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제 4 권 성령 하나님의 외적 사역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교회) · 247
1. 교회 · 249
1) 교회의 정의 · 249
2) 교회의 필요성 · 250
3) 두 종류의 교회 · 252
4) 교회의 표지 · 253
2. 교직제도 · 257
3.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직제도의 문제점 · 260
4. 성례 · 267
1) 성례의 정의 · 267
2) 성례의 구성 · 269
3) 성례의 종류 · 271
4) 세례 · 271
5) 성찬 · 275
5. 국가와 교회 ·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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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기독교 강요>는 4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1권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제 2권에서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다루며 제 3권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속의 역사가 어떻게 성령님의 내적인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제 4권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의 역사가 어떻게 성령님의 외적인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가를 다루고 있다. 즉 제 3권에서 구원론을 다룬다고 한다면 제 4권에서는 교회론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1) 교회의 정의
칼빈은 제 4권의 제목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교회)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라고 붙이고 있다. 이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교회가 어떠한 기관인가를 잘 알려 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피 값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공동체로서 신자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도록 초청하시고 그 안에서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성숙한 신자로 자라가도록 하신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얼마나 교회가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다스리시며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오늘날 존재하는 여러 공동체와는 너무도 다르다. 세상에도 밥상 공동체, 동창회, 여러 가지 모임 등이 있다. 세상의 공동체는 상호이익을 위해서 세워지고 또한 영원성도 없다. 상호 이익이 없어지면 그 공동체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영원하다. 또한 상호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 즉 머리요 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가 빠져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존재할 수도 없고, 만약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영속성이 없다. 세상의 어떤 권세도 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 이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를 친히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마 16:13-20).
2) 교회의 필요성
칼빈은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고도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더욱 키우며 마침내는 목적지까지 전진시키려면 무지하고 태만한(또 경박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에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그리고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기독교 강요>, 4.1.1.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의 연약성을 너무도 잘 아시고 믿음으로 끝까지 신앙생활을 하며 또한 신앙이 튼튼하게 자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잘 인도하시기 위해서 외적인 보조 수단으로서 교회를 세우셨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렇게 좋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에 이 사명을 맡기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교사와 목사를 임명하셔서(엡 4:11) 그들에게 하늘의 권위를 주시고 그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가르치게 하셨다. 하나님이 성례를 제정하사 성례에 참가케 하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로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모든 것을 제정하셔서 우리 신자들이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사랑으로 보호받고 거룩한 나그네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칼빈은 교회의 일반적인 기능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이 비유가 주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지극히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이다(롬 8:15).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 사람에게 교회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능은 어린이를 낳고 키우고 보호하며 잘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어머니로서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은밀한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존립을 지키시므로 교회는 영원한 것이다. 또한 교회는 영원 불변하신 그리스도 예수께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자라고 보호되는 한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으며 항상 진리 가운데서 자라 가는 것이다.
교회는 선택자의 회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를 구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다.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의 구별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 예수와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 가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누리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말씀을 순종하며 순례 길을 가는 것이다.
3) 두 종류의 교회
교회에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즉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 전자를 유형교회라고 하며 후자를 무형교회라고 한다. 무형교회란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성도들의 모임”(la companie des fideles)이다. 칼빈은 요리문답에서 무형교회를 보편적인 교회라고 했다(쟝 깔뱅, <깔뱅의 요리문답>, 한인수 옮김, 129. 교회: Q. 93, 97). 그래서 무형교회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교회이며 하나님만이 아시는 교회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여러 개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서 보여진다. The Catholicity of Calvin's Doctrine of the Church, George William Morrel, 1964, S.T.M. Thesis of Pacific School of Religion, 1964, 49. 오늘의 세계 각처에 있는 수많은 교회는 유형교회이다. 이 교회가 다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외형만 있지 교회 안에 진짜 계셔야 할 그리스도 예수가 없는 교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가 동시에 있는 교회에서 누가 선택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교회는 교회의 표지(marks of the Church)와 권위가 있는 것이다.
4) 교회의 표지
교회는 두 가지 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올바른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이다. 이 두 가지 표지를 통하여 교회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것으로 참 교회와 거짓 교회가 구별되어지기 때문에 이 표지는 참으로 중요하다. 칼빈은 진정한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듣고 전파하며 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 <기독교 강요>, 4.1.9. 아우스부르그 고백(Augsburg Cofession)에서도 교회란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치며 성례전을 올바르게 집행하는 성도의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art., vii.
칼빈은 교회의 권징을 중요시했지만 권징을 교회의 특색을 가르키는 표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 점은 부커가 권징을 교회의 표지의 하나라고 한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스코트랜드신앙고백(The First Scots Confession/1560) 18장과 밸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1561) 29조에서도 권징을 교회의 셋째 표지라고 했다.
칼빈에 의하면 권징이란 교회를 방어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화의 수단이지 교회를 특성 지우는 필수적인 표지는 아니다. 프랑시스 웬델, <칼빈의 신학서론>, 기독교문화협회, 3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권징을 중요시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교회의 생명인 것같이 권징은 그 근육이며 이 근육을 통해 몸의 지체들이 서로 결합하고 각각 자신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라고 칼빈은 말했다. <기독교 강요>, 4.12.1(Accordingly, as the saving doctrine of Christ is the soul of the church, so does discipline serve as its sinews, through, through which the members of the body hold together, each in it own place).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칼빈이 권징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칼빈이 교회 특징을 설명하는 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혹은 올바르게 전파해야 한다는 말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지 못하면 오히려 신자를 타락하게 만들어 결국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는 이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가르쳐 준 말씀을 기록된 대로 선포해야 하는데, 자기의 신학이나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가미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상을 가르치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에는 모든 사람이 전심으로 믿어야 할 핵심적인 교리를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든지,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시라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라든지,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달려있다는 것은 영구 불변한 진리로서, 이 교리를 무시하는 말씀 선포는 이미 말씀을 올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성례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제정한 성례(세례와 성찬)를 베풀어야 올바로 성례를 집행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곱 가지 성례를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례를 올바로 집행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교황제도를 심하게 공박했지만 천주교 내에 건전한 요소들이 남아 있음도 부정하지 않았다. <기독교 강요>, 4.2.12.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를 참된 교회라고 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기초는 사람의 판단이나 교황이나 사제계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회에는 거룩하고 경건한 자도 있지만 모든 성도가 다 그러한 자가 아님을 인정한다. 그래서 얼마든지 교회에 과오가 있을 수 있고 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교회의 영원한 표지인 교회의 원칙에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교회에서는 서로 용납하고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인정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했다. 칼빈은 고린도 교회를 예로 들면서 그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부도덕한 문제도 있었고 또 어떤 자는 죽은 자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의 핵심까지도 부수려고 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요 성도의 공동체라고 했다. 그 이유는 그 교회에서 말씀 선포와 성례가 집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칼빈이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원칙주의자였음을 반증해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성경에 적혀 있는 대로 가라지와 알곡이 모여 있는 곳이다. 추수 때에 하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가르실 것이다. 원칙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교회에서 행하여져야 한다고 칼빈은 역설한다. 또 교회 내에서 성도간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조급하게 교회를 떠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용서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서로가 잘못된 점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더 복음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를 수없이 옮기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떠나는 것으로서, 설령 구미에 맞는 교회에 간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자기의 구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교회가 이 세상에 있겠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또 반복해서 그 교회를 떠나지 않겠는가?
교회 내의 분열도 마찬가지이다. 이단을 그릇된 교리로 건전한 교리를 부패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교회의 분리와 분열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에 기초한 건전한 교리를 부패시키는 것을 제하고는 그리스도의 피로 산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의도는 그 자체가 무서운 죄이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정당한 이유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죄의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칼빈은 말한다. <기독교 강요>, 4.1.17-22.
교회는 거룩하다. 인간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요 몸이 되신 그리스도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5-27).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거룩해진 것은 아니다. 매일 매일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하는 성화 속에서 거룩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고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례가 집행될 때 그러한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영원한 표지이다. 즉 교회에서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이룬 구원의 역사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확신되어지고, 또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신자의 믿음이 자라 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논리이다.
2. 교직제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다스릴 교직제도를 마련하셨다. 하나님만이 교회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시고 교회를 다스리시며 교회의 권위를 가지신다. 이 권위는 말씀의 권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선포하시고 교육시키신다. 하나님은 이 권위와 직무를 택하신 주님의 종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위임이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다 위임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즉 대통령 부재시 부통령이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대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택하신 종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한다는 것이다. 교직자는 하나님의 입으로서 혹은 일하는 “연장”으로서의 역할을 위임받은 것과 같다. 그래서 교직자는 하나님의 “입” 혹은 “연장”으로서 맡은 바 직무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4.3.1. 칼빈은 교직자의 직무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봉사로 신자를 결속시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로 비유한다. <기독교 강요>, 4.3.2. 교직자의 봉사가 하나님의 입으로서 혹은 연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직분이 되지 못할 때 신자를 하나로 묶을 수도 없으며,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게 된다. 교회는 이와 같이 교직자와 성도의 봉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며, 교직자와 성도가 함께 그리스도의 머리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한다. 하나님은 이 봉사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능력을 교회에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몸인 교회를 이루어 가시기 위하여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을 두셨다. 교회 안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끝으로 교사(엡 4:11)가 있다. 이 중에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는 영구적인 직분이 아니고 일시적인 직분으로,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또 필요에 따라서 부활시키셨다. 그러나 목사와 교사는 교회 내의 영구적인 직분이다. <기독교 강요>, 4.3.4. 목사는 복음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이고 교사는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자이다.
이 외에도 능력, 병 고치는 은사, 통역하는 은사, 다스리는 것, 구제하는 직분 등이 있다(롬 12:7-8, 고전 12:28). 이 중에서 전자(능력, 병 고치는 것, 통역)는 일시적인 것이며 후자(다스리는 것과 구제)는 영구적인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 강요>, 4.3.8. 전자가 일시적인 것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요즈음 말썽을 일으키는 신유 은사나 방언은 일시적인 것으로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 주시는 은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다스리는 직분인 목사나 장로, 구제하는 직분인 집사는 영구적인 직분이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설교와 성례와 치리를 수행하는 자이며, 장로는 모든 신자의 생활을 감독하고 잘못을 범할 때 아버지로서 훈계하고 충고하는 직분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한다(롬 12:8). 집사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구제물자를 나누어주며 구제사업을 관리하는 집사와 직접 빈민과 병자를 돌보는 집사를 말한다. <기독교 강요>, 4.3.9. 칼빈에 의하면 여자들이 맡을 수 있는 공적 직분은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 강요>, 4.3.9.
영구적인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를 하나님은 사역자를 통해서 안수하심으로 그들의 일생을 하나님께 드려서 죽도록 충성스럽게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셨다. 직분자에게 안수하는 것은 교회를 섬기기 위한 매인 몸이라는 것을 공표하는 엄숙한 교회의 의식이다. 이처럼 교직제도는 하나님이 당신의 피로써 사신 교회를 유지하고 보호하며 발전시키기 위해서 세우신 제도이다.
3.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직제도의 문제점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4권의 상당한 분량을 로마 교황청과 그에 종속된 단체들의 교회 정치제도와 성직제도를 성경적인 입장과 초대교회사 입장에서 비판했다. <기독교 강요>, 4.5-13. 우리는 칼빈이 로마 카톨릭교회를 비판한 것이 그 교회가 단순히 개신교도들을 핍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성경적이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높이 사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란 로마 카톨릭교회에 의해서 부패한 복음의 순결성을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복음의 순결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세주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교리만이 신자의 생활과 삶의 절대 원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French Confession of Faith, A.D. 1559년 왕에게 바친 서문에서. 칼빈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직제도의 문제점을 교리적, 입법적, 사법적 측면에서 다룬다.
로마 카톨릭 회에서는 주교를 선택함에 있어서 그들의 소명보다는 교황의 권력에 의지했는데 그들의 자격은 아주 형편없었다고 했다. 예를 들면 주교 중에는 거룩한 학문을 이해하는 사람은 지난 100년(칼빈이 살던 시대) 동안에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열 살도 되지 못한 소년을 교황의 허락으로 주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주교를 선거하는 과정에서도 평신도들의 권리를 온전히 빼앗아 버려 다만 참사원들이 마음대로 주교직을 수여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이성에 위배되고 사기라는 것을 교황 레오 1세나 교부 키프리아누스도 거듭 강조했다.
주교들은 자신들을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그들만이 사제(희랍어의 장로라는 말에서 기원)와 부제(희랍어 집사라는 원어에서 기원)를 임명했는데, 이들이 일할 곳은 생각지도 않고 생활할 재력과 권력이 있으면 마치 성직을 팔듯이 주었다고 한다. 칼빈은 이와 같은 임명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칼케돈회의에서 목회의 사역지가 없는 사람을 목회직에 임명을 해서는 안된다는 교회 법령을 어긴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 강요>, 4.5.4. 이런 부조리로 임명된 이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을 감당하지 않으면서 온갖 부패를 저지르며 살았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교황청의 수위권(首位權)을 말하고 있다. 즉 로마 교황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온 교회를 주장해야 된다고 했다. 이 수위권의 주장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 다시 말하면 교황은 베드로를 계승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에게만 준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베드로 자신이 모든 장로들에게 교회를 먹이라고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5:2). 또한 베드로에게 한 말씀은 베드로가 받은 영예이지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위에 수위권을 가진다는 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로마 교회는 베드로에게 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는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하여 교황 수위권을 주장한 것이다. 즉 로마 교회는 이 말씀이 베드로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근거이며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성경적인 근거라고 턱없이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와 같은 해석은 너무나 왜곡된 것이라며 위대한 초대 교부인 어거스틴과 키프리아누스를 인용하면서 로마 교회의 입장을 반박한다. 같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모든 사도에게 맡긴 사명인 것처럼 매고 푸는 권한도 모든 사도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만일 교회의 신비가 베드로에게 없었다면 주께서는 열쇠를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가 열쇠를 받았을 때 그것은 온 교회를 상징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4.6.4. 어거스틴은 또 “모든 사람이 질문을 받은 후에 베드로만이 주는 그리스도시요(마 16:16)라고 대답했고 열쇠를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받았다. 이것은 그만이 매고 푸는 권한을 받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대답했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연합을 몸소 상징했다. 따라서 연합이 모든 사람 안에 있음으로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4.6.4.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한 사람에게 열쇠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인 것을 알리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베드로와 똑같았고 영예와 권한을 동등하게 나눠 받았다. 그러나 하나에서 출발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인 것을 보이시려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4.6.4.
교회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로마 교회가 수위권을 주장한 것은 교회사에서도 증명이 될 수 없는, 단지 황제 찬탈자인 포카스와 폐핀과의 관계를 통해서 조작된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강요>, 4.7.17-18. 그래서 칼빈은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교황은 회의를 초월한다. 교황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감독이며 지상교회의 최고 수령이다”라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권한은 교리에 대한 권한과 입법에 관한 권한과 재판권으로 나눌 수 있다. <기독교 강요>, 4.8.1. 교리에 대한 권한은 누가 주는가? 칼빈은 하나님이 권위와 위엄을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사도나 후계자들에게 주실 때에 개인에게 주시지 않고 그들이 임명되는 그 직분에 주셨다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권위를 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서 선포하는 것은 “겨”(chaff)라고 했다(렘 23:28). 그래서 선지서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경고”, “여호와의 말씀에”,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언어가 시사해 주듯이 교리의 권한은 말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신약에서 사도들이 자기들의 견해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명령하시는 것만을 충성스럽게 전파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마 28:19-28). 이와 같이 교회의 권한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말씀 안에 묶여 있는 것이다.
칼빈은 사도들과 그 이후 후계자들을 구분하고 있다. 전자는 “성령의 말씀을 틀림없이 받아 쓴 사람이고 후자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고 선포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기독교 강요>, 4.8.9. 그러므로 주님의 종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되고 성경에서 복종하도록 하신 교리만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교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교황의 무오설을 주장하는, 즉 자신의 전통을 성경과 동일시하는 카톨릭교회의 주장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비성경적이다. 칼빈은 교회 회의들을 존경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회의의 중요성은 성경과 일치할 때만 순종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칼빈은 카톨릭이 예배, 고해성사, 삶을 속박하는 교회법을 “자유의 법”, “부드러운 멍에”, “가벼운 짐”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양심을 노예로 만든다고 했다. 또 양심에 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을 마음으로 의식하며 이 의식이 한 증인같이 붙어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감추는 것을 허락지 않고 우리를 심판대 앞에서 고발할 때에 이 의식을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일종의 매개물로서, 사람이 아는 것을 마음 속에 떨쳐버리지 못하게 하며 그 죄과를 인정할 때까지 추궁한다”라고 정의했다. <기독교 강요>, 4.10.3.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지만 율법의 요구가 인간의 마음에 쓰여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것이 양심의 증거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송사하고 혹은 변명한다고 말했다(롬 2:15-16).
이처럼 교회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양심의 법이다. 하지만 카톨릭의 교회법은 사도들의 전승도 아니요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다만 속박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진정한 교회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하며 인간의 양심과 영혼을 온통 지배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입법자요 재판장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 4:12).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사 33:22). 하나님만이 교회법의 저자이시며 재판장이 되신다. 그래서 양심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외형적인 의식을 규범 짓는 교회법은 완전히 성경에 위배된 것이며 이것에 의하여 양심이 구속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 가령 예를 들면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열렬히 지지하지만 기도할 때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의 유익과 사랑에 의해서 판단되어져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기독교 강요>, 4.10.31.
교회의 재판권은 교회의 권징을 말하며,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조그마한 사회에도 그 사회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규율이 필요하듯이 하물며 질서가 정연해야 할 교회에서는 규율이 더욱 필요하다. 이에 대해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가 가르쳐 주신 구원의 교훈이 교회의 생명인 것처럼 권징은 교회의 “근육”이며 이 근육에 의해서 교회는 지탱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4.12.1.
권징에는 시정과 출교가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고 칼빈은 말했다. 첫째는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몸 된 교회를 욕되게 하고 더럽히는 자를 출교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악한 사람들과 교제함으로 인해 선한 양들이 영향을 받아서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는 죄를 범한 자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독교 강요>, 4.1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징은 천편일률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경중에 따라서 해야 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카톨릭 교회에서 강요하는 금식이나 고해성사나 독신제는 비성경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영적 권위는 성경에 근거해서 부분적으로는 감독들에게 주어졌고 부분적으로는 교회 전체에 주어졌는데, 교회의 이런 영적 권위는 교리(doctrine)와 입법(legislation)과 사법(jurisdiction)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의 교직제도나 교리, 입법, 권징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칼빈은 카톨릭교회의 교직제도를 비판함과 동시에 성경에 기초한 교리와 입법과 사법의 규범을 재정립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칼빈이 제시하고자 한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직제도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성경에 입각한 교리, 입법, 사법을 통해서 교직제도가 세워져야 함을 배우게 된다.
4. 성례
칼빈은 성례를 교회론에서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의 객관적인 역사가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내적으로 신자들에게 확신되고 외적으로 교회에서 믿음이 자라게 되는데, 성례는 신자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외적인 은혜의 방편인 것이다.
1) 성례의 정의
“성례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받쳐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이고, 우리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 간단히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인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의 변함없는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강요>, 4.14.1. 칼빈이 정의한 대로 성례는 외형적인 표로서 두 가지 다른 면이 있다. 신적인 것과 인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보이는 외형적인 표(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거듭 확인시켜 주시고, 성례를 받는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해서 다시금 하나님께 충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성례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a visible sign of a sacred thing)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a visible form of an invisible grace)라고 했다.
성례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이 있다.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이미 확고부동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심히 연약하여서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고려해 각종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도록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도와주신다. 성례도 그 중의 하나이다. 성례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강한 효력을 발생케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하시고 성령은 약속한 것을 효력 있게 하신다.
결론적으로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믿음을 강화하고 확증하며 사람들에게 이를 증언하기 위한, 우리를 위한 믿음의 의식이다.” 스피츠, <종교개혁정신>, 14장 성례, 190.
2) 성례의 구성
성례는 말씀과 외형적인 표로 구성된다. 여기서 말씀은 표징에 대하여 들러리를 서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성례의 표징의 의미를 우리로 하여금 깊이 깨닫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말씀은 성례에 있어서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성령은 항상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데 성령은 성령의 도구인 성례에서 오직 말씀과 더불어서 믿음을 일으킨다. 말씀의 효력이 성례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성례에서 사용하는 물질에 말씀을 첨가하라. 그러면 성물이 되리라. 말씀의 힘이 아니면, 물이 몸에 닿아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그 위대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말씀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말씀 자체의 소리와 뒤에 남는 힘은 서로 다르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사도는 말한다(롬 10:8). 따라서 사도행전에는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케 하사’라고 했으며(행 15:9), 사도 베드로는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벧전 3:21).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이 믿음의 말씀에 의해서 세례가 성별되고, 깨끗케 하는 힘이 세례에 있게 되는 것임이 확실하다. <기독교 강요>, 4.14.4에서 재인용.
따라서 칼빈은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지시하시며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시며 마지막으로,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그분의 지성을 비추어서 말씀과 성례가 우리 마음에 확실히 들어오게 하신다고 말한다. <기독교 강요>, 4.14.8.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케 하며 우리의 충성을 하나님께 고백케 하신다.
성례 자체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도구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로 하여금 보도록 생생하게 제시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에 성례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례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성례에 참가해야만 구원을 보장받는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그리스도에게만 맡겨져 있을 뿐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성례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구약에도 성례가 있었다. 할례와 결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구약의 성례는 신약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사실 구약의 성례는 신약의 그리스도를 약속한 것이다.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현현이라고 칼빈은 말했다. 예를 들면 구약의 할례와 결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성이 자신들의 부정과 악한 생각들로 오염되고 부패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의식들은 그들의 부패와 추악함을 씻을 다른 씻음을 약속했다. 이 약속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씻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을 씻는다. 이처럼 구약의 성례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성례를 예시한다. 구약의 성례의 외형적인 표시는 신약과 판이하게 다르지만 그 의미는 같다. 성례에 대한 믿음이 같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증거하는 점에서는 양쪽이 다 같다. 그러나 우리 성례는 더 분명하고 더 빛나는 증거를 한다.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 우리 것은 더욱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 준다. <기독교 강요>, 4.14.26.
3) 성례의 종류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세례와 성찬이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인간이 제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은 비성경적인 로마 카톨릭교회의 견신례, 고해성사, 결혼, 서품, 종유와 같은 성례는 꾸며진 것으로 간주했다.
4) 세례
제네바에서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과 칼빈이 공동 작성한 <신앙고백>에 의하면 “(세례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즉 그의 아들 예수의 형제로 받아드리시기를 소망함을 증명하는 외적인 표시이다. 그 때문에 세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 것, 곧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우리의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피츠, <종교개혁의 정신>, 15. 세례, 190. 또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세례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정식적으로 가입하는 입문(入門)이라고 했으며, 세례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둘째, 사람들 앞에서 신자의 고백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기독교 강요>, 4.15.1. 이 점에서 세례 교인이 되어야 교회의 정식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례의 목적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세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요 다른 하나는 사람들 앞에서이다. 세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표징이다. 또 세례란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표징이다.
그렇다면 사람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세례는 일생에 한번만 받지만, 과거의 죄만 씻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언제 세례를 받았든지 간에 우리는 일생 동안 내내 그리스도의 피의 씻음을 받아서 깨끗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세례를 통해서 주어진 약속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신자로서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오는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세례를 통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죄의 죄성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진노의 자식이 된 것이다. 유아들까지도 태중에서부터 저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이것은 원죄의 씨앗 때문이다. 이처럼 죄의 씨앗인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존재요 저주의 자식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저주가 제거되고 취소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약속 받는다. 바로 세례를 통해 받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육신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 인간은 정과 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즉 “죄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세례를 통하여 준 약속을 통하여 죄의 흔적은 있어도 이 흔적은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세례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일생 동안 계속해서 육체의 일을 성령을 통해서 죽이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서 7장은 중생한자의 내적 투쟁을 잘 묘사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는 칼빈과는 달리 로마서 7장에 묘사된 사람을 중생되지 않은 사람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로 여긴다. <기독교 강요> 4.15.12, 각주 20.
칼빈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재세례파와는 달리 유아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봐서 구약의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고 한다. 물론 유아들이 설교도 알아듣지 못하고, 회개하거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전혀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유아들도 장차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할례가 언약에 참여케 하는 것처럼 유아들도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서 세례를 받으며, 아직은 회개와 믿음이 그들 안에 생기지 않지만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서 그 씨가 그들 안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칼빈은 말했다. <기독교 강요>, 4.16.20.
세례는 그리스도 예수의 씻음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는다는 약속의 표징일 뿐만 아니라 죄의 씻음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제는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진실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에 의해서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참가한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 예수의 씻음을 통해서 영적으로 중생하여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드신다는 표징이다. 그러나 성만찬은 영적인 유아기를 지나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즉 주의 몸과 피를 분간하고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 점에서 성만찬은 아무에게나 구별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5) 성찬
성찬은 “떡과 포도주로 주님의 피와 살을 나누는 참된 영적 교제의 표시이다.” 스피츠, <종교개혁의 정신>, 16. 성찬, 190-191. 성찬은 떡과 포도주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영적 교제이다. 칼빈은 성만찬을 논할 때 성만찬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주의 만찬은 떡과 포도주를 표징으로 삼아 심오한 영적인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떡과 포도주는 표징이다. 세례가 그리스도 예수의 씻음을 통하여 중생케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표징이라고 한다면, 성찬은 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오는 떡과 음료를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표징이다. 하나님은 떡과 포도주로 주의 몸과 피를 상징하게 하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과 피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제정되었다는 것을 성만찬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다. 이와 같이 유추를 통해서 우리는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도된다. 떡과 피가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부터 얻어지는 영적인 진리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칼빈은 성찬을 통해서 얻어지는 약속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깊이 느끼는 신비라고 했다. 또 ‘그리스도의 살은 우리의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성찬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확신케 하는 것이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했다. <기독교 강요>, 4.4.17.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4.17.37.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과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의존한다는 것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며 성찬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칼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평화, 화목을 권장하시기 위하여 성찬을 제정하셨다고 했다. <기독교 강요>, 4.17.38.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고, 신자들은 이 몸에 서로 지체로서 연합된다.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서 서로 도와야 한다. 이 사실을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확인하며 느낀다. 우리가 함께 가르침을 받고,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자고 함께 노래하는 교제를 통해서 동료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깨닫게 된다. 얼마나 이 성찬이 중요한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성찬을 “사랑의 유대”라고 불렀다. Augustine,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Vol. VII.,"John's Gospel xxvi", 172.
성찬에는 그리스도가 임재하신다. 이 문제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견해와 논란이 있었다. 카톨릭교회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덩이와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한 데 비해, 루터교회는 천상의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를 통해 실제로 지상에 육체적으로 임재하는 공재설을 주장했다. 또한 쯔빙글리파는 떡과 포도주는 단순한 그리스도의 상징일 뿐이라고 하는 상징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은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영적인 실재를 믿는 기념설을 주장했다. 우리는 성찬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인 실재를 믿는다.
성례는 단순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도 아니며 헌신도 아니다. 성례는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을 통해서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씻음을 통하여 우리가 중생되어 새롭게 태어난 것을 확증하는 표징이 세례이며, 이제 새롭게 태어난 믿음이 자라 영생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오는 양식을 일생 동안 먹고 마시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떡과 포도주라는 표징을 통하여 가르쳐 준 영적인 진리가 성찬이다.
성례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받는 외적인 수단이다. 성례에는 세례와 성찬이 있다. 세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는 외적인 표시인 동시에 우리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생을 주님만 믿고 살겠다는 표시이다.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다시금 알게 하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해서 주어진 약속들을 더욱 확실하게 믿으며 영생의 약속을 마음 속에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서 화목하고 서로 사랑하며 천성을 향하여 걸어가는 나그네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성례의 논리이다.
5. 국가와 교회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4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 4권의 마지막 부분은 국가의 통치로 끝을 맺고 있다. 제 3권 19장 15절에서 칼빈은 두 가지 나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국가의 통치에 대해서도 자유롭다는 견해는 아니다. 그래서 그는 두 나라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국가통치를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내적으로 확신을 주는 구원론에서 다루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신자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초대하시며 그 공동체 안에 있게 하신 외적인 은혜의 수단을 다룬 교회론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다. 이것은 국가도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외적인 기관임을 은밀히 암시하는 것으로서, 국가를 외적인 은혜의 수단의 일부로까지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나라란 영적인 통치와 외적인 통치로 나눌 수 있는데, 인간은 이 두 나라의 지배를 받고 산다.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영적인 통치로서 여기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통치로서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또 시민으로서 사람 사이에 유지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배운다.” <기독교 강요>, 3.19.15. 영적인 통치는 그 의미가 영혼의 생활에 관한 것으로 신자의 마음 속에 있으며, 외적인 통치는 현세생활에 관한 것으로서 외면적인 인간의 사회생활을 규정한다.
칼빈에 의하면 외적인 통치에는 세 부분이 있다. 법의 수호자인 집권자와, 집권자가 통치할 때의 표준이 되는 법과, 법에 의한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국민이 그것이다. <기독교 강요>, 4.20.3.
국가 통치는 필요하며,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다. 정부는 국민이 살 수 있는 생활방편과 질서를 마련해 주고, 기독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허용하여 사회에서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기독교 강요>, 4.20.3. 집권자의 지위는 아무리 인간이 선거에 의해서 선출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 직무와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그 직책이란 “일반 시민의 무죄와 겸손과 예절과 평화의 보호자와 옹호자로서 임명된 자로서 사회 전체의 안전과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4.20.9. 다윗은 이런 면에서 매우 모범적인 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의 조직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법률이다. 칼빈은 “법률은 국가의 가장 튼튼한 힘줄이다”라고 했다. <기독교 강요>, 4.20,14. 법률이 없이는 국가는 무정부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법률이 잘 지켜지지 않은 국가는 무질서하고 부패해서 망하게 됨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모든 법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자연법(the natural law)은 하나님 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4.20.16. 영원한 도덕법인 십계명도 자연법의 증언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준 양심의 증언이다.
모세에 의해서 발표된 하나님의 율법은 도덕에 관한 율법(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이웃에 대한 사랑), 의식에 관한 율법, 재판에 관한 율법으로 나눌 수 있다. 칼빈은 이 법을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법정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증오심이나 복수심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기독교 강요>, 4.20.17.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국민 한 사람으로서 다스리는 자를 존경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최선을 다해 복종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집권자에게 지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대리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4.20.22. 칼빈은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하라고 했다. 이는 악한 집권자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4.20.24.25.26. 다만 예외가 있다. 만일 집권자의 명령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을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칼빈은 강조한다.
우리 신자는 구속받은 자로서 자유를 소유한 자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일원으로서 집권자를 존경하고 법을 지켜야 하는 시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자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법을 순종하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과감히 거부할 수 있다. 이것이 칼빈이 가르치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이다.
출처 : 개혁 신학 연구소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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