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교회의 9가지 특성 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 이 책은 미국 교회의 목사이며 교수인 마크 데버(Mark Dever) 박사의 “건강한 교회의 9 가지 특성”이라는 책에 기초하여, 권태경 교수가 개혁 신앙에 기초한 바른 교회상을 제시하려고 1999 년 여름 미주 크리스찬 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마크 데버 박사의 책에 기초하고 있으나, 한국 독자를 의식해 한국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권태경 교수가 이 책을 통해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상을 논하였다. 이 글은 교리적인 입장이나, 어떤 학자의 입장을 논하는 것에 있지 않고 21 세기 우리의 공동 관심사인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상을 위한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데 이 책의 의미가 있다. 이 책의 원 저자인 마크 데버는 역사신학을 전공하여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캐피톨 힐 침례교회(Capitol Hill Baptist Church)의 목사이며 남침례교 신학원의 교수로 있다. 편역자 권태경은 종교개혁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총신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영국 세인트 안드류스 대학교와 미국 칼빈대학(신학교)에서 종교개혁사를 연구하고, 현재 총신대학교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1. 강해 설교를 하는 교회 2. 바른 성경적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3. 복음에 기초한 교회 4. 회심을 경험한 교인이 있는 교회 5. 복음주의에 열정이 있는 교회 6. 교회의 멤버십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교회 7. 직분자(장로)를 양육하고 세우는 교회 8. 성경적인 치리를 이해하고 시행하는 교회 9. 영적인 양육과 성장이 있는 교회 • 건강한 교회를 소망하며 저자서문 미국교회의 목사인 본인에게 무엇이 건강한 교회인지를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말한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병든 사람이 유능한 의사에게 건강상의 조언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를 위해 건강한 교회상에 대해 나름대로 제시하며 저자 서문에 대신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수세기 동안 여러 면에서 당신의 크신 은혜를 보여주셨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 특히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한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884 년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이후, 이제 한국의 복음적인 교회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실제로 지난 40 년간 한국 교회의 성도의 수는 급격히 증가해왔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는 교회의 수도 많아졌고, 다른 한편 수많은 선교사들을 전 세계로 파송하였으며, 기도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였다. 세계 20 대 큰 교회 중 10 개가 서울에 있는 교회가 아닌가! 분명 저자가 보기에 한국은 복음의 전성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외형적으로 건강해 보이는 교회가 전적으로 건강한 교회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들이 어떤 다른 이유에서 교회에 모이는가?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들이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여기는데에는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준이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만약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잘못된 믿음으로 교회가 성장한다면, 이는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사명과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물론 나는 한국 교회에는 복음을 훼손하는 요인들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세계 어떤 나라에서나 교회 안에는 양육되어야 할 훈련되지 않는 크리스찬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건강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 교회의 경우를 보면, 복음주의와 교회 치리를 위한 우리의 모습에서 성경으로부터 벗어난 과오를 보게 된다. 한국도 그러한 과오를 저지를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질문에 여러분들이 대답하기를 바란다. 본인은 원래 이 소책자를 쓸 때에 나의 친구와 그의 교회, 그리고 내가 섬기는 교회를 염두에 두고 집필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은 무엇이 성경적인 진리인지를 알려고 하는 다른 많은 교회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본인은 이제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되도록 수고하신 권태경 박사께 감사드린다. 이 책을 통해 저자로서 기원하기는 하나님께서 주님을 따르려는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며, 우리가 섬기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함께 기도했으면 한다. 1999 년 11 월 워싱톤에서 저자, 마크 데버(Mark Dever) 편역자 서문 이 책은 미국 교회의 목사이며 교수인 마크 데버(Mark Dever) 박사의 “건강한 교회의 9 가지 특성”이라는 책에 기초하여, 편역자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개혁 신앙에 기초한 바른 교회상을 제시하려고 1999 년 여름 미주 크리스찬 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기본적으로 마크 데버 박사의 책에 기초하고 있으나, 한국 독자를 의식해 한국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편역자가 이 책을 통해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상을 피력한 것이다. 데버 박사의 책을 처음 읽으면서 현대 교회의 현 주소를 보는 그의 시각과 건강한 교회를 위한 그의 복음적이며 개혁적인 입장에 본인은 적지 않는 도전을 받았다. 저자의 뜻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글 전체를 번역하는 것도 의의가 있겠으나, 한국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여 부족하지만 편역자가 한국 교회도 이러한 방향, 즉 개혁적이고 복음적이며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의도에서, 한국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편역하여 이 글을 책으로 만들었다. 아무쪼록 이 글은 교리적인 입장이나, 어떤 학자의 입장을 논하는 것에 있지 않고 21 세기 우리의 공동 관심사인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상을 위한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데 이 책의 의미가 있다. 지난 5 년간의 영국과 미국의 해외 연구 생활에서, 본인의 전공인 종교개혁사를 연구할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 것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먼저 총신대학교의 교수이신 홍치모교수님의 도움에 감사를 드리며, 미국 올랜도에 있는 믿음의 식구들과,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들, 그리고 수원의 창훈대 교회(한명수 목사)성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이 책의 출판에 협조해 주신 생명의 말씀사에 고마움을 표한다. 2000 년 4 월 편역자 권태경 건강한 교회의 9가지 특성 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개혁되며 변화되기를 바라지만, 교회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바른 교회 개혁에 대한 문제는 16 세기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후, 오늘날까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지속되어온 관심사였다. 우리가 바라는 교회 개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단순하게 “교회 개혁이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 중요한 것은 교회가 지금의 이러한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 글은 바람직한 교회 개혁상을 위해, 현대 교회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비판적인 입장에 있지 않을 것이다. 단지 현대 교회의 모습을 바로 직시하여 21 세기 교회상을 바로 세우는데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진력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인은 이러한 교회 개혁의 문제를 고민하던 중, 최근 데버(Mark Dever) 목사의 “건강한 교회의 9 가지 특성”(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 1998 년 출판) 이라는 책을 읽고 교회 개혁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이 글을 편역하여 기고한다. 이 책은 교회 개혁을 막연하게 논하지 않고, 교회의 중요하고 실제적인 요소를 구체적으로 잘 다루고 있다. 데버 목사는 오늘날 교회 개혁의 대안으로 9 가지 측면의 성경적인 교회상을 제시하고 이를 바른 교회의 특성으로 삼고있다. 결국 데버 목사는 현대 신앙인들의 이기적인 면을 비판하며, 하나님의 언약과 구원에 대한 신앙인의 책임을 강조하며, 동시에 교회가 성경적인 방법으로 성장해야 함을 강조하고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건강한 교회의 9 가지 특성” 이지만, ‘건강한’(healthy)의 의미를 '바른' (true) 혹은 '아름다운' (beautiful)의 의미로 독자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스스로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해 보아야 한다. 교회가 건강하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인가? 도대체 과연 바른 교회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성경적인 교회 성장이란 무엇이며, 이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데버 목사는 자신이 제시한 9 가지 요소만이 건강한 교회의 특징이거나, 건강한 교회의 전부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9 가지 교회의 모습은 단지 하나의 아름답고 건강한 성경적인 교회상을 위한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어떤 일부의 교회가 다른 교회 보다 더욱 건전하고 건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건강한 교회상과 영성 회복을 위한 영적 투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신앙인들, 특히 교회의 목사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개혁 신학에 기초한 바른 교회를 소망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건강한 교회에 열정을 가진 신앙인들과 교회에 용기를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무엇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진정한 교회 개혁의 대안으로 신앙인들 개인의 영성 회복과 개 교회의 영적 갱신이 중요하다고 본다. 아무쪼록 이 글이 개혁을 바라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하나의 지침과 도전이 되기를 기대하며,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영광을 받기를 소망한다. 1. 강해 설교를 하는 교회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겠으나, 무엇보다 목사의 설교가 중요하다고 본다.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교회를 정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목사의 설교일 것이다. 물론 이것이 교회를 선택하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16 세기 종교개혁의 영적 유산을 받은 우리 개신교 신앙인들에게 바른 말씀의 선포는 분명히 교회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실제로 개혁 신학에 기초하여 볼 때,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3 대 표지인 말씀의 참된 전파와 성례의 정당한 집행,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 필요하다. 교회는 최근 이단 문제로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시 한번 위에서 제기한 교회의 바른 3 가지 표지 위에 자신의 교회가 서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즉 말씀을 바로 전하지 않거나(요 8:31, 32, 47; 14:23), 성례와 말씀을 분리시키거나, 성례를 오용하여 인간의 구원 문제를 왜곡하거나(마 28:19; 막 16:16; 행 2:42; 고전 11:23-30), 교회의 치리를 경시하여 교회가 무질서해지고 거룩함을 상실한다면(마 18:18; 고전 5:1-5, 13; 14:33, 40) 이는 바른 교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설교 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에 대해 데버 박사는 강해설교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데버 박사에게 강해설교는 건강한 교회가 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기본적으로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설교란 설교자의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성령의 도움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설교는 우리의 신앙과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해지며 건강해지는데 중요하다. 설교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강해설교는 가장 전형적인 설교이다. 강해설교란 성경의 어떤 한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며, 그 의미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강해설교 외에 다른 설교의 형태도 있다. 예를 들면 ‘기도’나 ‘사랑’과 같은 주제에 성경의 교훈을 설교하는 주제설교가 있고, 또한 성경의 한 인물을 택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거나, 믿음과 소망의 대표적인 사람을 소개하는 인물 설교가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강해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해석과 삶의 적용을 강조한다. 강해 설교는 성경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와 같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아니더라도, 현대 교회의 설교자들은 말씀을 전하는 동안 만큼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의 사역자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일부 사람들은 강해 설교를 어떤 유명한 강해설교자의 설교 스타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강해 설교는 근본적으로 설교 형태의 문제가 아니다. 저명한 강해설교가이며 캠브리지 에덴 침례교회의 로이 클레멘트 목사에 의하면, “강해설교는 우리가 전할 것을 어떻게 전하느냐에 대한 것(형식)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전하느냐(성경적 내용)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강해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그 설교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설교하지 못할 것이다. 강해설교를 하지 않는 설교자는 성경의 한 본문을 택해서 설교할 때, 본문의 핵심을 교인들에게 잘 설교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경우 설교자나 교인 모두는 이미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단지 듣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성경의 본문을 강해식으로 문맥 속에서 본문의 내용을 설교의 핵심으로 택할 때는,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게된다. 설교를 통해 우리는 이미 받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깨닫기도 하지만, 우리의 남은 생애동안 성취해야 할 사명인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지혜를 깨닫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이후 지금의 삶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구원(성화)을 이루기 위해 바른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의 바른 선포는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21 세기를 준비하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바른 말씀의 선포를 통해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일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말씀의 바른 선포를 위해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철저한 헌신과 순종이다. 그리고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실제적인 순종이 목회에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 (마태복음 18 장과 디모데후서 4 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하라).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지 못하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지도자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잘 인도하지 못할 뿐 만 아니라, 분명 교회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교회는 실제로 목사의 수준만큼만 성장할 것이며, 이 교회는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뜻보다는 목사의 의도대로 될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현대 지상의 교회는 복음을 바로 전하는 영적 강단의 회복을 위해 교회 지도자와 모든 교인들이 책임감을 갖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강해설교는 교회 성장의 근원이 될수 있다고 본다. 마틴 루터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주의깊은 관심이 결국 종교개혁을 가능케 한 것이다. 데버박사가 런던에 있는 한 교회의 세미나에서 청교도주의에 대해 논하면서, 이전 청교도들의 설교는 때때로 2 시간이었다고 얘기했다. 이 세미나 참석한 한 사람이 심각하게 묻기를, “그러면 도대체 예배에서 설교 이외에 다른 예배순서는 없느냐?” 고 했다. 이 질문자의 의도는 말씀을 듣는 것이 예배의 전부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에 데버 박사는 많은 영국의 개신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르는 삶을 본질적인 예배라고 생각해 왔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예배의 요소 중 여러 가지가 중요하겠으나, 무엇보다도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현대 교회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적용하는 것에 여러 가지 요소, 즉 찬양과 감사, 신앙고백, 선포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요소 중 일부는 찬양으로 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찬양의 형태가 어떠하든지간에, 말씀보다 음악에 의존하는 교회는 흐르는 모래에 세워진 교회와 같다. 그러므로 말씀의 바른 선포를 위해 교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즉, 평신도들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가 성경을 정확하게 주의깊게 그리고 진지하게 연구하도록 기도하며, 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을 자신의 삶과 교회에 적용하는데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시도록 기도하라. 그리고 목사들은 이 모든 것을 위해 스스로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또한 바른 복음의 전파를 위해 우리의 교회가 강해설교를 하도록 기도하라. 그러면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강해설교를 한다는 것은 건강한 교회를 의미한다. 현대 교회의 설교를 보면서 일부 설교자들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복음을 복음되게” 그리고 “강단의 영적 회복”을 위해 몇 가지 문제를 자성해 보고자 한다. 먼저 설교자들은 준비되지 않은 설교로 강단에 서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설교 중에 설교 본문과 관련 없는 지나친 개인의 사생활과 간증을 삼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을 의식해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거나 혹은 심지어 그들을 감정적으로 자극하거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도덕적인 면에 치우친 설교를 한다면, 이는 복음으로부터 이탈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바람직하지 못한 설교가 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현대 교회의 강단의 영적 회복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바른 말씀의 선포를 위해 강해 설교는 필요할 것이다. 더욱이 강해 설교가 본문의 해석과 주석으로 그치지 않고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성화의 삶을 원하는 현대 신앙인들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 될 것이다. 16 세기 종교개혁가 존 칼빈도 설교에서 본문의 의미를 항상 신자들의 삶에 적용하는데 에 주안점을 두면서, 설교를 통해 신자들과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과 그에 따른 변화를 강조했다. 원하기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강해 설교를 통해 복음의 본질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를 잘 드러내며,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며 머리가 되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망한다. 2. 바른 성경적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강해설교가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성경신학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성경신학이라 함은 성경의 교리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스스로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이해는 어떠한가? 지금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알고 믿고 있는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으라고 하면서, 바른 성경 신학의 이해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바르고 건전한(sound) 성경의 교리를 배우는 것이다. 건전하고 바른 교리란 무엇을 뜻하는가?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내는 바울의 목회서신에 보면, ‘건전한’ 이라는 말은 믿을만하고 정확하고, 신실한 것을 의미한다. 원래 이 말은 온전하거나 몸이 성한 건강하다는 의미의 의학적인 용어이다(시 38). 디모데전서 1 장에 보면, 바른 교리는 복음을 좇는 것이며, 경건치 않은 것과 죄와 반대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 장 3 절에서 “거짓(다른) 교훈”을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않는 것으로 설명한다. 디모데후서에서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딤후 1:13) 라고 권면하며,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3) 라고 훈계한다. 바울은 젊은 사도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거짓 교훈을 염려하고 바른 신앙을 권면한다. 바울에 의하면 디도가 임명한 장로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라고 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나 속으로는 이기적인 욕심이 있는 거짓 교사들을 비난하며(딛 1:13),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며”(딛 2:1)라고 하면서, 아울러 목회자가 성도를 양육함에 있어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실제로 모범을 보이라고 권면하였다. 우리가 바른 교리를 논할 때 유념할 것은 성경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의 부분을 갖고서 하나님의 진리를 논한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의견에 차이가 있을 수 없는 성경의 본질적인 문제가 있고, 부분적으로 이견이 있는 문제도 있고, 또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소한 문제들이 있다. 구원 교리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는 논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얻기를 바라는 것은 성경의 기본적인 교리로 논쟁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바를 인간들이 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비신앙적인 태도이다. 또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지금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신앙의 순수성이 필요한 시대라는 점이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는 행위는 진리가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신 12:32). 우리는 교회 문제를 접하면서 어느 정도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이 보다 좀 더 사소한 문제들 즉, 음주 문제나, 부정한 정치에 대한 무력 저항과 히브리서의 저자권과 같은 본질적이지 않고 확실치 않는 문제에 대해서 각자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접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원칙을 본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의 경지에 이르면 이를수록, 우리는 믿음과 관계된 문제에 일치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진리에 이르게 하는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에 우리가 다른 이견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위험한 일이다. 초대 교회가 그러하였는데 이들은 본질적인 문제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는 이견을 가졌으나, 결국 이 모든 문제를 사랑으로 보았다.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는 진리가 아닌 문제들에 대해서는 교인 상호간의 사랑과 이해가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이러한 성경의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로부터 파생되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반성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리면 경건하게 살기는커녕, 사람들간의 분쟁만 야기한다는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바른 교훈을 배우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경의 교리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예정의 문제는 너무 복잡하고 난해하여 우리가 무관심하였지만, 이 교리가 성경적이며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함은 성경의 본질적인 중요한 가르침이다. 성경에서 분명 말하고 있지만 종종 무시되어온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선하냐 혹은 악하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시며 하신 일이 무엇이냐?”,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일은 무엇이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 만약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돌보심은 우리의 신앙 때문이냐, 아니면 그의 뜻에 의한 것이냐?”등의 문제이다. 이 모든 문제는 물론 모든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이지만, 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교회 지도자라면 위에서 언급한 질문에 바른 대답을 못할 경우, 우리의 양떼를 얼마나 잘못 인도하는지를 알게된다. 우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분명한 권위를 갖고 답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중요하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소유자시며 지배자인 주님이시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권위가 교회 내에서 부인되었다. 신앙인 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창조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은 경건한 척하는 이교도들과 같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완강하게 부인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불신자에게 세례를 행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들인 것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될 수 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특히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 일은 더욱 위험하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의심하거나, 이 문제들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임명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지못해 신뢰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은 교회에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해가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그의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지도자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영화롭게 하는 성경적인 바른 교리를 갖고있는 지도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고 깨달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일”과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일”에 우리의 삶을 바치는 헌신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우리는 16 세기의 카톨릭 교회가 바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고 복음으로 멀어져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자고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다시 상기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교회 개혁 대상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자신인 프로테스탄트의 교회와 신앙인 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좀 더 능동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하나님의 진리인 복음으로 우리의 교회와 이 세상을 개혁해야 할 때이다. 교회 개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회복에서 시작해야겠지만, 이를 위해 교회에서 성경적인 교리에 기초한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성경신학이 있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바른 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3. 복음에 기초한 교회 이 세상에 어떤 교회가 스스로 복음에 기초하지 않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교회나 신앙을 볼 때, 복음보다는 또 다른 어떤 것이 우리의 모습 가운데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소망하기는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복음의 본질을 다시 한번 깨닫고, 흐트러진 복음의 상을 바로 세우는데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기본적으로 복음이란 말은 좋은 소식 혹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뜻한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복음의 핵심이 된다. 예수님께 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이었으므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실 때 하나님 나라를 설교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한편 사도 바울에게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 예수의 탄생, 고난, 죽음, 부활 등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복음이 기독교의 핵심이므로 당연히 우리의 신앙과 삶에 복음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복음의 중요성에는 동감하지만, 복음이 교회와 개인 신앙의 삶에 기초가 되지 못함은 우리의 아픈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복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우리가 복음에 서 있도록 스스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교회가 건강해야 교회내의 교인들이 건강하게 성장 할 수 있다. 진리를 향한 열정, 즉 복음에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 마크 데버 목사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바르게 전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먼저 기독교의 본질적 문제인 하나님과 인간, 그리스도와 복음을 소개하고, 그 다음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문제를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다음의 질문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이 질문들은 우리가 복음을 바르게 전했는지를 점검해 보는 좋은 질문의 예가 될 것이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 주권자이신 창조자에 대한 진리를 나누었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지만, 타락하였고,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였는가?”, 그리고 “그리스도가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시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유일한 중보자이며, 우리의 대속자이며 부활하신 주님인지를 설명했는가?,” 마지막으로 “비록 앞에서 언급한 이 모든 것을 불신자와 나누었다 하더라도,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 복음의 메시지를 따라 자기 중심적인 삶과 죄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결단하였는가?.” 오늘날 현대 교인들이 복음을 영적인 안목으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것에 복음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복음이 신앙인들의 삶에 감정적인 만족만을 주거나, 단지 교회 성장의 수단에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은 바르게 전해져야하며, 바르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관계하지 않고, 인간적인 이해와 관계한다면 이는 복음의 이탈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복음을 전할 때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가의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때 비 신앙인들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즐거움, 평화, 행복, 일의 성취, 자부심, 사랑 등을 주기 위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캐나다 리젠트 대학의 패커(J. I. Packer)교수는 “진리로 위장된 반진리(half-truth)는 분명히 진리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복음은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교인들은 주일에 교인들과 지내는 시간보다, 가정과 직장, 이웃의 비 신앙인들과 지내는 시간이 더 많다. 우리 각자 모두는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의 놀라운 복음을 갖고 있는데, 이 복음을 우리는 이웃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며,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해야 한다. 텍사스주 달라스 침례교회의 목사이며 미국 교회의 지도자인 조지 투르트는 말하기를 “교회에 대적되는 가장 심각한 것은 교회에 대한 열정과 영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다.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동정이 넘쳐 흘러나오지 않거나, 그 영혼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는 세속 사회의 윤리 단체보다도 못하다” 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받은 복음을 우리 주위에 있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전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다른 이웃 영혼들에 대한 사랑함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건강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며,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누는 교회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볼때, 이제 복음을 받은 구원받은 우리는 구원받은 것에 감격하지 말고, 구원받은 자답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책임감을 갖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믿음 생활을 통해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우는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구체적인 우리 삶의 희생과 헌신을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이 복음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교회가 복음의 문제를 경시하거나, 교회의 문제를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하는 영적인 통찰력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자라거나,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복음이 아닌 그 다른 어떤 것으로 그들의 성숙을 기대 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지 말고,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교회가 복음에 기초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여 이 세상에 복음을 바르게 선포해야 할 것이다.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면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역사가 드러나게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복음이 바르게 전해지는 교회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건강한 교회이다. 하나님 앞에 다음의 기도를 드리고자 한다. “하나님 이 땅에 복음을 복음되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 이 땅의 황무함과 백성의 패역함을 보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이 땅에 복음이 바르게 전해지게 하소서.” 4. 회심을 경험한 교인이 있는 교회 이 장에서는 교회가 건강해지는 하나의 대안으로 회심의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회심이란 기본적으로 ‘후회,’ ‘전환,’ ‘변화’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성경적인 회심이란 중생한자가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회개와 믿음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 회개의 결과로 나타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이며,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성화와 칭의의 삶이기도 하다. 침례교의 신앙 고백서 제 8 장에 보면 회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 성스러운 의무이며,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우리의 영혼 안에 역사하는 은혜임을 안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확신하며, 진실한 통회와 고백으로 자비를 기원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우리의 예언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받아들이며, 유일한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의지한다”. 우리는 이 신앙 고백서에서 인간이 변화되는 과정의 회심을 본다. 우리가 주님께 돌아온 것은 우리의 죄와 무력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깊이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에 의한 변화가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회개의 영이 우리의 영혼 안에 역사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에 의한 회개와 믿음을 잘 설명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다 하니라” (행 11:18).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물론 회심은 우리의 진지한 헌신과 자의식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회심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 스스로의 일로 안다면 이는 회심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회심과 관련하여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되고 우리의 생각이 변화되며 우리의 영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필요성이 있다.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인 근심에서 생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느끼는 염려이다. 사도 바울도 회개의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를 통해 주의해야 할 것은 회개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에서 생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회개가 우리를 지나친 공포로 절망에 이르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회개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애통하게 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를 낙심케하거나 지치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회개를 생각할 때 먼저 쉽게 인간의 절망과 슬픔을 생각하며, 울며 금식하는 감정적인 아픔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는 회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진정한 회심은 감정적인 흥분의 경험이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말한다. 요엘서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 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올지어다”(욜 2:12-13)라는 회개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회개는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찢는 삶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슬픔을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회개를 하는 가운데서도 소망과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히 12:3). 또한 우리는 회개를 통해 어떤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면, 회개는 우리가 지은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나 용서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보상과 의도적인 회개를 진정한 회개가 아닌 거짓 회개라고 말하고 싶다. 열왕기상의 아합 왕의 예를 통해 우리는 거짓 회개를 본다. 선지자 엘리야는 우상을 숭배하며 악한 정치를 하는 아합 왕의 죄를 보며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한다. 이러한 공포심에서 아합 왕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일시적으로 피하고자 진실하지 못한 회개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합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아합이 ...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왕상 21:27-29).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못한 회개는 일시적으로 용서를 받을 수 는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화를 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합 왕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진실하지 못한 회개를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악한 자들에게 내리는 악인의 처참한 종말이 어떠한지를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는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거나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 전 인격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분명한 삶의 변화를 말한다. 다른 한편 일부 사람들은 회개를 일시적인 인간의 죄의 고백 행위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의 죄에 대한 정직하고 진정한 회개는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은 방법론적인 면에 있어 회개의 구체성과 지속성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회개할 때 막연하게 하기보다는 우리가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회개보다는, 삶 가운데서 지속적인 회개를 해야할 것이다. 이에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회개를 설명하면서, 회개는 평생동안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회개는 우리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회심의 문제를 생각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가 회심을 통해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더욱 화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회심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영적 특권이며 은혜이다. 회심에 대한 스펄전 목사의 한 일화가 있다. 스펄전 목사가 런던에서 산보를 하고 있을때, 술에 취한 한 사람이 다가와 가로등에 기대어 말하기를 “스펄전 목사님, 나는 당신이 회심시킨 사람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스펄전 목사님은 “당신은 내가 회심시킨 사람중의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분명 주님이 회심시킨 사람중의 하나이지는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일생에 단 한번의 회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교인이 있는 교회는 건강하거나 복음적인 교회라고 하기가 어렵다. 이는 회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이다. 불행하게도 삶의 변화가 없이 한 번의 회심의 행위 그 자체에 만족하며 지내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치 못한 사람들이다. 남침례교 주일학교 위원회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남침례교인들의 이혼율이 미국 전국의 이혼율보다 더 높다는 보고가 있다. 이 보고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회심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 교회 내에서 우리의 아픔은, 교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심령의 변화, 즉 진정한 영적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변화시켜 회심한 사람은 삶 속에서도 경건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바라기는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에 주님의 회심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목회자들이 기도하며, 이들을 바르게 양육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오늘날 강단이 영적으로 메마르고, 교인은 많지만 영적인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교인들이 많은 이유중의 하나가,설교자들이 설교를 통해 인간의 죄와 죄에 대한 회개를 선포하는 일을 경시한 설교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 지금 보다 더 많이 인간의 죄의 문제와 회개를 말씀으로 강하게 선포하여, 신자들에게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데 회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결국 회심은 구원받은 자들을 구원받은 자답게 살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회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삶의 방향을 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심의 열매인 믿음과 경건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을 바로 이해하고, 성경적인 회심을 체험한 교인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의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신앙인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심령의 회개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회심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5. 복음주의에 열정이 있는 교회 이 장에서는 현대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복음주의에 기초하고 있느냐의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교회와 신앙인들이 복음주의에 기초하지 않고 성장할 때, 이는 위험한 성장이 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복음을 가르치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복음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나 전략을 가르치기보다는 복음 그 자체를 알고 가르치는데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본적으로 복음주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복음을 소개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행 16:14).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졌지만, 복음을 전함에 있어 바울이 근심과 두려움에 처하고 있음을 본다(고전 2:3). 이는 바울의 겸손과 온유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 자신의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에 의지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복음은 복음주의자인 사람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전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쉽게 영성을 상실하는데, 우리의 영성 회복의 원천도 말씀과 성령의 사역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주의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과 관계가 새로워지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복음주의의 핵심이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헌신하며, 믿음을 갖는 새로운 복음적인 삶을 살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였던 존 밀러는 복음에 의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새로운 삶이란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를 말한다(갈 5:22-23).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러한 새로운 삶의 모습이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져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엡 2:1).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복음적인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원한다면 다음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삶에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가?, 성경을 매일 읽고 공부하는가?, 교회를 출석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우리가 자신있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복음을 받아들인 자이기는 하지만, 복음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신앙인 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사명감과 복음대로 사는 책임감을 동시에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복음주의적인 삶이란 복음으로 변화된 자가 복음을 전하며, 복음에 따라 사는 거룩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전파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복음의 전파를 위해 진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도록 복음의 파수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기보다는,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교인 수를 출석인원보다 더 많이 집계하는 경우나, 교인 수를 구원받은 것의 증거로 간주하는 교회를 보는데, 이는 복음을 잘 모르는 잘못된 일이다. 더욱이 복음에 열정없이 교회 분리나 개척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며, 교회를 세워 가는 일에 희생과 헌신이 부족한 모습은 우리가 자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교회 분리와 개척 그 자체를 비난할 의사는 없다. 단지 제언하고 싶은 것은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우리가 지금 보다 더 열정을 갖고 헌신을 하자는 것이다. 요컨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주의를 위해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건전하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보며, 교회가 분열되지 않도록 책임감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도력과 영적 권위를 바로 세워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교회에 봉사하고 교회를 세워감에 있어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교회를 봉사하거나 교회 일에 간여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운 복음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의 책임이 따른다. 원하기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통해 구원의 복된 소식이 전파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가 복음주의에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독자들을 위해 복음주의에 대한 다음의 책을 소개한다: 윌 메츠거 (Will Metzger)의 「진리를 말하라」(Tell the Truth, IVP 출판), 이안 머레이 (Iain Murray)의 「영접과 부흥, 부흥운동」 (The Invitation System and Revival and Revivalism, Banner of Truth Trust 출판), 마크 놀 (Mark Noll)의 「복음주의 정신의 스캔들」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Eerdmans 출판).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절대적인 것보다는 상대적인 것을, 일원론보다는 다원론을 지향하는 포스트 모던 사회이다. 불행한 사실은 복음주의자들도 이 포스트 모던의 이념들을 수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세계관의 비 복음주의적인 면을 직시하면서, 복음으로 우리의 신앙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복음주의를 위해 사는 결단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4, 27). 분명히 성경적으로 복음주의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를 바르게 성장시키는 가장 유일한 방법은 교회가 복음에 기초하여 결국 하나님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6. 교회의 멤버십(Membership)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교회 신앙인들에게 교회를 출석하며 어느 한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교회를 쇼핑(Church Shopping)하듯이 출석하거나, 어떤 지역을 방문하는 여행자의 기분으로 교회를 찾는 것(Church Tour)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이 장에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교회의 멤버십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한다. 사도들이 활동하던 1 세기경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신앙인들이 어떤 교회에 소속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신약 성경을 보면 구체적인 교인 명단은 나타나지 않으며, 단지 교회와 관련있는 사람들의 이름만이 디모데전서 5 장(과부)과 빌립보서 4 장 3 절과 계시록 21 장 27 절(어린양의 생명 책)에 언급될 뿐이다. 또한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지역에는 한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교회를 선택할 필요성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는 초대 교회의 상황과는 다르다. 우리가 어떤 한 교회에 속하는 것은, 교회의 목사와 다른 교인들에게 예배참석, 헌금, 기도와 봉사로 헌신할 의도가 있음을 공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신자로서 어떤 한 교회의 멤버십이 되는데는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교회 등록의 책임은 교회내의 다른 교인들을 섬기며 아울러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 멤버십에 대한 성경적 입장은 교인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 섬기며,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며 서로 격려하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교회에 대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로부터 나온 개념이다(엡 1:23).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며,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우리를 교회에 속하게 하셨다. 이러한 면에서 신자의 삶이란 등록한 교회에 교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교회가 갖는 또 다른 멤버쉽에 대한 문제는 신자들이 어느 대형 교회나 유명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교인으로서 정작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는데 있다. 요컨대 교회의 멤버십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교인으로서 지 교회를 섬기는 일에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를 자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양은 양의 무리와 같이 있으며, 포도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다. 만약 교회가 한 몸이라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 우리가 어떤 교회에 교인으로 등록되었다면,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지 말아야 한다 (히 10:25). 우리는 교회 멤버십을 단순히 한 문서의 기록이나 교회와의 관계로 보지 말고, 멤버십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헌신을 나타내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교회에 등록된 모든 신자는 ‘함께,’ ‘서로서로’ 교회에 봉사하며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열심있는 헌신된 자가 교회 일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방치하면 안된다. 우리는 교회의 멤버십이 개인의 구원을 서로 확인하며, 이 구원을 공동체인 교회에 고백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멤버십을 단순히 교회 신자들을 세는 숫자적 개념이 아니라,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현대 교회의 교인 수와 교회에 헌신하는 사람의 수는 차이가 있다. 3000 명의 교인 수에 600 명이 정규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며 헌신한다고 생각해 보라. 미국의 남침례교의 예를 들면, 평균 233 명의 교인 등록 중에 주일 예배 참석인원은 70 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에는 문제가 있는 통계이다.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등록 교인이 몇 명인지가 아니라, 얼마나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에 헌신하는가에 있다. 일부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갖는 문제중의 하나가 과장된 많은 교인 등록 수에 스스로 자긍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과 큰 교회에 출석하는 그 자체가 복음적인 건강한 교회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신앙인들이 유념해야 할 부분은 교회의 등록 교인 수가 하나의 조각상과 같이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복음적인 건강한 교회란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교회에 등록한 교인들이 서로 함께 사랑하며, 등록 교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헌신된 신자들이 있는 교회이다. 여러분의 교회에는 등록 교인 중에 약 몇 퍼센트의 신자들이 교회에 실제로 출석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가? 원하기는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이 실제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역에 동참하는 진정한 교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를 위해 신자들은 이 일에 책임감을 갖고 자신만이 아니라, 교인모두가 구원받은 자답게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도록 서로 사랑하며 협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헌신은 결국 오늘날과 같이 과도기적인 시대에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을 훈련시키며 교인들을 격려하여,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의 진정한 멤버십은 단순히 어떤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회 멤버십을 성경적으로 잘 이해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다. 진정 건강한 교회는 교회의 출석 인원이 등록 교인 수 보다 더 많은 영적으로 은혜가 충만한 교회이다. 7. 직분자(장로)를 양육하고 세우는 교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적 은사를 주시며, 이들에게 직분을 주신다. 교회가 건강해 지려면 교회를 섬기는 헌신된 집사와 장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실한 목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교회의 직분자중에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장로의 직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에서 장로와 감독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지 않지만(행 20 장), 성경에 보면 감독(overseer)과 장로(elder)라는 직분이 나타난다. 교회의 장로의 수를 제시할 수는 없더라도, 신약 성경을 보면 분명히 각 교회의 “장로들”을 언급하고 있다 (행 14:23; 16:4; 20:17-18; 21:18; 딛 1:5; 약 5:14). 일반적으로 장로는 평신도 장로인 치리하는 장로(ruling elders)와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s)인 목사로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알 수 있듯이 설교자나 목사는 근본적으로 교회의 장로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장로라는 용어를 들을 때 먼저 쉽게 장로주의자를 생각한다. 그러나 16 세기 초기 회중파들도 신약 교회의 장로직을 인정하였고, 우리는 18 세기와 19 세기에 미국의 침례교에서도 장로직을 볼 수 있다. 최근 침례교에서 장로직을 부활해야 한다는 논의가 지속되고 있으며, 최근 침례교의 출판물을 보면 장로 직분과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침례교회에서 교회의 장로직은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점차 확대되고 있다. 물론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에서 장로직을 이해하는데 있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침례교회는 장로교회와는 달리, 교회 문제의 결정을 장로보다는 회중 전체에서 결정한다. 그러므로 침례교회는 교회의 합의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한편 장로교회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에 근거하여 장로의 역할을 강조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딤전 5:17).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장로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강조하는 것이,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의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가 교회의 질서와 양육을 위해 수고하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직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장로에게는 그 직분에 따르는 영적인 책임이 따른다. 바울도 이에 근거해 말씀과 가르침의 수고 없이 장로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장로가 되는데는 소명감과 자격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직분의 은사를 확신하는 내적 소명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외적 소명을 말한다. 소명감뿐만 아니라, 장로가 되려면 그 직분을 수행할 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장로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장로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딛 1:7-8, 딤전 3:3).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장로가 되려는 사람은 가정생활에서 아내와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존경을 받을 만한 모범적인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딤전 3:1-7, 딛 1:5-9). 그러므로 교회의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장로가 되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장로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외에 장로가 되려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영적인 은사가 있어야 한다(딛 1:9).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장로(감독)는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고 말하고 있으며(딤전 3:2), 디도에게도 장로(감독)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라고 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말씀을 가르치며, 어떠한 기준에 의해 교회를 다스리겠는가? 장로직은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교회내의 장로직은 목사의 목회를 도우며, 교회의 결정할 일이 있을 시 협력하면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 실제로 경건하고 분별력이 있으며, 교인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장로가 있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 일부 한국 교회에서 장로의 임직을 유보하며, 예를 들면 장로의 임직을 교인 500 명이 된 후에 혹은 설립 10 주년이 된 후에 하겠다는 것을 공언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는 장로직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장로직이 지금까지 교회의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한 부정적인 면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목사는 교회의 직분자를 바르게 세우며 목회를 해야 할 것이다. 분명 자질 없는 자를 직분자로 세우는 것은 교회 성장을 저해하는 어리석은 일이 되나, 양육되고 훈련된 헌신적인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는 것은 교회가 건강해지는데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장로가 되려고 로비를 하며 애를 쓰거나, 장로가 되기 위해 교회를 출석해 열심히 봉사하며 헌신하는 척 한다면, 얼마나 복음에 벗어난 비 신앙적인 일이 되겠는가? 다른 한편 장로의 직분과 관련하여 최근 한국의 교계에는 장로 임기제를 도입하고 있다. 이 제도는 장로로 피택되어 일정기간 장로로 시무한 후, 사역 장로로 교회를 섬기다가 은퇴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러한 목사와 장로의 임기제 도입은 분명 교회에 긍정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장로를 세우느냐 마느냐, 또는 장로 임기제를 도입해서 시행하느냐 마느냐 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교회가 복음적인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직분자를 어떻게 양육하여 세우는가 하는 것에 있었으면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효과적인 목회를 위한 좋은 제도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는 건강한 크리스찬을 양육하고 훈련하여, 결국 자질 있는 사람에게 교회의 직분을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고자 사명자를 찾으시며, 이들에게 직분을 주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람을 키우고 세워야 한다. 만약 교회에 사람을 키우는 양육 프로그램이 없다면, 교회는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양육 받지 못한 사람이 교회의 직분을 맡으면 교회는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병이 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들의 교회는 교회의 양적 성장 보다, 교회의 사명자, 직분자, 지도자들을 키우는데 정열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교회의 목회에 필요한 직분인 장로를 바르게 세우며,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명감을 갖고 헌신하는 훈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직분(장로)자가 많은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 8. 성경적인 치리를 이해하고 시행하는 교회 이 장에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교회의 치리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우리는 성경적인 교회 치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여, 교회가 질서있고 거룩하여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보면 치리는 거룩함과 관계 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거룩하게 하셨고(레 19:2; 잠 24:1, 25), 이러한 거룩함을 위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거나 추방당하였다. 이처럼 치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거룩하게 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후 6:14-7:1; 13:2; 딤전 6:3-5; 딤후 3:1-5). 교회 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알 수 있는데, 개혁교회에서 ‘교회 치리’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과 더불어 교회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3 대 표지였다. 실제로 지금까지 지상의 교회가 건전한 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치리를 바르게 시행한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러분의 교회는 이 3 대 표지가 바르게 행해지고 있는가? 복음적인 바른 성경적인 교회는 이 표지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성경의 원리가 사랑이지, 심판이나 징계가 아니라고 하면서 교회내의 치리 문제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치리를 등한시하는 사람들은 종종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 자유 게시판 # 929 " 판단해야 할까요 ? " 참고하시기를,, 그러나 이 말씀은 위선적인 인간의 비판을 염려하여, 남에 대해 사랑과 관용을 보이며 서로 도우며 권면하라는 뜻이지, 죄에 대한 비판 그 자체를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며, 공개적으로 그들을 경계하라고 하셨다(마 18:15-17;눅 17:3).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심판자이시다.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징계하시고, 불 경건한 사람들을 진노가운데 책망하신다 (히 12:). 그러나 우리는 이 징계가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를 온전하도록 훈련시키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딤후 3:16, 고후 2:6-11). 즉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 인간이 지은 죄를 죄로 알게 하시며,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결국 징계(치리)는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교회가 성경적인 치리를 할 때는 일반적인 사회법과는 달리 더욱 신중하게 절차에 의해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치리시 영적인 면에서 죄를 지적하는 경고와 권면을 하여 죄 지은 사람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고, 그래도 죄를 의식하지 못할 경우 정당한 절차에 의해 직분을 정지하거나 아니면 그에 해당하는 책임을 묻고, 그 다음에도 죄를 회개치 않을 경우에는 교회의 거룩함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교회로부터 추방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질서와 거룩함을 위해 치리는 필요하다. 칼빈은 치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이 불경하게 하지 못하도록 하며, 불 신앙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결국 죄를 알게 하여 회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교회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에 대해 판단을 하고, 잘못에 대해서는 치리를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을 할 경우 명심해야 할 것은 정당하고 신중하게 해야겠지만, 무엇 보다 그 판단에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롬 13:). 더욱이 책임을 전가하는 의도로 남을 판단하거나, 중요치 않는 문제를 갖고 남을 판단해서도 안된다(롬 14:-15:). 또한 교회 내에서 판단이 사람에 대한 증오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롬 12:19). 결국 치리는 교회를 질서있게 하거나 순결하게 하여, 교회의 성도들이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치리가 교회를 무질서하게 혼란을 야기하거나, 교회 전체에 어려움을 주어서는 안된다. 또한 교회 치리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치리가 교회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어 교회의 분열을 초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치리는 정치적인 면이 아니라, 인간의 죄와 거룩함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치리의 대상이 되는가는 교회의 상황마다 다양하므로 단순하게 그 기준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자들이 잘못된 교리를 신봉하며 주장하거나, 위증이나 성적 부도덕 등 불경한 행위를 할 경우 이는 치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교회 치리 문제를 다루면서, 교회의 지도자와 신자들이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교회 문제를 좀 더 지혜롭게 다루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교회가 치리를 시행하기 전에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말자는 점이다. 특히 교회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단지 교회 출석을 오래했다거나, 교회의 재정에 크게 기여했다거나, 그 주위에 가족, 인척 등이 많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전혀 교회 지도자로서 자격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지는 일이다. 앞장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교인으로 등록한 사람을 먼저 영적으로 양육한 다음에, 직분자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교회 치리 없이도 교회가 건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이제 교회는 세례와 직분(특히 집사와 장로, 권사)의 임직 문제를 교회와 성도의 거룩함의 차원에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가시적인 교회 성장을 위해 교회내의 세례와 직분이 남용되어서야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거룩하게 하겠는가? 성경적인 치리는 신자들에게는 죄와 거룩한 삶을 가르치며, 교회를 질서있게 한다. 우리의 거룩함과 교회의 거룩함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의 신분이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거룩함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 치리를 하는 교회는 질서있고, 거룩하며, 건강한 교회이다. 9. 영적인 양육과 성장이 있는 교회 이제 건강한 교회가 되기위한 마지막 대안으로 신자의 영적인 양육과 성장의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신자의 종교적인 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경건함이 있는 내적인 영적 성장을 말한다. 우리는 종종 영적 성장이 멈춘 발육 부진의 상태를 본다. 개인적으로나 교회 적으로나 이러한 미숙한 성장은 불행한 일이다. 만약 나무나 동물들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이는 죽은 것이며 생명이 없는 것이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의 영적 성장이 멈추면, 결국 생명이 없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믿음의 진보와 성장을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의 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지속적으로 자라기를 바라며, 이들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랄 것을 바랐다(고후 10:15, 엡 4:15, 골 1:10, 데살후 1:3). 베드로도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성장을 권면하였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바로 보고, 자신의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영적 성장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않고 성숙하지 못하면, 무엇이 복음인지 진리인지 분별을 못하는 영적 맹인이 된다. 최근 한국의 교계에 대두되는 이단 문제도, 한국 교회가 가시적인 교회 성장에 치중한 나머지 교인들을 복음의 진리에 기초하여 양육하지 못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교회는 신자들을 영적으로 양육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개 교회에서는 이 부분에 구체적인 목회적 배려와 교회의 예산 지출이 있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자들의 믿음이 자라는 교육과 양육에 무관심하고, 교회의 가시적인 성장에만 신경을 쓴다면,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복음적인 건강한 교회라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교회의 가시적인 교회 성장의 모습은 교회가 예산을 지출 할 때, 주일학교나 신자들의 양육 프로그램에 인색하여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교회 주보에 선교사 파송을 전시적으로 과시하는 면이나, 교회출석과 헌금등 교회의 통계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는 면을 말한다. 이는 교회 성장의 외적인 면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음적인 교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교회에서 자신들의 믿음이 자라는 양육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먼저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고,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경건한 신자의 모습을 보이는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는 바른 영적 성장은 단순하게 성경의 지식이 자라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교회에 관심을 많이 갖고 봉사를 하거나,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강해지는 것을 스스로 영적 성장의 요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드는 진정으로 성숙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부인하는 영적인 거룩함이 자라는 삶이라고 하였다. 신약과 구약 성경에서 거룩의 의미는 다소 다르다. 기본적으로 거룩한 삶이란 구약 성경에서 보여지듯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를 섬기며,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는 의식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말한다. 그러나 신약의 거룩함이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세속적인 이 세상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말하는 이 세상에 사는 우리 신자의 거룩함은 삶 가운데 주님의 인격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해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사랑과 선함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보다 더 축복된 삶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거룩해지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셔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 후반-7, 골 2:19)라고 하면서 성경적인 영적 성장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바른 성경적인 성장의 원리인지를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하기를 바랄 것이다. 교회가 성장하는데, 분명 유능한 교회 지도자와 헌신된 평신도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성경적인 원리는 교회의 성장은 사람의 지혜로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교회를 성장시키신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삶 속에서 거룩하게 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를 부흥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성화의 삶을 살거나,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는 목적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성장이 우리 자신에게 영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보았다. “너희가 이방인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저희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바라기는 우리의 삶과 섬기는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여 믿음 안에서 강건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교회가 내적으로 거룩하여 이 세속 사회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바란다. 만약 교회가 신자들을 훈련하는 양육에 무관심하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면 이는 분명 복음적인 건강한 교회가 아닐 것이다 건강한 교회를 소망하며 지금까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라는 주제 하에 복음적이며 개혁적인 바른 교회상을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 다룬 문제들이 건강한 교회를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신실한 신앙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고 하신다.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책임감을 갖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며, 사명감을 갖고 복음적이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바른 교회상으로 제시한 건강한 교회는 다음과 같은 교회였다: 1. 강해 설교를 하는 교회, 2. 바른 성경적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3. 복음에 기초한 교회, 4. 회심을 경험한 교인이 있는 교회, 5. 복음주의에 열정이 있는 교회, 6. 교회의 멤버십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교회, 7. 직분자(장로)를 양육하고 세우는 교회, 8. 성경적인 치리를 이해하고 시행하는 교회, 9. 영적인 양육과 성장이 있는 교회. 우리는 무엇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회인지 단순하게 말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보다 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애를 써야 할 것이다. 요컨대 목회자들은 설교와 삶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계시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신자들을 바르게 양육하여 교회를 건전하게 성장시켜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가시적인 교회 성장에 관심을 둔 나머지 훈련받지 않은 교인에게 직분을 주어, 이후에 교회가 무질서하게 되는 화를 자초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지속적으로 회개를 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경건한 신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 일반 신자들도 교회에 등록할 때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며, 교회 등록이 단순하게 등록 카드에 이름을 기록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자신의 헌신을 교회 공동체에 약속하고 고백하는 행위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의 3 대 표지인 말씀의 참된 전파, 성례의 정당한 집행, 권징(치리)의 신실한 시행 등에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사명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경고한다(출 20:7; 신 5:1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는 못할 지 언정,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의 이기적인 유익을 구하는데 익숙해 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불 신앙의 모습인 종교적 위선과 치장을 경고하고 있다. 현대 교회의 예배를 보면서 먼저 강단이 말씀 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며,예배의 참석자들은 예배를 통해 감정적인 만족이 아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구별된 성도의 삶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진정한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신앙인들 개인의 영성 회복과 개 교회의 영적 갱신이 중요하다고 본다. 교회는 물흐르듯이 항상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한다. 16 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모순으로부터, 영적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발전하여, 성경의 권위를 바로 찾고 말씀대로 바른 교회를 세우며, 바른 신앙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 사건이었다. 실제로 16 세기 종교 개혁은 “바른 교회(true church)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 것인가?” 하는 영적 순수성을 위한 하나의 운동이었다. 우리는 16 세기 종교 개혁 운동의 교훈과 유산을 간직하여,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바른 교회를 세우며, 바른 신앙의 삶을 위해 애쓰는 신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지금의 우리 교회와 신앙을 볼 때, 우리의 모습이 바로 개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현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위기 의식과 교회 개혁의 당위성을 느낀다. 21 세기의 교회 개혁의 방향은 “한 개인으로부터, 개 교회로부터의 영적 갱신”을 통해 교회를 건강하게(healthy church) 하는데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불순종과 잘못된 교회의 모습에 언젠가는 심판의 채찍을 드실 것이다. 교회가 건강하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복음을 복음되게,”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도 개혁 정신을 따라,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본이 되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이 세상에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21 세기 교회가 지향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적이고 건강한 교회일 것이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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