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심방의 개념 목회는 ‘영혼의 돌봄’, 즉 라틴어로는 ‘쿠라 아니마룸’(cura animarum), 독일어로는 ‘제일조르거’(Seelsorge)이다. 목회는 돌보고 보살피는 일이다. ‘돌봄’과 ‘보살핌’이 목회의 본질이라면 심방은 목회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목자가 양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만남과 교제 없이는 목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죄인을 만나시고 죄인과 교제하시기 위해, 즉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만나지 않는 자, 즉 자신과 교제하지 않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신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알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신들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의 복음을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곳이다. 성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교제할 때 결코 혼자가 아닌, 그분 안에서 다른 모든 지체들과 함께 만나서 교제하기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공동체’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 바로 그곳을 교회라 부른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교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고 만나는 곳이 교회다. 이런 영적인 만남과 교제를 위해 성도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 목회다. 그렇다면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전제하는 심방은 교회와 목회를 위해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심방과 종교개혁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공중 장소에서뿐만 아니라, 세리 레위의 집이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과 같은 개인의 가정집에서도 구원 사역을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사도들도 예수님처럼 성전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각 가정집에서도 부활의 복음을 가르쳤다. 중세에는 자발적인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세워진 탁발수도원들의 수도사들이 신자들의 가정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하지만 탁발수도사들의 가정집 방문 목적은 육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심방이라 볼 수 없다. 교구 사제들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심방이었지만 거의 수행되지 않는 유명무실한 임무였다. 교구 사제들이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는지 감독하는 일이 주교의 주요 업무였고, 이런 주교들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 대주교였지만 주교들과 대주교들의 주요 관심사가 출세와 재물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목회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래서 뇌물이 판을 쳤고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것이다. 중세 말기에는 이와 같은 교회의 타락상이 극심했는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타락보다는 오히려 교리적이고 목회적인 타락이 더욱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였다. 대주교와 주교, 그리고 교구 사제는 분명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찾아가는 심방 목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고해성사’였다. ‘고해성사’라는 교리는 신자가 죄를 지었을 경우 스스로 목회자인 성직자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관습을 만들어냈다. 결국 교인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를 찾았고 이로 인해 목회자가 교인을 찾아가는 심방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사실 천주교의 이런 전통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 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회개를 두려움의 ‘불완전 통회’(attritio. 하등통회)와 사랑의 ‘완전 통회’(contritio. 상등통회)로 구분한 중세 로마교 교리에 밀접하게 연결된 ‘고해성사’는 종교개혁 당시 ‘완전 통회’로 간주되었다. 즉 고해성사만 하면 죄가 깨끗하게 용서 받는다는 것이다. 최소 1년에 1번은 반드시 고해성사를 하도록 규정했지만 비밀유지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지은 죄에 대한 면벌뿐만 아니라 확실한 비밀유지까지도 보장된 길이 마련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면죄부, 즉 면벌부였다. 마르틴 루터 고해성사와 면벌부는 ‘심방’ 없이도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제도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두 가지 다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심방’의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루터는 1526년 요한 공작에게 주교구 심방을 요청했다. 요한은 1525년에 죽은 작센의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어 선제후가 된 그의 동생이었다. 1520년대 중반은 독일 전역이 개혁의 외침과 농민봉기로 혼란스러웠고, 1년에 한 번씩 시찰하던 주교의 관리 감독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주교구의 무질서는 심각했다. 그래서 루터는 교구들을 시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인데, 여기서 개신교 ‘심방’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에게 ‘심방’(visitatio)은 사실상 ‘시찰’이나 ‘조사’를 의미하고, 따라서 ‘심방자’(visitator)는 ‘시찰위원’이나 ‘조사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주장으로 독일 작센 지역은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10년만인 1527년에 비로소 4명으로 구성된 시찰단에 의해 교구 심방이 이루어졌다. 선제후가 이 시찰단 위원을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었는데, 이것은 교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리를 세속 정부의 손에 넘긴 사건, 즉 루터교회가 국교회로 정착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루터는 교회가 세속 권력자의 지배 아래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교회를 위한 선제후의 직무에 대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예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제후의 직무가 비록 가르쳐야 하고 영적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세속 정부로서 백성들 사이에 분쟁과 이단과 폭동이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할 책임은 있다.”1) 루터에 따르면 당시 로마교회의 대주교와 주교와 교구 사제는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이기는커녕 오히려 영혼의 파괴자였다. 1529년에 루터가 개신교 최초의 교리문답서인 <소교리문답>과 <대교리문답>을 만들어 출간하게 된 동기도 1527년부터 시행된 시찰단의 교구 심방을 통해 작센 지역 교구 교회들의 영적 상황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조차 가르쳐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심각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심방의 기원, 즉 교회 감독자인 주교의 기원을 구약의 사무엘, 일리야, 엘리사에게서 찾았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에게서 찾았다. 루터에 따르면, “실제로 주교(Bischoff)는 감독자(auff seher) 혹은 시찰관(visitator)이라 불리고 대주교(Ertzbischoff)는 그 감독자들과 시찰관들 위에서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각 교구목사(Pfarher)는 사람들이 어떻게 가르치며 사는지 자신의 교구민들을 심방하고 돌보고 감독해야 하는 것이다.”2) 심방을 맡은 시찰단 직무를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이고 필수적인 ‘사랑의 직분’(liebe ampt)으로 간주했다.3) 루터에게 심방이란 영혼을 돌보는 목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로써 사람들이 어떻게 가르치고 믿고 사랑하는지, 어떻게 기독교적인 삶을 사는지,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돌보고 약한 자들을 어떻게 위로하며 야만적인 자들을 어떻게 처벌하는지 등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마르틴 부써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써는 1538년에 개신교 목회학에 관한 최초의 저술이라 할 수 있는 <참된 목회에 관하여>(Von der waren Seelsorge)를 출간했다.4) 이 책에서 부써는 루터와 달리 교회의 영적인 치리를 세속 정부의 치리와 구분했다. 그는 교회의 고유한 영적 치리권의 근거를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묶고 푸는 열쇠권능에서 찾았다. 부써에 따르면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심방의 권리 역시 목회자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에는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장로는 감독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장로가 유대적인 명칭이라면 감독은 로마적인 명칭이다. 부써에게 초대교회의 야고보는 감독 중의 최고 감독, 장로 중의 수장이었다. 이런 점에서 부써는 루터처럼 신약성경의 감독제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 직분에 대한 루터와 부써 사이의 견해 차이는 분명하다. 루터와 달리 부써에 따르면 목사든 장로든 영혼의 목회자들을 세우는 주체는 정부가 아닌 교회다. “최상의 임직질서에 있어서는, 위선적이고 부적격한 직분자들(Dienern)을 해임하는 일과 바르고 유능한 직분자들을 임명하는 일을 교회가 [수행하되] 기독교 정부의 도움을 받고 그리스도의 모든 양들 전체의 동의를 얻어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5) 여기서 정부와 교회를 상하의 종속관계로도, 분리의 대립관계로도 보지 않고 상호 대등하고 독립적이지만 협력해야만 하는 관계로 보는 부써의 독특한 개념이 반영되는데, 그는 이 개념을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에 적용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후에 칼빈이 오늘날 당회의 기원인 제네바 교회치리회에 적용했다. 즉 교회는 세상 정부가 가진 칼의 권세와 다른 성령의 검인 말씀의 영적 권세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세상 정부의 처벌권과 구별된 영적 처벌권을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0-21)라는 바울의 고백을 근거로 부써는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과 권면이 교회의 공적인 모임과 강단에서만 제한될 수 없고 성도의 가정에서도 신실하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백성을 집에서도, 특히 각각 개별적으로 교육하고 가르치고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6) 심지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설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집집마다 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전달하고 분배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해 부써는 신실한 교사이신 성령을 반대하고 훼방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부써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결코 교회의 공적인 예배나 설교에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 그는 교인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는 심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공개적인 설교를 통해 친히 가르치신 자신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제자들 각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지 가가호호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시험하시고 감시하시기” 때문이다.7) 목회자의 가가호호 방문, 즉 심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부써는 “성령께서 교회를 바르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의 참된 후견인과 교사가 되시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 사람, 즉 성령의 인도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양떼, 즉 교인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점점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다면 교회는 최상의 근면성실함으로 공적인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 개개인의 가정집에서도, 또한 각자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고 시작하고 적용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부써의 심방 개념은 칼빈을 거쳐 장로교의 영적 치리권으로 발전하였다. 루터의 동방교회적인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와 달리 부써는 교회의 영적 자치권을 강력하게 변호했다. 그는 ‘심방’의 주체가 정부가 아닌 교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교회에 대한 영적인 관리감독의 권리와 책임이 정부가 아닌 교회 자체의 권한이라 보았던 것이다. 처벌권에 관하여 부써와 칼빈은 교회 주도적 교황황제주의(Papocaesarism)와 동방교회의 정부 주도적 황제교황주의의 사이의 중도(via media) 입장이었다. 정부와 교회를 상호 독립적이지만 협력해야만 하는 상보관계로 보았던 부써와 칼빈의 관점은 상당히 독특하다. 요한 칼빈 우리는 칼빈이 작성한 1541년과 1561년의 제네바교회법을 통해 정부와 교회가 상호 긴밀한 협력관계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561년의 제네바교회법은 시 관할에 속한 모든 지역교회를 시찰하기 위한 대표를 정부와 목사회가 각각 2명씩 선출하여 심방하도록 했는데, 1년에 한 번씩 시행하는 이 시찰은 목사의 생활과 사역 모두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즉 목사의 교리와 삶, 그리고 가정뿐만 아니라, 그의 공적인 사역인 설교와 각 가정 심방 등 전반에 걸친 시찰이었다.8) 그러한 심방은 “목회자가 설교할 때뿐만 아니라, 환자를 심방할 때도, 특히 훈계가 필요한 자들을 훈계할 때도, 그리고 아무도 신성모독을 하지 못하도록 방지할 때에도 근면성실한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가 스스로 선한 모범을 보이면서 정직한 삶을 영위하는지, 즉 그와 그의 가족이 실제로 멸시 받을 정도로 방탕하거나 경박한지, 혹은 그가 백성과 조화로운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16세기 제네바에서는 환자심방이 목회의 필수 사항이었다. 그래서 제네바교회법은 조사와 시찰 및 훈계를 위한 심방 규정뿐만 아니라, 환자심방을 “목회자의 일상적인 직무”로 규정하는 환자심방의 규정도 마련했다.9) 그 규정에 따르면 환자심방의 목적은 투병 중인 환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요, 그 환자에게 적절한, 구원을 위한 권면과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즉 환자심방의 이유에 대해 투병 중일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말씀으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경향이 있고, 또한 “그 사람에게 과거 어느 때보다 구원이 절실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권면이나 가르침 없이 죽어가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 마디로, 환자심방은 ‘환자에게 필요한 영적인 유익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환자심방의 규정에 따르면 환자가 침상에 3일 이상 방치되지 않도록 환자의 가족은 반드시 환자의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목사에게 심방을 요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는 어떤 위로도 무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실한 사람일지라도 병을 앓게 되면 마음만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도 약해진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 규정이었다. 결론과 오늘날 목회를 위한 적용 역사적으로 목회 심방은 사실상 16세기부터 시행된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심방은 시찰 혹은 감찰의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심방 개념과 달리, 교인뿐만 아니라 목사까지도 영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는 그와 같은 심방 제도를 교회의 세 번째 표지인 ‘치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런 점에서 심방은 찾아가는 고해성사로 간주되기도 한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시찰 즉 감시감독 차원의 심방 개념이 없다. 16세기 제네바교회는 교회치리회와 심방위원 뿐만 아니라 목사들의 모임인 목사회조차도 목사들의 삶과 사역을 관리하고 시벌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반면에,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기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법적으로는 당회와 노회와 총회가 치리기관이지만 한국적 인식과 인간관계, 그리고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가 곪아 터진 후에야 치리권이 발동되고 전권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은 사후약방문일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우리 사회에 팽배한 ‘좋은 게 좋다’는 인식 때문에 문제를 가능한 덮으려고 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고 더더욱 신앙적일 수는 결코 없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죄를 짓고 사는 죄인공동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를 권면하는 일이 없다면 죄인공동체인 지상교회가 성도공동체로 변화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실상 관리감독 개념이 배제된 현대적 목회 심방조차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대도시 교회일수록 목회 심방을 사생활 보호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현상이 심한데, 이것은 목회 원리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목회 심방이란 매주일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각 가정과 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각 가정과 개인이 개별적으로 필요한 자신들에게만 적합한 말씀을 제공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목회 심방이 교인에게는 권리요, 목회자에겐 책임과 의무다. 심방은 신자 개인과 가정을 영적으로 바르게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설교를 통해 일반적인 위로를 받지만 또한 심방을 통해 개별적인 위로를 받아야 한다. 위로와 권면이 심방의 핵심이다. 이 때 인간적인 위로와 권면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약속의 말씀 중심적인 위로와 권면이어야 한다. 누구도 말씀과 성령에 의한 위로와 권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신앙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중심의 영적 위로와 권면이 필요하다. 이런 위로와 권면은 영적으로 건강한 신자에게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건강하지 못한 신자에게는 더욱 긴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심방은 교인을 영적으로 돌보는 훌륭한 목회 수단이다. 누구보다 심방이 필요한 사람은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병든 환자다. 신자가 질병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말씀과 믿음뿐이다. 살든지 죽든지 생명의 주님을 의지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만이 인생 최고의 위안이라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도록 권면하는 것, 이것이 환자심방의 백미가 아닐까? 환자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밀하게 살피지 않고서는 심방의 목적을 완수하기 어렵다. 모든 질병이 죄로부터 온다는 사실은 아무도 교만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참된 신앙인을 더욱 겸손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거의 모든 질병은 자연현상이다. 스스로 우리 몸을 관리하지 않아서, 부주의해서 걸리기도 하고 심각한 재난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하고 병균에 감염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세상의 모든 질병이 타락과 죄악의 파생물이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질병으로 연약해진 영혼에게는 위로와 용기가 필요하다. 병든 신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늘의 위로와 용기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환자심방이란 이와 같은 하늘의 위로와 힘을 환자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하늘의 위로와 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을 공급하기 위해 목사는 심방 전에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하겠지만, 가능하면 환자의 심리 상태와 신앙 자세를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병으로 연약해진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 심방의 최대 목표이기 때문이다. 1) WA 26, 200. 28-31. 2) WA 26, 196. 5-8. 3) WA 26, 197. 20. 4) 이 책의 한글 번역은 다음 참조. 신현복 역, <영혼을 돌보는 참된 목회자> (서울: 아침영성지도연구원, 2013); 최윤배 역, <참된 목회학> (용인: 킹덤북스, 2014). 이 책을 중심으로 부써의 목회 사상을 다룬 글은 다음 참조. 황대우, “마르틴 부써와 그의 목회지론,” <고신신학> 19호. 이상규 교수 은퇴기념호 (부산: 고신신학회, 2017), 173-208. 5) BDS 7, 131. 5-8. 정부의 도움을 받아서 교회 직분자를 임직해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다원주의 시대인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는 매우 낯설고 납득하기 힘들지만 구약시대 이스라엘처럼 16세기 온 유럽이 기독교 세계(corpus Christianorum)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만 하다. 6) BDS 7, 218. 12-14. 7) BDS 7, 218. 31- 8) 이하에 인용된 1561년의 제네바교회법에 관한 내용은 다음 참조. CO 10, 91-124; 박건택 역, <칼뱅작품선집> VII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11), 635-680. 9) 아래 환자심방에 관한 내용은 상당부분 인터넷신문 “개혁정론”에 기고된 필자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3/8679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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