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정제기 1. 들어가며 하나님의 인간성!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인간성』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매우 도발적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이런저런 오해들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의 오해들이 발생할 수 있다: 왜 하필 하나님의 ‘인간성’을 다루어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인간성이 아닌 신성을 다루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인간성을 다루는 작업은, 혹 하나님의 완전성을 거부하고, 마치 하나님을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지위로 끌어내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신이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신을 완전한 존재자이자 무한한 존재자라고 믿는다.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안에서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영이시다(God is a Spirit, infinite, eternal, and unchangeable, in his being, wisdom, power, holiness, justice, goodness, and truth. 소요리문답 4문).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신성, 특별히 무한성과 영원성, 불변성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책은 하나님의 신성이 아닌 “인간성”을 다루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이 아닌, “인간성”을 문제로 삼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인간성을 다루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1) 「19세기 개신교신학」, (2) 「하나님의 인간성」, (3) 「자유의 선물 - 개신교 윤리학의 기초」이라는 세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그중 두 번째 에세이인 「하나님의 인간성」에 집중하여 논의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바르트가 신칸트학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주 유명한데, 특히 「하나님의 인간성」 에세이는 상당 부분 칸트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나는 지극히 철학도로서, 바르트의 논의들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바르트에게서 드러나는 칸트적 사유들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비-신학도의 관점에서 더욱 풍성하게 바르트를 이해하는 하나의 좋은 시도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철학사에서 유한-무한의 관계 바르트가 하나님의 “인간성”을 논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나는 바르트가 유한과 무한의 관계를 이해하는 칸트적 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1) 먼저 전통 형이상학에서 유한과 무한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논의되었는지를 살펴보고, (2) 칸트가 어떤 식으로 (1)을 거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본 후, (3) 그 후에 바르트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인간성” 문제가 얼마나 칸트의 사유와 닮아있는지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철학사에서 유한과 무한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틀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무한성과의 비교를 통해 유한성을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무한성을 제거하고 유한성 자체를 절대화하는 방식이다(최소인, 「유한성과 시간성 - 칸트와 하이데거의 철학적 반성의 지향점」, 418쪽 참조). 먼저 무한성과의 비교를 통해 유한성을 이차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전통 형이상학과 중세철학에서 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플라톤 형이상학을 잠시 살펴보자. 플라톤 형이상학은 가장 근원적이고 완전한 존재자인 이데아를 먼저 설명하고, 이러한 이데아를 존재근거로 하여 개별적 존재자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때 이데아는 바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초-시간적이고, 모든 공간에 동시에 분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공간적인 특징을 갖는다. 철학사에서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대상은 무한성을 지닌 일종의 무한자로 이해된다. 따라서 플라톤 형이상학은 무한성을 먼저 정초하고, 유한한 개별적 존재자들을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철학도 마찬가지다. 가장 완전한 무한자인 신의 현존을 정초하고, 그 후에 유한한 피조물들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음으로 무한성을 제거하고 유한성 자체를 절대화하는 방식은 니체 이후에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탈-형이상학적 사유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특히 니체는 『즐거운 학문(Die frohliche Wissenschaft)』에서 “신은 죽었다(Gott ist todt)”라고 선언하며 초월적이고 무한한 신을 제거해 버린다. 니체가 긍정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니체의 인간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통해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극복할 것을 요구하는 초인(Übermensch)을 지향한다. 이러한 사유는 바로 무한성을 제거하고 유한성을 절대화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은 유한과 무한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한 것이라 하기에는 곤란한 지점이 있다: (1) 무한성과의 비교를 통해 유한성을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독단적(dogmatisch)인 방식이다. 인간은 결코 무한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유한에 빗대어 무한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유한성을 무한성의 하위개념으로 이해하게 될 경우, 유한성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이고, 결여되며,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최소인, 「유한성과 시간성」, 418~419쪽). (2) 무한성을 제거하고 유한성 자체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형이상학적 반성을 상실케 하며, 가능한 한 통속적인 삶을 살 것을 요구하며, 인간 존재의 고유한 의미들을 단지 우연성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게 만들 뿐이다(최소인, 「유한성과 시간성」, 419~420쪽). 3. 유한-무한의 관계 맺음에 대한 칸트적 관점 그렇다면 무한을 배제하여 유한성을 절대화시키지도 않고, 유한을 무한에 종속시키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유한과 무한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칸트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 비판철학은 경계의 철학, 한계의 철학이라고도 불리는데, 칸트 철학은 바로 유한과 무한의 경계에 서서 그 누구도 절대화하거나 배제하지 않으면서 양자를 이해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경계-사유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1)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는 인간 이성의 인식의 범위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규명한다. 인간 이성이 인식 가능한 영역은 오직 감성적(경험적) 대상, 즉 유한성뿐이며,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감성적 대상인 무한자(칸트는 이를 제약되지 않은 존재자라는 의미에서 무제약자das Unbedingte라고 부른다)에 대해서는 결코 인식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인간 이성은 그 자신의 본성상 무한자를 계속해서 추구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무한자를 인식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부딪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에만 머물러있지 않는다. 비록 이론적 영역에서는 인식 불가능할지라도, 실천적 영역에서는 무한자를 “주관적으로는 존재해야만 한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필연적 대상”으로 요청(Postulat)하기 시작한다. 이는 바로 자신의 유한성이라는 토대를 딛고 서서 도달 불가능한 무한성을 향해 스스로를 무한히 기투하는 태도다. (2)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법칙에 따른 행동과 욕구와 경향성에 따른 행동을 구분하며, 도덕적 행동과 비도덕적 행동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 인간은 지성계와 감성계에 동시에 속해 있는 존재자다. 따라서 인간은 지성계의 법칙인 도덕법칙의 명령을 받으면서, 동시에 감성계의 법칙인 자연법칙에게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도덕법칙은 “이성의 사실”로서 각자에게 주어져 “너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라고 계속해서 명령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한계로 인해 도덕법칙을 온전히 따를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유한하다는 이유로 도덕의 온전한 완성, 즉 최고선(das höchste Gut)의 실현이라는 무한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순수이성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무한성이 신의 현존이라면, 실천이성이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무한성은 바로 최고선의 실현이다. 인간은 최고선을 자신의 능력으로 결코 실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최고선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기기 위해 그것을 가능하게 할 능력을 가진 신의 현존을 요청(Postulat)한다. 인간은 비록 자신의 유한성으로 인해 결코 최고선에 도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현존을 요청하면서 언젠가는 최고선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최고선을 향해 무한히 전진할 것을 결정한다. 이는 실천적 영역에서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이라는 토대를 딛고 서서 실현 불가능한 무한성을 향해 스스로를 무한히 기투하는 태도다. 이러한 점에서 칸트의 경계 사유는 바로 유한과 무한의 경계를 설정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각각의 한계를 규정하는 작업이며, 더 나아가 둘 중 어느 한쪽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느 한쪽도 절대화하지 않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유한과 무한은 서로 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인간은 자신이 무한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발견하지만, 자신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무한성의 이상을 무한히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칸트적 인간은 무한성으로도, 유한성으로도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무한성과 유한성 그 사이에 서 있다.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탈한계를 지향하는 칸트적 인간은 자신이 희망하는 이상향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고독하지만 숭고한 주체이다. 오롯이 희망에 불과한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도달 불가능한 완전성을 스스로 희망의 대상으로 정립하는 주체 – 이것이 바로 칸트가 그린 유한한 인간의 숭고함이다(정제기, 「칸트 실천철학에서 요청과 희망의 의미」, 영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84~85쪽). 4. 칸트적인 너무나 칸트적인: 「하나님의 인간성」에서 드러나는 칸트적 의미 이러한 문맥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본래 논의로 돌아오자. 매우 흥미로운 점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신성, 즉 하나님의 “무한성”을 하나님의 “인간성”을 통해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르트는 매우 칸트적인 방식으로 유한과 무한이 관계 맺는 방식을 드러낸다. 바로 하나님의 인간성이라는 “유한성” 위에서만 하나님의 신성, 즉 “무한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인간성을 하나님의 신성이라는 무한성으로 환원시키는 작업이 아니며, 하나님의 신성, 즉 무한성을 폐기하고 하나님을 유한한 존재자로 끌어내리는 작업도 아니다. 오히려 바르트는 신성과 인간성이 공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한성과 유한성이 만나는 경계지점이다. 바르트는 바로 이 경계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즉 하나님의 인간성이라는 유한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무한성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만약 바르트의 논의가 하나님의 무한성에만 머물렀다면, 바르트의 신학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독단적인 주장이 되었을 것이다. 혹 바르트의 논의가 하나님의 인간성에만 머물렀다면, 바르트는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자유로운 신학자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바르트의 이야기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살피면서 논의해 보자. 바르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성이 “그분의 역사, 인간과 나누시는 그분의 대화, 그분이 인간과 함께하시는 사건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라는 점을 주목한다(『하나님의 인간성』, 70쪽). 하나님의 신성은 인간성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으며(『인간성』, 71쪽),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간성의 한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인간성』, 86쪽).” 나는 이 말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무한자이신 하나님을 결코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으며, 오직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불멸하시므로 초시간적인 존재이시고, 편재하시기 때문에 초공간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3차원적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으시며,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계신 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3차원적인 시간과 공간의 형식 안에서만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한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셨다는 점에서 유한성, 즉 인간성을 가지며, 같은 3차원적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다른 인간들과 교제하실 수 있었다. 인간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과 함께하시는 사건”이라는 예수의 유한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의 인간성은 다른 어떤 추상적인 인간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인간성』, 72쪽).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존재이신가(『인간성』, 75쪽)”라는 물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신성을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르트는 19세기 신학 역시도 하나님의 신성을 그 자체로 추적하여 연구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인간, 즉 인간이 되신 예수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추적한 것이며, 이는 자신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인간성』, 60쪽). 이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만약 바르트가 자신의 이전의 신학에서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그 자체로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결국 위에서 살펴보았듯 무한성을 메인으로 하여 유한성을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환원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칸트적 의미에서 살펴보면, 이성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독단적인 방식일 수밖에 없다. 혹은, 바르트가 비판하는 자유로운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며, 단지 인간일 뿐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무한성을 제거하고 유한성을 절대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여러 긍정적 의미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 채 자신의 존재 의미를 겨우 우연의 산물에서 찾으면서, 형이상학적 반성 없이 스스로를 통속적인 존재자로 정립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간성,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유한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으로 이행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유한과 무한의 더 긍정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이 하나님 자신의 인간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함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알게” 된다(『인간성』, 78쪽). 하나님의 신성은 인간성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자유가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적인 자유 안에서 자신의 신성과 인간성을 분리하지 않으신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신성 안에는 인간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참하나님이기 위해서 굳이 인간성을 배제하실 필요가 없으며, 반드시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거나 어떤 기괴한 비-인간을 요청할 필요도 없다”(『인간성』, 79쪽)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라는 전통적인 신앙고백의 근거를 정확하게 마련해 준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트는 자신의 논의가 기존의 전통적인 신학과도 충분히 양립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 안에 하나님의 인간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간성에 대한 논의가 루터교의 본래 교리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루터교의 교리 안에 수용될 수 있다”(『인간성』, 79쪽)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트의 주장은 보수적인 신학과 양립가능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5. 나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인간성』을 유한-무한의 관계 맺음을 중심으로 논의했다. 이제 바르트적 사유에 대해 떠오르는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1)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이해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신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밝혀 주장했다. 그러나 내가 의문이 드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정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신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참 신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수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면, 그리고 바르트의 설명처럼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의 인간성을 따로 분리하여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결국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성은 철저히 신성과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하고 유한한 인간성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인간성을 볼 때 신성이 함께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인간성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 내에서는 결코 인식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전혀 인식할 수 없거나, 혹은 예수를 인간으로만 인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2) 인간성을 일종의 유한성으로, 그리고 신성을 일종의 무한성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는 유한하면서 동시에 무한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만약 이것이 가능하려면, “둥근 삼각형”이나, “각이 세 개인 사각형”, 혹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음”과 같은 개념도 논리적으로 가능해야만 함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바르트가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이를 삼위일체의 모순처럼, 비록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신비이자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설명은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찝찝함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페이스북 '신학서적중고장터 서평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출처] 칸트적인, 너무나 칸트적인: 바르트의 『하나님의 인간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작성자 holywavep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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