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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 생애와 사상]

by 【고동엽】 2011.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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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1987년은 아브라함 카이퍼 탄생 150주년이었다. 화란에서는 작년에 신문과 잡지들에서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재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란에서는 카이퍼의 출생지인 마슬부이스에서 카이퍼의 특별 전시회를 갖는 한편 다방면의 글들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일본 칼빈 학회에서는 아브라함 카이퍼 세미나를 가졌으며 금번에는 R. E. S.의 Theologrcal Forisn에서 아브라함 카이퍼 특집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이 주최가 되어 카이퍼 전시화와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있어서 아브라함 카이퍼 만큼 개혁신학의 장을 크게 발전시키고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 그는 조국 화란에서 삶의 전 영역에 위대한 흔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개혁주의 교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카이퍼는 그의 생존시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찬사와 비평을 동시에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활동 범위는 너무나 폭 넓게 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신학자로서만 카이퍼를 볼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한 사역을 동시적으로 평가 할 때만 가능하다. 물론 아브라함 카이퍼 만큼 그 시대의 사상에는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상 속에는 19세기적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적 사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과 신학에 항거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왕권을 위한 칼빈주의적인 삶이 업적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이퍼의 영향은 모든 개혁 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카이퍼는 너무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반대한 사람들마저도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20년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가 서거했을 때 전 세계 120여개 신문들은 그의 타계를 애도하면서 '제 2의 칼빈이 잠들었다.'고 논평했으며, 그가 일생동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왕권을 위해서(Pro Rege) 일했던 위대한 신학자요, 교회 개혁자요, 정당의 총재, 국회의원, 수상 그리고 대 학자요, 교육가였고 한평생 필봉을 휘두르던 기독교 언론인이었다고 격찬하였다. 그는 칼빈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일반은총을 강조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10월 29일 화란의 마슬루이스에서 화란 갱신교회의 Dis Kuyper 카이퍼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라이덴 대학에 입학하여 더 브리스 교수에게서 성경원어와 문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신학부에서 스콜턴 교수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으며 약관 25세의 나이로 「요한 칼빈과 요한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 연구」한 제목의 논문을 쓰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6세에 결혼했으며 첫 목회지인 베이스드 교회로 부임해서 청년목사로 일할 때, 그는 여전히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의 신봉자가 되어서 목회하였다. 그런던 중 그 교회의 진실한 신앙의 부인이었던 발투스의 충고로 자유주의적인 현대신학에 회의를 품고,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오게 된다. 카이퍼는 한 젊은 여성이 그를 향하여 하나님 주권이라는 성경적이고 신앙 고백적인 도전을 했을 때 꺼꾸러지고 말았다. 그는 베이스드교회를 떠나는 마지막 설교에서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채로 목사가 되었고, 베이스드교회에 부임한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이제는 개혁주의 신앙에 불타는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즈음 카이퍼는 사상적인 스승이며 칼빈주의적 정치 운동에 동기를 부여했던 흐룬 봔 프린스터를 만나게 된다. 카이퍼는 우트레흐트 대 교회의 목사로 청빙 받고 이전 목회자와 다른 개혁주의자로서 새로운 발돋움을 한다. 흐룬 봔 프린스터의 문하생이 된 카이퍼는 칼빈주의적인 세계관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기독교인의 활동을 강하게 주장한 걸작인 「불 신앙과 혁명」이란 책을 읽음으로서 확신하게 된다. 1864년부터 카이퍼는 19세기의 위대한 칼빈주의 부흥운동의 충격을 주었던 노 정객 흐룬 봔 프린스터를 만남으로서 카이퍼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흐룬 봔 프린스터는 카이퍼에게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교회, 국가, 학문 그 밖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가능한 형태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항하여 나타나야 한다고 확신시켜주었다. 흐룬 봔 프린스터는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오자 교회와 국가에서 개혁주의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영적 지도자로서 아브라함 카이퍼를 지명하게 된 것이다.

그후 카이퍼는 A.R.P. 정당의 총재가 된다. 이 정당은 흐룬 봔 프린스터가 창설한 것으로 불란서 혁명이 하나님 없는 무신론적 바탕에서 이루어졌음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정당정책을 폈다. 그러나 본래 A.R.P. 정당은 대중들의 지지를 크게 받지는 못했으나 아브라함 카이퍼가 총재를 맡은 후에는 면모를 일신하여 중산층에게 인기있는 정당이 되었고 대중들에게 깊이 있게 파고드는 정당으로 활성화 되었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는 기독교 언론인으로서의 생애이다. 그는 1870년 A.R.P.정당 소속의 일간지로 스텐다드지를 창간하고 주필로 취임하였고 곧 이어서 기독교 주간지인 더 헤타우트지의 편집인이 되어서 약 50년간 필봉을 휘둘렀다. 그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 설교집, 명상록, 수필집, 시집, 논문 등이 일간지와 주간지에 고했던 글을 모은 것이었다. 평소 카이퍼의 지론은 하나님의 주권은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지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언론도 예의는 아니었다.


카이퍼의 사역은 거기에 머물지는 아니했다. 그는 국 공립대학의 무신론적, 반 기독교적 성향에 반하여 성경적인 기독교 사립 대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1880년에 뿌라야 대학을 설립하고 그 유명한 영역 주권을 제창하였다. 물론 이 사상은 그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니지만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흐룬 봔 프린스터로부터 배워서 발전시키고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영역주권이란 한 마디로 우주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 그 주권을 땅에 행사 할 때는 한 사람 또는 한 기관에 독자적으로 행사 할 수 없고 삶의 여러 영역들에 분산되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슨 어떤 영역에서든지 하나님이 거기에 주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역주권 사상은 비판적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상은 칼빈주의 시상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퍼의 생각은 복음이 인간의 전 생애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의 삶이 구체적인 삶 가운데 명백히  나타나야만 한다고 믿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은 그가 항상 즐겨 사용한 "Pro Rege(왕을 위하여)"라는 말로서 잘 표현되었다. 이 Pro Rege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적, 나아가서 그의 우주적 통치를 드높이자는 것이다. 이 주제는 환란 중에 있는 모든 나라와 모든 방언이 그의 왕권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이퍼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수상이 되었으며, 교수와 총장으로서 언론인으로서 기장으로서 언론인으로서 기독교 사회사업가로서 지칠 줄 모르고 일하였다. 그의 삶의 폭이 너무나 넓었기에 거의 손대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카이퍼를 단순히 조직신학자로서만 비판하거나 저울질하는 것은 카이퍼의 일부분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카이퍼 박사는 교육과 과학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공헌을 세웠다. 모든 종류의 혼합주의 원칙과 싸웠으며 반위(Antithesis)의 원칙을 세웠다. 즉 모든 삶의 체계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중생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지는 체계가 있다고 보았다.

카이퍼는 중생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칼빈주의적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기독교의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사상체계, 즉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것이 1898년 미국 프린스톤 대학에서 강의한 유명한 「칼빈주의 」란 제목이었다.

카이퍼는 신학과 과학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매일 매일의 삶도 하나님 중심으로 개혁되기를 원했다. 기독교인은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세상에는 예수님께서 이것이 내 땅이 아니라고 할 땅은 한 치도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카이퍼는 불을 튀기는 설교자로서, 교회의 개혁자로서, 신학자로서, 정치가로서, 교육가로서, 언론인으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가지고 일생을 그리스도의 왕권을 위해서 일한 위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는 평생에 2백23권의 책을 저술한 다작가로서 어느 분야에 손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 대로 그에게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학 방법에 있어서는 스콜라적인 요소와 19세기의 이상주의, 낭만주의 사상의 잔재가 엿보이기도 한다. 누구이던 허물이 없으리오마는, 그의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위한 웅장한 삶은 여전히 칼빈주의의 찬란한 별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 할 수 있다. 신앙의 이원론적 삶의 체계로 고민하는 한국 성도들에게 카이퍼의 칼빈주의적인 삶은 새로운 이정표를 주리라고 본다. (기독신보, 1988-10-29)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


1) 카이퍼, 개혁주의를 만나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10월 29일 네덜란드의 항구 도시 마슬라의스(Maasluis)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 네덜란드의 교회 모습은 다소 실망적이었다.
카이퍼가 성장할 당시인 19세기 중엽엔, 16,17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이 세웠던 6개의 대학 중 세 개가 없어졌고, 그 나머지 세 학교마저도 개혁신학이 아닌 자유신학을 따랐다.

카이퍼의 부친 역시 목사였다. 그 역시 그저 시대의 흐름에 거역하지 않던 국가교회 목사였고, 분명한 칼빈주의자가 아닌 다소 완화된 개혁주의 형태의 정통주의자였다.

카이퍼는 1855년 레이덴(Leiden)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과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이성을 높였던 근대주의(합리주의) 물결이 당시의 학풍을 주름잡았고, 카이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미 개혁신학은 하향세였고, 자유신학이 상승세였다.
레이덴 학교 역시 라우벤호프, 퀴에넌, 스콜턴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들의 수중 안에 있었다.
카이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
(라우벤호프 교수는 심지어 "나는 더이상 예수의 육체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신학교의 권유로 칼빈과 라스코의 교회관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되었지만, 카이퍼는 절대로 그 개혁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그에게는 교회에 대한 통찰력이 생겼다.)
비록 카이퍼는 그 논문으로 논문대회에서 금메달을 받는 영예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모더니즘적인 신학자로서 화려한 데뷔였다.

1862년 그는 레이덴 대학에서 스콜턴 박사의 지도를 받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유주의 신학자였던 스콜턴 박사는 1861년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쓴 것이 한 마디도 없다는 주장을 했다.)
카이퍼는 신학적으로 정통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이에 서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성경에서 계시하는 바 대로의 구세주나 중보자가 아니라, 자신의 확신에 따라 적대자의 손에 넘겨진 숭고한 순교자였다.

이런 카이퍼가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가...
1863년 여름, 그는 시골에 있는 베이스트 교회의 담임 목사로 취임을 하게 되었다(당시 25세).
카이퍼는 반(半)정통주의, 반(半)자유주의였고, 베이스토 교회의 교인들은 보수적인 정통주의 경향이었다.
그 교인들은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 젊은 목사에게 이런 충고 한마디를 했다.

"이 교회에서 목사님은 몇 명의 불평분자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특이하고도 비판적인 사람들입니다. 모든 목사들을 아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하찮은 지위의 사람들이니까 전임 목사님들처럼 그들에게 별 특별한 관심을 두지 마십시요."

이 '불순분자'들은 바로 개혁주의파 교인들이었다.
비록 그들은 '오래된' 개혁주의 신앙체계를 갖고 있었지만, 질서정연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인간적인 행위나 공로는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완전한 주권적 은총"만이 인정될 수 있다는 확신에는 타협할 줄 몰랐다.

젊은 카이퍼 목사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이들을 상대하면서 종종 논쟁도 벌였다.
하지만 그는 그 만남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고, 점점 그들의 호의를 얻어 논쟁이 아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카이퍼는 이 만남에서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겼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그의 반(半)정통주의적이고 반(半)자유적이었던 신학적 견해는 건전한 정통주의로 옮겨갔고, 본질적으로는 개혁주의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그간 막연하게 꿈꾸었던 교회개혁과 교회건설에 대한 꿈은 좀더 구체적으로 승화되었다.
카이퍼는 더 풍부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 지식을 얻기 위해 화란과 외국 신학자들의 책을 접하였고, 그렇게 칼빈과 재회(!)하게 되었다.

1866년에 출판된 라스토의 저작 두 권에 그의 라틴어 서문이 실리게 된 것을 계기로 그는 이미 지역교회 목사가 아닌 전국 국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당시의 지역교회에는 서로 다른 신앙고백을 가진 여러 부류의 교인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소위 '교회의 문제'가 항상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교회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재판소가 있었는데, 1867년 총회에서 각 지교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원칙(23조)을 발표함으로써 새로운 혁신의 바람을 가져왔다.
카이퍼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우리 자신을 위해 투표권을 지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일할 교회재판소에 권위를 부여해야 하는가? 23조를 시행하는 데에 대한 한 가지 질문'이라는 소책자를 통하여 이 문제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중요한 교회개혁활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암튼 베이스트의 카이퍼는 교회와 국가가 밀착되어 있었던 16세기의 칼빈 시대에 관심을 쏟으면서, 본의 아니게 정치학과 정부를 연구하게 되었다. (아직 본격적인 정치활동은 하지 않고 있었다.)
베이스트에서 목회와 연구에 힘을 쏟던 카이퍼는,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1967년 6월 위트레히트 교회의 청빙을 받는다.
그는 4년간의 베이스트 목회를 정리하고, 도시 위트레히트로 진출하게 되었다.

카이퍼는 그를 변화시킨 베이스트 교회의 개혁주의자들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를 보내는 것을 섭섭해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카이퍼를 영적인 아들로 여겼던 발투스란 여인의 슬픔은 더했을 것이다. (카이퍼는 그들 중 그녀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2) 교회 개혁과 정치 입문

카이퍼는 1862년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로 베이스트, 위트레히트, 암스텔담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자유주의 신학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조그마한 시골 베이스트에서 개혁주의를 맛보게 되었고, 그의 신학에 있어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867년(30세) 위트레히트라는 도시로 사역지를 옮긴 카이퍼는 드디어 '교회개혁'이라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가지각색의 신앙고백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각지역의 국가교회에서 정통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교인들이 합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썼다.
그의 주도적인 제안으로 위트레히트 재직회는 전체 교회(교단)에서 시행하는 형식적인 교회 시찰을 거부하고, 영적인 실체를 빼놓고 일상적인 설문조사로 방관하는 총회를 비판했다. (재직회는 교회시찰을 위해 총회에서 보내온 설문조사에 응하지 않고 설문지를 돌려보냈다.)
이러한 반항은 교회언론, 신문 등에 대서특필 되어 급속도로 전국을 술렁이게 했고, 찬반 양론이 펼쳐지면서 국가교회는 그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1867년 3월 1일 발표된 23조에 의해 시행된 1868년 교회선거의 결과는 카이퍼를 비롯한 정통주의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전국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장로, 집사들이 아니라 정통주의자들이 선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는 최종적인 승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전포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승리는 투표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들이 많아서였지 결코 정통주의자들이 우세해서가 아니었다.
또한 보수적이고 낙관적인 많은 정통주의자들은 카이퍼의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견제하였다. (그들은 '심각한' 싸움을 원치 않았다.)

카이퍼는 교육제도, 즉 학교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서 국공립학교로부터 독립하려는 기독교국가교육협회에 참여하여 개혁주의적인 기독교 학교운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 때 그 협회의 명예회장이었던 흐룬을 만났다.
젊은 카이퍼는 67세의 흐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흐룬은 그런 카이퍼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흐룬은 카이퍼 박사를 반혁명당의 장래 지도자로 지목하였고, 카이퍼는 반혁명당을 지지하여 1869년 국민 선거를 치렀다. (그 국민선거의 주관심사는 학교문제였다.)

그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카이퍼는 정치적,종교적 주간지인 헤라우트(De Heraut)지의 협동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비전(!)을 펼쳐나갔다.
그는 이제 종교계, 교육계, 정치계, 언론계를 아울러 목소리는 내며 '개혁'하기 시작한 것이다.
1870년 암스텔담 국가교회에서 청빙하기까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위트레히트에서 너무도 많은 일들을 벌여나갔다.

카이퍼 목사는 암스텔담 교회에서 쉬지않고 일했다. 지교회뿐만 아니라 화란 국가교회 전체를 정화하고 회생시키려는 노력을 쏟았다.
암스텔담 고아원은 모든 종교적인 예배와 그들의 종교적인 수양은 정통주의적으로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872년에는 17명의 장로들이 자유주의적인 목사가 집전하는 모든 종교적인 예배, 예식 그리고 기념식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여,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 카이퍼 박사는 이 때에도 양측의 주장을 분석하여 객관적인 태도로 자유주의자들의 항변을 분쇄했다.
그는 또 교회재판소에서 정통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구성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모임을 조직했다.

헤라우트지의 편집장이 된 1870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와 민족의 생명에 대한 기초가 된다고 인정하는 자들로 구성된 헤라우트 협회를 만들어 헤라우트지를 매입하고 그의 종교적, 교회적, 정치적 견해를 알리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871년 1월 6일 발행된 첫신문에서, 국가교회 총회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세례를 주거나 그밖에 적합한 말로 세례줄 수 있다고 공표한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 마28:19)
이에 전국에서 많은 정통주의 목사들의 총회에 대한 반발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진짜'들을 가릴 수 있는 계기였을 뿐이고 그의 외로운 투쟁은 계속되었다.

1871년 카이퍼 박사는 "모더니즘, 기독교 세계에 있어서 신기루"라는 제목의 강연을 시작했다. 그 강의를 통해 그는 모더니즘(자유주의)의 체계를 정면공격하였다.
또 그 해 화란 개혁주의 선교협회의 연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교를 강조하였다.

독일과 화란의 개혁교회 연합모임이 300주년 되는 1868년 그 모임을 기념하여 개최를 시도했다가 연기가 되어 1872년에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 유형은 자유주의로부터 개혁주의자에 이르는 모든 분파를 포함하고 있어서, 그들이 300년 전의 개혁주의적 모임을 기념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러웠다.
1872년 모임에서 발언권을 얻은 카이퍼는 많은 참가자들의 야유와 방해를 무릅쓰고 그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렇게 카이퍼 목사는 계속 외롭게 싸워나갔다.
교회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회(총회?), 여당 성직자들, 교회위원회들, 교회재판소, 교인들은 교회개혁을 원치 않았다.
영향력있는 많은 목사들은 역시 그 일을 거들지 않았다.
단지 암스텔담 교회의 소수 개혁주의자와 철저한 정통주의자들만이 그의 사역을 높이 인정해 줄 뿐이었다.

1874년 봄... 그가 국회로 나서기까지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치적 관심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공포증은 칼빈주의적인 것도 기독교적인 것도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3) 본격적인 정치활동

1869년(32세) 우트레히트 중앙교회에서 비국립학교 설립 문제로 흐룬(칼빈주의적 정치노선을 지녔다.)을 처음 만난 카이퍼 박사는, 1871년 흐룬이 이끄는 반혁명당의 국회의원 후보자로 나섰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당시 정당활동에서 언론(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데 비하여 반혁명당은 그들을 지지하는 신문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때(1872년) 카이퍼가 주도하는 헤라우트 협회는 주간지였던 헤라우트지를 슈탄타르지라는 일간지로 재창간하였고,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언론활동을 벌였다.

1873년 그는 반혁명당의 임시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선거전을 전개하였고, 그 선거에서 반혁명당은 인상적인 결과를 얻었다. 비록 '하우다'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카이퍼가 본선거에서 지고 말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1874년 카이퍼는 하우다 주의 중간선거에서 승리하여 하원의석을 차지하였다.
국회의원이 된 그는 국회의원과 목회를 병행할 수 없다고 규정한 헌법에 의해 명예퇴직을 했지만, 교회의 내부개혁을 위하여 피택장로가 되었다.

36세의 국회의원 카이퍼는 먼저 '교육의 자립(비국립학교 문제)'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리고 노동법 제정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연설과 슈탄다트지를 통한 정치 활동은 적절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그럴수록 반대자들의 중상모략과 적대감정은 더해만 갔다.

급기야 그는 1876년 2월 심각한 신경쇠약에 빠져서 모든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편집장으로서 두 신문의 기사를 쓰고, 편집을 해야했고, 그를 향한 정치적 공세는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선거는 교회개혁을 후퇴시키는 결과로 진행되고 있었고, 고등교육법안은 자유주의의 기반을 뒷받침해 주었으며, 목회활동을 이은 정치활동은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는 힘든 상황에서 너무 자기 몸을 혹사시킨 것이었다.

결국 의사의 충고에 따라 카이퍼는 스위스 등지로 약 15개월간의 '휴양'을 떠나게 되었다.
1877년 5월에 화란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계획을 재정비하고서 7월 국회의원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진 그를 암스텔담 교회가 청빙하였지만 그는 모든 청빙을 거절하였다.
슈탄다트지는 그를 편집국장으로 위임하였고, 그는 계속해서 정치적 소신을 지켜나갔다.

그때까지 계속되었던 정치적 사회적 이슈는 단연 비공립학교에 대한 것이었다.
정부는 비공립학교에 재정지원을 할 수 없다는 기존입장을 재확인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을 옹호했고, 카이퍼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육협회는 병폐를 낳고 있는 국공립학교에 맞서기 위해 싸웠다.
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비공립학교를 억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세상을 떠난 흐룬의 뒤를 이어 반혁명당은 카이퍼를 지도자로 지명했다.
카이퍼는 이때 당시의 정당들이 할 수 없었던 혁신적인 일을 해내었는데, 바로 당조직과 정강을 갖춘 정당을 만든 것이었다.
반혁명당은 '원칙'있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카이퍼는 그것을 위해 슈탄다트지의 영향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1879년 국민선거에서 반혁명당은 11석의 하원을 당선시켰다.
관례상 정당 지도자가 하원의석을 차지해야 했지만, 카이퍼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흡족하였다.

그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나아갔다고는 하나, 카이퍼가 교회개혁에서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암스텔담 교회 선거위원회는 그를 장로로 임명하였고, 그는 다시 교회재판소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되었다.

그의 교회적,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이제 개혁주의 대학의 설립이라는 수순을 밟기에 적절하게 준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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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그의 동료들을 이렇게 독려했다.
"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4) 자유대학교 설립

카이퍼 박사가 신경쇠약으로 남부 유럽에서 요양을 하고서 1877년 5월 화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립학교에 대해 재정 보조를 하지 않겠다는 헤임스케르크 내각의 고등교육 법안이 입법화가 된 이후였다.
물론 그 법안에는 학교에 5개 학부(교양, 신학, 법학, 의학, 자연과학부)를 설치한다는 조건으로 사립대학 설립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는 했다.
개혁교회들은 모더니스트들이 판치던 대학 신학부의 폐지를 주장하였지만(순수한 신학교 설립의 방편을 위하여), 자유주의자들을 옹호하던 국회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학'이란 명칭을 유지한 채 '종교학'을 가르치면서도 기존의 대학에서 신학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신학과 종교학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정부는 국가교회 총회에서 지명하는 교수들을 재정 지원하도록 하였으나, 그 대상이 된 6명의 교수들 중 5명이 자유신학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퍼는 '온건하고 자유로운 칼빈주의적 국가대학'의 섭립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가 꿈꾸는 대학은 신학부만을 포함한 신학교가 아니었고,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회복과 정화를 이룰 기독교 대학이었다.
그리고 소유, 운영, 통제 등에 대하여 어떠한 외부 간섭도 허용하지 않는 '자유'를 갖기를 원했으며, 하이델베르트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를 신학교육의 토대로 인정하는 개혁주의적 학교여야 했다.
또한 그 학교는 국가의 장래를 책임지는 국가대학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주어진 여건은 아주 나빴다.
재원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았고, 학교 이념에 맞는 헌신된 교수들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졸업 후 뚜렷하지 않은 장래를 보면서 그 학교에 지원할 학생들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1878년 12월 5일 개혁주의 원리에 기반을 둔 고등교육협회가 우트레히트에서 조직되었다.그리고 3개월 뒤 협회규칙을 국왕에게서 동의받았다.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이퍼는 헤라우트지와 소책자 발행 등으로 논쟁을 벌여나갔다.
암스텔담을 대학 설립 도시로 채택을 하고서, 1879년 11월 7일 지도위원들은 카이퍼 박사와 루트헤르스 박사를 대학의 신학부 교수로 미리 임명하였다.
그리고 두 교수는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힘썼다.

드디어 1880년 10월 20일 '자유대학(Free University)'을 개교하였다.
카이퍼 박사는 "삶의 각 영역에 있어서의 주권"이라는 제목으로 개회 연설을 했다. (카이퍼를 자유대학의 설립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의 넓은 이상, 그의 박력있는 지도력, 그의 훌륭한 설득력, 그의 강력한 영향력, 그의 탁월한 조직력, 그의 엄청난 추진력 때문이다.)

1880년 12월, 자유대학은 5명의 교수와 5명의 학생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카이퍼 박사는 자유대학의 초대 초장으로 섬기면서, 주로 조직신학과 '신성한 신학의 백과'를 강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설교학, 화란문학, 미학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881년 10월 20일 그는 루트헤르스 박사에게 총장직을 넘겨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파괴적 영향력을 끼치는 현대 성서비평"이라는 연설로 아브라함 커넌(한때 카이퍼의 교수였던)을 태두로한 자유신학의 성경파괴운동에 대항하였다.

카이퍼 박사는 1880년대에 학교와 신문을 통해서 방대한 종교, 신학 저술을 펴냈다.
자유대학에서 계속된 강의와 "철과 진흙", "두 왕국", "칼빈주의와 예술" 등의 연설은 국가와 교회를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아주 적절했다.
헤라우트지(종교 주간지로 변경하고, 정치적인 부분은 슈탄다트지에서만 다루고 있었다.)의 운영 편집장이었던 그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약 3년 동안의 논설 연재를 이었고 이것을 1889년에 3권의 책으로 인쇄하였는데, 성령의 사역을 통일되고 체계적으로 해명한 최초의 화란 신학자가 되었다(프린스톤 대학의 워필드 교수와 견줄만한).
또 그 신문을 통해 계속된 명상록을 출판했고, 화란의 교회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전했다.
또 "말씀에서", "안식일", "야곱의 열 두 사람" 등의 논문을 출간했다.

1890년대에 자유대학의 학생수는 90명에 이르렀다. (1890년에 화란의 3개 국립대학의 총 학생수는 1,800명이었다.)
학교는 교수도 부족했고, 의학부와 자연과학부도 신설해야 했다.
자유대학은 재정적으로도 빈약하고 법적제한이 비참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괄목할 만한 신뢰감을 심어 주었다.

카이퍼가 1880년대에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사실 상상하기 힘든 결과이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자유대학 2개 학부에서 강의하였고, 교회개혁 운동의 주요 역할을 담당했고, 일간지인 슈탄다트지를 편집했고, 또한 1890년대에 나올 책들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광범위한 서신교환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무엇이 바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는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개혁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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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청년들에게 전투적인 삶과 자기부인의 삶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는 그들에게 목회를 통해서 재정적인 보장을 받게 하거나 목회자적 향취에 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넘어서 그들에게 찾아오는 십자가의 영광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 청교도들처럼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할 화강암과 강철 같은 자들을, 구약의 언약을 믿던 자들처럼(모리스의 말을 빌려) 만일 필요하다면 살아있는 마귀와 직접 전투를 벌이려 하는 자들을, 평안하고 안정되며 존경받는 자리를 선망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전쟁을 담대히 싸우며, 주의 이름을 위해 부끄러움과 비난에 처한다고 해도 밤중에라도 찬양을 드리는 자들을, 한마디로 말해서, 총회 소속이나 친구시늉하는 자들의 호의에 자신의 희망을 두지 아니하고 도리어 성령과 능력에 충만하여 여러분들이 자신을 부르신 그분을 믿는 것처럼 믿는 자들을 훈련시키기를 원합니다."
- 1882년 7월 5일 고등교육협회 정기대회 기도회 설교 中에서



5) 교회 개혁을 위한 투쟁

국왕의 칙령으로 화란의 전국 신교교회가 '국가교회'로 바뀐 것은 1816년이었다.
총회가 지도하는 그 체제는, 1852년의 헌법 23조를 보완하여 1867년에 민주주의적인 방식(교회 선거를 통한 대표자 선출)을 교회에 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개혁주의에서 자유주의와 그 신학으로 흘러갔다.
1880년에는 화란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4백만명)이 국가교회에 등록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교회 총회는 1883년에 목사 후보생들이 연합의 3형식(the Three Forms of Unity;하이델베르크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에 따라 설교하겠노라고 하던 서약을 삭제하였다.

이에 대해 '23조'에 의해 미약하게나마 교회재판소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개혁주의자들은, 카이퍼 박사가 주도하는 암스텔담 교회재판소를 중심으로 힘을 모았다. (1883년 당시 46세)
(암스텔담 교회는 시단위 조직으로 28명의 목사, 138명의 전체재직회, 165,000명의 전체교인, 10개의 예배당, 4개의 부속예배당이 있었다.)
그리하여 개혁주의적 신앙고백을 기준으로하는 전국규모의 대회를 암스텔담에서 가졌고, 여기서 총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연합의 3형식'에 서명하지 않는 자들은 목회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렇게 드러난 암스텔담 교회재판소와 교회당국 간의 갈등은, 목회 자격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견신례' 문제로 확산되었다.
교회에서 성찬 참여와 같은 실질적인 권리를 주는 견신례를 교회재판소에서는 목사와 한두명의 장로를 대표로 하여 그 후보자를 심사하도록 했는데, 1867년 이후 교회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통주의, 개혁주의 성향의 장로들 때문에 자유주의적인 목사들은 자유주의적인 청년들에게 마음대로 견신례를 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총회는 종교적 견해로 인해 행실이 바른 신앙고백자들이 성도의 교제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없다고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정통주의적인 목사와 교회재판소에 속해 있는 자유주의 청년들도 이웃의 자유주의적 교회재판소에서 '선량한 도덕적 증명서'를 받아 슬그머니 교회로 들어올 수 있었다.

1884년 후반 암스텔담 교회에는 세 명의 자유주의 목사가 있었는데, 이들에게 견신례를 받고자 했던 후보자들이 장로들의 참석 거부로 인정받지 못하자 그 부모들은 교회재판소에 항의했다.
교회재판소 역시 장로들의 편을 들자, 1885년 3월 그들은 다른 '우호적인' 교회재판소에 증명서를 요구했고 그 교회에서도 신앙고백이 없는 자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급기야 이들은 고전이사회와 주 이사회에 청원하였는데, 1885년 10월 24일 주 이사회에서는 6주 이내로 이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가교회 조직상 권위는 '총회'-'주 이사회'-'고전이사회'-'교회재판소' 순이었다.)
11월 5일 처음으로 그 소식을 접한 암스텔담 교회재판소는 자기들의 소견도 듣지 않고 내린 결정에 반발하여, 총회에 백지화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고 요히려 1886년 1월 8일까지 증명서를 발부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12월 3일 암스텔담 교회재판소는 총회에 증명서 발부 문제에 관한 제안을 제출했는데, 이는 찬성자들이 제명이나 정직도 당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12월 14일에 모인 전체 교회재판소에서 교회 운영권 확보를 위한 41조 개정을 80명의 찬성표로 채택하였다.

암스텔담 교회재판소와 당국간의 갈등은 깊어갔다.
1886년 1월 4일 오전에 소집된 고전이사회는 136명 중 80명의 교회재판소 회원(카이퍼 포함)을 정직시켰다.
그 날 오후, 56명으로 구성된 교회재판소는 재빨리 증명서 발부 문제를 해결해 버리고는 교회재판소의 문을 닫아버리고 물리적으로 제지하였다.
1월 10일 주일, 정직된 5명의 목사와 카이퍼, 그리고 그 동료들은 예배에 직접 참가하지 않고 강당을 빌려 '성경강독회'라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1886년 내내 계속되었고, 곧 열렬한 반응 속에 여덟 개의 강당에서 주일마다 초만원으로 모였다.
그리고 조직된 교회의 예배가 아니었기에 목사들은 성례를 행하지 않았는데, 병때문에 교회재판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 정직을 면했던 레니어 목사가 설교하는 암스텔담 국가교회 예배 때에 개혁 그룹 구성원들은 성례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카이퍼와 동료들은 국가교회 예배당을 물리적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굴복도, 혁명도 원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80명 중 5명이 교회로 돌아갔고, 3월 15일 고전이사회는 75명의 암스텔담 재직회원의 파면을 지방이사회에 제안했다.
7월 1일 지방이사회가 이를 인준했고, 9월 24일 소총회가 지방이사회의 결정을 인준했으며, 12월 1일 전체총회는 75명의 면직을 확정지었다.
이로써 국가교회는 개혁주의자들에게 쓴맛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을 합법적인 교회재판소라고 여기는 75명의 임원들은 이를 계기로 총회 조직과의 연대를 끊었다.
1886년 12월 16일 카이퍼가 쓴 소책자를 통해, 암스텔담 교인 7,000명이 75명의 임원들을 교회의 정당한 교회재판소로 인정하게 되었고, 교회재판소는 이제 정규적인 설교, 성례집행, 기타 교회기능을 회복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추어 1887년 1월 또다른 집회를 소집했는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행동을 회피하는 자들을 배제하였음에도 암스텔담에서 300명, 다른 지역에서 1,200명이 참가했다.
이러한 자율적인 지역교회는 '연합의 3형식'과 도르트 교회모범을 따라 생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1887년 집회 후 200개의 회중교회가 10만명의 전교인과 함께 국가교회를 떠났다.

곧 국가교회는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개혁그룹'에게서 교회건물을 빼앗는 일은 흔했다.
개혁주의 입장의 세입자들을 교회 소유의 집들에서 쫓아냈다.
총회주의자들은 교회서적과 문서, 기록을 찾으려고 집들을 뒤졌다.
시당국은 시민 보호를 거의 포기하였는데, 심지어 깡패들이 개혁그룹 사람들을 습격해도 놔두었다.
총회와 이사회는 시장, 경찰, 군인, 지역 선동가, 언론들의 지원을 받았다.
1888년 6월 15일, 화란 최고법원은 개혁그룹의 교인들과 교회가 교회건물, 기금, 기타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고 판결했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개혁그룹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영향력 있는 정통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은 그와 같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당시 카이퍼의 활동이 교회 내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비판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카이퍼는 반혁명당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교회개혁 운동의 지도자들 역시 반혁명당의 대표인물들이었다.
당연히 그 반대자들은 왜곡된 보도, 편벽된 편집 등으로 정치적인 공세를 펼치면서,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카이퍼와 그의 조직이 국가 분열을 조장하여 교회의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려고 한다고 흠집을 내었다.

또한 카이퍼와 그의 동료들은 자유대학의 유력인사들이었다.
총회주의자들은 카이퍼가 교회 내에 분열을 조장해서 그 졸업생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려고 한다고 과장된 비난을 했다. (1885년 자유대학에는 단 한명의 신학부 졸업생도 없었는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카이퍼의 지도력을 꼴사납게 여겼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카이퍼 박사는 헤라우트지와 슈탄다트지를 통해 진정으로 교회개혁에 관심있는 자들을 설득하고 인도하였다.
1888년에 그는 "위협적인 대결", "대결은 도래했다"라는 두 소책자를 발행했다.

그의 투쟁은 이렇게 점점 치열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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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 면직 직후, 경찰당국의 계속된 신변보호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6) 정치지도자 카이퍼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정치 형태는 상하원이 있는 내각책임제였다.
그리고 자유당, 보수당, 카톨릭당, 반혁명당의 구도로 정당체제가 자리잡혀 있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자유당과 보수당이 주로 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서로 정권을 주고받았다.
자유당과 카톨릭당, 그리고 보수당과 반혁명당이 자주 연합하였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립학교 등의 문제로 인하여 자유당, 보수당의 좌파와 카톨릭당, 반혁명당의 우파 간의 대립이 생겼다.
카톨릭당과 반혁명당은 서로 기독교나 정치 철학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지만, 사립학교 설립 같은 문제에 있어서 충분히 뜻을 모을 수 있었다.

1879년 11명의 의석을 차지한 반혁명당은 카이퍼의 주도적인 활동하에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883년 선거에서 반혁명당과 카톨릭당의 우파는 86명 중 37명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7년 하원 의석수가 86명에서 100명으로 증가되면서 판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1888년(51세) 선거에서 반혁명당은 28석, 카톨릭당은 26석을 얻어 모두 54석으로 과반수를 넘었고 막케이 수상이 이끄는 연대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막케이 수상은 곧바로 국민학교(국공립) 교육 법률안을 고쳤다.
비록 많은 지원금은 아니었지만 사립학교에도 정부가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처음으로 국회가 공립학교와 비공립학교의 평등을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1891년 다시 자유당이 52석을 차지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반혁명당은 20석을 차지하였는데, 이제 반혁명당은 군소정당이 아니었고 한 목소리를 내며 여론을 움직이는 어엿한 국정 파트너였다.
"Patrimonium"이라는 화란 기독교 노동자 협회는 반혁명당과 연대하여 카이퍼 박사를 지도자로 지목했다.

카이퍼는 신학자이자 대학 교수이다. 그리고 교회 개혁 운동가였고, 정당 당수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 정치 분야 언론인이었다. 정력적인 연설가였고, 많은 책을 쓴 저술가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못다 이룬 비전들...

당시 카이퍼를 비롯한 반혁명당 인사들에게 쏟아진 비난도 있다.
"칼빈주의자들과 카톨릭교도들이 무슨 연합이란 말인가!"
카이퍼 자신도 흐룬이 반혁명당을 이끌었던 정치 입문 시기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이지 않았었다.
정치 연합은 사상 연합이 될 수 없다.
신학적으로 카톨릭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연합한다는 것은 카이퍼 박사에게는 또다른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뜻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그의 연설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사람들을 끓게 만들었다.

이제 그도 50세가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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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당이 십자가의 기치 아래 모여서 개인적인 명예나 권력, 고관직이나 금전욕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 영광스런 미래, 조국의 신앙적인 구원을 위해서 영웅답게 전쟁에 임하게 되고,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순교자의 피가 물들어져 있는 이 땅에서 그에게 대적하기 보다는 할렐루야 하고 외치며 주를 찬양하는 사람들을 찾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1891년 5월 반혁명당 전국대회 연설 중에서



7) 각 분야에서의 헌신적 활동

1891~2년(55세) 카이퍼 박사는 다시 자유대학 총장으로 봉사했다. (1년 임기의 총장직으로, 그에게는 이번이 세번째)
그는 신학교수였지만, 그의 교수활동이 신학분야의 역할을 모두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수많은 강의와 저술, 그리고 연설 등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헤라우트지라는 '자유발언대'가 있었다. (헤라우트지는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주간지였고, 슈탄다트지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일간지였다. 모두 카이퍼가 편집장이었다.)
보다 더 일반적인 주제를 가지고 개혁주의적 신문 논설을 통해서 대중을 깨우쳤고, 오히려 그의 많은 책들은 그 논설들을 모아 책자로 발간한 것들이었다.

1886년 카이퍼를 중심으로 국가교회에서 탈퇴하여 형성된 개혁주의 그룹은, 그동안 기독교 개혁교회(1830년 조직)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개혁주의자들과 이제 같은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교회 연합을 이루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 통합에 장애가 되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 개혁교회 소속의 캄펀 신학교(여기엔 그 유명한 헤르만 바빙크 교수가 있었다.)와 카이퍼가 이끄는 자유대학이 서로 공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개혁주의의 통합에 따라 카이퍼라는 강력한 인물이 통합된 교회의 독재자로 군림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에 화란 개혁교회라는 정식명칭으로 개혁주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기독교 개혁교회 400개와 1886년 회중교회 300개의 연합)

1894년 투표권의 대폭적인 확대를 두고 갈등을 빚던 카이퍼와 로만(자유대학 법학부 교수이자, 반혁명당 하원의원)은 결별을 했다.
로만은 반혁명당을 떠나 자유 반혁명당을 세워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로만은 1896년에 자유대학 교수직도 물러났다.)
그토록 자신에게 등원을 요청하던 로만이 떠났는데, 결국 카이퍼는 다른 이유에서 1894년 슬리트레히트 지역 하원의원이 되었다.

(1895년에 카이퍼 박사는 루트헤르스 박사, 바빙크 박사와 함께 현대어법의 언어로 된 성경을 발간했다.)

1896년 화란 개혁교회 총회는 훗날 개혁주의 선교의 대헌장으로 유명하게 된 선교원칙을 채택하였다. (이때에도 카이퍼는 헤라우트지를 통해서 선교의 올바른 위치를 역설하였다.)

1897년(60세) 슈탄다트지 창간 25주년 행사는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았다.
캄펀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헤르만 바빙크 교수가 연설을 하였고, 가톨릭당의 지도자였던 스카에프만 박사는 카이퍼를 '우리 시대 최고의 언론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 기념일엔 모든 화란언론이 경의의 표시로 휴간을 단행했다.

1897년 6월에 투표권을 확대하여 치루어진 선거에서 좌파(자유당,사회주의당,급진주의당) 55석, 우파(반혁명당, 자유 반혁명당, 가톨릭당) 45석으로 자유당 중심의 내각이 구성되었다.
카이퍼는 이 선거에서도 하원에 등원하게 되었고, 자유당은 점점 기반을 잃고 있었으며, 로만이 이끄는 자유 반혁명당은 반혁명당이 석권하지 못한 진영에서 지지자를 확보함으로써 오히려 우파를 강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1898년 8월 카이퍼는 미국을 방문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명예 법학학사 학위를 받았고, 10월 그 대학에서 6개의 칼빈주의 강의를 했는데, 이것은 아직도 고전으로 남아 있다.

1898~9년 그에게는 이제 네번째인 자유대학 총장직을 수행하였다.
1899년 그는 그의 아내와 사별하였다.

1899년 헤이그에서 세계사상 최초의 평화협정이 있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의 보어족에게는 초대장을 발송하지 않았는데, 카이퍼는 하원회의, 국내외 신문기사, 서신 등을 통해 그에 대해 강력하게 반박했다.
곧 보어전쟁(영국이 침공)으로 그 이유가 드러나자 그는 슈탄다트지를 통해 유럽내외의 여론을 보어족을 옹호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1901년은 4년마다 열리는 선거가 있는 해였다.
4월 1일, 반혁명당 전국대회 의장으로 나선 카이퍼는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전쟁은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자유주의자의 정책 속에 스며있는 정치적 문제 및 정부문제에 있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정신입니다.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극도로 혁명원리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회민주당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하게 정치학과 실제 정치에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거만한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선거에서 우파가 58석, 좌파가 42석을 차지했다.
반혁명당이 24석, 자유 반혁명당이 7석, 가톨릭당이 25석, 프리즐란드 기독교 역사주의당이 1석, 기독교 역사주의당이 1석을 차지했고, 자유당을 정치 교두보에서 몰아내고 말았다.

빌헬미나 여왕은 새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카이퍼 박사를 초청했다.
카이퍼는 수상 겸 내무상을 맡았다.
1901년 8월 카이퍼 내각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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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 하원에서 인간의 불행한 일과 싸우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보험제도를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려 합니다." - 1899년 10월 25일 하원 연설 중에서



8) 수상이 된 카이퍼

1901년 8월, 64세의 카이퍼 수상이 이끄는 내각이 출범했다.
1888~91년, 반혁명당과 가톨릭당의 연립정부였던 막케이 내각 이후 다시 우파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반혁명당(24석)과 가톨릭당(25석)을 주축으로 한 연립정부였다.
카이퍼는 수상직에 전념하기 위해, 자유대학 교수, 헤라우트지 편집장, 하원의원 등의 직무를 그만 두었다.

1902년 빌헬미나 여왕의 중병으로 인하여, 그 해 9월 그녀가 회복될 때까지 화란은 비상사태나 다름없었다.
국회의 입법과정이라든가 여러가지 국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는 여왕이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 자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였고, 카이퍼 내각은 집권 초기부터 이런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런 중에도 카이퍼는 보어전쟁(영국-남아프리카 보어족간의 전쟁)을 중립적인 위치에서 효과적으로 중재하여, 1902년 5월 31일 페어에이닝힝 평화 조약을 이끌어내었다.

1903년 1월 9일 수로 운수회사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약 3개월간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문제는 수로 운수회사 노동조합과 철도회사 노동조합이 서로 얽혀서 야기된 것으로, 결국 철도회사의 파업으로 이어졌고, 전국적으로 확산된 이 파업에는 국가적 내분의 양상까지 나타났다.
이 파업은 점차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놀아나게 되었다.

이에 카이퍼는 2월 24일 반철도파업법을 국회에 제출함으로 대처하였고, 사회민주당, 자유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조직한 저항위원회가 이 법안의 제정을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4월 11일 그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으로 화란에는 철도파업이 재발되지 않았고, 이 법률은 아직도 화란 법전에 남아있다고 한다.)
사회주의자 장관이나 노동운동조차 이 법안을 반대하지 않았고, 카이퍼는 계속해서 노동자들의 법적지위와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입법화를 추진하였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했는데, 동인도지역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화란은 중립정책을 견지했다.
이로 인해 또다시 카이퍼 내각은 업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기간에 카이퍼 내각은 아주 인상깊은 업적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등교육법의 입법이다.
카이퍼 수상은 1903년 3월 11일 '국가적 자격'이라고 불리는 법적 지위를 일정한 규정조건과 적절한 제도 아래서 비공립대학의 학위와 성적에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고등교육법안을 하원에 제출하였다.
이는 유일한 비공립대학이었던 자유대학의 폐지만을 바라던 자유당과 사회주의당의 즉각적인 반발을 촉발시켰다.

이 법안은 국회에서의 심한 논란 끝에 1904년 3월 24일 우파(56-1) 대 좌파(40+1)의 양상으로 하원에서 통과되었지만, 좌파가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원에서는 7월 14일 27 대 22로 부결되었다.
이에 카이퍼 내각은 상원 해산을 결심하였고, 여왕이 이에 동의하여 7월 19일 상원이 해산되었다.
8월 3일 열린 상원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정부는 다시 법안을 제출하였고, 1905년 3월 9일 하원에서는 58 대 38로, 5월 20일 상원에서는 27 대 15로 이 법안을 채택하였다.
이제 자유대학을 비롯하여 이후에 설립될 어떤 비공립대학도 국립대학들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학교가 국가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카이퍼의 지론에 의한 것이었고 이 고등교육법은 그의 가장 위대한 입법상의 업적으로 대표된다.

흥분되고 혼란스러운 4년간의 임기동안 카이퍼 내각은 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였다.
반혁명당을 탈당했던 로만 역시 카이퍼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이는 야당에게는 지극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애써서 카이퍼 내각의 업적을 과소평가하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1905년 선거전을 자유주의 대 카이퍼의 구도로 몰고갔다.
좌파 정당들은 반(反)카이퍼 연대를 형성하여 카이퍼를 혹평하였고, 그를 흠집내기에 열성을 다하였다.

1905년 카이퍼는 반혁명당 국가위원회 의장직을 임시적으로 사임하였다.
4월 13일 반혁명당 전국대회는 바빙크 박사를 의장으로 열렸다.
그리고 그 전국대회에서 선거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던 슈탈만과 그 동료들이 공식적으로 탈당하였다.

6월 29일 선거에서 우파가 48석, 좌파가 52석을 차지하였다.
반혁명당을 탈당한 슈탈만은 기독교 역사주의당과 함께 독자노선을 택했고 5석을 차지하였다. 만일 그가 우파에 연대하였더라면, 선거 결과는 53 대 47로 우파가 승리했을 것이다.
비록 이 결과가 카이퍼와 그 내각의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암튼 카이퍼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905년 8월 16일 카이퍼와 그의 내각은 퇴임하였다.
이제 그는 한 평범한 노(老)시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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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명한 풍자만화가였던 알버트 한(Albert Hahn)은 "Abraham de Geweeldige(두려운 아브라함)"이라는 제목의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것은 무거운 뺨, 아랫쪽으로 쭉 내린 입술과 턱, 사납게 노려보는 눈과 깊이 패인 주름살의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카이퍼의 머리를 그린 것이었다. [그림보기]
한(Hahn)과 같이 카이퍼 박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에게서 분노와 잔인한 인상을 느꼈나보다



9) 주님 안에서 잠들다

1905년(68세) 수상 임기를 마친 카이퍼 박사는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로 1년 남짓 여행을 떠났다.
1902년 수상직을 수행하면서 생긴 자유대학 교수직은 그 동안 바빙크 박사가 대신하고 있었는데, 여행을 돌아와서도 카이퍼는 학교의 청빙에 응하지 않고 쉬기를 원했고 1907년 70세가 된 그는 명예퇴직을 했다.
반면, 바빙크는 카이퍼가 없는 기간 동안 반혁명당 국가위원회 의장도 맡고 있었는데, 1907년 10월 그는 그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카이퍼에게 의장직을 넘겨주었다.

당시 카이퍼에게는 또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는 데 메이스터 내각의 뒤를 이어 1909년 선거에서 다시 수상이 되어 이루지 못한 입법안들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1908년 초 뜻하지 않은 내각의 퇴각으로 인해 반혁명당의 헤임스케르크(그의 부친은 자유주의자로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가 과도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고, 1909년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하면 그 내각이 연장될 것이었다.
이는 카이퍼가 의원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1908년 8월 31일 카이퍼는 국가평의회(국왕자문기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0월에는 옴멘 주 보궐선거에서 상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2월에는 다시 반혁명당 의원 클럽 회장이 되었다.
1909년 선거에서 카이퍼의 예상대로 우파는 60석을 얻어 대승리를 거두었고 자신 역시 옴멘 주에서 상원에 재선되었지만, 헤임스케르크 내각이 그 직무를 계속 수행하게 되었다.

그 무렵 카이퍼는 소위 "훈장 사건"에 연류되어 국회에서 호된 공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반혁명당의 한 기부자가 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로비했다는 내용으로, 좌파 세력들은 즉각적으로 이에 대해 반응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반혁명당 내에서 카이퍼의 입지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 일은 카이퍼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후회스러운 일이 되었다.

1912년(75세) 7월 카이퍼는 건강상의 이유로 상원을 사임했다.
1913년 선거는 좌파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상원은 우파(기독교 연립)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 해 7월 8일 카이퍼는 다시 상원의원이 되었다.
1915년에는 반혁명당에 내부 문제가 발생했는데, 고위간부들간의 의견차이였다. 카이퍼는 1907,8년에 있었던 헤임스케르트의 돌발 행동을 지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약 40년간을 당수로 지내온 카이퍼의 독선적인 이미지를 비판하였다.
암튼 이런 홍역을 치른 카이퍼는 1916년에 1878년 정강을 재설명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다시금 당의 조직적 구조를 바로잡았다.

1916,7년에는 그가 그동안 추진해왔던 학교문제와 선거제도 문제가 어느 정도 매듭지어지고 헌법개정이 완성되었다.
그는 폐렴, 기관지염 등의 지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918년 5월 반혁명당 전국대회에서 그는 직접 연설하지 못하고 이덴부르크가 대신 읽게 했다.

1918년 선거에서 다시 우파의 승리로 가톨릭 신자를 수상으로 하는 내각이 9월 출범했다.
하지만 세계대전의 그늘에 있던 화란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정치혁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사회 민주노동당 지도자였던 트룰스트라는 군과 경찰이 정부의 편이 아님을 들어 혁명을 시도했지만, 국회 다수당이 그것을 반대하였고,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동조하지 않았다.
혁명은 곧 카이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다. 적대자들에 있어서 그는 원흉이었다. 경찰들은 그를 호위했고 동료들은 그에게 피신을 권했지만, 카이퍼는 헤이그를 떠나지 않았다.
사회민주노동당 대회가 열리기로 되어있던 헤이그로, 전쟁 중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군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가지를 행진하며 혁명분자들에게 경고했다. 11월 18일 그들은 혁명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프리즐란드 군인들과 반혁명당 모두 81세의 노인 카이퍼의 집 앞에 모여 승리의 찬양을 불렀다.

1918,9년 카이퍼는 기관지염으로 시달렸고, 1919년 3월 그는 반혁명당 국가위원회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10월 29일 생일 직후, 다시 심각한 병으로 고생했고, 12월 18일 마지막 논설을 끝으로 슈탄다트지 편집장직도 그만 두었다.
그해 말경, 카이퍼는 오랜 친구이자 동역자였던 로만(정치적으로는 결별했던)과 편지를 교환하며 깊은 우정을 확인했고 화해를 했다.

1920년 9월 헤이크 시평의회는 카날슈트라트라는 거리의 이름을 카이퍼박사 거리(Dr.Kuyperstraat)로 바꾸었다.
9월 21일, 그는 상원의원직을 사임했다.
9월 24일, 그는 마지막으로 헤라우트지 초본을 수정했다.
10월 6일, 그의 후계자 콜린이 병문안을 했다.
10월 20일, 자유대학 설립 40주년 기념일에 학교로부터 감사 전문을 받았다. (카이퍼의 장남은 그 해 자유대학 총장이 되었다.)
10월 29일, 그의 마지막 생일에 도착한 많은 편지, 카드, 전문을 그는 스스로 읽을 수가 없었다.

11월 8일, 카이퍼는 83년간의 생애를 마치고 주님 품에 잠들었다.

11월 12일 장례일에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외부인들이 참석하지 않았고 화환이나 종려가지도 꾸미지 않았지만, 경찰의 호의를 받는 장례행렬이 장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만명의 군중이 모여있었다.
자유대학 학생들이 관을 운반했고, 내각 관료인 헤임스케르트가 정부를 대신해서, 당수인 콜린이 반혁명당과 슈탄다트지를 대표해서, 디크 박사가 개혁교회를 대표해서, 이덴부르크가 가장 친한 친구로서 연설했다.
그리고 카이퍼가 즐겨 부르던 시편 89편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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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카이퍼 박사가 쓴 유언장대로 묘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
1837년 11월 27일에 태어나고,
주님 안에서 잠들다.
1920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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