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처세술/ 창세기14:13-16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이민을 가기 시작한 때가 60년대 후반부터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민 가시는 분들이 늘 마음에 불안감을 안고 고국을 떠납니다. 그 불안 가운데 하나는 낯선 본토인들 틈에 끼어 한국인으로서의 언어나 문화나 관습과 같은 것들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 가며 살 것인지에 관한 걱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수 가운데 끼어서 소수가 생존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는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 컴퓨터 선교회에서 '99년도 대한민국 복음화 지도'라는 색다른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가장 적은 곳으로 제주도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8%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0명 가운데 1명도 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주도에 사는 성도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얼마나 외롭겠으며 남 모르는 고달픔이 또 얼마나 크겠습니까? 감사하게도 서초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복음화가 잘된 지역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30%나 되었습니다. 10명 중에 3명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의교회나 이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잘 해서 그랬는지 혹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 골라서 이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고마운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30%라고 해도 소수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다수인 불신자와 더불어 공존하여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미운 오리 새끼 신세가 되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지혜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본문을 보시면서 '이런 본문으로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나? 십일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아마 십일조 설교를 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내용이지만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소수로서 다수인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떤 지혜를 가져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 땅은 이미 여러 부족들이 선점하여 정착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곳에서 62년을 살고 난 다음에 한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창세기 23장 4절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떠돌이 신세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좀더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 말을 생각해 본다면 아브라함이 여전히 그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다수의 부족 틈에 끼어 살기 때문에 경험하는 고충을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필요 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성경을 통해서 검토해 보거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대단하게 대접하셨는가를 살펴 보면 그는 분명 성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수의 가나안 사람들, 불신자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선민으로서 그는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공했습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처럼 다수의 불신자들 틈에서 사는 소수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큰 교훈과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부족들과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던 소돔성에 전쟁이 일어 났습니다. 그 전쟁에서 소돔성 왕이 패배하자 그 성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 버렸습니다. 물론 모든 재산도 다 빼앗겼습니다. 그와 같은 비보를 도망 온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든지 조카를 이 위기에서 건져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장면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런데 13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 간 조카를 건지기 위해서 누구하고 전략을 협의한 줄 아십니까? 바로 자기와 동맹한 마므레, 에스골, 아넬, 이 세 형제 부족들과 협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들과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맹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부족이나 국가들이 서로의 안전과 유지를 위해서 힘을 모아 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하는 정치적인 제휴 관계입니다. 한미 공동 협약도 동맹입니다. 유럽에는 나토 동맹이 있습니다. 서로가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공동 보조를 맞추려고 정치적인 제휴를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살면서 이 세 형제 부족 족장들과 동맹을 맺었던 것입니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처음에 그렇게 느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답지 못하게 주변 부족들하고 동맹을 맺다니?' 우리가 아브라함을 얼마나 대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합니까? 그가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찾아가셔서 말씀 하시기를, '너는 네 친족, 네 고향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세 가지 축복을 너에게 약속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먼저 '너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다.' 입니다. 순종하고 그곳에 가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가 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을 전부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당당하게 가나안으로 왔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네가 이것을 지키면 내가 이것을 해 주겠다.'는 식의 약속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습니다. 이 언약은 그대로 성취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보장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왔으면 하나님만 잘 섬기고 날마다 기도 생활만 열심히 하면 되지, 왜 이웃 부족들하고 동맹을 맺고 삽니까? 무엇이 겁이 나서 그렇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너무 인간적이었다는 비판의 소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브라함의 이 행동, 즉 이웃 부족과 동맹을 맺은 것이 신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사는 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이었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려고 노력하던 거룩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 틈 바구니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외롭게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가나안 불신자들과 더불어서 날마다 양을 치고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종종 그들과 어려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신세를 지기도 하고 신세를 갚기도 하고, 그러면서 우정을 쌓아 나갔습니다. 서로가 기대고 살 수 있는 언덕이 된 것입니다. 그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엇을 책임져야 하고, 무엇을 희생해야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지만 그들이 곤궁에 처할 때에는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 지를 알았고,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맹이라는 말 한 마디 속에 다 들어있는 아브라함의 처세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 부족들과 살고 있습니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협력해야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또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고 해서 성도들끼리만 교회 안에서 지내는 것은 절대로 잘 하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가 없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교회 안에서 무엇을 책임져야 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동시에 내가 사회에서 무엇을 책임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면이 다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요즈음 정치 풍토를 개선해야 되겠다는 열망에서 낙천, 낙선 운동을 벌이느라 시민 단체들이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만 이 나라를 맡겼다가는 아무 것도 안 되겠다는 위기 의식으로 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팔을 걷고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낙천, 낙선 운동은 시각에 따라서 좋게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고 비판적으로 평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정치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보스 정치는 종식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우습게 보면서 항상 자기들에게 유익한 것만 생각하고, 국가를 위해 유익하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자기 정당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으면 무조건 비토하고 반대하는 이런 정치 풍토는 깨끗이 청소되어야 합니다. 정치 후배들이 자랄 수 있는 풍토를 전혀 만들어 주지 아니하고 3,4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의 영향 아래서 이 정치계가 그대로 굴러 가는 것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낙천, 낙선 운동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치가 바로 되어야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치가 엉망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는 대부분 안 믿는 사람들이 맡아서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교회 이름으로 참여 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 마음에 시민 운동이 펼치는 모든 캠페인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개인적으로 적극적인 동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할 일을 하십시오. 그래서 이 나라 정치계가 맑아지고, 깨끗하고 새로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여 이 나라에 소망을 안겨 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치하고는 관계가 없어. 정치를 가지고 왜 그렇게 떠드는가? 기도나 열심히 해.'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환경 문제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에 신문을 통해서 자주 보셨겠지만 앞으로 10년 안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최대의 이슈는 날씨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다우 지수가 올라갈수록 환경 지수는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점점 더 잘 살게 되고, 돈을 더 많이 벌수록 지구는 점점 더 망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10년 사이에 날씨가 최대 이슈라면 어떤 재난이 우리에게 덮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다수인 불신자들과 연합해서 힘을 합하여 이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약해야 되면 절약하고, 약품을 쓰지 않는 깨끗한 제품을 만들어야 되면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하고, 쓰레기를 분리 수거해야 되면 해야 하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협력할 때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년부터 대각성 전도 집회라고 하지 않고 대각성 전도 사역이라고 합니다. 대각성 전도 사역은 2월 달부터 시작해서 12월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중간에 '더불어 한길축제'라는 전도 집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각성 전도 사역의 첫번째 단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좋은 이웃 만들기 캠페인입니다. 2월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좋은 이웃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협력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을 일이 있으면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우리가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닦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협력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전도 집회 때 '교회 갑시다.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좀 경솔한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로마서 12장18절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담을 헐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껏 다가올 수 있게 하고 우리도 그들에게 자유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담을 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협력하는 자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해서 이웃 부족들과 손도 안 잡고, 인사도 안 하고, 홀로 유아 독존이 되어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회 안에서만 맴돌고, 세상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고, 이웃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어도 흥미도 없는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항상 '집사님, 권사님'을 입에 달고 다녀서 사람만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집사'가 나오는 식으로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협력해야 합니다. 문을 열어야 합니다. 담을 헐어야 합니다.
두번째로는 아브라함은 평소에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14절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 나오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 행동에 옮겨야 될 상황이 되었는데, 참 놀라운 것은 그가 평소에 자기집에서 사병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318명이라는 군사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칼을 쓰는 법을 가르치고, 활을 쏘는 법을 가르치고, 전투하는 법을 가르쳐서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318명이라면 별로 숫자가 많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만 한 가정에 이 정도의 사병을 키운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면 역시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음 하고 모순이 되는 행동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데 왜 사병을 키우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욱이 가나안으로 아브라함을 보내시면서 이런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너에게 와서 너를 다치게 하면 내가 가만히 안 두겠다.'고 할 정도의 언질을 받고서 가나안에 온 사람이 왜 자기 집에 사병을 양성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못 미더워서 그랬던 것일까?'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가 해야 할 책임은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힘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힘을 가져야 남보다 앞설 수 있고 힘을 가져야 불행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힘을 가져야 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고, 힘을 가져야 만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힘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힘을 키우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투자와 희생이 따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라도 자기가 노력을 하지 않으면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투자하지 않으면 남다른 힘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이 대신 해 주는 것 아닙니다. 봄날 파종기가 되어 많은 농부들이 씨를 뿌릴 때, 날마다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합시다. 그 기도가 씨를 뿌려 줍니까? 절대 뿌려 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나가서 직접 뿌려야 됩니다. 남이 한창 추수를 하고 있을 때 성경 공부만 한다고 해서 성경공부가 추수를 해 줍니까? 안 해 줍니다. 자기가 가서 직접 추수해야 됩니다. 땀 흘려야 됩니다.
자주 듣는 이야기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또 반복을 합니다. 한국의 역대 목사님들 가운데서 아주 유명한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아마 한국교회 초창기의 목사님 다섯 분을 꼽으라고 하면 그 안에 들어가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최권능 목사님인데, 그는 날마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하고 외치며 전도하시던 참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학교에 다닐 때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책상에 앉아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라면서 공부를 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전도 나간 줄 알면 될 정도였습니다. 그저 전도만 했습니다. 따라서 시험을 치면 항상 영점이거나 낙제점이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학생들은 다 졸업을 하는데 자기만 졸업을 못하고 자꾸만 유급을 당했습니다. 한 번 유급 당하고, 두 번 유급 당하고, 계속 유급을 당하면서 졸업을 못하게 되니까 점점 초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싶어서 한 번은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머리에 들어갈 리가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자기가 잘 하는 장기를 살렸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 주십시오. 이번에는 꼭 졸업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주의 일을 위해서 더 열심히 전심을 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험에 꼭 합격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는 시험장에 들어가서 학기말 시험을 쳤습니다. 시험지를 받아보니 눈 앞이 캄캄한 것입니다.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 해도 또 졸업을 못 했습니다. 그 때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령도 시험에는 별 수가 없네. 성령도 시험에는 맥을 못 추는군.'
힘을 키우는 것을 성령이 대신 해 주지 않습니다. 믿음이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잘 믿는 많은 분들 가운데 미신적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상당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미신적인 생각입니까? '기도만 하면 된다.' 반은 성경적이고 반은 미신적입니다. '신앙 생활만 잘 하면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 걱정하지마.' 반은 성경적이고 반은 미신적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천사를 보내어 대신해 지게 해 주시는 일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까?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를 원합니까?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를 원합니까? 또 이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힘을 키워야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각자가 받은 달란트 대로 최선을 다해서 힘을 키우십시오. 날마다 교회 마당에서 서성거리지 마십시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일본은 그 국민들이 너무나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한이 맺혀서 영어를 제2공용어, 즉 일본어와 같이 쓰자고 하는 기가 막힌 발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영어 배우기를 위해 지금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세계적으로 퍼져서 지구촌을 좁은 정보의 세계로 끌어들인다고 할지라도 영어를 제대로 모르면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영어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날마다 성경 공부만 하고 있다면 약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성 신자들도 인터넷을 모르면 앞으로 기를 못 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인터넷을 못 하면 우리 나라 개화기 때 한글을 몰라서 어려움을 당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세상이 이런 형편인데 인터넷을 배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또 귀찮기 때문에 컴퓨터 앞에 다가가지도 않고, '잘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도만 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키워야 됩니다.
요즘에 저는 도올 김용옥 교수가 쓴 '노자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EBS에서 노자 강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야든 힘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이 김교수는 대학도 다녔고, 신학교도 다녔습니다. 전공은 동양고전이지만 미국에 가서 서양 고전도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자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름대로 도 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노자 이야기를 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종교는 악이다. 기독교도 악이다. 예수님은 진리지만 기독교는 악이다.' 대단히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말입니다. '선악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고 불선이다.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악은 사실 알고 보면 악이라는 실체가 아니고 우리가 싫어하는 행위일 뿐이다.' 절대 선악의 개념을 부정합니다. 모든 선악을 상대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노자 사상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까지도 상대화 시킵니다. 이런 말들을 사람들이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아주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가뜩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절대 진리를 부정하려고 들지 않습니까? 기독교 사상이 배후에 깔려 있는 서구 문화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상황입니다. 기독교 사상의 절대 주제가 뭡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절대선이 있고, 절대악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염증을 느낀 많은 젊은이들, 지성인들에게 모든 선악을 상대적으로 해석하는 노자 사상으로 그들의 생각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재미있게 듣습니다. 왜냐하면 들어 둘 만한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가치를 상대화 시키는 사상을 가지고 많은 젊은이들을 휘어잡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면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우리 젊은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만한 정도의, 또는 그 이상의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좋은 점, 성경의 좋은 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덕을 매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만약에 그런 사람들이 지금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입니다. 힘을 키우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제가 한 가지 예를 든 것 뿐입니다. 잠언 24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우리가 불신자들 틈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향을 끼치려면 힘을 키워야 합니다.
끝으로 아브라함은 자신이 무엇이 다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비록 그들과 같이 살기는 했지만 어떤 점에서 그들과 다른지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몇 가지 예가 있는데, 우선 2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소돔성에 있는 백성들과 자기 조카를 다 구출하고 많은 전리품을 끌고 왔습니다. 소돔왕이 자기 대신 복수를 해 준 아브라함에게 너무 감사해서 아브라함이 얻은 전리품을 전부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아주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23절입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릇 한 실이나 신들매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겠다.' 쉽게 말하면, 소돔왕이 그 전리품을 아브라함에게 다 주고 난 후 돌아서서는 아브라함이 자신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소리를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사는 사람이지, 그들에게 손을 벌리면서 살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 한 타래라도, 신발짝 하나라도 안 가지고 갈 것이며 소돔왕의 것은 다 도로 가져가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서 다른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23장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또 하나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수십 년을 살았으면서도 장지를 쓸 만한 땅 한 평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었는데 장사할 땅이 없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에게 찾아가 사정을 합니다. '내 아내를 장사하려고 하는데 땅이 없다. 너희들이 소유하고 있는 막벨라 굴을 나에게 팔아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사서 내 아내를 거기에 장사 지내도록 하겠다. 좀 도와 달라.' 헷 족속 가운데 막벨라 굴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시여, 두 말 하지 말고 그 굴을 가지십시오. 제가 거저 주겠습니다. 굴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수목까지 전부 다 당신에게 거저 줄 테니 당신이 소유하시고 거기에 죽은 자를 장사하십시오.'
이 정도 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처음에는 '아닙니다. 내가 돈을 치르고 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아닙니다. 내가 돈을 안 받겠습니다. 거저 줄 테니 장사 지내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못 이기는 척 하고 받아 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안 믿는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면전에서는 '거저 가지십시오. 괜찮습니다.'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가서 뒷말을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선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복을 가지고 살아야 되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 전부를 자기 자손에게 준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데, 남에게 공짜로 땅 얻어서 뒷말을 듣습니까? 그는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 받겠다는 것을 억지로 그 당시 시세를 쳐서 은 400 세겔을 주고 그 땅을 사서 소유하고 장례식을 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염치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돈에 있어서 항상 흐릿한 행동을 하면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속에 감추고 있는 욕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언동을 하면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성공, 우리의 부귀, 우리의 형통, 우리의 남은 미래는 전적으로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구질구질하게 아부하거나 사람들에게 손 내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자세를 지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세상사람에게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돈을 많이 가질수록 망신 당하기가 더 쉽습니다. '돈을 그렇게 많이 가졌는데 왜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쓰지 않소?' 하면 망신 당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갖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만한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부패한 정치계하나 바꾸지 못하고 왜 그렇게 자기 혼자만 호의호식 합니까?'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함과 청렴함을 보여 주면, 예의 바른 자세를 보여 주면, 욕심이 없는 투명한 자세를 보여 주면 세상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분명히 우리 하고는 다르다. 분명히 다르다.' 이렇게 느낄 때 그들의 마음에서 존경심이 우러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행동으로 처신을 하기 때문에 그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23장 6절에 보면 '당신은 우리 중에 하나님의 방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지도자입니다.'라고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두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영향을 주려면 빛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 5장 8,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세상 사람 앞에 아브라함처럼 물욕에서 초연한 자세를 보여 주여야 하고 하나님이 나의 축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언동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세상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삽니다. 우리는 소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지혜를 가집시다.
세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힘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다름을 보여 주라고 했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첫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협력하십시오. 둘째는 무엇입니까? 힘을 키워야 됩니다. 셋째는 무엇이 다른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점에서 바로 살면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쓰임을 받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이민을 가기 시작한 때가 60년대 후반부터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민 가시는 분들이 늘 마음에 불안감을 안고 고국을 떠납니다. 그 불안 가운데 하나는 낯선 본토인들 틈에 끼어 한국인으로서의 언어나 문화나 관습과 같은 것들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 가며 살 것인지에 관한 걱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수 가운데 끼어서 소수가 생존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는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 컴퓨터 선교회에서 '99년도 대한민국 복음화 지도'라는 색다른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나라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가장 적은 곳으로 제주도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8%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0명 가운데 1명도 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주도에 사는 성도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얼마나 외롭겠으며 남 모르는 고달픔이 또 얼마나 크겠습니까? 감사하게도 서초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복음화가 잘된 지역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30%나 되었습니다. 10명 중에 3명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의교회나 이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잘 해서 그랬는지 혹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 골라서 이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고마운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30%라고 해도 소수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다수인 불신자와 더불어 공존하여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미운 오리 새끼 신세가 되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지혜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본문을 보시면서 '이런 본문으로 무슨 설교를 하려고 하나? 십일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아마 십일조 설교를 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내용이지만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소수로서 다수인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떤 지혜를 가져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 땅은 이미 여러 부족들이 선점하여 정착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곳에서 62년을 살고 난 다음에 한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창세기 23장 4절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떠돌이 신세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좀더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 말을 생각해 본다면 아브라함이 여전히 그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다수의 부족 틈에 끼어 살기 때문에 경험하는 고충을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필요 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성경을 통해서 검토해 보거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대단하게 대접하셨는가를 살펴 보면 그는 분명 성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수의 가나안 사람들, 불신자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선민으로서 그는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공했습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처럼 다수의 불신자들 틈에서 사는 소수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큰 교훈과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부족들과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던 소돔성에 전쟁이 일어 났습니다. 그 전쟁에서 소돔성 왕이 패배하자 그 성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 버렸습니다. 물론 모든 재산도 다 빼앗겼습니다. 그와 같은 비보를 도망 온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든지 조카를 이 위기에서 건져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장면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런데 13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 간 조카를 건지기 위해서 누구하고 전략을 협의한 줄 아십니까? 바로 자기와 동맹한 마므레, 에스골, 아넬, 이 세 형제 부족들과 협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들과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맹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부족이나 국가들이 서로의 안전과 유지를 위해서 힘을 모아 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하는 정치적인 제휴 관계입니다. 한미 공동 협약도 동맹입니다. 유럽에는 나토 동맹이 있습니다. 서로가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공동 보조를 맞추려고 정치적인 제휴를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살면서 이 세 형제 부족 족장들과 동맹을 맺었던 것입니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처음에 그렇게 느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답지 못하게 주변 부족들하고 동맹을 맺다니?' 우리가 아브라함을 얼마나 대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합니까? 그가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찾아가셔서 말씀 하시기를, '너는 네 친족, 네 고향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세 가지 축복을 너에게 약속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먼저 '너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다.' 입니다. 순종하고 그곳에 가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가 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을 전부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당당하게 가나안으로 왔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네가 이것을 지키면 내가 이것을 해 주겠다.'는 식의 약속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습니다. 이 언약은 그대로 성취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보장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왔으면 하나님만 잘 섬기고 날마다 기도 생활만 열심히 하면 되지, 왜 이웃 부족들하고 동맹을 맺고 삽니까? 무엇이 겁이 나서 그렇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너무 인간적이었다는 비판의 소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브라함의 이 행동, 즉 이웃 부족과 동맹을 맺은 것이 신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사는 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이었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려고 노력하던 거룩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 틈 바구니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외롭게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가나안 불신자들과 더불어서 날마다 양을 치고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종종 그들과 어려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신세를 지기도 하고 신세를 갚기도 하고, 그러면서 우정을 쌓아 나갔습니다. 서로가 기대고 살 수 있는 언덕이 된 것입니다. 그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엇을 책임져야 하고, 무엇을 희생해야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지만 그들이 곤궁에 처할 때에는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 지를 알았고,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맹이라는 말 한 마디 속에 다 들어있는 아브라함의 처세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이지만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 부족들과 살고 있습니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협력해야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또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고 해서 성도들끼리만 교회 안에서 지내는 것은 절대로 잘 하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가 없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내가 교회 안에서 무엇을 책임져야 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동시에 내가 사회에서 무엇을 책임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면이 다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요즈음 정치 풍토를 개선해야 되겠다는 열망에서 낙천, 낙선 운동을 벌이느라 시민 단체들이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이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만 이 나라를 맡겼다가는 아무 것도 안 되겠다는 위기 의식으로 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팔을 걷고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낙천, 낙선 운동은 시각에 따라서 좋게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고 비판적으로 평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정치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보스 정치는 종식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우습게 보면서 항상 자기들에게 유익한 것만 생각하고, 국가를 위해 유익하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자기 정당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으면 무조건 비토하고 반대하는 이런 정치 풍토는 깨끗이 청소되어야 합니다. 정치 후배들이 자랄 수 있는 풍토를 전혀 만들어 주지 아니하고 3,4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의 영향 아래서 이 정치계가 그대로 굴러 가는 것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낙천, 낙선 운동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치가 바로 되어야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치가 엉망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는 대부분 안 믿는 사람들이 맡아서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교회 이름으로 참여 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 마음에 시민 운동이 펼치는 모든 캠페인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개인적으로 적극적인 동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할 일을 하십시오. 그래서 이 나라 정치계가 맑아지고, 깨끗하고 새로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여 이 나라에 소망을 안겨 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치하고는 관계가 없어. 정치를 가지고 왜 그렇게 떠드는가? 기도나 열심히 해.'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환경 문제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에 신문을 통해서 자주 보셨겠지만 앞으로 10년 안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최대의 이슈는 날씨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다우 지수가 올라갈수록 환경 지수는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점점 더 잘 살게 되고, 돈을 더 많이 벌수록 지구는 점점 더 망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10년 사이에 날씨가 최대 이슈라면 어떤 재난이 우리에게 덮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다수인 불신자들과 연합해서 힘을 합하여 이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약해야 되면 절약하고, 약품을 쓰지 않는 깨끗한 제품을 만들어야 되면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하고, 쓰레기를 분리 수거해야 되면 해야 하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협력할 때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금년부터 대각성 전도 집회라고 하지 않고 대각성 전도 사역이라고 합니다. 대각성 전도 사역은 2월 달부터 시작해서 12월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중간에 '더불어 한길축제'라는 전도 집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각성 전도 사역의 첫번째 단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좋은 이웃 만들기 캠페인입니다. 2월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좋은 이웃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협력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을 일이 있으면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우리가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닦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협력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전도 집회 때 '교회 갑시다.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좀 경솔한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로마서 12장18절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담을 헐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껏 다가올 수 있게 하고 우리도 그들에게 자유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담을 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협력하는 자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해서 이웃 부족들과 손도 안 잡고, 인사도 안 하고, 홀로 유아 독존이 되어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회 안에서만 맴돌고, 세상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고, 이웃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어도 흥미도 없는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항상 '집사님, 권사님'을 입에 달고 다녀서 사람만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집사'가 나오는 식으로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협력해야 합니다. 문을 열어야 합니다. 담을 헐어야 합니다.
두번째로는 아브라함은 평소에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14절을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 나오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 행동에 옮겨야 될 상황이 되었는데, 참 놀라운 것은 그가 평소에 자기집에서 사병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318명이라는 군사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칼을 쓰는 법을 가르치고, 활을 쏘는 법을 가르치고, 전투하는 법을 가르쳐서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318명이라면 별로 숫자가 많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만 한 가정에 이 정도의 사병을 키운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면 역시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음 하고 모순이 되는 행동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데 왜 사병을 키우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욱이 가나안으로 아브라함을 보내시면서 이런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너에게 와서 너를 다치게 하면 내가 가만히 안 두겠다.'고 할 정도의 언질을 받고서 가나안에 온 사람이 왜 자기 집에 사병을 양성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못 미더워서 그랬던 것일까?'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가 해야 할 책임은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힘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힘을 가져야 남보다 앞설 수 있고 힘을 가져야 불행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힘을 가져야 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고, 힘을 가져야 만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힘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힘을 키우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투자와 희생이 따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라도 자기가 노력을 하지 않으면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투자하지 않으면 남다른 힘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이 대신 해 주는 것 아닙니다. 봄날 파종기가 되어 많은 농부들이 씨를 뿌릴 때, 날마다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합시다. 그 기도가 씨를 뿌려 줍니까? 절대 뿌려 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나가서 직접 뿌려야 됩니다. 남이 한창 추수를 하고 있을 때 성경 공부만 한다고 해서 성경공부가 추수를 해 줍니까? 안 해 줍니다. 자기가 가서 직접 추수해야 됩니다. 땀 흘려야 됩니다.
자주 듣는 이야기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또 반복을 합니다. 한국의 역대 목사님들 가운데서 아주 유명한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아마 한국교회 초창기의 목사님 다섯 분을 꼽으라고 하면 그 안에 들어가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최권능 목사님인데, 그는 날마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하고 외치며 전도하시던 참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학교에 다닐 때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책상에 앉아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책상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라면서 공부를 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전도 나간 줄 알면 될 정도였습니다. 그저 전도만 했습니다. 따라서 시험을 치면 항상 영점이거나 낙제점이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학생들은 다 졸업을 하는데 자기만 졸업을 못하고 자꾸만 유급을 당했습니다. 한 번 유급 당하고, 두 번 유급 당하고, 계속 유급을 당하면서 졸업을 못하게 되니까 점점 초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싶어서 한 번은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머리에 들어갈 리가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자기가 잘 하는 장기를 살렸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 주십시오. 이번에는 꼭 졸업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주의 일을 위해서 더 열심히 전심을 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험에 꼭 합격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는 시험장에 들어가서 학기말 시험을 쳤습니다. 시험지를 받아보니 눈 앞이 캄캄한 것입니다.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 해도 또 졸업을 못 했습니다. 그 때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성령도 시험에는 별 수가 없네. 성령도 시험에는 맥을 못 추는군.'
힘을 키우는 것을 성령이 대신 해 주지 않습니다. 믿음이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잘 믿는 많은 분들 가운데 미신적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상당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미신적인 생각입니까? '기도만 하면 된다.' 반은 성경적이고 반은 미신적입니다. '신앙 생활만 잘 하면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 걱정하지마.' 반은 성경적이고 반은 미신적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천사를 보내어 대신해 지게 해 주시는 일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까?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를 원합니까?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를 원합니까? 또 이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힘을 키워야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각자가 받은 달란트 대로 최선을 다해서 힘을 키우십시오. 날마다 교회 마당에서 서성거리지 마십시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일본은 그 국민들이 너무나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한이 맺혀서 영어를 제2공용어, 즉 일본어와 같이 쓰자고 하는 기가 막힌 발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영어 배우기를 위해 지금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세계적으로 퍼져서 지구촌을 좁은 정보의 세계로 끌어들인다고 할지라도 영어를 제대로 모르면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영어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날마다 성경 공부만 하고 있다면 약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성 신자들도 인터넷을 모르면 앞으로 기를 못 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인터넷을 못 하면 우리 나라 개화기 때 한글을 몰라서 어려움을 당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세상이 이런 형편인데 인터넷을 배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또 귀찮기 때문에 컴퓨터 앞에 다가가지도 않고, '잘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도만 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키워야 됩니다.
요즘에 저는 도올 김용옥 교수가 쓴 '노자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EBS에서 노자 강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야든 힘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이 김교수는 대학도 다녔고, 신학교도 다녔습니다. 전공은 동양고전이지만 미국에 가서 서양 고전도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자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름대로 도 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노자 이야기를 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종교는 악이다. 기독교도 악이다. 예수님은 진리지만 기독교는 악이다.' 대단히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말입니다. '선악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고 불선이다. 인간의 행위에 관한 모든 악은 사실 알고 보면 악이라는 실체가 아니고 우리가 싫어하는 행위일 뿐이다.' 절대 선악의 개념을 부정합니다. 모든 선악을 상대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이 노자 사상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까지도 상대화 시킵니다. 이런 말들을 사람들이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아주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가뜩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절대 진리를 부정하려고 들지 않습니까? 기독교 사상이 배후에 깔려 있는 서구 문화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상황입니다. 기독교 사상의 절대 주제가 뭡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절대선이 있고, 절대악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염증을 느낀 많은 젊은이들, 지성인들에게 모든 선악을 상대적으로 해석하는 노자 사상으로 그들의 생각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을 재미있게 듣습니다. 왜냐하면 들어 둘 만한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가치를 상대화 시키는 사상을 가지고 많은 젊은이들을 휘어잡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면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우리 젊은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만한 정도의, 또는 그 이상의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좋은 점, 성경의 좋은 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덕을 매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만약에 그런 사람들이 지금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입니다. 힘을 키우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제가 한 가지 예를 든 것 뿐입니다. 잠언 24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우리가 불신자들 틈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향을 끼치려면 힘을 키워야 합니다.
끝으로 아브라함은 자신이 무엇이 다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비록 그들과 같이 살기는 했지만 어떤 점에서 그들과 다른지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몇 가지 예가 있는데, 우선 2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소돔성에 있는 백성들과 자기 조카를 다 구출하고 많은 전리품을 끌고 왔습니다. 소돔왕이 자기 대신 복수를 해 준 아브라함에게 너무 감사해서 아브라함이 얻은 전리품을 전부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아주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23절입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릇 한 실이나 신들매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겠다.' 쉽게 말하면, 소돔왕이 그 전리품을 아브라함에게 다 주고 난 후 돌아서서는 아브라함이 자신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소리를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사는 사람이지, 그들에게 손을 벌리면서 살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 한 타래라도, 신발짝 하나라도 안 가지고 갈 것이며 소돔왕의 것은 다 도로 가져가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서 다른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23장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또 하나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수십 년을 살았으면서도 장지를 쓸 만한 땅 한 평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었는데 장사할 땅이 없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에게 찾아가 사정을 합니다. '내 아내를 장사하려고 하는데 땅이 없다. 너희들이 소유하고 있는 막벨라 굴을 나에게 팔아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사서 내 아내를 거기에 장사 지내도록 하겠다. 좀 도와 달라.' 헷 족속 가운데 막벨라 굴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시여, 두 말 하지 말고 그 굴을 가지십시오. 제가 거저 주겠습니다. 굴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수목까지 전부 다 당신에게 거저 줄 테니 당신이 소유하시고 거기에 죽은 자를 장사하십시오.'
이 정도 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처음에는 '아닙니다. 내가 돈을 치르고 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아닙니다. 내가 돈을 안 받겠습니다. 거저 줄 테니 장사 지내십시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못 이기는 척 하고 받아 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안 믿는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면전에서는 '거저 가지십시오. 괜찮습니다.'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가서 뒷말을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선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복을 가지고 살아야 되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 전부를 자기 자손에게 준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데, 남에게 공짜로 땅 얻어서 뒷말을 듣습니까? 그는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 받겠다는 것을 억지로 그 당시 시세를 쳐서 은 400 세겔을 주고 그 땅을 사서 소유하고 장례식을 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염치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돈에 있어서 항상 흐릿한 행동을 하면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속에 감추고 있는 욕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언동을 하면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성공, 우리의 부귀, 우리의 형통, 우리의 남은 미래는 전적으로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구질구질하게 아부하거나 사람들에게 손 내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자세를 지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세상사람에게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돈을 많이 가질수록 망신 당하기가 더 쉽습니다. '돈을 그렇게 많이 가졌는데 왜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쓰지 않소?' 하면 망신 당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갖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만한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부패한 정치계하나 바꾸지 못하고 왜 그렇게 자기 혼자만 호의호식 합니까?'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함과 청렴함을 보여 주면, 예의 바른 자세를 보여 주면, 욕심이 없는 투명한 자세를 보여 주면 세상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분명히 우리 하고는 다르다. 분명히 다르다.' 이렇게 느낄 때 그들의 마음에서 존경심이 우러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행동으로 처신을 하기 때문에 그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23장 6절에 보면 '당신은 우리 중에 하나님의 방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지도자입니다.'라고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두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영향을 주려면 빛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 5장 8,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세상 사람 앞에 아브라함처럼 물욕에서 초연한 자세를 보여 주여야 하고 하나님이 나의 축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언동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세상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삽니다. 우리는 소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지혜를 가집시다.
세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힘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다름을 보여 주라고 했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첫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협력하라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협력하십시오. 둘째는 무엇입니까? 힘을 키워야 됩니다. 셋째는 무엇이 다른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점에서 바로 살면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쓰임을 받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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