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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도회 헌신 예배
주님의 일만 잘되면
마11:1-10
우리는 가끔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가 저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가 헤매 일 때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 놓고도 정말 주님을 위해 잘한 일인가 그렇지 못한 일인가를 생각해 볼 때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성심 성의를 다 했는데 칭찬과 격려는 고사하고 여러 가지 서운한 말을 듣게 될 때 이런 생각을 더욱 더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위해 죽도록 일을 했는데도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 보기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던지 심한 욕을 당한 사람들을 만나 보게 됩니다.
히브리 기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히11:36-38)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즉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을 했어도 세상에서 얻은 것은 오직 고난과 죽음과 핍박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받아 드리기 어려운 주저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보상적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보다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끝까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믿음과 충성심을 더 높이 생각하고 존경합니다.
예를 들면 스데반이 그렇고 바울, 여러 사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갔던 그 길을 선택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의 신앙과 충성심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과연 우리 시대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끝까지 충성하여 칭찬을 들을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는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세상에 왔고, 들에서 자랐으며, 양떼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기에 별명이 [광야의 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정의와 회개를 외치며 산 사람입니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여기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잇습니다. 요1:32에 이하에 보면, "요한이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위로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에게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사도 요한이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거나 명패를 본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휘황 찬란한 빛을 가진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그 분의 머리에 임하는 것을 보고 그 분이 메시아인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이제 알고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이렇게 증거하고, 심지어는 요한과 안드레를 비롯해서 자기 제자 서너 명을 예수님께 양보까지 합니다(요1장).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신랑의 친구처럼 기쁘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로 큰 자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요한이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다른 이를 기다리니이까?"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정말 섭섭한 질문입니다.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만, "우리가 다른 이를 가디립니까?"라고 묻는 것은 도대체 지금까지 사도 요한이 무엇을 외치고 다녔는지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 주석가들은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메시아를 잘 본 것인지 아닌지 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세례 요한을 좀 두둔해서 좋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틀림없는데 그의 제자들이 많은 불평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메시아는 어디 계시며 우리 선생님은 왜 감옥에서 저러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는 제자들의 불평 때문에, 그러면 너희들이 직접 찾아 뵙고 여쭈어 보라고 그들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보냈다는 좋은 해석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마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61:1에 있는 말씀의 자유스러운 인용입니다. 이사야는 “(사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 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메시아는 반드시 이사야가 증거한 일을 하실 것이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내가 그런 일을 하는 메시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대하여 하신 말씀의 서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어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 극찬의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칭찬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부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곧 이어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비록 세례 요한이 나를 위한 훌륭한 선지자이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천국은 세상에 있는 세례 요한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극찬과 세례요한의 부족함에 대한 말씀을 동시에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은 세상에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이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도 작은 완전치 못한 사람이 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우리 자신들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대망 사상이 바로 이스라엘의 혼입니다. 대망 사상 즉, 메시아와 메시아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들이 경험한 모진 고난을 다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 메시아가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몰랐습니다. 그리고선 좌절합니다.
또 어떤 때는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때로는 믿었습니다. 큰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아! 굉장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셨다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곧 그 믿음을 저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여기에 큰 유감이 있는 것입니다.
왜 메시아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1).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2). 이유는 그들은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대로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기 사랑과 자기 교만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믿었다 가도 곧 그 믿음을 저버립니다. 기뻐하다가도 절망합니다.
(3). 자기 식의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백말을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는 대 장군, 모세와 같고 다위과 같은 겉치장이 화려하고 그 업적이 용맹한 정복자를 그들은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아니 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아니하므로 메시아를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으로 감격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곧 어떤 사건을 만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아니면 나를 버리셨는가 하면 믿음을 저버리며 원망을 합니다. 꼭 종잇장을 뒤집듯이 변덕이 심합니다. 왜 이렇게 시원찮은 휘청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보잘것없는 일을 해 놓고도 칭찬해 주지 아니한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는 사람들, 작은 일을 하고서도 천국에 상이 클 것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기회만 있으면 내가 이 교회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교회에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헌신을 해도 주님께서는 천국에서 작은 자 중에 작은 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감히 요한처럼 살지도 않으면서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까?
1.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것으로만 만족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 보았고, 메시아가 오신 것을 분명히 보았으면, 그것으로서 만족했습니다. 나의 처지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현재에 내가 어떻게 살든 간에 메시아가 오셨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이것만 가지고 그는 만족했습니다.
나 어렸을 때 우리 학교에 강단을 짖는다는 말을 선생님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6학년이 였기 때문에 강단을 지어도 그 강단에 들어가는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단을 지으면 뭣해 들어 가 보지도 못하고 졸업할 것을------’하고 시궁퉁이 생각한 일이 있었는데 그게 영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눅2:29이하에 보면 시몬이라는 나이 많은 선지자가 오래 동안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메시아를 보게 됩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품이 안고 하나님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찬송을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보았고 품에 안았던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 즉,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기뻐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고 들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나의 처지가 감옥이냐 아니냐는 잊어야 했습니다.
2. 세례 요한은 감옥에 있어도 메시아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그렇습니다. “너희가 가서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세례 요한이 메시아의 일을 중단해도 주님을 통해 메시아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안심하고 기뻐하라는 전갈입니다.
“네가 감옥에 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다. 네가 죽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 여기서 메시아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라는 대답이십니다. 그리고 이적은 있었으나 세례 요한에게는 없었으며 기적은 있었으나 요한의 감옥에는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가 이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겐 다 있는데 나에게는 없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겐 축복이 있는데 내게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겐 은혜가 있는데 내겐 없습니다. 왜입니까?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요한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목 베임을 당해서 죽어 갔습니다. 그가 이미 고백한 대로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고 한 문자 그대로 썩어지는 밀 알이 되는 이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일은 꼭 내가 해야 하고, 축복을 받아야 하고, 내가 잘 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안 되면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입니까? 내 소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날 사랑하는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날 버리신 것입니까? 참 답답한 어린이 같은 신앙입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밀 알이 되고 나는 그 밀알로 인해 영광을 얻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되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죽음을 당해도 주님만이 흥해야 한다는 헌신이 참 헌신인 것입니다.
천국의 상은 고사하고 나 같은 죄인이 그 악독한 모든 죄를 다 용서 받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천국에 가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면서 주님 위해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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