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와 들보
(마 7: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본문에서 주님은 판단에 근거한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을 피하거나, 모든 형태의 판단을 금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별력이나 지혜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는 이들에게 판단하고 분별하고 구별할 것을 명령합니다(고전 6:1-8; 5:9-13; 14:29; 고후 6:14; 딤전 3:1-13; 살전 5:14). 세상은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심지어 사단의 사역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깨어있어야 하고 "영들을 시험해야"합니다(요일 4:1)
주님은 정죄 문제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을 정죄하는 이 성향을 피하려 애쓰면서 반대편 극단으로 돌아가 다시 잘못된 입장을 취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와 같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균형 잡힌 삶의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걷는 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에 대하여 많은 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편이나 저편으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편이나 저편의 오류를 피하여 계속해서 진리의 중심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분별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리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이 남을 정죄하는 무서운 위험과 최종적인 의미에서 심판을 선언하는 무서운 위험을 경고하고 있음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 신상설교에서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내내 마음에 두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관과 생활 방식에서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구제할 때 자랑하며 과시했습니다. 그들은 길모퉁이에서 기도하는 것과 성구함을 넓히는 것에서 과시적(誇示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금식 중임을 널리 알렸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사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금전만능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특별한 점에서도 그들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누가복음 18:9-14에서 보여주신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시여,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 태도가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애써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태도는 초대교회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하여 괴롭혀 왔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제에 접근할 때 이 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요 8:7).
산상설교 중에서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이 말씀보다 더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가 많은지요!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망치고 우리로부터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황폐케 했으며 지금도 황폐케 하고 있는지요!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대한 말씀입니다. 이 주제는 고통스럽지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설교가 우리에게 와서 말씀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이곳에서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우리의 책임으로 이것을 무시합니다. 비록 이 주제가 고통스럽겠지만 너무나 중요하므로 필히 계속해서 더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단지 상처를 무시하거나 또는 상처 부위만을 피상적으로 치료해서는 안됩니다. 올바른 치료법은 그 상처를 탐침(probe)으로 조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건강해지려면 반드시 탐침을 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깨끗해지기 위하여 이 상처를, 혼속에 썩고 있는 이 창(瘡)을 탐침으로 조사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이 위험은 어떤 위험입니까?
우선 이 영은 어떤 점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영의 일종이라 하겠습니다. 정죄하는 이 영은 어떤 영입니까? 이 영은 스스로 의롭다하는 영입니다. 그 배후에는 항상 자아(自我)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영은 항상 자기의(自己義)의 나타냄이요, 우월감이요, 다른 사람들은 틀리고 우리는 모두 옳다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 영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만듭니다. 이 영은 항상 경멸하는 태도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영입니다. 이러한 것에 곁들여서 이 영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며 경멸적으로 대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바리새인들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영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핵심부는 혹평적 성향인 것 같습니다. 비평적인 것과 혹평적인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비평은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참된 비평은 거의 없습니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이나 기타 어떠한 것이든지 참된 비평은 인간 정신의 최고의 활동 중 하나입니다.
참된 의미에서의 비평은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건설적입니다. 그것은 감상입니다. 비평을 하는 것과 혹평적인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용어의 의미에서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바로 혹평적인 사람으로서, 비평을 위한 비평을 기뻐하며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람은 결점을 발견하기를 기대하고, 실제로 결점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비평을 요청 받은 일에 접근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 그대로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날 것이며,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표현한대로 우리가 그 때에 부끄럽지 않기를 원한다면, 지금 주의합시다(요일 2:28). 만일 우리가 심판날에 담대함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바로 그 판단으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에 가게 될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곳 이생에서, 그리고 이생 후에 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 주님께서 산상설교의 이 대목에서 첫 번째 말씀으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이 말씀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너희도 그들에 대하여 절대로 불친절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옳으며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자신을 심판에 노출시키고 있으며, 장차 이러한 일들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잃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제시하신 바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한 원리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판단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낳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의 표준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거니와, 이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앙갚음을 당한다'고들 말합니다.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면밀하게 살피고 조사하여 그들 속에 있는 사소한 결함에 대해 말했던 사람들이 거꾸로 그들에 의해 자신들이 판단을 받을 때에 흔히 크게 놀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판단을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들의 기준과 자신들의 척도로 판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술을 여기서 그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필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실지로 선언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가 앞에서 설명해 온 이 판단으로, 우리 자신의 표준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해석에 대한 몇 가지 성경의 권위를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2장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봅시다. 거기서 주님은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는 그들이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48). 다음으로 로마서 2:1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 사람아, 판단하는 네가 누구이든지 변명하지 못할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 스스로를 정죄함이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너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네가 알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옳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네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에 대한 가장 명백한 말씀은 야고보서 3:1에 주어졌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지만, 야고보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함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야고보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무시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야고보가 이 특정한 문제에 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 형제들아, 많이 선생이 되지 말지니,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앎이라". 달리 말하면, 만일 여러분이 권위자인체 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선생이 된다면, 그래서 여러분이 선생으로 권위자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권위에 의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바로 그 주장에 의하여 여러분은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권위자로 자청하십니까? 좋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여러분에게 적용될 바로 그 표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구절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진술의 하나입니다. 내가 성경에 대해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까?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는 내가 주장하는 그 지식의 관점에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이 일들에 관하여 실지로 잘 알고 있는 종이다'라고 주장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매를 많이 맞는다고 해서 결코 놀라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권위자로 자처한다면, 바로 그 표준에 따라 판단을 받을 경우 우리는 불평을 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평할 어떠한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지식을 갖고 있다면, 필히 이 지식에 맞는 삶을 삶으로 이 지식을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주장한 그 주장에 의해 나 자신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유심히 살피는 일에 용의주도하다면, 바로 그 표준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며, 나는 전혀 불평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불평한다면 내게 이런 반론이 주어질 것입니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경우에 대해서는 왜 실행하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랍고 두려운 생각입니다. 내가 알기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이 죄악스러운 습관으로부터, 그리고 그같이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더럽고 추악한 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주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이유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3∼5 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느냐?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 이같은 풍자가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보다 더 완전한 반어법의 실예가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얼마나 값진 것인지요. 이같은 방식의 논증을 많은 원리의 형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세 번째 이유로 우리가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판단을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이 이러하기 때문에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판단을 받을 것이고, 판단의 표준을 우리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필히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님은 '잠깐 멈추어라, 너희는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증명하십니다. 주님은 우선 우리가 의나 참된 판단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관심을 두었다면, 그것을 우리 안에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지로 진리와 의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자신을 설득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기를 원치 않으며 비판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직 진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진실로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면 너희 자신을 판단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의 관심은 실지로 진리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공평한 논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가 의와 진리에 있으며 인신 공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는 항상 자신에 대하여 가장 가혹한 비평가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직업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래이든, 연극이든, 그림이든, 기타 어떤 것이든,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와 참된 비평가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너희는 진리와 의에 관심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그랬듯이 너희 자신은 눈감아주고 다른 사람들만 비판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같은 원리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사람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혹평의 영은 원리보다는 인신 공격에 관심을 갖는 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거리입니다. 우리는 실지로 특정한 주제나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제거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혹평의 영은 우리로 참된 판단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만약 편견이 있다면, 만약 사적인 감정과 개인 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참된 심문관이 아닙니다. 율법조차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배심원중 한 사람과 재판받고 있는 사람이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 배심원은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배심원에게 요구되는 것은 공평입니다. 절대로 편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사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편파적이지 않은 객관적인 재판이어야 합니다. 바른 재판이 되려면 사전에 반드시 사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에 적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개인이나 인신 공격에 너무나 관심을 갖기 때문에 전혀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판단에는 이처럼 숨은 동기가 너무나 잦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과 그의 행동을 구별하는데 너무나 자주 실패합니다.
주님의 분석을 따라가 보기로 합시다. 주님의 다음 논증은 4절에 있습니다.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이 말씀은 최고의 풍자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의 상태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전혀 무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허물에 큰 관심을 갖는 체하고 그들의 유익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 있는 이 사소한 결점으로 괴로워하며 이 티를 제거하고 싶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티를 제거하는 일이 너무 섬세한 과정이기 때문에 너희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이 들보가 여러분을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매우 통렬한 비평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비평에는 눈먼 사람이 다른 눈먼 사람을 인도하려고 애쓰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러운 일은 눈먼 안과의사라고 쓰여있습니다. 눈먼 안과의사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눈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아무 쓸모가 없다면 눈먼 안과의사는 얼마나 더 쓸모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는 체하는 사람의 민감한 눈에서 작은 알갱이의 티를 빼낼 수 있을 만큼 분명히 볼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눈이 완전히 맑은지를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들보에 의해 눈이 멀어 있는 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님은 실제로 우리를 위선자라고 정죄하고 계십니다.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문제의 진상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실제로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정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척합니다. 우리는 이 결점을 발견하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척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바와 같이 (이것은 무서운 부분입니다) 사실은 그 결점을 발견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칭 친구인 것처럼 찾아가서는 '이런 결점이 당신 속에 있다니, 매우 부끄럽군요'라고 말합니다. 이같은 행동에 의해 흔히 나타나는 악의와, 이러한 사람이 흔히 즐기는 쾌감은 어떠한 것인지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너희가 이 문제에 순수하며 참되다면, 너희 자신에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첫째 -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버려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버리리라."
이것을 이같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그리고 그들에게서 결점과 허물과 연약함과 약점을 제거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의 영과 여러분의 태도 전체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판단과 혹평과 비판의 영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미세한 티와 대조해 볼 때 실지로는 들보와 같습니다.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의 이 판단하는 영보다 더 무서운 형태의 죄는 없다는 것을 알아라. 그것은 들보와 같다. 다른 사람이 불륜과 부도덕과 정욕의 죄에 빠지거나, 여기 저기에서 작은 과실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 속에 있는 마치 들보와 같은 이 영과 비교할 때, 그것은 단지 눈에 있는 작은 티일 뿐이다. 너희 자신의 영에서부터 시작하라." 주님께서 바꾸어서 이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자신을 온전히 정직하게 직시하라. 자신에 관한 진실을 인정하라!"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행해야 합니까? 매일 고린도 전서 13장을 읽으십시오, 매일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진실에 대하여 직시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한 말을 앉아서 분석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의미하는 바가 실지로 무엇인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운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선언을 정직하고 참되게 살핀다면, 우리는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충분히 겸손해져서 비판과 혹평의 영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논리의 표본입니까! 사람이 진정 참되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결코 누구도 잘못된 방법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죄하고 자기 손을 씻고 자기를 깨끗케 하고자 애쓰는 일에 모든 시간을 사용합니다. 비평과 혹평의 영을 제거하는 한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먼지와 같이 낮추어, 그 결과 우리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하며, 필연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우며 그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빼낼 수 있는 적합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눈에서 티를 빼내는 과정은 매우 어려운 수술입니다. 눈보다 더 민감한 기관은 없습니다. 손가락이 눈에 닿자마자 눈은 닫힙니다. 눈은 너무나 예민합니다. 눈을 치료하는데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동정과 인내와 침착과 냉정입니다. 이것들이 요구됨은 수술의 섬세함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영적 영역으로 옮기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혼을 다루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 속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손대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작은 티를 빼낼 수 있을까요?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겸손해야 하고, 동정심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죄와 자신의 가치 없음을 깊이 인식하여, 그 결과 다른 사람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때 정죄하기는 커녕 슬피 울고 싶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돕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심히 기뻐하여 그도 동일한 기쁨과 즐거움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맑은 시력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영적 안과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직시하고, 이 들보를 제거하며,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겸손하고 이해하며 동정적이고 관대하며 사랑이 넘치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 다른 이에게"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엡 4:15). 이 일은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감사하옵게도,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할 때, 여러분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동일한 진리를 말하지만, 여러분으로 하여금 즉시 자신을 방어하도록 이끌고, 그렇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도록 이끄는 태도로 말합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야고보서를 인용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각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할지니라."(약 1:19).
이상 말씀드린 세 가지 이유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갈보리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비추어서 이러한 진리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이생에서 징계를 피하고 싶다면, 그리고 -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거니와 - 오는 세상에서 손실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는 것 외에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 산상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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