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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소망 설교

야고보서 4:1-6 주님과 올바른 관계

by 【고동엽】 2021.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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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1-6 주님과 올바른 관계

 

야고보서 4:1-6절까지 말씀으로 주님과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한달 사이에 아들과 딸을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동네사람이 그 어머니에게 축하한다고 하면서

왜 한달 사이에 둘을 다 결혼시켰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주 고맙다고 얘기했더니 동네사람이 딸은 어디로 시집갔냐고 물었습니다. 그맀더니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너무 귀한 사위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딸이 아침에 늦게까지 자도 사위가 아무말도 안 한다는 겁니다.

또 밥을 안 해줘도 사위가 불평을 안 해주고, 옷도 많이 사주고,

외출도 딸 마음대로 해도 전혀 말을 안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나가서 맛있는거 사먹고 하니까 너무나 시집을 잘 갔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사람이 잘 좋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러면 어떤 며느리를 맞이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딱 변해서 하는 말이 말도 말하지 말라.

어디서 배워먹었는가 매일 늦잠만 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한테 밥도 안 해준다고 합니다.

어쩝니까 똑 같은 사건을 봐도 입장차이가 그렇게 크게 납니다.

그러면 올바른 관계를 가질수가 없습니다.

자기 딸이 하면 좋은 것이고, 며느리가 하면 엉터리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는 어떻게 보냐면 딸을 보듯이 봅니다.

그런데 남을 볼 때는 며느리를 보듯이 봅니다.

나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면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며느리를 보거나 딸을 보거나 며느리도 내 딸 같이 생각을 하고

사위도 내 아들같이 생각을 했다면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같습니다. 내 입장에서만 보면 관계를 올바로 갖지 못합니다.

항상 하나님 편에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떠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야고보서도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서 4장에 얘기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얘기하냐면 싸움이 어디서 났느냐 다툼이 어디서 났느냐 하면서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그렇게 얘기하면서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고 살인하여 시기하여도 취하지 못하는데, 계속 불신 때문에 다투고 싸운다고 얘기하면서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쓸라고

내 욕심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하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는데

너희 안에 있는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면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이것을 잘 깨닫고 알아서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라고

오늘 본문 4장에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을 우리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되는데

어떤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될 것인지 보겠습니다.

약4:1-2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제일먼저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하면

첫 번째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됩니다.

1절에 보면 싸움이 어디서 났느냐? 다툼이 어디서 났느냐?

다 지체중에서 정욕을 좇아 난 것이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대방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과의 관계도 내가 많이 가지려고 하면 싸움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은 정욕 때문에 욕심 때문에 난다고 하면서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여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야욕을 채우려고 하면 이렇게 싸움이 다툼이 나는 문제가 발생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주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을 한다고 하면 자족을 한다고 하면

절대로 다투거나 싸움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더 가지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이만큼 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속에서 만족하면 절대로 다툼이 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불란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하면

주님이 주신 조건 안에서 내가 사는 방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좋은 조건을 주셨던지, 나쁜 조건을 주셨던지, 그 안에서 내가 만족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세상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진 것을 보면 그 즉시 그 기쁨을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으로 만족하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거기에 절대로 동요하지 않습니다.

 

송명희 시인이라는 분은 온 몸을 다 비틀어야 기억자를 씁니다.

그런데 그분이 뭐라고 하셨냐면, 기억자 하나도 제대로 못쓰는 분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왜 공평하느냐 나는 육신으로 몸이 거북하지만, 영적으로는 눈이 떴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거북하면 영적으로 눈이 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좋은 사람은 영적으로 안 떠도 잘사니까

영적으로 눈이 안 떠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나는 몸이 불편한 대신 영적으로 눈이 떴고,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반대로 영적으로 눈이 못 떴기 때문에 공평하신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주님이 나한테 이걸 주시든, 저걸 주시든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나한테 꼭 필요한 것으로 주셨겠지 하고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면 절대로 불란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일이 우리 일이 아니라

주님 일이란 사실을 늘 명심하고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자족?이라는 두 글자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자족이 아니라 불평으로 가면 아까 친정어머니가 딸을 보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는 이율배반적인 그런 생각속에 살아서 늘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을 낸다고 다 얻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다 가져지는 게 아닙니다.

저는 늘 그런 얘길 합니다. 망해본 것이 너무나 고맙다고,

내가 할려고 한 것이 안된 것이

너무나 너무나 고맙다고 뼈져리게 저는 느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제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제가 하려고 하는 것은 끝이 무엇이 됐어요? 망했기 때문에 저는 힘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하면

주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거 아주 중요합니다.

 

대상29장을 한번보세요.

대상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자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로소이다. 그리고 다 우리 주님의 권세아래 있습니다 라고

다윗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우리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되는데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속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먼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라고 먼저 선택권을 롯에게 주고 우리 주님이 어떤 것을 주던지

나는 만족하겠다는 그런 마음자세로 롯에게 가지라고 하니까 롯은 자기 좋을대로 선택했지만 하나님니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땅을 주셨습니다.

그 주신 것으로 만족을 하며 살았더니

그 땅에서 전쟁이 벌어져서 자연히 아브라함이 놓아진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도 항상 왜 나만 이렇게 어렵고, 왜 나만 지금까지 이러냐 라고 불평하는 사람은

현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못 맺고 사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자기자식에게 나쁜거 줄 사람 한사람도 없습니다.

자기 자식에게는 자기 입속에 것 빼서라도 줍니다.

아프리카에 사는 영양이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가 조금 뛰어다녀요.

그때 재칼이 잡아먹으려고 위협하니까 영양어미가 새끼쪽으로 못하게 자꾸 방해를 하더니 나중에는 재칼이 새끼가까이 오니까 홱 돌아서서 재칼을 받으려고 달려드니까

맹수인 재칼이 도망가더라구요. 그것이 모성애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줬겠느냐 이 말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 줬을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거

우리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제일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는 4절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두 번째 주님만을 간절히 바라보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됩니다.

지금 야고보는 간음여자들이여! (이 말은 세상을 향하여 가는 자들이여 그러면서)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에 모든 것을 책임져 줄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를 책임져 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나를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내 욕심으로 끌어가지만 하나님은 진정한 생명길로

나를 끌어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벗이 된다고 하면 우선 좋고, 자랑스럽고,

괜찮은 것 같지만 실상은 생명은 죽어버리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바라보느냐는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것 답게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 할때는 하나님과 원수됨을 스스로 만들어 버린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향해서 계속 가고, 토지를 향해서 계속가고, 자동차도 좋은 것을 향해서, 명예, 권력, 좋은 집, 금은패물을 가질려고 계속 향해봤던들 그것으로는 절대로 나를 만족시킬수도 없고,

나를 생명길로 인도하지도 못합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나를 잠시동안은 기쁘게 해 주는 것이 그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종점이 아니기 때문에 바라보면 안됩니다.

애들보세요. 아무리 좋은 거 갖고 있다가도 금방 싫증냅니다.

우리 희원이도 소리나는 거 주면 조금 가지고 놀아요.

그러다가 그 시기가 넘어지면 아무리 꼬셔서 다시 줘도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래요. 우리도 한번 그거 맛보면 처음에는 아주 좋아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가면 이제 재미가 없어져요. 그리고는 더 쌈박하고,

더 이상한 것, 더 특이한 것 없나 하고 자꾸 찾아가게 마련이에요.

그러나 일생동안 찾아 봤던들 그것은 우리를 살려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살려내는 우리주님을 간절히 바라보는 거 아주 중요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날마다 무얼 바라보느냐,

무얼 사모하며 사느냐, 무얼 생각하고 사는냐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를 잘 이루어서 나의 어떤 평안이나 나의 목표를 향해서

계속 가봤던들 그것은 진정한 평안으로 나를 이끌지 못한 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보는 것이 세상 길이냐 아니면 주님이냐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늘 주님만을 간절히 바라봐야 하는데

요한일서2:15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랬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과 사귀라고 요한일서2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목표로 삼아서 바라보느냐는

내 삶이 어떤 삶으로 가느냐의 중요한 하나의 요소가 됩니다.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방나라에서 느브갓네살의 진미를 먹으라고 하고,

자기 일을 돌봐주라고 뽑아서 쓰겠다고 하는 조건속에서도 뜻을 정하여 그 음식을 먹지 않고 채식을 먹습니다. 열흘 있다가 보니까 하나님만을 바라고 채식을 먹었던 다니엘의 얼굴이 훨씬 나아져서 나중에 높이 올라가서 하나님이 형통한 축복으로 인도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상과 짝해서 아무리 이룰려고 해도 그것은 헛깨비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얼 바라봐야 하느냐 우리 주님만을 간절히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올바른 관계

두 번째 주님만을 간절히 바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약4:5-6절을 봅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세 번째 주님을 삶에서 많이 깨달으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세상을 사랑하여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베푸는데,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냐면 교만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꾸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가 못 알아들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못 듣고, 못 이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에 주님의 역사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삶에서 주님을 느껴야 합니다.

이해를 해야 됩니다. 만나야 됩니다. 깨달아야 됩니다. 인식해야 됩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된 사람은 나중에 죽고나면

니가 나를 그렇게 인식했냐 니가 나를 그렇게 인정했냐

니가 나를 그렇게 만나고 깨달았냐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뽁작뽁작이 안되고 평안으로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문제가 없고, 자식이 잘되고, 몸이 건강하고, 교회가 크고, 재정도 풍부하고,

성도들이 한사람도 걱정 없는 그 속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세상살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는 마귀가 왕노릇 하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속기 마련입니다.

삶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어떤 때는 제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하고,

남의 머리카락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 지는 경우도 있고,

사물을 볼 때, TV를 보는 순간 순간에 하나님이 무엇인가 나에게 깨달음을 주시거든요.

그럴 때 삶에 그것을 많이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못느끼느냐.

나는 괜찬은 사람인데 그러면 못느낍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병 속에 들어가면 이세상의 모든 것으로는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느냐 망치라는 약이 있습니다.

그 망치로 한번 딱 맞으면 그 즉시 치유가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무리 좋고 비싼 약이라도

교만은 치유할 수 없지만 망치로 한번 딱 맞으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삶에서 많이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주신 환경 속에서 자꾸 깨달아야 되는데

히브리서4:16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삶에서 많이 만나고, 깨닫고, 이해하고, 배우고, 알아듣고, 인정하고,

내 삶에서 그래요 그래요 하기를 원하신 다는 거죠.

이것이 정말로 귀하고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절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하나님을 많이 느끼고, 만나고, 깨닫고, 인정하며, 고백하며

성경의 시편을 많이 쓸 수 있었을까요? 그 삶에 고달픔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이 아무일도 안 만났다고 하면 다윗도 그렇게 많이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고달픔이 있다든지,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든지,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고 할 때는 빨리 알아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네. 그렇게 고백하고 무릎꿇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 생기면 풀어보려고 산기도를 가고 금식하고

그것이 계급장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절대 그러면 안됩니다.

삶에서 우리 주님을 많이 깨닫게 되면 내 맘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느껴지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사울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압살롬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집안에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훈련받을 때 하나님이 또 이렇게 하시네 하고 많이 만났기 때문에

시편 150편중에 절반을 다윗이 쓴 것입니다.

얼마나 다윗은 하나님을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달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한자라고 나를 부르신다고 하면

삶에서 더 많이 느끼고 만나고 깨달아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삶에서 못 만난다고 하면 만나려고 기도를 하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옆에서 보면 그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은 응답도 빨리빨리 못 받는 사람입니다.

그죠. 그냥 느껴버린 사람은 금방 응답 받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면 마이크 소리가 넓게 퍼지잖아요. 그럴 때 어떤 하나님이 느쪄요? 여기서 말하면 크게 느껴지거든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내 말 좀 들어라. 내 말좀 들어.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가슴으로 크게 말하고 있어요. 그냥 말하면 목 아프니까 마이크로 내 말좀 들어라 내 아들들아! 누가요? 우리주님이 불러요. 그런데 마이크가 뭐냐. 아무것도 못 느껴요.

제가 말하니까 아 그렇구나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이런 식으로 자꾸 보면 보는 것마다 하나님이 느껴지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요.

나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걸 준비해 두셨구나. 이렇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렇게 많은 걸 놔 두셨는데. 저것도 주님이요. 요것도 주님이요. 이 소리도 주님이요.

마이크도 주님이요. 무엇이든지 다 주님으로 느껴봐요.

신명기에 보면 가나안땅에 동,철,나무 강산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했어요. 그것이 다 예수에요.

여러분들 지금 앉아 있잖아요. 앉아 있을 때 어떻게 생각이 들어요.

우리주님이 지금 내 밑에 나 앉게 하시려고 무릎꿇고 앉아 계세요. 어때요.

앉으면서 버릇으로 주여 하지 말고 나를 앉게 하시려고 주님은 무릎꿇으셨네.

그러고 나를 지금 앉게 하셨네. 나는 지금 그분 등에 앉아 있어요.

그런식으로 자꾸 주님을 느낄 때 우리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됩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왜 나한테만 그러냐는 불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만을 간절히 바라보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됩니다

세 번째는 주님을 삶에서 더 많이 깨달으려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가슴에 기억된 바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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