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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화화 논쟁 - 목창균 교수

by 【고동엽】 2021.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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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화화 논쟁


목창균 / 서울신대 교수


1.들머리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당대 제일의 신약성서학자로서 현대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오그덴(Schubet M. Ogden)에 따르면, 불트만의 공헌은 어떤 기준에 의해 판단되든지 간에 과소 평가될 수 없으며, 그의 신학은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불트만이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신학적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어야 하는가였다. 불트만은 두가지 접근방법을 통해 이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다. 신약성서의 비신화화(非神話化)와 실존론적 분석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불트만의 분석인 동시에 해결책이었다. 전자가 소극적 방법이라면, 후자는 적극적 방법이다. 비신화화는 "1세기의 신화적 세계상(世界像)과의 관계에서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이 세계상이 신약성서에 표현된 실존에 대한 이해에 얼마나 불필요한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신화적 표현이나 사고로 둘러싸여 있는 복음의 진리를 그것으로부터 벗겨내는 것이다. 한편, 실존론적 분석은 1세기의 개념, 언어, 의미들을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고 인간실존의 현실 상황에 일치하는 용어들로 전환하는 것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분석은 학계에 다양한 문제점을 제기했던 동시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비신화화론은 바르트의「로마서주석」에 비견되는 파문을 신학계에 던졌다. 1941년에 불트만이「계시와 구원의 사건(Offenbarung und Heilsgeschehen)」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비신화화의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이에 대한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문에서 불트만은 마르틴 켈러 (Martin Kahler)의 'Historie '와 'Geschichte'사이의 구별에 근거하여 계시가 사건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그 사실의 보도만으로는 현대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과 신약성서에는 신화가 많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 논문은 그 후「신약성서와 신화론(Ne-ues Testament und Mythologie)」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비신화화 논쟁은 1941년에 독일 루터교회 내부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럽 대륙의 신학계에서 널리 전개되었다. 1952년 독일 루터교회 총회는 불트만의 학설을 이단으로 규정했고, 감독회의는 비신화화론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대는 비신화화 논쟁의 시대라 해도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신화화론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일어났다. 그것은 근 20년 가까이 계속된 20세기 최대의 신학 논쟁으로 성서신학은 물론 조직신학, 실천신학 등 신학의 전 분야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불트만의 생애와 신학적 배경을 서론적으로 개괄한 후 신약성서와 신화론 에 근거하여 그의 비신화론의 핵심 내용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비신화화론에 대한 논쟁점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려고 한다.


Ⅱ .펼침


1. 생애
불트만은 1884년 8월 20일 독일 올덴부르그(O1denburg)의 비펠드스테데(Wiefeldstede)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할아버지의 경건주의적 유산과 아버지의 온건한 루터교 신앙으로 이루어진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불트만은 전 생애를 학문세계에서 보냈던 인물이다. 그는 1895년 올덴부르그 인문고등학교(Gymnasium)에 입학하여 헬라어로 로마문학을 공부했다. 당시 그곳에는 후일 실존주의 철학자로 활약했던 야스퍼스(Karl Jas-pers)도 재학중이었다. 그 후 불트만은 튜빙겐대학, 베를린대학, 마르부르크대학에서 공부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궁켈(Herman Gunkel)밑에서 구약성서를, 하르낙(Adolf von Harnack) 밑에서 교리사를 공부했다. 마르부르크대학에서는 율리허(Adolf Julicher)와 바이스(Johannes Weiss)밑에서 신약성서를, 헤르만(Wilhelm Herrmann) 밑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성서신학교수 대부분은 종교사학파에 속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 그는 1910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하이트 뮬러(Wilhelm Heitmuller)였으며 학위논문은 "바울의 설교양식과 견유 및 스토아학파의 논증화법(Der Still der Paulinischen Predigt und die Kynisch-stoische Diatrike)"이었다. 1912년 그는 "테오도르 몹수에스티아의 주석학(Die Exegise des Theo-dor von Mopsuestia)"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교수자격 심사를 통과했다.


불트만은 1912년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신약성서학 강사로서 교수생활을 시작하여 1916년에는 브레슬라우(Bres-lau)대학의 신약성서 조교수가 되었다. 1920년에는 종교사학파의 성서신학자 부세트(Bousset)의 후임자가 되어기센(Giessen)대학의 정교수로 잠시동안 활동했다. 1921년 스승 하이트 뮬러의 후계자로 모교 마르부르크 대학의 신약성서 교수로 부임하여 1951년 은퇴했다.


신약성서학자로서의 불트만의 학문적 방향과 위치는 1921년에 출판된 「공관복음 전승사(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를 통해 분명하게 예시되었다. 그는 궁켈의 양식비평적 분석과 역사비평적 방법을 도입하여 공관복음서 안의 모든 자료의 성립과 역사를 비판 연구했다. 그는 전승된 예수의 말씀 대부분은 초대 교회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구성한 것이며, 공관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전기가 아니라, 교회의 신앙과 예배를 위해 만들어진 예배서라고 주장했다. 복음서는 교회의 케리그마이며, 설교된 그리스도는 역사의 예수가 아닌, 신앙과 예배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예수에 대한 공관복음서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에 부정적이었다. 「공관복음 전승사」는 양식사적 성서이해의 길을 열었다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공관복음서에 대한 양식비평적 분석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6년에 출판된 「예수(Jesue)」에서 불트만은 신약성서가 예수의 전기로서 신뢰할만한가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부정적인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그는 예수의 인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1933년에 출판된「신앙과 이해(Falth and Un-derstanding)」는 불트만의 첫번째 논문집으로 1924년에서 1930년 사이에 저술된 모든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신앙과 이해는 불트만의 신학적 삶의 과제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시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 즉 신앙과 이성이 조화될 수 있도록 해석하려고 했다. 이 논문집을 통해 불트만의 사상발전에 미친 하이데거의 영향이 잘 나타나있다.


신약성서와 신화론은 1941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으며, 그 때의 제목은 '계시와 구원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1948년에 출판된 「케리그마의 신화(Kerygma and Myth)」에는 "신약성서와 신화론"으로 개제(改題)되어 수록되었다. 분량은 비록 작지만, 이것은 불트만의 평생에 걸친 연구의 축소판이며 비신화화논쟁의 도화선이 된 작품이다. 불트만은 역사비평과 양식사 비평의 방법을 사용하여 신화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신약성서의 내용과 언어를 재해석한것이다. 걸작품으로 평가받는 「요한복음서 주석(The Gospel of john, 1941)」과 「신약성서신학」(The Theology of New Testament, 1948, 1953)에서 불트만은 신약성서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전개했다. 불트만은 제4복음서저자가 전승을 비신화화했으며 실존론적 해석을 암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엄격히 구별했다. 1955년 영국 에딘버러대학에서 행한 기포드 강연(Giford Lectures), "역사와 종말론(History and Eschatology: The Presence of Eternity,1957)"은 종말론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그의 현재적, 실존적 종말론이 제시되고 있다. 불트만은 세상의 종말을 현재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 또한 불트만 사상연구에 중요한 것은 "해석학의 문제(The Problem of Hermenutics, 1950)"에 대한 논문과 비신화화와 역사적 예수에 관한 그의 후기 논문들이다. 이 이외에도, 불트만은 많은 저서와 논문을 저술했다.


2.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의 신학사상은 결정 적인 변화없이, 일관성을 지니면서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 사상적 발전에 큰 변화가 많았던 바르트와는 달리, 불트만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입장을 한결같이 유지했다. 그의 신학적 발전은 자유주의신학적 배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튜빙겐, 마르부르크, 베를린대학에서 궁켈, 하르낙, 율리허, 헤르만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피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일어난 변증법적 신학 운동에 참여한 이후에도, 자유주의신학의 합리적인 방법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신학에 대한 철학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판적 방법을 평생 자신의 성서연구에 수용하여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의 철학을 도구로 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신학인 실존신학을 형성했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대인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신약성서학자로서의 자신의 평생 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초기에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양식사비판(form criticism)과 종교사적 접근방법을 수용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후기에는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방법을 개발했다.


양식사비판은 구전 전승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문학해석의 방법이다. 성서 가운데에 있는 문학 양식과 고대 근동의 문헌들을 문학 및 역사적으로 비교, 검토하여 그 사상의 유래가 어디에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궁켈이 이 방법을 구약성서 연구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는 고대 근동문화를 연구하여 창세기의 배후에는 당시의 이교(異敎)문학이나 신화로부터 유래된 것이 많으며, 시편 양식들이 종교의식상의 특정 축제나 마술적인 제례에서 근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 1883∼1947), 슈미트(Karl Ludwig SchHudt, 1891 ∼1956)등과 함께 앙식사 비판을 신약성서 연구에 도입하여 그 기술을 개척하고 발전시켰다.


양식사비판에 따르면,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구전, 즉 원래의 복음인 케리그마가 있었으며, 초대교회가 그것을 필요에 따라 가감하여 보존한 것을 편집한 것이 복음서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등으로 부르고 부활과 승천사건을 첨가했다. 따라서 양식사비판은 복음서 기록 배후에 있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구전의 문학 양식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방법이다. 그 목적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첨가한 내용과 재해석한 것들을 제거하고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구전의 원 형태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 불트만의 초기 저서「예수(Jesus, 1926)」에 반영되고 있다.


한편 불트만은 신약성서 연구에 종교사적접근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독일 괴팅겐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종교사학파의 방법이다. 종교사학파는 성서학을 주로 한 학파로서 성서의 외적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히브리 종교와 고대 근동의 이방종교 및 헬라 종교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세계 모든 종교를 역사발전 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연구했다. 이 학파는 복음서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과 초자연적 요소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여러 신비 종교로부터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라 하여 제거하려 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 연구에 이 연구방법을 도입하여 발전시켰다. 즉 그는 성경의 개념과 교훈을 고대문화의 배경과의 관계성 속에서 해명했다. 기독교는 주변 정황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 영향을 받은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후기에 불트만은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을 통해 신약성서를 연구했다. 그는 신약성서가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했다. 신약성서에는 케리그마라고 불리우는 복음의 진수(眞髓)와 신화적인 성격을 가진 세계관이 있다. 그리고 케리그마의 중심 요소들은 비성서적인 용어들로 표현되었다.


신약성서의 신화적인 요소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 하늘의 존재가 세상 속에 임재하는 극적 이야기이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근본적인 의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독교 이전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redee-mer myth)'를 수용했다. 이것은 지상에 와서 계시를 전하기 위해 인간으로 나타난 하늘의 존재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이다. 이 신화는 기독교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둘째, 과학 이전의 우주론이다. 신약성서 저자들의 세계관은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세계가 3층, 즉 하늘과 땅과 땅 밑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땅은 인간의 자연적인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이며, 하늘은 하나님과 하늘의 존재, 곧 천사들이 사는 곳이요, 땅 밑은 음부, 즉 고통의 장소이다. 그들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진행은 선과 악의 초자연적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다. 땅은 "초자연적인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또한 사단과 그의 마귀들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 뿐만 아니라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 죽음, 부활도 신화적인 세계관에 의해 표현된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 즉 저 세상적인 것을 이 세상적인 것으로,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이 공간적인 거리로 묘사되는 것이 그런 것이다. 불트만은 이러한 신화적 표현은 현대인에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신화적인 신 개념은 신학적으로 지지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신화적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이전 시대와 우주론이다. 현대인은 이런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사고는 현대과학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약성서의 신화적인 표현은 현대인의 복음 이해에 막대한 장애가 된다. 불트만은 현대인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신약 성서를 현대인의 과학적 세계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성서의 비신화화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약성서에 대한 해석의 방법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말하는 것이며 성서의 진리에 대한 당시의 해석을 현세의 해석으로 고치는 것이다." 케리그마를 그 신화적 윤곽으로부터 벗겨내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불트만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했다. 그러나 불트만은 신약성서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는 데에는 그들과 입장을 같이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그들과 입장을 달리한다. 스트라우스나 하르낙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화를 상대적이며 시대적인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신약성서에서 일체의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으며 종교와 윤리의 기본적인 원리만을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불트만은 그것들을 제거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적인 요소와 사고를 제거하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케리그마도 제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화의 제거나 파괴와 같은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신약성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힐 수 없으며 현대인의 복음이해라는 과제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고 보았다. 신약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성서에 있는 신화적인 요소의 진정한 기능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신화에 대한 재해석이며 비신화화(非神話化)이다. "신화적인 개념들 배후에 있는 보다 깊은 의미를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신약성서의 해석방법을 나는 비신화화라 부른다. 그것의 목적은 신화적인 진술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


불트만이 신화를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실존적 해석이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진정한 의미는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에 관한 메시지를 새로운 세대에 전하는 것에 있다고 이해했다. 신약성서의 사명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 즉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에 있다. 따라서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신화 역시 우리의 실존을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측면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본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자기 이해를 표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가 아니라 마땅히 인간학적으로 또는 실존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 불트만에 따르면, 신약성서의 신화론은 유대 묵시문학과 영지주의 구원신화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그들은 현세계와 인간은 악마적인 힘의 지배 하에 있으며, 따라서 구원이 필요하다는 이원론적 사고를 근본 구조로 하고 있다. 이 두 형태의 신화가 표현하는 것은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해 야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의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는 실존주의 사상, 특히 하이데거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관심은 존재의 본질 규명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철학의 근본 문제로 보았다. 그는 인간존재를 존재에 대한 해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 '로서 항상 근심, 걱정하면서 사는 존재이다. 근심과 걱정이 현존재의 근본 성격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 같이 존재하지만, 존재를 문제시하는 점에서 다른 존재자와 다르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된다. 인간은 매순간 양자 택일의 결단 앞에 놓여있다. 인간은 비본래적인 존재가 되든가 아니면 본래적인 존재가 되든가 하는 두 가능성 앞에 결단해야하는 존재이다. 불트만은 인간존재를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철학 전체를 받아들인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사상에서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재해석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구조를 발견했다.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을 해석학적 도구로 사용했다. 불트만에게 있어 인간은 실존이다. 실존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존재 양식을 의미한다. 실존은 인간의 본질이나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바로 실존이다. 인간 존재는 언제나 삶의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결단을 통해 잃어버릴 수도 있고 얻을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이란 언제나순간적인 결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불트만은 인간 존재를 신앙없는 인간 존재와 신앙을 가진 인간 존재로 분류했다.


신약성서에 대한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분석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약성서가 그리스도의 사건을 신화적인 언어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것을 비신화적인 용어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화적인 성격과 역사적 성격, 양면을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선재적인 존재이며,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죄가 없었다. 그는 피로써 우리의 죄를 소멸하는 희생물이었다. 그는 대속적으로 세상의 죄를 지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당함으로써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한다." 이것이 십자가에 대한 신화적인 해석이며, 현대인은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불트만은 신화적인 언어는 과거 사건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그리고 시간을 넘어서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은 "우리와 우리의 세계 밖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신화적 과정이거나 또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객관적 사건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과거의 사건이나 신화론적 사건이 아닌, 영원한 현재적 사건으로 해석했다. 현재 우리들의 삶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건인 것이다. 그는 대속적인 속죄론이나 만족설과 같은 전통적인 해석과는 달리, 세상에 대한 심판과 인간에 대한 심판과 구원을 십자가의 영원한 의미로 간주했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화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죽은 자가 현세의 삶으로 다시 소생한다는 것은 신화이며, 그런 신화적인 사건은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빈 무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남과 같은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원시 전통에 첨부한 신앙의 항목이라고 주장했다. 즉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신앙의 사건 또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보았다. 부활이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며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십자가의 구원의 효능에 대한 신앙'이다. 그것은 '십자가가 선포되는 방식 '이며 '설교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부활절 신앙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구원사건, 즉 실존적 체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또 기독교인은 매일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


이러한 실존론적 해석은 본문이 말하는 사실과 그 본문이 전달하고자하는 의미 사이, 역사가들에 의해 탐구되는 과거 역사(Historic)와 실존적 역사(Geschichte)사이의 구별에 근거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불트만은 양자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이고 사실보다는 의미, 과거의 역사보다는 실존적 역사를 중시했다. 실존론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이 오늘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건의 교리적 내용보다는 오히려 인간 실존과의 관계성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3. 비신화화 논쟁
불트만의 신학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많은 신학적 논쟁을 일으켰다. 이것은 사실과 의미, 과거의 역사와 실존적 역사, 역사와 신학에 대한 그의 예리한 구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논쟁의 주요 문제는 역사적 연구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태도 그리고 실존론적 성서해석에 관련된 것이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쟁이나 역사와 신학의 관계 문제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1953년 불트만의 제자, 케제만(Ernst Kasemann)은 마르부르크대학 동창모임에서 '역사적 예수의 문제(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케제만은 스승 불트만의 역사적 회의주의는 과장된 것이며 십자가의 케리그마 위에 모든 것을 집중함으로써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관계성을 위태롭게 했다고 지적했다. 케제만은 불트만을 설복하지는 못했지만, 불트만학파 내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촉진시켰다. 그것은 부활절 케리그마는 단지 초대기독교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말씀과 행진에 근거한 것임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불트만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보다 오히려 십자가에 대한 선포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의 역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알트하우스(Paul Althaus)는 1958년 출판된 소위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에서 그 두 가지를 분리시킨 것이 불트만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신학과 역사에 대한 논쟁은 판넨버그(Pannenberg)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1961년에 저술한 「역사로서의 계시(Offfnbarung als Geschichte)」에서 역사와 신학의 분리에 근거한 불트만의 신학을 문제시했다. 그는 계시의 역사적 사건을 단지 실존의 의미에서만 이해하는 불트만의 케리그마신학을 비판했다. 그는 신학과 역사를 분리하는 불트만의 입장이나 전체 역사로부터 구원의 특별역사, 즉 구속사를 분리하려는 바르트와 브루너의 입장이나 전체 역사로부터 구원의 특별역사, 즉 구속사를 분리하려는 바르트와 브루너의 입장을 거부했다. 그리고 역사와 신학을 결합했다. 그는 신학을 역사와 역사적으로 증명할수 있는 사건들, 특히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신을 알려지게 하기 때문에, 신학자가일해야 하는 지평은 역사 자체의 지평이다. 그러므로 판넨버그는 계시를 보편사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보편사신학을 제시했다.


그러나 초기의 작은 논쟁을 제외하고, 불트만의 신학에 대한 토의와 논쟁은 1941년에 발표된 논문 "신약성서와 신화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비신화화 논쟁을 통해 불트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에 대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불트만이 속해있던 독일 루터교회였다. 1942년에 저술된 자우터(H.Sautar)의 「신약성서 비신화화의 찬성과 반대」와 틸리케(H.Thielicke)의 「신약성서 비신화화의 문제」 그리고 1943년에 발표된 슈니빈트(Julius Schniewind)의 논문 "불트만에 대답한다" 등은 루터교회의 관점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을 비판한 것이었다. 1952년 3월 독일루터교회 총회는 불트만을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1953년 루터교 감독회의는 비신화화론에 대해 반대하는 선언물을 발표했다. 비신화화논쟁은 처음에는 루터교회 내분의 논쟁으로 진행되었으나, 1946년 개혁교회 신학자 오스카 쿨만(O.Cullmann)이 「그리스도와 시간」을 발표하면서 전 유럽 대륙의 신학계로 확산되었다. 1950년대는 비신화화 논쟁의 시대 또는 케리그마신학 논쟁의 시대라고 불리을 정도로 비신화화론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신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독일의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 스위스의 베르너(Martin Werner)와 부리(Fritz Buri) 등이 비신화화론을 지지했던 반면, 디임(H.Diem), 알트하우스(Paul Althaus)와 같은 루터교 신학자들과 바르트와 브루너와 같은 개혁교 신학자들은 그것을 반대했다. 이 논쟁에는 개신교 신학자들뿐만 아니라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심지어 야스퍼스와 같은 철학자도 참여했다.


비신화화 논쟁은 유럽 대륙 뿐만 아니라 전세계 신학계에 걸쳐 20년 이상 계속 되었으며,이와 관련된 논문만도 몇권으로 출판될 정도로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이 논쟁을 몇 페이지로 요약하여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필자는 불트만의 비신화화논쟁의 핵심은 무엇이었으며 비신화화론은 왜 문제시되고 비판받게 되었는지를 몇가지로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불트만이 신약성서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요소를 신화로 간주한 것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논쟁점이었다. 불트만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성서로부터 신화를 제거하는 것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신화화라는 슬로건은 부정 적인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순히 과거의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실존적인 삶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그의 실존론적 해석의 긍정적인 의도가 퇴색되었다. 이 때문에 비신화화 논쟁은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불트만이 과거의 역사보다는 실존적 역사, 사실보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에 대한 성서 비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그 신화의 현재적 의미를 찾고자 했다. 이러한 불트만의 입장은 복음의 역사성을 부정하며 기독교의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토대를 파괴하는 동시에 신학을 인간의 주관적인 존재영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셋째, 불트만은 신화를 저 세상적인 것을 이 세상적인 것에 의해,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에 의해 표현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러한 신화적인 표현으로부터 과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Ⅲ.마무리


불트만은 어떻게 하면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할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가 일평생 신학적 주제로 삼았던 것은 신앙과 이해 문제였다. 그에 대한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신약성서의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비판적 방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전체 신학연구는 '비신화화'라는 주제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현대인의 이해를 위해 성서를 재해석해야한다는 불트만의 문제제기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반면,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법론과 신학은 그의 생존시부터 많은 논쟁과 논란을 일으켰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신학과 역사의 관계성, 비신화화논쟁 등이 그것이다. 불트만의 문제점은 몇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불트만은 성서의 초자연적인 사건 등을 신화로 취급하고 그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켰다. 불트만은 역사에 기초한 기독교를 신화에 기초한 기독교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둘째, 불트만은 신약성서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서 저자들이 예수의 생애와 구전에 대한 전승과 고대 근동의 종교들로부터 유래한 자료들을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가 지니고 있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셋째,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영향으로 모든 기독교 신학은 인간실존에 관계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앙은 내적인 동시에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실존적이다. 그의 신학은 역사성과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가 신학의 영역을 인간의 주관적인 영역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불트만은 신적 계시의 우주적인 측면을 과소 평가했다. 하나님의 계시는 현재, 과거 및 미래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적 종말의 세계 완성으로 끝난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 역사의 전 과정을 외면하고, 단지 그 중에서 현재 속의 순간, 즉 인간의 실존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의 실존론적 성서해석이 그러하다.


목창균/드루대학교에서 목회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울신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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