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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경륜(사도행전 21:27~36)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
오늘의 본문은 얼핏 읽기에는 하나의 사건만 기록된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생각하면 이 본문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는지, 내가 왜 이렇듯 억울하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납득이 가는 일보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남의 일에 대해서는 잘 설명할 수가 있는데 내가 당한 일에 대해서는 설명할 재간이 없다고 말입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는지 그것을 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체포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가 체포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죽여야 됩니까? 왜 바울이 없어야만 살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예요. 죽이겠다는 말은,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저가 죽어야 내가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복음 전하는 바울이 없어야 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왜 그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역사의 최대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의인이 세상에 있다고 안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의인이 핍박을 받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습니다. 왜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아야 합니까? 왜 사람들은 의인과, 경건한 자와, 선한 자를 그대로 두고 지낼 수 없는가, 왜 그들과 공존할 수가 없는가, 왜 같이 살아갈 수가 없는가, 왜 꼭 없애야 하고 핍박을 해야 하는가 그 말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 진실하게 사는 사람,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또한 이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니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울하게도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죄 없이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일이 순리대로 편안하게, 안일하게, 무사하게, 그렇게 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됩니다. 그것도 성전에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성전 밖으로 쫓겨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성전 출입이 됩니다. 그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예루살렘에 돌아오면 반드시 유대사람으로서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지냈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바로 지금, 예배드리는 현장에서 그는 체포되어 끌려나옵니다. 더욱이 본문에는 아주 비참한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30절)"―생각하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하나님의 종이 성전에서 끌려나오고, 그 큰 성전 문이 꽝하고 닫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요, 이것이 세상사입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이나,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인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모두가 바울이 무사하기를, 바울이 체포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무사히 다시 이방으로 갔으면, 제발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무사했으면, 다시는 피 흘림 같은 것은 없었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여론이 그렇지 않아요. 바울이 오기만 하면 무슨 음모와 무슨 계책을 꾸며서라도, 저를 없애겠다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야고보가 미리 손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지금 많은 오해를 받고 있으니,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제사를 드리고, 며칠 동안 성전에서 회개하고, 이방에 돌아다니면서 이방사람들과 같이 지내던 중에 실수하고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고 저들은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으로 치고, 결례를 행하자 그래서 바울이 편안하고 무사하도록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결례가 끝남과 동시에 체포되니까요. 아무튼 사도들은 바울이 무사하기를, 그래서 다시 이방에 가서 활발하고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고, 힘쓰고,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다 구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예상했던 대로 바울은 체포됩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바울은 이상한 상황에서 체포됩니다. 결국은 그가 여기서 체포되어 로마까지 가게 되거든요.
가만히 보면, 바울이 체포당하는 사건은 참 모순스럽습니다. 로마사람들이 바울을 체포하라고 했다던가, 어떤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서 누가 체포를 했다던가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예요. 묘하게도 동족 유대사람들 때문에 그는 로마군대의 천부장에게 체포됩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고 싶어서 체포한 것이 아니예요.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바울이 유대사람들에게 맞아죽을 판이라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체포한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고 싶어서 묶은 것이 아니예요. 묶는 척해야 군중이 조용해질 테니까 묶은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되어지는 일이 이렇게 복잡하고, 이렇게 모순스럽고, 이렇게 부조리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로마사람에게 체포되어서 로마까지 압송되는데, 그 과정이 철저하게 모순적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을 체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대사람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하니까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득불 체포했다-이것이 누가가 증거하고 있는 당시 사건의 현실입니다.
자,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27절)"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시아란 소아시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마다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핍박했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따라왔다면 모르지만 죽이기 위해서 악착같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니 이게 보통 극성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렇게까지 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부득부득 죽이려고 했느냐-우리는 여지껏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사도 바울이 핍박받았던 얘기를 살펴왔습니다. 가만히 보면 로마사람들 때문에, 혹은 군인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핍박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은 거의가 유대사람들로부터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핍박을 했어요. 회당장이 핍박을 하고, 장로들이 핍박을 하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했어요. 왜 핍박을 했느냐-그 문제는 끝끝내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습니다마는 사도행전의 맨 끝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아무튼 저들이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것에는 공통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시기와 질투 때문인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 신앙이고 뭐고 보이는 것이 없어요. 아주 꽉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하면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됩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운동을 해도 무효랍니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고 맙니다.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공부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남이 하니까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다 끝내기 전에 제풀에 죽기도 합니다. 또 사업하는 데에도 시기와 질투가 작용을 하면 성공하는 사업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강한 경쟁심, 시기 질투, 이것이 문제입니다. 철학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이 살아야 나도 삽니다'하는 생각은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그런데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를 죽여야 한다―사실은 이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헤겔의 변증입니다. 유물사관의 기본철학입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마음씨가 공산당입니다.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산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을 죽여야 된다, 내가 살기 위해 죽이는 것이니까 그것은 타당하다, 저 사람이 살아 있고는 내가 죽는다―이런 생각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남을 살려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도 아내가 기뻐야 나도 기쁘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꼭 상대방의 기를 죽여놓아야 자기가 사는 줄 알아요. 못된 성미지요. 이런 사람은 교회를 나와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남을 꺾고, 무슨 말이나 농담을 해도 핀잔을 주어서 남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놓고, 저는 좋아합니다. 남을 낮춰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 압니다. 이게 얼마나 잘못된 철학입니까? 이런 사람은 중생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비뚤어졌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매일반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살겠다'하는 마음보가 있어요. 지금까지는 자기네가 거침없이 마음대로 지배해왔어요. 회당장도 되고, 장로도 되고, 교회에서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딱 나타나 외치니까 백성들이 다 그리로 갑니다. 그러니 자기네들은 뭐가 됩니까? 그래서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귀들이 길을 가는 이 성자에게 시험을 걸었습니다. 예쁜 여자로 나타나 유혹을 합니다. 그래도 성자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금덩이를 눈앞에 보여줘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협박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갖가지 방법으로 시험을 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성자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한 마귀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풀이 죽어 있는데, 대장 마귀가 나섰습니다. "저리 비켜라. 내가 하는 것을 보아라." 그리고 성자의 귀에 입을 대고 무슨 소린지 딱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성자의 얼굴이 확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에 놀란 마귀들이 대장에게 물어봅니다. "도대체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간단하지. '당신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가 되었소'라고 했지." 바로 그 한마디에 성자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입니다. 동생이 주교가 되었으면 "참 잘됐구나. 할렐루야!"해야지 안색이 변하다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씨가 어디까지 왔습니까? 시기 질투는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어느 순간 그것이 작용한다 싶으면 그 뒤에 사단이 있는 것으로 아세요. 예수 믿는 사람을 시험하는 데는 이 시기 질투가 마지막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실은 가야바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질투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바울은 꼭 죽어야 된다, 바울을 죽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시기 질투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없어야 자기네가 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반드시 바울을 죽여야 할 역사적인, 혹은 신학적인 이유가 저들에게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소위 히브리파 유대인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하니까 이방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온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은 그 중의 대표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다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바울은 지성인입니다. 바울이 갈릴리의 어부라든가, 혹은 초보였다면 그가 말할 때에 "그 사람, 정신나간 사람이야. 무식해서 그래"하고 밀어붙이면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철학자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대학자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만, 심지어는 아그립바 왕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바울아,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그 정도로 그는 높은 지식인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여느 갈릴리 어부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체계적이요, 변증적이요, 확실합니다. 당할 수가 없어요.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그를 없애는 길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들은 그를 없애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의 죄목은 첫째, 반유대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너는 못할 짓을 했다, 유대사람이 왜 이방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느냐-이것이 저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입니다. 민족주의적인 차원에서 바울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반율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는가 하면 할례의 문제에서도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통과 규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반유대교적이라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는 그가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방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그 자리에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으니 성전을 더럽혔다, 그러니까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네는 성전의 거룩함을 수호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성전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하여 바울같은 사람은 죽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성전에 대해서,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는 데 있어서 아주 보수적이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는 그실 시기 질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전에 에베소사람 드러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29절)"-저들의 오해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한 일이 없어요. 이방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이방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성전에도 같이 들어간 줄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오해가 왜 문제가 됩니까?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일이 편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을 때에는 오해가 있더라도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그치겠지만, 악의에 찬 사람이 뒤에서 정말로 사건을 만들고 있으면 이렇게 일이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보는 대로 뭇사람이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소동하게 했어요. 그래서 여론에 의해서 재판하고, 군중심리에 의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기네가 죽인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죽인 것처럼 일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인민의 뜻이 그렇고 국민의 뜻이 그렇다, 하고 싶은 것입니다. 대개 독재하는 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뜻인데도 백성의 뜻이라고 둘러대고, 군중심리를 자극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공작'하여 소위 '인민재판' 같은 것을 해볼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생각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말할 수 있어요. 바울은 할말이 없어요. 바로 몇 년 전에 자신이 그 짓을 했으니까요. 스데반을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바울은 조용히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 심은 대로 거두는구나, 참으로 정확하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죽는구나.' 성경을 보니 바울이 아무 말씀도 안 했습니다. 그 박해에 대한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어쨌든 얼마 전에 스데반을 죽인 바로 그 방법으로 이제는 바울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대로 두면 바울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로마 백부장과 천부장을 보내어 보호하십니다. 백부장과 천부장이 오니까, 흥분한 사람들이 죽이지 않습니다. 죽이려고 하다가 멈추었습니다. 왜 멈추었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에 백부장이 보는 데서 돌로 쳐죽였다면 이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돌을 든 사람이나, 처형한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의 법이 행사되는 시기였으므로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군인에게 체포됩니다. 하지만 로마군인들이, 백부장과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하려고 체포한 것이 아니예요. 그냥 놓아두면 바울이 죽겠으니까, 살인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소위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체포합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2년 동안을 재판도 없이 가이사랴에 가두어둡니다.
바울을 내놓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놓기만 하면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기로 맹세한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정말 그 사람들이 다 죽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좌우간 바울을 죽이려고 벼르고 벼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2년이 흘러갑니다. 바울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자 같은 바울이, 그야말로 소리소리 지르면서 복음 전해야 할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재판도 없이 이렇게 갇혀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로마에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긴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는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체포될 때에 왜 그렇게 체포되어야 했는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왜 그렇게 갇혀 있어야 했는지, 왜 거기서 그렇게 썩어야 했는지를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죽는 것도 아니고, 순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어쨌든 바울은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갑니다. 그곳에서 얼마를 지내고 나서야 그는 중요한 말씀 한마디를 합니다. 이 말씀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내가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갇혀 지내는 그 파란을 겪으면서 로마까지 왔고, 감옥에서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당한 일, 이 많은 고통과 긴긴 시간, 이것은 잘못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바울대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내가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유익했다, 이것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필요악입니다. 모순적이지만 그 사건은 반드시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유대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고, 제사장의 군사에 의해서 체포되시고,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을 거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유대사람들의 시기 질투 때문에 부득불 죽을 수밖에 없었다가, 로마사람들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악이요, 모순이요, 그리고 흑암의 권세의 시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침묵이 있습니다.
흔히들 이럴 때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십니까?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왜 이렇게 되어야 합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이것이 인간의 고뇌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엄청난 역사를 경륜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유명한 학자 존 벨러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상황이 하나님의 기회이다"-"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 Man's extremity, 한계상황, 극한의 상황이 God's opportunity,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써는 이젠 끝났다, 속수무책이다, 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새로운 기회를 만드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십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퍼전 목사님도 목회 하면서 편안하지만은 않았답니다. 어느 때인가 참으로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해서 굉장히 낙심을 하고 있었는데 한 교인의 부탁으로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집은 농가 집인데 마당에 울타리가 있고, 담장이 있고, 소가 몇 마리 있습니다. 보아하니 소들이 담장에 갇혀 가지고 고개를 번쩍 쳐들고, 저 멀리 있는 초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풀을 뜯어먹고 싶지만 담장에 갇혔으니까 가지는 못하고, 그저 고개를 쳐든 채 마냥 바라보고만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스퍼전 목사님은 집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소가 왜 저렇게 고개를 쳐들고 있고?" 그는 대답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담장을 뚫을 수도 없고 넘어갈 수도 없으니,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주인이 언젠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퍼전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나는 여기에 갇혀 있지만 지금은 고개를 들고, 저 푸른 초원, 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기다림입니다.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예요. '믿사오니'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요. 전혀 내 뜻대로 안되고, 모순과 부조리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만은 항상 저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또 믿음은 순종입니다. 오늘 내가 당한 일에, 체포되든지, 매를 맞든지, 감옥에 갇히든지, 혹은 죽든지 살든지 간에 더 이상 불만을 터뜨려서는 안됩니다. 그야말로 찬송가 가사 그대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면 살게 하시고,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죽게 해주세요, 상관이 없습니다,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부득불 이러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믿고 기다려야 할 시간입니다. 행동을 해야할 때도 있지만, 묵묵히 기다릴 때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럴 때에 낙심하지 말 것이고, 원망하지도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경륜과 지혜를 믿고, 조용히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깨달으면 깨달은 대로 감사하고, 깨달음이 없으면 그대로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 알 수도 있지만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다 알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저 잘될 줄로 믿고 얼마까지라도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를 않습니까?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길을 통해서 홍해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옵니다.
좌우에는 절벽입니다. 이제는 갈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들로서 할 일이 없습니다. 그 때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입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행동을 할 것이니 너희는 조용히 기다리라 하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바로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역사 하시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나에게 기다림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륜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당했던 이 귀한 일을 상고해봅시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이것이 절대로 버려진 현실이나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에 하나님의 또다른 창조적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순과 경륜(사도행전 21:27~36)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 말로, 어떤 이는 저 말로 부르짖거늘 천부장이 소동을 인하여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이러라
오늘의 본문은 얼핏 읽기에는 하나의 사건만 기록된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생각하면 이 본문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는지, 내가 왜 이렇듯 억울하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납득이 가는 일보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남의 일에 대해서는 잘 설명할 수가 있는데 내가 당한 일에 대해서는 설명할 재간이 없다고 말입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는지 그것을 알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체포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가 체포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죽여야 됩니까? 왜 바울이 없어야만 살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예요. 죽이겠다는 말은,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저가 죽어야 내가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복음 전하는 바울이 없어야 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왜 그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역사의 최대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의인이 세상에 있다고 안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의인이 핍박을 받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습니다. 왜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아야 합니까? 왜 사람들은 의인과, 경건한 자와, 선한 자를 그대로 두고 지낼 수 없는가, 왜 그들과 공존할 수가 없는가, 왜 같이 살아갈 수가 없는가, 왜 꼭 없애야 하고 핍박을 해야 하는가 그 말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 진실하게 사는 사람,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또한 이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니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울하게도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죄 없이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일이 순리대로 편안하게, 안일하게, 무사하게, 그렇게 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됩니다. 그것도 성전에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성전 밖으로 쫓겨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성전 출입이 됩니다. 그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예루살렘에 돌아오면 반드시 유대사람으로서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지냈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바로 지금, 예배드리는 현장에서 그는 체포되어 끌려나옵니다. 더욱이 본문에는 아주 비참한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30절)"―생각하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하나님의 종이 성전에서 끌려나오고, 그 큰 성전 문이 꽝하고 닫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요, 이것이 세상사입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이나,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인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모두가 바울이 무사하기를, 바울이 체포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무사히 다시 이방으로 갔으면, 제발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무사했으면, 다시는 피 흘림 같은 것은 없었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여론이 그렇지 않아요. 바울이 오기만 하면 무슨 음모와 무슨 계책을 꾸며서라도, 저를 없애겠다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야고보가 미리 손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지금 많은 오해를 받고 있으니,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제사를 드리고, 며칠 동안 성전에서 회개하고, 이방에 돌아다니면서 이방사람들과 같이 지내던 중에 실수하고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고 저들은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것으로 치고, 결례를 행하자 그래서 바울이 편안하고 무사하도록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결례가 끝남과 동시에 체포되니까요. 아무튼 사도들은 바울이 무사하기를, 그래서 다시 이방에 가서 활발하고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고, 힘쓰고,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다 구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예상했던 대로 바울은 체포됩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바울은 이상한 상황에서 체포됩니다. 결국은 그가 여기서 체포되어 로마까지 가게 되거든요.
가만히 보면, 바울이 체포당하는 사건은 참 모순스럽습니다. 로마사람들이 바울을 체포하라고 했다던가, 어떤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서 누가 체포를 했다던가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예요. 묘하게도 동족 유대사람들 때문에 그는 로마군대의 천부장에게 체포됩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고 싶어서 체포한 것이 아니예요.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바울이 유대사람들에게 맞아죽을 판이라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체포한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고 싶어서 묶은 것이 아니예요. 묶는 척해야 군중이 조용해질 테니까 묶은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되어지는 일이 이렇게 복잡하고, 이렇게 모순스럽고, 이렇게 부조리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로마사람에게 체포되어서 로마까지 압송되는데, 그 과정이 철저하게 모순적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을 체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대사람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하니까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득불 체포했다-이것이 누가가 증거하고 있는 당시 사건의 현실입니다.
자,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27절)"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시아란 소아시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마다 계속적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핍박했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따라왔다면 모르지만 죽이기 위해서 악착같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니 이게 보통 극성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렇게까지 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부득부득 죽이려고 했느냐-우리는 여지껏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사도 바울이 핍박받았던 얘기를 살펴왔습니다. 가만히 보면 로마사람들 때문에, 혹은 군인들 때문에 사도 바울이 핍박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은 거의가 유대사람들로부터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핍박을 했어요. 회당장이 핍박을 하고, 장로들이 핍박을 하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했어요. 왜 핍박을 했느냐-그 문제는 끝끝내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습니다마는 사도행전의 맨 끝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아무튼 저들이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것에는 공통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시기와 질투 때문인 것입니다.
시기 질투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 신앙이고 뭐고 보이는 것이 없어요. 아주 꽉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하면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됩니다. 제가 어떤 책을 보니 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운동을 해도 무효랍니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고 맙니다.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공부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남이 하니까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다 끝내기 전에 제풀에 죽기도 합니다. 또 사업하는 데에도 시기와 질투가 작용을 하면 성공하는 사업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강한 경쟁심, 시기 질투, 이것이 문제입니다. 철학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이 살아야 나도 삽니다'하는 생각은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그런데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를 죽여야 한다―사실은 이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헤겔의 변증입니다. 유물사관의 기본철학입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마음씨가 공산당입니다.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산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을 죽여야 된다, 내가 살기 위해 죽이는 것이니까 그것은 타당하다, 저 사람이 살아 있고는 내가 죽는다―이런 생각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남을 살려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도 아내가 기뻐야 나도 기쁘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꼭 상대방의 기를 죽여놓아야 자기가 사는 줄 알아요. 못된 성미지요. 이런 사람은 교회를 나와도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남을 꺾고, 무슨 말이나 농담을 해도 핀잔을 주어서 남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놓고, 저는 좋아합니다. 남을 낮춰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 압니다. 이게 얼마나 잘못된 철학입니까? 이런 사람은 중생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비뚤어졌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매일반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살겠다'하는 마음보가 있어요. 지금까지는 자기네가 거침없이 마음대로 지배해왔어요. 회당장도 되고, 장로도 되고, 교회에서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딱 나타나 외치니까 백성들이 다 그리로 갑니다. 그러니 자기네들은 뭐가 됩니까? 그래서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귀들이 길을 가는 이 성자에게 시험을 걸었습니다. 예쁜 여자로 나타나 유혹을 합니다. 그래도 성자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금덩이를 눈앞에 보여줘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협박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갖가지 방법으로 시험을 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성자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한 마귀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풀이 죽어 있는데, 대장 마귀가 나섰습니다. "저리 비켜라. 내가 하는 것을 보아라." 그리고 성자의 귀에 입을 대고 무슨 소린지 딱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성자의 얼굴이 확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에 놀란 마귀들이 대장에게 물어봅니다. "도대체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간단하지. '당신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가 되었소'라고 했지." 바로 그 한마디에 성자의 얼굴빛이 달라진 것입니다. 동생이 주교가 되었으면 "참 잘됐구나. 할렐루야!"해야지 안색이 변하다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씨가 어디까지 왔습니까? 시기 질투는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어느 순간 그것이 작용한다 싶으면 그 뒤에 사단이 있는 것으로 아세요. 예수 믿는 사람을 시험하는 데는 이 시기 질투가 마지막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실은 가야바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질투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바울은 꼭 죽어야 된다, 바울을 죽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시기 질투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없어야 자기네가 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반드시 바울을 죽여야 할 역사적인, 혹은 신학적인 이유가 저들에게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소위 히브리파 유대인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하니까 이방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온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은 그 중의 대표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다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바울은 지성인입니다. 바울이 갈릴리의 어부라든가, 혹은 초보였다면 그가 말할 때에 "그 사람, 정신나간 사람이야. 무식해서 그래"하고 밀어붙이면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철학자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대학자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만, 심지어는 아그립바 왕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바울아,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그 정도로 그는 높은 지식인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여느 갈릴리 어부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체계적이요, 변증적이요, 확실합니다. 당할 수가 없어요.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그를 없애는 길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들은 그를 없애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의 죄목은 첫째, 반유대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너는 못할 짓을 했다, 유대사람이 왜 이방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느냐-이것이 저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입니다. 민족주의적인 차원에서 바울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반율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는가 하면 할례의 문제에서도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통과 규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반유대교적이라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는 그가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이방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그 자리에 그들을 데리고 들어갔으니 성전을 더럽혔다, 그러니까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네는 성전의 거룩함을 수호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성전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하여 바울같은 사람은 죽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성전에 대해서,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는 데 있어서 아주 보수적이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는 그실 시기 질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전에 에베소사람 드러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29절)"-저들의 오해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한 일이 없어요. 이방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이방사람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성전에도 같이 들어간 줄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오해가 왜 문제가 됩니까?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일이 편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을 때에는 오해가 있더라도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그치겠지만, 악의에 찬 사람이 뒤에서 정말로 사건을 만들고 있으면 이렇게 일이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보는 대로 뭇사람이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소동하게 했어요. 그래서 여론에 의해서 재판하고, 군중심리에 의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기네가 죽인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죽인 것처럼 일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하면 인민의 뜻이 그렇고 국민의 뜻이 그렇다, 하고 싶은 것입니다. 대개 독재하는 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뜻인데도 백성의 뜻이라고 둘러대고, 군중심리를 자극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공작'하여 소위 '인민재판' 같은 것을 해볼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생각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할말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말할 수 있어요. 바울은 할말이 없어요. 바로 몇 년 전에 자신이 그 짓을 했으니까요. 스데반을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바울은 조용히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 심은 대로 거두는구나, 참으로 정확하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죽는구나.' 성경을 보니 바울이 아무 말씀도 안 했습니다. 그 박해에 대한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어쨌든 얼마 전에 스데반을 죽인 바로 그 방법으로 이제는 바울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대로 두면 바울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로마 백부장과 천부장을 보내어 보호하십니다. 백부장과 천부장이 오니까, 흥분한 사람들이 죽이지 않습니다. 죽이려고 하다가 멈추었습니다. 왜 멈추었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에 백부장이 보는 데서 돌로 쳐죽였다면 이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돌을 든 사람이나, 처형한 사람들은 로마법에 의해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의 법이 행사되는 시기였으므로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던 행동을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군인에게 체포됩니다. 하지만 로마군인들이, 백부장과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하려고 체포한 것이 아니예요. 그냥 놓아두면 바울이 죽겠으니까, 살인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소위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서 체포합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2년 동안을 재판도 없이 가이사랴에 가두어둡니다.
바울을 내놓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놓기만 하면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기로 맹세한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정말 그 사람들이 다 죽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좌우간 바울을 죽이려고 벼르고 벼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2년이 흘러갑니다. 바울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자 같은 바울이, 그야말로 소리소리 지르면서 복음 전해야 할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재판도 없이 이렇게 갇혀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로마에 상소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긴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는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체포될 때에 왜 그렇게 체포되어야 했는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왜 그렇게 갇혀 있어야 했는지, 왜 거기서 그렇게 썩어야 했는지를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죽는 것도 아니고, 순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어쨌든 바울은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갑니다. 그곳에서 얼마를 지내고 나서야 그는 중요한 말씀 한마디를 합니다. 이 말씀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내가 당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갇혀 지내는 그 파란을 겪으면서 로마까지 왔고, 감옥에서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당한 일, 이 많은 고통과 긴긴 시간, 이것은 잘못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바울대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내가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유익했다, 이것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필요악입니다. 모순적이지만 그 사건은 반드시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유대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고, 제사장의 군사에 의해서 체포되시고,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을 거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유대사람들의 시기 질투 때문에 부득불 죽을 수밖에 없었다가, 로마사람들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악이요, 모순이요, 그리고 흑암의 권세의 시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침묵이 있습니다.
흔히들 이럴 때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십니까?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왜 이렇게 되어야 합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이것이 인간의 고뇌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엄청난 역사를 경륜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유명한 학자 존 벨러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상황이 하나님의 기회이다"-"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 Man's extremity, 한계상황, 극한의 상황이 God's opportunity,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써는 이젠 끝났다, 속수무책이다, 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새로운 기회를 만드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십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퍼전 목사님도 목회 하면서 편안하지만은 않았답니다. 어느 때인가 참으로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해서 굉장히 낙심을 하고 있었는데 한 교인의 부탁으로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집은 농가 집인데 마당에 울타리가 있고, 담장이 있고, 소가 몇 마리 있습니다. 보아하니 소들이 담장에 갇혀 가지고 고개를 번쩍 쳐들고, 저 멀리 있는 초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풀을 뜯어먹고 싶지만 담장에 갇혔으니까 가지는 못하고, 그저 고개를 쳐든 채 마냥 바라보고만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스퍼전 목사님은 집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소가 왜 저렇게 고개를 쳐들고 있고?" 그는 대답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담장을 뚫을 수도 없고 넘어갈 수도 없으니,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주인이 언젠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퍼전 목사님은 깨달았습니다. '나는 여기에 갇혀 있지만 지금은 고개를 들고, 저 푸른 초원, 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시간이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기다림입니다.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예요. '믿사오니'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요. 전혀 내 뜻대로 안되고, 모순과 부조리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만은 항상 저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또 믿음은 순종입니다. 오늘 내가 당한 일에, 체포되든지, 매를 맞든지, 감옥에 갇히든지, 혹은 죽든지 살든지 간에 더 이상 불만을 터뜨려서는 안됩니다. 그야말로 찬송가 가사 그대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면 살게 하시고,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죽게 해주세요, 상관이 없습니다, 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부득불 이러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믿고 기다려야 할 시간입니다. 행동을 해야할 때도 있지만, 묵묵히 기다릴 때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기다리는 것밖에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럴 때에 낙심하지 말 것이고, 원망하지도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경륜과 지혜를 믿고, 조용히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깨달으면 깨달은 대로 감사하고, 깨달음이 없으면 그대로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 알 수도 있지만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다 알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저 잘될 줄로 믿고 얼마까지라도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를 않습니까?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길을 통해서 홍해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앞에는 홍해요,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옵니다.
좌우에는 절벽입니다. 이제는 갈 길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들로서 할 일이 없습니다. 그 때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입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행동을 할 것이니 너희는 조용히 기다리라 하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바로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역사 하시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나에게 기다림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모순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륜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당했던 이 귀한 일을 상고해봅시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이것이 절대로 버려진 현실이나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에 하나님의 또다른 창조적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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