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생애와 사상 융엘 (E. Jüngel) 심광섭(한누리교회 담임/신학박사) 역 ----------------------- I. 생애 1. 신학적 실존 2. 전기 II. 신학 1. 시작 2. 변증법적 신학 3. 교의학적 신학 III. 영향 ---------------------------- I. 생애 1. 신학적 실존 칼 바르트는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이다. 바르트는 쉴라이에르마허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그와 관련맺고 있다. 바르트의 개인적인 활동과 신학적인 작품들로 인하여 개신교 신학은 교파적 한계를 넘어 자기이해를 현저하게 변화시키게 되었고, 나아가 개신교의 자기실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바르트는 20세기의 정치·문화적 생활 가운데서 간과할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바르트 당대의 내·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하여 그의 논박할 수 없는 천재성은, 갱신을 요구하는 시대의 아들로서 그리고 금세기의 변화에 표준적으로 작용한 힘으로서 증명되었다. 바르트의 작품이 유럽 신학사 혹은 유럽적으로 고정된 신학사의 탈출구를 표시하는 것인가 - 바르트 자신은 그가 그렇게 격렬하게 비판한 19세기의 전통을 기꺼이 주목하였다 - 아니면 역사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계속적인 논쟁은 양자택일의 지평위에서 움직이는 부적합한 물음이다.그러나 바르트의 세계적인 영향은 우선 연속성과 불연속의 대립, 즉 전통과의 결합과 전통과의 단절의 대립을 극복한 신학적인 핵심 주제에 철저하게 몰두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바르트는 신학적 핵심 주제에 철저히 몰두함으로써 때로는 오해받을 수 없는 “정신적 혁명가”의 모습을, 때로는 “20세기 교부”라는 가부장적 모습을 드러낸다. 바르트의 자기이해에 따르면 그는 정신적인 혁명가나 20세기의 교부가 아니라, 1933년에 “교회 안에서의 우리들의 실존, 더 정확하게 말해 교회의 부름받은 설교가와 선생”으로서 정의하였던 “신학적 실존”의 방식으로 산 예수 그리스도의 한 증언자이다. 바르트가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 가장 중요한 신학적 열매인 교회 교의학 보다는, 그의 신학적 실존으로부터 출발한 실제적인 발언들과 영향이 계기가 되어 신학적 “분위기”에 현저하며 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바르트가 끼진 영향사를 분석하는데 과소평가될 수 없는 요소이다. 다른 한편 가벼웁게 혹은 사변적으로 수행된, 저자의 실존에 대한 독자의 기억도 철저하게 바르트의 신학적 전집에 속한다. 교회 교의학의 서설과 그 안에 들어 있는 확실히 감추어진 자서전적 보론은 일련의 논문, 강연, 편지들과 함께 바르트의 저작을 그의 인격과 역사적 제약성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한편으로 바르트의 신학적 저작을 저자의 신학적 실존을 객관화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다른 한편 진리에 대한 그의 주장을 신학적 전기와 무관하게 평가할 수 없다. 바르트의 많은 출판물들은 분명히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문서들이고, 몇몇 다른 책들처럼 교회 교의학의 모든 부분은 강의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2. 전기 바르트는 부계 쪽으로나 모계 쪽 모두 바젤(Basel)의 신학적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다. 1886년 5월 10일 바르트가 바젤에서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요한 프리드리히 바르트(Johann Friedrich Barth)는 자유주의로 물든 대학의 신학노선에 분명히 반대하기 위해 10여 년전 세워진 설교자를 위한 학교의 교수직을 넘겨받았다. 바르트의 아버지는 베크(J.T.Beck)의 마지막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바르트의 할아버지는 베크의 처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베크의 신학은 일시적으로 칼 바르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바르트의 어머니 안나 카타리나(Anna Katharina)는 개혁교회 정통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던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독일에서 바젤의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1832년 알코올 중독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모계 쪽으로는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와 친척이며 그의 혈통으로 보아 바젤 시민사회의 도시적 전통이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오히려 스스로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관계를 발전시켰다. 바르트를 감동시킨 가장 강력한 바젤의 정신은 아벨 부르크하르트(Abel Burckhardt)의 바젤 독일어로 된 수수한 형식의 자장가였다. 바르트는 이 자장가를 늙어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였고, 그것을 그의 첫 번째 신학수업으로 인정하고자 하였다. 그 노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명성으로써 신앙의 진리의 현실성을 부각시켰고 “주제 자체에로”(Zur Sache selbst) 인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바르트는 그의 교회 교의학 속에서 이 노래에 기념비를 세웠다. 바르트의 아버지가 쉴라터(Schlatter)의 후임자로 초빙됨으로써 바르트는 1889년 베른(Bern)으로 이사하였고 거기서 그는 중·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바르트가 부모님의 교육과 충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율법을 끊임없이 유보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라는 어머니의 준칙은 뒤늦게야 “선한 그리스도교적 정신 속에서의 교육”이라는 긍정적인 대답을 찾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부모와의 갈등 상황으로부터 나온 바르트의 후기의 신학적 결단과 발전에 대한 심층심리학적 해석은, 이러한 고찰이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무엇보다 할머니 자토리우스(Satorius)와의 관계 속에서 접촉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의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을 아버지에 대한 “후기의 복종”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에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아버지가 정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가르치기를 거절했던 그것을 교의학적으로 실행하려고 했다는 가설로서 더 이상 타당성이 없다. 바르트는 완전히 예외적으로 그를 사로잡았으며 고무하였던 것으로 베른의 목사 로버트 애쉬바허(Robert Aeschbacher)에게서 받은 견진수업을 기억한다. “나는 당시에 그리스도 신앙고백의 위대한 명제들을 알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이 하나의 아름답고 선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르트는 거기서 사회적 물음의 타당성을 배웠다. 이 수업을 계기로 바르트는 “신학자가 되겠다는 결단을 하였다. 그는 신학자를 설교나 목회 그리고 그 밖의 것들에 대한 기대 속에서가 아니라, 신학수업을 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어둡게 떠올랐던 신앙고백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생각하였다”. 베른에서의 신학수업을 통하여 그는 옛 형태의 역사-비평 학파를 철저하게 공부하였기 때문에 역사비평학의 후기 모습은 그의 피부와 심장 가까이 파고 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를 괴롭게 할 뿐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르트는 후에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여러차례 읽ㅇ,면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가 자유주의적 분위기인 마르부르크에서의 계속적인 수업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바르트는 베를린에 가서 카프탄(Kaftan), 궁켈(Gunkel)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르낙(Harnack)에게 배웠으며, 그는 스스로 하르낙의 제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칸트 이외에 지금 쉴라이에르마허가 이전보다 더 의미있게 나의 의식 속에 들어와 있다”라고 아마도 헤르만(W.Hermann)의 윤리학을 독서함으로써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바르트는 헤르만을 베른에서 다시 한번 공부하고 튜빙엔에서 우악스러운 고집을 피우면서 쉴라터에게 속한 후에, 1908년부터 헤르만에게서 그의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의 참된 선생이었던 헤르만 이외에 하이트뮬러(Heitmüller), 코헨(Cohen), 나토르프(Natorp)와 라데(Rade)등이 바르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바르트는 베른 지역의 유라(Jura)에서의 짧은 전도사 생활과 1908년 목사고시 이후 “기독교 세계”지의 공동 편집위원의 자격으로서 일년동안 마르부르크에 되돌아왔다. 그 후에 제네바에서 보조목사로, 1911년 자펜빌(Safenwil)에서 목사로 일하였다. 바르트는 자펜빌에서 노동자의 궁핍한 상황과 마주치게 됨으로써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나의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목도하였던 계급간의 대립에서 나는 처음으로 실제적 삶의 실천적 문제와 접하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나는 여러해 동안 설교와 교육을 세밀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신학에 몰두하였다”. 바르트는 1913년 넬리 호프만(Nelly Hoffmann)과 결혼하였으며, 그녀는 바르트와 그의 생애 끝까지 신뢰하면서, 그러나 자주 단념한 채 살았다. 자펜빌 시절에는 뚜르나이젠(E. Thurneysen)과의 깊은 우정이 싹트는데, 그는 바르트의 신학적 발전을 그때마다 가장 철저하게 따라간 사람으로, 부분적으로는 신학적 발전을 함께 불러일으킨 사람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1915년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고, 동시에 신학적 작업에도 몰두한다. 왜냐하면 제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의 선생들의 입장과 유럽 사회민주당의 태도가 이중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과 절연하게 되고, 쿠터(라가츠가 아님)로부터 이어받은 하나님 나라와 사회운동과의 일치사상과도 절연한다. 그러나 부름하르트 부자의 실제적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은 결정적으로 그에게 남아있다. “설교의 궁핍”은 신학이 새롭게 정초될 것을 요구하며, 바르트가 이후의 전 신학을 “근본적으로 목사들을 위한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였다. 성서의 새로운 발견은 즉시 신학적으로 효과를 나타내었다. 바르트는 1916년 로마서를 주석 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로마서 주석은 1918년 12월에 인쇄되었으나 191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1918년 11월 20일에는 아직 인쇄되지 않은 레닌의 작품 “국가와 혁명”의 독일어 번역을 로마서 13장을 주석 하는 데 사용할 수 없었다. “로마서” 제 1판을 쓰고 1921년 바르트는 괴팅엔 대학 개혁신학의 명예교수로 초빙되었다. 1922년 완전히 수정된 로마서 주석 제 2판이 출간되었고, 이것은 새로운 신학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교과서가 되었다. 괴팅엔에서 히르쉬(E. Hirsch)와 비판적인 그러나 친밀한 관계가 전개되었다. 바르트는 1922년 고가르텐(F. Gogarten), 뚜르나이젠(E. Thurneysen) 메르츠(G. Merz)와 함께 “변증법적 신학”의 모판으로써 작용한 잡지 “시대사이”(Zwischen denZeiten)를 창간하였다. 불트만도 이 잡지에 기고하였다. 바르트는 1925년부터 1930년까지 뮨스터(Münster)에서 교의학과 신약성서 주석의 교수로 가르쳤으며, 거기서 철학자 숄츠(Heinrich Scholz)와 밀접하고 지속적인 교제를 가졌다. 여기서 “계획 중에 있는 기독교 교의학”이 나왔다. 바르트는 1929년부터 모든 면에서 그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신실한 여비서 “샤로테 폰 키르쉬바움(Charlotte von Kirschbaum)을 만나게 되었다”.바르트는 1930년 본(Bonn)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부름 받았다. 거기서 교회 교의학 제 1권이 나왔는데, 여기서 그는 지금까지의 동료들 대부분에 대해 간과할 수 없는 반대를 하였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야기된 교회투쟁은 바르트(1932년에 사회민주당에 가입)와 고가르텐 및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을 첨예화시켰다. 이미 1933년에 “시대사이”지는 해체되었다. 히틀러에게도 보내어졌고 이듬해에 37,000부를 찍어 유포한 팜플렛 “오늘날의 신학적 실존”에서 바르트는 신학과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주제에로(zur Sache)”라는 한마디 단어로 입장을 밝혔다. 1934년 5월 11일에 바르멘에서 열린 제 1차 고백교회 총회에서 바르트가 광범위하게 기초한 “신학적 선언”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바르트와 “고백교회”의 중심세력들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차이점은 바르트가 에밀 부룬너를 “거부”한데서 발견된다.바르트의 거부는 기초 신학적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서 에밀 부룬너가 주장하는 그리스도 선포를 위한 자연적 “접촉점”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바르트는 “지도자”에 대한 맹세를 무제한 거절함으로써 직무위반 혐의를 받게 되었으며, 이 혐의가 끝날 무렵인 1934년 12월 면직이라는 벌로 수정되었다. 바르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5년 6월 21일 제국의 문교장관에 의하여 연금생활(해고가 아님)로 들어갔다.후에 바르트의 모든 인쇄물은 독일에서 금서가 되었다. 바르트는 독일에서 추방된 이후 은퇴할 때까지 바젤에서 가르쳤다. 바르트는 1935년 6월 바젤에 초빙되었는데, 바젤로부터 신학적 논쟁을 벌림으로써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하도록 유럽의 그리스도인을 고무하였다. 1938년 9월 19일 프라하에 있는 로마드카(Hromadka)교수에게 한 편지는 유명해졌는데, 거기서 바르트는 “칭의와 정의”에서 서술하였던 근본명제를 지금은 모든 “체코의 군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싸워야 한다”라는 주장에 적용하였다. 바르트는 “정치적 예배의 증거”를 요구하였다. 전쟁 후에 바르트는 반공주의와 스위스 및 서독에서의 재무장에 대해 경고하였으며, 격분하여 독일 대통령 호이스(Heuss)가 독일 서적상에게 의도적인 평화상을 수상하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중재하였다. 바르트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에 참여함으로써 세계교회와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불규칙적인 시간 간격으로 출간되고 우선 강의로써 전달된 교회교의학의 부분들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다양한 존경 중에는 평화봉사에 대하여 영국이 수여한 훈장에 대한 교의학적 반성이 있다. 바르트는 공식적인 교수활동을 1961/62년 겨울학기에 행한 “개신교 신학 입문”이라는 강의로 끝맺었다. 이 주제에 대하여 바르트는 미국 여행 후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까지 대화식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는 1966년 바티칸의 초청으로 로마에서 강연을 하였는데, “풍자적이며 비판적인 의견”을 말하였고, 이 강연은 풍자만을 의도하지 않는 제목 “사도들의 방문” - “교황은 적그리스도인이 아니다”으로 출간되었다.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는 다시한번 - 마지막 출판물들 중의 하나와 마찬가지로- 쉴라이에르마허였다. 1968년 12월 10일 바르트는 바젤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기 바로 전에 바르트는 한 인터뷰에서 그의 삶과 사유의 구성적 동기를 끊임없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 사랑하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듣는 것과 연결하면서 그의 신학의 대상을 다음의 말로 요약하였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 인간을 위한 하나님, 땅을 위한 하늘”. II. 신학 바르트의 신학은 처음부터 매우 반체계적이다. 체계적으로 엄격하게 구성된 교회 교의학에서 조차 역시 반체계적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체계적인 것은 교의학적 사유과정을 그때마다 생각해야 하는 주제로부터 교정받게 하고 새롭게 움직이게 하는, 말하자면 이때 전진하게 하는 신학의 힘이다. 바르트의 거대한 신학적 생산력과 그의 작품의 범위는 우선 그가 객관적으로 명령하고 느끼는 필요성, 즉 끊임없이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한다”라는 강박감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통해 바르트의 사상 발전에 나타나는 현저한 변화가 설명된다. 바르트의 사상적 변화는 우선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자유주의 신학과 소위 실증주의 신학과의 단절로 나타나며 그 후 여러번의 자기교정 - 부분적으로 다시금 다른 신학적 노선들과 연결된 - 을 거쳐 마지막으로 외견상 접합점이 없어 보이는 교회 교의학의 건축술 내부에서 대부분 은밀하게 수행된 수정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바르트가 특별히 명백하게 제시했던 변화에 초점을 맞출 때, 그의 신학적 사상의 발전을 다음과 같은 단원으로 구분할 수 있는 판별기준을 얻는다: 1. 시작: 1919년 로마서 주석 제 1판까지; 2. 변증법적 신학: 1927년 그리스도교 교의학까지; 3. 교의학적 신학: 교회 교의학과 교의학의 핵심적 물음이 응집된 많은 분량의 작은 문서들, 부분적으로 실제적이며 부분적으로 원칙적인 문서들. 그러나 바르트의 신학은 이러한 3기 안에서 끊임없이 개축되기 때문에 바르트 신학을 구분하는 일은 부정확성을 감수해야 한다. 그때 그때마다의 생의 체험(실천)이 어느 정도 신학적 인식을 규정하였느냐는 물음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신학적 발전 내부에서의 눈에 뜨이는 사건에 상응하는 상호작용이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역시 상호작용을 위하여 바르트의 자기증언 - 동시적인 것이건 혹은 후대의 것이건 - 이 제시된 비판적 신중성과 함께 진정한 주석으로 읽혀질 수 있다. 1. 시작 바르트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이 입장과 결부된 당시의 신학에 대한 비판으로 이끄는 바르트의 신학적 출발은 그의 생애의 다양한 단계로부터 시작한다. 아벨 부르크하르트의 동요와 로버트 애쉬바허의 견진례 교육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지속되었다. 대학시절 아버지의 신학사상에 대한 긴장이 명백하게 형성되며 공부할 대학을 선택하는 갈등으로 나타난다. 아버지가 마지못해 승인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mann)으로부터 받은 수업과, 칸트와 쉴라이에르마허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이들로부터 준비되고 인도된 연구는 젊은 바르트에게 오랜 기간동안 인상을 준 체험이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 이후에도 헤르만으로부터 배운 신학적 인식들 중 얼마는 결정적으로 남아 있다. 적어도 상대적인 신학의 학문적 독자성, 변증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리스도 진리의 자기 입증성(Insichselbst-Gegründet- sein)”; “그리스도 중심적 충격”이 그것이다. 1909년 바르트가 “전적인 마르부르크 사람”으로서 제베르크 학파의 조정신학(Vermittlung- theologie)에 대하여 면역이 되고 트뢸치(Troeltsch)로부터 조금 영향을 받고 리츨(Ritschl)과 그의 제자들의 세계로부터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대학신학의 내용”을 “현대신학”에서의 “하나님 나라 사업”으로 요약 설명할 때, 이미 배워 습득한 신학의 주요 특징이 “종교적 개인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로서 제시되고 긍정되었다. 신앙표상에 대한 적법한 다원주의에 신앙표상을 입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때마다의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현실성”을 통하여 부합한다. 이러한 신학은 실천으로 될 수 없다라는 설득력 있는 이의는 주도면밀하게 “실천으로의 도주”라는 이름 아래 방지되었다. 실천은 “학문은 재료가 아니라 방법이다”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전도사 바르트는 그의 첫 설교에서 제네바의 교회에 자신을 “내적인 삶의 영역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천거하였다”: “우리는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바르트는 제네바에서 새롭게 쉴라이에르마허를 읽는 것 이외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연구하였다. 이 연구는 1910년 “그리스도 신앙과 역사”라는 강연으로 나타났으며 - 제목은 “기독교 신학 일반의 문제를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마르부르크 신학이 계속적으로 충분하게 발전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 이 강연에서 두드러진 것은 루돌프 불트만에게서 다시 나타나는 철저한 문체이다. 주제를 취급하면서 자명하게 대두된 것은 “신앙의 방법이 신앙론의 방법”을 규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강연의 전개 속에서 막연한 일반성만이 신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트뢸치와 스스로 한계를 긋는다. 바르트는 동시에 “역사를 위하여 수행하려 했으며” 따라서 계시가 사라지게 되는 리츨의 뒤를 잇는 종교사학파의 분별력 있는 분석에 도달한다: “하나님은 역사로부터 사라진다”. 이것만이 학문적으로 적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계시, 그리고 기적 등은 학문적 개념이 되지 못한다”.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Harnack)은 후에 바르트에 대해 동일한 논증을 행한다: “계시의 개념은 학문적 개념이 아니다”.이 논증은 바르트에게 매우 친근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하르낙에게서, 그리고 누구보다도 빌헬름 헤르만에게서 오직 이러한 전제하에서 “절대적인 역사...신앙과 계시에 대한 절대적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이제 신앙은 “사회적 사태”로 선언되며, 사회적 사태의 기독교성은 “인간의 사회성 안에 내재하는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중재된다.이미 여기서 신앙은 “인간의 개념 안에 주어진 것으로 전제될 수 없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따라서 “신앙이 의미하는 그리스도는 우리 밖에 계신 절대적인 그리스도이다”. 인간의 본성에 본래적으로 주어진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에 본래적으로 주어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도 존재할 수 없다.오히려 그리스도는 멜랑히톤과 칼빈의 견해를 따라 “작용하고 촉발하는 그리스도”로서 이해되며 - 예수의 내적 삶의 직관을 통해 전달되며 -,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신앙의 원천이며 자료”로서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명제가 기독론적 자기중재를 변호하는 것 같은 인상을 야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 바르트의 이해에 따르면 전 정통주의 신학체계를 폭파시키는 다이나마이트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는”성령의 내적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 신앙은 분명하게 본래적으로 중재하는 법정으로 주장되었고 신앙과 역사의 “대립관계”가 “상호병존”을 위하여 파괴 되었다.신앙은 역사적 기초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은 모든 종류의 연역행위와 외적인 필연성을 내적인 필연성으로 돌리는 신앙자체(Autopistie)라는 본질구조를 가진다.성서 이외에 일련의 중재적 역할을 담당하는 개인들의 예감이 “계시의 원천”으로 등장함으로써, 신앙의 보편성에 대한 정당한 관심이 신앙의 독자성을 평준화하는 방법으로 인식된다: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다른 수로를 갖고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Franz von Assisi)와 보델쉬빙(Bodelschwingh)의 행동은 바울과 루터 사상이 선한 것과 같이 선하다. 그러나 미켈란젤로, 바하, 모짜르트와 베에토벤, 그리스도 십자가의 설교자로서의 쉴러의 작품 역시 선하다. 그리고 괴테의 강력한 영향력 중 하나는 자기를 부정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복종이 주는 영향력이 아닌가?”후에 바르트는, 이 논문이 인쇄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판단한 사실은 이해할 만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기본통찰은 후에 감내하기 어려운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 인식에는 우선 신앙과 역사의 상호병존, 내적 필연성으로의 신앙의 진리의 환원,그리고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Christus extra nos)로부터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Christus in nobis)에로의 이동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이며 교회 밖에서도(extra ecclesiam) 작용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관심이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항상 다시 나타난다. 바르트는 마르부르크에서 받은 교육에 이어 스위스에서 당시 젊은 스위스 목사들에게는 자명하게 받아들여졌던 쿠터(H. Kutter)와 라가츠(L. Ragaz)로 대표되는 종교사회주의자들과 밀접하게 접촉한다. 바르트는 특히 쿠터의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강연으로부터 “위대한 단어인 ‘하나님’을 다시 진지하고 책임적이며 의미심장하게 언명하는 것”을 배웠다. 바르트는 쿠터에게서 자유주의 신학이 품고 있는 반교회적 분노와 친숙하게 된 이해로부터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하나님의 세력 범위는 교회의 세력 범위 보다 크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바로 “세속적 세계사건의 형태와 형상 속에서” 만날 수 있다.쿠터의 영향이 보다 강렬하고 지속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동안 라가츠가 대변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앞선 현상인 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는 이론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기에 이르렀다.자펜빌의 노동자와 농민 단체 안에서 계급모순을 발견하고 바르트는 사회문제에 대한 일련의 강연을 하였고, 그 중 1911년에 아르가우(Aargau) 주 노동자당의 공식 기관지인 “자유로운 아르가우 사람들”에 출판한 연설, “예수 그리스도와 사회운동”에서 바르트는 쿠터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한 명제와 연결시켰다: “예수는 사회운동이며, 사회운동은 현재적 예수이다”. 예수와 사회운동은 “아래로부터 위를 향한 운동”으로 해석된다. 반 관념적 논쟁이 지배적이다: 정신은 하나님 앞에서 물질을 변화시키고 몸(F. Chr. Oetinger)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 힘이다. “나의 것은 내것이다”라는 소유에 관한 동어반복은 예수에 의하여 가족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파괴되었기 때문에 예수는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사회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사상 속에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발견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예수가 연대적이고 사회적인 하나님만을 알 뿐이며 따라서 연대적이며 사회적 종교만이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동지가 되어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주의에 실망하고 바르트는 새로운 신학적 정초를 찾았다. 이것은 “신학과 전혀 관계를 맺을려고 하지 않는”쿠터와 라가츠로부터의 전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스위스의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다. 물론 바르트는 “종교적인” 목사나 “정치적 목사”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종교와 사회주의”라는 주제로 행한 지금까지 발간되지 않은 강연에서 바르트가 제시한 정초로부터 후기 신학의 근본동기를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신학적 종교비판이 등장하며, 일방적으로 인간학적으로 고정된 종교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근본사실 및 생의 사실”과 모순되며 하나님 나라는 다시 사회주의 안에서 그의 인간적 “거울”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 비판의 요점이다. 이 강연 속에 쿠터와 마르부르크 시절 신학의 모습으로 새로운 사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여전히 바르트는 넓은 의미의 “계시”를 말하며 사회주의를 “하나님 나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 나라를 엄격하게 종교와 동일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동적인 다스림으로 해석한다. 하나님 나라의 거울, 징후와 표시는 하나님 나라 자체와는 구별되면서, 하나님 나라와 관계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일하시는 분으로서 이해되지만 그분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 - 가장 엄격하게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실천 - 에 부합한다. 물론 “세계는 세계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바르트는 이제 근본적인 구분과 관계라는 방법으로 연구하기 시작한다. 구분과 관계는 우선 변화된 형식으로 주로 역설로서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교회 교의학의 유비론에서 완성된 모습을 발견한다. 창세기 15장 16절에 관한 한 설교에서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어법이 눈에 띈다: “즐거운 마음으로 처음부터 시작하자”;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새로운 신학적 정초에 관한 착상은 - 뚜르나이젠과 쿠터에 의하여 중재된- 브룸하르트(Blumhardt) 부자의 연구를 통하여 조성된다. 바르트는 그들의 “가정 기도문”을 1916년의 한 평가에서 “전시를 탄생시킨”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라고 찬양하였다. 브룸하르트의 주목할 만한 사상은 그가 “세계를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브룸하르트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혁명적”기대가 그에게 부응할 수 있다. 나우만(F. Naumann)과 브룸하르트(Ch. Blumhardt)의 죽음을 기리는 한 논문에서 바르트는 이들을 찬양하며 다음과 같이 확정적으로 말한다: “불행한 단어인 ‘종교’는 뫼트링엔(Möttlingen)과 볼(Boll)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바르트는 브룸하르트로부터 종교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대립을 배웠다: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위하여 종교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없다”. 바르트는 브룸하르트에게서 종교가 아니라 “인간성을 위한” 희망과 “생의 육적인 면”을 위한 희망을 발견한다.바르트는 그의 후기 저작에서 여전히 브룸하르트 부자의 종말론적 방향을 특유하고도 새로운 착상으로 결정적 증언을 한다. “예수는 승리자이다”라는 부활절의 확신은 직접성의 철학적 공리의 원칙적인 추상성으로부터 구분하기 곤란하지만 “로마서” 제 1판 신학의 실제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당신들은 부활절 이후에 산다”.그러나 교회 교의학의 화해론은 여전히 아버지 브룸하르트의 명언이 담고 있는 진리의 전개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바르트 특유의 신학적 착상이 발생하게된 결정적 법정은 성서이다. “Ch.브룸하르트의 영향”을 통하여 성립된 “구체적 성서주석”이 바로 그것이다. “성서와 신약성서 사의의 유기적 관계”를 발견할 수 없는 능력은 부족한 성서적 인식 때문이다: “우리가 보다 일찍 성서로 되돌아 갔더라면!”.바르트의 사회주의가 그의 신학적 이론 형성을 위하여 구성되었다는 해석은 지속될 수 없다. 오히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공히 위기에 빠졌던 유산이며, 위기로부터 각기 상이하게 발생하였다. 바르트 특유의 신학적 발전에서 구성적인 요소는 새로운 성서주석의 방법이며, 물론 이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적 선택은 왜곡되지 않았다. 뚜르나이젠과 함께 신 구약 성서를 새롭게 읽고 해석함으로써 신학의 ABC를 새롭게 습득하려고 했던 시도는 로마서 주석에서 실현되었다. “나는 성서를 지금까지 마치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것처럼 읽기 시작했다”.로마서 제 1판의 주석은 “벵엘(Bengel)과 외팅어(Oetinger)의 사상(그리고 쿠터를 돌아 쉘링의 사상)의 영양 하에서 쓰여졌으며 후에 그 내용은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로마서 주석은 참으로 특징적인 대립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에 관한 사신은 인간의 종교론이 아니며”,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유일한 진리이며”, 이 진리는 스스로 승리를 위해 진력하며 그 자체로서 “주제 자체”,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우리의 하나님 인식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대상화 하지 않고 우리에게 직접적이며 창조적으로 다가 오신다”.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찾는 사람에게 탐구 가능하며 인식 가능한 존재이다”. “하나님에 관한 개념은 우리 자신의 존재처럼 그렇게 직접적으로 주어진다”.복음은 변증법적으로 해석된 원천을 통하여 서술된다. 한편으로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것이며, 특수한 것이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전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복음은 “오래 전에 이미 알려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특수한 것이며, 단순한 전제가 아니라 역사 자체의 전제이다”.처음에 단순하게 대립의 통일을 말한 역설적인 이 주장은 지금부터 항상 새롭게 형성되고 대답된 과제, 즉 어떻게 ”가장 특수한 것”이 동시에 “가장 일반적인 것”이며 또한 일반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과제를 예시한다. 처음에 바르트는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혁명이라는 정치적 은유를 사용하여 논증한다. 하나님의 혁명은 “우주적 관계의 우주적 출현이며”, “순수한 왕들의 왕국”으로 파악된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의 “공화국”을 위한 “모든 종속으로부터의 해체”로서 이해된다.그러므로 “혁명적인 것”은 신적인 것의 해석학적 도구가 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혁명적인 것은 “만물이 그의 원천으로 회귀하는 일”이기 때문이며, 죽음의 세계에로 침입하여 모든 구속을 허무는 작업으로서 “개혁적으로”죽음의 세계에 특유한 가능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혁명은 차안의 세계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차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피안적인 것으로서, 개인주의적으로 개인들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세계혁명!”이며, 차안에서 “생명의 영”과 부합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현재 속에서 혁명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으며, 현재 속에서 혁명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의 혁명이다!종말론적 직접성의 사상 - “하나님 신뢰”, “세계의 수수께끼의 해결”과 “구원의 확지”는 “종말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 은 효과를 강조하는 의인사상으로 되며 윤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승인하여야 하는 마지막 관점에서 볼 때 윤리란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운동만이 존재한다”.하나님의 운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엄격한 “윤리의 건설”이며, 하나님은 “완료된 분이 아니라 가장 자유롭고 생명력 있는 운동 속에서”의 사랑이며 자비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운동 안으로 끌어들인다”.그러는 사이에 “옛 태도”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철저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반대로 “옛 인간”에 대한 비판은 빈약한 것으로 들어났다. “우선 인간을 죽이는 위기가 요청된다”. 2. 변증법적 신학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표현은 바르트와 브룬너(E.Brunner), 불트만(R.Bultmann)과 고가르텐(F.Gogarten) 등의 학자들이 대표한 신학적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그러나 이 용어는 바르트와 당시의 친구들이 사용한 언어에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로마서 주석 제 1판과 2판 사이에 작성되었고 바르트를 독일에서 빨리 유명하게 만든 탐바흐(Tambach) 강연 “사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은 날카로운 반명제로 기초되어 있으며, “전적 타자”를 강조하고, “하늘로부터 수직으로”(부싯깃)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이다”. “사물에 대한 가장 위대한 통찰”은 사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발생한다.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결합(“기독교-사회적”, “복음-사회적”, “종교-사회적”)에 반대하여 “우리의 사회적 삶을 향한 열려진 창문”이 없는 “스스로 폐쇄된 것”으로서의 “신적인 것”이 유효하며, “그리스도를 그렇게 빈번히 세속화하거나” “민주주의적 태도나 사회주의적 가미를 통해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금지된다. 범주로서의 종교적 체험은 궤멸된다: “직접적인 것과 원천은 그 자체로써 결코 체험될 수 없다”. “인간적인 것 안으로 신적인 것이 침입해 들어오는 일”은 “말하자면 수직적인 위로부터의 아래로의 운동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그 힘과 의미가 개명되었으며”, “소위 역사적 예수의 인격적 삶에 대한 관심”으로써는 결코 해명될 수 없다. 형식적으로 이러한 기독론적-종말론적 운동은 “하나님의 계시의 기적”으로 규정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모든 국면에 걸친 바르트의 신학 사상을 위한 열쇠의 역할을 갖는 범주이다. “따라서 예수에 대한 공관복음의 전달 역시 그의 의도에 대한 벵엘(Bengel)적 통찰이 없으면 절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부활의 음성”.사회적 가치에 대한 신학적 부정 - 권위, 가족, 예술, 노동과 종교자체 -은 본래적 입장으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하나님이 의도한 부정은 긍정적인 반면에, 하나님 위에 세워지지 않은 긍정은 어떠한 종류의 것이라도 부정적이다”.그러나 변증법은 당시에도 이미 유비론(Analogie)을 함축하고 있었다: “삶을 절대적이며 비판적으로 대면하는 자는 세계 안에서 신적인 것의 유비를 인정하고 기뻐할 수 있으며” “공관복음의 비유”에 정향된 “삶의 직관”에 대하여, 비록 유비를 넘어 신적 실재에 이르는 연속성은 없으나, 자유롭다. “하나님 안에서만 종합이 존재한다”. 탐바하에서의 고가르텐과의 만남을 통해 바르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서적 의미에 관한 물음을 첨예화하였으며, 오버벡(Overbeck),칸트(Kant), 플라톤(Platon), 키에르케골(Kierkegaard)과 도스토예프스키(Dostojewski)로부터 영향을 받아 “쉴라이에르마허에 공개적인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확장적으로 이룩된 사상적 전환점에 도달한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문헌이 1920년 아르가우의 회의에서 행한 강연 ‘성서적 물음, 통찰 및 조망’”이다. 이제 성서적 판단력의 선행적 운동이 작업가설로서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했다: “성서는 무엇을 제공하나? 성서는 이미 제공하였다... 우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물음에 대한 충분한 대답을 가지고 있으며 전제된 시원적 긍정에 의하여 사로잡혀 있다”.물음에 대한 대답의 우선성은 계속되는 바르트의 신학적 작품을 규정하는 강철같은 해석학적 이성이다. 물음에 대한 대답의 우선성 속에서 방법론에 대한 문제와 주제에 대한 문제가 일치한다. 본래 바르트 신학의 중심적 단어는 “긍정”이며, 이 “긍정의 실재”가 너무 강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했기 때문에 우선 신학적 부정을 초래했을 경우에도 그렇다.주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신학적 법정인 성서에 대한 점증하는 집중은 이제 등장하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항속적 위기”를 중심으로 한 바르트 신학과의 논쟁을 해석학적 논쟁으로 조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논쟁은 로마서 주석 제 2판과 3판 서문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동일성의 형식은 고가르텐과의 계속적인 만남을 통해 받은 인상으로부터 성립된 로마서 주석의 새로운 이해에서“시간과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표현으로 되었으며, 차안과 피안 사이의 차이를 다시 한번 능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여기와 저기의 대립에 매인 부정이 아니라 순수 부정이며, 따라서 ‘차안’과 ‘피안’의 피안이며, 차안을 위한 피안, 피안을 위한 차안을 의미하는 부정의 부정이고, 우리의 죽음의 죽음이고 우리의 비존재의 비존재이다”.그러므로 발타자르(H.U.von Balthasar)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절대적 거리라는 개혁 신학적 정렬” 배후에, 정렬의 전제로서의 “근원적 동일성”을 주장하였다.이에 대하여(프르지바라의 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역사적 직관력 내부에서” 그에 의하여 야기된 “깔때기와 동공”을 통해 오직 부정적으로 검증되며, “하나님의 불가능성”과의 관계인 신앙,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불가능하며 비역사적으로 정의된 신앙을 통하여 증명되는 바 이 신앙은 “역사 안에서 오직 위기로써만, 따라서 신화와 신비의 형식으로써만 서술 가능하다”. 이것과 함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이성을 전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역설”과 “승리자”로서 그리고 “원-역사”로서 이해될 수 있고, “역사적 직관성 내부에서는 문제와 신화로서, 이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차원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차원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수직으로 절단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오버벡으로부터 이어받았으나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사용된 ”원역사“라는 개념은 “불가능한 가능성”을 암시하며, 플라톤의 순간(εξαιψνηs)을 기억하게 하는 “이전과 이후가 없는 순간이다”. “원역사”는 본래적인 신학적 차원을 의미하며 창조론과 종말론을 동일시하며, 바르트는 다시 오버벡을 인용하여 후에 자기오해로 취소한 명제를 내걸 수 있게 된다: “철저하게 남김없이 종말론이 아닌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철저하게 남김없이 무관하다”.바르트는 그의 가파른 변증법적 주장과 함께 바울의 로마서에 담겨있는 “주제의 내적 변증법”을 언명하고자 한다.바르트는 비평적 주석학이 보다 더 많이 비평적이 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역사 비평적 주석학보다 더 비평적이어야 한다!” “본문이 제공하는 개념의 내적인 긴장은 가능한 한 보다 부드럽고 자유로운 조사를 통하여 문자들과 문자들 속에 있는 말씀의 관계가 밝혀져야 한다”.로마서 1판의 서문에서 이미 역사비평적 주석에 대하여 “이해 자체의 일”에 오히려 충실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선호했던 “영감설”의 의미는 역설적으로 일반적 해석학의 의미에서 수용되었고, 이해할 가치가 있는 모든 본문에 적용될 수 있는 명령법 “너 자신을 성찰하라”라는 공식과 그의 해석학적 선-판단은 성서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가설이며 “선한 책”과 관계한다. 선한 책의 사상은 최소한 자기 자신의 사상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해석자가 저자에 상응하는 “신뢰관계”는 성서의 관점에서 인지되어야 하며 “모든 것은 문자”이고, 그러나 어느 정도 모든 것이 “주제”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의 소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과 함께 읽혀져야 한다.이러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찰되어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가공을 기다리기 때문이다“.바르트는 불트만이 요구한 사실비판은 날카로운 이해의지를 통해 보다 더 철저하게 인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의심할 여지없이 새로운 신학적 사실관계를 부수고 자유주의 신학 자신이 빚지고 있는 논쟁의 견고한 핵심으로 되돌아가는 바르트의 해석학적 입장은 - 해석학과 하이데거와의 확실한 친밀감은 이미 초기에 확인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보다 더 중요한 과제를 위하여, 중요하게 남는 질문제기를 상대화하여 질문제기의 적합성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1921년 대학의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일반적으로 신학적 문체와 특히 개혁신학의 특이성에 대한 보다 강한 성찰이 발휘되기 시작한다.역사적이며 주석적 강의로부터 바르트 자신의 교의학적 판단능력이 성장한다. 판단능력은 우선 단순한 교정의 기능으로 제한되며 하나의 관점보다는 하나의 수학적 점과 강단위에서 성서와 회중 사이에 있는 목사의 상황을 중시하고자 했다.바르트는 신학 전체를 위한 주석의 근본적 의미를 승인하다. 대상적 전달에 치중하는 “교의학적 길”과 인간의 자기부정으로 인도하는 신비주의의 “비판적 길”보다, 바르트는 “변증법적인 길”을 “바울적이며 종교개혁적인 길”로서 그리고 객관적으로 우월한 길로서 선호한다.왜냐하면 변증법적 길은 “긍정과 부정 양자를 서로 관계시키기”때문이며 신학의 참된 과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며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당위성과 우리의 무능을 알아야 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존귀를 돌린다”.이 명제는 「시대 사이」 - 1922/23년에 설립된 잡지의 이름 - 지를 통하여 발표한 신학자들 사이에 일치한 신학적 의도를 조성하고 있다. 그들은 특히 스스로를 “논쟁신학자”로 이해하였는데,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하나는 논쟁적으로 종래의 신학이 표명한 모든 방향에 대한 반대자로서, 다른 하나는 변증법적으로 전체 인간을 죄인으로 동일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로서 이해한다. 이 신학적 입장은 모든 정정에도 불구하고 쉴라이에르마허 이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적 학파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이 입장에 일치하였다. 그러나 후에 학파의 대변자들 사이에 점점 논쟁이 된 문제의 중심은 계시와 역사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다. 고가르텐이 이미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대한 율리허의 비판에 대하여 바르트와 연대하였고, 에밀 브룬너는 로마서 주석의 1을, 불트만은 제 2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틸리히는 바르트와 고가르텐과의 “정신적 유대관계”를 강조하였다면, 불트만은 아돌프 폰 하르낙의 글, “신학자들 중에 학문적 신학을 경멸하는 자에 대한 15개의 질문”에 대한 바르트의 “답변”을 옹호하였으며, 특히 하르낙의 주장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하고 공동체적 인식”은 “비판적-역사적 연구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하여 얻어질 수 없다 - 에 반대하여 내걸었던 명제에서 분명히 부각된다: “복음의 중심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인식하는 확실성과 공동체성은 하나님이 일깨운 신앙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따라서 “신학의 과제는 신앙을 일깨우는 설교의 과제와 하나다”. 하나님의 “직관 불가능성”을 대상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모든 일치에서, 즉 계시와 역사에 대한 자유주의적 종합과 일반 역사 속에서의 특수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구속사적 제한과, 역사 진리에 대한 물음을 면제하는 계시와 교회의 모든 일치에서, 역사의 문제와 불가분리적으로 주어진 특히 근세적 역사경험(고가르텐)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물음과 역사 경험에 부합하는 철학적 진리인식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물음(틸리히)이 더욱 길어졌는데, 이러한 일치를 심도 있게 문제시하는 논점이 많을수록 더욱 그렇다. 마침내 이 논점은 해석학적으로 신학 내부에서(불트만) 인간학 - 즉 전이해 - 의 위치와 기능에 대한 논쟁으로, 교의학적으로 자연과 은총에 대한 관계규정에 대한 논쟁(브룬너)으로 조정되었다. 바르트는 근세 신학사를 점차적으로 타락한 역사로 서술하였으며, 이 타락의 역사의 본질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의 명제 속에 개념화된 것으로 보았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종교의 대상 안에는 인간의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이 언표되지 않는다”.포이에르바허는 이미 루터에 의하여 출발된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하나님으로 관심이 바뀐 것에서부터 결론을 내린 셈이다”. “거의 독자적으로 등장하며 영향을 미치는 신적 실체로서의 루터의 신앙론”과 루터적 성례전론에서의 동일성의 주장, 루터 정통주의가 표방하는 “속성의 교류론” 이와 함께 “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는 개혁신학적 유보를 무시하는 일에서 바르트는 벌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전도의 가능성”을 보았다. 이 가능성은 근세의 등장과 함께 현실성이 되었으며, 포이에르바하는 현실성 자체를 철두철미하게 진술하였다.따라서 종교개혁 신학에 대한 긍정적 방향정위는 매우 사실비판적으로 수행되었으며 홀(K.Holl)과 제베르크(R.Seeberg)의 루터 수용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면서 이루어졌다. 이때 물론 루터와 칼빈(쯔빙글리는 아니다)은 원칙상 공통적으로 카톨릭주의와 신개신교주의에 반대하고 잘못된 방향을 비판하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다만 콜브류거(H.F.Kohlbrügge)에 의하여 유효하게 된 “잃어버린 죄인 이외의 기독교성은 없다”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은총이 “자유롭게 존재하는 은총”이다 라는 전제에 대한 멸시가 잘못된 방향설정임을 말한다.그것은 “자연과 죄의 개념의 일치”를 의미할 뿐 아니라 본래 카톨릭의 반대공격을 받았다.바르트에게 “근대의 좌파 개신교주의와 우파 개신교주의”는 “다양한 그러나 너무 비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을 왜곡한 카톨릭주의”를 의미한다.바르트는 왜곡된 카톨릭주의를 “半펠라기아니즘”으로 보고, 이것이 “18세기에 합리주의와 경건주의라는 이중적으로 열린 문을 통해 다시 개신교 신학 안으로 유입되었다”고 본다.바르트는 카톨릭주의에서 신학적으로 흥미 있고, 보다 원칙적으로 논쟁되는 적수를 알아차렸는데, 그것은 그들의 전제가 신개신교주의보다 훨씬 종교개혁자들에게 가깝다는 것이다.카톨릭주의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바르트 신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바르트의 카톨릭주의에 대한 온갖 논쟁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세계교회적 법정이 되었다. 바르트는 구개신교주의와 고대교회 및 스콜라 신학에 대한 교의학 강의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그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주목하게 됨으로써 교부들과의 대화가 점증하게 되었고, 낡은 것으로 여겨 버려진 옛 교의학의 교설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개방적이 되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계시에서의 지양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관성의 문제”를 언명한다.교회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대한 일관된 이해가 이에 상응한다. 여기서 페터손(E. Peterson)으로부터 표준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변증법에 반대하여 “비록 유비적일지라도 실제적인 하나님 인식”의 필연성을 제시했으며 “교의를 전제하는 신학”과 “완전히 비변증법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학을 요구하였다.바르트는 이러한 이의와 이와 유사한 이의, 예를 들면 프르지바라(E. Przywara)의 이의를 비판적으로 소화했는데, 이전에 오버벡의 착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와 같다. 신학은 “무모함 이외의 다른 것을 통하여 기초될 수 없다”. 바르트는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탐지되는 하나님에 관한 언명을 비신학적으로 기초지으려는 시도들에 대하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무전제성을 점층적으로 강조하며 이에 타당한 학문 이론을 제시한다. 바르트는 이 이론을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서술하기 시작한다: “예언자들의 몸짓과 돌파의 태도 속에 머무는 일은 정당화될 수도 명령될 수도 없다”.바르트는 “기독교 교의학 초안”을 썼다. 물론 그중 서설만 나왔다. 서설은 당시에 일반적인 교의학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간결한 교의학으로 삼위일체론이며, “전체를 도해하는 교의학 자체의 본론 중 한 단면”이다. 1922년 바르트에게 신학 일반은 서설을 넘어 기독론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나아가야 하는가를 물었더라면,아마 바르트는 서설로써 모든 것이 말해진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서설은 그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이 미리 언급되어야 하며, 그리고 난 후에 방법론적으로 모든 것을 적합하게 말할 수 있는 신학적 본론으로 이해하였다. 서설을 “교의학 자체의 본론”으로 이해함으로써 교의학은 교의학적으로 신학은 신학적으로 근거되어야 함이 실증된다. “자연 신학”이 - 빌헬름 헤르만의 유보를 받아들이고 실현하여 -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잘못된 신학의 총괄개념이 된다. 베르너 엘러트(Werner Elert)가 “자연의 책” 이나 “역사의 책”을 계시의 원천으로 승인할 것을 거절하는 바르트를 비웃으며, “칼 바르트가 금지하는 책의 목록”이 등장한다.신학적 이론은 그 이론의 대상인 계시의 불가연역성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계시를 “원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했으며,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에게 인간적 당신의 모습으로 말을 건넨다”.이제 “원역사”라는 범주가 “역사는 계시의 술어이며, 계시는 역사의 술어가 아니라”성서 안에 증언된 “사건과 말하기와 듣기의 통일체”로서 변증법조차 탈피하는 “하나의 특수한 범주”임을 보증해야 한다. “계시는 인간 실존의 변증법 이상이며 이상을 설정한다”.그 이상은 동시에 인간 실존 안에서, 타락한 피조물의 죄성 안에서 스스로를 전적으로 관철하며 “우리의 현존재까지 유일한 삼위일체의 흔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어쨌든 원역사를 증언하고 원역사에 참여하는 역사는 순서상 “질적으로 변화된 제 2의 역사”이며, “교회”로서 이미 구약성서에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회적으로 기초되었으며, 역사 안에서 나머지 역사를 능가하는 지상 위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이다.교회 안에서 교의학은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이며 사회학적인 함의를 철저하게 의식하고,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Deus dixit)를 문제없이 전제하는 사유의 성서적 태도 안에서 선포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서 수행된다. “교의학자는 이 사유를 마치 다른 것을 배우듯이 연습을 통해 배워야 한다”. 바르트는 “교의학의 보조학문”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윤리학을 기초하였다. 윤리학은 “인간 행동의 선에 대한 물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대답을 찾는다.바르트는 이 윤리학을 1928/29년과 1930/31에 강의하였으나 당시에는 여전히 주장된 그러나 곧 극복된 창조질서론 때문에 출판하지 않았다. 여기서 “좋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윤리학의 주제는 거룩한 인간이 아니라 선포된 하나님의 계명으로써 인간(하나님의 피조물, 은총 아래에 있는 죄인, 하나님 나라의 유산자로서)을 거룩하게 하는 권리주장이다. 교의학으로서의 신학이 이미 말한 바를 윤리학으로서의 신학이 다시 한번 말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신학의 유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건으로부터 윤리가 구별되는 표시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주장의 사상으로부터 나온 인간의 자연과 문화와 철학에 대한 긍정적-비판적 판단을 다음의 두개의 강연, “교회와 문화”와 “신학에서의 운명과 이념”이 증명한다. “신학과 엄격하게 철학으로 남으려고 하는 철학 사이에는 호의적 중립성뿐만 아니라, 계몽적인 연구공동체가 성립될 수 있으며 성립될 것이다”. 비록 철학이 신학이 되지 않으며 신학이 신학적 공리인 제 1계명을 부정하지 않아도 말이다.브룬너와 불트만 및 고가르텐이 바로 이 경우라는 의심은, 신학적 진술의 필연적 전제를 해명하지 못한다는 바르트를 겨냥한 비난도 이 경우에 부합하는데, 변증법적 신학의 종말을 초래하였다. 교회 투쟁의 시작과 전선에서 비록 부분적으로 다른 길을 걸은 사람도 있으나(불트만!) 바로 이 의심이 “시대 사이”지의 해체를 이끌었다. 바르트가 비판적이며 긍정적인 타당성을 꾀하려고 했던 것은 그가 본(Bonn)의 학생들에게 주의해야 할 점으로 말한 “마지막 충고”에서 볼 수 있다: “주석하라, 주석하라, 그리고 다시 한번 주석하라!”바르트는 이 마지막 충고를 자신을 브룬너와 고가르텐과 분리한 판별기준으로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르트의 교의학은 철저한 주석학 이외의 다른 것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 “주석하라, 주석하라, 다시 한번 주석하라”는 마지막 충고에 다음의 의견이 뒤따랐다: “그리고 난 후 확실하게 조직신학과 교의학을 돌볼 수 있다”.이러한 태도로부터 바르트가 스스로 개혁교회의 고백, 스위스 교회,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선택을 그의 신학적 논증의 전제로서 제시하지 않은 것이 이해된다. “나는 경고한다. 당연히 나는 그에 대해 나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참으로 그것을 해석했을 때, 독일의 종교사회주의의 사상을 그렇게 근본적으로 쓰지 않도록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나의 신학적이며 교회적인 친화성은 저 악명 높은 14년 동안 그 어떤 방식으로든 명시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1933년에 정치적으로 나와는 매우 달리 방향을 정한 나의 청자들이 나의 신학의 악한 인과론적 관계성의 어떤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며 이에 부합하게 행동했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연관성을 나의 책이나 논문 그리고 설교에서 나에게 입증하거나, 원한다면 괴팅엔과 뮨스터와 본에 있는 동안 내가 행하고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문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연후에 비로소 할 수 있다면 나의 정치적 배경에 관한 언급을 계속할 수 있다. 그때까지 나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말을 잡담으로 여길 것이다”.이것을 행하기 위한 최신의 시도는 이 문장을 “오해”라고 주장해야 하며, “오늘의 신학적 실존“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신학 즉 오직 신학을 수행하는”결단을 통하여서만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치며,바르트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용인을 얻어낼 수 있다는 바르트의 명제는, 비록 바르트가 근원적으로 “들어보지 못한 매우 정치적인 날카로운 성명서”를 작성하고 “통합적인 오늘의 신학적 실존”이라는 말로 보충했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해석이다.정치적인 것은 하나의 술어였으며, 바르트 신학의 “구성요소”였다.그러나 바르트의 신학은 결코 한 번도 정치적인 것의 술어가 되지 않았다. “매우 교회적이고” 동시에 “매우 세계적이 된”그의 생애와 사상은 어느 정도 “잘못된 종류”로서 철회된“기독교 교의학 초안” 대신 등장한 “교회 교의학”을 명시하는가? 3. 교의학적 신학 교의학적 신학으로의 바르트의 전회는 겉으로는 교수를 위촉하는 방식으로써, 실제적으로는 이미 바울 주석에 대한 해석학적 논쟁 속에서 그가 주장한 성서본문을 올바로 평가하는 사유와 진술을 요구하는 행위를 통하여 “현대에서의 특유한 책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회는 이러한 것을 넘어서 “사유양식”의 변화를 표현한다. 이 사유양식은 철저하게 단언적인 변증법적 양식으로부터 결코 비변증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비변증법적으로 수호하는 단언의 양식으로 표시될 수 있다. 이 양식은 시대관련성과 함께 하는 사실관련성 및 지적 차별화의 예술을 명료성의 능력과 “입장을 표명하는” 진술에로의 용기로써 결합한다. 정확한 사유를 “이지적인 것”으로 불신하는 지적 경고는 “이제 나는 명료해져야 한다”는 논쟁적 확언과 화해한다. 그러나 교의학적 사유양식 안에서의 일차적 시도들은 곧 수정이 필요한 것으로 증명되었는데, 바르트가 “신학을 실존철학에 기초를 두며, 이것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려는”모든 잔재를 배제하려고 할 때 그렇다.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근절의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방향의 “사유운동”을 통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사유운동은 이미 “기독교 교의학”에서 인지될 수 있었던 켄터베리의 안셀름에 대한 연구에서 추론된다. 바르트는 이 연구로부터 발전시킨 - 역사적으로 이해할 때 논쟁거리가 되지만, 그의 많은 책들 중에서 가장 큰 사랑으로 저술된- 책을 “사유운동을 이해하는 열쇠”로 제시하였다. 이 사유운동은 바르트에게 “‘교회 교의학’에서 점점 신학에 적합한 운동으로 제시되었다”. 이 사유운동은 고유한 신앙의 진리를 인식하는 요구를 기초로한 신앙을 따른다. “인식하는 행위는 미리 말해지고 미리 긍정된 신앙을 숙고하는 일을 통하여 성취된다”. 그리고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사실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하여 묻는다”.이때 신학자는 “기독교 진리의 내적 필연성을 제시함에 있어서 철저히 외적인 필연성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사실성을 생각하여야 하며 이 사실성을 기독교 진리의 내적 필연성의 계기로서 이해하여야 한다“.근세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주관성과 의식 중심의 흐름에 반대하면서, 존재적 필연성과 합리성의 존재론적 우위성에 대한 주장이 이에 상응하는 인식적 필연성과 합리성 이전에 전제되었고, 신과 동일한 진리 안에서 확정되었다. “진리 안에서 그리고 진리를 통하여 근거는 근거가 되며 이성은 이성이 된다”.따라서 진리는 세계 안에서 “유비를 통하여 계시될 수 있다. 교회는 교회의 신인식과 더불어 인류의 가능성을 실현한다”. 인류는 “죄의 타락의 결과 신인식을 할 수 없으며, 그러나 가능성으로서 요청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신앙 안에 근거된 신뢰는 대상의 합리성과 필연성을 넘어서 인식적 필연성을 목표로 하는 인식적 합리성으로 나아가는”사유운동을 산출한다. 이때 등장하는 신학적 명제에 대한 판별기준은 성서이다. 그러나 성서는 실증적으로 그의 사실성에서가 아니라, 근거있는 의미의 연관성 속에서 진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객관적 진리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가 간파하는 진리의 내적 의미, 근거와 연관성은 성서가 증언하는 대로의 것을 증언하여야 한다”. 해석학적 순환운동의 마지막에는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사유의 해석학적 순환구조 안에서 바르트 교의학의 논증구조는 강한 고백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점점 강한 이야기체적 특징을 갖는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고백적으로 전제된 각 신앙조항의 현실성이 설명됨으로써 현실성의 내적 가능성이 현실성의 근거로 해명된다. 논증적이며 개념적이고 선포적인 언어가 서로서로 고유한 개별적 - 절대로 모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차한다. 교의학적 언명의 형식적 근거 구조는 유비론임이 점차로 증명된다. 유비론은 다음의 세 가지를 관할한다: a) 모든 구별과 대립 속에서도 - 예를 들면 명령과 복종 - 모순 없이 부합하고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에 대한 관계 사이. 이 관계는 결정적으로 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사건이 되었고 그 분 안에서 모든 인간을 위한 존재론적 타당성을 지닌다; b) 하나님의 계시와 이 계시를 해석하는 성서적 신앙의 언어; c) 계시와 교의학적 진술의 언어능력 사이. 형식적으로 신학적 사유운동과 내용적으로 신학적 대상의 자기운동이, 유비론의 모습으로써 서로 만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대상의 자기운동을 소위 장악하려는 존재의 유비 - “적그리스도의 발견” - 를 오랫동안 거절했으며, 이에 반대하여 존재론적으로 관계의 유비로서, 신학적으로 신앙의 유비로서 표시되는 유비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에 대한 충분한 개념적 설명을 하지 않았다. 형식적-내용적 유비의 구조는 사건, 즉 역사로 생각되는 하나님의 관장할 수 없는 대상성을 위하여 계시가 “대상화”되는 위협으로서의 변증법적 공포가 극복되도록 한다. 하나님의 대상성 안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자신의 세 가지 “존재방식”에 대하여 스스로를 대상화한다.그리고 유비구조는 신의 행위와 자기관계와 원사건의 개념으로부터 새롭게 조직된 존재개념을 “모든 편견없이” 적용하도록 한다.이전에 주장되었던“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동일성이 그의 근원적 진리를 상실함 없이 그 통로가 열려졌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상응하시며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에 상응하는 인간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 교의학적 재료와 조직신학을 지배하는 “기독론적 집중”을 통하여 지지되며, 기독론적 집중은 교회 전통에 대한 비판적 논쟁, 종교개혁자들 및 칼빈과의 논쟁을 발생시켰다.이 비판적 논쟁은 교회 투쟁 기간 동안 “바르멘 신학선언”에서 가장 의미 있게 표현되며, 바르멘 신학 선언은 철저히 바르트 신학의 기본적 본문으로 읽혀질 수 있다. 기념비적 작품인 교회 교의학의 내용 구분에는 바르트의 사상적 동향이 그때마다 나타나 있으며 “가장 일반적”인 타당성을 요청하는 현실성은, 기독론적으로 확인된 계시의 “특수성”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성의 가능성을 현실성으로부터만 해명하고, 이로써 이 가능성을 가장 근원적 현실성으로 증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성에 관한 서술이 - 계시된 말씀, 쓰여진 말씀, 선포된 말씀으로서의 말씀의 세 가지 형태 - 서설의 내용을 형성한다. 서설은 삼위일체론, 성육신과 성령의 부르심에 관한 가르침으로서 계시를 규정하고 성서론과 교회의 선포에 관한 가르침을 제공한다.이 때에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기독론적으로 규정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구약과 신약은 “계시의 시간”을 나타내며, 구약은 “기다림의 시간”으로 그리스도가 기다려진 자로 계시되었으며, 신약은 “기억의 시간”으로 역시 그리스도가 이야기의 대상으로 되었다. 율법과 복음의 구분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차적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구약과 신약 사이를 올바르게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계시 시간의 총괄 개념이며, 그 자체로서 신비이고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의 기적 속에 부활의 표시가 있다. 신론은 기독론적으로 확인된 자유 가운데서 사랑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의 현실성을 논구한다.신론은 좁은 의미의 신론과, 복음의 모든 것을 언표하는 선택론 그리고 신론의 과제에 속하는 계명 즉 하나님의 법 안에 윤리를 정초하는 과제로 계획된다. 하나님의 계명은 “복음 자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우리를 향한 요청의 형식을 갖고 있다”. 바르트는 전통적 예정론의 이해를 완전히 개축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시는 하나님과 선택받은 인간으로 이해하는 선택론을 전개한다. 이 선택론 안에서 선택받은 인간은 요한 1:1-18의 영원한 “로고스” 안에 이미 그의 “예정석”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하나님의 원 결단이 “우리들의 세계와 시간 안에서”집행된 역사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죄인에게는 죽음을, 변증법적으로 이스라엘과 교회로 표현된 인류에 대하여 생명과 구원을 준다.바르트는 이러한 내용을 교회 교의학 I/2, 15장에서 간결하게 기독론에로 방향을 마추어 완전하게 전개한다. 이로부터 신의 본질과 삼위일체적 현존,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내재적 신비와 계시 사이의 “완전한 상호관계”에 무게가 실린다. 완전한 상호관계 안에서, “자존적 하나님”은 그의 삼위일체성으로 “말하자면 이미 우리의 하나님”으로 증명된다. 이로써 절대적으로 타당한 하나님의 예정(praedestinatio gemina im decretum absolutum)에 관한 칼빈적인 가르침의 추상성과,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숨어 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에게 추상적으로 기대어 하나님의 “원결단 혹은 은총의 결단” 이나 “하나님의 자기규정”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한 소위 루터적 견해가 거절되었다.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깊이 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본질과 활동의 깊이는 없다”.역으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상호교제(Perichorese)의 유비론 안에서 삼중적 시간 양식의 내적 교제로 생각된 영원성이 세계 안에서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현재에 상응한다.예정론을 보편적으로 구상함으로써 개인의 선택보다 공동체의 선택이 우위를 차지한다. 암묵적으로 만유의 구원(αποκαταστασιs παντων)을 가르치는 위험 - “나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 은 주권적 구원의지와 복음의 힘을 제한하는 보다 더 크다고 생각되는 위험에 종속된다. 기독론적 근본정향이 신론 부분에 포함된 윤리에도 영향을 미치며, 신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 선택하는 하나님과 선택받은 인간 사이의 변증법과 병행하여 - 거룩한 하나님과 거룩하게 된 인간으로 서술된다. 창조론은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지에 의하여 유비적이며, 기독론적으로 계획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계약을 창조의 내적 근거”로, 창조를 “계약의 외적 근거”로, 세계를 계시의 무대로, 자연을 시공간적 형식과 세계사적 내용 안에서 은총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고, 은총 자체에 의하여 전제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위한 가능성으로 서술했다. 이를 이어 인간론, 섭리론, 무와 천사에 관한 가르침 및 실제적 윤리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공동체 안에서 삶을 향한 피조물의 자유와 자유의 제한에 관한 가르침이 뒤따른다. 은총의 계약의 역사는 “창조 다음에 따라오나 창조론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반면 창조는 창조의 외적 전제로서의 은총의 계약의 역사로부터 나온다.창조는 그 자체로서 “창조의 뒤를 따르는” “사건의 표징과 증언”이며 “참된 성사이다”.창조 안에는 자기 자신과 창조와 관계하는 하나님의 원관계에 부합하는 관계들이 지배한다. 예를 들면 하늘과 땅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인간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 사이에 “나와 당신 사이의 대면 안에 있는 실존”인 유비가 존재한다. “이 실존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인간성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인간론은 “죄로 인하여 규정되었으나 구조상 죄로 인하여 변하지 않은”이러한 존재론적 상응을 철저하게 관철한다. 인간론의 존재 근거와 인식 근거는 참되고 완전한 인간인 예수이며 - 단성론적으로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의 존재방식으로 실존함으로 -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인간으로서, 자기자신과 피조물을 위한 삼위일체성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비유(형상)이며, 공동존재의 원형(僞他존재가 아님)이며, 인간성을 실현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근본형식이다: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말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다”.인간은 영을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말 건네진 자로서, “그의 몸의 영혼”이며 완전한 인간이며, 스스로를 다스리며(영혼), 스스로에게 봉사할 수 있다(몸). 인간은 “본래적이며 자유로운 주체”로서 그에게 주어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시간 안에서 유한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 초월이 아니며 그와 같은 것을 필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초월이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인간성은 은총을 위한 “접촉점”이 아니다. 인간은 계약을 체결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계약동지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약동지가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무와 죄에 관한 가르침은 전 교의학의 견본품이다. 이 부분은 창조적이며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의 특별한 현실성으로부터 사고되었고, 악은 하나님의 긍정에 상응하는 부정과 함께 거부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소멸된 것으로서 생각되었다. 따라서 악은 그 자체상 무화하는 것이며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그와 같이 이해된 무에 대한 승리 속에는 하나님의 “부성적 다스리심”이 나타나며, 하나님은 부성적 다스리심으로써 피조물을 옳게 “보존하고 동반하고 지배한다”. 교회 교의학은 화해론에서 “모든 그리스도 인식의 중심”에 도달한다. “루돌프 불트만과의 계속적인 집중적 대화”와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교리에 대한 개신교적 답변의 시도로써 수행”되었으며 그리스도적 삶의 윤리 중간에 중단된 이 계획은 위대한 개관이며 바르트의 전 신학의 수정이다. 교회 교의학 I/2에서 미리 조금 언급된 기독론은 이제 고대 교회의 교리와, 무엇보다 구개신교 정통주의의 교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죄와 칭의와 성화와 파송과 성령의 역사에 관한 교리의 기초가 전개되며, 각각의 조항은 성령에 의하여 회집되고 건설되며 파송되는 공동체와 믿음, 사랑, 희망으로 규정된 개별적 그리스도인 안에서 폭넓게 전개된다. 이때에 한편으로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반형이상학적이며 삼위일체적인 이해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낮아지고 복종한 하나님의 존재 자체 안에 위치한 운동을 통하여 강화된다.다른 한편 이제 “추상적인 신일원론”에 대항하는 신론이 인간존재에 존재론적으로 도움이 되는 인간 예수가 아버지의 우편으로 고양되는 운동을 통하여 “신인간학(Theanthropologie)”으로 확장된다. 양자의 경우 바르트가 40년 전에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신성”을 선언했던 강조점이 후퇴하고 전에 거부한 자유주의 신학이 진리의 절대성을 조명한 명제에 주목한다: “옳게 이해된 하나님의 신성은 하나님의 인간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하는 니이체의 명제는 하나의 뻔뻔스러운 거짓이다”.신약성서의 언어사용과 그리고 역시 바르트가 철저하게 연구한 찬송가와 연결시키고 헤겔의 변증법과의 경쟁을 통하여 주인됨과 종됨이 기독론적으로 중재된다. 이 때 하나님의 인간됨은 “예수 그리스도, 종이신 주”라는 표제어 아래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고양(신격화가 아님)은 “예수 그리스도, 주이신 종”이라는 표제어 아래에 언표된다. 우선 세계를 위하여 해명되며 “세계를 위한 공동체”안에서 상응성이 발견되는 이 사건의 증언은 다시 기독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진실된 증언자”라는 표제어 아래 중재된다. 윤리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초를 다루는 세례론과 사후에 출판된 주기도문의 해석의 단편이 화해윤리를 정초하는 일 이외에 화해론 앞에서 다루어진다.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적 삶의 완성을 기도로서 성찰한다.교의학 IV권에 있는 교회론과 세례론은 서설에서 다루어진 하나님 말씀의 삼중적 형태와 말씀과 성례전의 관계 규정을 대폭 수정하며 이로써 “교회의 세례론”이 새롭게 이해된다.성사의 개념은 기독론적으로 보존되며, 따라서 세례는 인간의 행위로 이해되고, 그러므로 아기세례는 부정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주저인 교회 교의학의 건축술은 바르트가 안셀름이 신학에 관하여 말한 아름다움(pulchritudo)자체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개신교주의의 가르침인 인격과 직무와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인격이 연합된 존재가 양위 속에서 역사로 설명되며, 참된 구성의 원리로 작용하는 삼중적 사역/직무는 역사적으로 행위하는 자의 존재로 서술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겸허 속에서, 인간성이 그의 고양 속에서, 신인의 통일성이 중재자의 - 인식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저하게 존재적으로 생각된 - 자기선언 속에서 증명된다는 사실은 바르트 기독론의 초점이며 동시에 죄론과 속죄론과 교회론의 구조원리이기도 하다. 이때에 a) 신의 겸허는 인간의 교만의 죄와 모순되나 신앙의인(信仰義認)과 공동체의 회집과 상응하며; b)인간의 고양은 인간의 태만의 죄와 모순되나 사랑 안에서의 성화와 공동체의 건설과 부합한다; c) a)와 b)를 연합하는 참된 증언자를 통하여 우리 밖에서(extra nos) 일어나는 존재와 사역의 선포는 인간의 거짓의 죄와 모순되나, 인간을 희망으로 부르는 일과 공동체를 세계에로 파송하는 일과 상응한다. 하나님의 부름심의 관점에(시편 50,15) 기초된 윤리는 a) 성령을 간구하는 기도에서 정점에 이르는 세례로써 기초되며, b) 주기도문을 길잡이로 해석된 기도의 삶에서 실현되며, c) 성만찬을 성례전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적 삶의 갱신으로 서술한다. 이때에 명령법이 문제가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특징적으로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인 양면적 상황을 “아래에서 수직으로” 가르는 인간의 행위로 이해된다. 죄가 기독론 다음에 취급된 것은 이미 1935년에 수행된 계획적인 전도인데, 이것은 특히 루터교에서 일상적인 율법과 복음의 순서를 “복음과 율법”의 순서로 바꾼 것이다. 이 순서는 제목에서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목표를 제시하는 1952년의 논문 “그리스도와 아담”에 의하여 지지되었다. 아담을 통하여 대변되고 모든 인간 속에 나타나는 인간성이 - 모든 종류의 집단주의는 왼쪽에, 모든 종류의 개인주의는 오른쪽에 놓게 하는- “그리스도에게서 측정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아니듯이”, “율법의 본질을 알기 위하여 우선 복음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서, 그 역이 아니다”.따라서 죄는 정복한 죄로 취급되는 곳에서만 비로소 죄로 인식된다. 바르트는 형용의 모순(contradictio in adiectio)으로 생각되는 상속죄의 개념을 버릴 것을 촉구하며, “원죄(peccatum originale)”의 개념으로 대치할 것을 권한다. 기독론을 마감하고 구속론으로의 이행으로 넘어가는 고찰들은(아버지의 심판, 아들의 지시, 성령의 약속) 이에 부합하게 “한편으로 인간 예수와, 다른 한편 다른 인간들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확립하여”,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예수의 사역은 모든 인간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잠재적”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며,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발적인 인간 현존재의 원리”로서 나타나게 한다.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종교와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트 신학의 혹독한 비판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교의학적 신학의 단계에서 비로소 예리하게 형성된 이 비판이 진리의 일방성을 비판되어진 대상 안에서 유효하게 하고, 예를 들어 이전에 불신앙으로 주장된 종교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종교로, 따라서 기독교를 참된 종교로 보려고 항상 노력하였다면,이제“교회의 담 밖에 있는 참 말씀”을 제시하고 피조세계의 인식에서나 존재에서 이미 빛나고 있는 하나의 생명의 빛을 반영하는 세계의 빛을 제시하는데 이르게 된다. 세계의 빛은 그리스도교의 증언처럼, 그리스도교의 증언과 엄격하게 구분된다 하더라도, “하늘나라에 관한 지상의 비유”로 불리운다. 바르트가 이 주장을 하필이면 바르멘 선언 제 1명제를 변경하는 단원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가르침이 옛 비판을 새로운 수단, 물론 비판을 적극적인 것으로 돌리는 수단으로써 지속함을 암시하며 비판을 철회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여기서 의롭다 선언하며 의롭게 만드는 기독론적 전제로부터 나온 칭의론의 결과가 주제화되며, 이 칭의론은 카톨릭신학의 판단으로써도 그들과 “분리할 수 있는 참된 근거”를 인식할 수 없게 한다.이와 함께 물세례론 - 물론 성례전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은 “구원하는” 인간적 “행위”로서 카톨릭 쪽에서 그 의도에 따라 “충분히” 긍정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세례론은 카톨릭 교의학에 신학을 세계교회적으로 계속 발전하세 하는 계기가 되었다.바르트의 교회이해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역사적 실존형식”으로 이해하는 착상을 제공했다. 교회는 인간이 성령의 능력으로써 성취한,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원칙적으로 이미 발생한 전 인간 세계의 성화”를 “잠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 자체 “구원을 필요로 한다”.그리스도와 아담의 관계 규정으로부터 나온 이러한 교회이해와 함께 바르트는 죄인의 칭의와 인간의 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사이의 필연적이고 내적인 관계를 묻는다. 이 물음의 관심은 종교개혁적 신앙고백문과 종교개혁 신학 일반의 관심이 중지되거나 절뚝거리는 곳에서 시작된다.바르트는 유비론의 맥락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국가와 교회 사이에 일치는 있을 수 없으며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교회가 정치적 계획을, 그것이 비록 민주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다른 계획을 반대하며 기독교적 계획만을 고집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본다.유비론은 정치적 대상에 비유 능력이나 비유 필요성이 존재하며, 이것은 국가의 정의를 교회가 믿은 하나님 나라의 유비로서 주장할 수 있도록 하며,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위를 고백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주장의 근본 사상을 바르트의 다른 사상에서처럼 쉴라이에르마허를 기억나게 하면서 그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인간의 무신성은 존재하지만 화해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무인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III. 영 향 바르트 신학의 영향은 수용과 비판의 과정에서 이해와 오해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개신교 신학 안에서는 특히 “변증법적 신학”과 그 다음 바르멘 “신학선언”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바르멘 신학선언은 - 물론 그 자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 교회투쟁의 시기에 “고백교회”의 자기이해를 위한 것으로, 1945년 이후 고백교회를 반대하는 공격이 있었으나 독일의 교회를 위한 신학적 기본 방향이 되었으며 제 1급의 교회사적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점을 넘어서 바르트의 신학은 개신교 신학에서 이반트(H.J.Iwand), 포겔(H.Vogel), 버르쿠어(G.C.Berkouwer), 글뢰게(G.Gloege)등의 조직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골비쳐(H. Gollwitzer), 베버(O.Weber), 크렉(W.Kreck)의 비판적 수용을 중재하는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사상의 미숙성을 벗어나지 못하며 광범위하게 오해되고 있다. 반면 바르트 신학은 카톨릭의 영역과 세계교회 안에서 점점 의미를 얻고 있다.오히려 생산이 없는 개신교의 바르트 수용이 - 고가르텐 이후, 특히 불트만과 푹스가 주제적 접근으로부터 제기한 해석학적 반대물음을 계속적으로 피하였다 - 풍성한 토론에 방해가 되었다면, 죙엔(G.Söhngen)과 발타자르(H.U.von Balthasar)와 보일라르(H. Bouillard)와 큥(H.Küng)에 의하여서는 부각되었으며, 점증하는 개신교 진영의 논의를 무게 있게 지원한 카톨릭의 논의는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이 신학의 세부적 문제에 대한 논쟁은 - 글뢰가가 그 근본문제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철저히 이 신학의 근본 운동을 형성한 기독론적 집중과 이것 안에 함축된 우주적 확장 - “예수는 승리자이다” - 이라는 신학적 리듬으로 귀착되었으며, 이는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의 자유를 언표하는 일이어야 한다. 바르트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 그의 신학을 “사회학적”으로 제한하여 해석하려는 시도나, “입장”으로 떨어진 근세적 자율-주관성이라는 잘못된 이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논의에서 무시된 문제제기가 존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해석된 작품의 의도를 전도하려는 횡포 없이 가능해야 한다. 바르트 신학에 대한 모든 논쟁은 그의 영향을 방해할 수 있는 기념비적 신학작품이 방대하지만 그의 주저의 미완성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결여된 종말론에 대한 적지 않은 착상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 착상은 바르트가 때때로 대변한 신학은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주장이 이해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그의 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교회 교의학의 본론과 19세기 개신교 신학사에서 다루어진 역사적 연구를 존중해야 하며,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에 그를 억압받는 민족의 목회자로 기독교의 양심이 되게 하였으며,동시에 반대자를 격렬하게 자극했던 그의 신학적 실존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의 전 신학 작품이 신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문학적 업적으로서 20세기의 가장 의미 있는 정신사적 작품에 해당한다는 사실에 대해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그의 신학의 초점을 단 두개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이 작은 감탄으로 우리는 하느님에게 말한다: 아, 그렇구나!” “ 이 안에 모든 것이 숨어 있고 모든 것은 항상 이 작은 감탄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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