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과 은혜론 - 펠라기우스 논쟁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는 말 기독교 역사는 한마디로 이단들과 정통적 신앙간의 계속되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이단들이 발호하였을 때마다 공의회는 이들 이단들을 정죄하고 신앙을 수호하여 왔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수많은 논쟁들이 있어왔지만 이 논쟁들은 이단과 공의회 간의 논쟁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과 정통적 신앙의 싸움의 역사에서 특이한 한 사건이 뚜렷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 논문의 두 대립되는 인물 즉 펠라기우스(혹은 펠라기우스파)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에 대한 반박은 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의존해 있고 이 논쟁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그 어느 이단논쟁에서 보다 더 두드러진다.
고대와 중세의 한 중간지점에 우뚝 선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잘못된 사상 즉, '의지로 얻는 공로'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선재(先在)를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구원은 전혀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명백히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은혜관은 펠라기우스파와 반(semi) 펠라기우스파를 누르고 교회의 정통적 사상으로 정립되었으며 오늘날 교회의 기본적 사상이 되었다.
본 고(考)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과 '은혜론'을 그의 서간과 설교와 논문을 통하여 고찰함에 있어서 확장되어 가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박, 일명 '펠라기우스 논쟁'을 중심으로 기술할 것이다. 후일 케사리우스(Caesarius, 469-542)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펠라기우스논쟁1)은 논외로 하였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von Hippo, 354-430)는 A.D. 354년에 현재 알제리아(Algeria) 땅인 루미디아(Numidia)에 있는 타가스테(Tagaste)에서 비기독교인 아버지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 모니카(Monica)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르타고(Cartage)에서 수사학을 배웠고 373년경부터 약 9년동안 마니교에 탐닉하였고 383년 로마에서 학문적 추구를 하였으나 실망하고 쾌락주의(Epicurianism)의 즐거움에 탐닉하기도 하였다. 384년 밀란의 공적연사(the public orator)가 되었으며 '고백록'에 묘사된 것처럼 387년 긴 종교적, 철학적 순례를 마친 후, 387년 밀란(Milan)에서 세례를 받았다. 388년 북아프리카로 돌아와 391년 서품을 받았고 395년(혹은 396년) 힙포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힙포의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430년 반달족의 침입이 있는 동안 질병으로 사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란의 어떤 정원에서 로마서 13:13-14를 읽고 회심하였다고 전해지며 도나투스파에 반박하여 '삼위일체론'(The Trinity)을 저술하여 도나투스파의 재세례를 거부하고 '비록 합당치 않은 성직자에 의해 받은 성례라도 참다운 성례로 남는다'(ex opere operato)는 주장을 하였다. 411년경부터는 펠라기우스파에 대한 논박에 힘을 쏟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대표적인 저술은 [회의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독백], [고백록], [신의 도성] 등이 있고 방대한 분량의 설교와 서간과 논문을 남겼다. 또한 그의 생애를 반대자들과 관련을 지어 정리해 보면2), ①이교도에 대항하여, ②천문학에 반하여, ③유대인에 반하여, ④마니교에 반하여, ⑤브리스길라단에 반하여, ⑥도나티스트에 반하여, ⑦펠라기안에 반하여, ⑧아리안족에 반하여, ⑨아폴리나리안에 반하여 등이 있다.
3. 펠라기우스 논쟁 1) 펠라기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펠라기우스는 본래 영국사람이고 사제는 아니었으나 열렬한 금욕주의자였다.3) 그는 로마에서 자기의 수도원적 이상을 위해 운동하여 제자를 얻고4), 기독교사회의 방종과 부도덕에 반대하여 성공적으로 설교하였다. 그는 서방전통을 희랍적, 오리게네스적 신학의 관념과 결합시키고자 하였으며 펠라기우스는 아리우스에 반대하여 논쟁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결정적인 대적행위는 마니교도들을 향한 것이었는데 마니교도들에 반하여 의지의 힘과 의미를 강조하고 자기 행위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책임을 논술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마니교적 문헌, 즉 [자유의지론]을 연구하기도 했다.5) 그는 400년경, 이미 상당한 고령에 달해 있을 때, 로마에 정착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당시 대중적이었던 스토아윤리에 가까웠다.6)
펠라기우스 논쟁은 펠라기우스가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만난 카일레스티우스(Caelestius)를 통해서 최초로 공개적인 논쟁이 되었는데, 알라릭(Alaric)이 로마를 침공하기전(A.D.411)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카일레스티우스는 카르타고에 남아있었다. 카일레스티우스는 그곳에서 감독임직을 원했으나 밀란 출신의 집사 파울리누스(Paulinus)는 감독 아우렐리우스(Aurelius)가 주재하는 회의에 고소장을 내었다. 파울리누스의 고소장은 일곱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의 내용은 카일레스티우스가 이단적 사상을 가르쳤다는 주장이다. 고소에 따른 심문의 내용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개의 기록7)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한 워필드의 기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은 숙명적인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죄를 짓거나 혹은 짓지 않았거나 죽었을 것이다. 아담의 죄는 그 자신만 오로지 손상시켰을 뿐 인류 전체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갓 태어난 유아는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인류 전체는 한편으로는 아담의 사망 혹은 타락으로 인해서 죽지 않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다시금 일어나지도 않는다.
갓 태어난 유아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영생으로 인도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도 죄가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8) 펠라기우스는 이런 사상 때문에 정죄되어 출교명령을 받자 에베소로 떠났으며 거기서 임직을 받았다. 415년 7월말 경 예루살렘의 요한이 주재하는 교구회의에 출두하게 되었으나 애초에 이 사건이 서방에서 발단된 것이라는 명분하에 로마 감독에게 다시 회부되었다.
얼마 후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두 사람의 갈리아 감독들이 대주교인 가이사랴의 율로기우스와 함께 펠라기우스에 대한 고소를 제기했는데 펠라기우스는 교묘히 빠져나가 사면9)되었다. 그러나 416년 여름 중반 68명의 감독이 소집한 회의와 첫 번 회의 후 곧 60명의 감독이 소집한 밀레베(Mileve or Mila) 회의에서 정죄가 재확인되었다. 팔레스타인과 북아프리카의 결정이 다른 상황에서 북아프리카회의는 대주교좌인 로마의 감독 인노센트 1세에게 회의의 이름으로 카르타고의 아우렐리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다섯명의 감독들이 친서를 보내어 결정을 촉구했는데 417년 1월 27일에 우호적인 회신을 얻었다.
이 답장에서 인노센트는 북아프리카의 결정에 동의하고 내적인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펠라기우스의 유아세례 이론을 거부하였으며,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가 정통으로 돌아올 때까지 출교를 명령한다고 선언했다.
단지 6주가 지난 후 본래 희랍인이었던 조지무스(Zosimus)는 이 논쟁에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던 차에 417년 9월 이들을 정통이라고 재선언하였다.
이에 반하여 417년 말 혹은 418년 초에 아프리카의 감독 200여명 이상이 카르타고에 회집 조지무스에게 답장을 보내 이들에 대한 반대 결정을 선언하였다. 이 편지는 418년 3월 21일에 기록되어 4월 29일 아프리카에 도착되었는데 황실은 로마로부터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를 추방할 것을 선언하였고 5월 1일에 카르타고회의에서 펠라기우스적 색채를 가진 교회법 9개를 모두 정죄하였다.
이런 사건의 전개 속에서 조지무스는 자신이 정통이라 선언한 이들과 함께 추방을 당하던지 아니면 자기의 선언을 번복하든지 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결국 조지무스는 카일레스티우스에게 출두를 명하였으나 그가 도시를 빠져나가자 6개월 전의 자신의 선언을 번복하고 이들을 정죄, 출교한다고 선언하고 황실의 칙령에 순응하여 이들에 대한 단호한 정죄문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엑크라눔의 율리안(Julian Eclanum)을 비롯한 이탈리아출신 감독 18명은 서명을 거부함으로 축출되었으나(그들 중 몇몇은 자기 주장을 철회함으로 복직되기도 했다), 펠라기우스 사후에도 가울(Gaul)지역을 중심으로 소위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활동이 퍼져갔다.
논쟁의 끝은 431년 교황 코엘레스틴이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손을 들어주고 496년 교황 겔라시우스(Gelasius)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글을 금서목록에 지정하고 529년 7월 3일 오렌지의 두 번째 회의에서 신조를 채택하고 이듬해 보니훼이스 2세(Boniface Ⅱ)의 비준을 받음으로 논쟁은 마무리되었다.10)
2) 펠라기우스의 사상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로운 헌신이 구원에 결정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11)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견해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대립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가 은혜를 전적으로 무시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논리일 뿐이다.
펠라기우스도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부차적으로 보거나 단지 없어도 괜찮은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이전 인류의 악한 "습관"과 구별해서 세례와 용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인간의 자유화와 "은혜로" 다시 얻은 의지의 자유와 자기 활동을 생각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해방된 자유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작용받고 규정받는 것이라고 한 데 반하여,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로운 헌신이 구원에 결정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12) 워필드도 이런 맥락에서 논쟁의 출발점을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의 주장과 역사가들의 인식에 비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자유의지에 대한 그의 강조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인류의 타락과 은총의 필요성을 부인하는데 더욱 큰 문제점으로 나타났다."13) 펠라기우스가 의지를 강조하게 된 것은 그의 원죄론에 크게 기인하는데, 그는 로마서 5:12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의 원죄적 본성을 추리해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단지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인류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유아들은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죄 없이 무죄하게 태어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14) 이런 그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본성은 변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캄펜하우젠의 말에 의하면, (펠라기우스의 입장에서 보면)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계속되는 죄과의 육체적 유전이라는 가설은 마니교적이고 하나님의 의에 어긋난다"15)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핵심적이며 형식적인 기본 원리는 인간의 완벽한 능력을 가정하는데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은 의가 요구하는 모든 사항을 행할 수 있으며-자신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완벽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16)
이런 사상은 펠라기우스로 하여금 모든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의 많은 성인들도 사실에 있어서 죄 없이 살았다는 주장을 하고, 아담의 죄가 아담의 나쁜 행실로 인해서 후손들에게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 즉 원죄의 유전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유전된 죄성을 부인함으로써 그에게 있어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이 열려 지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인노센트(Innocent)에게 보낸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또한 짓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고백합니다"17)라고 말한다. 원죄의 유전 혹은 본성의 타락을 부인하는 펠라기우스도 점진적인 타락은 인정한다. 이런 점진적 타락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짓는 습관'에 빠진 인간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모방하고 또한 거룩한 모범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선택은 전적으로 그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인노센트(Innocent)에게 보낸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인간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또한 짓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고백합니다"17)라고 말한다. 원죄의 유전 혹은 본성의 타락을 부인하는 펠라기우스도 점진적인 타락은 인정한다. 이런 점진적 타락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짓는 습관'에 빠진 인간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모방하고 또한 거룩한 모범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선택은 전적으로 그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어린이는 태어날 때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이 죄 없는 상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린이가 지닌 순진무구성은 나쁜 환경과 관습에 의해서 더렵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8) 이런 맥락에서 펠라기우스는 "갓 태어난 유아들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보다 차원 높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19)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펠라기우스의 세 가지 주된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0) 첫째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모순된 주장으로 반박된 것으로서, 인간의 능력으로 율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죄가 없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의 많은 성인들도 죄 없이 살았다.
둘째는 원죄를 부인하는 것으로, 각각의 인간은 과거인들의 지나가 버린 행동으로부터 연유된 죄악이나 도덕적인 연약성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셋째,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성을 지원하기 위한 초자연적인 도움 즉, 특히 선행은총은 필요하지 않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1) 원죄와 유전 펠라기우스는 죄의 보편성에 대하여 '인류의 오랜 세월에 걸친 죄를 짓는 습성' 즉 반복되는 의지의 행위들로 인해서 인간의 죄를 범하는 성향이 증가되어 왔다고 보았으나21)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전된 원죄를 강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타락 이전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은 수 있는 능력과 동시에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 즉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다. 즉, 아담은 완전한 견인의 선물,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은 갖지 못했으나 선을 견지할 수 있는 능력, 즉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을 선물로 가지고 있었다.22)
그러나 자신의 교만과 불신앙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동산 안에 심어 둔 선한 나무를 악하게 사용하게 만들었고23) 이 죄악의 결과로 인해서 아담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과 그의 특별한 지식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즉, 타락한 인간에게는 죄에 대한 강요(necessitas peccandi)가 있을 뿐이며, 인간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능력(non posse non peccare)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24) 타락 후에도 여전히 자유로왔으나 아담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는 은총을 상실했으므로 이제는 다만 죄를 짓는 쪽으로만 자유로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죄를 짓는 속성이 아담으로부터 상속되었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이 원죄를 후손들에게 상속으로 물려주어서 유전된다고 생각했다.25) 이러한 생각은, "아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이며,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 집약되어 있으므로, 그의 모든 후예들은 그 안에서 단일성을 형성하고 아담의 죄책을 공유한다"26)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원죄는 자연적인 출생에 의해 유전된다.27) 자연적 출생이란 '성적 욕망'이다. 이 성적 욕망은 '현세욕'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나쁜 것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 즉 "욕정적인 정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열을 합법적이며 고상한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음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증식하려는" 것에 결혼의 유익성이 있다.28)
그러나 출생은 원죄의 유전을 불가피하게 초래한다. 이러한 죄는 인간의 죽음을 가져왔다.29) 즉, 인간의 치명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일정한 질병이 발병함으로써 창조될 당시의 생명의 안정성을 상실하였으며, 그들의 삶의 각 단계를 거치면서 경험하게 되는 연약화로 인하여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사망하게 된다.30)
2) 유아의 죄 문제와 세례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유아에게 원죄는 유전되어 있으나 스스로 범한 죄는 없고31) 무지와 연약함에서 오는 악이 있을 뿐32)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지 않고 몸을 떠난 갓 태어난 유아는 가장 약한 정죄를 받는 자들에게 포함된다.33)
그는 "갓 태어난 유아는 실제적인 삶에서 오는 죄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생의 물로써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의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원죄의 죄책으로 인한 것"34)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아세례의 필요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갓 태어난 유아들은 구원을 위해서 성별되게 특별히 제정하신 성례전을 통해 신자가 되지 않는다면 어둠(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35)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아들에 대한 세례의 유용성에 대하여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은 다음에 이 현재적인 세상의 삶을 떠난다고 한다면 원죄로 인해서 묶여 있던 죄책은 사라지는 것이며, 영원토록 불변적으로 그 상태를 지속할 것이며, 창조자 앞에서 의로운 자를 조명해 주는 진리의 빛 아래에서 완전하여질 것이다.36)
그는 또 말하기를, 갓 태어난 유아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와 연합한다는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갓 태어난 유아는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와 연합을 이루게 됨으로써 이러한 연합을 이루지 않음으로써 받게 될 저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37)고 하였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유아들은 성찬에 참여함으로 생명을 얻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갓 태어난 유아라고 할지라도 인자의 피와 살을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38)고 하였다. 5.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1) 인간의 전적 타락과 원죄 "각각의 인간은 과거인들의 지나가 버린 행동으로부터 연유된 죄악이나 도덕적인 연약성에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펠라기우스 죄론의 핵심이라면 "인간의 전적 타락"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의 핵심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은 원죄에 의해 <멸망당할 자의 무리, massa perditionis>에 속해 있다. 또한 어린 유아로서 죽었던 사람이라도 멸망을 받는다. 신의 특별한 은총의 행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가 있다."39) 캄펜하우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을 설명하기를,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적에 그들이 모두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러한 한에서 그들은 아담의 죄에 가담했으며, 죄의 본래적인 자리가 인간적인 정신이고, 그 정신을 통하여 아담이 불순종과 '교만'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다.40)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우리에게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아주 강력하고 변함없는 자유의지가 있으며, 이것은 창조주가 모든 인간성에 부식(扶植)한 것이지만,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인애로 직접 매일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보호하신다"41)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그의 말을 따라 인간의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며 이 "가능성"은 인간에게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 무흠의 상태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펠라기우스의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 말씀은 요15:15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30에서 말하기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라고 하신 분이 용인하시지 않는다"42)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런 인간은 "의지와 행동의 선천적 가능성을 도울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의지와 행동 그 자체까지 돕는 은혜"43)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은혜 (1) 은혜의 수단과 효과 은혜에 대하여 펠라기우스는 "율법과 교훈을 의미한다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모범도 이 교훈에 포함된다고 하며, 혹은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44)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2에서 펠라기우스가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소개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죄를 피하도록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시는 것은 그 자신이 바르게 사시며 바른 일을 가르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45)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주장에 대하여 "우리의 모든 처신에서 주의 처신을 모범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순간 모든 행동을 위해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발언 자체에 모순된 견해가 있음을 논증한다.46)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은혜는 '죄를 피하도록 우리를 돕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그의 본성과 자유 의지 또는 율법과 교훈을 주신 일과 동일시'한다.47) 은혜를 언급할 때 펠라기우스는 언제나 율법(혹은 계명)과 연관을 짓는데, 그의 체계의 기능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가지로 요약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주장에 대하여 "우리의 모든 처신에서 주의 처신을 모범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순간 모든 행동을 위해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발언 자체에 모순된 견해가 있음을 논증한다.46)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은혜는 '죄를 피하도록 우리를 돕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그의 본성과 자유 의지 또는 율법과 교훈을 주신 일과 동일시'한다.47) 은혜를 언급할 때 펠라기우스는 언제나 율법(혹은 계명)과 연관을 짓는데, 그의 체계의 기능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가지로 요약한다.
그에 따르면, 펠라기우스는 "'가능성'에 의해서 사람은 의롭게 될 수 있으며, '의욕'에 의해서 의롭게 되려고 마음을 먹으며, '행동'에 의해서 실지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48)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펠라기우스의 '가능성'은 "하나님은 의지와 행동의 가능성을 사람에게 주셨으며, 은혜로 항상 이 가능성까지도 도우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한 일을 원하면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렇게 만드신다"49)라는 그 자신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의욕과 행동을 도우시지 않고, 의욕과 행동의 가능성만을 도우신다는" 주장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판한다.50)
여기서 말하는 펠라기우스의 '가능성'은 "하나님은 의지와 행동의 가능성을 사람에게 주셨으며, 은혜로 항상 이 가능성까지도 도우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한 일을 원하면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그렇게 만드신다"49)라는 그 자신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의욕과 행동을 도우시지 않고, 의욕과 행동의 가능성만을 도우신다는" 주장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판한다.50)
이런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들을 논박할 때 구분한 세 가지의 기능, 즉 '가능성'(possibilitas ; posse), '의욕'(voluntas ; velle), '행동'(actio ; esse)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는 것은 오직 '가능성'이며 '의욕'과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빌2:1351)의 말씀을 들어 그들의 은혜관을 반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이끌어내는 효과를 '그리스도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52) 그는 이 점에서 펠라기우스가 "그리스도께로 올 '가능성'을 본성이라고 하며, 심지어는 '그것에 의해서 바로 이 가능성이 도움을 받는다'라는 말로 그 가능성을 은혜"라고 한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사람은 올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실지로 오며", 이런 결과에는 "가능성의 발동과 의지의 감동과 행위의 실천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선한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불과한 것 같이, 선한 생활에 대한 상으로서의 영생도 하나님의 은혜"53)라고 말하였는데, 펠라기우스가 율법에 관심하는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율법을 완수하게 하며 본성을 해방하며 죄의 지배를 제거"54)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무엇인가? 그의 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9에 의하면55) "율법과 은혜는 아주 달라서, 은혜가 돕지 않는다면 율법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절대로 유해"하며 율법의 이용가치는 "범법자로 증명된 사람을 은혜에 가게 만들어, 거기서 해방을 받으며, 악한 정욕을 극복하기 위한 도움을 얻게 하는데" 있으며. 같은 글에 보면, 갈3:24을 인용하여 율법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데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율법에 대한 이해는56) "참으로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는 율법을 준수할 수 없으며" 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은 '사랑'이며(롬13:10).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붓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성령(롬5:5)"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은혜의 주된 형태는 사랑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피조된 선들 안에서 즐거워하게 만든다. 도덕적 행위와 종교적인 행위에는 이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은혜가 없으면 인간의 모든 의지와 행위는 죄악된 것이 된다. 사랑은 피조물이 소유할 수 있는 피조된 성품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이요, 영향력이다.57)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의'(義)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는데,58)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14에서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확실하나, '율법에서 난 의'는 '하나님께로서 난 의'가 아니며, 은혜에 의해서 완성되는 의라야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율법의 저주의 두려움 때문에 행하는 것이므로 '율법의 의' 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통해서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2) 선행하는 은혜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그의 은혜를 얻는다"59)고 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요일4:1960)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떤 선행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주장, 반문한다. 그러면서 그는 롬5:561)를 계속 인용하면서 이런 선행적 은혜를 인정하는 것은 "바른 신앙고백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선행하는 은혜는 무엇인가? 그는 '은혜'와 '의지'를 비교하면서 이에 대하여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4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혜가 의지보다 먼저 있으므로 은혜는 또한 믿음보다 먼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믿음이 은혜보다 먼저 있다면, 의지 없이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확실히 의지도 은혜보다 먼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의지보다 먼저 있으므로, 은혜는 모든 복종보다 먼저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보다 먼저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참으로 또 즐겁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은혜를 받는 사람 안에서 은혜가 이루며, 은혜는 그들에게서 이 모든 일보다 먼저 있습니다."62)
(3) 값없이 주시는 무상의 은혜 펠라기우스 논쟁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논쟁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가 "은혜는 공로에 따라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기 위해, 그 근거로 펠라기우스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말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인용한다.63)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자유 의지를 이용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허락된 그 자유를 악용했으니, 당연히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유 의지를 바르게 사용하여 그 공로로 주의 은혜를 받으며 주의 계명을 지키므로,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공로없이 주어짐을 성서의 많은 구절64)들을 인용하며 반박하였는데 이런 성경 구절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으면서 믿음을 받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은혜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아들의 예를 통하여 설명하기도 했는데, 그의 글 "은혜와 자유 의지에 대하여" 44에 보면 "유아들이 은혜를 받을 때에는 그 자신의 의지가 없으며, 의지의 영향으로 어떤 공로를 이미 세웠노라고 할 수 없다"65)고 말한다.
그는 "원죄에 대하여" 45에서 "갓난 아이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마귀의 속박에서 구출된다는 것"은 교회의 성례전이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면서 이것은 "믿을 만한 참된 신비"라고 말하였다.66) 그러므로 "공로에 대해 주시는 것이 아닌 은혜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뿐이며, 종말에 주시는 은혜 즉 영생은 선행하는 우리의 공로에 대해 주시는 것"이라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참으로 공로가 사람의 것인 때에는 그것은 악하며, 하나님은 그런 것에 면류관을 씌우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선한 공로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선한 공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공로에 여러분의 공로로서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물로서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입니다."라고 응답한다.67)
(4) 하나님의 절대 주권 공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그의 사상을 엿보게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를 예지하시고 또한 그의 구원을 예정하셨으며 은혜를 베풀고 그의 구원을 이룰 때까지 견인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한 안의 일이다.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공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일에서 힘을 잃는다. 왜냐하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며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혜로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 즉, 예정에 대하여, "하나님이 장차 하실 일들을 예지하시며, 속이거나 변할 수 없는 그 예지로 그 일들을 정돈하시는 것이 곧 예정이며 이것은 절대적인 것"68)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예정'은 "하나님께서 누구는 죄를 짓고 혹은 저주받도록 예정하시는 것은 아니다. 선택된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심에 따라서 이 '저주받을 무리'들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다.69)
(5)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란 것은 은혜가 의지 안에서 활동하여서 의지가 선을 의지하도록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은총을 통해서 의지를 증진시키시고 강하게 하시고 자극을 주셔서 의지 자체가 아무런 강요에 의하지 않고서도 선을 의지하게 만든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를 거스려서 구원받을 수도 없다. 은총이 의지를 움직이나 이것은 "부드러운 강요"로서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행동과 일치하도록 만들어 준다."70)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는 인간이 다시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된다는 면에서 불가항력적이다. 이것은 신적 은혜가 자율적 행동자로써 인간의 성질에 옳지 않게 의지를 강제로 시킨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의지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스스로 선한 것을 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를 조종할 수 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가능하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결핍을 보충하는 목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성질의 방향이 완전히 다시 새로워짐을 위하여 필요하다.71) 하나님의 은혜는, 특히 예정으로서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나 그 영역을 넘어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그 타락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가능성도 없다. 오직 은혜에 이끌림을 받는 것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예정론의 근저를 흐르는 사상이다.
(6) 견인의 은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믿음을 시작하며 또 그 믿음이 끝까지 견인할 수 있게 한다"72)고 하였는데, 이 같은 견인의 은혜를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주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로 사람 안에 견인을 실현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매일 견인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헛될 것입니다."73) 그는 또한 견인의 방법에 대하여 이르기를 "선견지명이 가장 투철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견인하지 않을 사람들을 견인할 사람들 사이에 섞어 넣으셔서,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하셨다고 말한다.74)
3) 예정 예정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그의 글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16-38까지 방대한 분량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는 예정을 말함에 있어서 예지와 예정을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예정은 은혜를 위한 준비며, 은혜는 주시는 일 그 자체"인데 이 예정은 예지(豫知) 없이는 있을 수 없으나, 예지는 예정 없이도 있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셨을 때에 자기가 하시려는 일을 예지하셨다는 것이다.75)
하나님의 예지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7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을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미리 아신 때와 장소에서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시며 자기의 가르침을 전하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는 모든 사람이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라고 하면서, "…구원은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왔으며, 구원이 오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 믿을 사람들이 아니면서 복음을 듣게 된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기가 믿게 하실 사람들이나 아들에게 인도하여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실 사람들을(요18:9) 예지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도 확실히 예지 하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예정이라고 하였는데, 즉, "구원을 받을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들을 확실히 구원하실 하나님 자신의 자비를 예지하시며 준비하셨다는 것"77)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와 예정의 현저한 실례를 유아들과 그리스도라고 말한다.78)
"유아들을 생각하거나, 신인(신인)간의 중재자이신 인간 그리스도 예수의 경우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공로가 먼저 있었다는 주장은 전연할 수 없습니다. 유아들에게 구세주께 속하게 될만한 공로가 먼저 있어서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신 구세주 자신도 어떤 인간적인 공로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구세주로 뽑히신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말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사람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말함과 동시에 예정의 현저한 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말이다. 그는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1에서 말하기를,79) "우리의 머리이신 분에게 은혜의 원천이 있으며, 거기로부터 그의 지체인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 은혜가 확산되는 것입니다. 저 한 사람이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되게 한 그 은혜가 모든 사람을 믿음의 시초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나신 것과 같이, 각 신자는 같은 그 성령으로 다시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게 하신 성령이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가 이 모든 일을 하시리라고 예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도의 예정이며, 같은 이 예정이 성도 중의 성도(그리스도)에게서 특히 빛났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같은 글에서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실 분이 거룩한 영으로는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되신 것"이라고 하면서 "저 한 사람이 우리의 머리로 예정된 것과 같이, 우리는 여러 사람으로서 그의 지체들이 되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성도의 예정에 있어서 그것은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믿게 되기 위해서 선택된"80) 것이며, "그의 자비는 은혜에 따라 그들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고…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쓰고 계실 때에 그들을 세상에서 택해 내셨지만, 그들은 창세 전에 이미 그의 안에서 선택된 자들"81)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성결 무흠하게 되겠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택하시며 예정하신 것" 즉,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82)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파가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결 무흠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도는 …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며 예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셨을 때에 하나님 자신의 역사로 우리가 성결 무구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지하셨습니다."83)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선포의 필요성을 그의 글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3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84) "예정을 가르친다고 해서 견인하며 전진하는 믿음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며…충실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순종을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공로인 듯이 생각해서 교만하게 되지 말며,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하기 위해서 예정선포가 필요합니다."
4) 예지와 예정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의 예지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병행, 혼용 혹은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을 예지예정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예지예정은 17세기(1610) 아르미니우스가 죽고(1609)난 후 요한 우텐보가르트와 에피스코피우스에 의해 알미니안주의로 형성된 후 4명의 지지자들이 "항변"(remonstrane)이라는 신앙고백을 작성하고, 절대 예정론에 반대하여 가르쳤는데85) 칼빈의 제자들이 주장한 절대 예정 즉 '타락 전 예정'과의 반대 개념으로서 '타락 후 예정' 즉 예지예정이 대두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정을 말할 때 예지를 함께 말하고 있다고 해서 17세기에, 그리고 위와 같은 이유로 형성된 이 단어를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하여 사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알미니안주의의 예지예정의 골자는 무엇인가?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명에 응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믿을 자들이라고 아는 자들만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또한 제약된다.
하나님이 예지하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은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누가 믿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으며, 그러므로 누가 인간에게 구원을 위하여 선택될 것인가도 인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아는 자들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통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주장으로서,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함으로써 궁극적인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인 것이다.86)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지를 말할 때 그것은 아르미니우스 식의 예지가 아니다.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19(Augustinus, 242.)를 보면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또는 예정에 의해서라고 말합니다. 또 은혜와 예정의 차이는 한 가지 뿐입니다)라는 말에 곧이어서 '예정은 은혜를 위한 준비며, 은혜는 주시는 일 그 자체인데 이 예정은 예지(豫知) 없이는 있을 수 없으나, 예지는 예정 없이도 있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셨을 때에 자기가 하시려는 일을 예지 하셨다'는 논지를 전개하는데 이것은 예정과 예지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배려이지 예지예정을 말하려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을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미리 아신 때와 장소에서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시며 자기의 가르침을 전하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는 모든 사람이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87)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예지예정을 말하려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니라 예지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글 즉, 예정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35 : Augustinus, 301을 보면 "(하나님은 확실히 이 일들을 예지하셨고, 또한 자기가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리라는 것도 확실히 예지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성도의 예정입니다. 즉,) 구원을 받을 사람이 누구든지간에, 그들을 확실히 구원하실 하나님 자신의 자비를 예지하시며 준비하셨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서 예지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이 말은 구원과 관계하여 예지하신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예지하셨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구절에서 '즉'이란 접속사를 통하여 부연되는 바와 같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자비를 예지'하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8(Augustinus, 263.)의 "사도는 …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며 예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셨을 때에 하나님 자신의 역사로 우리가 성결 무구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지하셨습니다."라는 말도 역시 예지예정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예지, 즉 인간의 공로에 따른 예정('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결 무흠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곧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결 무흠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예지'하신 것 때문에 예정된 것이 아니고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의 선택에 의해서' 예정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은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믿게 되기 위해서 선택된"88) 것이며, "그의 자비는 은혜에 따라 그들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고…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쓰고 계실 때에 그들을 세상에서 택해 내셨지만, 그들은 창세 전에 이미 그의 안에서 선택된 자들"89)이라는 것과,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공로를 예지하시고 예정하셨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성결 무흠하게 되겠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택하시며 예정하신 것" 즉,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라는 것이다.90)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예정'이 어떤 것인가는 그의 글에서 명확히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35.(Augustinus, 301)에서 두로와 시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믿을 수단' 곧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으로 선택된 예정과 두로와 시돈처럼 복음을 들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들이 예정되어 있음을 말하였다.
여기에 그의 예정론의 한계 즉, 무슨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한사람을 구하시고 다른 사람은 구하시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대두되는데, 이것에 대한 그의 답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께 힐문할 수 없다'(롬 9:20)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 선물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91)
더 나아가 그는 같은 글에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자기들이 당했을 일을 본다는 것은 큰 은혜인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자기의 공로나 정죄받는 사람들의 공로가 동등함을 알고 자기의 공로보다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가끔씩 일어나는 이런 예지와 예정의 혼용은 롬 11:2을 인용하여 "예지라는 이름으로 예정을 의미하는 때도 있다"92)고 말하는 그의 글에서 해명될 수 있는데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예컨대 사도는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전후 관계로 보아서, "그 미리 아신"이라는 말은 "그 예정하신"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바르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몇가지 이유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을 예지예정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의 예지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비중있는 테마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자유의지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할 때 자칫 그가 의지의 자유를 전혀 부인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다만 그는 "의지가 항상 스스로 죄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고, 자기의 방향을 바꿀 능력이 없다"93)는 점에서 의지보다 은혜가 선행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왈렌티우스와 그 동료 수도사들에게 보낸 논문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하여" 2에서 이렇게 한정하여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의지의 자유 선택이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 사람에게 의지의 자유선택이 없다면 하나님이 교훈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실행해서 약속된 상을 얻진 못할 것이므로, 그 교훈까지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겠습니다."94)
그러면 이러한 의지의 자유는 왜 주어지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탓해서 자기를 변명하려는 죄인들에게도 자유 의지가 있으므로,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95)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 의지는 펠라기우스의 자유 의지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음과 같은 그의 글 "영과 의문에 대하여" 56에서도 분명하게 밝힌다.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면(롬5:5), 사랑의 조그마한 불꽃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다는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그 사랑입니다 … 이런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계명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주심으로써 실지로 우리에게 주시는 의입니다."96)
위의 글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은혜를 "하나님에 대한 사랑 및 하나님이 명하시는 선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이해"97)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믿으려는 의지도 사람에게서 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믿음에 은혜를 주셔서 믿음으로 하여금 사랑으로 역사하여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98) 다시 말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는 선택의 자유(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부르심 아래 있는데 다음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조주가 이성적 영혼에게 한 본성으로서 주신 선택의 자유는 중립적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믿음 쪽으로 반동할 수도 있고 불신앙으로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와 그 의지 활동에서 그는 받지 않은 것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의지 활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선택의 자유에서 발생하며, 이것은 그가 창조되었을 때에 한 본성으로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시지 않고, 자유를 선악간 어느 쪽으로 사용하든 간에 그들은 절대적 정의의 심판에 복종해야 합니다."99)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떻게 얻게 되며,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과 의문에 대하여", 60에서100)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며 믿게 되도록 우리가 경험하는 인상(印象)들을 통해서 우리를 유도(誘導)하시고 혹은 복음으로 권고하시는 것같이, 외부적인 인상을 쓰시는데 이 경우 율법의 명령이 사람의 무력함을 경고해서 그로 하여금 의롭다 하시는 은혜에 믿음으로 피난하도록 하는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얻은 믿음은 '견인의 은혜'로 유지되는데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런 방법들로 하나님은 이성적 영혼에 작용하셔서 믿도록 하십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끌어가는 유인(誘引) 또는 초대가 없다면, 선택의 자유만으로는 믿는 행동을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캄펜하우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지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역사(役事)받은 자유"라고 말하였는데, "인간의 완전한 자유와 인간성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지만, 인간이 긍정하고 자기 자신의 의욕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행하는 자유는 남아있다"는 것이다.101)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자유의지는 그의 질문에서 집약되는데 그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묻기를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함으로써 '사람의 심중에 믿겠다는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이시며, 모든 일에 그의 자비가 우리보다 앞선다'고 단언하고,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은혜는 선택의 자유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웁니다. 선택의 자유는 율법 완수를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해서는 죄를 알게 되고, 믿음에 의해서는 죄를 극복하는 은혜를 얻습니다. 죄로 병든 영혼이 은혜에 의해서 치유되며, 영혼이 치유될 때에 선택의 자유가 생깁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에 의를 사랑하게 되며, 의를 사랑할 때에 율법을 완수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은혜를 얻음으로써 율법을 완수하기 때문에, 믿음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도리어 확립하는 것과 같이, 은혜가 의지를 치유함으로써 의를 자유로이 사랑하게 만들기 때문에, 은혜는 선택의 자유를 폐하지 않고 도리어 확립합니다."102)라고 말하였다.
은혜는 죄의 제거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주입"(infusio caritatis)을 의미한다. 즉, 세상으로 향해 있던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인, 카리타스로 바뀌어진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자유, 곧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회복된 것이다(libertas restituta).103)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타나는 자유의지를 정리해보면 "타락 이전에는 우리들이 죄와 죄를 짓지 않는 것, 둘 중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과 구속 사이의 시기에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런데 우리가 구속을 받으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의지를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서 이끌고 나아가서 이제 죄를 짓고 죄를 짓지 않는 것 둘 가운데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회복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104)는 것이다.
"피조물은 신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성령의 내주하심, 즉 사랑의 은혜를 통해서만 자신의 참된 가치에 합당하게 피조된 선을 원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사람의 모든 선한 의지와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진리의 아름다움으로서 전달하심에서부터 파생"105)된 것으로 보았다. 6. 나가는 말 아우구스티누스의 죄론은, "아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이며,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 집약되어 있으므로, 그의 모든 후예들은 그 안에서 단일성을 형성하고 아담의 죄책을 공유한다"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원죄는 자연적인 출생에 의해 유전되고 아담의 대표성 안에서 유전된 죄는 인간의 죽음을 가져왔다. 이 죄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교만에 의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다. 이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먼저 주어진 은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으로 공로가 사람의 것인 때에는 그것은 악하며, 하나님은 그런 것에 면류관을 씌우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선한 공로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선한 공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공로에 여러분의 공로로서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물로서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입니다"라고 응답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주어진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한 안의 일이다. 선택된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심에 따라서 이 '저주받을 무리'들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특히 예정으로서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나 그 영역을 넘어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그 타락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가능성도 없다. 오직 은혜에 이끌림을 받는 것만 있을 뿐,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예정론의 근거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실 분이 거룩한 영으로는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되신 것"이라고 하면서 "저 한 사람이 우리의 머리로 예정된 것과 같이, 우리는 여러 사람으로서 그의 지체들이 되도록 예정"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정하신 자를 견인하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믿음을 시작하며 또 그 믿음이 끝까지 견인할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견인의 은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및 하나님이 명하시는 선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지속된다. 은혜는 죄의 제거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주입"(infusio caritatis)을 의미한다. 즉, 세상으로 향해 있던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인, 카리타스로 바뀌어진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의 예정하심 안에서도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빼앗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탓해서 자기를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안다는 것은 좁혀 말하면 그의 은혜론을 안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해 정리된 은혜론은 오늘 우리가 가진 은혜론과 다르지 않다. 물론 그의 예정사상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를 가진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기독교 사상적 유산의 중요성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 할 것들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다 알 수 없으나 우리는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하여 그 일단이라도 얻게 됨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의 증거인 은혜와 그 은혜로 주어진 성령, 그리고 성령을 통해 주어진 카리타스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들을 보내신 사랑에서 절정을 이룬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응답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좇는 카리타스의 삶일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로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열매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맺는 카리타스의 열매가 오늘의 기독교적 삶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반달(Vandal)족이 힙포에 침입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75세의 노인이었다. 힙포의 주교로서 관리들과 군대를 향하여 자기의 의무를 다할 것을 종용하였고, 성직자들에게는 자기의 교회를 떠나지 말고 최후의 한사람이 떠난 후에 그 뒤를 쫓으라고 하였다. 자신의 말대로 그는 포위 당한 힙포에 남아 피난민들을 돌보아주고, 자기 교회의 금그릇을 녹이게 하여 그들의 곤궁을 구제해 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달족이 침입한 지 3개월 되던 때에 치명적인 질병을 얻어 병상에 눕고 말았는데 침실의 벽에 다윗의 회개시편을 걸어 놓고 날마다 눈물로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그의 생이 마감되어 갈 때도 그는 유언을 하지 않았는데, 포시디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가난한 종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언으로 상속할 만한 아무 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방 기독교의 역사와 신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기독교적 삶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 진정한 목회의 정도(正道)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성(聖)과 속(俗)을 구별하기에 너무나 익숙해 있는 우리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금그릇은 기독교적 삶의 본질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한국의 교회들은 예배당의 금그릇을 녹여, 예배당 문밖에서 헌데를 큰고 있는 오늘의 나사로들에게 카리타스를 나눠줄 수는 없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비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난 것인즉, 우리의 구원은 헐려진 성전의 그루터기에서만 돋아나는 예수 생명의 시여(施輿)인 터, 높이 솟은 십자가보다 더욱 값진 것은 값없이 얻은 은혜를 값없이 나누는 것임은 자명하다. * 참 고 문 헌Augustinus,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과 신앙론」김종흡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7. 1. 영과 의문에 대하여 2.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3. 원죄에 대하여 4.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하여 5.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6.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Bengt Hagglund, 「신학사」 박희석 역, 서울:성광문화사, 1997. Bernard McGinn 외2인 편, 「기독교영성Ⅰ」유해룡외 3인 역. 서울:도서출판 은성, 1997. D. 스틸/ C. 토머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김남식 역, 서울:정음서적,1982. Gerhard Schwinge.「신학 전문용어 및 외래어 사전」조병하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Hans F. von Campenhausen. 「라틴교부연구」, 김광식 역.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7. Ingeberg C. Henerr 편,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송기득 역, 천안:한국신학연구소, 1996. John Woodbridge,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초대·중세편, 박용규 역, 서울:도서출판 횃불, 1994, Justo L. Gonzalez, 「기독교사상사(Ⅱ)」, 이형기, 차종순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도서출판 은성, 1995. L. Berkhof, 「기독교 교리사」, 김진홍·김정덕 역, 서울:세종문화사, 1975. Philip Schaff, 「어거스틴의 은총론」,차종순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Williston Walker, 「세계기독교회사」, 강근환 외3인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4. 주승민, 「초대교회 집중탐구」, 서울:도서출판 이레서원, 2000.
1) 이들이 반 펠라기우스파(Semi-Pelagians)로 불려진 것은 16세기에 와서부터이다. Williston Walker, 『세계기독교회사』, 강근환 외3인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4), 133.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함에 있어서 신적 은혜와 인간의 의지를 동위적(동위적)요인으로 보았고, 또 믿고 순종할 것을 미리 안 예지를 예정의 기초로 보았다. 이들은 인간의 부패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성질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치명적으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되거나 병든 것으로 보았다. 타락한 인성은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보존하고 있으며 이것 때문에 신적 은혜와 협력할 수 잇다. 중생은 두 요인이 합하여 산출한 것인데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은 실제로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 사상은 가울(Gaul)지방에서 성행했는데 맛실리아 수도원장인 카시안(Cassian), 레기움의 파우스투스(Faustus), 맛실리아의 겐나디우스(Gennadius) 등이 주요 인물들이다. 이들은 오렌지회의에서 정죄되었다. L. Berkhof, 『기독교교리사』, 김진홍·김정덕 역(서울:세종문화사, 1975), 148.2) 주승민, 『초대교회 집중탐구』(서울:도서출판 이레서원,2000), 225.3) 한스 폰 캄펜하우젠은 펠라기우스에게서 실천적 행동주의를 보았다.
Hans F. von Campenhausen, 『라틴교부연구』, 김광식 역(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7), 333을 보라.4) 그의 제자이자 강력한 동지였던 코일레스티우스(Coelestius)와 좀더 나중의 제자로 에클라눔의 줄리안(Julian of Eclanum)은 펠라기우스 주의를 대표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이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 주의가 정죄되었다)에서 최종적으로 정죄되었다. Bengt Hagglund,『신학사』, 박희석 역(서울:성광문화사, 1977), 182.5) Hans F. von Campenhausen, 332-33.6) Williston Walker, 132.
7) Augustinus,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과 신앙론』, 김종흡 역(서울:생명의 말씀사, 1997), 127-28. "원죄에 대하여",3.4에 기록되어 있다. 이하에서는 김종흡이 번역한 이 책을 인용할 때에는 Augustinus라고만 표기하며 기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들은 따옴표(" ") 안에 책 혹은 논문의 제목과 권, 장 등을 기재하고 번역되어 있거나 실려 있는 책의 서지 정보와 함께 수록된 페이지를 기재할 것이다.
8) 이 글은 Philip Schaff의 편저인 Anti-Pelagian Writings Ⅰ 이라는 책에 실린 벤자민 B 워필드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에 관한 안내논문" 39쪽에서 인용하였다. 이 책은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차종순에 의해 1996년에 『어거스틴의 은총론 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9) 사면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하여는 위의 책 41쪽을 참고하라.10) Philip Schaff, 37-48.11) 펠라기우스가 처음 목표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었고, '암브로시아스터'라는 사람의 바울 이해였는데 이 사람의 주석들은 '힐라리우스'라는 이름으로 유포되었다. Hans F. von Campenhausen, 334.12) Ibid., 333.
13) Philip Schaff, 26.14) John Woodbridge,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초대, 중세편, 박용규 역(서울:도서출판 횃불, 1994), 144.15) Philip Schaff, 334.16) Ibid., 28.17) Ibid., 32.18) Ingeberg C Henerr 편,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송기득 역(천안:한국신학연구소, 1996), 170.19) Philip Schaff, 37.20) Ibid., 30-31.21) Bengt Hagglund,『신학사』, 박희석 역(서울:성광문화사, 1977), 183.22) "타락과 은총에 관하여", 12 : Justo L. Gonzalez편, 『기독교 사상사(Ⅱ)』, 이형기, 차종순 역(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4), 62
23) "지식인에게 보내는 창조에 관하여", 11. 5 : Justo L. Gonzalez, 62.24) Bengt Hagglund, 186.25)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9장 : Philip Schaff 편저, 『어거스틴의 은총론 Ⅰ』, 차종순 역(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245-46.26) Bengt Hagglund, 187.
27)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20장 : Philip Schaff 편저, 260.28)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57장 : Philip Schaff 편저, 308.29)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8장 : Philip Schaff 편저, 244.30)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21장 : Philip Schaff 편저, 261.31)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65장 : Philip Schaff 편저, 321.32)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67장 : Philip Schaff 편저, 323-25.33)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21장 : Philip Schaff 편저, 260.34)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25장 : Philip Schaff 편저, 266.35)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35장 : Philip Schaff 편저, 281.36)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25장 : Philip Schaff 편저, 267.37)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3권 제7장 : Philip Schaff 편저, 418.38)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하여", 제1권 제27장 : Philip Schaff 편저, 269.39) Ingeberg C. Henerr 편, 175.
40) Hans F. von Campenhausen, 340.41) 이 글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의 글 "자유의지 옹호론" 제1편에 있는 글을 자기의 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29에 직접 인용한 것으로서, Augustinus, 『은혜론과 신앙론』, 김종흡 역(서울:생명의 말씀사, 1997), 107-08에 전재되어 있다.42) Ibid. 108.43)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37 : Augustinus, 113.44) Augustinus, 82.45) Ibid., 84.46) Ibid.
47)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3 : Augustinus, 84.48)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4 : Augustinus, 85.49)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5 : Augustinus, 85.50)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6 : Augustinus,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과 신앙론』, 김종흡 역(서울:생명의 말씀사, 1997), 87.
cf. Post-Nicene Fathers vol.Ⅴ.에는 "so that He does not help us to will, nor help us to act, but simply helps us to the possibility of willing and acting"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사용된 세 개의 주요한 라틴어 단어는 가능성(possibilitas), 의욕(voluntas), 행동(actio)이다.51)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의욕을 일으키고) 행하게 하시나니"52)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15 : Augustinus, 96.53)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하여" 20 : Augustinus, 186.54)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하여" 27 : Augustinus, 193.55) Augustinus, 89-90.
56)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10 : Augustinus, 91.57) Bernard McGinn 외 2인 편, 『기독교 영성Ⅰ』, 유해룡 외 3인 역(서울:도서출판 은성, 1997), 565.58)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14 : Augustinus, 95.59)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24 : Augustinus, 102.6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61)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62) Augustinus, 308-09.
63)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하여" 34 : Augustinus, 111.64)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롬 13:3),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65) Augustinus, 214.66) Augustinus, 162.67)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하여" 15 : Augustinus, 181.68)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41 : Augustinus, 309.69) Justo L. Gonzalez, 66-7.70) 이 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집 131.에 있는 것으로 곤잘레스의 『기독교사상사(Ⅱ)』, 65.에 재인용되어 있다.
71) L. Berkhof, 145.72)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33 : Augustinus, 299.73)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41 : Augustinus, 309.74)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33 : Augustinus, 299.75)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21 : Augustinus, 242.76)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포르리리우스에 반박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의 글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17에서 예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Augustinus, 239.77)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35 : Augustinus, 301.78)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23, 30, 31 : Augustinus, 245-54.79) Augustinus, 253-54.
80)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4 : Augustinus, 258.81)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4 : Augustinus, 259.82)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7 : Augustinus, 262.83)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8 : Augustinus, 263.84) Augustinus, 303.85) 윌리스턴 워커, 「세계기독교회사」, 강근환 외 3인 편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4), 337.86) D. 스틸/ C. 토머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김남식 역(서울:정음서적,1982), 19. 87)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17, Augustinus, 239.
88)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4 : Augustinus, 258.89)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4 : Augustinus, 259.90)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37 : Augustinus, 262.91)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16.; Augustinus, 238-239.92)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77. ; Augustinus, 314-315.93) Hans F. von Campenhausen, 340.94) Augustinus, 168.95)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하여" 2 : Augustinus, 168.96) Augustinus, 69.
97) Bernard McGinn 외 2인 편, 560.98) "영과 의문에 대하여" 57 : Augustinus, 70.99) "영과 의문에 대하여" 58 : Augustinus, 70.100) Augustinus, 73-4.101) Hans F. von Campenhausen, 341. : 김광식은 캄펜하우젠의 'gewirkte Freiheit'라는 말을 "역사(役事)받은 자유"라고 번역해 놓았다. 그러나 좀더 정확한 번역은 "실현되어졌던 자유"이다.102) "영과 의문에 대하여" 52 : Augustinus, 63.103) Bengt Hagglund, 189.104) Justo L. Gonzalez,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서울:도서출판 은성, 1995), 339-40.105) Bernard McGinn 외 2인 편, 5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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