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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고광필) 7강 - 칼빈의 성경해석 2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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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경 해석과 해석자의 자질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두 지평이 있다. 성경과 해석자이다. 성경 해석은 이 두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성경과 성경을 해석하는자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 두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관계를 Anthony C. Thiselton은 두 지평이라고 했다. Anthony C. Thiselton, The Two Horizons New Testament hermeneutics and Philosophical Description(Michigan:William B. Eermans Publishing Company, 1980), xix.
여기서 지평이라는 말은 은유로 해석자의 限界性(limits of thoght dictated by a given viewpoint or perspective)을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해석자의 관점의 범위를 의미한다. 두 지평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상관관계에 의해서 서로의 지평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했다. Anthony Thiselton, The Two Horizons, xix.
그러나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과 해석자의 관계는 상관관계라기보다는 성경과 성령에 의존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해석자는 늘 성경에 의존하며 항상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해석자의 관점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져야 한다.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지만 해석자의 관점은 항상 바꾸어져야 한다. 해석 자가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은 변하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항상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 시대에 주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1451년 그의 강요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모든 것에 비추지만 소경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이해하는 데 소경이며, 그래서 우리 내적인 선생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the Word of God cannot enter into our spirit unless the Spirit of God, who is the inner master, give us access to it by his illumination). Institution of 1451, Vol.II, Paris, 1937, 13.
중요한 것은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타락성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는 한 본질상 항상 명료하다( Still it remains a fixed principle, that the word of God is not obscure, except so far as the world darkens it by its own blindness). “The word of God dis always bright, but its light is choked by the darkeness of men.” (CC, Vol 16, ii(2권), 102-03).
이 말은 아주 성경을 해석하는데 또한 칼빈에 의하면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원리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럽고 분명한 성경의 의미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칼빈의 성경 해석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명료하고 분명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이해못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타락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 이해 못하는 것은 성경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른 경건한 생활을 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철학적인 이론이나 논리에 의해서 추론해 낸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의 언어가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은 아무나 갖는 것은 아니다. 눈이 나뿐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만이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관점이 늘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i)성경의 제자(a disciple of Scripture)가 되어야 한다. ICR, 1.6.1-2.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유명한 사람의 제자라고 할 때 제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선생이 누구인가를 속속들이 알며 선생의 삶의 스타일을 배우며 또 그렇게 가르치고 사는 사람을 말하여 제자라고 할 것이다. 제자의 특성은 선생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칼빈은 자기를 소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소개했다. 때문에 그는 일생 동안 말씀을 주석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며 일생을 살았다.
성경에는 두 가지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있는가?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칼빈도 하나님의 올바른 지식은 순종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ICR. I.VII.2.
“완벽하고 모든면에서 완전한 신앙 분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올바른 이해는 바로 이 순종에 의해 탄생된다.” 죤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제 I권(성문출판사, 1993), I. 6. 2.(But not only faith, perfect and in every way complete, but all right knowledge of God is born of obedience.)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조금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이해의 시작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하여 증거하기를 기뻐하셨던 바로 그것을 우리가 경외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윗책, I.6.2.(Hence, there also emerges the beginningg of true understanding when we reverently embrace what it pleases God there to witness of himself.)

ii)성령의 학교(School of Holy Spirit)에서 배워야 한다.

칼빈은 성경은 성령의 학교라 했다. ICR, III.21.3.
성경은 학교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성령님이 운영하시고 주관하시는 학교이다. 학생은 성경을 배우는 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성경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만하게 배우도록 도와 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선생이다. 학교를 누가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해한 그것에 의해서 신자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학교라는 말은 인문 교육이나 신학 교육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케 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성경 해석, 설교, 가르침은 생명력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는 성령의 학교에서 배운 사람에 의해서 선포되어지고 가르쳐지고 해석되어진다고 할수 있다.

iii)경건한 생활

칼빈은 경건을 다음과같이 정의했다. “경건의 요점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고 싶은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으므로 이 심판 앞에서 두렵고 떠는 마음과 태도에 있다. 오히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그의 의를 수용하고 죽을 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은,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 이러한 열심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몰염치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날조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되 하나님이 자기를 저들에게 계시하고 선포하신 대로 이해한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요약 』, 이형기박사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0), 29.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신앙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 참 경건한 생활이란 매사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렇게 살도록 변증하고 험증하는 자이다. 특별히 성경 해석과 연관하여 마지막 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깊게 영접해야 할 것이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계시하고,” “선포 한대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혹은 성경대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경건한 삶은 성경 해석이요 성경 해석은 곧 경건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7.성경 해석 방법

i) 역사적 문법적 성경 해석(historical grammat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Kemper Fullerton은 그의 저서 『예언과 권위』 (Prophecy and Authority)에서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은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와 언어를 중요시하며 역사적이라는 말은 성경 콘택스트의 역사적인 상황을 중요시하며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신학적인 전제와 석의적인 방법의 조화가 아니라 석의적인 방법이 신학적인 전제를 컨트롤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는 전제가 성경 해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역사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루터와 다르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적인 전제가 성경 해석의 방법을 인도하는 원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방법을 컨트롤하는 것은 신학적인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위적으로 루터처럼 모든 성경 구절에서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면 칼빈은 구약을 해석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루터처럼 문법적 역사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는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칼뱅은 여자의 “씨”(ערז)는 삼인칭 여성 단수이지만 집단 명사로써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 칼빈에 의하면 집단적 단수 명사가 한 사람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때문에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아니했다. 교회사를 보면 본문은 Protoevangelium(원시복음)이라고 해석한 것이 통례이다. 칼빈은 이들의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사탄과 인간 사이의 계속적인 갈등이 있을 것이며 결국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오심을 말한 것이지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CC, Vol. 1, 170.
여기서 우리가 칼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칼빈은 얼마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에 투철하였으며 동시에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라는 신학적인 전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루터처럼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지나친 예수님 중심의 성경 해석은 구약의 역사적인 의미를 약화시킨다. 구약의 메시지는 구약 시대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과 희망을 주며 동시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미리서 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CC, Vo1. 이사야 45:1 주석.

칼빈은 성경에 알레고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알레고리를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역사적인 콘택스트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 알레고리에서 문자적인 의미, 즉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칼빈은 고후 3: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의 주석에서 알레고리의 부당성을 말한다. 알레고리칼 성경을 해석한 자에게 의문은 성경의 문법적 문자적인 의미를 말하며 영은 알레고리칼 의미를 말했다. 따라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의문과 같으며 알레고리칼 의미는 영적인 의미로 봤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본문은 오리겐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본문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불순하게 하며(germanum scripturae sensum adulterandi) 알레고리칼 해석을 성경 해석의 규범으로 만들게 했다고 말한다. CC, Vol. 20,172-75.
그리고 주석 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입으로만 전하면 그것은 죽게 하는 것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마음에 받아들이므로 전하면 생명을 준다는 말이라고 주석했다. CC, Vol.20, 175.
따라서 칼빈은 고후 3:6은 성경의 해석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결과를 말하며 사도 바울이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키를 제시했다고 봤다(Paul here furnishes us with a key for expounding Scripture by allegories).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칼빈은 알레고리칼 해석과 알레고리를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James Barr는 알레고리칼 해석은 성경의 콘택스트를 무시하는 하는 해석이라고 했다.( “The literal context, the cultural background and the historical setting,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44(1989), 14.


칼빈은 비유(알레고리)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유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하는 비유의 목표(finis, scopus)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고 했다. 크리소스톰도 마태복음 20:1절 주석에서 우리는 비유에서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고 비유의 목표(skopon)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We should not waste labour to explain all the details in a parable but having learned the aim[or mark :Greek skopon] for which the parable was constructed, to get hold of that and not to bother oneself with anything further). 칼빈에 의하면 비유는 비교와 같은 것이다. 마태복음 13:34-35 말씀을 잘 보면 비유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I will open my mouth in parables, I will utter things hidden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비유로 진술한다는 말이다.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 주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했다. 비유란 이 말씀에서 보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to show) 것이다. 이것이 비유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천국은 “이다”(the kingdom of heaven is)가 아니라 이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will like(NIV;KJV;shall be compared to(RSV))이다. 천국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유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 비유(παραβολη)이다. 나는 선한 목자에서 “나”는 비유이다. 여기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목축 업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은 확대된 은유(extended metaphor or metaphorical saying, παροιμια)이다. 진실된 은유는 알레고리가 아니라 실제에 기초하고 있다. 비유는 첫째, 비유를 듣는 자를 도전하며 책임감을 갖게 한다. 둘째, 비유는 자기 자신을 그 비유에 의해서 들여다보도록 한 거울과 같다. 셋째, 비유는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이다. 넷째, 비유는 적대감이 있는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다섯째, 비유는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많은 메타포를 써서 거룩한 순례자가 천성을 향하여 순례 길을 감에 있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를 통해서 묘사한다. 꿈속의 이야기지만 깨닫는 자에게는 금과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하나의 꿈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우리 주님도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했다. 들을 귀가 없을 때 우리 주님의 말씀은 번연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비유의 중요성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인 깊은 진리를 보여준다는데 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메타포를 통하여 묘사하고 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I am the door of the sheep; 요10:7) 나는 선한 목자이다( I am the good shepherd; 요10:11)에서는 천국 비유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경우는 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잘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천국 비유는 “이와 같다”라는 말을 썼고 선한 목자의 경우는 “이다”인 것이다. 언어의 사용에 따라서 그 언어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언어의 사용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야 한다. 칼빈은 은유적인 표현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은유적 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이 아니다. 알레고리는 믿음의 규칙을 벗어나지 아니하는 방향에서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한다.
칼빈은 요한 복음 1:1-5에 대한 설교에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의 언어가 어떻게 문장에서 사용되는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르면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For it is important to know how Holy Scripture uses words. Surely we need not stop simply at words, but we cannot understand the teaching of God unless we know what procedure, style and language he uses.).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Leory Nixo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Michigan, 1950), 13.
여기서 성경 언어의 사용은 문맥과 문법적인 구조를 살피는 것이며 언어의 스타일이라는 말은 성경의 장르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성경의 장르와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현대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이러한 사항은 아주 중요하다. 칼빈이야말로 현대 성경 해석학의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다.

ii)모형론적 성경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Gerhard von Rad는 “구약의 모형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Old Testament)에서 모형론(typology)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 아니라 상관관계(correspondence)에 있으며 이 상관관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 했다. 여기서 일시적이라는 말은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 일시적이라는 말이다. 환언하면, 원시적인 사건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사건의 모형이라는 말이다(the primal event is a type of the final event).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John Knox Press, 1979), 20.
알레고리(한국인 성경은 비유로 나와 있음)는 예표된 것과 이루어질 사건 사이에 인위적인 관계를 설정하지만 모형론에 있어서는 역사적인 관계이다. Rad에 의하면 칼빈은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유지했다고 했다. Rad는 모형론적인 해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한 한 하나님이 구약의 언약 백성들의 역사 속에 그의 발자취를 남겼다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신구약은 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은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와 관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이라는 두 개의 찬양대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두개(신구약)의 찬양대는 양편에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Rad에 의하면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지식은 구약 없이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했다. Essay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37-38.
동시에 신약 없이는 구약의 이해는 의미가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형론은 진정한 에언이다. 모형론은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라는 역학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주석하면서 칼빈은 모든 제사 제도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The whole cultus of the law, taken literally and not as shadows and figure[umbras et figuras] corresponding to the truth, will be utterly ridiculous). ICR, II.VII.1.

칼빈은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렘17:22)를 해석하면서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 명해졌으며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에서 말함과 같이 안식일이나 절기나 월삭은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types) 혹은 그림자(umbras/shadow)이며 그리스도는 모형과 그림자의 본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림자라는 말과 본체라는 말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림자란 본체(substance)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본체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며 그림자는 본체가 그대로 드러나면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 제도나 예식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하여 진 것이다.
칼빈은 로마서 5: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επι τω ομοιωματι της παραβασεως Αδαμ ος εστιν τυπος του μελλοντος)는 주석에서 알레고리칼 해석을 반대하면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했다. 어떤 점에서 모형인가? 유사성의 모형이 아니라 대조적인 모형이라고 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온 세상에 들어오고, 사망이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회복되고, 그리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칼빈성경주석』, 존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역편(성서교제간행사, 1990), 로마서. 빌립보서, 173.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한 사람으로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의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이 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다르지만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담이 죄의 모형이라거나 그리스도가 의의 모형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칼빈은 복음은 율법이 모형 아래 감추어진 것을 손을 가지고 지적해 준다고 했다( the gospel points out with finger what the law foreshadowed under the types). ICR, 2.9.3. Bates는 칼빈의 모형론적 해석은 칼빈 신학에 중요하다고 했다( Ed. Richard Gamble, Camlvin and Hermeneutics,. 146-61). 칼빈은 강요에서 강요의 목표는 성경을 올바로 일고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는 안내서라고 했다. 1560 불어 판에는 강요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을 여는 키라고 했다( a key to open a way for all children of God into a good and right understanding of Holy Scripture). 강요는 성경 주석에서 다루는 토픽을 좀더 자세하게 다루지만 주석은 그렇지 않는다. 이점에서 강요는 성경 주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칼빈에 있어서 강요 와 주석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데 있다. 칼빈은 창세기 1:16을 주석 하면서 “모세는 철학자로서 혹은 과학자로서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썼다고”했다.
칼빈의 모형론적인 해석을 안디옥학파의 Theoira라고 비교한다면 칼빈의 theoira의 의미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텍스트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란 성령의 내적인 조명에 의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며 동시에 영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저적인 의미는 여러 의미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의 의미이다.

VIII. 성경 해석 원리의 적용

칼빈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했다. 따라서 그의 성경 해석 논리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에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과 가르침이 필수적이다.이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 해석이란 복잡한 이론이나 세상의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가지고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진 후에 중요한 것은 성경 언어 사용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칼빈 자신이 팔복 설교에서 “우는(πενθεω/애통) 자는 복이 있나니 마지막에 저희는 기뻐하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의 설교에서 애통하는 자를 우는 자로 번역했다. 칼빈은 “우는자는 복있다”는 하나님 말씀의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해했다.

그런데 사실상 울려는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눈물이 야수의 표호와 같거나
또는 황소가 울부짖을 때 두들겨 맞는 암소가 비명을
내지를 때, 등과 같은 여려 동류의 눈물이라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참다운 눈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불신자의 눈물이 어떤 것이나가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들은 실컷 울고는 ‘오호라!’하고 끝없이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그들은 표호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눈물 흘리는 법을 배웁시다.우리의 눈물이
상달되어야 할 곳이 바로 거기이기 대문입니다.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윗이 말 한 말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당신의 병에다 나의 눈물을
담으셧나이다.!’우리가 고귀한 향수 또는 댓가를 치뤄
얻은 한방울과 같은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간직해 두신다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눈물은 땅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우리가 손으로 닥아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울 때
그것은 분명히 한방울도 상실되지 안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은 전부다 조심스럽게 간직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같은 위로를
받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박건택 편저, <칼빈과 설교>( 도서출판 나비, 1988), 204-5.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단순한 설교인가?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드러내지 않은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란 성령의 내적조명을 통해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처준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해석과 연결시켜 말한다면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내적 조명 혹은 가르침을 통해서 해석자에게 가르처 준 자연스럽고도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칼빈의 강해설교에서 살펴봤듯이 성경의 의미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따라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란 성경 말씀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해석인 것이다. 해석이 없는 설교, 강의는 감동력이 없는 것이다.
요약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래서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구속의 메시지이다. 구약과 신약은 구속사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일성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보면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IX. 맺는말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그가 세상 학문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이론이 아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경해석의 논리는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요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대에 맞게 올바로 이해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것을 읽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을 풍유적으로, 안디옥학파는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 풍유적인 해석은 성경언어 이면에 숨은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모형론적인 해석은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안디옥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칼빈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배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버리지 않고 배웠다. 그 일례가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는 모든 학문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가려서 좋은 것은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그의 성경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를 성령님의 감동을 통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이것은 연약하고 제한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며 은혜이다.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의미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따라서 성경 해석 원리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가르처준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며 이 의미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며 동시에 영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여러 의미중의 하나가 아니고 유일한 하나의 의미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지만 그 의미를 현 시점에 적용할 때 문자적인 의미(meaning)의 유 의미성(significance)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염두해두는 것은 중요하다. 칼빈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환언하면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진정한 성경의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다. 이것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성경의 문자적인 이해는 성경 언어의 이면에 있는 신비스러운 의미를 찾는데 있지않고 성경을 전체로서 이해하려는 방법이다. Hans W. Frei, The Eclips of Biblical Narrative: A Study in En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y Hermeneutics(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4), pp. 18-19(“The literal orgrammatical meaning, primary for Luther and Calvin, was for both men usually identical with the text's subject matter, i.e., its historical reference, its doctrinal content, and its meaningfulness as life description and prescription.”).
다시 말하면,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며,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구속의 메시지이며, 성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는 불과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성경의 진정한 이해는 성령님의 조명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성경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 아니라 해석자의 신앙과 학문을 쓰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깊은 이해가 있는 것이다. 칼빈은 구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모형론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모형론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언약의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해 있다.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는 오늘처럼 혼탁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해석학이 인간 이해에 중점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시대에 칼빈의 해석 논리는 성경을 계시한대로 보게 하는 성경에서 도출한 성경 해석 방법이요 나아가서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며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장로교회의 대원칙을 새롭게 조명하며,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성경의 제자가 되고 성령의 학교에서 배워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 삶 속에서 보여주어야 할 목회자의 갱신이요 성경 해석 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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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칼빈의 성경관

칼빈은 성경을 연구하고 주석하는데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요한2서, 요한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구약 성경을 주석했다. 그가 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은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계시록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상징적인 것들이 많다. 칼빈의 솔직성과 말씀에 대한 경외심은 오늘을 사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깊이 배워야 할 점이다. 칼빈의 신학의 기능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성경관부터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성경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자유자주와 정통주의를 판가름한다. 종교개혁의 모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쉽게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고 대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것이 성경 위에서 성경에 의해서 성경으로 해석, 평가, 이해되어 지고 성경의 핵심인 예수님만을 믿음으로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에 있어서 개혁이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성경의 핵심으로 삼음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 구원이 온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살도록 돕는데 있다.
성경에 보면 성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쓰여져 있으며 무엇에 유익한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딤후 3:15-17말씀이다. 칼빈의 주석을 한 번 살펴보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이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And that from a child thou has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thee wise(σοφισαι) unto salvation through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칼빈은 딤후 3:15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구원에 충족한 지혜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대한 아주 귀한 찬사로 다음 구절은 그의 의미를 더욱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성경의 핵심이요, 알멩이가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에 곧 이어지는 내용 역시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다.” “it is very high commen dation of the Holy Scriptures, that we must not seek anywhereelse the wisdom which is sufficient for salvation; as the next verse also express more fully. But he states, at the same time, what we ought to seek in the Scripture; for the false prophets also make use if it as a pretext; and therefore, in order that it may be useful to us for salvation,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right use of it, What if any one give his whole attention to curious question? What if he adhere to the mere letter of the law, and do not seek Christ? What if he pervert the natural meaning by inventions that are foreign to it? For this reason he directs us to the faith of Christ as the design, and therefore as the sum, of the Scriptures for on faith depends also what immediately follow.”(CM., Vol. 21, 248-249).
이 주석에서 보면 칼빈의 주석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성경의 언어사용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 밖에서 구원에 충족한 지혜를 찾지 않아야만 한다는 말이나 성경의 핵심이며 알맹이인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이끈다는 말은 성경에 쓰여진 그대로의 말이다. 성경은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말은 지혜(σοφια)라는 말이다. 성경의 구원을 얻는 지식을 가르친다는 말과 구원을 얻는 지혜를 가르친다는 말은 아주 의미가 다른 두 개의 문법이다. 지식은 인간의 탐구를 통해서 나오지만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경외심을 갖고 읽어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칼빈은 요한복음 5장 39절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CM., vol.17, 218.

성경은 어떻게 쓰여졌는가? 딤후 3장 16절을 보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All scriptures is given by inspi ration of God(θεο πνευστος), and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uction in righteousness). 칼빈은 주석하기를 성경을 먼저 추천하는 것은 첫째 성경의 권위 때문이요, 둘째는 거기에서 오는 유익 때문이라고 말했다. CM., vol. 21, 248-249.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In order to uphold the authority of the Scripture, he declares that is divinly inspired; for if it be so, it is beyond all controversy that men ought to receive it with reverance)이다. 바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성령님의 도구”(organs of the Holy Spirit)에 의해서 성경을 기록했다고 했다. 벧후 1:20-21의 주석에서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였다”(holy men of God spa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CM., vol. 22, 390.
여기서 “도구”라는 말이나 “구술”이라는 말 그리고 “하나님께 받아”라는 언어의 사용을 볼 때 성경은 비록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다고 했다. 최고의 증명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때문이다(God in person speaks in Scripture). Calvin: In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1,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7, 1.7.4. cited as CICR.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하늘로 부터 온다”(the teaching of Scripture is from heaven.) CICR., 1.7.4.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자증(Scripture indeed is self-authenticated, αυτο πιστον)하신다. CICR., 1.7.5.
그렇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I am who I am)이다(출3:13). 그래서 누구의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다. 여기서 “자증”이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성경의 기원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성령님의 증거이다(the testimony of the Spirit). CICR., 1.7.4.
논리적으로 볼때 이것만큼 더 확실한 증명은 없다. 이와같은 칼빈의 논리는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이 부패되어서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the inner 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과 “내적인 선생님”(interior magister)으로서 성령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주관적으로 확실하게 깨달음에 이른다. CICR., 3.2.33, 3.2.34.
이것이 칼빈의 성경의 신적기원과 진실성에 대한 인식론이다.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은 두가지 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인간의 마음의 문을 열며(illumination), 확신을 준다. 다른 하나는 마음에 봉인(sealing)하는 역할을 한다. CICR., 3.2.34, 1.7.4.
여기서 마음의 내적인 조명과 봉인한다는 말은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할이 믿는 자를 중생케하고 칭의, 성화, 견인에 이르게 한다면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이란 성령님께서 신자를 말씀을 통해서 회개케하고 말씀을 순종하도록 도와서 진정한 신자의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성경 말씀을 깊이를 깨닫게 해준다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확실성과 진실성을 인감도장을 찍듯이 공증한다는 말이다. 칼빈은 말씀의 인식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확신(persuasio), 지식(notitia), 감각(sensus)이라는 말을 쓴다. CICR., 1.7.5.
칼빈은 말했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 이성도 요구하지 않는 그러한 확신이다. 그러한 지식은 지고의 이성에 의해서 저지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마음을 그 어떤 이성 안에서 보다 더욱 큰 안전과 일관성을 가지고 안주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하늘로부터 계시로만 만들 수 있는 그러한 감각이다” CICR., 1.7.5.
성령님은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의 절대무오성을 확신시키시며 알게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밝히시며 우리의 지식에 걸맞도록 감정을 가지고 우리 가슴을 고무시키신다. 동시에 하나님 지식은 우리가 그를 두려워하며 사랑하도록 이끌어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와 종으로서 그 분을 섬기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처럼 주와 아버지로서 그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Calvin's Commenataries, vol.22, Michigan: Baker Book House, 1989, 174. cited as CM.
칼빈의 인식론은 이 세상 초등학문들의 인식론과는 다르다. 경험주의자들은 경험이 인식의 시작이요 이성주의자들은 이성이 인식의 시작이지만 칼빈은 성령님께서 첫째, 내적조명을 통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 시키시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게 하시며 세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케 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경험을 하게 하신다.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과 성령님을 내적인 선생이라는 은유(metaphor)를 통해서 네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조명이라는 말은 무대에서 연극 배우들을 그들의 상황에 맞도록 정서(mood)를 조성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조명은 순간적이고 기계적이다. 그러나 조명이라는 말을 여러가지 의미로 쓸 수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뜻은 비추어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은 죄로 부패되어 어두워진 우리 마음을 조명하는 뜻이다. 둘째, 성령님의 조명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 일생을 통해서 조명한다는 것은 결국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삶, 즉 예수님을 닮은 삶을 통해서 성경의 깊이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를 시사해 준다. 셋째, 성령님이 우리의 내적인 선생님이시라면 이 말 속에는 가르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가르쳐 준다는 의미도 있다. 네째로 칼빈이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과 선생님이라는 말을 기독교 강요 제3권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는 길에”대해서 설명하는 데서 이 언어들을 사용한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하고 진실된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살때 확실하게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성령님의 역사를 쿨스터(Fred H. Klooster)는 성령님이 마음을 고무시킴으로써 일어나는 마음의 이해(heart-understanding)라고 했다. Fred H. Klooster, The Role of Holy Spirit in the Hermeneutic Process: The Relationship of the Spirit's Illuminat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 468. 이 에세이는 (Hermeneutics, Inerrancy, & the Bible Papers from ICBI summit II, ed. Earl D. Radmacher and Robert D. Preas, Academic Books, 1984.)로부터 인용했음.

칼빈은 딤후 3장 16절의 후반부의 주석에서 성경을 통해서 얻는 유익을 설명하고 있다. 환언하면 신자가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완전한 룰(a perfect rule of a good and happy life)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주석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가치있는 교훈은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faith in Christ)이다. 그리고 “책망”(reproof)과 “올바르게 함”(correction)이다. 그래서 성경을 공부하면 교훈을 얻고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렇지 못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유익의 문법을 잘 모르는 것이다.

Ⅶ.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리

학자들에 의하면 해석학이라는 말은 두가지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첫째는 해석학은 성경을 해석하는 학문과 예술이요, 둘째는 해석하는 방법, 룰, 원리를 가르쳐 주는 학문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입장은 이 두 종류의 정의 중의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는 언어논리를 이론화하지도 않았으며 해석하라고 하기보다는 언어의 사용을 “보라”(to see, and to look at)고 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언어의 사용을 보는 것이 바로 그 언어의 의미요 해석이기 때문이다.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의미나 구조를 파악하려 했던 현상학자들이나 구조주의 해석학과도 다르다.

1) 성경해석사의 요약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해석사를 보면 성경의 참 뜻을 파악하는 문제는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신약성서를 처음으로 언급한 이레니우스(Irenaeus)는 성경에 계시된 사도들의 믿음의 요약을 정경의 진리(cannon of truth)이라 했으며 터툴리안(Tertullian)은 믿음의 룰(the rule of faith)이라고 했다. 그들은 믿음의 진라나 믿음의 규범을 성경해석의 원리로 삼았으며 이단과 정통신앙을 구별짓는 시금석으로도 사용되어 졌음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초대 교부 중에서 최초의 조직신학자라 불리운 오리게네스(Origen)에 의하면 인간의 구조가 몸(body), 영혼(soul), 영(spirit)으로 된 것처럼 성경에도 세가지 의미가 있다. 문자적(literal), 도덕적(moral), 영적(spiritual)인 의미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영적인(신비적인) 의미로써 성경 언어의 이면에 숨어있는 신비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 좋은 해석방법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풍유적(allegorical interpretation)으로 해석했다. 이 해석 방법은 성경의 역사성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처럼 어떤 특수한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신비적 경향으로 갈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리게네스(Origen)는 신 플라톤철학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재해석한 최초의 신학자라이다. 이에 반대해서 안디옥 학파가 생겼으며 이 학파의 대표자들인 몹스터(Theodore Mopsuestia)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언어적인 면, 역사적인 상황, 각 성경 본문의 문자적인 점을 고려하는 것을 해석학에 있어서 중요시 했다. 성 어거스틴 풍유적인(allegorical)적인 성경해석방법을 택했지만 성경의 올바른 해석의 기준은 사랑의 룰(the rule of charity), 즉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게 함에 있다. 초대 교부들의 한가지 중요한 특색은 성경해석과 기독교인의 삶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해석상의 관점은 달라도 신학의 목적과 해석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James L. Kugel and Rowan A. Greer, Early Biblical Interpretation, 191-195.

중세에는 초대교회의 풍유적(allegorical method) 해석 방법을 네가지 계층의 의미로 세분했다. Wayne G. McCown은 16세기 시를 이용해서 잘 말해 준다. “The letter shows us what God and our fathers did. The allegory shows us where our faith is hid. The moral meaning gives us rules of daily life. The anagoy shows us where we end our strife”(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과 우리의 선조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보여주며 알레고리적 의미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숨어 있는가를 보여주며 도덕적인 의미는 우리 일상생활의 규범을 보여주며 신비적 의미는 우리의 투쟁이 어디에서 끝이나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경의 사중적 의미로서, 첫째는 단순한 문자적인 것을 말하며 둘째는 영적인 의미는 텍스트의 이면에 숨어 있다는 말이요 셋째는 텍스트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규범을 말하며 네째는 신비적인 의미는 성경의 텍스트에 의해서 암시된다는 말이다. A Contemporary Western theology, vol. 2, ed. Charles W. Carter, Francis Asbury Press, 1983, 744.
중세 해석적인 방법은 성경의 저자의 의도 보다는 해석자의 의도를 더 중요시 하는 데 있으며 교회와 전통이 해석학의 키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교황이 성경해석의 옳고 그름의 마지막 재판관이 된다.
종교개혁 해석사는 두 번째 항목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근대와 현대를 다루고자 한다. 문예 부흥과 계몽주의 영향으로 성경도 다른 문학이나 역사와 똑같은 방법으로 연구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고 그래서 역사비평연구, 문서비평, 편집사비평, 양식사비평 등 많은 성경연구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런 비평연구가 무가치 하다는 것이 아니라 얻은 것 보다는 손실이 더 많았고 현대신학적 상황을 위기신학으로 특성지우게 했다. 그래서 개혁주의 구약학자는 아니지만 예일대학 구약학 교수인 B. Childs는 그의 중요한 저서인 Introduction to the Old Testment as Scripture라는 책에서 정경 비판연구(canonical critism)를 주장하면서 많은 성경비판 연구들이 성경의 권위를 세상의 한 책으로 떨어뜨렸다고 하면서 그의 책의 이름대로 구약을 하나의 문학작품이 아니라 성경으로 읽자고 했다. 환언하면 정경비판(canonical critism)은 또 다른 하나의 비평이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기록된 성경으로 읽자는 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견해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해석학에는 크게 두 조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덱거(M. Heidegger)의 실존적 현상학의 해석이론을 받아 드린 철학적 해석학이요 그중에 유명한 사람이 불트만(R. Bultmann)과 새로운 해석학(the new hermeneutics)을 주창한 에벨링(Gerhard Ebeling), 푸크(Ernst Fuchs), 가다마(Hans Georg Gadamar)들이다. 다른 하나의 주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영향을 받은 옥스포드대학을 중심으로 한 언어철학적인 방법이다. 미국에서는 시카고대학을 중심한 실존적 현상학이요 주인물은 트레시(David Tracy)와 폴 리쿠어이며 예일 대학을 중심한 문화적 언어적 시도(cultural linguistic approach)로서 최근에 중요한 책, The Nature of Doctrine을 낸 린드벡(George Lindbeck)이다. 방법론에서는 이 두 시도가 다르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언어를 심도있게 다루자는 데는 동의한 점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철학적인 이론을 도입해서 성경을 더 분명히 해석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 문제이다. 이와같은 오류는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하나님이 저자라는 것을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것이며 성경의 언어의 문법을 혼동한 것이다. 그래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Bultmann)의 영향을 받은 자들로서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2) 칼빈의 해석원리

종교개혁 해석학은 일반적으로 로마 카톨릭 해석학의 원리(성경 자체보다는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한 것)에 반대해서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가 해석학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의미에서는 성경이 보여주는 해석방법을 찾는데 있다. 루이스 벌코프에 의하면 개혁자들의 해석학의 특성은 두 원리에서 왔다고 한다. 첫째는 “성경의 해석자는 성경이다”(Scriptura Scriprurae interpres). 둘째는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것과 설명하는 것은 신앙과 일치하여야 한다”(Omnis intellectus as expoitio Scripturae sit analogia fidei). 루이스 벌코프, 성경해석학, 윤종호, 송종섭 옮김, 개혁주의 신행협회, 1979, 26.
루터와 칼빈은 근본해석 원리는 같지만 칼빈이 위의 원리에 더 충실하고 탁월했다고 했다. Ibid., 27.

칼빈은 교부들의 풍유적 성경해석 방법(allegorical exegesis)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칼빈이 이 해석방법을 반대한 것은 성경에는 영적인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텍스트에 없는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한 것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을 해석하는 근본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을 해석하고 읽을 때, 교회를 세우는데 도움을 줄만한 통찰력을 끓임없이 찾아내고 또 이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CICR., 1.14.4.
그래서 칼빈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외에는 불명료한 문제들에 관하여는 말하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Ibid., 1.14.4.
성경은 우리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인도하고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심을 알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Ibid., 1.6.1.
칼빈은 제네바 성경(Geneva Bible)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우둔한 호기심과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바울은 성경이 매우 유용하다고 말하였다. 왜 그런가? 우리를 올바른 가르침으로 훈계하며, 위로하며, 권고하며,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하는 의의 일군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가’라고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며 그를 두려워하는 것을 배운다고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다. cited in Kraus, “Calvin's Exegetical Principles,” 11.


칼빈이 성경이 말한대로 말하고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나 Genva Bible 서문에서 사도 바울의(딤후3:16-17) 말을 그대로 말한 것을 언어논리적으로 본다면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논리이며 정말로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따라야 할 명령의 힘을 갖고 있는 문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인위적인 이론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핵심이 무엇이며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쓰여졌는가를 통해서 성경을 주석하는 방법을 성경에서 찾았다는 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임으로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갈라디아서 4장 주석에 의하면 이 문자적인 의미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natural and obvious meaning)라고 했다. CM., vol. 21, 135-136.
그러나 이 말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 문제이다.
맥킴(Donal K. Mckim)은 칼빈의 성경관이란 글에서 칼빈은 두가지 주석하는 원리가 있는데 첫째는 “분명한 간결성”이요 둘째 “용이성”(facilitas)라고 하면서 이 말의 의미는 “쉽게 이해되는 것”과 “단순한 것”(simplicity)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칼빈이 설명하고자 한 것은 성경의 “단순하고(plain), 자연스럽고(natural), 진정한(genuine)의미, 혹은 문자적(literal) 의미”였다고 한다. 이 말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을 뿐이지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로마서에서는 어떻게 주석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문법)을 말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 문장을 보면 로마서에서는 “The method which you liked best, I myself approved most of all others. We both thought that the chief excellency of an expounder consists in lucked brevity”라고 말했다. CM., vol. 19, Simon Grynaeus에게 보낸 로마서 현사, XXiii.
갈라디아서에서는 “진정한 성경의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다”(the true meaning of Scripture is the natural and obivous meaning)라고 말했다. CM., vol. 21, 136.
Kraus는 이 구절의 의미는 “참된 의미를 본래 그대로의 거짓이 없는, 간단한 혹은 문법적인 의미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인용구는 Donald K. Mckim이 편집한 Reading in Calvin's theology(Michigan: Baker Book House, 1984) 67페이지 74번 주석에서 왔음.
T.H..L. Parker는 갈라디아서 4장 22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정한 성경의 의미”(verus Scripturae sensus)라는 것이 있다. 성경에는 하나의 객관적이고 변치 않는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곧 자연적인 의미(genuinus sensus), 진실한 의미(germanus sensus), 단순한 의미(simplex sensus), 그리고 문자적인 의미(literalis sensus)라고 한다. 형용사가 의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 자연적인(genuinus)와 진실한(germaus)는 진정한(verus)의 객관성과 불변성을 반영해 준다. 단순함(simplex)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함(simple)'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simplex를 소위 말하는 복잡성(duplex)과 구별하여 단일성(onefold)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성경에는 단 한가지 의미(sense)만이 담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Literalis는 우리가 성경 내용 속에 단단히 고정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의미는 단어들 속에 내포되어 있다. 칼빈 역시 그의 시편 주석에서 “참되고 자연스러운 의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해석은 칼빈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를 혼동케 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성경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할 수 있지만 칼빈이 말하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단순하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영원불변한 진리화 하거나 객관화시킨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성령의 내적조명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하고자하는 의미는 분명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라는데 강조점을 둔 것으로 사료된다. 성경의 단순성은 파커가 말하대로 복잡성과 관계가 있지만 갈라디아서 “단순성”의 의미는 하나의 의미라기보다는 성경의미는 누가 봐도 분명하다는 명료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4장 22절 주석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Scripture, they say, is fertil, and thus produces a variety of meanings.” CM., vol. 21, 13-136.
여기서 칼빈은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처럼 성경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다고 했다. 따라서, 성경의 자연스러운 의미란 1) 인위적인 의미가 아니며 본래의 의도된 의미이며 2) 그 의미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며 3) 성경 본문에 없는 다른 세상의 철학과 섞지 않은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란 단순히 문장의 문법적인 구조만을 의미하는 것이나 문장의 의미는 고정된 의미라기보다는 성경 언어가 쓰인 역사적인 배경, 예수님과의 관계성,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는 즉 성경 언어의 사용을 말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문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루이스 벌코프도 “성경은 오직 단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성경해석학, 61.
그러나 그는 이 말의 의미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칼빈이 이러한 말을 했는지 의심스럽고 만약에 칼빈이 그러한 말을 했다면 그 의미란 하나님께서 본래 성경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마8:29). 이 문장의 문자적인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의 깊은 뜻의 이해는 신앙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문자적인 의미를 성경 단어 하나 하나에 한 의미만 있다고 고정시킨다면 이것은 칼빈의 문자적인 의미를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이론화시킨 것이다. 다시말하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그 적용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문장에서 그 문자적인 의미는 둘이 될 수 없지만 해방신학자는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의미와 다르다. 해방신학자에게 그리스도의 의미는 억압받는 정치상황에서 억압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미이미 칼빈에게서는 죄로부터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적용을 하나의 의미에 한정시킨다면 칼빈이 말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왜곡시킨 결과를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의 주장대로 “성경해석자가 첫째로 할 일은, 해석자가 생각하는 것을 성경저자로 하여금 말하지 않게 하는 대신, 성경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루이스 벌코프, 성경해석학, 27에서 인용.
그리고 성경 스스로(let Scripture itself show it true meaning) 우리에게 그 의미를 보여주도록 하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단순하다”는 말의 의미는 진정한 성경의 의미는 복잡하거나 다른 무엇으로 섞이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복잡하고 현학적인 이론적인 의미가 아니며 성경이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의미는 예수님을 올바로믿게 하며 그 말씀을 올바로 순종하고 살도록 하는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둘째, 칼빈은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좋은 해석 방법은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간결성”(lucid brevity)이라고 말했다. 하트니인(Joshep Haroutunian)은 똑같은 말을 “clarity combined with brevity”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에 의하면 칼빈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간결한 명료성에 강조를 둔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서문에서 멜랑톤(Philipp Melancthon), 부커(Bucer)들의 방대한 학식과 문체에 대해서 찬양을 하면서도 이들의 주석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칼빈은 학적인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석의 목적은 신자의 신앙을 굳게 세우고 그렇게 살도록 돕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이 명료성을 강조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라는 데 기인한다. 그래서 해석의 목적은 성경을 분명하게 알기쉽게 주석하는 데 있다. 칼빈은 올바른 성경해석은 성경을 복잡한 이론이나 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며 신자들의 신앙을 올바르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돕는 데(edification)에 있다. 이러한 해석이 모든 성경 해석의 올바른 룰(the rule by which we must try all interpretation of Scripture)이라고 했다. CM., vol. 21, 222-223.

세째,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칠려면 올바른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여 형성된 진정한 신자의 삶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CM., vol. 2, 440.
칼빈에 의하면 올바른 성경해석은 경건한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경건(pietas)이란 바리새인들처럼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이 아니다. 참 경건이란 1)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데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며, 2)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며 그래서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충성스럽게 사는 데서 경견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며, 3)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기 위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죽는 것보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순수한 열정이라고 했다. CICR., I.ii.i.
이와같이 경건한 삶이 없이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네째,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과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칼빈의 성경관에서 이미 말했다.
다섯째, 올바른 성경해석의 목적은 예수님을 믿게 하며 성경 말씀대로 살게 하는 데 있다. 그래서 칼빈은 성경해석의 목적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Ⅷ. 신학의 기능(theology as grammar)으로서 문법

초대교회에서는 신학의 기능은 주로 호교적이고 동방교회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와 신약과 구약의 관계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으며 구원의 의미와 신자의 생활을 강조했으며 서방교회에서는 믿음이 무엇인가? 은혜가 무엇인가? 누가 구원 받을 것이가? 하는 신학적 인간학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며 중세에서는 기독교의 합리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성경의 message를 안믿는 사람들에게 합리적으로 어필하는데 두었다. 그래서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는 종교의 핵심은 이성이나 역사도 아니요 절대자를 의지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라고 했으며 바르트(Karl Barth)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느냐를 체크(check)하는 것이 신학의 기능이요 불트만(Rudlof Bultmann)이나 틸리히(Paul Tillich)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독교의 메세지(message)를 실존적으로 해석해서 현대 지성인들에게 어필하는데 중점을 두고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에서는 기독교의 메세지(message)가 고난 받고, 억압 받는 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중점을 두었다.
여성신학은 지금까지의 신학이 남성위주의 신학이어서 여성의 진정한 경험을 무시했기 때문에 여성의 경험이 성경해석학의 키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희망의 신학을 주창한 몰트만, 판넨버그, 메즈 등은 예수님의 부활이 희망의 시작이요 성경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기 보다는 하나의 희망이다. 과정신학에서는 하나님은 두가지 속성이 있는데 하나는 변하는 속성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환경과 반응에 좌우되는 하나의 우주의 과정에 영향을 받는다. 이들의 신학이 그들 나름대로 시대가 직면한 인간들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답하고자 노력했다.이들의 학문을 향한 열정과 노력은 놓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신학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성경의 유오를 주장하며 인간의 경험이나 어떤 철학의 체계 속에서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이다.
특히 바르트(Karl Barth)는 19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에 재동을 걸고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 그의 정신은 높이 평가 할 수 있으나 그의 신학은 실존주의 색채가 농후하며 성경의 유오를 주장한 그의 신학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유오성을 주장하면서 어떻게 그 유오한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출발한 Barth의 신학이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Barth은 성경의 유오를 주장하면서 성경 밖의 개념을 사용해서 성경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사화”(saga/history like)라는 인위적인 개념을 도입해서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려 했다. 설화(saga)라는 개념은 성경의 개념이 아니다.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오히려 부활의 개념을 인간이 만들어 낸 신화로 만듦으로서 성경에서 말하는 역사개념을 더 혼동하게 만들어 버렸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른 성경의 말씀은 이 예수님을 지시하는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과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다. Barth는 인위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성경을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문법을 잘 모르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무오를 주장한 칼빈의 신학과 성경유오를 주장한 바르트의 신학은 두 개의 다른 문법을 가진 양립할 수 없는 신학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853.

칼빈은 성경을 안경(spectacle)이라고 보았다. 이 말은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진다. 이 말은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고, 평가하고, 성경이 말한 대로 살며, 이 시대의 문제를 성경을 통해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주제(the sub ject matter)에서 <기독교 강요>를 조직신학책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안내서(guidance) 혹은 길잡이(direction)라는 말을 쓰고 있다. 성경에서 평신도가 무엇을 찾아야만 하는가를 돕고 인도해 주는 안내서라고 했다. 물론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성경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sum)을 체계적으로 요약한 것임에는 사실이나 조직(system)이라는 말과 어떤 주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과는 문법이 다른 말인 것이다. 전자는 사변적이라는 의미가 강하고 후자는 알기 쉽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강요>를 아퀴나스(Thomas Aquinas)처럼 <신학대전>(Summa Theolgiae)라 하지 않고 그의 처음 라틴어 타이틀에서 경건의 대전(summa peitastis)라고 했다. CICR., introduction, 1i.
환언하면 그의 저서의 목적은 “경건의 모든 핵심과 구원의 교리에서 필수 불가결한 모든 것”을 알기 쉽게 그리고 심도있게 파헤친 믿음의 문법(길잡이)이라고 하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나 주석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for the building of the Church),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서”(Scripture for the upbuilding) 주석하고 왜곡된 당시의 교리를 성경의 입장에서 분명히(clarification) 잘못을 수정하여 올바른 교리를 보존하고 가르치는 데 있다. 칼빈에 있어서 교리(doctrina)는 하나의 법칙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는 신령한 가르침이다. 이 언어들이 주는 뉴앙스를 볼 때 신학자의 사명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고 생각되어 진다.
그리고 실제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신학자의 사명을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나 사변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진실되고, 분명하고, 유익된 것을 올바르게 가르쳐 믿는 자들의 양심을 올바르게 깨우치는 것이라고 했다(”The theologian's task is not to divert the ears with chatter, but to strengthen consciences by teaching things true, sure and profitable”). CICR., 1.14.4.
그는 딤전 3장 15절 주석에서 진실된 신학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도록 믿는 자들의 양심을 깨우치는 자라고 했다. 문제는 이렇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학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CM., vol. 2, 440.
결국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아서 신자로서 살도록 돕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의 신학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해서 올바른 신자로 살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으며, 둘째는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서 잘못된 교리를 수정하고 변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 많은 신학도들이 이론적이며 사변적인 신학을 아는데서 끝나는 경향이 많은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칼빈의 저서를 깊이 이해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칼빈이 그의 저서를 쓴 상황을 보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칼빈을 읽어야 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분명한”, “옳은”, “진실된”, “단순한”, “경외”, “교회의 덕” 등의 말을 많이 쓰는데 이 말의 뉴앙스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철학의 모토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칼빈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경외하는 심정으로 성경의 말씀을 대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칼빈은 성경 언어의 사용을 깊이 되새긴 신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은 복잡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왜 그리 신학이 복잡하는가? 신학은 복잡한 것인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왜 철학이 그렇게 복잡한가? 철학은 단순해야 한다. 철학은 지혜없이 만들어낸 우리 사고 안에 있는 풀기 어렵게 꼬인 노끈을 푸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노끈이 꼬인 것처럼 복잡해서 무엇인가 조작이 필요하다. 철학적인 해결은 간단하지만 푸는데 도달 하는 방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철학의 복잡성은 철학이 추구하는 주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끈처럼 꼬여진 이해에 있다. 56) Wittgenstein, Philosophical Remark, 52.
이 말을 필자의 스승인 예일대학 신학교수인 호머(Paul L. Holmer)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신학적인 면에서 풀어 썼다. “왜 신학은 그렇게 복잡한가? 신학은 단순해야 한다. 신학은 우리가 지혜없이 복잡하게 만든 우리의 사고 안에 꼬인 노끈을 푸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끈을 푸는 것은 노끈이 꼬인 것처럼 복잡하다. 신학이 복잡한 것은 신학이 추구하는 주제 자체에 있지 않고 우리의 뒤틀려진 이해와 진실되지 못한 인간성에 있다. Paul L. Holmer, Wittgenstein and Theology, 27(New Essays on Religious Language, ed. Dallas M. Hig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9.).

그렇다. 칼빈처럼 성경을 우리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으로 읽고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 신학의 복잡성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인가를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 뿐만 아니라 칼빈도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경견한 생활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우리의 사고가 어디에서 꼬이고 어떻게 하면 그 꼬인 사고를 고칠 수 있는가를 새로운 이론을 도입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써 풀 수 있는 것은 풀며 풀 수 없는 것은 풀 수 없는 것이 대답이라고 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서 우리는 그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삶으로 보여주어야 설득력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신학의 기능으로서 문법은 신학의 주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의 목적이나 적용에 있어서 신학이란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학문에 중점을 준다기보다는 성경의 올바른 해석과 적용에 둔다고 볼 수 있다. 신학의 목적은 성경의 언어의 사용을 봄으로서 하나님이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의미를 분명히 하며 그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 적용시키는데 신학의 목적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적인 탐구가 철학적인 해석이 아니냐는 반문을 던질 수 있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을 언어철학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저서와 그 생애를 보면 단순히 이론적인 철학을 한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문제의 핵심을 조명해주고 그렇게 함으로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이 문법적인 탐구이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문법적인 탐구는 방법론이지 이론화가 아니다. 성경의 언어 사용을 보자는 것은 칼빈이나 안디옥학파가 말하는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인 의미를 더 명료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밭에다 칼빈의 신학을 심으면 칼빈의 신학이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있으며 신학자요 목회자로서 칼빈의 위대성과 독창성을 더 분명히 밝힐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사용을 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성경의 의미를 다른 방법보다 더 명료화시킬 수 있다.

IX. 정리

오늘날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예수님에 의하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시대라고 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믿음+무엇”한 신학이 판을 치고 있다. 환언하면 혼합주의 신학이다. 또한 패역이라는 말은 “perverted”로서 왜곡시킨다는 말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신학을 하나의 시대산물로서 신학이라는 말만 부치면 신학이라고 생각함으로 진정한 의미의 신학을 왜곡시키고 있다. 신학이 시대적인 문제를 도외시 할 수 없으나 시대의 산물은 아니다. 칼빈은 교리(doctrina)는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인 이론이 아니라 “신령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대신학을 혼합주의, 자유주의 산물이라고 하면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최근에 W.C.C. 대회에서 발표한 정현경 교수의 주제강연이 바로 혼합주의 신학에서 나온 것이며 민중신학의 앞으로 방향을 점칠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신학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르트(Barth)와 불트만(Bultmann)신학에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 성경의 무오에 기초한 올바른 교리를 왜곡시킨다. 윤리적으로 말하면 한탕주의와 도덕성의 타락이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의하면 시대의 병폐는 새로운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서 고칠 수 있다고 했다. Ludwig Wittgenstein, Remarks on the Foundations of Mathmatics, Rev. ed. G.H. Von Wright, Rush Rhees, and G.E.M. Anscombe. tans. G.E.M. Anscombe, Cambridge, MA: MIT press, 1978, 132.
우리의 태도를 바꾸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한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은 딤후 2장 15절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말한 신학의 기능을 살펴보고자 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τον λογον της αληθειας)을 옳게 분변(ορθοτομονντα)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사도 바울은 신학자와 목회자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칼빈도 마찬가지이다. 칼빈은 신명기(5:23-27)에 관한 설교에서 “누구든지 그가 일급 학자가 아니라면 결코 훌륭한 성직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도날드 K. 맥킴외/공편,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24.
사도 바울에 의하면 주된 신학자의 사명과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옳게”, “힘쓰라”, “분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인데 올바르다는 말은 사변적인 말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힘쓰라는 말은 명령형이다. 명령은 명령이다. 분변이라는 말은 사변적인 말이 아니라 똑바로 자른다는 말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섞지 않고 하나님 말씀 그대로 분명하게 전한다는 말일 것이다.
영어로 보면 “correctly handle the word of truth”라고 번역했다. 미국에서 소포에 “취급주의”라고 쓴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소포의 성질을 잘 알아서 취급하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핵심은 무엇이며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쓰여졌는가를 잘 알아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칼빈은 분변이라는 말을 “분명하게 신자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주석했다. CM., vol. 21, 222-223.
환언하면 신학의 기능이란 첫째,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으로 가르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도록 도우며, 둘째, 성경에 계시된 교리를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올바르게 가르치고 변증하고 험증하며 , 세째,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됨을 삶으로 보여주며, 네째, 위의 전부는 명령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대로 하나님 앞에(before God)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신학자요 목회자가 되는 것이 바로 성경의 언어논리가 보여주는 신학의 기능이요 신학자의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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