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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길 기쁨의 길 (시편 122:1-9)

by 【고동엽】 2021. 10. 15.

순례의 길 기쁨의 길 (시편 122:1-9)
영안교회/박정근 목사

1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예루살렘아 우
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
다 5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6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
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8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여러분들 중에 누구나 한 두 번쯤은 여행을 떠나보았을 것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여행하고자 하는 곳의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일 겁니다. 하루 정도 다녀오는 여행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외국에 일 주일 내
지 한달 정도 다녀오는 여행을 한다면, 그곳의 풍습과 지리적인 여건, 숙박업소, 식당, 날씨
등, 모든 것을 알아야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여행사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알려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준비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여
행사가 생긴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약 15년, 20년 전만 해도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알아보고 준비해야 했습니다.

제가 직접 들은 얘긴데, 약 18년 전에 한 부부가 사이판을 여행하려고 했습니다. 사이판은
열대기후에 속하는 곳입니다. 사시사철 반소매를 입고 지내야 합니다. 그곳은 겨울에도 덥습
니다. 그런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한국에서 떠날 때는 굉장히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래
서 내복을 입고 그 위에 방한복을 입었는데, 여자는 밍크코트까지 걸치고 떠났습니다. 요즘
은 그런 곳을 여행하게 되면 반소매 옷을 가져가서 비행기 안에서 갈아입고 내리지 않습니
까? 그런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이들 부부는 사이판 공항에 내렸습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
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분 말로는 그 날 , 이 부부가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습니다. 두 분은 비
지땀을 흘렸고요. 다른 곳에 가지도 못하고 택시를 타고 근처에 있는 상점에 가서, 반소매와
반바지를 사서 입고 여행을 했다는 당혹스런 경험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
리가 가고 있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 생활에서 실
패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굉장히 오래 나온 사람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실패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우리가 가는 이 믿음의 길은 순례의 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코 쉬운 여정이 아
닙니다. 핍박과 온갖 위험과 유혹이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공부한 시편 120편
과 121편의 내용입니다.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서 평화를 외쳤지만,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전
쟁을 선포하는 가슴 아픈 길,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내가 아무리 눈을 들어봐도 나를 도
와줄 이가 아무도 없는 것!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하고
한탄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시편기자를 통해
각인 시켜 주시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믿음의 길에는 위험, 유혹, 고난, 핍박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믿
음의 길의 전부일까요? 이 순례의 길에는 고난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요? 기쁨은
없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유혹이 있음이 사
실이요, 핍박이 있음도 사실이지만, 세상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 있다고 말
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공부할 시편 122편의 내용입니다.

1.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라

1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내가 기뻐하였도다" 얼마나 다른 분위기입니까?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거하는 나여! 화
로다! 내가 저주받은 인생이로다!"라고 시편 120편에서 탄식합니다. 121편에서, "누가 나를
도와주겠느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도 나의 도움이 도대체 어디서 올 것이냐!" 하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122편에서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자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쳤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이 위험
하고 어려운 순례의 길을 떠나면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위험과 핍박의 길을 가야
하고, 유혹의 언덕을 넘어서 순례의 길을 떠나는 저와 여러분이, 낙심하지 않고 이 길을 승
리하며 나아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은 들려주시고 있습니다.

먼저 이 시편기자의 기쁨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그것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장소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2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시편기자가 이미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떠났거나 아니면 예루살렘으
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얘기합니까?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
에 섰도다!" 도착하기도 전에 이런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이 순례자는 순례의 길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멉니다. 자기 앞에는 뜨거운 태양이 있
고, 밤의 달이 자기를 해할 수 있으며, 수많은 유혹들이 있으며, 지형적인 어려움을 극복해
야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루살렘까지 가는 동안 강도 떼가 앞에 남아 있음
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기뻐합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이 말씀
이 무슨 의미일까요? 시편기자는 기대감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리고 모든 위험과 유혹을 다
지나서, 예루살렘 성안에 우리의 발이 굳건히 섰을 때를 바라보며, 오늘의 위험한 여정을 기
뻐하며 떠났다고 간증해 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우리가 어떻게 기쁨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십니다. "이 믿음의 길을, 핍박이 많은 이 길을, 유혹과
환난이 많은 이 길을, 기쁨으로 마치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1절과 2절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처소를 사모할 때, 아직도 우리
앞에 위험의 길이 많이 남아있지만, 우리는 이 길을 낙심하지 않고 기쁨 가운데서 건너갈
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서 당하는 어려움과 환난, 고난은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곳에 가기 위한 잠깐 동
안의 어려움일 뿐이며,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발을 저 높은 곳, 하나님의
도성에 세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찬송가 작사자는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 앞에 수많은 환난이 있어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도성 안에 우
뚝 설 그 날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라는 겁니다. 머리로만 믿지 말고,
온 마음과 인격을 다해 우리가 가야할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릴 적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놀이가 많아서 그런지 소풍간다고 하면 아
이들이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장학습'이라고 말을 돌려서 한다고 합니다. 제가 초등
학교 시절에는 소풍 전날 잠을 설쳤어요. 어머니가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줄 때, 얼마나 기분
이 좋던지!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면 잠을 설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잠을 못 잤습니다. 저
는 좀 감정적이라 그런지 그런 날들을 아주 좋아했거든요. 상상해 보세요. 제가 결혼하기 전
날 밤을 어떻게 보냈을 것 같습니까? 꼬박 새웠어요. 주례사를 듣고 있는데 졸리더라고요.
바로 이런 마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잔치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요즘은 잔치하면 뷔페에 가서 치르지만, 저희 할아버님 생
신이나 동네 어른들 회갑잔치 때가 되면 삼사일 전부터 집에서 음식을 만듭니다. 그러나 옛
날에는 그때가 되어야 친척과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 생일을 맞이한 당사자의 마음은 어떻
겠습니까? 음식 준비를 하면 할아버님께서 나오셔서 차마 부엌에 들어가 볼 수는 없고, 뒷
짐을 지고 부엌 앞을 왔다갔다하십니다. 생일상 준비하는 것이 기쁘고 들떠서 그렇겠지요.
주님 앞에서 여러분도 이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유혹과 죄악이 많은 이 길, 병이 많고 환난이 많은 이 순례의 길을 다 지나서, 언젠가 우
리의 발이 하나님의 도성 안에 우뚝 설 그 모습! 그 날을 기대하며 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기대감에 가득 차 있을 때, 마음속에 항상 기쁨이 넘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서 말씀하십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
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
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하나님이 이 우주를 6일 동안 창조하셨어요.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려고 떠나신 지가 대
략 1970년쯤 됐어요. 그런데 아직도 안 오신 걸 보면 그 처소가 얼마나 놀랍겠어요?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기대감이 안 생깁니까? 이런 기대감을 가지
라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주님, 제가 저 영
원한 처소를 사모하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에,(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주님, 오늘밤에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신다면 정말 그곳에 우뚝
서고 싶습니다." 이런 기도를 합니다. 이런 기대감이 있으면 기쁨으로 순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 천국의 교제를 연습하라

3절.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이 말씀과 교제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말씀은 해석이 필요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한글 성경에 보면 어렵게 표현되어 있어요. 원어에는 두 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한글 성경에
는 하나밖에 없어요. 히브리 원어에는 '조밀한 성읍'과 '건설되었도다'가 동사로 표현되어
있는데, '조밀하다'란 말은 '오밀조밀하다' 로,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촘촘히 연결되었다'라
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3절 말씀을, 원어의 뜻을 살려서 표현하자면 "예루살렘아 너는
촘촘히 연결된 도시같이 건설되었도다" 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기자가 그 당시 예루살렘 도시를 찬양한 것입니까? 물론 겉보기에는 그렇
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렇게 읽으시면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건물이 중요
한 것이 아니잖아요? 왜 시편기자가 예루살렘을 찬양합니까? 왜 헨델이 "메시아"에서 예루
살렘을 찬양했습니까? 그 당시 예루살렘 도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
다. 집이 중요한 이유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도시가 촘촘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뜻은,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천국의 모습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서
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곳은 성도와 성도, 즉 한국인 성도뿐만 아니라 미국인 성도와 아프리
카인 성도를 비롯한,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촘촘히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찬양한 겁니다.

헬라어로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한 '70인역'이라는 놀라운 번역 성경에는 3절을 이렇게 번역
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는 완벽한 교제를 가졌도다" 바로 성도와의 교제를 말씀하고 있습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례의 길을 가면서 어떻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가질 교제를 이 땅에서 Practice, 연습하고 실행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목적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
교제입니다. 여러분은 왜 영안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왜 영안 교회에 등록 하셨습니까? 그
가운데 하나는 서로 연결되기 위함이에요.

교회 안에도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여기 2부 성가대원들이 모여 있습니다. 성가대원 여러
분, 하나님이 왜 여러분에게 성가대 하라고 한 줄 아세요?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않고 있
다가 그저 주일날 와서 연습해서 노래하는 것, 그것이 성가대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여러
분은 큰 것을 놓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영안 교회 안에서 따로 성가대로 묶어주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른 대원끼리 서로 연결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가
대가 가장 훌륭한 성가대와 단체인가? 일주일동안 뿔뿔이 흩어졌다가 서로 미워하며 찬양하
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성가대, 연결되어 있는 목장, 연결되어 있는 중등부, 연결되
어 있는 주차팀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연결되어 있다' '하나 된다' 는 말을 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이 늘 오해하는 것은 성경적
인 하나가 아니라, 유교적인 하나를 생각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연결되어 있는 하
나라고 하는 것은 똑같은 하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달라요. 그러나 연결되어 있어
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저의 오른팔과 왼팔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팔
은 위를 향하고, 왼팔은 옆을 향하고 있다면, 분명히 연결되어 있지만 하는 짓은 달라요.

아랍권을 여행하다보면, 그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반드시 밥은 오른손으로 먹습니
다. 오른손은 거룩한 손, 왼손은 부정한 손이에요. 누가 들여다보진 않지만 화장실에 가서는
왼손을 사용합니다. 만일 화장실에 가서 오른손이 편하다고 오른손을 썼다가는 그 나라에서
는 난리가 나는 겁니다.

손이 하는 기능이 다 다릅니다. 피아노를 쳐도 오른손은 멜로디를 칠 수 있고 왼손은 반주
를 칠 수 있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른손과 왼손은 내 몸에 연결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는 이런 하나됨을 말씀합니다. 오늘날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하
나됨을 얘기하면 머리에 무엇을 떠올리는가? 유교적인 하나됨을 생각합니다. 유교도 하나됨
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가정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임금과 신하관계에서도 하나됨을
강조했지만, 그 하나됨은 나의 기준에 맞춘 하나됨입니다. 권력이 강한 자가 권력이 약한 자
를 지배하는 하나됨입니다. 이것을 갈파한 책이 바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입니다.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무슨 사상을 잘못 배우고 있는가를 알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유교에서는 하나됨을 아주 강조했어요. 옛날 우리나라의 하나됨을 한번 생각해 보세
요. 아버지를 중심으로, 임금을 중심으로 한 하나됨입니다. 누구 한사람을 중심으로 한 하나
됨이었어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저자는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분이 모든 것을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공자가 정치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교를 만
들었다는 겁니다. 정치하는 사람이 나라를 잘 다스려야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하나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겁니다. 똑같은 사람! 그래서 궁리를 하다
가 공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공자가 그 청탁을 받아들여서 유교를 만들었어요. 저와 여러분
의 마음속에는 이런 하나됨이 자리잡고 있어요. 그러니까 교제가 안 됩니다.

동양에서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는 피지배자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수많은 방법을 강구해 냈어요. 이것을 간파한 임마누엘 칸트는 '이기주의'
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주의가 모든 것의 불행이다"

사람들 사이가 왜 연결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가?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칸트는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첫째는 '논리적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사로잡혀 산다는 겁니다. 논리적 이기주의는 자기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 생각과 판단이 옳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어요. 이런 사람 옆에 살
아본 적 있습니까? 정말 가까이 가기 싫죠. 무슨 얘기를 해도 자기 생각만 옳아요. 자기의
주장을 굽히는 법이 없어요. 이것이 논리적 이기주의입니다.

두 번째는 '미학적 이기주의'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말 같지만 쉽습니다. 자기의 심리적
취향에 몰두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느낌이 항상 옳다는 겁니다. 늘 자기의 기
분과 느낌만 중요하지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분이 나쁘면 나쁜 것이고, 자기의 기분이 좋으면 좋은 겁니다. 우리
사회를 잘 보세요. 여러분 모두 피해자이면서 어느 정도는 가해자입니다. 저는 군대에서 그
것을 느꼈습니다. 군대에서는 그 날 밤에 잠을 편하게 자느냐 못 자느냐는, 내가 오늘 일을
잘했느냐 못했느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날 운세(?)를 봐야 됩니다. 고참 눈치를 보
면 알아요. 그 날 고참의 기분이 나쁘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소용없어요. 군대 말로
'한딱가리' 하고 자야 돼요. 두들겨 맞고 기합을 받고 자야 돼요. 그런데 내가 오늘 잘못했
어요. 하지만 고참 기분이 좋아요. 그러면 그 날은 그냥 편안히 자는 겁니다. 작업하는 날이
라 하더라도 법을 어겨서 노는 겁니다.

가정에서는 어떻습니까? 내가 오늘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 날 아버님의 기분입니다. 그래서 들어오면서 눈치를 보는
거예요. 우두머리가 어떠신가! 아버지가 회사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 빨리 어디론가
튀어야 됩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가정 아닙니까? 왜 그럴까요? 칸트가 말하는 미학적 이
기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나 많이 있는 줄 압니
까?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신앙 생활 할 때에도 자기의 기분과 느낌
이 중요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떤 사실에 대해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아요. 만약 어
떤 사람이 당신을 욕했다고 제 3자가 들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가서 사실여부를 따져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미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들어서 내 기분이 상해 버렸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로 자신의 기분을 얘기해 버립니다. 그때의 감정을 쏟아 버리는 거예요. 그
사람이 만일 그 얘기를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욕했다고 몰아세우게 되면, 당하는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기분 나쁘죠. 그래서 기분과 기분이 맞붙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안
에서 한 달간 말 안 하고, 두 달간 안 쳐다보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순례의
길, 가정의 삶, 신앙의 길이 기쁨이 아니라 모래알 같은 거예요. 이 길이 너무나 고통스럽습
니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도덕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내가 손
해가 되면 나쁜 것이요, 내게 유익이 되면 좋은 겁니다. 그래서 요즘 사회에서 도는 말이 내
가 하면 사랑이요,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이기주의입니다. 이런 사람
옆에는 친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 옆에는 교제가 있을 수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교회 안에도 이런 철학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성경에서 말씀하
는 교제가 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의 교제는 어떤 것인가? 다른 사람의 독특성을 인정해
준 채로 연결되는 거예요. 우리는 보통 둘 중의 하나를 택합니다. "어? 저 사람 나하고 다르
네. 기도하는 방법도 다르고, 성경 보는 관심도 다르고, 모든 것이 나하고 달라. 목회 철학도
틀리고 다 틀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내길 갈게"가 됩니다. 그리고는 연결을 안 해 버
립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겁니다. 그 다음은, "야! 저 사람 어떻게
나하고 저렇게 똑 같을까! 예배 시간에 가끔 조는 것까지 똑 같네" 이렇게 되면 동지가 되
는 겁니다. 같은 길을 가는 거예요. 이것은 성경적인 교제가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촘촘히 연결된 것같이 건설되었도다
" 하나님은, 서로 다 다른 사람끼리, 다른 생각과 철학을 가진 사람들끼리, 다른 기준을 가
진 사람들끼리 연결되어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의
perspective를 넓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보수적인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런 잘못을 많
이 저질러요. 왜냐하면 그 신앙관이 너무나 좁아서 그래요. 나는 장로교인인데, 나는 침례교
인인데 하면서 따집니다. 침례교인 이라면 "너 물에 담가졌냐? 아니면 뿌렸냐?"를 따집니다.
그래서 물 뿌림 받은 사람은 아예 취급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침례를 줄 때 두
번 줬으면 좋겠어요.

예전엔 신학교에서 4학년이 되면 목욕탕에서 침례 실습을 합니다. 사람들을 물에 넣습니
다. 그런데 교수님이 장난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안 꺼내요. 교수가 빨리 꺼내라고 하면 "
교수님, 이놈이 아직 안 죽었습니다!" 하며 장난을 많이 쳤어요. 그런 장난 때문에 저희 다
음 학번에서 실습이 폐지됐어요.

이전의 교회사를 보십시오. 교인과 교인끼리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십자군 전쟁을 비
롯해서 천주교도들이 신교도들을 죽이고, 장로교인들이 침례 준다고 침례교인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성도간의 교제가 아닌 거예요. 오늘 교회가 이런 모습에 빠지게 되면, 순례의 길을
걸어가면서 신앙생활이 아니라, 세상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
로가 고난을 자처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덕적 이기주의에 빠지지 마세요. 담배 피는 사람이 꼭 나쁜 사람입니
까? 담배가 건강에 해로운 건 사실이지만, 성경 어디에도 담배 피지 말라는 얘기는 없어요.
'도덕'과는 상관이 없어요. 침례교회의 가장 훌륭한 설교자인 스펄전이 골초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의 사진을 보면 파이프를 물고 담배를 피우고 있어요. 그 사진을 보면서 나도
위대한 설교자가 되기 위해선 한번 피워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
어요. 그런 것으로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지 마세요.

우리는 너무나 도덕적 이기주의에 빠져 있어요. 하나됨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와 똑같
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판에 박은 듯 똑같아야 되는 거예요. 자식도 그렇게 키
워야 되고, 나와 다른 것은 용납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넓으십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창조적인 분이십니까? 우리는 그런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고 있어요. 이
사람은 이래서 나쁘고, 저 사람은 저래서 틀립니다.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틀려서 나와 교
제할 수 없다고, 교제를 다 끊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 보
수적인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짓는 죄가 '판단과 비판의 죄'입니다. 이
런 자에게는 교제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과 싸우기도 힘든데 어찌하여 나와 신앙관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나와 성경관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를 원수로 삼아 싸우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순례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십시오.
모든 사람을 품으십시오. 저도 보수적인 교단에서 자라났어요. 저는 특별히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뜨겁게 소리치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반감이 많이 생
기고 싫어했어요. 제가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달았어요. 내가
얼마나 교만했던가! 하나님이 받으신 형제를 내가 비판했더라고요. 제가 유학 10년을 마치
고 나서, 친구들이 바다는 아니지만 호수만큼은 넓어졌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넓히고 나자
내 마음속에서 기쁨이 얼마나 샘솟듯 하는지요.

우리는 천국에 가서 다 만날 것입니다. 순복음 교인, 천주교인이지만 구원받은 사람, 담배
피지만 구원받은 사람, 죄지었지만 구원받은 사람 등 모두 만나서, 우리는 촘촘하게 연결될
것을 믿으십니까? 예!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그 하나님의 교제를 연습하십
시오. 거기 가서만 그렇게 살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시고 이 땅에서 그렇
게 살아가십시오. 정죄하기보다 이해해주고, 비판하기보다 품어주세요.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촘촘히 연결된 것같이 건설되었도다!"

오늘 이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어떻게 순례의 길을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는가? 첫 번째는 영원한 처소를 사모해야 합니
다. 두 번째는 이 땅에서 천국의 교제를 연습해야 합니다. 마지막은 올바른 예배를 체험하라
는 겁니다.

3. 올바른 예배를 체험하라

4절과 5절에서 예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왜 성전에 올라갔는가? 이유는 예
배하기 위해서 올라갔어요. 성경에 예배에 대해서 수많은 정의가 있는데, 여기서 시편기자가
정의하는 예배에는 중요한 두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4절의 '감사'와 5절의 '판단'입니다.
예배는 감사와 판단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기쁨으로 순례의 길을 가기 원한다면 예배
드릴 때마다 이 두 가지를 항상 잃지 말고 유지하라는 겁니다.

첫 번째, 감사입니다. 이미 시편 강의를 하면서 말씀드렸지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이
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들이었어요.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이렇게 세 번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23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무교절은
출애굽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한 주간 동안 이스트가 들지 않은, 부풀지 않은 빵을 먹는
거예요. 맥추절은 첫 열매를 땄을 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곡식을 다 거
둬들여 창고에 넣고 나서, 하나님께서 곡식을 저장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해서 드리는 예배
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이 감사를 연결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무교절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을 감사하라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심을 감사해야 됩니다.
예배에서, 구원의 감격이 없으면 예배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합니다. "주여! 내
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구원'이란 단어만 들어도 여러분의 가슴이 펄떡
펄떡 뛸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맥추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
을 풍성케 하심을 감사하는 겁니다. 수장절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도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 예배에 나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13평 아파트에 사는 것도 하나님
의 은혜요, 내 몸이 유지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예요. 하나님이 내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
니라, 내 믿음과 내 육체를 풍성케 하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하나님께서 언젠가
내게 주신 이 생명을 완벽하게 완성시킬 것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배입
니다. "하나님,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지난 한해보다 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언젠가 제 믿
음이 완벽해질 줄 믿습니다. 지금은 제가 죄로 말미암아 낙심하고 죄를 짓지만, 언젠가는 죄
와 상관없는 몸이 될 줄 믿습니다!" 라고 믿는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감사하는 거예요.

두 번째 요소는 '판단'입니다. 이것은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께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하
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난 한 주간의 자신의 삶을 판단 받는 거예요.

"주님, 제가 아내와 이런 말다툼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옳습니까?" 하고 판단 받는 거
예요. "지난 주간에 이렇게 사업을 했는데 제가 옳습니까?" "지난 주간에 이런 생각을 했는
데 하나님, 판단해 주시옵소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한 주간 동안 내 안의 잘못
된 것을 오늘 이 예배를 통해 판단하셔서, 저의 죄를 지적해 주시옵소서! 지적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당신이 제 죄를 지적해 주기만 하면 제가 그 판단에 의해 제 마음을 바꾸겠습니
다. 제 행동을 바꾸겠습니다." 결단하고 기대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예배시간마다 하나님께 판단 받으십니까? 말씀 앞에 여러분을 비춰보십니까? 우
리에게 이런 감사와 판단이 예배 때마다 계속될 때, 마음속에 기쁨이 흘러 넘칠 거라고 시
편기자는 얘기합니다. 저는 이런 것을 체험했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굉장히 엄한 분이셨어
요. 그래서 제 아이들을 사랑은 하지만 아이들이 저를 좀 어려워해요. 특히 광진이는 좀더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저도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꾸중
이 굉장히 두려웠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는 것을 느끼고, 얼
마나 두려웠는지 몰라요. 그 판단 앞에 내 모든 잘못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해결 받고 난
뒤에 오는 그 기쁨!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세상의 누가 그런 기쁨을 나에게 주
겠습니까? 여러분, 이런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6절부터 마지막 9절까지는 기도문입니다. 6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두 가지 기도를 합니다. '평안'과 '형통'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자세로, 천국을 사모하
며, 천국의 교제를 연습하며, 올바른 예배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평안함과 형통함이
있도록 기도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 당해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해도, 하나님이, 오늘 시편기자를 통해 말씀하신 세 가지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실행하며 산다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는 평안함과 형통함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
는 이것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보십시오. 평안함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형통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안 새생
명 축제'를 준비했습니다. 순례의 길이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재미없어 못 믿겠
다. 예수 믿으면 내 모든 재미를 다 포기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해서 형통하지 못한
길을 걸어가는 저들에게 나가서 전하십시다. 이 순례의 길이야말로 기쁨의 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 모두가 간증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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