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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주신 말씀(마가복음 16장 14절~20절)

by 【고동엽】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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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주신 말씀(마가복음 16장 14절~20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우리는 가끔 축구 시합에서 게임 종료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주는 것을 봅니다. 경기 중에 선수 부상 등으로 뺏긴 시간을 보충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충 타임이라 합니다. 혹은 주심이 자기 재량껏 주는 시간이라 해서 레퍼리 타임(referee time)이라고도 합니다. 전광판 시계는 멎었습니다. 법적으로 경기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상실된 시간, 경기 외적인 일로 흘러간 시간이 주심의 재량에 의해 보충됩니다. 이 연장된 보충 타임 안에 승부가 바뀌는 경우도 봅니다. 그야말로 결정적인 시간이요 소중한 시간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잘 모르는 채 선수들은 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가 몇 달만에 다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제목을 「보충 인생을 산다」라고 붙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생태학적으로 보나 사회학적으로 보나, 어디로 보아도 세상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아직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것이야말로 보충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그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우주적인 사건이요,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든 메시지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고D쵥쵹TXT*부활에 있습니다. 언제나 메시지의 초점을 십자가와 부활에 두고 말씀하신 것을 그분의 제자들은 한참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애초에 당신이 계시던 곳을 승천하시기 직전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할 일은 다 이루었다, 이제는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요. 제자들이 하여야 할 일-----이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이르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깊이 상고해보면 세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왜 의심하느냐? 믿음을 가져라!"
둘째,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보충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셋째, 예수님 당신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하시고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소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소원하신 것, 그 제자들에게서 얻고 싶으셨던 반응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특히 제자들한테 하신 말씀을 보면 금식이라든가, 선행, 구제, 봉사 등에 대한 것이 그리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에서 도덕적인 의무, 종교적 경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으라, 끝까지 믿으라고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실패의 원인이 믿지 아니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약해지는 원인도 불 신앙 때문이요, 비겁해지는 것도 인생이 처절하게 되는 것도 모두 불신앙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믿으라-이것이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은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우셨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경험한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사람한테 자기 경험을 설명한다고 칩시다. 상대방이 고분고분 믿어주면 좋지만 마음 문을 닫고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이다, 믿어라, 믿어라 하는데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당신의 못자국 난 손을 펴보이십니다. 그리고 옆구리에 난 창자국도 확인해보라고 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예수님은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믿으라, 믿으라!
나이드신 분들은 아직도 6․25의 비극, 그 어려움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기막힌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까! 이것을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전후(戰後)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리 이야기해주어도 잘 믿지를 않습니다. 늘 같은 이야기를 하니까 마지막에는 듣기 싫다고 달아나 버립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앉혀놓고 6․25 이야기를 해주었답니다. 할아버지로서는 깊은 생각이 있어서 손자에게 그 고생한 이야기를 죽 하는데 이 녀석은 번번이 말대꾸를 합니다. "그때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단다. 하도 배가 고프니까 나중에는 쥐를 잡아먹기까지 했지." "냉장고 문 열고 꺼내 먹으면 되잖아요? 무엇을 그리 걱정해요?" "예끼, 냉장고가 어디 있었겠느냐." "그럼 라면 삶아 먹지요?" "라면은 또 어디 있누……" 이쯤 되니까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는 참 답답하네!" 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알고 보면 양쪽 다 답답합니다. 믿기지 않는다는 쪽이나 믿게 하려는 쪽이나 못할 노릇입니다. 믿지 않겠다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믿게 할 도리가 있어야 말이지요! 보고도 안 믿고 만지고도 안 믿고, 들어도 안 믿고, 같이 앉아 있으면서도 안 믿고……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믿지 않기로 작심한 사람을 믿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래서 괴로우십니다. 그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봅니다.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왜 믿지 않느냐!"
인격과 인격의 만남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사람들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의심을 말하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다.' 의심은 마음에 두는 것이요, 했다가도 지워버려야 할 것입니다. 의심하는 바가 맞을지 틀릴지는 확률이 반반입니다. 의심은 말 그대로 의심이요. 확실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의심에 근거해서 말을 해버리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의심하기로 들면 어디 끝이 있습니까? 알고 보면 사는 것이 모두 믿음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늘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봅시다. 그 바퀴를 빼어서 바퀴를 지탱하는 걸림쇠를 보면 우리들 손가락 만한 몽둥이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퀴가 제자리에 걸려 있습니다. 그 손가락 만한 몽둥이 하나가 댕강 부러지는 날에는 차체가 사정없이 곤두박질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타이어를 바꿔 끼우면서 생각했습니다. 나사를 죄면서 '이 나사 하나가 풀려나가면 어찌되는 건가' 하고 말입니다. 끔찍한 일이지요. 한창 속력을 낼 때 나사가 풀린다고 상상하면 도저히 차를 탈 수가 없습니다. 안 풀릴 것으로 믿기에 타는 것입니다. 신호등은 또 어떻습니까? 내 앞에 있는 신호등이 빨간 불 파란 불로 바뀔 때 우리는 적어도 내 눈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내 눈을 의심해서 파란 불이 켜졌는데 '아니야, 저것은 빨간 불일 거야' 하고 그대로 달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어야 합니다. 안 믿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의심을 조금씩 해봅니다마는 결국은 전적으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식사할 때에 은수저 가지고 국 속을 휘저어 보셨습니까? 독약이 들어 있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아마 그렇게 해보신 분은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전날 저녁에 큰 부부 싸움을 했다 해도 그런 의심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먼저 믿고 보면 이것도 고맙고 저것도 고맙고, 뭐든지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의심하기로 들면 끝이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으라!"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주시자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든, 병자를 고치시든, 5천 명을 먹이시든, 모두가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많은 말씀에 목적이 있다면 역시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믿게 하려고 가르치고 가르치시다가 언젠가는 '이거 참 불가능하구나' 하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구원받을 사람은 나를 믿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 곧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은 자는 끝내 안 믿으니 어쩔 수 없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믿기지 않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참으로 복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볼 때에 완전히 믿기는 사람, 설교말씀을 들을 때에 100% 믿기는 그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입니다. 반대로 성경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설교말씀이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도 없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믿을 때에라야 이 믿음의 채널을 통하여 우리 안에 그 능력이 역사 하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라, 진실하게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너희들의 능력으로 살아라, 너희들의 의지로 살아라가 아닙니다. 오직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네 안에 살 것이다. 네 안에서 역사할 것이다-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입니다.
주님께 있는 능력의 차원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역사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에 그 능력이 내게 와서 능력화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떠한 객관적 사건이 내게 사건화 되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
집에 불이 났다고 가정합시다. 내 집에 불이 났는데 누군가가 "불이야!" 하고 외칩니다. 이때 그 외침을 믿고 바로 뛰쳐나가는 사람은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보를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타 죽어도 그에게는 불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라도 믿는 순간에만 비로소 사건화합니다. 능력이 능력 되고, 기적이 기적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들린 어린아이 하나를 고치려다가 실패합니다. 형편없이 창피를 당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막 9:19)."믿음 없는 세대가 능력을 받을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능력을 받는 그릇이 믿음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제자를 붙잡아 올리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왜 믿음이 없느냐, 왜 그렇게 믿음이 시원치 않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믿어라! 무엇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병 나을 줄로 믿어라, 소원 성취될 줄로 믿어라 하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믿어라 믿어라 하시는 말씀의 골자는 이러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어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너희 가운데에 와D쵹TXTnL있음을 믿어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음을 믿어라,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능력이 여기에 있음을 믿어라,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 사건임을 믿어라,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용서가 여기에 계시되었음을 믿어라-이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놀라운 능력은 믿는 자에게만 효력 있고, 부활의 능력도 믿는 사람에게서만 사건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곳에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뿌리깊은 죄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 이 최초의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따먹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다면 어찌 감히 따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을 저희 마음대로 '죽을까 하노라' 라는 말로 바꾸었기에 따먹었습니다. 의심 때문에 그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값은 사망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 심은대로 거둔다고 했는데 이것을 뻔히 믿는 사람이 형편없는 행동을 하고 다닙니다. 이것을 무엇을 뜻합니까? 결국은 믿음이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죄를 짓고, 그래서 엄청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었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성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 이성주의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로 예수님의 그 놀라운 말씀과 사건을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의 지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으니 안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들의 믿음을 보십시오. 납득가지 않으면 안 믿고, 납득이 가면 저버립니다. 저희들의 이성으로 다 소화해버렸으니 그것은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들의 경험에 없다고 해서 못 믿습니다. 이래저래 믿음이 없습니다.
그실 중요한 경험들은 전부가 단회적(單回的)입니다. 사는 것도 단회적이요 죽는 것도 단회적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두 번 산다고 상상해봅시다. 한 칠팔십 년 살다가 다시 12세가 된다면 그 12세때부터는 아마 공부하지 말라고 해도 공부를 열심히 할 것입니다.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아주 착실하게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일방 통행로입니다. 한 번 살면 그만입니다.
되돌아오지 못합니다. No return one way street(일방통행)-----한 번 가면 끝입니다. 그런 생애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젊은이들 보고 이미 살아본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에 그 젊은이들이 그것을 그대로 믿으면 지혜가 되고 자본이 되겠는데 대부분은 잘 믿지 않습니다. 의심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겪은 실수를 딸도 똑같이 범합니다. 아버지가 내쉰 한숨을 아들도 내쉽니다. 왜입니까? 안 믿어서 그렇습니다. 경험자의 경험에서 비롯된 교훈을 믿었어야 됩니다. 그랬더라면 그 경험이 내 경험이 되어서 나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딱한 일입니다. 내 경험, 이것만이 모두인 것처럼 생각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지 못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나의 나약함입니다.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이나, 너나할것없이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예수님 앞에 어찌 고개를 들겠습니까? 내가 믿는다고 하겠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다시 고백하겠습니까? 여기에서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에 열등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갈등이 있고 말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오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녔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저들은 함께 지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가면 그 앞에 또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미지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저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가 없고, 그 신비로운 미래에 대하여 긍정적인 자세로 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 믿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면 믿어집니다. 의심함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못 믿을 사람까지도 믿어집니다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의심이 있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음의 증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그것은 전적인 수락입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이스라엘사람들이 예배드리는 회당에 가보았습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기도하는 분이 영어로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내용을 알 수가 있었는데, 들어보니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저 찬양과 감사뿐이었습니다. 어떠어떠해서 감사합니다, 어떠어떠해서 찬양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내용 중에 특별히 제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들어 보십시오. "이 일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지금은 납득이 가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 사건이 여기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성의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납득가지 않더라도 전적으로 수락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또하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행동적인 믿음입니다. 먼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면 알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야곱이 그러했고,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그러했습니다.
먼저 순종하고, 그 다음에 깨달았습니다. 먼저 따르라! 먼저 순종하라! 그리고 네 생명을 위탁하라! '이렇게 믿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내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장차 어떤 일이 생길 것입니까?' 하고 의심하지 말아라, 네 생명과 네 운명을 그대로 나에게 위탁하여라-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운명을 맡겨라, 따르라, 믿으라, 그리고 복음을 전하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힘쓰고 있습니까? 이 마지막 남은 시간은 신중히 생각하여야 합니다. 헛된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전도하기 위함이요, 직장생활 하는 것도 전도하기 위함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 생애 전체의 목적은 오직 전도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충인생을 사는 사람의 마지막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들으십시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우리는 모세처럼 언제나 표적을 먼저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먼저 가라, 행하라, 전하라, 그리하면 표적이 따르리라." 믿고 전하고, 믿고 행하면, 거기에 기적이 따른다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으라, 전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표적이 거기에 나타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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