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말라하는 인간
요 4: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
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
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
사람의 몸은 절반이 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의 몸 안에는 1.25갤런의 피가 있는데 그 가운데 3/5이 수분이라고 합니다. 그 수분 때문에 사람은 해갈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그 수분이 없으면 탈수증에 빠지게 되어 결국 목말라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끊임없이 물을 마셔야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신의 탈수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의 탈수증입니다. 이 영혼의 탈수증은 사람만이 느끼는 현상입니다. 짐승은 영혼의 갈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승은 목마를 때 목만 축이면 해갈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육신의 갈증도 느끼지만 동시에 영혼의 갈증도 느끼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혼의 갈증을 채워야 살아가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목말라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늘 부족함을 느끼고 무엇인가를 더 채워보고자 하는 갈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욕망의 바다는 끝이 없기 때문에 적절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삼킬 듯이 다가오고 밀려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합니다.
권세로 채우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을 가지려 하고 그리고 권세를 가지고 공허한 공간을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은 막강한 힘을 소유하여 지배하려고 목말라 합니다. 짐승은 힘을 가지고 한 번 지배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 번 가진 힘과 권세를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권세를 오래도록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 안간힘을 쓰는 자체가 사람들의 갈증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그러다 그 권세가 사라지게 되면 그 갈증은 더욱 증폭이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갈증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이 갈증의 발자취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권세를 쟁취하려고 몸부림을 쳤고 한번 쟁취한 권세를 끝까지 유지하려고 몸부림친 흔적으로 역사는 짜여 있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 같은 몸부림의 흔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물질로 채우려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많은 물질의 소유를 통해서 영혼의 갈증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짐승은 배고플 때는 사정없이 잡아먹지만 일단 배가 부르면 손을 놓습니다. 그 먹이를 다른 동물들이 와서 먹어도 바라보면서 그냥 놔둡니다. 그런데 사람은 배가 불러도 계속 모아갑니다. 축적하고 쌓아놓고 저장합니다. 그리고 그 물질을 오래 간직하려고 장치를 마련합니다. 탈세, 차명계좌 등으로 숨깁니다. 반면 국가에서는 그것을 찾아내려하고 밝히려하니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확천금을 가지려고 주식에 투자를 했습니다. 그는 눈만 뜨면 신문을 먼저 찾아 주식란을 읽었습니다. 그는 그날의 주식 동향에 따라 웃고 울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해변을 걷다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주웠습니다.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1년 후 신문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식란부터 보았습니다. 어떤 것이 일 년 후 폭등할 것인가를 미리 보았습니다. 혼자만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다음 장을 넘기려는 순간 검은 글씨의 부고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보니까 낯익은 사진과 이름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순간 놀라 잠이 깼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며 허기지며 갈증 나는 삶입니까? 갈증을 채우려하면 할수록 더 공허하고 욕망의 바다는 커져만 가고 채워지지 않습니다.
페니실린을 개발한 알렉산더 플레밍은 가난해서 연구실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그 연구실에서 곰팡이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깨진 유리창으로 곰팡이 포자가 날라 왔습니다. 그 포자를 현미경으로 보니 그 속에 페니실린의 원료가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낡은 연구실 을 보고 “좋은 환경이었으면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때 플레밍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바로 이 열악한 환경 때문에 페니실린을 개발하게 되었다네.” 반드시 넉넉하고 크고 풍요한 물질만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 속에서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명예로 채우려합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냄으로서 이 영혼의 갈증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권사, 장로가 되는 것을 진급하는 것으로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들어보면 어떤 분은 “아직도 장로를 못 땄냐”고 합니다. 호랑이는 산속 높은 바위에서 크게 포효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오래 남기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그래서 비석을 세우고 자서전을 쓰고 자신을 오랫동안 알리려고 애를 씁니다.
옛날 그리스의 파이러스(Pyrrhus)왕은 로마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신하 중 키네아스(Cineas)라는 충신이 극구 말렸습니다. “폐하 로마를 공격하고 나서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시실리까지 점령해야지” “그 다음은요?” “아프리카를 건너가 칼타고까지 점령해야지” “그 다음은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까지 판도를 넓혀야지” “그 다음은요?” “내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으니 큰 잔치를 베풀고 실컷 술을 마셔야지.” 그때 충신이 진심어린 진언을 드렸습니다. “폐하, 그것이 소원이라면 이미 폐하의 이름은 지금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오늘 그 잔치를 베풀고 오늘 술을 마시십시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소원이라면 그 많은 세월을 소모하고 수고하고 인명을 희생시키고 전쟁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할 일이 필요 할까요? 인간은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세상에 과시하고자 하는 무서운 욕망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름다움으로 채우려합니다
사람은 때로 아름다움을 통해서 채워보려고 합니다. 오늘날은 아름다움이 최고의 우상인 듯합니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한다면 순교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건 수술도 마다하지 않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에 투자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맹목적으로 이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 예뻐진다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어떤 부인이 딸의 결혼식 날 미장원에 갔습니다. 30분밖에 시간이 없었는데 머리를 말아야 더 예뻐진다는 미용사의 말에 그만 머리를 내 맡겼더니 3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공기가 썰렁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 부인은 딸 결혼식을 비디오로 보아야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면의 세계를 가꾸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모두 외적인 모습을 가꾸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이 아름다워지는 일은 오늘 우리시대의 최대의 우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성으로 채우려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공허한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려고 애씁니다. 그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에로스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영국 에드워드 8세는 미국의 심프슨 부인을 사랑한 나머지 325일 만에 대영제국의 왕관을 벗어던지고 일개 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도, 그 시대에 주어진 사명도, 민족을 대표하는 자신의 위치도 다 포기하고 사랑을 찾아갑니다. 솔로몬도 영적 해갈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품이 아니라 여인들의 품에서 이 갈증을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후궁이 700명이었고 첩이 300명(왕상 11:3)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도리어 그 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노년에 고백한 것이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는 것입니다. 뱃사공이 망망대해를 떠다니다가 아무리 갈증이 심해도 바닷물을 떠 마시지 않는 것은,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떠 마시면 더 큰 갈증 때문에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신앙에서 떠난 솔로몬이 그 영혼의 갈증을 성의 욕망으로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큰 갈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결국에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길과 방법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이 갈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사람들에게 끌려왔습니다. 당시 모세율법에 의하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은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환경임에도 대낮에 그 일을 감히 감행하였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간음을 자행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그만큼 그 여인은 갈증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맞바꿔서라도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영혼의 갈증을 채워보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거치면 3일이면 갈 수 있는 그 길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동편을 우회하여 6일이나 되는 길로 돌아서 갔습니다. 그 땅을 부정한 땅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이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앗수르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끌고 간 후 이방사람들을 끌어다 이주시킵니다. 남아있던 사마리아 여인들이 이방남자들과 결혼함으로써 문화, 종교, 피가 섞이게 됩니다. 정통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정통성을 잃고 부정해진 것입니다. 이후 천년동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예수님이 그곳에 가셨습니다.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왔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자, 여인은 “왜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내게 생수를 구하였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게 그 생수를 주십시오.” “네 남편을 데려오라.”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맞도다. 너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만나 부부가 되게 하심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도록 하셨습니다. 영적인 갈증도, 성적인 갈증도, 인생의 갈증도 다 해갈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음에도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이 여인은 얼마나 더 많은 남편을 두게 될는지 모릅니다. 솔로몬은 천여 명의 첩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해갈이 아니고 더 깊은 갈증에 묻혀버리게 되었고 그는 그 욕망의 물결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모두가 헛되다고 외치며 그 경랑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방법으로 허기진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해갈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 이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리라.” 물론 이 물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질도 다함이 있습니다. 부자 삼년 못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어지는 날에는 갈증이 증폭됩니다.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십년 지나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녀 때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넉넉히 잡아도 십년일 것입니다. 십년 지나면 벌써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 금을 메우느라 여러분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그리고 금이 가야 정상입니다. 고려청자도 자글자글 금이 가니까 청자입니다. 꽃도 열흘 있다가 시드니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일 년 내내 꽃이 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머리도 희어지고 인생도 깊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막겠다고 하니까 갈증만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 경험하고 다 깨닫고 다 체험한 후 철이 든 후에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고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전1:2)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설명하려고 하신 것이지만 이 말씀은 모든 것의 근원은 예수이시고 모든 것의 길은 예수님에게로 통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데서 아무리 찾아봐도 길은 없다. 오직 내게 올 때만이 영생하는 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는 줄 알고 여러 곳을 찾아보고 엉뚱한 길을 갑니다. 다섯 남편 얻어 보고 아름다움을 추구해보고 물질, 권세, 성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집을 나갔던 탕자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잃어버렸던 길을 되찾습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4세기 활동했던 성자 어거스틴은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십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3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안돌아왔습니다.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때 암브로시우스라는 감독이 격려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 용기에 힘입어 15년을 기도했습니다. 15년 만에 어거스틴은 성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편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15년 동안 끝없이 방황했던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 고백합니다. 여기서 집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단 하루도 평화가 없었습니다.”
오늘 신앙 생활하는 우리도 얼마나 방황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에 귀를 기웃거리는지 모릅니다. 모두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자리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 그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리라.” 영생하시는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때 여러분에게 더욱 충만한 생명력을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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