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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1854-1921)의 생애

by 【고동엽】 2007. 9. 17.
 

헤르만 바빙크(1854-1921)의 생애

 

2011년 10월 5일에 756쪽이나 되는 카이퍼 저술 목록 해설집이 출판되었다. 그날 전임 수상까지 나서서 그 의미를 짚어보는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2주간이 지나 한국에서는 카이퍼의 동역자 바빙크의 교의학 4권의 번역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카이퍼 저술 목록을 편집한 편집자는 동양에서 나온 카이퍼 저작의 번역이나 관련 저서들의 목록을 입수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하였다. 언젠가는 바빙크 저술 목록을 편집할 때,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까? 아니면 우리가 바빙크 저술 목록을 출판할 수 있을까?

 

필자는 “부흥한 교회가 신학을 생산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바빙크의 교의학 번역 출판은 한국교회가 개혁신학의 발전을 이룩하는 중요한 일보이다. 역자와 출판사의 수고와 인내 그리고 대담한 결단에 칭찬과 축하를 보낸다. 참석자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번역으로 큰 유익을 얻기 기대한다.

바빙크의 생애와 사역으로부터 한국교회가 얻을 수 있는 지침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출생과 학업

바빙크는 1854년 12월 13일에 네덜란드의 호오허페인에서 그 지역의 분리 측 목사인 얀 바빙크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바빙크는 비교적 내성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1871년에 즈볼러 라틴어 문법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아주 탄탄한 고전어 교육을 받았다. 1873년 7월 15일에 바빙크는 졸업시험을 치렀고, 라틴어와 불어와 네덜란드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같은 해에 아버지가 신학교가 있는 캄펀교회로 옮긴다.

 

 바빙크는 1873-4년 한 해 그 신학교에서 공부한다. 카이퍼가 1874년 3월 24일에 캄펀의 학생들 앞에서 「네덜란드 헌법에 보장된 자유의 원천과 보장인 칼빈주의」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였다. 이것은 바빙크의 일생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두 사람의 첫 번째 조우였다.

 

바빙크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874년 9월 23일, 레이던으로 향하였다. 현대 신학의 본거지였던 레이던에는 스홀턴과 쿠우넌, 틸러 등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하여 레이던은 유럽에서 큰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스홀턴에게서 바빙크는 옛 개혁신학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고, 교의학을 명쾌하게 강의하는 방법도 배웠다. 헬라어와 라틴어 뿐 아니라, 별도로 문학부에서 셈어를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바빙크는 특히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친 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평생 옵조오머의 경험주의를 경계하고, 칸트를 따라 18세기의 합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자유주의 속에서도 불구하고 분리 측의 아들이었던 바빙크는 자신의 신앙을 놀랍게도 흔들림 없이 지켰나갔고, 여러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분리교회 출신 학생들과 학생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이들과 함께 독일, 프랑스 고전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1876년 5월 24일에 바빙크는 예과를 최우등으로 마쳤다. 1877년 12월부터 1878년 4월 사이에 신학 과정 시험에서도 우등의 성적을 얻었다. 그 해 9월 20일에 셈어 문학 졸업시험에도 합격하였다. 이 공부로써 그의 교의학은 주석적 기초를 얻게 될 것이다. 1879년 4월 4일에는 신학 석사 시험을 치렀고, 이번에도 우등의 성적을 얻었다. 석사 논문 주제는 “슐라이어마허가 성경 해석에 끼친 영향”이었다.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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