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특성
1. 형이상학적 원리들의 규정
- 토마스의 철학 사상에 대한 탐구를 착수할 수 있는 한 가지 관점은 그의 형이상학의 일반 원리들에 대한 초기의 규정들과 한결같은 재확인들을 검토하는 일이다. 성 토마스가 자신의 학문적 저술들을 시작하면서 형이상학 전체의 제1원리들을 자기 머리 속에 이미 체계적으로 배열해 놓고 있었고 그것을 자기의 사변활동이 끝날 때까지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초기 두 작품 『존재자와 본질』 및 『자연의 원리들』과 말년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분리된 실체』의 주요 진술들을 비교해 봄으로써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존재자와 본질』의 근본적 진술들을 조사해 보기로 하자. 실존하는 모든 존재자는 순수 현실이거나 아니면 현실태와 가능태로 합성되어 있다. 순수 현실은 유일하고 무한하나, 가능태와의 합성은 현실태를 다수적이고 유한하게 만든다. 그리고 존재자는 모두 스스로 자립하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한다. 순수 현실은 스스로 자립하는 것으로서 그 자신일 수 있기 위해서 어떤 원인에 의존하지 않는다. 순수 현실은 원인을 가지지 않는 것이요, 모든 다수의 유한한 현실태들은 순수 현실을 그 원인으로 갖는다. 그리고 존재는 최고의 현실이다. 따라서 물질적 실체들과 순수 지성체들은 다수적이고 따라서 유한하기 때문에 순수 존재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이라고 불리는 순수 존재 현실로부터 유래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순수 존재 현실인 신은 존재하고 또 이 때문에 유일하고 무한하다. 지성체들에게는 현실-가능의 합성 즉 존재-본질의 합성이 있다. 그러나 본질은 질료 속에 수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것으로서는 무한하고 유일하다: 즉 아비첸나가 마했듯이 種의 수만큼 많은 개체들이 있다. 물질적 실체들에 있어서는 존재-본질의 합성 외에도, 본질 속에서의 질료-형상의 합성이 있다. 따라서 같은 종에 속하는 여러 개체들이 있다. 그리고 가능태로서의 질료는 다수화와 개체화의 원리로서 개개의 물체적 형상에 자기가 주는 크기에 따라서 개체화한다. 순수 지성체들은 ??원인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래로는’ 무한하고 ‘위로는’ 유한하다: 즉 본질이 어떠한 질료에도 수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본질에 있어서 무한하고, 밖으로부터 받는 존재에 있어서는 유한하다.
동시에 『자연의 원리들』에서는 다른 입장들이 추가된다. 제1질료는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출산은 형상만의 것이 아니라 질료-형상 합성체의 일이다; 네 가지 원인들이 있고 그중 첫째는 목적인이다; 현실태는 단적으로 말해 가능태에 앞서고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에 앞서지 그 반대가 아니다. 존재나 존재자의 개념은 아무런 차이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genus)가 아니다. 따라서 종적 차이를 말하듯이 존재의 차이를 말함으로써 존재단일설에 빠져서는 안 된다. 차이는 존재 개념 자체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 존재 개념은 모든 차이들을 포용하고 있기에 어떤 일의적인 개념으로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동일성과 차이성을 동시에 담고 있는 ‘유비적’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존재는 현실태이다. 모든 현실태들의 현실태요 모든 형상들의 현실태이다. 실체적 형상은 모든 존재자에 있어서 제1존재이므로(우유적 형상들의 경우처럼 더 이상은 없다) 유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체적 존재를 가지는 실체적 형상은 각 존재에 있어서 단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완으로 남은 『분리된 실체』에서도 같은 주장들을 만나게 된다. 최고로 참된 존재는 다르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와 진리의 원인이다. 순수 지성체들은 아무런 질료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가능태는 지니고 있다. 그들은 존재와 본질로 합성되어 있다. 제1진리와 제1善은 절대적으로 순수 현실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에 더욱 완전히 참여할수록 더욱 완전하다. 현실태는 가능태보다 더 완전하고 따라서 더욱 존재에 참여하므로 현실태로 있으면 있을수록 언제나 더욱 완전하다. 신은 현실이고 자립 존재이다. 따라서 모든 자립하는 현실 또는 형상이 유일하듯이(즉 어떤 가능태의 현실이 아니듯이) 신은 이런 최고의 완전성에 있어서 유일하다. 물질적 실체들은 ‘위’와 ‘아래’로 유한하다. 온통 영적인 실체들은 위로는 유한하고 아래로는 무한하다. 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무한하다. 물질은 개체화의 원리이다. 이런 이론들은 초기 작품들과 절대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제1질료가 순수 가능태이고 좀 더 명시적으로 말해지고 있고, 신은 ‘자립 존재, 존재 자체, 자기 존재, 단적으로 존재, 아무것도 받지 않은 절대 존재’라고 규정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본질적 원리들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직 그 표현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완벽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성 토마스에게는 아무런 혼선도 없었다거나 또는 일부 세부적인 점들에 있어서 아무런 사상적 혁신도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즉시로 한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무제한적 규모’의 본성이라든가 개별 사물들의 ‘개체성’을 인식할 수 없는 이유라든가 하는 경우에 그 자신이 정화천(淨火天, coelum empireum)이 아래 있는 하늘들에 미치는 활동에 대해서처럼 독자에게 관점이 바뀌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명제집 주해?? II, 제2구분 제2문 제3답에서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15년 뒤 ??신학대전?? Ⅰ, 제66문 제3절 제2답에 가서는 ‘아무런 영향도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제한된 영향이 있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2-3년 뒤에는 어떤 영향이 있고 또 충분히 규정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관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부인하고 있고, 또 이런 어떤 것은 나에게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게 되면, 최고의 하늘은 하급 물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자유토론문제집?? 제Ⅵ토론, 제11문).
2. 아리스토텔레스 선호와 철학의 자율성
- 성 토마스가 아직 30대도 아닌 나이에 이미 의심의 여지없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근본적 요체들을 소유하고서 그 귀결들을 훨씬 더 이상으로 이끌어 가 체계적으로 다른 가르침들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희랍어에서 시리아어로, 다시 시리아어에서 아랍어로, 그리고 또 다시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그야말로 부정확하기 짝이 없는 번역본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알게 되었다. 이 번역들은 원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된 것들이었고, 본문들 속에서는 희랍과 아랍의 주해들도 발견되었는데, 이 주해들은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는 극단적으로 동떨어진 것이기 일쑤였다. (그의 권유에 의해서 새로운 번역들이 나오게 되는 것은 겨우 1260년의 일이고, 그는 그것들을 주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처음부터 이런 형이상학의 근본 요체들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 절대적 보편성과 필연성을 보았으며, 그래서 이 요체들에 입각해서 다른 모든 가르침들을 통찰할 줄 알았다.
15세에서 25세까지 나폴리, 파리, 쾰른에서 그는 교부들과 중세 사상가들의 작품과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암브로시우스, 성 힐라리우스, 성 이시도루스, 위-디오니시우스, 보에티우스, 성 대 그레고리우스,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 다마셰누스, 후고 생빅톨, 리카르두스 생빅톨, 성 베르나르두스, 성 안셀무스, 그리고 당대에 알려져 있던 고전 철학자나 신-플라톤주의자들 외에도 이미 아비첸나, 아베로에스, 아비체브론, 마이모니데스 등의 일부 작품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한 박식의 방대함 속에는 그때부터 몇몇 기본적 형이상학적 원리들이 그토록 명료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교수 및 저술가로서의 풍부한 20년의 기간을 한결같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그는 존재자 개념의 초월성과 유비 이론, 생성변천하는 유한한 존재자에서 가능-현실 합성 이론, 4원인론, 물체적 실체들의 질료-형상 합성 이론, 가능태의 한정적이고 다수화시키는 기능, 물질적 실체들의 개체화의 원리인 질료, 순수 지성체들의 種의 단일성, 인과율과 원인 계열의 무한 전개 불가능성, 제1원인과 부동의 원동자(즉 가장 완전하고 오든 완전성의 원천)이자 최고 지성이며 최고선의 실존 등을 받아들였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인 플로티누스로부터는 제1원리 즉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모든 완전성에서 무한한 일자의 절대 단순성을 받아들였다. 한편 정신(Nous)은 이미 질료-형상으로 합성되어 있다(‘가지적 질료’). 그리고 아비첸나로부터는 실존-본질의 구별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신을 순수 존재 현실(Actus Purus)로, 필연적 존재자, 자립적 존재자로 개념했으며, 모든 유한한 존재자에 있어서의 존재-본질 합성 이론을 받아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 아비첸나의 이런 원리들과 더불어 성 토마스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구성함으로써 그 위대한 철학자들을 그 불확실성과 특히 그리스도교 진리와의 대립성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다. 순수 존재 현실, 즉 ‘자립적 존재자’로 개념되는 부동의 원동자(Primum movens immobile)는 필시 유일하고 무한한 일자이며 절대 제1원인인 유일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순수 현실은 유일하고 무한하기 때문이며 여기서는 절대 순수 현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쇠퇴기의 스콜라 철학과 칸트(Kant)가 제기하게 될 어려움도 미리 극복되게 된다. 이들도 역시 제1원인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유일하고 가장 완전한 절대 존재(바로 ‘창조주’이다)를 가지기 위한 불가결의 조건인 유일성을 주장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자립적 존재자’인 부동의 원동자는 그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주(Creator ex nihilo)가 된다. 이런 창조는 ‘자립 존재’(esse subsistens)의 고유 결과로서 무로부터의 창조이고 자유로운 창조이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자이므로 온통 절대적으로 지성이고 자유이다. 이것은 온갖 형태의 유출설(emanationism)과 신-플라톤적이고 아랍적인 또는 스피노자적이고 관념주의적인 필연적 유출을 가장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단호한 태도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들 자체의 힘에 입각해서 그에게 말하도록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성 토마스의 시대에 즉 플로티누스와 아비첸나 이후에 살았더라면 말했었을 것을 말하도록 만든 것이다. ??형이상학?? 제1권의 ‘모든 존재자는 존재와 진리에 똑같은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진리는 존재를 원인으로 가지고 그 위에 정초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993b23)에 대한 해석을 예로 들어보자. 그 바로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어떤 등급을 가진 완전성이 존재한다면 이 완전성의 최대도 존재해야 하며, 바로 이 최대 완전성이야말로 그 때문에 다른 모든 제한되고 유한한 완전성들이 완전하게 되는 원인이라고 말했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문을 따라 주해하면서, 천상 물체들과 같은 가장 완전한 존재자들도 그들 존재의 원인뿐만 아니라 그들 진리의 원인도 가지며 이 원인은 최대존재이자 최대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형이상학 주해?? 제2권 제2강). 그리고 『분리된 실체』(제3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대로 진실한 것이 ‘존재 원인’(causa essendi)이자 다른 모든 진리들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신은 자기와는 다른 모든 존재자들의 실존의 원인 즉 창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와 천상 물체들의 영원성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 실존의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부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도교 계시와 이성에 반대되는 것은, 그가 창조를 부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질료와 운동의 영원성을 ‘필연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제9장).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성 토마스의 태도는 토마스가 철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개념에서 궁극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스승 알베르투스보다도 더욱 자기 동시대인들에 견주어 독창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자기보다 더 그리스도교적으로 보이는 성 보나벤투라의 길을 따를 수도 있었다. 보나벤투라에게는 그리스도교야말로 진리였고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교적이니 아랍적이니 히브리적이니를 따지지 않고 심지어는 순수한 철학까지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전망에서라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못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떤 특수한 관점에서 외부로부터 취하는 태도이다. 성 토마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말할 것도 없이 진리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철학도 그 자체로 참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질료의 영원성이라든가 섭리의 부정 때문이 아니라, 그 형이상학적 원리들 때문에) 참된 철학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교적이라거나 그리스도교적이라서가 아니라, 또는 새로운 것이라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에 합치하기 때문인 것이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관통해 들어가 본질적 핵심인 가능-현실 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이론으로부터 다르특수한 입장들이 파생되게 된다. 성 토마스는 그 본질적 핵심을 받아들여, 날카로운 정신을 가지고 그 귀결들을 전개시켰고 해석하며 그리스도교 진리로부터 멀어져가는 경우일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수한 요점들을 교정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전통 위에 서 있는 성 보나벤투라에 비겨 볼 때 성 토마스는 훨씬 더 열성적인 혁신가였다. 온통 그리스도교로 충만했고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적대적이었던 분위기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했다. 그는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의 주해와 가르침들을 과감하게 수용했고 그들에게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성 안셀무스보다도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교에 반대되기 이전에 먼저 이성에 반대되던 몇 가지 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의 입장들을 철저하게 논박했다. 그는 자기 철학의 진실성을 그토록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학을 자신의 철학 사상과 함께 엮어 짰다. 그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던, 그러나 그가 진리라고 보았던, 그러기에 거기 담겨 있는 거룩하고 신성한 것들을 유익하다고 보았던 새로운 문화에 단호하게 편승했다.
성 토마스는 “철학자들은 사랑스런 친구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존중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주해?? 제1권 제6강)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읽었고, 그 자신도 다음과 같이 썼다: “철학을 탐구하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사물들에 대한 진리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천지론 주해?? 제1권 제22강). 그는 전통보다는 진리를 더욱 존중하였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정당화된 인식이라면 어떠한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행성들의 운행이 불규칙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고대인들의 설명들을 검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들이 제시한 가정들이 필연적으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런 가정들로부터 (자연의) 현상들이 마땅히 구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가정들이 참되다고 말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방식으로 별들에 관한 외양이 구해지기 때문이다”(『천지론 주해』 제2권 제17강). 그가 만일 그때 살았었더라면 코페르니쿠스적인 어떤 증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인식론
1. 인식과 존재
- 성 토마스의 활동과 주의가 처음부터 형이상학적 문제에 쏠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인식론적 문제 즉 인식 일반의 가치 문제와 특별히 인간 인식의 가치 문제도 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여러 문제들로 된 『토론문제집』의 첫 문은 ‘진리’(veritas)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더욱 인식 문제에 관련되는 문제들은 1256년에 작성되었다. 즉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소품들과 거의 동시대의 작품인 것이다. 성 토마스는 자신의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사변들을 학문적이고 비판적으로 정초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진리론』의 최초의 문제들 속에서, 그는 존재와 인식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존재를 산출하는 인식이 있는가 하면 인식을 산출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존재를 정형화하는 인식과 존재에 의해 정형화되는 인식, 창조하는 인식과 아는 인식(혹은 존재 속에 이미 있던 것을 정신 속에 표상 또는 재소개하는 인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 토마스는 아는 인식에 있어서 인식되는 것은 존재와 사물들의 표상이 아니라 존재와 사물들 자체임을 선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인식되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사물들이고, 포착되는 것은 존재 자체이다. 물론 인간의 인식은 인식의 등급에 있어서 하급의 형태임을 감추기 않는다. 즉 인간 인식은 여러 가지 한계와 불완전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끔은 존재 자체를 포착하는 방식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상대주의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오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물이 실천적 지성과 맺는 관계와 사변적 지성과 맺는 관계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천적 지성은 사물들의 원인이다. 따라서 사물들의 척도로서 스스로 실행한다. 그러나 사변적인 지성은, 사물들로부터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사물들 자체로부터 움직여진 것이다. 따라서 사물들이 지성의 척도이다. 이로부터 명백해지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위의 지식을 받아들이게 되는) 자연 사물들은 『형이상학』 제10권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 인식의 척도이다(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공작품들이 장인[匠人]의 지성 속에서 조형되듯이,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창조된) 신의 지성에 의해서 측량된다. 이처럼 신의 지성은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측량되지 않는 (만물의) 척도이다. 자연 사물들은 측량되기도 하고 척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다만 측량되기만 할 뿐이다. 즉 자연 사물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위적인 것들만을 측량할 수 있을 뿐이다”(『진리론』 제1문 제2절). 그러나 성 토마스는 우리의 지성이 “사물들에 의해 측량된다”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사물들에 대면해서 수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물에 대해서 판단하는 한 사물들로부터 [수동적으로] 겪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행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짜 금(金) 조각이 필시 지성을 오류에 빠뜨리는 것은 아닌 것이다(『진리론』 제1문 제10절).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식한다는 것은 사변적 인식을 의미하므로 인식은 존재에 의해 측량되고, 실제로 실존하는 것을 실존한다고 주장할 때 그 인식은 참된 인식이고, 실제로 실존하지 않는 것을 실존한다고 주장할 때 그 인식은 가짜 인식이다. 진리는 (비록 가끔은 사물들이 참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사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 속에 있다. 실상 진짜 금과 가짜 금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관념적 금에 즉 금의 진정한 본질에 상응하는 것은 참되다. 여기서 진정한 본질이란 창조하는 신의 지성에 의해서 정의되고 규정된 본질을 말한다. 또한 ‘모든 존재자는 참이다’(omne ens est verum) ‘존재자와 眞은 호환된다’(ens et verum convrtuntur)고 말한다. 이때 의미는, 모든 존재자는 그것이 비-존재가 아닌 한 가지적이고 지성과의 관계의 종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그러한 본성을 가진 지성의 경향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의 본성은 사물을 그러한 대로 아는 것이다. (2+2=5라는 등식은 참이 아니고 가지적이 아니다. 비-존재에게가 아니라 존재에게 동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지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진리에 대해서 논할 때의 진리의 정의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이다”(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그러나 가장 고유한 의미의 진리인 지성의 진리에 대해서 다룰 때는 진리는 지성이 사물들에 관한 것을 포착하는 한에 있어서 “지성과 사물의 일치이다)(adaequatio intellectus et rei)(『진리론』 제1문 제1절; 『신학대전』 Ⅰ, 제16문 제1절). 성 토마스는 이 정의를 유대인 이사악 이스라엘리로부터 전해받았다고 말하고 있다(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뚜렷하다: 『영혼론』 제3권 제6장; 『형이상학』 제4권 제7장; 제5권 제29장; 제9권 제15장). 실상 이사악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있는 것은 참되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있는 것은 가지적이고, 있지도 않고 또 있을 수도 없는 모순은 가지적이 못되기 때문이다. ‘일치’(adaequatio)라는 말 대신에 성 토마스는 가끔 ‘상응’(conformitas)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자체로 그러한 사물에 일치 또는 상응하는 지성은 참되다(per conformitatem intellectus et rei veritas definitur)(『신학대전』 Ⅰ, 제16문 제2절).
2. 지성의 사물 동화 능력
- 따라서 인식의 정의에 의존하고 있는 진리의 정의에는, 성 토마스에 따르면, 지성이 그 본성상 사물들에 동화(同化)되는 본성 또는 사물 자체를 포착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함축되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는 가지적이고 지성은 그것을 포착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성의 자연적이고 고유한 활동은 존재 자체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누가 지성이 존재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비-존재를 향해서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성인 것과 지성이 아닌 것을 동시에 정의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지성일 것이고 또 반대로 지성이 아닐 것이다. 모순율을 부정하는 중에 그것을 긍정하듯이, 부정은 긍정과 같게 될 것이다. 지성은 존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어떤 형태에 있어서든지 지성의 긍정의 절대적 가치이다. 즉 지성은 언제나 존재 자체에로 눈길을 던지고 있어서, 때로는 존재를 실제로 포착하고 때로는 포착하지 못한다. 사실상 포착하지 못하면서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함축적으로 지성이 존재 자체를 포착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그만큼 그의 주장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이 실수하여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주장할 때조차도 지성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적성’이다. 그것을 부인하려 해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를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바로 이 ‘존재를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포착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인간 지성은 개념들과 관념들이라는 전체 장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이 장치는 모든 인식 활동이 다 존재 포착이고 존재에 관한 포착이라는 사실을 전혀 제거하지 않는다.
3. 개념들의 가치
- 실상 개념과 관념들은, 성 토마스에 따르면, 지성이 존재를 인식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성 토마스에게 있어서 인간 지성은 현실적 활동의 결실인 개념들과 관념들을 통해서 인식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현실태로 있는 인식이 아니라, 때론 인식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인식하지 않기도 하는 인식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식 활동은 단순한 능력으로서의 인식과 구별된다. 현실태로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 개념들 또는 관념들로 표현되는 것은 인식 그 자체의 1차적인 일이 아니다. 그 본성상 현실태로 있는 인식인 그런 존재(아리스토톨레스의 noesis noeseos)는 실존하는 것을 알기 위해 개념들과 관념들을 활용하지 않는다. 지성과 개념들은 인간 영혼이 바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수단이다. 개념들은 인식 대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속한다. 인식 대상은 존재다. 인식이라고 말하게 될 때 인간 인식에서는 이미 개념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과 더불어 알게 되고, 개념들과 더불어 알게 된다. 어떤 경우에든 인식되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어쨌든 실존하는 것 즉 존재 자체이다. 인식하는 동안 자신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식의 존재 자체이다. 그리고 성찰 속에서도 어떤 다른 것에 대한 활동의 인식이 아니라, 곧 살펴보게 되겠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지성적 활동의 인식이다. 성 토마스가 부르고 있듯이 ‘가지상’(species intelligibiles) 또는 개념들은 “우리 지성에 대해서 인식 대상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인식 수단으로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Ⅰ, 제85문 제2절에서 언제나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호소하면서(『영혼론』 제3권 제9장) 그리고 이미 『진리론』 제19문 제9절에서 말한 것을 더욱 명시적으로 되풀이 하면서 말하고 있다(그리고 또 『영적 피조물』 제9절 제6답서도 말하게 될 것이다). 개념들 또는 ‘상’들은 사물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인식함이다. 그들의 본성에 있어서 사물들에 대한 ‘충실한’ 표상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식이란 그 본성상 사물들의 충실한 표상들이라는 것이고, 그들을 실제 존재 속에 현존하고 있는 그대로 자기 앞에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은 그 본성상 진리를 소유할 수 있다고 즉 사물에 동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재소개(즉 표상, re-presentatio)와 상응(con-formitas: 같이 모습이 됨)은 동일한 개념을 표현한다.
4. 진리의 비판적 소유
- 그러나 ‘언제’ 그리고 ‘어떻게’ 지성이 사실상 실재에 따라 존재 자체를 포착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성 토마스는 대답한다: 지성 자체가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지성은 바로 존재 자체를 실재에 따라 포착하는 자연적 능력이 아니었던가? 인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찾는 것은 아직도 어떤 인식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성적 인식은, 존재 자체를 포착하는 한, 그것을 포착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자기 통제 능력을 즉 자기가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지를 통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알려지는 것은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로 ‘완전히 돌아올’(reditio completa) 때이다. 이것은 지성에게 고유하고 특징적인 활동이고, 이미 이것에 대해서는 『원인론』의 저자가 언급했던 것이다(“자기 본질을 아는 모든 인식자는 온전한 귀환을 통해서 자기의 본질에게로 돌아가는 자이다”: 15명제; 『원인론 주해』 참조). 이 귀환이란 자기 자신의 활동을 그 자체로 가지는 추만한 소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귀환은 이미 기존하는 다른 활동에 대한 어떤 활동에 대한 성찰 속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활동 속에서 가지게 된다. 나중에 가서 구분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현실태로 표시된 성찰’ 즉 어떤 다른 활동 속에서의 성찰이라기보다는 “현실태로 수행중인 성찰” 즉 활동 수행 속에서의 성찰인 것이다.
지성적 인식은 감각과는 달리 안다는 것을 알 뿐 아니라 즉 자기 활동을 의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포착해야 하는 존재에 사실상 일치되느냐 여부도 안다. 지성이 (언제나 하나의 존재 긍정인) 판단을 발하면서 어떤 것이 그것을 인식하는 그대로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참으로 있는 것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 특정 경우에 그의 본성에 따라 행한 것이라는 주장을 함축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지성이 어떤 것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있다고 ‘판단’할 때 진리가 있게 된다. 그리고 진리는 지성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활동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판단이 사물과 일치된다는 것을 의식하는 한에서 지성에 의해 인식된다. 이 일치성은 지성이 자기 본성을 알기 때문에 어떤 개별 경우에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런 판단의 활동적 원리인 지성의 일반적 태도이다. 그리고 여기서 본성이란 있는 것 또는 사물과 관계를 맺고 동화되는 그런 본성이다.(『진리론』 제1문 제9절).
판단 활동 즉 있는 것의 긍정에서 지성적 인식은 존재 자체롤 포착할 수 있고 그것을 포착할 때 그것을 포착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잘못했을 때는 성급하게 굴었기 때문에 즉 자기 활동에 대한 통제 또는 충만한 자기 소유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말한다. 판단 또는 긍정의 본성에 관한 가르침은 당연 『신학대전』에서 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되고 있다. 감각은 자기가 감각 대상과 일치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 반해, 지성은 감각보다 월등히 뛰어나므로 인식되는 대상에 일치되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상 “사물로부터 포착하는 형상처럼 그렇게 사물이 있다고 판단할 때” 일치되고 있는지 여부를 인식한다. 즉 어떤 대상에 그것이 실제로 지각되는 것을 돌리게 될 때 진리가 있는 것이다. ‘종이 조각’이라고 부리기에 적합한 이 대상은, 감각을 통해서 실제로 하얗고 검지 않다고 지각된 귀결로서, 하얗다(『신학대전』 Ⅰ, 제16문 제2절).
지성은 사실상 진리를 소유할 때 알 수 있다. 이 소유는, 가장 단순한 진술들을 다룰 때 즉 술어가 주어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을 때, 그에게 명백하게 된다.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어떤 제3의 것과 동일한 두 개의 존재자는 서로 서로 동일하다, 스스로는 실존하는 것이 실존하고 있을 때 그것은 다른 어떤 것 덕분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위 그 자체로 알려지는 원리들 즉 논변의 제1원리들을 다룰 때 진리를 소유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대상의 측면들이 복잡할 때 또는 어떤 사실의 상황이 복잡할 때, 그래서 정신이 다만 그중 일부만을 떠올리고 있을 때, 이것들에 입각해서 발언된 주장은, 이들에 의존하고 있는 한, 참되다(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가지적인 긍정은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거짓일 수 없다). 그러나 나머지 상황들을 소홀히 하게 되면, 그것은 그 주장 전체에서 볼 때 정신과 사실 또는 사물과의 불일치로 이끌 수 있다. 우리 정신의 대상들은 보통 대단히 복잡하기 때문에 그리고 의지는 어떤 단편적인 善 속에서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의지는 성급하게 지성으로 하여금 대상의 참으로 포착된 측면들에 입각해서 주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넘는 주장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 토마스에게는 오류의 비-신학적인 기원이다(『보에티우스 삼위일체론 주해』 3문, 1절).
5. 존재는 가지적이다
-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와 지침들을 따르면서 존재자는 가지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즉 존재자는 지성에 의해 포착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지성은 존재 자체를 포착하도록 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즉 존재가 실제로 그러한 그대로 실존한다고 주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유한하고 제한된 모든 지성에 해당되는 것으로 따라서 지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모든 개별 인간의 지성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존재가 존재인 한 참되고 가지적인 것처럼, 존재는 존재인 한에 있어서 善하고 원욕될 만하다. 無는 원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도, 만일 원해진다면, 그것이 존재의 결핍으로서가 아니라, 선으로, 존재로, 생각되는 한에 있어서, 원욕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인 한에 있어서의 존재는 긍정이고, 그 본성은 선하다. 모든 존재는 존재에 관한 것을 가지고 있는 한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본성이란 습성적 태도를 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그의 본성에 따라 어떤 적극적인 목적을 향해 기운다. 그러나 바로 자기 본성으로부터 일탈하는 한 상실되어 분정과 악에 떨어질 수 있다. 이 일탈 가능성은 그의 존재의 한계들로부터 온다. 오직 무한 존재만이 자기 본성으로부터 일탈할 수 없다. 개개인의 지성적 인식도 존재 자체를 포착하도록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지성이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으므로 상실되고 거짓에 떨어질 수 있다면, 또한 그의 독특한 본성에 따라 그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덕분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일탈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성 토마스는 주장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성 토마스도 각 개인이 진리를 (그리고 때로는 예컨대 자신의 존재 자체 포착 능력이라든가 모순율의 진리처럼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진리까지도) 소유할 수 있음을 보장하기 위해서 각 개인의 지성적 인식을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보편 필연적으로 타당한 가지적 진리를 보증하기 위해서 바로 이 토대 위에 감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개념들의 기원 이론 즉 (순수 가지적인 것들을 직관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슬러) 추상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허용된다.
6. 추상 작용
-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추상(abstractio) 이론을 받아들인다. 각 개인에게는 어떤 지성적 빛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공통 경험에 의해서 제공된 물체적 존재자들 속에서 보편 필연적인 (즉 무한한 개체들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들을 포착할 수 있는 가지성의 원천이 인간 각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또 그들 속에는 개체화되고 구체화된 요소들도 있다. 이 요소들은 오직 가능태로만 가지적이다. 그러나 명백해지기만 하면 즉 지성적 빛에 의해 조명되기만 하면 또는 그것이 처하고 있는 개별성으로부터 파내지고 추상되기만 하면 현실태로 가지적일 수 있다.
사물들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따라서 그들이 존재들이라는 것, 실체 혹은 성질들이라는 것, 물체나 영들 또는 원인이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인 지성적 인식은, 하나의 돌멩이 앞에서 하나의 존재자 앞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돌멩이일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존재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자라는 규정은 돌멩이에게 내밀하고 지극히 실제적이다. 그러나 다른 여하한 실재에 대한 규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하한 실제적인 것에게도 타당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규정이다. 이런 규정은 돌멩이 속에서는 가능태로 가지적이지만 지성적 인식 속에서는 현실태로 가지적일 수 있다. 지성은 만일 하나의 존재자라면 비-존재일 수 없다는 것을 즉시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간 지성이 한 돌멩이 앞에서 그것이 하나의 존재임을 알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다고 선언한다고 말하는 것은 돌멩이로부터 존재자 개념을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알 수 없다면 지성적 인식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눈(眼)은 어떤 돌맹이 앞에서 그것이 무슨 색깔을 하고 있는지 느끼고 알 수 없단 말인가? 그리고 지성적 인식은 스스로 그것이 하나의 존재자임을 알 수 없단 말인가? 마땅히 지성적 인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렇다면 그것은 그런 능력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는 논거를 폈다. 그리고 가지적 개념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긍정과 부정을 하면서 직관과 논변을 펴 나갈 수 있는) “가능 지성”(intellectus possibilis)이라고 불렀고, 추상 능력을 즉 물체 세계의 어떤 실재 앞에서 가지적 개념들을 형성하는 능력을 “능동 지성”(intellectus agens)이라고 불렀다(예컨대, 『신학대전』Ⅰ. 제70문 제1-5절; 제85문 제1절).
그러므로 가지적 개념들을 형성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서 인식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지성의 본성에 속한다. 따라서 지성의 첫 번째 활동은 개념의 가지성(可知性)을 산출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사물들에 공통적인 요소들을 가지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물체적 대상들을 감각적인 것들로 만드는 것은 감각적 빛이듯이, 사물들의 보편적인 측면들을 가지적으로 만드는 것을 ‘가지적 빛’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의 본성의 능동적인 면을 선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는 ‘빛’이라는 비유를 채택하고 있다. 성 토마스는 이 활동 속에서 지성적 인식의 1차적이고 근본적인 완전성을 통찰하고서 그는 이렇게 썼다: “능동 지성의 빛(lumen intellectus agentis) 속에서 어떻게든 모든 학문이 솟아나오게 된다. 이것은 능동 지성의 빛으로 즉시 인식되는 보편적 개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보편 원리들을 통해서 하듯이, 다른 것들을 판단하고, 그 원리들을 그것들 속에서 미리 인식한다”(『진리론』 제10문 제6절). 논변의 제1원리들은 능동 지성의 빛 속에 함축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가 명시적으로 포착되게 되고, 존재자, 실체, 원인 등과 같은 가장 보편적인 개념들이 추상되고 이해되자마자 모든 인식을 증진하는 데 동원되게 된다.
성 토마스는 이 제1원리들과 제1개념들이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던 ‘영원한 진리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확실히 신의 정신 속에 있고, 인간에게도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신 안에 있는 관념들을 직관함으로써라든가 각자의 창조활동 시에 인간의 정신 속에 그것들을 인각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인간 각자에게 바로 지성을 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지성의 빛 속에 저 진리들은 함축적으로 포함되어 있고 그 빛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가르침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순수 지성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어떤 육체와 결합된 지성적 영혼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언제나 현실태로 있으면서 순수 지성체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지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육체와의 결합 때문에 때로는 현실태로 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가능태로 있기도 하는 그런 지성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성은 점차적으로 인식에 이르게 되는데, 직접적으로 (가지적이 아니라) 감각적인 실제 경험 속으로 나아가는 만큼 조금씩 진보하는 것이다(『신학대전』 Ⅰ, 제84문 제3절).
성 토마스는 그리스도교의 천사들과 같은 순수 지성체들은 생득적 개념들을 통해서 인식하고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지성은 (개념들을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이지도 않고 또 ‘추상적’이지도 않으며(왜냐하면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술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개념들과 원리들의 ‘가치’에 관해서 관념과 원리들이 생득적이라고 주장하든 아니면 관념과 원리들을 산출하는 지성이 생득적이라고 주장하든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영적 피조물』 제10절 제8답). 왜냐하면 지성이 자연적으로 선한 산출 능력이라는 것 즉 존재를 실제 있는 그대로 말하고 인정하도록 되어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7. 본질 인식
- 이상의 인식론적 전제들과 더불어, 그리고 물체적 존재자들을 질료-형상의 합성체로 즉 그 자체로 가지적이 아닌 요소와 그 자체로 가지적인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가르침과 더불어,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이 모범을 따라 보편적 개념들의 가치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고, ‘실재론’(realismo)을 확립했다. 즉 가지적 내용의 상관자가 실재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신학대전』 Ⅰ, 제84문 제1절; 제85문 제2절; 『진리론』 제10문 제4절). 이 보편 개념들은, 예컨대 어떤 특정인이 실체라는 것, 몸이라는 것, 연장되어 있다는 것, 키가 크다는 것, 색깔이 검다는 것 등은 ‘보편적 본성들’을 지칭하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저 특정인이 그것들을 실제로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무한히 많은 사람들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각자에게 참인 것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어느 누구에게 있어서도 참이다.
그렇지만 이 개념들은, 바로 가지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실체적 형상과 우유적 형상들로부터 유래된 것들이기 때문에, 질료에서부터 유래되는 것을 지칭하지도 또 지칭할 수도 없다. 오히려 ‘추상적’인 그만큼 즉 개체들 속에서 가지는 개별적 구체화로부터 이격됨으로써 가지적이 되는 그만큼 가지적이다. 질료에서부터 오는 개체화는, 그런 존재자들을 추상을 통해서 인식하는 자에게는 어떤 가지적인 것일 수가 없다. 바로 여기서 토마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개별자’의 개체성은 지성에 의해 직접 인식되지 않지만, 개별자를 그 개체성 속에서 느끼고 만지고 보는 외부 감각기관들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포착된다. 어떤 물체적 개별자에 대해서 지성이 고유하게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모두 그 가지적인 요소들이다: 실체, 원인, 연장, 능동. 이런 가지적 요소들 전체는 거의 언제나 다만 어떤 개별자에게만 고유하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감각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성적으로도 인식되며, 다른 여하한 것으로부터도 감각적으로 그리고 지성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 토마스에 따르면 개별자는 지성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것의 개체성이 개체성 그대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완전히 닮은 두 쌍둥이를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구별할 수 없는 경우, 엄밀하게 말해서 구별짓는 요소는 어떤 형상적 요소가 아니라 오직 질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그것의 개체화와 개체성은 인식될 수 없다(『진리론』 제10문 제4-5절; 『신학대전』 Ⅰ, 제84문 제1절). 인간의 본성, 추상 통한 인식, 개체에 대한 직접적이고 고유한 인식 불가능 등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토마스의 가르침들이다.
보편 개념들은 사물들 속의 가지적인 요소들인 ‘공통 본성들’을 지칭한다. 보편 필연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학문’ 즉 보편적으로 타당한 가지적 인식이 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공통 본성들이 동일하게 인간 지성에 의해 가지적인 것은 아니다. 질료에서부터 추상된 것이 인간에게는 가지적이므로, 가지성의 척도가 어째서 질료로부터의 거리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신학대전』 Ⅰ, 제84문 2절). 질료로부터의 추상의 등급에 따라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적 공통 본성들 즉 존재자, 실체, 원인 등의 개념들은 가장 추상적이다. 그리고 수학적 공통 본성들 즉 數나 線같은 개념들이 온다. 이들을 통해서 2+2의 합이라든가 삼각형의 공리등이 직접적으로 또 쉽게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물리학적 공통 본성들 즉 다른 모든 개념들이 온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그 자체로 가지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드러내는 서로 다른 특성들을 통해서만 개체화되고 구별될 수 있다. 물리적인 종적 본질은 그들이 질료 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가지적 인식을 벗어난다. 감각적 사물들의 본질적 차이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고 성 토마스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존재자와 본질』 제6장; 『대이교도대전』 Ⅰ, 제3장; Ⅳ, 제1장; 『신학대전』 Ⅰ, 제29문 제1절 제3답; 제77문 제1절 제7답). 그들에 대해서는 오직 그들의 특성들을 의식하는 한 의식하게 되는 데 반해, 수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질들에 대해서는 참다운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실상 그들은 본질로서 가지적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는 다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특성들에 대한 증명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물리적 본질들에 대해서는 이런 인식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물은 어째서 다른 온도에서가 아니라 특정 온도에서만 끓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8. 귀납추론
- 그러나 성 토마스에 따르면 왜 물리적 본질들이 꼭 그렇게 변화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그것들이 사실상 보편적으로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과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개체화가 종적인 형상적 본성들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전제할 때, 오직 자유를 가진 영적 존재자들에게만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따라서 물리적 본성(자연)의 법칙들은 항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같은 종에 속하는 물리적 존재자들의 변화 방식은 ‘하나’로 규정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된다. 여러 경우들의 반복적인 경험들과 더불어 귀납과정을 통해서 가끔은 일정한 방식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다. 특수한 주변 여건들의 의존성이 배제되고 항구한 변화가 공통 요소 즉 보편적 종적 본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인정될 수 있을 때, 그 종적 본성의 모든 구현들에 있어서 동일한 변화 방식이 발견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분석론 후편 주해』 제2권 제20강).
그러므로 성 토마스에 의하면, 과학적 추론으로부터, 미래 예측의 어떤 커다란 개연성이 아니라, 어떤 진정한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바로 본질들의 ‘형이상학적’ 확실성은 절대적이고 그 반대는 불가능하지만, 본질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본질들의 행동과 변화 방식에 관련되는 ‘물리학적’ 확실성은 절대적이지 못하고 다만 ‘가설적’이다. 즉 본질들의 우연적 실존과 창조주의 불간섭에 종속되어 있어서 어떤 예외적인 경우에는 기존의 변화 방식을 중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100도에 끓는다’는 것이 물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귀납적으로 알았다면, 물이 100도에 끓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본질에 관한 확실성이기 때문에, 물리적 본질들도, 형이상학적이고 수학적인 본질들처럼,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내일 어떤 물이 100도에 끓으리라는 것은 그 반대가 불가능할 만큼 확실한 것은 아니다. 세상은 창조주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알 수 없는 동인에 의해 어떤 변화 방식이 정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 범위 내에서는, 만일 아무런 예외적인 개입도 없이 세상이 그대로 지속된다면, 확실히 내일 그리고 미래에도 물은 100도에서 끓을 것이다.
9. 감각적 인식의 가치
- 성 토마스는 지성적 인식에서 인간의 최고 완성과 품위를 본다. 그것은 지성적 인식이 또한 인간 자유, 자율, 책임감의 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 지성의 능력에 커다란 신뢰를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안고 있는 결핍성, 불확실성, 한계들을 감추지는 않았다. 개별자들을 직접 고유하게 인식할 수 없다고 했고, 물리적 본질들을 가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외부 감각기관들을 때리는 자연의 인식을 매우 불완전하고 근사치적이라고 생각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색깔, 맛, 냄새와 같은 감각 성질들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아주 조금 또는 전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외부 감각기관들 자체에 의해서는 분석될 수 없는 그 성질들로부터 오는 자극에 의해 변형되는 한에 있어서 외부 감각기관들에 의해서 지각되기 때문이다. 실상 외부 감각기관들은 감각 기관들의 구성 때문에 가끔 다양하고 복잡한 어떤 자극을 단순하고 단일한 것으로 느낀다(Quidquid recipitur ad modum recipientis recipitur). 따라서 외부 감각기관들의 인식은 매우 상대적이고, 대상의 존재 자체를 지각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줄 모른다. 이것은 지성에 의해서 탐구될 수 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데, 그것도 겨우 개연적인 결과들만 얻어내기 일쑤다(『신학대전』 Ⅰ, 제78문 제3절).
그러므로 성 토마스는 지성적 본성의 확실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감각적 본성의 확실성으로부터 출발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성적 인식을 가지고 감각 인식의 소여들을 조명했다. 그는 수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연역의 확실성에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했다. 이 확실성들이 논변의 제1원리들의 직접적 조명 하에서 더욱 보편적이고 더욱 단순하고 더욱 순수한 개념들로부터 흘러나올수록 그 가치는 더 큰 것이다. 그가 자신의 형이상학을 정초하는 것은 감각적 인식 위에가 아니라 바로 이 개념들과 원리들 위에이다. 이 형이상학이 실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지성이 진정한 개념들을 추출하는 것이 바로 실재로부터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타당한 이유는, 지성이 형이상학에게 가지성과 자명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존재론
-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범을 따라, 아주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추출된 ‘존재’와 ‘생성’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두 개념 위에 그의 형이상학 전체를 정초한다고 선언한다. 실상 존재 개념 분석으로부터 그것이 하나의 ‘유’(genus)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연역한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초의 근본적인 주장이다. 생성 개념으로부터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핵심적 구조인 가능-현실 이론과 4원인론이 연역된다.
1. 존재 개념
-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있고, 무는 없다’고, 그리고 존재는 존재로부터 올 수도 없고(왜냐하면 이미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로부터 올 수도 없다고(왜냐하면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왜냐하면 존재의 차이들은 존재에 속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차이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말했다. 절대적인 일원주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답변한다: 그런 논변은, 만일 존재 개념이 예컨대 ‘동물’처럼 類 개념이라면, 즉 그 의미에 이질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어서 동물성에는 이질적인 ‘이성성’이 동물에 추가됨으로써 ‘인간’ 개념을 이루게 되고, 비-이성성이 추가됨으로써 평범한 동물 개념을 이루게 되는 경우라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 개념은 類 개념이 아니다. 존재는 類가 아닌 것이다(『형이상학』 Ⅲ, 제3장 998b22). 존재자(ens) 개념은 아무런 이질적인 차이(종차)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차이들을 모두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안에 (일의적univoca 개념들이 가지는 절대적 동일성은 아닌) 어떤 특정 동일성과 (다의적equivoca 개념들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 다름은 아닌) 어떤 특정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유비적’(analogica) 개념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유비적 개념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존재 개념 또는 존재자 개념이다. 이 개념은 자기 안에 함축적으로 모든 차이들을 담고 있다. 이 차이들은, 어떤 존재자에 대해서 실체라든가 아니면 성질이라든가, 현실적 존재자라든가 아니면 가능적 존재자라든가, 절대적 존재자라든가 아니면 상대적 존재자라든가 등이라고 말할 때,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체는 존재고, 성질도 존재며, 현실적 존재자든 가능적 존재자든, 절대적 존재자든 상대적 존재자든 모두 다 존재들이다. 존재 개념 또는 존재자 개념은 모든 유적, 종적, 또는 개체화시키는 차이들을 다 담고 있고 또 그들을 넘어간다. 이 모든 차이들을 넘어가고, 이런 의미에서 ‘초월적’(transcendentalis)이다. 존재자의 유비와 초월성은 존재자들의 복수성과 상이성들을 설명해준다. 이렇게 해서 존재론적 일원주의(monism)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生成에의 길을 열어주며 형이상학 체계 전체를 건설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가르침들을 성 토마스는 자신의 철학적 사변을 시작할 때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고(『진리론』 제1문 제1절; 제2문 제11절; 『명제집 주해』 Ⅰ, 제19구분 제5문 제2절) 이후 언제까지나 유지하고 있었다(『신학대전』Ⅰ. 제4문 제1절; 제13문 제5절; 『대이교도대전』 Ⅰ, 제25장; 제32-34장; 『영혼에 관한 토론문제』 제6문 제2답).
2. 존재 개념
- 경험으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개념은 ‘생성’(fieri) 개념이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아무리 그것이 짧더라도, 존재 경험이기는커녕, 어떤 생성 변화하는 존재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나 변화는 무와 존재의 어떤 계기적인 도약이 아니라, 어떤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어떤 것도 완전히 우리 경험에 포착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어떤 지속적인 요소와 어떤 지나가 버리는 요소가 병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계속되는 요소는 어떤 때는 이런 방식으로 규정되었다가 다른 때 저런 방식으로 규정된다. 먼저 가능태로 있다가 지금 현실태로 있는 규정은 언젠가는 다시 가능태로 돌아갈 것이다. 생성에는 이처럼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현실태에서 가능태로의 이월이 있다. 그리고 생성의 여러 형태에 따라 순간적인 이월이 있는가 하면, 계속적이고 연속적인 이월도 있다. 그러나 공통적인 요소는, 어떤 때는 이런 규정으로의 가능태에 있고 다른 때는 저런 규정으로의 가능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저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이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본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자체는 이런 모든 것과 무관하다. 그러므로 이런 무관함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어떤 다른 존재자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가능태로 있다는 것은 현실태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딘가로부터)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며, 그 스스로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다른 존재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일 한 규정으로부터 다른 규정으로의 이월을 촉발시키는 자가 그 본성상 이런 저런 이월과는 무관한 자라면, 그는 자기와는 다른 어떤 자로부터 무관함에서부터 유관하게 연루되게 된 것일 수밖에 없다. 영속하는 요소는 ‘기체’(substractum) 즉 ‘질료적 원인’(causa materialis)이고, 지나가는 요소는 형상 즉 ‘형상적 원인’(causa formalis)이며, 이월을 촉발시키는 자는 작위자 즉 ‘작용인’(causa efficiens)이고, 행위자를 규정하는 자는 목적 즉 ‘목적인’(causa finalis)이다(『자연학 주해』 Ⅱ, 제5강).
3. 가능-현실
- 그러므로 생성에 대한 분석은 가능태로 있는 존재와 현실태로 있는 존재 개념들로 귀결된다. 언제나 연속적인 현실태가 될 가능 상태에 있는 요소는 바로 ‘가능성’(potentia)이라고 불리고, 연속적으로 실현시키는 요소는 ‘현실’(actus)이라고 불린다. 이 두 개념은 존재적으로 구별(distinctus)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존재적으로 구별(separatus)되는 것은 아니다. 실상 만일 그러했다면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라 두 개의 존재자였을 것이다. 이들은 다만 자기 단일성을 가지고 생성되는 하나의 존재자의 두 구성적 원리들인 것이다. 이미 각자 스스로 실존할 수 있는 완전한 존재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서로 정초됨으로써 한 완전한 존재자를 구성한다. 따라서 생성 변화하는 모든 존재자는 하나의 單純한 존재자가 아니라 複合 존재자이다. 그 안에서 ‘현실’(actus) 즉 사실상의 실존 구현은 완전하게 만드는 요소 즉 완전성이다. 그리고 완성되게 되는 基體인 능력(또는 가능, potentia)은 그 완전성을 개별화시켜 이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되게 만들고 다른 어떤 등급이 아니라 바로 그런 등급을 만드는 즉 완전성을 제한하는 요소이다. 현실(태)은 오직 가능에 의해서만 제한되게 된다.
한편,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이월은 생성 변화하는 존재자 즉 능동인에 의해서 촉발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이 능동인도 어떤 생성 변화하는 존재자라면, 그것도 역시 주기 위해서는 바로 그 주는 그것을 어디로부터인가 받았어야 할 것이고, 이 경우 생성 변화하고 받는 한, 어떤 원인에 대해서는 ‘결과’(effectus)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는 자는 주는 한에 있어서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완성되는 결과에 대해서 완성하는 완전성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완전성 또는 완성하는 현실(태)은 어떤 가능태에 의해 제한받는 현실(태)와 전혀 다른 본성의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오직 현실(태)만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즉 아무런 제한이나 가능태도 없는 ‘순수 현실’(actus purus)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원인이 참으로 순수한 원인인 이유는 바로 제한 없이 무한한 현실(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한하기 때문에 유일할 수밖에 없다. 실상 만일에라도 어떤 특정 완전성에 있어서 두 개의 무한자가 있다면, 하나는 다른 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더 이상 무한자가 아닐 것이다. (두 개의 순수 현실은 서로 구분되기 위해서 하나에게는 있고 다른 것에게는 없는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각각에게 적합한 무엇을 지니지 않고 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라 동일한 것일 것이다). 따라서 같은 종류의 실재에 속하는 두 개의 순수 현실이란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각 종류의 실재에 있어서 순수 현실은 무한하고 유일하다. 한편 어떤 가능(태)을 완성하는 현실들은, 즉 결과들은, 다수일 수 있고, 그래서 어디까지나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생성은 가능과 현실 개념들을 요구한다. 그리고 원인 개념은 순수 현실 즉 무한하고 유일한 순수 완전성을 요청한다. 만일 생성 즉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넘어가는 이월이 ‘운동’(motus)이라고 불린다면, 그 결과는, 운동 이전에 ‘운동 가능한 것’(mobile)이고, 운동 이후에는 ‘움직여진 것’(motum)이며, 원인은 ‘기동자’(起動者, movens)이다. 그 기동자는 결과가 아니므로 운동 가능한 것이 아니고 부동자(immobile)이다. 이렇게 해서 불완전한 것을 완성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기동자’(movens immobile)개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만일 순수 현실 또는 순수 완전성이 어떤 基體의 완전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기체 속에 자립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 때문에 자립하는 완전성(perfectio in se et per se)은 어떤 순수 본질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컨대 얼굴이나 다른 모든 아름다움들을 완성하는 아름다움들에 비겨 아름다움(美) 그 자체라는 플라톤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하나일 수밖에 없는 美 그 자체는 자라날 수도 감소될 수도 없는 불변적인 것이다. 생성의 사실로부터 촉발된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들을 대조해 보게 되면 바로 이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연역 방식들에 따라, 우리는 성 토마스의 형이상학의 최초의 주요 입장들을 이해할 수 있다: “가능(태)과 현실(태)은 존재자와 여하한 존재자의 類도 나눈다”(『신학대전』 Ⅰ, 제77문 제1절; 『영적 피조물』 제1절; 『분리된 실체』 제7장). 따라서 실존하는 모든 것은 혹은 순수 현실이거나 혹은 현실-가능으로 합성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현실태로 있는 어떤 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넘어갈 수 없다”; “아무런 기체에도 속하지 않는 현실(태)은 무제한적이고 무한하다”. “자립하는 것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다”(『대이교도대전』 Ⅰ, 제43장; Ⅱ, 제52장; 『영적 피조물』 제1절; 『분리된 실체』 제8장). 왜냐하면 그것은 받은 것이고 원인받은 것으로서, 순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기원을 둔 이런 입장들은, 이제까지 언급된 모든 가르침의 모든 주제들의 기본 전제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미 말한 대로(2.1) 아퀴나스에 의해서 최초의 작품들로부터 마지막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유지되었다.
4. 본질-실존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핵심적 원리들을 밝혀내는 데 있어서 성 토마스의 특별한 공로는 존재를 현실(태)로서 고찰하는 데 있고, 따라서 존재에 가능-현실의 원리들을 적용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렇게해서 신을 순수 존재 현실(actus essendi)로 피조물을 존재와 본질의 합성체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존재자와 본질』(제5장)에서, 보에티우스는 존재와 본질의 구분을 알고 있었고, 또 지성 속에서도 ‘quo est’와 ‘quod est’를 구분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에티우스의 일부 주해자들은 성 토마스가 암시하고 있는 본문들 속에 실존과 본질의 구분이 현존한다는 데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형이상학 주해』(Ⅳ, 제2강, Cathala판, n.558)에서 성 토마스는 이 구분이 아비첸나에게 현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비첸나가 (몇몇 논증의 유사성 또는 동일성으로 미루어 보아) 자기 영감을 끌어내고 있는 알파라비(Al-Farabi)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껏 우리는 알파라비 자신이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신-플라톤주의 등의 원천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참조: A. M. Goichon, La distinction de I’essence et de I’existende d’apres Ibn Sina, Paris, 1937, p.132). 알파라비는 본질과 개체화 사이에, 그리고 ‘무엇임’(quidditas)과 자체성(ipseitas) 사이에 구분을 직접적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실존을 자체성에 접근시키면서 자체성과 실존은 하성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동시발생적’인 우유로서 ‘무엇임’에 부가된다고 말하고 있고, 또 실존의 원인은 무엇임이 아니라 무엇임과 자체성이 거기서 동일시되는 어떤 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비첸나는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실존은 피조된 여하한 본질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본질들의 원인들은 실존의 원인들과 다르다. 예컨대 삼각형의 본질은 세 개의 선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의 실존은 어떤 다른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물질(질료)과 같은 본질들은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존재이다. 본질들은 존재를 받고, 존재의 주체 즉 기체들이다. 그 본질들이 존재할 수 있는 그만큼 존재자들은 더욱 완전하다. 본질은 실존하는 그것이고, 존재는 그것 때문에 본질이 존재하게 되는 그것이다. 본질은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움푹한 그릇(오목함)과 같은 것이고, 모든 존재는 오목함이 없는 존재로서 관통될 수 없는 존재이고 충만한 존재로서 오직 존재일 뿐이다(상동, 133-48). 이미 알파라비에 따르면 신은 必然有이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다만 가능할 뿐이다. 필연유는 아무런 제한도 없는 최초의 것이고 지극히 완전하며 모든 유와 종을 초월해 있고, 불변하고 비물체적이며 지성적 인식과 그 대상이 동일시되는 순수 지성으로서, 의지를 소유하고 있고, 최고의 美, 최고의 善, 완전한 참행복, 최초의 애인이고 그 최초의 대상이다. 모든 다른 실존들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의 존재의 흔적들이다. 그는 지성적 인식에 따라서 작업하고, 그에게서 직접적으로 파생되는 것은 오직 ‘제1지성’으로서, 이 지성 속에서 구분, 다수성, 합성이 시작된다(상동, 152-54). 아비첸나는 이 모든 알파라비의 입장들을 받아들여 신에 있어서의 본질과 존재의 동일성과 피조물들에 있어서의 존재-본질의 구별로 해석한다. 그 본질이 존재인 저 존재는 필연 존재이고, 그 본질이 실존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가능 존재들이다. 이 가능 존재는 그 구현이라는 점에서만 이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론적 구성에 있어서도 이렇게 불리고 있다. 필연적 존재자가 둘일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존재 필연성일 것이고 따라서 서로 동일시될 것이다. 가능과 현실로 합성된 모든 것, 즉 생성 변화하는 모든 것은 가능 존재다. 모든 현실은 존재이고 필연적 존재자는 오직 존재일 뿐이다(상동, 157-199). 창조는 어떤 조명적 방출, 신의 존재의 ‘귀결’, 어떤 흘러넘침, 그의 선성에 다른 어떤 필연적 방출이다(201-223).
제라르도(Gerardo di Cremona)에 의해서 라틴 서구 세계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아비첸나의 형이상학은 그리스도교적인 사변 속을 관통해 들어갔다. 파리의 기욤 도베르뉴는 그리스도교의 개념들을 정의하고 명료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아비첸나의 용어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 존재자 = 존재 필연’이었다. 그는 필시 실존하는 존재인 신 개념 위에 그의 이성 신학적 사변 전체를 정초하고 있다. 그는 아비첸나의 작품들을 통해서 존재와 본질 사이의 구분을 알기는 했지만, 아직도 불완전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을 어떤 사상 체계의 초석으로 삼지는 못했다. 바로 이 구별에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 있고 또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입장들을 이성적으로 명료화하기 위한 가장 주목할 만한 공헌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러나 이런 통찰을 가지게 된 것은, 존재를 현실로, 아니 모든 현실이 그것 덕분에 있고 현실적인 기능들을 실제로 수행하게 되는 최고의 현실로 보는 그의 개인적인 통찰 덕분이다. 실상 모든 현실은 참으로 어떤 것이고 참으로 완성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실존하고 있어야 하고 그런 완전성에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이라는 완전성에 참여해야만 하듯이, 美, 善, 지성적 인식, 정의와 같은 모든 완전성들은 어떤 존재자를 참으로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실존의 완전성에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 존재는 모든 현실의 현실이고 모든 완전성의 완전성이다(『권능론』 제7문 제2절 본론과 제9답; 『신학대전』 Ⅰ, 제4문 제1절 제3답). 그 대신, 존재 현실(actus essendi) 자체가 아닌 모든 현실은 존재에 견주어 볼 때에는 존재에 참여하는 하나의 가능(또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한 구현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실존은 가능성의 조건에 견주어 볼 때 다만 존재자들의 현실성의 조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모든 완전성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이 (자기의 존재자의 완전성의 척도인) 존재 현실 자체가 아닌 모든 존재자 속에 있는 이런 완전성의 등급은 본질 즉 (존재 현실력에 견주어 볼 때 가능인) 존재 현실 능력 또는 가능성이긴 하지만, 그 자체 나름대로는 하나의 현실이고 완전성이며 모든 속성과 성품들의 원천인 것이다: 지성과 의지를 갖춘 어떤 사람의 인간 본성, 한 천사에게 있어서의 천사적 본성, 어떤 사자에게 있는 사자의 본성, 등등.
존재에 가능-현실 이론을 적용하게 될 때, 존재는 모든 완전성 중의 완전성이므로 최고의 존재인 신은 순수 존재 현실, ‘그 자체로 자립적인 존재자’(Ens per se subsistens), 존재 자체, 그리고 그 본질이 존재인 그런 존재인 것이다. 다른 어떤 본질도 존재도 아니고 그것을 실존시키는 바로 그 존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본질(quod est)은 모든 특수한 존재를 구성하는 완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신만이 존재와 동일하고, ‘자기 존재 자체’(ipsum esse suum)인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들은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를 ‘가진다’. 어떤 사람, 어떤 천사, 하나의 사자 등등이고, 자기들의 고유한 본질인 것이다. 각각의 존재자는 (어딘가에 참여하게 되는 그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고유한 본질인 것이다. 어떤 아름다운 얼굴이 하나의 얼굴로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그 얼굴은 그 아름다움도 아니고, 자기의 아름다움 자체도 아니며, 오직 언제나 하나의 얼굴인 것이다. 성 토마스가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오직 신만이 ‘자기 존재’(suum esse)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에 참여해서 존재를 지니고 있는 본질들이다. 그들 속에 있는 존재는 받아들여진 것이지, 그들 본질에 고유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이 아닌 모든 존재자 속에는 존재와 본질 사이의 실제적 구별이 있다. 존재 능력과 존재 현실이 실제적으로 구별되듯이 모든 생성 변화하는 존재자에는 가능-현실 사이의 그리고 질료-형상 사이의 실제적 구별이 있다. 따라서 가능-현실 이론을 존재에 적용한 결과인 아비첸나의 논변을 받아들여, 신이 아닌 어떠한 본질 속에서도 실존이 구성적 요소로 들어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아비첸나로부터 존재와 본질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성 토마스는 그가 실존을 본질에 부가되는 하나의 ‘우유’(accidens)로 보았다고 비난한다(『형이상학 주해』 Ⅳ, 제2강, Cathala판, n.558). 그러나 성 토마스는 이미 알파라비에게 있던 ‘동시발생적’ 우유와 ‘파생된’ 우유 사이의 구별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우유 개념에 머물면서, 엄밀한 의미에서 본질의 어떤 우유를 어쨌든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체의 2차적 규정으로서의 우유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알파라비와 아비첸나는 피조된 존재자들 속에서 존재가 본질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피조물들 속에서 실존은 그들의 본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본질 바깥에서부터 오는 것이다(accidit essentiae: ‘본질에 부가된다’). 어쨌든 성 토마스가 엄밀한 의미의 우유와 존재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설사 본질에 ‘부가’된다고 하더라도, ‘부수적’ 현실로서 부가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결합된 그 존재자의 ‘구성적이고 존재적인’ 현실로서 부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아비첸나가 자기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사물들이 신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유출’(emanatio)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난한다(『분리된 실체』 제10장). 성 토마스에게는, 만일 신이 순수 존재 현실이라면 즉 절대 존재라면 신과 존재들 간의 구별은 절대적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모든 존재들과 존재 자체 사이에, 세상과 신 사이에는 어떤 의존 관계가 감싸고 있다. 그러나 신은 세상과의 결속으로부터 자유롭다. 바로 존재 절대인 그의 실존은 어떤 방식으로도 모든 다른 존재들의 실존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존재들은 근본적으로는 실존할 수도 있고 또 실존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 존재들에 지나지 않으므로 실존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필연적 유출 이론은 아비첸나에게 있어서 필연 존재와 가능 존재 사이의 구별에 모순된다. 그리고 그 구별은 존재-본질 구별로부터 요청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아비첸나는 존재를 현실로 고찰하지 않고, 따라서 존재에게 순수 현실의 절대적 우위성과 독립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았다. ‘자립 존재’ 고유의 원인성은, 성 토마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즉 無로부터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무로부터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은 바로 ‘창조한다’(creare)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고유한 결과는 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선재(先在, praeexistere)하고 있던 것의 유출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본질이 실존으로부터 실제로 구별된다는 사실로부터, 신이 창조 작업에서, 미리 실존하던 어떤 부조리한 본질에 실존을 준다는 것이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가능으로서의 본질과 현실로서의 실존으로 구성되는 존재자를 무로부터 창조한다.
성 토마스에게 있어서, 신이 순수 존재 현실이고 피조물들은 본질과 실존으로 합성된 존재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이 무한히 완전한 무한 존재이고 피조물들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차이와 다름이 어떻게 성립되는지를 확정하자는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다르고 차이나는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서로 다른 존재론적 구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무한자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완전성이라면, 다른 것들은 합성되고 제한된 것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하게 하는 것과 그 완전성을 어떤 특정 등급으로 제한해서 그 존재를 천사, 사람, 사자로 만드는 것 사이의 합성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성 토마스에게 있어서,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 또는 존재자라고 말하는 것과 존재-본질의 합성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5. 신과 피조물
- 존재 개념과 그 유비성 및 초월성, 생성 개념과 생성 변화하는 존재자의 가능-현실 합성, 능동인과 목적인 및 인과율의 필연성, 순수 현실이라는 ‘진정한’ 원인, 무한하고 유일한 순수 현실, 순수 현실을 원인으로 가지고 있는 유한하고 제한된 모든 피조물, 현실로서의 존재, 존재-본질로 합성된 모든 유한한 존재자. 이런 모든 전제들로부터 성 토마스는 자신의 특수 형이상학 전체를 연역해 낸다. 이로써 우선 신학적 문제의 근본 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가 갖추어져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순수 지성이 아니고 육체성에 결합된 지성이기 때문에, 어떤 순수 가지적인 존재를 직접적으로 직관할 수 없다. 그 순수 가지적 존재의 실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감각 영역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성 토마스는 인간 영혼의 영적 활동들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서 신의 실존을 입증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시적으로 고찰하지 않는 것뿐이다.)
신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길’(via)은 다섯 가지다. 왜냐하면 존재들이 가장 명백한 경험을 통해 제시되게 되는 많은 측면들 가운데서 그가 선택한 것은 다섯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그 존재들의 유한성을 명백히 밝혀준다. 이 유한성은 유일하고 무한히 완전한 순수 현실과 어떤 가능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현실이라는 원리들에 순수 현실이 순수하지 못한 현실들의 원인이라는 통찰을 부가함으로써 밝혀지게 된다. 이 유한성은 즉시로 무한히 완전하고 유일한 어떤 존재 즉 창조주의 필연적 실존으로 올라가게 만든다. 오직 성 토마스의 정신에는 명료했던 이 현실태와 원인의 형이상학을 염두에 두지 않을 때에만, 성 토마스의 ‘길’들은 유일한 창조주에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결국 어떤 ‘제1원인’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이 존재자는 ‘움직여진’ 또는 생성 변화하는 존재자,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그 자신도 다른 어떤 것을 원인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존재자, 덜 완전할 수도 있고 더 완전할 수도 있는 존재자, 자기 본성상 알지도 못하는 어떤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자이다(『신학대전』 Ⅰ, 제2문 제3절). 경험상의 존재자들의 이런 모든 특성들은, 이 존재자들이 어떤 절대적인 것, 순수 현실들, 원인받지 않은 원인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유한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즉 어떤 원인에 의존하는 결과들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것의 원인이 되기 위해서 그 자신이 다른 것으로부터 원인을 받아야 하는 것은 진정한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에게는 원인이 될 힘과 충분성이 결핍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과의 특성들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존재자의 실존이나마 설명할 수 있으려면 결과를 산출하기에는 한결같이 불충분한 원인 받은 원인의 어떤 무한 계열에 호소한다는 것은 헛되고 부조리하다. 오히려 원인받지 않은 원인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원인은 유한 존재의 원인이 되어야 하므로, 존재의 무한자, 순수 존재 현실, 무한히 완전한 유일한 존재, 존재인 한에 있어서의 존재의 원인, 따라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통한 원인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제5의 길’이 말하고 있는 대로, 어떤 존재의 ‘본성’을 어떤 목적으로 질서지우는 자는 이 존재의 창안자인 창조주일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크고 작은 존재자들의 원인으로 요청되는 ‘제4의 길’의 ‘최고 존재자’는 유일하고 완전한 순수 존재 현실이다. 실존하기는 하지만 (실존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단지 가능할 뿐인 그런 존재는, ‘제3의 길’에서 가능성의 상태에서부터 실존의 상태로 넘어갈 수 있기 위해서, 필연 존재,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그 자체로 필연적 존재, 즉 자기의 본질과 본성으로 존재를 가지고 있는 자, 다시 말해 순수 존재 현실을 요구한다. ‘제2의 길’에서 ‘제1 능동인’은 바로 이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없이는 오직 무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첫째’, 모든 결과들의 토대인 존재를 산출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상 나머지 전부는 존재의 규정들일 것이다. ‘제1의 길’의 ‘부동의 기동자’는 바로 이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자들 속에서 비-존재에서 존재로의 ‘운동’까지도 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는 자신의 ‘다섯 가지 길’(五道, quinquae viae)을 데시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관념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유일 완전한 존재인 창조주 하느님의 실존을 참으로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이 ‘길’들은 부동의 제1 기동자, 원인받지 않은 원인, 필연적 존재, 최고 존재자, 자연의 안배자, 순수 존재 현실의 모든 속성들의 실존으로 인도하면서, 동시에 신의 본성과 그의 속성들을 확정하는 데에로 이끌어간다. 그는 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동의 제1 기동자이기 때문이다(『신학대전』 Ⅰ, 제3문 제1절). 아무런 질료나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뛰어난 순수 현실이기 때문이다(상동, 제2절). 그에게서는 본질과 실존이 일치된다. 왜냐하면 제1 능동인이고, 그리고 아무런 가능성도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와는 다른 어떤 것과 합성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無에 대해서 가능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제1 능동인이기 때문이다(모든 합성체는 원인받은 것들이다)(제6-7절). 그것은 가장 완전하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현실이기 때문이며, 대단히 활동적인 절대적인 제1원인 즉 최대로 현실태로 있고 최고로 완전하기 때문이다(상동, 제4문 제1절). 그것은 최고선이다. 왜냐하면 주는 자는 사랑스러운 법인데, 그는 제1 능동인으로서 모든 것에게 그들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주는 자이기 때문이다(제5-6문). 모든 완전성에 있어서 무한하다. 왜냐하면 아무런 가능태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 순수 존재 현실이기 때문이다(제7문). 어느 곳에나 다 있다. 왜냐하면 원인은 자기의 결과 속에 현존하는 법인데, 그는 모든 것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더없이 내밀하게 현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 때문에 실존하게 되는) 현실보다 더 존재자에 내밀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제8문). 그것은 불변적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과 다를 수 있는 아무런 가능성도 지니고 있지 않은 순수 존재 현실이기 때문이다(제9문). 그것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불변적이기 때문이다(제10문). 그것은 하나 즉 자신 안에 나뉨이 없다. 왜냐하면 가능-현실의 여하한 합성도 절대적으로 缺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일하다. 왜냐하면 순수 현실로서 자기 안에 그것을 다수화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둘이 있었더라면 자기 안에 서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은 온통 서로 동일시되고 말 것이다(제11문).
인식, 생명, 의지, 사랑, 정의, 자비, 섭리, 전능, 참행복 등 신의 모든 다른 완전성들을 그는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모든 완전성들의 원인이고 원인인 한에 있어서 다른 것들 안에 있게 만드는 그것을 먼저 자기 안에 탁월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제12-26문). 특히 성 토마스는 ‘왜’ 그리고 ‘어떻게’ 신이 자기와는 다른 모든 것들을, 어쨌든 가능하거나 실존하고 있는 모든 것을, 미래의 자유로운 행위들까지도 인식하는지를 증명한다(제14문 제13절). 또한 ‘왜’ 그리고 어떻게‘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불변성이 그에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제19문). 그리고 자유로운 행위자들에게 필연성을 강요함이 없이 그리고 직접 악의 원인이 되지 않고도 그들의 행위들을 추동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얼마나 섭리하는지를 해명한다(제19, 22, 49, 103, 104문). 그리고 신의 고유한 행동 방식이 왜 창조인지, 어떻게 창조에서 물질은 벗어나는지를 입증한다(제44-45문).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한 두 사실 즉 ‘존재’와 ‘생성’의 경험으로부터 형이상학의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들의 형성으로 올라간 성 토마스는 다시 경험으로 돌아와 경험의 가장 흔한 측면들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이성적 신학을 연역한다. 같은 원리들을 세상과 인간에 적용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천사론, 자연 철학, 인간학을 연역한다. 신은 순수 존재 현실이므로, 모든 다른 존재자들은 존재 현실과 존재 가능으로 즉 실존과 본질로 합성된다. 만일 존재의 어떤 특정 등급이라 불리는 본질 즉 완전성이 순수 완전성이라면, 그것은 단순하고 유일하며 모든 완전성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순수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가능-존재로 합성된 것이고, 이 경우 가능(태)은 더 이상 본질적 구별의 원인일 수 없으므로, 양이나 연장과는 무관한 어떤 수적인 구분의 원인일 것이다. 즉 그것은 본질적이고 종적인 동일한 완전성 속에 다수적인 물체들의 실체적 구성 요소로서의 제1질료일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불변적인 존재와 비겨 볼 때 다른 모든 존재들은 완성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의 실체(이것은 앞에서 말한 이유로 다만 실존과 본질로만 합성되어 있든가 아니면 본질 속에 또 다시 형상-질료의 합성을 가짐으로써 2중의 합성을 지닐 수 있다)와 우유 또는 그 실체의 2차적 규정들로 합성된 것들이다. 물체들 속에서 이 2차적 규정들은, 성 토마스가 따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 분석에 따르면, 아홉 가지다: 즉 실체와 더불어 물체적 존재의 10가지 범주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원리들을 적용하면서 성 토마스는 그리스도교 계시의 천사들을 물체적이 아닌 지성적 존재들로 개념했다. 다수화의 원리인 질료를 결하고 있기에 각각의 種에 유일한 순수 지성체들이며, 種에 각각 유일한 자들로서, 이들 지성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천구를 움직이는 지성체들이고, 플로티누스에게는 유일한 ‘정신’(Nous)이며, 아랍인들에게는 (역시 유일한) 능동 지성이었다. 한편, 모든 물체적 존재자는, 이미 살펴본 대로, 그 실체적 본질에 있어서 형상-지료로 합성되어 있다(이것은 물체들의 변화라는 가장 일반적인 사실에 기원을 둔 형이상학적 고찰로서, 당시 4개의 원소들을 인정하고 있었고 과학의 발전으로 변화를 겪게 되는 물리적 고찰과는 다르고 또 독립적이다). 형상(forma)들은 다소 효과적이고 산출적인 어떤 능동적 원인의 행위 덕분에 질료의 잠재력으로부터 이끌어 냄으로써 결과된다. 모든 실체 속에는 실체를 그런 실체로 즉 근본적인 제1실체로 규정하는 형상 단일성이 있어서, 이후의 모든 다른 현실들은 우유들로, 즉 다수적일 수도 있는 2차적 규정들로 개념될 수밖에 없다. 질료는, 종적으로 동일한 실체적 형상들의 다수성의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즉 시-공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물체적 실체 각각의 개체성의 기원이라는 의미에서 형상들의 개체화의 원리이다.
6. 인간
- 육체적인 인간에게 성 토마스는 질료-형상 이론을 적용한다. 그의 생명 원리는 유일할 수밖에 없으며 유일한 영혼이 질료와 실체적으로 결합된 것일 수밖에 없다(『신학대전』 Ⅰ, 제76문). 그러나 인간의 생명 원리는 질료의 규정들과는 전혀 무관한 어떤 활동 즉 지성의 활동을 드러낸다. 만일 이 활동의 원리가 물질적이라면, 어떤 물체의 본성은 단 하나의 규정된 본성이므로(다른 어느 것과도 적절히 동일시될 수 없다), 따라서 그러면서도 만일 어떤 것의 본성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즉 모든 사물들을 저 규정된 본성에 따라(예컨대 나무나 쇠의 관점에서) 인식하지, 각자 고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의 다양성에 따라서 인식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물들은 모두 말하자면 다르게 만들어지고 다른 성품들을 가진 나무나 쇠들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눈이 다만 빨강만을 볼 수 있게 만들어졌다면, 모든 대상을 다만 빨강의 다양한 변형들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특수한 물질적 본성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사물들의 본성들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영혼 자신은 하나의 물체가 아니며, 또 인식하기 위해서 어떤 신체 기관을 활용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랬다가는, 다시 말하지만, 언제나 유일하게 신체 기관의 본성만이 영혼에 현존하게 될 것이다.
이 특징적인 논변은 아낙사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었다. 지성은 물체 세계를 ‘지배’하며, 물체와 ‘섞이지 않았다’. 그것은 여하한 특수 규정들을 넘어가고 어디든지 번져가며, 이해하고 깨달으며 논변한다. 그 대상은 특수한 감각적인 것들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가지적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지성적 활동은 비물체적이고 비물질적이며 영적이다. 그러나 행동은 그 본성상 (거기서부터 솟아나는) 존재보다 우월한 것일 수가 없다. 만일 그랬더라면 적절한 원인 또는 (단적으로) 원인이 없는 어떤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지성적 원리를 갖추고 있는 존재는 비물질적이고 영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영혼은 바로 이런 원리로서 영적이다. 이것이 바로 질료와는 무관하게 ‘자립한다’ 또는 그 자체로 실존한다는 말의 의미이다(상동, 제75문 제2-3절).
만일 사정이 이러하다면, 인간 영혼은 생장적, 감각적, 지성적 활동의 원리이므로, 이런 어떤 실체적 형상이고, 육체와 결합되어서 육체에 의존하고 육체와 협력해서 첫 두 활동을 포괄하고, 육체와는 무관하게 세 번째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렇지만 자기 존재의 완전성을 자기 활동의 가장 완전한 등급에 따라 평가받는 것이라고 할 때, 영혼은 자기 존재에 있어서 질료와 무관하고 자기 자신 안에 존재를 가진다. 따라서 그 존재는 질료로부터 산출을 통해서 영혼에 오게 된 것이 아니다. 어떠한 물체적 행위자도 물체적 행동들을 통해서 어떤 비물질적인 존재에 실존을 줄 수 없다. 영혼은, 식물이나 동물의 생명 원리들에서 보듯이 질료의 잠재성으로부터 그 실존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질료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無로부터 존재 전체를 주는 자의 행동 즉 창조를 통해서 생겨난 것이다. 영혼은 질료의 어떤 발전을 통해서 그 실존을 받고 질료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료가 외부적 조건이 채워져서 사물들의 본성에 따라 인간 영혼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을 요구하게 되면, 질료에게 그 존재를 수교하는 것은 영혼이다(상동, 제90문 제2절), 영혼은 그 기원에 있어서 질료와는 무관하게 실존하게 되었고 또 질료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존하고 있으므로, 그의 본성과 실체는 물질적 작용들로 인해서 훼손될 수 없다. 즉 유기체의 조직이 해체되어 죽음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영혼은 불멸인 것이다(상동, 제75문 제6절).
마지막으로 인간은 지성적 활동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도 지니고 있다. 실상 보편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자, 진, 선, 미 등 가장 일반적인 관념들을 인식할 수 있고, 어떤 무한한 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에 있어서 바람은 인식에 비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어떤 무한 선을 향해 확장된다. 이 무한 선을 향한 개방은 다음과 같다: 한편 만일 그 무한 선이 그 앞에 제시되게 된다면, 그래서 무한한 것으로서 그를 사로잡는다면,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다른 한편 그것이 너무도 완전하기 때문에, 다른 여하한 선에게도 불가피하고 저항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로잡힐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히 완전한 존재를 개념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유한한 선들의 불완전한 측면들을 깨달을 수 있고 그것을 원하고 사랑했다가도 그것을 원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의지는 모든 특수한 선으로부터 자유롭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선을 선호하고 다른 선을 기피할 동기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동기에 머문다. 그가 그것을 훤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hic et nunc) 끌리고 있는 선에 대한 지성의 심사숙고를 끊고 의지가 그것을 사실상 좋아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의 자유 선택 때문이다(제83문 제1절; 제59문 제3절).
존재론
1. 윤리학
- 성 토마스는 행동을 존재의 표현, 드러남, 발전으로 본다.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agere squitur esse). 행동의 토대는 존재요, 행동은 존재에 비례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성적이고 자유로운 어떤 존재의 행동은 도덕적 행위이다. 성 토마스는 자신의 도덕적 가르침을 존재의 가르침, 곧 형이상학 위에 정초한다. 형이상학의 결론들이 윤리의 전제 조건들이 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라야만, 감각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고 합리적인 도덕적 가르침을 구성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만일 인간이 그 존재에 있어서 절대적이었다면 자기 자신에게 행동 규범을 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 규범을 자기의 본성에 타고난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자기에게 존재를 부여한 자에 의해 주입된 것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존재가 자기충족적이고 자기 바깥에 어떤 다른 능동인을 상정할 필요도 없고 자기 바깥에 자기 행위의 어떤 목표에 도달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절대 존재가 아니고 자기와는 다른 어떤 원인에 의해 결과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자기와는 다른 (자기의 행위들을 그리로 향해, 자신의 완성으로 도달해야 하는) 어떤 목적이나 선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 그 존재 원리가 제1원인으로서의 신인 모든 존재자들은, 최종 목적인 신에게로 향하기 않으면 안 된다. 능동인에 있어서도 목적인에 있어서도 무한 계열 나열은 부조리하다. 행위의 직접적 목적들로서 존재의 중간 능동인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그 궁극적 목적이다. 모든 존재 모든 행위에는 언제나 직접적 목적도 있어야 하고 또 최종 목적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존재자는 신에 가까운 존재를 가지고 있는 그만큼 더 신을 직접적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무한자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존재는 직접 신을 자기 행위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 신에 이르게 될 때 그는 지성에는 진리, 의지에는 최고선으로 가득 차 완성되는 동시에 지복직관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완성과 행복은 일치하게 될 것이다(『신학대전』 Ⅰ, 제44문 제4절; 제65문 제2절, Ⅰ-Ⅱ, 제2문 제1-8절).
이런 형이상학적 원리들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성 토마스는 어렵지 않게 신 안에 어떤 영원법의 실존을 설정할 수 있었다. 영원법은 각각의 존재의 행위를 그 적절한 목표와 목적에 이를 수 있는 수단과 더불어 질서지운다. 지성을 갖추지 못한 존재자들에게는 그 자연적 기울음을 통해 물리적 작용의 법칙들이 있는데, 바로 결정론적 법칙들이다. 합리적인 존재자들에게는 지성을 통한 도덕적 처신의 법칙들이 있는데, 이들은 행위의 방향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엄밀한 의미의 도덕적인 행위들 즉 자유로우나 통제된 행위들이 있는 것이다. 신에게 영원법인 것은 피조물들의 영역에서는 자연 법칙들이 된다(물리 법칙들, 생물학적 법칙들, 생리 법칙들, 본능적 법칙들, 그리고 비지성적인 존재자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법칙들; 그리고 지성 속에 내재하는 자연적인 도덕 법칙). 그리고 선-악을 알기 때문에 지성은 자신의 본성에 알맞게 행동하고 그 존재 목적에 도달하려면 선은 행해야 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Ⅰ-Ⅱ, 제91문 제1-2절).
지성은 어떤 기준에 따라 하나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선한지 아니면 악한지를 판단하는 것일까? 행동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걸음들과 같기 때문에, 그리고 각 존재의 행동의 목표는 바로 자기 본성에 따른 완성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합리적이고 감각적으로 합성된 존재의 본성에 따라 완성하는 행동들은 도덕적으로 선하다. 그리고 두 구성 요소들의 완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덜 완전한 것들이 보다 더 완전하고 그것의 종적 완성을 구성하는 것에 종속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간은 신을 창조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특별한 의무 부과자로서의 신에게 결속되어 있는 것은 합리적이고 마땅하다. 자신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결속, 새로운 의무들이 생겨난다. 도덕적 선-악의 척도는 그 행위가 산출하는 快나 苦, 또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관심, 힘의 승리나 아니면 모든 관심이나 감성의 억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들이 이성이 명하는 대로 각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인간 본성의 통전적 완성을 향하는 데 적합한지 여부에 있다(『대이교도대전』 Ⅲ, 제129장). 그러므로 행위의 도덕적 선성의 척도는 바로 인간 본성과의 적합성 여부이다. 예컨대 각자에게 자기 고유의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법칙의 강제성은 그것이 효력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의지의 자의에 내맡겨져서는 안 된다는 어떤 명령을 구성한다. 그렇다고 인간 본성의 어떤 일반적인 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에 개방되어 있는 한 존재가 효과적으로 강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으려면 그 명령을 절대 의지인 신의 명령으로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이 신은 자신의 의지를 어기는 자들에 대해 책벌을 가할 수 있는 방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신학대전』 Ⅰ-Ⅱ, 제90문 제1절 제3답; 제91문 본론). 실상 책벌이 없는 법칙은 헛되고 개념될 수 없다. 법칙이 책벌 때문에 준수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법칙을 어기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법칙일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물리 법칙들에서는 결정론적으로 얻게 되는 법칙의 불가피성이 도덕 법칙에서는 책벌을 통해서 얻어지게 된다(『대이교도대전』 III, 제143-144장).
2. 법
- 모든 덕에 연관되는 도덕적 자연법은 정의와도 연관된다. ‘각자에게 그의 것을 주어야 할’(suum sibi cuiusque) 의무와,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유지하고 옹호할 권리이다. 만일 하느님과 자연(본성)이, 모든 이성적 피조물의 생명이 고유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고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목적으로 삼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면(사실상 요구한다), 모든 이성적 피조물은 그것을 그에게 주어진 목적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어떤 불의한 공격자에 대해서도 맞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방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자기 자신의 생명 보호에서 권리에 대한 정의(定義)가 구성된다. 그 권리는 한 국가의 실정법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이 아니다.(권리는, ‘네 것’과 ‘네 것’이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가능성으로서라도 어떤 ‘타자성’을 전제하지만, 그렇다고 필연적으로 어떤 정치적 사회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 전제가 권리의 ‘정치성’ 정당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정권’(jus positivum)이라고 불려야 하는 권리의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자연법의 일부인, 권리의 일부가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권’(jus naturale)이다. 도덕 영역에서의 실정권은 의식에 외부적인 어떤 것이고, “법적인 것”, 곧 실정법에 부합되는 것에 일치된다. 그러나 권리의 일부는 의식을 직접적으로 구속하고, (자연법의 처벌에 고유한 강제를 포함해서, 권리 개념의 모든 본질적 특성들을 지니고 있는) 자연권(자연법)이다(『신학대전』 II-II, 제57문 제1-2절; 『니코마코스 윤리학 주해』 V, 제12강).
3. 정치와 경제
- 도덕 철학과 권리 철학의 근본 원리들을 넘어 성 토마스 안에는 언제나 그의 형이상학에 의존하고 있는 정치 철학, 경제 철학, 교육 철학, 예술 철학의 근본 원리들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주해하면서 그는 다른 개인들과의 협력이 없이는 자신의 모든 자연적 역량을 완성시킬 수 없다는(그래서 그들의 완성에도 가담해야 한다는) 불완전성으로부터 연역되는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을 인정한다. 여기서 사회는 개개인들이 자기만의 힘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저 부분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고, 개개인들은 저 실현을 위해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협력해야 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성 토마스는 개인에 대한 시민 사회의 우성성이 자연의 의도들에 있어서, 사회보다 우선하고 그것과는 독립적인 개인의 권리들의 부재(不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의 최종 귀결이라는 점을 관찰하도록 초대한다(『정치학 주해』 I, 제1강; 『대이교도대전』, III, 제85장; 『신학대전』 I, 제86문 제4절). 이로부터 한 사회 내에서 (오직 모든 이들의 협력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고, 또 동일한 시민사회나 국가의 구성원인 한에서 권리와 의무들이 뒤따르는) 공동의 질서에 속하는 경제적, 도덕적, 지성적 복지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개개인의 행위들을 조율하기 위해 하느님이 원하시고 자연이 요구하는 불가결의 요소들인 권력의 권리들과 의무들이 뒤따른다.(『정치학 주해』 III, 제6강; 『군주통치론』 I, 제1장).
훌륭한 통치 형식을 위해서 그는 모든 시민이 다수에 의한 단체장 선출과 같이, 정치에 일정한 참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일반 원리로 설정한다(I-II, 제105문).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폭군이 되어 버린 왕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민중의 권위에 힘입어서만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선제적인 폭군 살해나 비밀스런 처리도 허용되지 않는다.(『군주통치론』 I, 제7장) 성 토마스 안에서는 선배나 동시대의 다른 스콜라 학자들 안에서처럼 권력 자체를 보유하고 있는 다중으로부터 군주에게로 넘어가는 정치 권한의 이양 개념이나 공동체와 군주 사이의 계약 개념이 없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제2권을 주해하면서, 경제, 특히 부(富)의 분배에 관한 몇 가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플라톤과 팔레아 칼케도니쿠스가 내세웠던 ‘재산 공유제’와 재산의 균등 분배와 같은 유토피아적 개념들에 대해 가해진 비판에 동조한다. 자기의 지체들의 일정한 결합과 재화의 일정한 교환이 사회의 양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결합과 소통이 자연 자체가 어느 단일한 사회의 대단히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에 설정하는 차이들과는 반대로 모든 이들의 일정한 평준화에 도달해서는 안 된다. 재화나 부는 각자에게 속하도록, 그리고 어떤 식으로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되도록,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각자의 소유를 모든 이의 복지와 비교 측정하는 것은 입법자의 역할이다. “자기 소유 사물의 사용이 어떻게 공동의 것이 될 수 있는지는 입법자의 역할에 속한다.”(같은 곳, 제4강, n201. 제8강, n.258)
재화는 각자의 소유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공동의 것보다는 자신의 것에 대해 훨씬 더 정성을 쏟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으로 남게 될 어떤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훨씬 더 기꺼이 일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주는 데에서 아량을 베푸는 것은 가장 유쾌한 일이다. 자신의 재화의 분배에 대해서도 다툼이 있다면, 공동의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는 훨씬 더 그러하다. 하지만 자신의 재화는 그 사용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배제할 정도로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개개인의 재화도 사유화되기 이전에 그러했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이의 것이고, 따라서 궁핍한 이들이 그 한 몫을 차지할 수 있도록 언제나 채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신학대전』 II-II, 제66문 제2절)
‘월급’ 또는 노동 임금은 거의 ‘특전’(quasi pretium)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환되는 노동은 어떤 공동 재화가 아니기 때문이다.(II-II, 제71문 제4절) 매매계약서에서는 이익의 동일성이 준수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가’는 상품들의 단지 생산비뿐만 아니라 상품의 조건들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가격이다. 예컨대 상품의 희귀성의 경우에, 그것이 없는 자는 그것이 넉넉했더라면 입지 않았을 해를 입었을 것이다. 어쨌든 온갖 종류의 사기와 투기 행위는 금지되고, 단죄된다.(제77문 제1절) 당대의 관념들에 부합해서 성 토마스는 돈이란 그 본성상 어떤 생산적인 재화가 아니라 단지 교환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하여 고리대금을 차용금에 대한 이자로 간주하였다.
4. 교육학
- 성 토마스는 자신의 교육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원리들 위에 정초한다. 인간의 이해력은 생득관념을 가지고 있는(플라톤) 것도 아니고, 주입되는 관념들을 수용하는(아비첸나와 아베로에스) 것도 아니다. 생성이란 가능태의 실존으로부터 현실태의 실존으로의 이월이다. 그는 학문과 덕의 학습, 따라서 교육과 엄밀한 의미에서의 학습을 다루지만, 전자에 더 관심을 집중한다. 한 존재자가 그 어떤 완전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온통 가능태에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능동적인 가능태에 있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에 그 획득은 온전히 어떤 외부적 원리로부터 와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내밀한 원리가 주된 원리가 되거나 심지어는 유일한 원리가 될 수 있으며, 외부적 원리는 2차적이고, 엄밀히 말해 다른 원리가 갈망하는 획득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학문과 덕의 학습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처지에 있다: 능동적 기관(능력)인 이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 안에 학문의 근본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 대단히 이른 초기 경험으로써 모든 학문들이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최초의 개념들과 제1 원리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의지의 경향들 속에 모든 덕들의 씨앗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관념들과 경향들은 각각 지성과 의지를 통해서 학문과 덕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예술가의 손에 들려 있는 도구 역할을 한다.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다 알려져 있지 않고, 또 그 관념들의 손쉬운 증대와 그 제1 원리들의 사용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적어도 사실상, 완전히 모르지 않는다. 따라서 조금밖에 알지 못하던 것에서부터 더 많이 아는 데에로 넘어가는 이월이 있다. 지성과 의지는 능동적 능력이기 때문에, 스스로도 학문과 덕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문의 획득을 통해서 “창의력”(inventio)을 가지게 된다. 반면에 외부적 협력이 있다면 “학습”[숙련]을 가지게 되고, 스승의 활동을 구성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사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덕을 전해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외부에서 그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도 채워 나갈 수 있을 것을 수행하도록 돕는다. 개념들을 형성해야 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지성인 셈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업(업적)에서 스승은 자신의 ‘기술’을 가지고 ‘자연’(본성)을 본받아야 하고, 제자가 스스로 제1 원리들과 자연적 경향들 안에 함축되어 있는 관념들과 덕들을 자기 자신에게 명료화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 스승은 학문과 덕들을 현실태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자보다 더 용이하게 그 학문과 덕의 명시화를 위해 가장 적합한 수단들을 찾아낼 수 있다. 주요 원인은 언제나 제자 자신에게 있고, 그 이해함과 그의 의지에 있다. 이것과 저것이 그의 본성을 구성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외부의 2차적인 선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이 인간의 내면적이고 주된 스승이다. 그리고 개인은 주요 기예가이기에 스스로도 창조력과 학문과 덕을 갖추고 학습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자기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학문과 덕을 가능태로만이 아니라 현실태로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스승이기 때문이다.(『진리론』 제11문[스승에 대하여], 제1-2절; 『신학대전』 I, 제117문 제1절)
5. 미학
- 성 토마스는 美를 산출하는 활동들을 고찰하기보다는 美 자체를 고찰하고, 理想의 창안자인 정신의 삶의 계기를 고찰하기보다는 이상 자체를 고찰한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 고찰로부터 그의 주관적 고찰이었을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 美란 보고 명상하고 직관된 것이고 快와 만족을 주는 것이다(『신학대전』 Ⅰ, 제5문 제4절 제1답). 그것은 원하던 어떤 선을 소유하게 된 자의 기쁨이 아니라, 단순히 냉정하게 명상하고 명상에서 아름다운 어떤 대상을 바로 그 아름다움 때문에 보고 명상하는 중에 기쁨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자의 기쁨이다(in eius cognitione quietatur appetitus..., id cuius ipsa apprehensio placet)(『신학대전』 Ⅰ-Ⅱ, 27문 1절 3답). 따라서 미를 지각하는 시각과 청각 감각들은 다른 감각들보다 더 지성을 닮았다. 공감(complacentia), 심미적 향유(fruitio aesthetica)는 어떤 진리를 보고 관상하는 한에서 지성 자체 안에 일깨워진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아름답게 제시된 어떤 진리, 곧 조화롭게 비쳐지는 진리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향유 없는 단순한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가지적이기도 한 어떤 아름다움의 가능성은, 영과 육신으로 합성된 인간에게 흔히 주어지는 것과는 달리, 감각적 아름다움이다. 실상 “아름다움은 형상 위에 정초된다.”(pulchrum fundatur super formam) 다시 말해 가지적인 것에 “토대를 두는” 것이다. 따라서 그저 순수하게 가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빛나는 가지적인 것, 또는 감각적인 것 속에 표현된 가지적인 것, 질료 안에서 빛나는 관념적인 것, 유한한 것 안에 구체화된 무한, 질료 속에 있는 영이다. 그리고 형식(형상)의 광채이다: “그것은 마땅한 비례에서 성립된다.”(in debita proportione consistit)(『신학대전』 I, 제5문 제4절) 따라서 미의 요건들은 “통전성(integritas) 또는 완전성, 마땅한 비례(proportio) 또는 상응, 명료성(claritas)”이다.(I, 제39문 제8절, 『신명론 주해』 제4장 제5강). 통전성은 또한 어떤 폐허의 통전성일 수도 있고, 상응이란 형상의 비례화되고 상응하는 표상이며, 명료성은 흔하고 통속적인 것이 아니라 찬란한 표상이다.
이 조건들 때문에 성 토마스에게는 예술 작품과 그에 상응하는 예술 활동을 가지게 된다: 비록 창조적 계기로서의 ‘예술’ 개념이 수행(executivo) 개념에 비해 (예술가에 대해서보다 기술자에 대해 더 논하는) 그의 사고 속에 덜 현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예술품은 그 자체가 도덕적이 아니다. “영상은 비록 추하더라도 사물을 완벽하게 표상할 때 아름답다고 말해진다.”(imago dicitur pulchra si perfecte repraesentat rem, quamvis turpem)(『신학대전』 I, 제39문 제8절) “이 일들의 선은 제작자의 욕구의 성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는 그 일의 가치에 달려 있다. 이런 기술자는 그가 그 일을 하는 의지 때문에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니라, 행하는 일의 성격 때문에 칭찬할 만하다.”(non pertinet ad laudem artificis, in quantum artifex est, qua voluntate opus faciat, sed quale sit opus quod faciat)(I-II, 제57문 제3절) 어떤 예술 작품 또는 예술 활동은 인간인 한에서 도달해야 할 인간의 저 통전적 완성(perfectio integralis)에 도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도덕적이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한다. “모든 사람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하지만 육적인 사람은 육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한다.”(omnis homo amat pulchrum: carnalis amat pulchrum carnale, spiritualis amat pulchrum sprituale)( 『시편 주해』 25편 5절) 그렇다면 단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형식적(형상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선한 것, 다시 말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또한 선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움을 ‘통전적 아름다움’(pulchrum integrale)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선을 일깨우게 되는, 추한 것에 대한 심미적 표상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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