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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됨의 자격 (행 1:21-26)

by 【고동엽】 2021. 7. 24.

사도됨의 자격 (행 1:21-26)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께
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모습을 끝까
지 지켜보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
다.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저들은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대부분 사람
들이 갈릴리 사람들이지만 이 예루살렘에서 저들은 예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
며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모여 전심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분부를 기다립니다. 부
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영으로 나타나셔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릅니다. 몇날을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다리라 하셨기에 저들은 함께
모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 이십 문도들은 기
다리는 가운데 세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로, 저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저들은 마음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 가롯 유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
니다. 베드로는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비록 가롯 유다가 우리 가운
데 있었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우리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와 함께 행동은 했지만, 예
수님의 제자로 함께 행세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유다는 우리와 함께 한 사람은 아니었
다. 이렇듯 유다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해석을 내리려 했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말씀
대로 유다는 제 갈길로 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언된 바요 이미 주신 말씀안에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유다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해답을 찾은 것
입니다. 베드로는 성경안에서 저들의 마음속에 있든 가롯 유다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
를 불식 시키려 했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공동적인, 집단적인 참회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들은 가롯 유다로 인해서 마음이 아팟습니다. 그 문제를 빨리 잊어버려야 했
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경적인 해답을 내린 것입니다. 있을 일이 있은 것이니 마
땅하다 유감스러울 것도 없고 크게 잘못된 것처럼 그렇게 마음 아파할 것도 없다고 생
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예언서를 찾아서 성경대로 그 사건에 대하여 해석
을 내립니다. 이렇게 함으로 저들 마음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제하려 했든 것입니
다. 메시야가 어떻게 자기 제자에게 팔리울 수 있느냐? 메시야가 어떻게 십자가를 지
고 무력하게 죽을 수 있느냐? 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통해서 종
식 시키려 했습니다. 부활 사건을 통해서 저들은 밝은 아침을 맞았고 기쁨과 영광을
누렸습니다마는 그래도 메시야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과 제자인 가롯 유다에게 팔
렸다는 사실이 저들 마음에 무척이나 언짢은 앙금으로 남아 있었든 것입니다. 이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안에서 찾았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유다가 빠진 열두 사도의 반열에 한명을 보선하여 그 자리를 채우려
했습니다. 본디 이 열두 제자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교회
의 질서와 구조를 위하여 한명을 보선하여 그 자리를 채우려 했습니다. 그것은 열둘이
라는 숫자가 열두 지파와 보좌를 상징하기에 그것을 채우자는 목적도 있었습니다마는
그 보다는 심리적인 목적이 더욱 컸습니다. 보세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자리가 비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가롯 유다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이 못마땅했든 것입니다. 따
라서 저들은 이 문제를 소극적으로, 임시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영구
적으로 해결하려 했든 것입니다. 저들은 가롯 유다의 빈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려
했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열두 사도라고 하는 것이
아주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요 영원한 지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채울 수
도 있고 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세요. 가롯 유다가 빠진 열
두 사도이니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빈자리로 해서 가롯 유다의 그림자가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만이 특별
한 사람이 아니요 사도 못지 않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열두 사람이 대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채우려 하는
것이지요

  만일 그것이 절대적인 지위라고 한다면 누가 감히 채우려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기 사도들의 겸손이 있고 베드로의 겸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평등의식이 있
고 보편의식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나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만이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얼마든지 저들 가운데 부활의 증인이 있고 얼마든지 저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일군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겸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
서 저들은 일백 이십 문도 가운데 한사람을 택하여 열둘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이 방법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가롯 유다의 문제에 대한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성경적으로 이해했고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빈자리를 다시 채워서
다시는 가롯 유다의 생각을 하지 않도록 했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사도는 특별한 사람이 아
니라 보통사람입니다. 다만 주님께 특별한 은혜로 선택을 받았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사도의 직능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
야 하리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의 절대적인 사명입니
다. 물론 이밖에도 사도의 사명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도는 진리를 창출해내는 사람도 아
니요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 역사하셨고, 예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
셨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그 역사의 효력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사건
을 개개인의 마음 속에 사실로 믿어지게 하는 것 -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actualization 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거듭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아무리 엄연한 사실
이요 확실한 사건일지라도, 내가 믿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것이 내게는 사실이 아닌 것
입니다. 나와는 관계가 없는 사건이 되고 맙니다. 믿을 때에야 그 사건은 나와 관계있
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믿게 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증인이 필요합니다.

(제가 평양에 다녀와서 우리 교인들에게 평양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평양이 어떻고 북한
이 어떻고 하는 방송이나 신문의 이야기를 늘 들어왔습니다만, 설마 그렇게야, 하고
의심했는데, 이제는 믿을 수 있겠습니다. 목사님이 직접 보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니
이제는 믿겠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그 동안은 안믿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리고
안믿으니까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제 제가 직접 다녀와서
이야기를 하니 제 체면을 봐서 믿겠다는 것입니다. 저를 믿고 믿겠다는 것이지요. 보
십시오. 믿게하는 데에 제가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분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저의
말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부터 지식이 성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건이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안믿는 사람에게
야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
과 안믿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보십시오. 천양지차입니다. 하기야 같을 수
가 없지요. 부활을 믿는 사람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인사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마는, 부활을 안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끝을 의미합니다. 지옥 천당
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겟지만, 있다면 틀림없이 지옥갈 것이라며 두려워합니다. 부
활을 믿고 안믿고간의 차이가 이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증거입
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
한 사람들이 그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해야 합니
다. 사실 직접 만나고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증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세요. 사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
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
리라" '우리와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사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혼자서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증거하는 것입니다. Co-witness입니다. 혼
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열한 제자가 더불어 증거합니
다. 그리고 여기에 보선된 한 사람이 더불어 증거합니다.

  이제, 저들은 유다가 빠진 그 자리에 한 사람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
저 부득불 사도의 자격을 논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도의 자격은 엄격하게 신학적
으로 세 가지 입니다.

  첫째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후, 복음을 증거하시기 시작한 그 삼년 동안을 늘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다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한 사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공생
애에 동참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한
사람은 열두 제자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습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몇
번 만났다든가 며칠 동행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두 사도가 예수님과 동
행한 것같이 줄곧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본 사람, 모든 것을 들은 사람을 의
미합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하는 성경의 말씀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면서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을 함께한 사람만이 사도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친히 지명하여 세운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로 삼을 열두 사람을 친히 지명하
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 이렇게 불러내셨습니다. 이렇듯 예
수님께서 친히 이름을 불러 지명한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동행했
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예수님과 삼 년 동안 같이 다녔다 하더라도  그것
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명하셔야 합니다. 사도의 자격은 시험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명하심으로만 가능합니
다. "너는 내 제자다, 나와 함께 가자"하고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이름을 부르셔서 지
명한 사람만이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뵌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
는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들이니까 마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꼭 열한번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해서 예수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뵌 사람에게라야 사도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위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사도가 될 수 있고,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
서 우리는 재미있는 추리를 해볼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사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
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생애를 같이했습니
다. 그리고 예수님께 지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는 못했
습니다. 그러니 가롯 유다는 사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또 한 사람,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그 역시 자격이 의심스럽고 아리송해서 늘 문제
가 되었습니다. 그도 이를 의식했던 것인지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
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에
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 9:1,2)"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조금 미진한 구석이 있습니다.
조금 점수가 모자랍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뵈었습니다. 그리고 주
님께 지명도 받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불러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주님께로서 사명
이 주어졌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사도의 두 가지 요건은 지녔는데, 딱 하나가 모자랍
니다. 그는 예수님 살아 생전에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가끔 사도 바울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면 이점을 들추어 그를 섭섭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하지 못했으니 진정한 사도일 수 없다고 꼬집었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누누이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만나
뵈었다고 변명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바울은 예수님의 삼 년 동안의 공생애에
는 동참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드러내놓고 사도임을 자처했습니다.  
보세요. 같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요한은 자신을 사도라고 내세우지 않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장로된 자"라고 점잖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보면 편지를 쓸 때에
도 반드시 "파울로스 둘로스 그리스도 예수 아포스툴로스"라는 말을 집어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는 말로 편지의 첫머리를 시작합
니다. 이처럼 바울이 스스로 사도임을, 아포스툴로스임을 자꾸 강조한 것은 스스로 그
자격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사도의 세 가지 자격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봅시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잇습니다. 뿐만아니라 이것은 우리들 모두에
게 의미가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선은 체험적 신
앙이 필요합니다. 자기 생활속에서 주님을 만났어야 합니다. 병중에서 만났든, 사업을
하면서 만났든, 길을 가다가 만났든 분명한 체험적 신앙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책상
머리에 앉아서 공부한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체험적 신앙이 필
요합니다. 그리고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지명하셨
다고 하는 개인적 소명 의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지명하셨다고 하는
개인적 소명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가하면 종말론적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운데서 늘 주님
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
님의 일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종말론적 인식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주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을 바로하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주님
의 일을 할수 있습니다. 꼭 명심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가롯 유다가 빠진 열두 사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보선하는 모습
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백 이십 문도는 사도의 요건 세 가지에 합당한 사람을 선택
하여 사도로 세우려 합니다. 먼저, 예수님과 삼 년 동안의 모든 생활을 함께 보고 듣
고 경험한 사람을 사도로 세우려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사람 가운데서 사도를 선택하려 합니다. 이 요건에 합당한 사람
으로 바사바와 맛디아가 천거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는 주님
께서 친히 지명을 하심으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개별적으로
지명을 해 주셔야 합니다.

  결국 저들은 주님의 뜻을 묻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선택합니다. 보세요. 바사
바와 맛디아, 두 사람 모두 휼륭합니다. 사도로서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제는 주님
의 뜻만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일백 이십 문도는 이 두 사람을 세워놓고 하나를 사도
로 지명해 주십사하고 주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맛디아를 제비로 뽑아 열
두 제자의 반열에 함께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
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인 소명에 대하여 주님 앞에 묻고 있는 저들의 진지한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비뽑기 절차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들의 제
비 뽑기는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네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는, 성경적 근거에 준합니다. 가롯 유다에 대한 문제만도 성경에 기초하여 성경
적 맥락에 따라서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식
(common sence)에 준합니다. 저들은 바사바와 맛디아, 이 두 사람을 사도의 후보로 천
거합니다. 이것은 아무나 마구잡이로 선택하여 세우고 그저 투표나 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
람을 쓰실 것이다 하고 주님께서 주신 자신들의 상식을 다 동원하여 천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한 사람, 우리와 함께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뵌 사람,
이렇듯 저들은 상식적인 문제를 충분히 고려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을 추
천해 놓은 것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천거한 즉시 투표를 한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주님의 역사가 함께하시기를, 주님께서
합당한 사람으로 지명해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런 후에야 제비를
뽑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도 투표를 할 때면 언제든지 기도를 먼저 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 마음에 감동해주시기를, 이 투표를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를 지명해
주시기 바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
니 우리 마음대로 투표한다고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투표의 결과 역시 주님의 뜻이라
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써 교회의 모든 구조와 질서가 바로잡힐 줄로 믿습
니다.

  저들은 주님의 뜻을 제비뽑기로 물었습니다. 제비뽑기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제비뽑기"는  헬라어로 "순카테페피스데"라고 합니다. 이
것은 "순" "카타" "푸세이로스"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여기서 "순"과 "카타"는
전치사요, "푸세이로스"는 "조약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하고 매끈매끈한
조약돌을 의미합니다. 이제, 제비뽑기하는 과정을 보십시다. 먼저, 천거된 두 사람의
이름을 각기 조약돌에 써넣습니다. 이름을 쓴 조약돌 두 개를 둥그런 그릇에 담은 뒤
에 기도를 드립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사도로 지명해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나서 조약돌이 담긴 그 그릇을 한참 흔듭니
다. 그러다가 하나가 툭 튀어나오면, 그 조약돌에 적힌 사람이 뽑히는 것입니다. 이것
이 바로 당시에 있었던, 저들이 사용했던 제비뽑기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이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습니
다. 우리는 그저 많은 사람이 지지하면 그것이 무조건 옳은 줄로 생각합니다마는, 그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나라에 필요한 일꾼을 투표를 통해서 선출합니다. 그
런데 그 선거라고 하는 것은 사실 후보 가운데 누가 당선되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그
런 입장에서 우리가 선거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다. 그런
데 악한 사람이 옳은지 선한 사람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것을 투표로 결정하겠
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온 백성이 다 지지한다 하더라도 틀린 것은 틀린것
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만이 지지한다 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렇습니
다. 민주주의는 무조건하고 대세에 기준하여 좇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지
지를 받았다고 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먼저, 민주주의에는 일반적 상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선출할 때에 그들
의 도덕성도 보고, 정치성도 보고, 능력도 보고, 선악까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
중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그 후보들 모두 자격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면 나라가 흥
하고 저 사람이 하면 나라가 망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긴 가끔 선거  유세할 때
에 보면 자기가 하면 나라가 흥하고 다른  사람이 하면 나라가 망할것처럼 말합니다마
는, 그것은  잠시 내뺕는 선거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하면 흥
하고 저가 하면 망할 것이라면 그 선거는 하나마나 아닙니까? 민주주의란 어디까지나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다는 그 신뢰성 아래서 하나를 택하는것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선거를 할 때에도 보면 여러 후보를 놓고 투표를 합니다마는 실은
대체로 두 사람의 후보를 놓고 그 중의 한 사람을 뽑습니다. 우리가 선거를 할 때에도
보면 여러 후보를 놓고 투표를 합니다마는 실은 대체로 두 사람의 후보를 놓고 그 중
의 한 사람을 뽑습니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그것이 무슨 민주주의입니까? 민주주의라
면 말 그대로 내 마음대로 써내야지요.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천거하여 세워진 사람 중에서 누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격이 충분한 두 사람을 세워놓고 국민에게 그 뜻을 물어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
미의 선거요 민주주의입니다.

  여러분, 민주주의는 수의 우세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의와 불의
를 가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내용도 가만히 보십시오. 바
사바와 맛디아, 두 사람을 놓고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휼륭한 사람이
요, 사도로서 자격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어느 쪽이  되어도 좋습니다. 저들은 그  선
택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지명해주시기를 바
랍니다. 그리고 투표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투
표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선과 악도 투표로 결정하고, 옳고 그른 것도
투표로 결정하고, 진리와 비 진리마저 투표로 결정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
입니다.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다 옳고,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다
그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선되지 못했을 뿐, 그른 것은 아닙니다. 그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선과 악이 여기서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은 사도를 세우는 데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상식을 동원했습니다. 사도의
자격에는 이런저런 기준이 있다 하고, 거기에 맞춰 두 사람을 천거한 것입니다. 그리
고 나서 이제는 그 마지막 결정을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결정해 주십사
하고 간절히 기도드린 후에 제비뽑기를 합니다. 누가 당선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
국은 사도로 맛디아가 당선됩니다. 저들은 맛디아를 주님께서 지명하신 사도로 믿고
열두 사도의 반열에 서게 합니다. 이렇듯 저들에게는 상당한 겸손과 신앙과 합리적인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는 이러한 선을 잊어버리고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
을 떠나서 불합리하게 선택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여기에 운명을 다 걸고는 도덕성까
지 물으려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서적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학교를 선택한다거나 직업을 선택한다거나 배우자를 선택한다거나 할 때에
도 보십시오. 그다지 성서적이지못합니다. 여러명의 배우자감을 놓고 무작정 "주여,
한 사람을 지명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는 그 계시가 꿈속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마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가 있고 상식이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건강한 사람, 신앙이 있는 사람,  
성격이 좋은 사람, 봉사 정신이 있는 사람, 나아가 이기적인 즐거움보다는 남을 섬기
면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 교회생활 속에서 봉사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
을 선택해야지요. 그런데 이러한 자격을 모두 갖춘 사람이 두 사람이라서 고민이 되거
든 저에게 오십시오. 제비 봅아드릴 테니까요.

  사실 아무리 같아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애초부터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가
한쪽에만 점수를 주어서 합리화하고 동등하게 만든 것일 뿐, 사실 진정으로 동등하지
는 않았습니다. 대개 보면 될 수 있는대로 큰 것, 좋은 것, 이로운 것만 택해 나가다
가 결국에는 큰 손해를 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게 이롭고 남에게 이로운 것이  있
거든 남에게 이로운 편을 택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첫째로 주님을 위하
고, 둘째로 남을 위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선택의 기준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유다를 대신하여 열두 제자의 반열을 세운 사도를 제비뽑기로
세우는 일백 이십 문도,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근대 민주주
의의 선거방법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선택해나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간혹 우리는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 지혜를 얻습니
다. 맛디아를 선택하는 그 절차나 기준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지혜를
다해서 옳은 일, 선한 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는
데도 둘이 남고 셋이 남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기도하고 정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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