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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풀무에서 선택된 사람 (이사야 48장 1절~11절)

by 【고동엽】 2023.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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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풀무에서 선택된 사람 (이사야 48장 1절~11절)

 

나비가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것을 관찰하고 있던 소년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와줄 양으로 고치를 찢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나비는 쉽게 고치를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나비는 몇 번 날개를 움직이며 날아오르려는 것 같더니 이내 땅바닥에 맥없이 툭 떨어지고 맙니다. 들여다보니 나비는 죽어 있었습니다. 다른 한 마리의 나비가 역시 고치를 빠져 나오느라 있는 힘을 다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거의 필사적으로 바동거리던 그 나비가 이윽고 고치를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갔습니다. 이 나비는 고치를 벗어나려고 혼자 애쓰는 동안에 스스로 날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 무슨 일이건 그저 쉽게 되기만을 바랍니다. 내 노력은 차치하고 밖으로부터 어떤 다른 힘이 주어져서라도 쉽게, 무사하게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안일한 마음으로 임하는 일은 성사되지도 않을 뿐더러 그 일이 보존되지도 못하고 결과 또한 아름답지 못합니다. 고통과 실패, 역경과 환난----이것은 아픈 것입니다 마는 문제는 그 속에 포함된 동기와 목적과 의미입니다. 많은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는 흔히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나보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이렇게 내버려 두시나보다. 하나님도 속수무책인가보다'하고요. 또한 어떤 때에는 '내가 너무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보다'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죄가 많아서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 1절 이하를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제가 여기에 질문 하나를 덧붙이겠습니다. "본인의 죄라면 나기 전에 무슨 죄가 있었으며, 부모의 죄라면 본인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소경으로 태어나 40세가 넘도록 이처럼 어두운 가운데서 불행하게 살아오다니, 이럴 수도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본인이나 본인의 부모에게 죄가 있다는 것도 틀린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은 죄의 문제가 아니요, 적어도 이 사건 자체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뜻깊은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그 일과 나 자신의 생각이 좀 달라서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문제를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떻게 수렴하고 어떻게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죄의 문제이기도 하고, 환경 요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무지와 무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을 수만 있다면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 나님의 경륜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려워서도 견디어야 하고 고되어도 참아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3C로 나타내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3C란 'Communication, Content, Command'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의논을 하십니다. 우리와 소통하십니다. 우리와 이야기하려고 하십니다. 우리의 의견을 물어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우리를 만족하게 하십니다. 내 소원대로 다 이루어 주시고, 생각보다 더 크게 이루어 주시어서 감사해야 하고 감격해야 할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명령을 하십니다. 내 뜻과는 무관하게, 내 의견이나 소원은 아예 고려조차 하시지 않는 것처럼 친히 명령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 명령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대화적 관계를 이루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면 이런 이론을 'Personal mandate'라고 합니다. 위임장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을 위임하시고 그 위임장을 주셨습니다. 그만큼의 자유, 그만큼의 책임, 그만큼의 선택권이 있고, 또 그 영역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가끔 에덴 동산 사건에 대하여 불평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에 선악과를 두실 것은 뭐냐? 또 산악과를 두셨거든 가시철망이라도 쳐서 범접(犯接)을 못하게 하시든가 하와를 꼼짝못하게 해 두시든가 하셨으면 될 터인데, 공연히 일을 만드셔가지고 기어이 이처럼 타 락시키셔야 했단 말인가' 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이야기는 아득한 그 옛날, 천지가 창조되던 그 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의 현실에, 오늘의 나에게 엄연히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에서만 인격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재량(裁量)을 가지지 못한 인격은 인격이 아닙니다. 가시철망을 치거나 꽁꽁 묶어 두어서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라는 것이 '위임장'의 뜻입니다.

요즈음 툭하면 '민주화'라는 말을 노래삼아 이야기들 합니다마는, '민주'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는 의문입니다. 민주화가 되려면 우리는 먼저 말버릇부터 고쳐야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라도 명령하듯 말을 함부로 내뱉으면 안 됩니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달리 선진국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물 한 잔을 청할 때에도 "물 가져와!"라든가 "왜 안 가져와?" 하는 식으로 명령하는 투를 씁니다. 이 말씨를 영어로 직역하면 "Give me a cup of water."가 되는데, 선진국에서는 명령 계통이 엄격한 군대에서나 더러 쓰일까, 이런 말씨는 절대로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Could I have a cup of water, please?" 물 한 모금 얻어 마시는 데도 이처럼 상대를 존중하는 말씨로 나옵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럼요, 왜 안 드리겠어요?" 이렇게 받습니다. 상대의 말씨가 그렇고 보니 심부름을 하더라도 기분 좋게 하는 것입니다. 기분 나빠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만 밝힐 따름입니다. 주고 안 주고는 상대방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합니다.

나는 내 의견만을 말하고, 그 다음에 올 일은 상대방에게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내 생각을 밝힌 다음에는 상대방의 의사가 어떠한가를 기다려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급하게 내놓으라고 요구할 뿐더러 안 내놓으면 빼앗겠다고까지 합니다. 이런 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선악과는 에덴 동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도 있습니다. 오늘도 선악과를 곳곳에 만들어 놓으시고 '자,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것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이렇게 두 갈래 길을 둔 것은 나의 뜻이다.

너는 어느 쪽 길을 택하겠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셨다는 사실을 간과치 않으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상기시키시며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말씀으로 역사하시고, 계시로 말씀하시고, 때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설교자들을 통하여, 또는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는지, 우리가 바른 응답을 하고 바르게 행동하는지---끈기 있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 4절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켜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하고 꾸짖으 십니다. 갖은 죄악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교만해진 인간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런 완악한 인간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꾸짖으려고 '너 이리 와!' 하고 눈을 부라리면 어떤 아이는 눈치만 살피면서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요.

그러면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빕니다. 이런 아이는 얻어맞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아이는 스스로 잘못한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리고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잘못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아요. 나중에는 오히려 부모 쪽이 지쳐서 "제발 잘못했다고 해라" 하고 거의 사정하다시피 해도 듣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는 맞아도 호되게 맞아야 합니다. 아무리 호되게 맞아도 항복을 하지 않는 아이---이런 아이 앞에는 결국 부모 쪽이 항복을 합니다. "내가졌다" 하고 맥이 빠지고 맙니다. 고집 불통은 참으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사이 시쳇말로 '목에 힘준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서경에서는 "목의 힘줄은 무쇠"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쇠 같은 힘줄로 뻣뻣해진 목을 꺾어 놓으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지치셨습니다. 이사야 1장 5절에 보면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하나님께서는 매질하시다 말고 지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시지 아니합니다. 물러서시지도 아니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9절)" 말씀하시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11절)"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기어이 회개시키겠다고 다짐하십니다. 기어이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기어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연단 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10절)." 즉 주신 연단을 통하여 기어이 정화(淨化)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듣게 하시고, 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끊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순종케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결국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택한 백성을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매질은 효과적인 조처(措處)요, 비상한 방법입니다.

고난의 풀무----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고난의 풀무'란 바벨론 포수(浦囚) 70년을 가리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포위하고, 성전을 훼파(毁破)하고 수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게 됩니다. 이 바벨론 포수 70년이야말로 엄청나게 어려운 연단의 세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난, 곧 무시무시한 전쟁과 기근과 노예로서의 그 엄청난 고통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같이 무서운 풀무에서 저들을 선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저들의 마음 문을 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무쇠 힘줄의 목을 꺾어서 무릎꿇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못된 고집을 꺾고 놋과 같이 뻔뻔한 얼굴을 부셔서라도 기어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어느 집사님 한 분이 큰 사업을 잘 꾸려 가시다가 뜻밖에 부도(不渡)가 나는 바람에 욕을 보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저는 그 때에야 비로소 사업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떵떵거리며 잘살던 '사장님' 집인데 부도가 나니 하루아침에 다 망해 버리고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을 빼앗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가 심방을 간 그 시각에도 사람들이 몰려와 선풍기, 냉장고 할것없이 별것도 아닌 물건까지 다 빼앗아가지 뭡니까. 어디에나 차압 딱지 투성이고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당사자인 집사님은 방 아랫목 한귀퉁이에 드러누운 채 앓고 있었습니다. 보름 동안이나 누워 있는 중인데, 얼굴이 퉁퉁 부어 올랐더군요. 문안을 드리기는 했지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답답해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집사님은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더니 오히려 저를 위로합니다. "목사님, 너무 염려하시지 마세요." 그리고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께서는 제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요, 워낙 고집이 셉니다. 그래서 이 정도로 호되게 당해야 제 정신이 듭니다. 저는 이제야 무엇을 좀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겨우 알 것 같습니다."---그후 이 집사님은 거기서 쫓겨나 어는 산비탈에서 닭을 몇 마리 치다가 나중에는 그 산비탈에 교회를 세우고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겸손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저는 목회 30년 하면서 여러 가지 형(型)의 사람을 보아 왔습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교양 서적 많이 읽었다고 겸손해지는 것 못 보았습니다. 기도 생활 열심히 하는데, 그로 해서 겸손해지는 것도 보지 못했습 니다. 오직 한 가지---되게 얻어맞아야만 낮아집디다. 머리가 땅바닥에 닿을 때까지 떨어져야만 비로소 겸손해지더군요. 겸손---참으로 배우기 어려운 덕목(德目)입니다. 겸손처럼 좋은 덕목이 없는 데도 그것처럼 배우기 힘든 것도 없습니다. 겸손이라는 귀한 축복과 은사는 어려운 시련 속에서, 고난의 풀무에서 받을 수 있는 선물인 것입니다.

고난의 풀무에서라야 우상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며, 순수하게 됩니다. 풀무불로 온갖 찌꺼기와 불순물을 다 태워 버립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십니다. '이래서는 안 되지!' 하면서도 미적거릴 때, 하나님께서 탁 끊어 주십니다. 내가 끊지 못하고 있는 못된 버릇을 하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내가 꼭 해야 될 일인 줄 알면서도 하지 않고 있는 게으름은 고난의 풀무에서 부지런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정신을 차리게 해 주십니다. 거짓된 사람을 진실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순수하게 만드십니다. 고난의 풀무에서 가치관을 바꾸게 하십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정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melting pot"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봅니까?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는 소유관(所有觀)도 달라져야 합니다. 전에는 내것이라고 했지만 이젠 내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것은 없습니다. 가치관도 달라져야 합니다. 대학 입시 공부를 하고 있는 고등학생에게 "너 공부해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하고 물었더니 "공부요? 열심히 하지 않으렵니 다" 하고 대답해요. "왜 그러니?" 하고 반문했더니 "부자 되면 청문회 나가야 되지 않아요? 정치도 별거 아니더군요. 그래서 저는 출세하지 않으렵니다" 하고 말해요. 맹랑한 반응입니다. 여러분, 요사이는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생각의 틀이 달라졌습니다. 옛날에 좋아 보이던 것, 옛날에는 값져 보이던 것이 이젠 별로 좋은 것이 못 되고 있습니다. 정신 못차리게 많은 문제가 한 솥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런 가운데서 이제 정말로 귀한 것이 무엇이며,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며 행복할 수 있는 근본 요소가 무엇인지, 퍼스트 프라이어리티(first priority)곧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배워야 할 것입니다.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의 풀무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를테면 늘 밖으로만 나돌던 몹쓸 남편들도,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면 자기 아내만 찾습니다. 그제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형제도 알고 이웃도 알고---말하자면 사람을 알아봅니다. 고난의 풀무에 드니까 비로소 정신이 나는 것이겠지요. 몽롱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벗어나 오늘, 이 시점에서 바른 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의 풀무에서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역사하고 계십니다.

대학에서는 가끔 교수들과 학생들이 함께 앉아 어떤 주제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는 일이 있습니다. 똑같이 생소한 문제를 두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데, 학생들과 교수들 간의 의견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여건에서 똑같이 읽었는데 어째서 양자간에 그렇게 많은 차이가 생길까요? 시각의 차이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혹 서부극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서부극을 참 좋아합니다. 서부극에서는 착한 사람이 절대로 죽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심을 하고 봐도 됩니다. 착한 사람이 질까봐 조마조마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반드시 의로운 사람이 이깁니다. 선한 사람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 영화는 서부극이 아닙니다. 그런데, 똑같은 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거기서 의(義)가 이기는 것을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러브신이나 말 타는 장면, 총 쏘는 장면 따위나 보고 있습니다.

즉 보는 눈이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엄청나게 소용돌이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습니까? "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욥기 23장 10절에 욥이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저 고난의 풀무에서 연단되어 정금(精金)이 되어 나오겠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이제 고난의 풀무에서 그가 나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내가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끊으실 것입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고난의 풀무에서 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게 하실 것이요, 용서하게 하실 것이요, 화목하게 하실 것이요, 진실하게, 충실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따뜻하고 영원한 그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 손길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고난의 풀무에서 너를 택하였노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에 똑바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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