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되게 하신 것(엡 4:1~12)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민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몇 년 전에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성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잠깐 틈을 내어 장로님 몇 분과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이 국경은 캐나다의 밴쿠버와 미국의 시애틀 사이에 있었는데, 우리 나라의 38선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무튼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무장한 군인이나 철조망은 물론이고 이렇다할 경계선의 표지도 전혀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쪽 저쪽을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경계선을 찾는다면 우리 나라의 독립문과 유사한 문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의 위쪽에 새겨져 있는 한 줄의 글이 제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We are of the same mother."---우리는 같은 어머니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캐나다와 미국이 싸우지 않고 화평하게 지내는 이유가 바로 같은 조상, 즉 한 뿌리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한 조상을 가지고도 이렇게 대치하고 싸워야만 합니까? 하나됨이란 힘의 원리입니다. 하나일 때에 강할 수 있고 분열되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음은 강한 의지로 자신 있게 나아가지만 분열되는 마음은 곧 걱정으로 힘이 분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나라의 번영과 안정도 이 하나됨의 원리 위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평화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 평화의 원리가 바로 하나됨입니다. 잠언 17:1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아주 현실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날 우리들이 헐벗고 굶주릴 때에는 보릿고개만 해결되면 살 줄 알았고 집 한 채만 마련되면 걱정이 없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잘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화평이 먼저요 화목이 우선임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가 먼저란 말입니다. 하나됨이 없이는 행복이다 기쁨이다 하는 이야기가 다 소용이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들은 하나됨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됨은 생존의 원리입니다.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들의 상황은 하나되면 살고 아니면 다같이 못산다는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노사 문제로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난날의 우리들의 하나됨이 힘이나 정권이나 군사력에 의해 그 질서가 유지되다가 이제 와서 풀어지니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나보다고 온 세계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나라 안팎이 들썩거릴 정도로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그치고 타결이 되어 공장들이 돌아가고 질서가 잡히는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자문해야겠습니다. 정말 하나가 된 것입니까? 그렇게 싸우고 야단을 하더니, 결과는 월급 2만 원이 올랐습니다. 이것을 위해 그토록 싸웠습니까? 돈 2만 원 때문에 노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싸우면 너도 죽고 나도 죽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참은 것이지 월급 몇 푼 인상되어서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싸움이 계속되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다함께 망하므로 서로 참고 이해하자는 생각에서 엉성하나마 이만큼이라도 조용한 것입니다. 하나되면 살아남고 분열되면 죽기에 살기 위해서는 부득이 하나되어야만 했습니다. 망하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싸우기만 한다면 살아남을 자격이 없습니다. 확실히 하나됨이란 생존의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됨의 윤리적인 철학이나 화목해야 한다는 인간 처세를 말하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벌써 하나되게 하신 역사가 있었고 이것을 지켜나가라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이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타협에 의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됨이 있고 이것을 우리들이 지켜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 보면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라고 쉽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로 하여금 새로운 하나됨의 창조나 새로운 어떤 문제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인 하나됨의 원리로서, 본문에서 보다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뿌리가 하나이고 마지막 운명이 하나입니다. 현재라고 하는 잠깐동안 현상적인 것에 착각이 있고 차이가 있으나 이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즉 현재만 보지 말고 본래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좋은 시설에서 호강스럽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고 어려워서 정말 힘든 악조건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빈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무슨 빈부 귀천이 있습니까? 또한 세상을 떠날 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묘지가 크고 작고 비석의 높고 낮음은 있습니다만 그 속에 누워 있는 썩은 시체는 꼭 같습니다. 내용이 같은데 불필요하게 겉이 크고 작고가 무슨 소용입니까? 결국 사람은 태어날 때에 한 모양이고 마지막 가는 모습이 한 모양으로, 본래가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하나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키부츠(Kibbutz)라는 공동체를 조직해서 공동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학교 성적을 우리들처럼 개별적으로 등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시험 결과는 선생님만 알고 계시다가 이것을 모두 종합해서 키부츠 단위로 성적을 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각자 자기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고 부담 없이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지나가던 손님이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면서 이것을 알아맞히면 상을 주겠다고 했답니다. 질문은 이스라엘의 제 1대 왕이 누구인가 라는 문제였는데, 아이들은 대답을 하지 않고 구석으로 몰려 앉아 저희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다시 와서는 일제히 사울 왕이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손님은 꼼짝없이 전체에게 상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결론을 내기만 하면 된다는 지혜로운 생각으로 하나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라는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빈부 귀천이란 별것이 아닙니다.
그저 잠깐 보이는 현상으로, 실제로는 다 하나입니다. 본래도 하나요 마지막 운명도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름 받기 전에 우리는 모두 같은 죄인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왕의 아들의 잔치 비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귀한 잔치에 왕은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모두가 무자격하지만 예복을 보내서 자격을 부여하여 부르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자격한 우리들도 용서와 함께 부르셔서 자격을 부여하셨습니다. 부름 받은 우리들은 모두가 진노의 자녀요 멸망의 자녀로서 구제 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받기 전이나 구원받은 과정이나 앞으로의 운명이 꼭 같습니다. 부름 받았다고 하는 입장에서 볼 때에 한 치의 차이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의 축복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는 말씀처럼 마지막 운명이 같습니다.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네 아내를 사랑할 때에 앞으로 영원한 기업을 함께 누릴 자라는 것을 알고 사랑하라."----즉 아내란 늘 여기서보고 끝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기업을 함께 누릴 자임을 전제하고 그리고 오늘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래 지향적 신앙 간증이 필요합니다. 결국 한 길, 한 운명이기에 우리의 고백도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 4:5).---근본적으로 뿌리와 기초가 하나이니 이것을 알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는 지도자이지만 평생 보좌에 앉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기껏해야 돌 위에, 그것도 깨어진 돌 위에 앉는 것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상인 모세 다얀은 그의 운전 기사에게 늘 친구처럼 대했다고 합니다. 아침에 서로 만나게 되면 운전 기사는 모세 다얀에게 "모세, 오늘 아침은 어떻소?"라고 마치 친구에게 하듯 인사를 해서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모세 다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하나는 앞에 앉고 하나는 뒤에 앉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이 다른 것은 아니다."---다시 말하면 나는 수상이요 저 사람은 수상의 운전 기사일 뿐 사람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고는 민주화는 없습니다. 아마 우리 한국에서 사장님 비서가 사장님께 "잘 있었나"했다가는 그 날로 해고 일 것입니다. 이 의식이 바뀌기 전에는 평화는 요원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가졌다 못 가졌다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입니까? 지위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하나됨의 의미를 알아야겠습니다.
둘째,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됨의 원리란 권력이나 힘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군사력이나 이해 관계도 아닙니다. 물론 이데올로기나 어떤 공약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하나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노사 문제가 터졌을 때 어떤 사장님은 허탈감에 빠져 어찌할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 동안 20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완전히 남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십 년 아니 삼십 년을 함께 있었어도 이해 관계로 한 직장에 있었다면 하나될 수 없습니다. 하나됨의 역사란 주가 하나요 고백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인, 즉 성령의 감화 안에서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천 년을 지난 미이라의 손에 있는 밀 알은 그대로 밀 알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밀 알이 밀 알대로 자기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땅에 떨어져서 썩어야 하고 그래야만 생명을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분해되어 중생 되어야만 하나될 수 있습니다. 중생하지 않고는 하나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화로써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엡 4:7). 즉 은사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한 몸의 지체로서 유기적 관계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기에 지체이지 머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둘이면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머리라는 생각을 버릴 때에만 하나될 수 있습니다. 각 지체인 손과 발은 싸우지 않습니다. 눈과 코도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와 머리는 서로 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같이 한 머리에 붙어 있는 지체임을 알고 지체됨의 은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지체는 기능면에서 그 역할이 다르나 목적과 소속과 운명은 하나입니다. 어느 날 장님과
절름발이가 함께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날이 좋지 못하여 비가 오고 길이 질퍽질퍽해서 장님은 조심을 해도 흙탕물에 빠지기가 십상이었습니다. 장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절름발이에게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절름발이는 나도 시원찮은데 어떻게 당신을 돕겠느냐고 걱정을 했습니다. 장님은 "여보시오, 당신은 절름발이지만 눈은 성하지 않소. 그 대신 나는 장님이지만 발이 성하니 당신이 내 등에 업히면 우리는 서로 발이 되고 눈이 되어 이 흙탕길을 잘 가게 될 것이오." 이렇게 두 사람은 합의해서 무사히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무엇이든 다 가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다 가질 수도 없습니다. 부득불 남을 도와야 하고 또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잘났다고 하는 한 쪽 때문에 늘 말썽입니다. 아내 없이 못 살고 남편 없이 못 살겠다는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살수 없는 세상입니다. 노동자 없는 사장이 어디 있으며 사장 없는 노동자가 어디 있습니까? 가진 자 없이 못 가진 자가 없으며 못 가진 자 없이 가진 자가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서로 한두 가지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협력하여 유기적인 온전함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주신 은사를 소중히 여기고 십분 발휘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사도 또한 소중히 여겨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됨의 역사가 있습니다.
제가 외국에 가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유학하는 사람들에게 가상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언어 문제인데 길들여질 때까지는 몹시 고역을 치릅니다. 특히 나이 들어서 공부하게 되면 책을 보고 글은 써도 언어 소통에는 오랫동안 곤욕을 치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그 곳에서 자랐거나 10년 이상 체류한 사람들은 아주 잘합니다. 그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 이제 막 유학 온 학생들의 서툰 영어를 무시했습니다. 저래 가지고야 어떻게 공부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미국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영어를 잘하는 대신 한국어가 서툽니다. 즉 하나를 얻었으면 또 하나를 잃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가진 것과 남이 못 가진 것만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알고 동시에 다른 사람이 가진 것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포 2세들이 마침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의 아들들이었기에 서로 흉볼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가진 것을 존중하고 합쳐 보자고 말했습니다. 서로 합치면 온전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 되어진 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되어진 바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역할이 다르고 기능이 다르나 목적이 하나요 운명이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사람과 화목하게 하신 그 하나됨의 근본을 지켜 나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로 향한 길이 있습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론] 제1강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김재진 박사) (0) | 2021.10.23 |
---|---|
해골 위의 십자가 (0) | 2021.10.23 |
분열 왕국시대와 포로생활 (0) | 2021.10.22 |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 (The Epistles) (0) | 2021.10.22 |
바 울 서 신 (0) | 2021.10.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