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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 21세기 한국교회의 대안

by 【고동엽】 2021. 11. 4.
개혁신앙, 21세기 한국교회의 대안


임경근 목사
1. 들어가는 말


지난 두 번의 글(2007 겨울/ 2008 봄)에서 한국 개신교의 특징과 복음주의와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한국 개신교는 교파를 초월해서 복음주의 일색이다. 복음주의의 강점은 개인적인 회심과 변화를 강조하며 전도와 선교에 앞장서며 한국 개신교회의 양적 성장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1995년부터 한국교회는 복음주의의 강점보다는 약점이 더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양적 성장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사회ㆍ경제ㆍ정치ㆍ문화의 변화와 더불어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인식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 집단이 아니다. 개신교회는 이제 종교집단을 넘어 기득권을 가진 이익집단 혹은 압력집단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개신교를 대표하는 한기총은 최근 시국과 관련된 어설픈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단지 종교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뉴라이트 운동은 대표적인 복음주의적 기독교 집단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장로 대통령을 세 명이나 배출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 사회에 던져준 인상은 그렇게 곱지 않다. 그들은 희생과 사랑과 공의를 정치에 접목하는데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기독교 단체들이 이제 공공연하게 기독교 자체에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은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많지만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맹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들도 있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언론도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MBC ‘뉴스 그 이후’ 시리즈 보도에서 반복적으로 한국 교회의 사회적ㆍ도덕적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한국 교회가 자정능력을 잃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해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복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선교학자이면서 30번 이상 한국을 다녀간 한국통, 랄프 윈터(Ralph Winter) 박사는 선교 강국으로 약진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해 이렇게 직언하고 있다. “가장 큰 도전은 교회가 선교를 과소평가하는 것에 있습니다. 선교가 세상에 참여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단지 복음전도와 개인적 구원에만 한정돼 있는 게 가장 큰 도전입니다. 기독교가 삶의 방식이 아니라 종교의 하나가 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지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세상 속에 실현하려는 노력이 우선돼야 합니다.” 이런 관점은 복음주의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무엇인가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복음주의에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보는 큰 관점이 부족하다. 복음전도에 열심인 한국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모든 정력을 쏟아 붓고 있지만 그 열매가 어떤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랄프 위터(Ralph Winter) 박사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단기선교를 할 수 있는가?” 라는 기자의 질문에 단호하게 “가지 마십시오. 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의미 없는 단기선교보다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교회의 약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제시한 것이다.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세상에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새로운 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잊혀진 제자도]라는 책에서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을 풍자하기를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은 이런 자세를 가진다. “부디 당신의 피가 조금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학생이 되거나 당신의 성품을 닮을 마음은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인생을 즐기는 동안 좀 못 본척해 주시렵니까?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복음주의가 추구해온, 삶이 빠진 신앙생활의 한계와 맹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현 개신교를 꼬집는다. “오늘 복음주의자들의 삶에서 빠진 부분은 영성이 아니라 순종이다. 우리는 순종을 본질로 치지 않는 변종 종교를 만들어냈다.” 개인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현대 한국 교회의 모습은 전형적인 복음주의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균형 잡힌 세상을 향한 신앙과 영성이 필요하다. 이웃과 세상을 향한 시각을 제공하는 신앙적인 틀이 필요하다. 이제 그 새로운 틀인 개혁신앙을 살펴보자. 새로운 틀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개혁신앙이 한국에 있었지만 복음주의에 눌려 제대로 그 기능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개혁신앙이 주류로서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2. 개혁신앙의 용어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개혁주의’(改革主義)이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져 있다. ‘개혁주의 사상’, ‘개혁주의 신학’,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학문’ 등이 그렇다. ‘개혁주의’에서 ‘주의’는 어떤 사상의 포괄적인 체계를 일컫는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본래 의미는 ‘주의’나 ‘주장’이라기 보다는 ‘믿는다’는 생명력 있는 그 무엇이다. ‘개혁주의’라는 용어에는 역사적 의미의 종교개혁의 신학적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기에 적절하지 않다. 본래 ‘개혁주의’의 영어 표기는 ‘reformed’인데 형용사적 기능과 의미를 가진다. ‘개혁주의’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며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배경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에 적절한 한글 번역은 ‘개혁된’이라고 하면 직역이지만 뭔가 부족하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 가장 근접한 한 용어를 찾자면 ‘개혁’이라는 명사이다. 이 명사는 형용사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개혁(된)’(reformed)은 형용사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개혁교회는 한 번 개혁되면 다시는 개혁될 필요가 없다는 인상을 준다. 본래 ‘개혁주의’는 계속적인 개혁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개혁’이라는 한글 용어는 ‘개혁(하는)’(reforming)의 적극적인 의미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개혁주의’ 대신에 ‘개혁’이라는 용어로 통일해 사용가능하다.


학원 선교단체인 SFC(Student for Christ)의 강령에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등장 한다. 이 강령은 박윤선 박사와 한명동 목사가 작성한 것으로 종교 개혁적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형용사적 용어로 사용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을 영어로 옮겨 놓은 SFC 강령도 ‘reformed’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개혁주의’는 형용사적 의미임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개혁주의’는 ‘개혁’이라는 용어로 바뀌어야 적절하다고 하겠다.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 대신 ‘개혁’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할 것이다.


3. 개혁신앙의 역사적 배경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적 약점을 대체할 대안적 신앙은 ‘개혁신앙’이다. ‘개혁신앙’은 하늘에서 떨어진 말이 아니다. ‘개혁신앙’이라는 단어는 16세기의 역사에 정초한 역사적 용어이다. 종교개혁가들, 곧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쯔빙글리(Ulich Zwingli, 1484-1531), 마틴 부쩌(Martin Bucer, 1491-1551), 불링거(Heinlich Bullinger, 1504-1575), 그리고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으로 이어지는 인물들에 의해 전개된 16세기의 종교개혁(the Reformation)에 근거한 단어이다. 바로 이 역사적 용어인 종교개혁의 영어 표기인 ‘Reformation’에서 형용사적 용어로 ‘reformed’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교회에 부패해 있던 교회가 말씀으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로마교로부터 개혁된(reformed) 교회가 된 것이다. 이 역사적 물결 속에 흘러 내려온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개혁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개신교회와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
로마 천주교에서 개혁된 프로테스탄트에 속하는 개혁교회의 범위는 넓다. ‘루터교회’, ‘성공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구세군교회’, ‘순복음교회’ 그리고 ‘개혁교회’가 있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교의 멍에에서 벗어난 교회들이 각 지역과 국가에서 역사를 거쳐 독특하게 발전해 나간 교회들이다. 이들을 일컬어 넓은 의미에서 모두 ‘개혁교회’라 말할 수 있다.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이 그 예이다. 이 단체에는 장로교, 개혁교회, 회중교회, 루터교회 등이 다양하게 가입되어 있는데 세계적으로 100개 나라 7천 5백만 명의 회원이 있다. 이 개혁교회는 이렇게 같은 종류의 무리를 통칭하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다음으로 좁은 의미의 개혁교회가 있다. 이 때 ‘개혁교회’는 일반적인 명칭이 아닌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이 교회들은 독일과 독일어권 스위스 개혁교회(Reformierte Kirche), 네덜란드 개혁교회(Hervormed or Gereformeerde Kerken), 프랑스 개혁교회(Eglise Reformee), 헝가리 개혁교회, 루마니아 개혁교회, 폴란드 개혁교회, 남아프리카공화국 개혁교회와 이들 나라에서 이민 간 사람들이 세계 각 곳에 세운 교회들이 있다. 또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일본 등지에도 있는 개혁교회가 있다. 이들 교회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의 개혁신앙을 소유하고 있거나, 좁은 의미의 개혁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네덜란드계 ‘개혁교회’이다. 이 교회는 네덜란드어로 ‘Gereformeerde Kerken’(개혁된 교회)라는 공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미국 이민 교회는 직역하여 ‘Reformed Church’라 이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개혁교회는 일반적 보통 명사화된 ‘개혁교회’와는 다른 개념의 ‘개혁교회’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소위 넓은 의미의 개신교의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다름을 분명히 한다. 같은 교리와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름만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그 예이다. 장로교는 앵글로 색슨계로 개혁신앙을 소유한 교회이다. 장로교회의 설립자 존 낙스(John Knox, 1505-1572)는 칼빈의 절친한 친구이자 제자였으며,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따랐다. 개혁교회는 유럽 대륙에 산재하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유산이다. 이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칼빈신학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삶에 적용한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개혁신앙’은 '칼빈주의(Calvinism) 신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개혁신앙’을 좁은 의미인 칼빈주의적 신앙 관점에서 살필 것이다.


4. 개혁신앙 = 칼빈주의


16세기에는 로마 천주교회가 개혁한 교회를 일컬어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 불렀다. 기록에 의하면 1561년 프랑스의 포이시(Poissy)회에서 사용되었는데, 처음에는 종교개혁 무리 전체를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16세기 말경에는 루터교회와 칼빈을 중심한 개혁교회로 구분하여 사용되었다(재세례파와 자유주의자들 제외). 성만찬 논쟁에서 칼빈주의자들의 교회를 개혁교회로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루터교회와 칼빈의 신앙을 따르는 개혁교회를 넓은 의미에서 개혁교회라고 부를 수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칼빈의 신앙을 따르는 무리를 개혁교회라 부른다. 칼빈주의는 루터교회와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정도와 강조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그 후 개신교회 안의 복음주의와 개혁신앙을 나누는 뿌리가 된다. 즉 루터주의는 복음주의로, 칼빈주의는 개혁신앙으로 발전한다. 루터의 관심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구원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곧 루터의 관심은 인간인 ‘나’였다. 그의 답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였다. 칼빈은 루터의 관심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셔야할까?’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곧 칼빈의 관심은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칼빈의 관심은 인간의 구원이 이신칭의로 말미암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영역으로 넓혀졌다. 이러한 차이는 교회 역사 가운데 확연하게 드러났다. 루터의 인간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복음주의가 이어받았고, 칼빈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은 개혁신앙이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이 좁은 의미의 개혁교회는 칼빈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칼빈주의 교회는 16세기 유럽에서 다양하게 퍼져 나간 종교개혁의 한 흐름이다. 이 칼빈주의는 스코틀랜드, 영국, 아일랜드의 장로교회로 퍼져 나갔고, 동 유럽의 교회를 합하면 전 세계적으로 2천 5백만 이상의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있다. 지금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교회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이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큰 개신교 교단들 중에 개혁교회가 있다. 이제 칼빈주의적 개혁교회는 더 이상 유럽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쌍파울로, 나이로비가 그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침례교회, 성공회, 회중교회에도 칼빈주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이 있다. 침례교 신학자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ugustus H. Strong)은 유명한 칼빈주의적 신학자이다. 유명한 칼빈 연구가 베틀즈(F. L. Battles)도 회중교회 배경을 가진 자였다(후에 개혁교회로 들어온다). 또 유명한 칼빈 연구가들인 휴즈스(P. Hughes), 페커(J. I. Packer)와 파커(T. H. L. Parker)는 성공회 신학자들이다. 최근에는 존 파이퍼(John Piper) 같은 자들이 침례교 목사이지만 칼빈주의적 신앙을 소유하고 실천하고 있다. 칼빈주의 신앙 혹은 개혁신앙은 더 이상 어느 한 교회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4. 개혁신앙의 특징


사실 개혁주의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하라고 하면 공통된 어떤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개혁신앙에 미친 칼빈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어거스틴, 안셀무스, 루터와 종교개혁 이후 세대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수많은 개혁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공통점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도 특징을 찾는 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누구를 개혁신학자의 범위에 넣을까하는 점도 문제이다. 도르트 신경에 나타난 칼빈주의 5대교리를 특징으로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독특한 이슈에 대한 표현이지 개혁신앙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는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개혁신앙이 종교개혁 당시 무너진 성경의 권위를 다시 되찾고 그 성경에 근거해 교회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회복한 것이라면 이 관점에서 각 시대를 향한 부르심(Calling)과 사역(Mission)을 생각하면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혁신앙을 가진 개혁교회는 더 이상 개혁될 필요가 없을 만큼 완벽하지 않다. 개혁신앙은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무오하지도 않다. 개혁신앙의 특징은 성경에 비추어 계속 개혁하는 것이다. 다음 라틴어 문장은 개혁신앙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가 ‘reformed church’(개혁된 교회) 곧 ‘개혁교회’이다. 개혁된 이라는 과거분사는 과거의 일처럼 생각되어 더 이상 개혁이 필요 없는 교회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개혁신앙’에서 개혁은 ‘개혁된’(reformed)의 역사적인 의미가 있음과 동시에 ‘개혁하는’(reforming) 역사적 사명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개혁교회라고 주장하며 칼빈주의를 주장하지만, 이 교회도 계속적인 개혁적인 요소가 있음을 알고 겸손히 잘못된 것들을 찾아 썩은 부분들을 도려내는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
본 글에서는 개혁신학자들이 대체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개혁신앙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 본다.


1) 하나님 중심


개혁신앙은 인간 중심적이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이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개혁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다.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자들은 구원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혁신앙은 구원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사역이라고 믿는다. 전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다고 믿음에 비해서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라고 믿는다. 개혁신앙의 ‘중생’의 개념을 살펴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복음주의 부흥사들이 성도들에게 ‘중생 받아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러나 개혁 신앙적 입장에서 볼 때 중생은 인간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다시 태어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인데, 인간 스스로가 뱃속에 들어가 다시 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서 밝히신 것과 같이 중생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느끼고 보지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같이 중생은 사람이 느끼고 볼 수 없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편에서의 사역이다. 중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이 하나님의 중생의 사역이 없이는 우리의 믿음은 불가능하다. 중생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인간이 믿음으로 구원 얻지만, 그 근원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곧 구원을 위한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3).


성경은 하나님의 전능과 인간의 책임, 선택과 인간의 의지를 모두 언급한다. 그러나 개혁신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선택, 예정 등에 대한 것에 관심이 많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써 노력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구원의 책임이 마치 인간에게 있는 듯 해 보인다. 그러나 개혁신앙은 구원을 위하여 하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는다. 바울은 이어서 13절에 구원의 진정한 근원에 대해 이렇게 선포한다. “하나님이 너희 속에 일하시고,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구원은 철저하게 인간의 일 이전에 하나님의 사역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래서 개인 구원에 대한 확신과 격려와 위로를 인간 개인의 체험과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바울이 고백하고 찬양한 것처럼(엡 1장) 구원하시고 버리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많은 관심을 둔다. 개혁신앙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고 사람 앞에서 하듯이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배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그 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데 관심두지 성도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와 음악과 예배 순서를 만들지 않는다.


개혁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적 신앙 양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유아세례’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입장은 침례교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신앙은 당사자 스스로가 고백할 때에 의미가 있기에 유아세례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신앙에서는 유아의 구원이 자신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할례의 의미가 언약에 근거한 것처럼, 신자의 자손도 언약에 근거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하셨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을 경우 3만년까지 축복해 주시겠다는 의미는 그 약속이 확실한 것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유아 세례의 의미 또한 언약의 백성임을 표하는 것이기에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치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성경은 에베소서 2장 5절에서 “은혜로 너희가 구원을 받았나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이 은혜가 언약의 관점에서 믿음의 자손인 유아에게도 주어질 것을 믿음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도 이 점을 분명하게 기술한다. “... 나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 영원한 의와 구원을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 순전한 은혜로 주신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21).


2) 하나님의 절대 주권


복음주의에서는 성과 속의 이원론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상은 불타 없어질 것이고 파선되어 가라앉고 있는 난파선과 같다고 본다. 그래서 복음을 소유한 교회는 구조선과 같아 물에 빠져 허덕이는 불쌍한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난파선을 고치고 수리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정치는 본래부터 부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관심할 바가 아니다. 문화 예술의 영역에도 기독교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재로 이원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인 대통령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한다는 기독교인의 대안이 없다. 이것은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성과 속의 이분법적인 모델은 특별히 기독교 공동체에서 확립해 온 직업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즉 해외선교사, 목사, 전도자, 선교단체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기독교 전담 사역자’(full time christian workers)로 생각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인 농부, 의사, 주부, 배관공, 그리고 판매원들은 ‘세속적’ 직업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종교적인 일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며, 더 영적이고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하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은혜를 받으면 당장 선교사나, 목사가 되려 한다. 훌륭한 주부나, 좋은 아버지, 탁월한 그리스도인 청소부가 되려는 사람은 없다. 왜 목수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직업으로서 자랑스럽지 않단 말인가!


그러나 개혁신앙에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개혁신앙은 그리스도가 단순히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분일 뿐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 구속자, 그리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한다. 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왕 되심은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모든 창조의 영역에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직업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전임 그리스도인 사역자들’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대부분의 직업을 세속적인 것으로 낙인찍는 곳이 그리스도의 주권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사역지이고 선교지이다.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하신 것은 교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우리를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사셨다. 그리고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개인을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되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을 넘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영역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는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모든 현상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전 생애를 살아가며,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구원은 실제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우리의 삶에 대한 구속 사역의 적용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물을 자신과 화목케 하셨다(골 1:20). 그러므로 구원은 온 세상을 향한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 곧 산업과 상업의 영역까지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하여 이 영역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것을 의무로 생각한다. 사업을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소명(calling)으로 본다. 직업은 경건한 삶이 되어야 한다. 검소, 절약, 정직, 성실과 같은 사업적 미덕들이 실천됨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을 나타내며 온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나타내야 한다. 미국 아이오와 주 펠라(Pella)라는 자그마한 도시에 소재한 버미어 회사(Vermeer Mfg Co.)는 3천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큰 세계적인 회사인데 농업과 임업을 위한 중장비를 생산하는 회사이다. 이 회사는 일 자체와 서비스 활동 속에서 자원에 대한 청지기적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또 회사가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웃에 대한 봉사, 질적으로 우수한 기술, 공정한 가격, 고객에 대한 봉사, 종업원들과 이익의 공유, 지역 사회에 대한 자선 행위, 그리고 기업의 성장만을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외부로부터 꾸어 쓰는 것이 아니라, 회사 자체의 재원만으로 사용하거나 한정된 부채 안에서 건실하게 기업을 경영하는 방침을 가지고 있는 회사로 이름나 있다.


한국 교회는 바로 이 개혁신앙의 세계관이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한국 교회는 19세기 말엽 전 세계를 휩쓸었던 복음주의의 성령의 운동의 큰 영향 하에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신앙은) 신성하며, 세상(일)은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삶 전체가 종교이며,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이며 기도라는 성경적 진리를 충분히 강조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개혁신앙을 받아들여 설교와 성경공부 등 다양한 기회를 통하여 개혁신앙의 기본 개념과 원리, 기독교적 세계관, 사회관, 문화관 등을 가르쳐 창조주와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제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도록 교육해 나가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 부분이 취약하다. 해방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나라가 유린되고 파괴된 후 50ㆍ60년대를 거치는 동안 빈곤의 악순환을 경험했고 어려운 시절을 지냈기 때문에 영혼이 구원받고 이생에서 잘 되는 복을 받는 신앙이 절대적인 관심사였다. 21세기에 접어든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의 단순한 기복적인 복음주의 경향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세상을 향한 관심이 없다. 멸망해 버릴 세상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렇지만 개혁신앙은 인간의 구원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생각한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기독교인이 소금과 빛 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기대한다. 교회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말씀 선포를 통해 성도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살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모두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 직업 전선은 단순히 돈을 벌어 선교 헌금을 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할 사역지이다.


3) 성경 중심


루터란들은 종교개혁의 내용적 원리(material principle) 곧 이신칭의를 강조했다. 그들은 교리에 ‘성경’에 관한 명확한 진술이 없다. 성경 안에 포함된 내용만 중요하지 그것이 정경인지 위경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결과이다. 개혁신앙에서는 공식적 원리(formal principle)라는 용어로 성경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성경 자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개혁교회 교리는 성경에 대해 별도의 항목으로 진술하고 있다(프랑스 신앙고백 1559, 제2스위스 신앙고백 1577, 아일랜드 조항 161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6, 스위스 일치신조 1675 등). 이는 개혁교회가 얼마나 성경을 강조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 준다.
개혁신앙을 가진 교회는 복음주의로부터 교리를 성경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종종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 비판은 결코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여러 개혁 신앙고백 자체가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루터교도들은 하나의 교리문답서와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지만, 개혁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60여개의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 개혁교회는 하나의 교리모델을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리도 성경에 의해 계속 교정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러 복음주의 교회들은 교리 자체를 인정하는 것부터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있다고 비판하지만, 사실 그들도 나름대로의 교리적 신앙 고백적 진술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 분이거나 없다고 우길 뿐이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성경 이외의 그 어떤 교리와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교회들은 한 목사 자신의 교리와 신앙고백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성경 외의 어떤 교리도 인정하지 않기에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주의와 문자주의에 빠지게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어떤 지침이 필요하고 성경을 이해하는데 안내서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리와 신앙고백이다. 교리와 신앙고백은 성경의 권위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좋은 교리이고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용어로 말해보면 성경은 ‘규범을 만드는 기준’(norma normans: the ruling rule)라면, 교리나 신앙고백은 ‘기준으로 만들어진 규범’(norma normata: the ruled rule)이다. 교리나 신앙고백은 언제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성경에 종속되고 상대적 권위만 가질 뿐이다.


또 개혁신앙은 복음주의에서 강조하는 개인의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강조한다. 복음주의가 합리주의자들이 좋아했던 알미니안주의를 받아들이고 복음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반응을 요구함으로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선교와 봉사도 하나님의 영광과 감사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 구원과 관련시키려하기 때문에 융통성을 잃어버리고 율법주의적으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선교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자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그런 것이다. 또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한 자인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정죄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복음주의자들은 반율법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다. 예배나 성례와 설교에 대해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으면 모든 것들이 필요 없다고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개혁신앙은 인간이 무슨 경험을 하던 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느냐가 더 중요한 신앙생활의 기준이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빠져 들어가거나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식의 부족 때문이다.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했던 이장림 이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앙생활에서 성도의 경험과 느낌은 있지만 그것이 기준이 되어 성경을 해석하게 된다면 잘못이다.


4) 교회 중심


개혁신앙은 하나님 나라 확장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고 개혁신앙은 교회를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말씀 선포와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던 것이다(마 18장). 개혁교회가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교회관을 개혁하면서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루터는 교회를 단순히 성도들의 모임(communio sanctorum)으로 인식했지만, 칼빈은 인간의 모임 이전에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institutio)로 보았다. 교회가 단순한 회중들의 모임을 넘어 하나님이 의도하신 기구라는 의미에서 교회의 구조를 인정한다. 루터가 본래 구원론에 있어 ‘만인제사장론’을 말했지만 사실은 영적인 의미에서 사용했지 교회론에 있어서 교회 봉사의 직분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로 적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경건주의자와 신령주의자들이 ‘만인제사장론’을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라고 해석하고 적용 하는 것은 신학적 오류이다. 또 칼빈은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했지만 우리 인간이 논할 수 있는 것은 ‘보이는 교회’이며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못 박았다. 이 세상의 교회가 불완전하지만 제도적 교회에 충실하면서 최대한 성경적인 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한 자가 칼빈이고 개혁신앙을 가진 자들이 취한 행동이다. 재세례파는 순수한 그리스도인들만의 교회를 추구하면서 분리주의적 교회를 추구했으며, 17ㆍ8세기 경건주의 운동도 보이지 않는 교회를 역사 가운데 추구함으로 퀘이커교도와 형제단들이 생겨났고, 일본에서는 우찌무라 간조를 중심으로 한 무교회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이 사상은 한국에도 들어와 김교신과 함석헌 등에게 전수되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보이는 이 세상의 교회의 기구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강조하는 쪽은 교회의 제도와 운영에 관심이 없지만, 개혁교회는 건강한 교회 건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개혁신앙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하고 세상에서 성경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연구했다. 그 관심은 교회의 ‘구조’와 ‘정치’와 ‘운영’에 대한 것이었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바른 ‘장로 제도’를 부활시켰고, 목사와 집사 직분을 지속되는 항존 직분으로 삼았다. 개혁교회에는 목사 위에 다른 목사가 군림하는 위계질서(hierarchy)를 허용하지 않으며,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계급 혹은 등급 개념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개혁교회는 지 교회의 독립성을 기본으로 함과 동시에 교회의 연합과 보편성(catholicity)을 최대한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는 제도이다. 교회 연합을 위하여 시찰과 노회와 총회 제도를 두고 있는데 장로교는 상회와 하회 개념이 있지만, 개혁교회는 다수회와 소수회가 있을 뿐이다. 다수회가 지역에 있는 개체교회를 명령할 권한이 없다. 한국 장로교는 이 부분에서 개혁 신앙적이지 못하다. 상회는 하회보다 높이 있으면서 군림하려는 경향이 있고, 섬기는 직분이 아니라 영광을 누리는 자리여서 선거 운동(부정적인 방법도 자행하기도 함)을 통해 경쟁을 한다. 이런 모습은 불신자들에게서도 지탄의 대상이 된다. 서리집사와 장립집사 그리고 장로의 관계도 교회법에는 그렇지 않지만 실제로는 위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서리집사 개념은 매우 특이하며 성경적인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서리집사의 역할은 단순한 ‘호칭’에 불과한 실정이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으면 성도라고 부르기 어색하니, ‘집사’라 불러주기 위해 임명하는 직분이다.


그러면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해 개혁교회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를 가지고 있는가? 개혁교회의 정치 형태는 로마 천주교ㆍ성공회ㆍ장로교와 침례교ㆍ회중 교회의 중간에 위치한다. 성경적 교회 정치 제도를 찾은 결과 교회의 힘의 균형을 찾았다. 예수님이 주인 되시고 성령님이 다스리도록 하는 가장 좋은 제도를 연구한 결과가 개혁교회 시스템이다.


개혁교회가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교회의 표지는 바른 ‘말씀’과 바른 ‘성례’와 바른 ‘권징’의 시행이다. 그 중에서도 ‘권징’ 제도는 칼빈이 직접 교회의 표지에 넣지는 않았지만(마틴 부쪄와 낙스는 세 번째 표지로 넣음),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권징을 세 번째 중요한 표지로 넣었다. 권징은 본래 중세 로마 천주교가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렇지만 개혁교회는 교회의 영적인 권징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권징은 교회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본래 목적은 목회적 보살핌을 위한 것이다. 교회의 성결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권징은 잘 실행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성이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세속화를 부채질했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이미 권징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한 교회의 장로가 죄를 지었지만 아무런 권징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슬쩍 교회를 떠나 버리면 그만이다. 그가 옮겨간 교회는 과거를 묻지 않고 두 손 들고 환영한다. 교회는 수적으로 늘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개혁교회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교회의 제도와 다스림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다. 교회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에 비해 복음주의는 개 교회의 개혁과 성경적인 제도와 다스림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교회 바깥으로 많이 나갔다. 루터는 교회의 표지로 말씀과 성례를 강조했는데 삶의 성화로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로마 천주교의 공적주의와 행위로 구원 얻는 부분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많은 제도를 국가에 맡겼다. 신학교육과 목사의 관리와 월급을 국가 종교국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그에 비해서 칼빈은 권징을 강조했다. 권징은 성도들의 훈련과 단련을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목회를 할 때 재세례파 교인들이 삶을 강조하는 칼빈의 교회로 많이 돌아왔던 것은 주목해 볼 일이다. 한국 교회는 권징이 없다. 곧 교회의 순결을 상실하고 있다. 권징이 없는 교회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분열을 조장한다. 교회는 생존을 위해 경쟁을 하게 되고 천박한 자본주의의 적자생존을 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 한국 개신교의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지만 되돌릴 길이 없다. 결국 사람들의 눈에는 신앙의 표현이 교리가 아니라 신앙생활이며 무엇보다도 기독교 공동체 그 자체였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개혁신앙만큼 충분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했던 그리스도인들만큼 교회의 순수성과 성도들의 삶에 대해 고민한 자들은 없었다.


5) 교리와 삶의 일치


개혁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적인 이론만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 받았다. 그러나 개혁신앙은 오히려 반대이다. 개혁신앙은 믿음보다 행위, 교리보다 윤리를 강조한다면서 바리새적이고 율법적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시 개혁신앙의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성화와 윤리에 대한 것이다. 개혁교회가 십계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로마 천주교와 근본주의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개혁신앙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에게는 감사의 차원으로 율법이 재탄생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죄, 구원 그리고 감사로 구성되어 있다. 십계명은 바로 세 번째 감사하는 삶에서 다루어진다. 개혁교회는 예배 시간에 반드시 십계명을 낭독한다. 한국 교회에는 이런 전통이 사라진지 오래다. 계명과 율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십계명의 서론에 기초해 십계명을 강조한다. 십계명의 서론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 교회 찬송가 뒤편에 있는 십계명에는 이 서론이 없거나 있더라고 일부는 점으로 생략되어 있다. 십계명에는 본래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1)라고 기록되어 있다. 곧 십계명은 바로 이 서론이 없으면 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론을 이해하는 성도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계명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교훈해야 한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제자도(마 28:19-20)에서도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개혁신앙은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신앙은 삶과 함께 간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인 지식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인식은 행동과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신앙은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혁신앙은 개혁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는 개혁 신앙자의 삶의 현장이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부분에서 이원론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믿는 바와 행동하는 바가 충돌하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6) 기독교 세계관


개혁신앙은 성경적 삶의 영역이 신앙인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개혁신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적극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세계관’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생각한다. 기독교적인 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얘기다. 혹은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기독교적 세계관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소위 원시복음(창 3:15)을 주셨다. 사실 이 원시복음에는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세상 문화와 하나님의 자손이 서로 적개심을 품고 대립하도록 하신 것이 핵심이다. 세상과 교회가 대립하는 것은 원시복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의가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떠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변혁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세상을 보는 기독교 세계관은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는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특히 오늘과 같은 복잡한 사회는 직장과 교회, 다양한 가정의 형편 속에서 긴장과 갈등과 충돌이 만만치 않다. 이 속에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신앙적 가치로 해석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좌절하거나 타협하기도 한다. 이런 싸움에서 기독교인들 가운데 세 가지 양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기독교적 안경은 ‘이원론적이고 수직적 세계관’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하나님과 멀어진 죄스러운 것이다. 성도는 가능한 죄로 물든 세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땅보다는 하늘에, 이승보다는 저승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보다 중요하고 이 시대의 일보다 영원한 일이 훨씬 중요하다. 구원은 사람의 영혼에만 해당되고, 세상은 악한 사단에게 맡겨져 마치 침몰하고 있는 배와 같다고 믿는다. 이미 무너져가는 배를 고칠 마음은 없고 전도해서 배로부터 구출하는 일에만 관심한다. 무디가 주장한 것처럼 세상은 난파선에 불과하다. 교회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배를 수리하거나 멋진 항해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배는 물에 빠져가고 있고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수직적인 관계에만 관심이 있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수평적인 영역에는 관심이 없다. 신령주의자들은 특별은총만 강조하고 일반은총에는 관심이 적다. 죄악 된 현세와 세속의 역사와 문화를 정죄하는 나머지 반지성적이며 반문화적인 경향을 보이며, 영적인 삶에 치중하여 윤리를 소홀히 한다. 대체로 선교 지향적이고 개인적 신앙을 강조하는 신령주의자들과 복음주의적 교회가 이런 관점을 견지한다.


두 번째 기독교적 안경은 ‘혼합적이고 수평적인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한다. 교회가 세상의 문화와 사회적 문제에 관심해야 하고 한 몸이 되어 평화와 의를 추구한다. 하늘나라에는 관심이 덜하고 이 땅에서의 삶이 중요하다. 신기루와 같이 확실하지 않은 미래보다는 구체적인 현재가 그들의 관심사이다. 구원은 정치와 사회적인 구조를 좋게 만드는 것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투쟁하며 평화를 추구하며 환경 운동을 한다.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하며 세계의 기아와 인권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의 수평적인 관계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이 이러한 견해를 취한다.


세 번째 기독교적 안경은 ‘개혁신앙적인 세계관’이다. 성경을 색안경을 끼지 않고 전체적으로(Tota Scriptura) 바라보면 ‘이원론적이고 수직적인 세계관’과 ‘혼합적이고 수평적인 세계관’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개혁신앙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인이 세상 안에 서 있지만(in the world)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not of the world)는 점을 주장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인인 영과 육을 구원함을 믿는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의 구원 사역은 전체 창조물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개혁신앙적인 세계관은 미래에 약속된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일시적으로 머물고 있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도록 애쓴다. 개혁 신앙적 세계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속한 세상의 전통과 문화에서 주어지는 세계관을 무의식적으로 생각 없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변 문화와 전통의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이고 변혁적인 관점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가 이것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 개혁 신앙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5. 개혁신앙과 한국 교회의 관계와 영향


한국 교회는 복음주의적인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로 인해 장로교 고유의 개혁신앙을 비교적 적게 물려받은 것이 사실이다. 평양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 1864-1939) 선교사는 미국의 구파와 구학파의 전통을 따른 찰스 핫지(C. Hodge)와 워필드(B. B. Warfield)의 노선에 선 개혁신앙을 분명하게 가진 분이었지만 세계적인 부흥운동의 분위기 가운데 밀려들어 온 복음주의적 신앙과 삶의 분위기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박형룡도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을 고수했지만, 엄밀한 의미의 개혁신앙을 좋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개혁신앙은 박윤선 박사를 통해 한국에 전달되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그는 미국 장로교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출신으로 짧지만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수학했고, 개혁신앙을 한국 장로교가 따라야 할 신앙으로 주목했다. 그는 세계적인 칼빈주의 변증학자였던 반틸(C. Van Til) 교수에게 배웠고 네덜란드의 개혁신앙을 소개받았다. 그는 고려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동안 고신 교회와 목사들에게 개혁신학을 전수했다. 1960년 고려신학교를 떠나 총회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을 가르쳤으며, 1979년 이 후 합동신학교를 통해 개혁신학을 전파했다. 지금도 개혁신앙적인 영향이 가장 분명한 세대는 총회신학교에서는 60ㆍ70년대, 곧 20년 동안 배운 50ㆍ60대 목사들이다. 합동신학교에서는 40세와 그 이하 젊은 교역자들에게서 영향이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다.


그 후 고신의 이근삼 교수가 박윤선 교수처럼 개혁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네덜란드 자유대학으로 갔다. 그는 박사학위를 할 때 화란개혁교회와 관계를 맺게 되고 깜뻔(Kampen)에 있는 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와 교류하다가 1968년 자매결연을 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네덜란드자유개혁교회는 한국에 신학교 교수 선교사를 두 명 파송해 10년 동안 고신대학에서 개혁신앙을 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동시에 한국에서는 학생들을 깜뻔 신학교에 보내 개혁신학을 배워 오도록 했는데 1964년에 차영배, 1966년에 허순길, 1973년에 박성복과 이보민, 1982년에 변의남, 1985년에 유해무와 변종길, 그 후 신득일, 임경근 , 김재윤 등 많은 분들이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대학과 교회에서 개혁신앙을 가르치거나 목회하고 있다. 차영배 교수가 총신에서 강의하면서 보낸 학생들이 신학적으로 자유화된 깜뻔의 다른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이들은 주로 총회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정훈택, 김지찬, 한천설, 안인섭 등이 있다. 암스템담의 자유대학에서도 많은 분들이 개혁신학을 공부했다. 자유대학이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헤르만 바빙크(H. Bavinck), 도이여비얼트(H. Dooyeweerd) 시대에 개혁신앙을 꽃 피웠지만 1970년대 이후 자유화되어 개혁신앙을 찾아보기 힘들다. 자유대학 신학부는 철학부 교수들보다 신앙이 없다는 얘기를 할 정도이다.


한국 장로교는 이렇게 저렇게 개혁신앙과 계속 관계를 맺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신앙적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복음주의적 경향이 더 뚜렷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신학교에서는 고재수(N. Gootjes) 교수와 박도호(J. M. Batteau) 교수가 거의 10년을 개혁신학을 가르쳤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네덜란드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고신교회 안에서 조차도 개혁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답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다양한 원인이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복음주의적인 영향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임은 자명해 보인다. 한국 교회는 해방 후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어려움 가운데 기복적인 복음주의가 제공하는 신앙과 삶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특별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부흥과 교회 성장주의가 교파를 초월해 한국의 모든 개신교에 주도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교회만 성장시켜 놓으면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현실 가운데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신학교의 교수보다 목회 현장에서 성공한 목사를 선생으로 두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황 가운데 아무리 좋은 개혁신앙적인 설교와 강의를 해도 학생들은 들으며 ‘말은 옳지만, 그것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나?’라며 뱉어 버리고 교회 현장에 나가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며 새로운 신학과 방법론을 배운다. 두 번째 이유는 개혁신앙적인 삶의 모범과 목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목사들은 대부분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목회를 한 분은 고려신학교 은퇴교수인 허순길이 거의 유일하지만 호주 현지인 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한국에 미친 영향은 거의 미미하다. 그가 경험한 개혁교회를 바탕으로 책을 냈는데 그나마 많은 분들에게 개혁교회의 신앙과 삶을 간접적으로 그려 볼 수 있어 귀한 자료이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개혁신앙의 교리뿐만 아니라 삶이 더 필요하고 그 모범이 더 요구된다고 하겠다. 감사한 것은 여기 저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금도 개혁신앙적인 목회를 시도하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파를 초월해 일어나고 있는데, 앞으로 한국 교회에 개혁신앙이 큰 물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6. 잠시 나가며


우리는 지금까지 복음주의 일색인 한국 교회에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개혁신앙이 필요함을 살펴보았다. 개혁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개혁신앙은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교회와 세상을 향한 개혁 신앙적 관점과 삶은 우리에게 절실하다. 개혁신앙이 추구하는 교리와 정신은 어느 특정 교단과 교회를 넘어선다. 개혁신앙은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기독교 진리이다. 그렇지만 개혁신앙은 국가와 교단과 교회와 개인의 차이로 인해 여러 가지 오해와 비난을 받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개혁신앙에 대해 편견이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개혁신앙의 내용과 삶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사도적 신앙고백에 기초한 종교개혁 신앙을 그대로 전수 받은 개혁신앙이 얼마나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지 그 신앙고백들을 읽어 보면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이미 개혁신앙은 고신을 중심으로 총신과 합신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실재적인 영향력은 약한 것이 현실이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가 양적인 교회 부흥에만 여전히 관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신앙이 교회를 부흥시키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개혁신앙을 따르는 교회와 신앙적 모델이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이제 구체적인 개혁신앙적인 삶의 모습들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개혁신앙적인 삶이란 어떤 것인지 모델이 필요한 때이다. 개혁신앙인은 생명에 대해 어떤 자세이며 실제로 그것을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는가? 개혁신앙이이 추구하는 부부관계는 어떠하며,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는가? 공부, 운동, 올림픽, 음악, 과외, 주일성수, 가정예배, 술, 담배, 등등의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는가? 개혁신앙인은 경제생활을 어떻게 하는가? 이런 구체적인 개혁신앙적인 삶의 모델을 찾아본다. 이 내용은 다음 글에서 살펴본다.
* 이 글은 [SFC간사저널] 2008 겨울 호에 실렸다.
출처 : 다우리교회
글쓴이 : 임경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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