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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누가 주를 더 사랑하는가?

by 【고동엽】 2021. 10. 16.

눅 7:36-50

Ⅰ. 이 말씀은 한  바리새인  시 몬의 집에서 죄 있는 한  여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의  사회에 는 이른바 명사(名士)들을  초대하 는 관례들이 있었습니다.  한 바리 새인이었던  시몬이  젊은 갈릴리  사람   예수를  초청하였습니다(눅  7:36). 그가 어떻게  당시 바리새인  종파에서 문제의 인물로 주목의 대 상이 되고 있는 예수를 자기와  함 께 잡수시기를 청했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초청 받은 그  집안 에서 뜻밖의   사태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그 동네에서 이미 창녀라고  하는 딱지가 붙은 죄인인 한  여자 가 예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발 곁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그  눈물로 주님의 발등상을  적셨습니 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 씻 었습니다. 뿐아니라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그녀가  가지고 온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습니다(눅  7:37-38).    
    
예수는 불청객이었던 이런  죄인  여자의 소행 앞에 침묵으로 일관했 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속으로  예수 를 힐난하였습니다.  '예수가 과연  소문대로 선지자인가?  만약 그가  선지자였다고 하면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나 자기를  만지는 이  사람이  죄 있는 여자인 줄 알았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  7:39). 그는  소리  없는  멸시의   총알을 예수에게    겨누고 말았습니다(눅 7:39).
이때 예수는 그 무거운  침묵의  공간을 깨치고   입을 열어
"시몬 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 멋 진 부채 탕감 비유를 통하여 '사죄  은총의 진리'를 공개하였습니다.


"많은 돈을 가진 한 사람이  어 떤 가난한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 나리온을, 또 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을 빌려준  일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이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채주는  두 사람 모두에게 그 빚진   돈을 받지  않겠다고 탕감해  주었 다. 이런  경우 그  두 사람  가운 데서 누가  그 채주를  더 사랑하 겠느냐?"(눅 7:41-42) 이렇게 예수 님은 그 바리새인 시몬에게 물었습 니다.

그때 시몬의 대답은
"많이  탕감  받은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십 데나리온보다 오백  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가 그 빚을 탕감해 준  채주에게 더 고마움과 사랑하는 마 음을 가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눅  7:43). 예수님은 시몬의 판단과  대 답이 없다고 긍정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하고 싶은  말씀 의 중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 수님은 그  바리새인 시몬에게  너  지금 이 여자를 보느냐고 하였습니 다. 그리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했습니 다.
그것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초청되 어 머물고  계시는  그 장소는 그  집 뜰안입니다. 당시  유복한 바리 새인들의 집들은 그 가운데가 오목 하게 활짝 트인 뜰을 끼고  사방으 로 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흔 히 그런 집의 마당에는 화원과  우 물이 있었고, 특별한  경우에는 거 기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초대받은 손님은  그  집주인으로부터 세 가지 경우의 예 (禮)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그  집 에 들어오는  손님의 어깨에  자기  손을 얹고 환영과 평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먼지투성이가 된 손님의 발을 항아 리에 준비된 물로 씻어  주는 일이 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올리브향 을 뿌려  손님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이런 예(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청객의  그 여자는 항아리의 물이 아닌  마 음 속에서부터 솟아난 눈물로 예수 의 발을 씻었다고  하였습니다. 수 건이 아닌  자기 머리털을  풀어서  닦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합 을 깨뜨려 향유를 붓고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눅  7:44-46).
그녀가 이렇게 하게 된  큰 이유 를 예수님은   분명히 하였습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 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 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 랑하느니라」(눅 7:47)고 하였습니 다. 확실하고 분명한 대답입니다.

누가 주(예수)를 더 사랑하는가?   예수에게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 람이 주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습니 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하였 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오십 데 나리온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많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로 비유했습 니다(눅 7:41).
예수님은    시몬에게  그녀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눅 7:43). 또 '많은 죄' (눅 7:47)를 지은 자라고 하였습니 다. 예수님은  50데나리온과 500데 나리온 빚진 자  두  사람 가운데  그 채주를 '더 사랑하는 자'는 '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가리 켜 말한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자'라고 하 였습니다.

Ⅱ. 이 말씀은 예수는 사죄의 구 주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8절에  「이에 여 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 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사죄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가  누구이기 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하였습니 다(눅 7:49). 사람의 죄를  사해 주 는 일은 하나님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이 저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  인 류의 많은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결코 예수께서  이 세 상에 오신 강세(降世)의 목적은 정 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모토(motto)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결코 예수는  이 세상에 서의  인류의  이상향을  건설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어떤 윤리적  혁신이나 교육적 계몽이나  사상적  이데올로기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물론 군사적  문제나 영 토의 주권 문제를 가지고 오신  것 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 다(요 18:36).
  
그는 더 확실하게 말씀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건강한  자 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 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 다.
또 마태복음 1장 21절에는  「아 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 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 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운  선언이었습니다(롬 6:23). 모든  인 류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 암아 이 사망 아래 놓여  있었습니 다(롬 5:12-21). 그래서 인류는  하 나님 앞에서 죄와 죄의 결과인  사 망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죄값은  금이나 은으로 보상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1:18). 그 죄값을 대신 할 것 은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 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 다고 하였습니다(벧전 1:19).  그래 서 예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 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이  세상 에 오셨습니다(막   10:45). 그래서  자신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 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 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 었나니」(벧전 2:24)라고 하였습니 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복음성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 교의 소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바 로 여기에 기독교의 우주성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민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 수는 만민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된 것입니다(눅  2:10).  바 로 시몬의 동네에   있는 죄 있는  그녀는 이러한 사죄의 주를 만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Ⅲ. 이 말씀은 보은적(報恩的) 감 격의 사랑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본문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 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였 습니다(눅 7:47).
우리는 이 성경을 오해하지  말 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학자나  잘못된 개신교 학자들 중에는  '그 녀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죄사함도   많이 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의 인간공덕설 교리입니다.  곧 이 행득구주의입니다.
문제는  그녀의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되느냐,   결과가 되느냐에  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사실입니 다. 그러면 '죄사함'은 어디에서 오 는가? 바로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 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7장 50 절에 그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떠난 사랑이 용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500데나리 온의 많은 빚을 탕감 받았기  때문 에 그 채주를 더 사랑하고  감사하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믿음의 대명사 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죄  받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를  더 사랑하게  됨은 믿음에서  오는  사죄(속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보 은적 사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시몬의 동네에  죄 있 는 한 여자!  그녀는 벌써  예수께  대한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았음 을 알고  불청객으로 갑자기  주님  앞에 나타난 행동은 벌써 믿음에서  나온 보은적   사랑의 행동입니다.  그녀는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죄인의  구 주라고  하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 다. 그것은 주님의  섭리적인 은혜 였습니다(엡 2:8).

그러므로 그녀가 ① 예수께 나오 고 ② 예수의 발 곁에 서고 ③  울 며 ④ 그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 고 ⑤  자기 머리털로 씻고 ⑥ 그  발에 입맞추고  ⑦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는 행동은 바로 많은  사 죄(구원)의 은총에   대한 '보은적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 플루머(Plummer)는   '그리 스도 자신은 그녀에게 회개와 사죄 의 확신을 주었고   그 확신은 또  그녀에게 사랑과 감은의 정을 격동 시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복음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기독교가 소망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기독교 가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과연 기독교가 죄인의 종교 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죄인 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 니다. 예수는 의인과는  상관이 없 습니다. 마치 건강한  자가 의사와  상관이 없음과 같습니다.  병든 자 가 의사와  상관이 있음과  같습니 다.

지상에 존재하는 주 예수 그리스 도의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장소 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죄 를 사함 받은 무리들의  모임입니 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다.'고 하 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또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자가 됩니다(요일 1:8, 10).
바울은   주님의   사도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 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 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5).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 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하였 습니다. 세리는   성전에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 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 고 하였습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는 '나보다 가련하고  비 참한 죄인은  다시없다.'고 하였습 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베푸시는  큰 사죄(구원)의 은총이  따라옵니 다. 그 결과 마침내  탕감 받은 감 격의 힘이  주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2,000년  기 독교가 세상을 이긴 비결입니다.
누가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망에 이르는 많은 죄,  큰  죄 를 사함 받은 사람들이 주를 더 사 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순교에 까지  이르는 불사성(不死性)의 사 랑입니다. 바로 우리  경향의 오늘 은 더  주를  사랑하는 은총 입은    자들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입니 다. 500데나리온이나 되는 크고 많 은  부채를 탕감 받은 자들의 감격 적 보은의  사랑이 오늘의  경향을  있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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