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안토니 A. 후크마,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1) (무천년설적 입장)|

by 【고동엽】 2017. 12. 9.
목록가기
 
 

요한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무천년설의 입장

Amillennialism (Anthony A. Hoekema)

이 글은 칼빈 신학대학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안토니 A. 호에케마(Anthony A. Hoekema)가 [무천년설]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관한 "해석법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Anthony A. Hoekema, "Amillennialism,"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Four Views(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7). Edited by Robert G. Clouse. pp. 155-187.]

천년왕국설에 관한 무천년설의 이해에 대한 본인의 진술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요한 계시록의 해석법,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지상 천년왕국을 예언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는 구약성경에서의 두 구절, 무천년설의 종말론에 대한 간단한 설명, 무천년설의 종말론에 대한 몇 가지 암시들에 대해 요약 진술을 다루고자 한다.

용어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무천년설이란 말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어떤 천년왕국설도 믿지 않는다거나 또는 천년왕국 통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계시록 20장의 첫 여섯 절의 말씀을 간단히 무시 해버리고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들 어느 진술도 사실이 아니다. 비록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오는 문자적 천년 지상통치를 받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무천년설이란 용어는 이 들 학자들의 견해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제이 E. 아담스(Jay E. Adams) 교수는 무천년설이란 말은 현실화된 천년설이란 표현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설은 미래에 있을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 실현되고 있는 일로 믿기 때문에, 현실화된 천년설은 확실히 무천년설의 주장을 무천년설 이란 말보다는 더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화된 천년설이란 표현은 세 음절로 된 단순 접두사로 대치한 시원찮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인은 무천년설이란 말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더 짧고, 더 잘 알려진 말인 무천년설이란 말을 계속해서 사용코자 한다.

1. 계시록의 해석

왕국설에 대한 무천년설의 견해가 가진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계시록의 해석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서, 계시록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와 그 주변 시기에 일어날 사건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배타적으로 미래적인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가정하자. 계시록 20장에서 지시된 것이 계시록 19장에서 기술된 것을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또 가정 해보자. 그러면 결과적으로 20장 4절에 묘사된 천년왕국 통치가 19장 11절에 기술된 그리스도의 재림 후 따라야 한다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시록 20장 1~6절이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시작되는 전 교회 역사를 통해서 일어날 사건의 기술로 본다면, 지금 막 언급한 것과는 전혀 다른 계시록 20장의 왕국설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계시록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석 방법에 관해 먼저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내게 가장 만족스런 계시록의 해석 방법은 그것이 비록 단점을 가지고는 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윌리암 헨드릭센(William Hendriksen)이 쓴 그의 계시록의 주석『정복자들 이상의 정복자』(More Than Conquerors)에서 기술된(Progressive parallelism)으로 알려진 해석법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계시록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각각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시기까지의 교회와 세상을 묘사하는 일곱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들 중 첫 부분은 1~3장까지에 나타나 있다. 요한은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걷고 계시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각각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과 함께 분명하게 한 부분을 형성한다. 이들 서신들을 읽으면, 두 가지 것을 느낄 수 있다. 첫째, 계시록이 기록될 때의 사건들과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둘째, 이들 서신들에 내포되어 있는 원리들과 칭찬들과 경고들은 모든 시대에 처한 교회들에 주시는 말씀으로써 그 가치를 가지고있다. 실제로 이를 두 가지 관찰은 전 계시록의 해석을 위한 단서를 제시한다. 계시록이 주후 일세기에 교회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는 그 때 일어난 사건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당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계시록이 또한 전 시대에 걸친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계시록의 메시지는 또한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 일곱 부분 중 두 번째는 4~7장에 나타난 일곱 인에 대한 환상이다. 요한은 하늘로 들림을 받아 광채 나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된다. 그리고는 베임 바 된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기를 받으시는 것을 본다. 여러 가지 봉인이 뜯기고,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심판이 기술되고 있다. 이 환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배경에 대항하여 가해진 고난과 박해를 당하는 교회를 본다.

셋째 부분은 8~11장에 나타나 있고, 일곱 나팔의 심판을 기술하고 있다. 이 환상에서 우리는 교회가 복수를 갚게 되고, 보호되고,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된다.

넷째 부분은 12~14장에 나타나 있고, 여인이 한 아들을 낳은 환상으로 시작하며, 용은 이 아이가 출생하자마자 삼켜버리려고 대기하고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말씀이다. 이 부분의 나머지는 사단을 상징하는 용이 교회를 계속해서 박해하는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또 용의 협조자들인 두 짐승, 즉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다섯째 부분은 15~16장에 나타나 있고, 일곱 대접의 진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개치 않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징벌을 매우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여섯째 부분은 17~19장에 나타나 있고, 바벨론 큰 성과 두 짐승의 몰락을 기술하고 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는 세속주의와 불경건의 힘을 가진 세속도시를 상징하고 있다. 19장 말에는 용의 두 협조자들의 몰락과 최후의 징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들 짐승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동일인으로 나타나는 거짓선지자이다(16:13을 보라).

일곱째 부분은 20~22장에 나타나 있고, 용의 운명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적들을 쳐부수는 것으로써 종결을 짓고 있다. 또 이 부분은 최후의 심판, 교회와 그리스도의 승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불리는 새로워진 우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비 록 이들 일곱 부분이 피차 평행을 이루고 있지만, 이들 역시 일정한 양의 종말론적 과정을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예를 들어서 마지막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도 더욱 더 미래에로 우리들을 인도하고 있다. 최후의 심판이 이미 1장 7에서 선포되었고, 또 6장 12~17절에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하더라도 20장 11~15절에서야 비로소 상세하게 그것이 설명되고 있다. 오는 세상에서 누릴 구속받은 성도들의 최후의 기쁨에 대해서 7장 15~17절에 암시되어 있지만, 21장에서야 비로소 상세하고 격조 높게 새 땅에서 누릴 축복된 삶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21:1~22:5). 그러므로 이 방법의 해석법을 점진적 평행이라고 부른다.

이들 일곱 부분에는 개개의 부분에서는 물론 계시록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한 팀이 되고, 그리스도의 적들과 사단의 교회가 한 팀이 된 둘 사이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계시록의 첫 전반은(1~11장)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는 교회를 묘사하는 지상에서의 투쟁을 기술하고 있고, 계시록의 나머지 절반은(12~22장), 용(사단)과 그의 두 짐승에 대한 교회의 박해를 기술하면서, 이 투쟁의 영적 배경을 더 깊이 다루고 있다. 이 분석에 의해서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인 20~22장의 적절한 해석을 찾게 된다.

이 마지막 부분은 사단에게 임한 심판과 그의 최후의 운명을 기술하고 있다. 사단이 그리스도의 최고의 적수이므로 그의 운명이 최후에 기술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2. 계시록 20장 1~6절의 해석

우리는 지금 천년설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성경구절인 계시록 20장 1~6절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먼저 이들 구절들은 분명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1~3절의 말씀은 사단의 묶임을 기술하고 있고, 4~6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혼들의 천년 통치를 기술하고 있다.

이들 구절들의 말씀에 대한 전천년설의 해석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일어날 지상에서의 천년왕국 통치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그것들을 보고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앞장인 19장 11~16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만약 계시록 20장이 19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을 연대적으로 이어지게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시록 20장 1~6절의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도래할 것으로 정말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위 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20~22장은 계시록의 일곱 부분들 가운데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이어지는 일들을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계시록 20장 1절은 초기 신약시대로 다시 한번 되돌아간다.

이것이 이들 구절들의 적당한 해석이라는 것은 위에서 발전된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본 장이 사단의 패배와 최후의 운명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분명히 사단의 패배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시작되었고, 12장 7~9절에서 이미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4~6절에서 기술된 천년왕국통치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일어난다는 것이 본 장 11~15절에 기술된 최후의 심판이 천년통치 후에 오는 것으로써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로써 증명된다. 계시록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도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되어 있다(계시록 22:11과 마 16:27;25:31~32; 유 14~15 그리고 특별히 살후 1:7~10을 보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계시록 20장 4~6절의 천년통치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가 아니라 전에 일어나야 한다.

자, 계시록 20장 1~6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1~3절의 말씀부터 보도록 하자.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 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이들 구절에서 사단의 묶임에 대한 기술을 보게 된다. 분명히 마귀 또는 사단과 동일 인물인 용은 일 천년 동안 묶이고 무저갱이라고 하는 곳에 던짐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결박의 목적은 천년이 차기까지 더 이상 만국을 속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계시록은 많은 상징적 수를 쓰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일천"이란 수는 분명히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열이란 수는 완전을 상징하기 때문에, 또 천은 십의 삼 제곱이기 때문에 "일 천년"이란 표현은 한 완전한 기간, 무한정한 길이의 매우 긴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시록의 구성에 대해서 상기한 바와 함께 그리고 사단의 잠깐 동안 즉, 최후의 결투와 최후의 심판을 기술한 본 장의 7~15절에 비추어 동의함으로써 이 천년 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 시부터 그의 재림 직전까지로 연장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0, 14, 15절에서 언급된 "불못"이 최후의 심판장소에 대한 기술이 분명하기 때문에, 1, 3절에서 언급된 무저갱은 최후의 심판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저갱이란 말은 사단의 활동이 일 천년 기간동안 제한될 것이라는 비유적인 기술로서 오히려 생각되어져야한다.

그러면 사단의 결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시대에 적어도 아브라함 시대이후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사단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은 자들이었고,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죄악과, 그들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세상의 다른 나라들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하였고(행 17:30을 보라), 때때로 하나님의 특별계 시를 접한 개인, 가족, 도시를 제외하고는 무지와 과오 속에 살았다. 이 시기에 이들 국가들은 사단에 현혹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우리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죄에 빠진 것도 사단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대 위임을 주셨다(마 28:19). 이 때에 제자들은, 만약 사단이 과거에 했던 방법으로 만국을 현혹하기를 계속한다면 우리가 이것을 가히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의 질문이 일어났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계시록 20장 1~3에서 요한은 이 질문에 확실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의 대답은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인 복음시대 동안에는 사단이 과거에 했던 방법으로 계속해서 만국을 현혹시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의 전 시기 동안에는 너희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이며, 만국을 제자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로 의역할 수 있다.

이것은 사단이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 아무런 해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오직 의미할 뿐이다. 사단이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훼방하는 방법으로 만국을 유혹할 수 없다. 본 장의 뒤에서 천년이 끝난 뒤에는 사단이 결박에서 풀릴 것이며, 나가서 세상의 나라들을 유혹하여 끌어 모아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여 싸우며, 가능하다만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려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7~9절). 그러나 이것을 사단은 결박당하여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없다. 그러면 복음시대의 사단의 결박은 첫째, 복음의 확산을 막을 수 없고,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적들을 모아 교회를 공격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우리는 결론을 지을 수 있다.

신약성경에 사단이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결박당하였다는 어떤 암시가 있는가? 정말 있다. 바리새인들이 사단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는다고 예수를 비방하였을 때,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고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흥미 있는 것은 강한 자의 결박을 기술한 마태의 어휘가 계시록 20장에서 사단의 결박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용된 단어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므로 승리의 개가를 올리셨고, 이때 사단을 결박하셨다. 예수의 마귀를 쫓으심은 이 승리에 대한 증거라는 것을 이 말씀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다. 여기서 언급된 사단의 결박은 복음의 전파와 연결하기보다는 마귀의 쫓으심과 연결하여 보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마귀의 쫓으심은 하나님의 왕국의 임재에 대한 증거이며(마 12:28), 복음이 현재 만국에 전파될 수 있는 것은(마 13:24~30, 47~50을 보라)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칠십 인이 복음 전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라고 하였다. 이때 예 수는 대답하시기를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보았노라"고 하셨다(눅 10:17~18). 이들 언어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의 제자들이 행하고 있는 사역에 의 해서 사단의 왕국이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다는 징후 즉, 사단의 일정한 결박 또는 그의 권세의 일정한 제한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해되어야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사단의 추락 또는 결박은 예수의 제자들의 선교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사단의 활동의 제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교사역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2장 31~32절이다.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 끌겠노라 하시니"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쫓겨나리라"로 번역된 동사 "ekballo"로는 계시록 20장 3절에 "무저갱에 던져(ballo)" 라고 사용한 어휘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심지어 더 중요한 것은 사단의 쫓겨남이나 던짐 당함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리스도께로 인도될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관찰이다.

그러면 계시록 20장 1~3절에서 기술된 사단의 결박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전체 복음시대를 통한 사단의 영향력이, 비록 그것이 완전히 박멸된 것은 아니다 하더라도, 매우 큰 타격을 입어서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 시대의 사단의 결박으로 인하여, 국가들은 교회를 정복할 수 없고,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정 복하고 있다.

이제 일 천년 통치를 다루고 있는 말씀인 4~6절의 말씀으로 주제를 옮겨 볼까 한다. 계시록 20장 4~6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례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우리는 1~3절의 말씀이 천년시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이미 주목한바 있다. 4~6절의 말씀 또한 천년시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지금 보게 된다. 4~6절의 천년기간이 1~3절의 천년기간과 다른 시기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써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는지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1~3절과 4~6절의 말씀이 같은 시기의 천년을 말하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본대로 그 기간은 전체 신약시대 즉,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믿는다.

4절 말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4절은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직면해야 할 첫째 질문은 이들 보좌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계시록에 "보좌"라는 말이 47번 사용되고 있는데, 세 번(2:13; 13:2; 16:10)을 제외한 이들 모든 보좌들은 하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요한이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을 본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 고려 점에 부과한다면, 우리는 요한의 환상의 장소는 이제 천국으로 바뀌었다는 결론을 확고히 내릴 수 있다. 그러면 이들 여섯 절에 기술된 일 천년시기는 내내 같은 반면에 1~3절은 이 천년시기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술하고 있고, 4~6절은 천국에서 일어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자들이 앉은 것을 본다. 계시록은 정의문제에 특히 박해 당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정의문제에 훨씬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의 환상에서 보좌들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심판할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보좌 위에 앉은 것으로써 그들에 대한 요한의 기술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하나의 견고한 방법이다(4절 후반 절을 보라). 분명히 이 통치는 재판할 수 있는 권세를 포함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재판에 대해 단순히 동의하고 감사한다는 뜻인지 또는 보좌에 앉은 자들에게 세상일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재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경우에서든 여기 기술된 그리스도와의 다스림은 그리스도의 재판 활동에 부분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포함한다(단 7:22을 보라).

다음 문제는 누가 이들 보좌 위에 앉는가 이다. 해답은 나머지 절인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에서 주어지고 있다. 요한은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지상에 현재 살고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확실히 "혼들"(psuchai)이란 말은 때때로, 사도행전 2장 41절의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며,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 이나(three thousand souls) 더하더라"는 말씀과 같이 지상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술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계시록 20장 4절에서의 psuchai(혼들)란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Tas psuchai ton pepelekismenon을 "목 베임 당한 사람들" 또는 "목 베임을 당한 백성들"이라고 해석 할 수 없다.[여기서 저자는 목 베임을 받은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므로 psuchai를 "혼들"이라고 번역해야지, 그것을 마치 산 사람처럼 "목 베임 받은 사람들 또는 백성들"로 해석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psuchai이란 말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지칭하는 말이어야 한다. 실제로 이 본문은 계시록 6장 9절의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 가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아래 있어"의 말씀과 일종의 평형을 이룬다.

요한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어떻게 볼 수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해답은 요한이 환상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또 어떻게 요한이 천사가 마귀를 잡아 일 천년동안 결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을 본다. 환언하면 순교자들의 영혼들 즉 그리스도께 바친 충성심 때문에 순교의 죽음을 당한 신앙인들의 영혼들을 요한은 본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였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 기록된 환상은 이들 순교자들의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많은 위안을 줄 것이다. 요한은 그들의 영혼이 지금 천국에 있는 보좌들에 앉아서 심판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 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다." 신국제개역(New International Version)성경은 마치 그들이 앞에서 말한 절에서 언급한 순교자들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이들 말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표준개역(American Standard Version) 성경에서 발견되는 번역에 의해 전달된 가능성인 또 하나의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 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않은 것과 같은" 이라고 이 성경은 쓰고 있다. 이 미 계시록에서는 믿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자들과 그의 왕국은 짐승과 그의 우상을 숭배하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로써 기술되고 있다(13:8, 15~17; 14:9~11을 보라). 그 반대로 주님께 믿음을 지킨 신자들은 짐승과 싸워 승리한 자들로써(15:3) 또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 경배하지 아니한 자들로써(13:15)기술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은 요한이 단지 순교자들보다는 더 폭넓은 그룹을 본 절에서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고 반기독교적인 권세에 대항한 모든 기독교인을 의미한다. 순교의 죽음을 당한 자들은 이 그룹의 일부이긴 하나, 그들이 이 그룹의 천체는 아니다(비록 요한이 여기서 "영혼들"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베임 바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죽은 신자들의 영혼에 대해서 아직까지 말하고 있다고 별 무리 없이 추측할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은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하신 말씀이다. 전천년설 해석자들은 시대구분론이나 비시대구분론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구절이 죽음으로부터의 문자적 부활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 구절에서 지상에서의 재림 후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에 대한 입증을 찾는다. 이것이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인가?

"살아서"로 번역된 헬라어 ezesan은 육체적 부활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마 9:18; 롬 14:9; 고후 13:4; 계 2:8을 보라). 그러나 이것이 그 단어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인지가 문제이다.

요한이 여기서 부활의 종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5절 하반 절의 "이는 첫째부활이라"하신 말씀 즉, 4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통치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말씀으로 보아서 분명하다. 그러나 이 첫째부활이 육체의 부활 즉 죽음에서 일어나는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죽음에서 얼어나는 몸의 부활은 여기서 기술된 것과는 구별이 되는 무엇으로써 20장 11~13절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몸의 부활 즉, 천년왕국 초기의 신자들의 부활과 천년왕국 후에 있을 불신자들의 부활을 믿을 때에만 비로소 4절의 ezesan이 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포함하는 한 가지의 몸의 부활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요 5:28; 행 24:15을 보라), 4절 하반 절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 육체나 몸의 부활이 아닌 다른 무엇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니"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4절 전 반절에 실마리가 이미 주어져 있다. 거기 서 요한은 말하기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앞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하였다. 하반 절은 보좌에 앉은 자들은 죽은 백성들의 영혼들 즉, 믿음 때문에 순교 당한 자들과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 바친 성도들이었다고 간단하게 설명한다. 이것이 "살아서 천년동안 왕노릇"한 그룹이다. 비록 이들 성도들이 죽었지만, 몸으로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며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한은 살아있는 것으로써 그들을 본다. 이 삶이 지고한 행복의 삶이다(빌 1:23과 고후 5:8에서 쓴 바울의 말씀을 보라). 그것은 그들이 보좌에 앉아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함께 참여하며, 심어지는 심판하시는 일에까지 함께 참여하는 삶이다. 이 하늘의 통치가 계시록에서 이 미 언급한 약속인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하신 말씀의 성취이다.

요한의 시대에 교회가 빈번한 압박과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이 환상의 중요성을 인식 할 수 있다. 비록 많은 동료 기독교인들이 죽었고, 일부는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까지 극악한 처형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들 죽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의 영혼에 관한 한 현재 실제로 천국에 살아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통치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 성도들에게는 대단한 위로가 됐으리라. 요한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다스리는 것은 천년동안 즉, 전체 복음시대에 걸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무덤에서 이들 성도들의 몸을 살리시기까지 계 속 될 것이라고 한다.

요한이 지상 천년왕국 통치를 기술하고 있다는 어떤 암시도 이들 구절들에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가 본 장면은 천국에 고정되어 있다. 아무것도 4~6절에서 지상에 관하여, 특히 이 통치의 중심지인 팔레스타인이나 유대인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계시록 20장 4절의 일 천년 통치는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다스리는 통치를 말한다. 이 통치는 미래에 나타날 어떤 것이 아니며,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천년왕국의 문제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 기억된다면, 현실화된 천년왕국설이란 말은 여기 변증된 견해에 대한 적절한 기술이 될 것이다.

다음 문장인 5절 상반 절은 괄호 속에 들어가야 할 성질의 것이며, 그러므로 신국제개역에서는 그것이 괄호 속에 다음과 같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라고 적절히 놓여 있다. 이들 말이 천년왕국 이후에 일어날 몸의 부활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왜 본인이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미 언급한 바 있다. ezesan이란 말은 본문에서 사용된 대로 전문에서 그것이 의미했던 꼭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은 여기서 불신자들의 죽음 즉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이 방금 기술한 신자들의 죽음과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더라고 요한이 말할 때는 그가 방금 신자들에 대하여 말한 것과는 반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즉 불신자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일 천년 기간 동안 통치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사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새로운 삶을 즐기며, 그리스도의 통치에 함께 동참하는 한편, 사후에 불신자들은 이 생명이나 통치 어느 것도 함께 나누지 못한다.

일 천년 기간 전반에 걸쳐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라는 말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다. 여기서 "까지"로 번역된 헬라어 achri는 여기서 말한 것이 천년 기간의 전체 기간 동안 사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까지"라는 말의 사용은 이들 죽은 불신자들이 살아서 이 기간이 끝난 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효과에 대한 분명한 진술을 우리가 기대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진술의 예문은 계시록 20장 3절에 나타나 있다). 오히려 일 천년이 끝난 후 죽은 불신자들에게 일어날 일은 6절에서 말하는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둘째 사망"이 죽은 신자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것을 6절에서 말하는 것은 "둘째 사망"이 죽은 불신자들 위에 권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사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14절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둘째 사망은 몸의 부활 후에 받는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죽은 불신자들에 관한 한, 일 천년이 끝난 후에 변화가 있을 것이며, 더 좋아지기 위한 변화가 아니라 더 나쁘게 되는 변화가 될 것이다.

요한은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계속해서 말한다. 이 구절은 방금 설명한 괄호 속의 진술 직전에 나오는 4절 하반 절에 요한이 기술하고 있는 죽은 신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에 비추어서 우리는 이들 말들이 몸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삶의 전환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전환이 여기서 부활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잘 쓰는 말은 아니지만, 앞서의 문맥의 배경에 비추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첫째 부활"이란 표현은 이들 죽은 성도들을 위한 "둘째 부활" 즉 일 천년기간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일어날 몸의 부활이 정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6절에서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라고 말한다. 다음 구절에서 축복된 이유를,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는 데 두고 있다. 우리가 본대로 둘째 사망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한다. 둘째 죽음에 대한 이들 말들은 요한이 막 언급한 "첫째 부활"이 몸의 부활이 아님을 뜻한다. 왜냐하면, 만약 신자들이 영화롭게 된 몸들 즉, 육체적으로 일으킴을 받은 것으로써 여기서 생각되어야 한다면, 그들은 이미 도래할 생명의 충만한 축복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 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이 전체 천년 기간동안, 죽은 신자들은 제사장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릴 것이다.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연장될 기간을 단지 일 천년 가량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계시록의 마지막 몇 장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몸의 부활 후에 이들 죽은 성도들이 그들이 현재하고 있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수 있을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몸으로 죄 없는 완벽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 20장 1~6절의 무천년설의 해석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대로 이들 본문은 우선적으로 유대인의 왕국으로 세워질 그리스도의지상 통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천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스리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날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다스린다.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