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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새로워지는 비결(빌립보서 3 : 12-16)

by 【고동엽】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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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워지는 비결(빌립보서 3 : 12-16) 신년주일, 새해, 새마음, 망각 용서 새출발 

/ 곽선희 목사 

 

 

새로워지는 비결(빌립보서 3 : 12-16)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누구나 새해를 당하면 좀더 새로운 각오로 새롭게 살고자 소원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한번도 새로워지지를 못하고 계속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게다가 심지어는 뒤로 물러서기까지 합니다.

새롭게 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그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에 이 반복되는 실패 때문에 자기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고 자시 자신을 불신하게 되며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저주하게도 됩니다. 언젠가 한번 대단히 술을 많이 마시는 어떤 이에게 왜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이의 대답이 "술을 많이 먹으면 죽는다고 하여 그 죽는다는 소리가 두려워서 술을 먹는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이는 자기를 아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학대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하여 자기를 죽이는 자살 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망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가정도, 건강도, 사회도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학대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절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과 모순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시간 깊이 생각하십시다. 먼저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지는 마십시다. 그로 인한 고민이 있다면 고민 그 자체가 아직도 소망의 여지가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고민이 없습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되었기에 내가 잘못되었지나 않나, 혹은 환경이 좋지 않았던 탓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더불어 좋은 일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흔히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는 인사말을 하게 되는데 이는 한 마디로 말하여 주위 환경이 달라지기를 바라고, 새로운 변화가 있어지기를 바란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망상은 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는 부동 자세로 있으면서 다른 사람만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의 새해나, 그런 의미의 축복이라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달라지면 언젠가는 상대방도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새로워지면 가정도, 환경도 언젠가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나 자신을 새롭게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새해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절대 자기를 포기하지 맙시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좀더 진실하게 비판하면서 왜 잘못되었는가, 무엇인가 새로운 비법이 없을까, 하고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믿음의 대 선배인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의 고백 중에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곧 미완성 그 자체를 현실로, 진실로, 그리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지금, 현재에 만족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에 불만하지도 않습니다. 다 알았다고 교만해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알지 못했다 하여 낙망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기 고백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과정, 미완성 이대로 진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만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그 말은 결코 낙심도 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교만해 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미완성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무한한 기대 속에 삽니다. 우리의 지난 일을 생각해 보면 그 어느 땐가는 이젠 끝났구나 하고 이 길 밖에 없는 것처럼 절망한 일도 있었습니다만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노라면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좀더 선할 수가 있었고, 좀더 사랑할 수가 있었으며, 좀더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현장에서는 이 길 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다시 생각하여야 됩니다. 우리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완성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의 여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모순과 갈등 이대로가 곧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밝힌 자기 고백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하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며 악순환 되는 자기 실패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자기 자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은혜 안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자기됨을 그는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보다 더 효율적인 세계, 보다 더 능력 있게 사는 그런 세계를 바라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미완성 그 자체의 삶에 의미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목표를 재조정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패를 두고 말하기를 "목적은 좋았으나 방법이 나빴다", "최선을 다 했다", "세상이 나빴다", "환경이 나빠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한결같은 변명의 전철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물어 봅시다. 방법이 옳았고 최선을 다했느냐고 말입니다. 아니 좀더 나아가 뜻이 옳았느냐고 물어야 하겠습니다. 정말 목표가 분명하였고 목적이 옳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 목적이 선했고, 분명하고, 옳았다고 하면 이제 후회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계속 졸다가 쓰러지고 마는 베드로를 향하여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흔히 우리는 이 말을 들어서 자기 변명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저 육신이 약해서!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데 돈이 없어서라며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만 이제 다시 한번 물어 보십시다. 진정 마음에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정말 마음에 있었는데 잠이 올 것이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만약 제가 예수님이라면 "너는 싹수가 노랗다"고 했을 것입니다. 뜻이 없었고 마음도 없었습니다. 마음이 있고야 졸음이 오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돈 십만원만 잃어버려도 잠이 오지를 않고, 기분 나쁜 전화 한 통화만 받아도 잠을 못 자는데 이제 내일 아침이면 메시아가 십자가를 지시고 그렇게 돌아 가신답니다. 자, 이런데도 잠이 온다는 말입니까? 노골적으로 말하면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 올 판국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잠꾸러기 아이들도 내일 아침에 소풍을 간다고 하면 밤새 잠을 잘 못 잡니다. 그런데 그래 그 졸음 하나를 이길 수 없더란 말입니까? 이는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마음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뜻이 있었는지, 정말 뚜렷한 목적을 두고 살았는지, 목적을 재 진단하여야 하겠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나온 교인들 중 태반은 남한으로 가서 그저 자유롭게 교회에 나가면서 예수만 마음대로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돈 몇 푼을 벌더니 그만 마음이 달라져서는 어느새 걱정도 많고, 한숨도 많고, 문제도 많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했었는데 이제 와서 왜 딴 소리냐 말입니다. 왜 목적이 변했느냔 말입니다. 오직 하나의 소원이었으면 그것으로 끝나야지 가난하든 병들든 문제될 것이 아닙니다. 자유롭게 예수 믿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더 다른 아무런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목적이요, 소원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고로 실패는 죄가 아닙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입니다.

어느 지위, 어느 형편에 있든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할 말이 없습니다. 왜 사는 것입니까? 내 뜻은 어디에 있으며, 최종 목적은 무엇이며, 그 구체적인 목표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추상적인 목적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또한 결과적인 목적도, 현실적인 목적도 안 됩니다. 더욱이 자기 변명적인 목적이어서도 안됩니다. 되는대로 살다가 이제 와서는 옛날 이야기하면서 이랬었노라 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그 속에 본래적인 목적이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말하기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잡힌 바 된 그것" 내가 잡은 것, 내 이상이 아닌 그리스도가 나를 붙잡은, 나를 포로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주님만 인정하시면 그만입니다.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을 향해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그것을 위하여 좇아가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제 목표를 새롭게 하십시다. 금년은 왜 살아야 하며, 왜 내게 있어야 하는지, 적어도 생의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는 지난날은 잊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 과거에 성공한 것, 과거에 잘 살던 것,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 생각하면서 교만해 하는 것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실패를 생각하면서 오늘 낙담하는 것도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지나간 것은 다 잊어야 합니다. 사실은 이 망각도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려서 괴로워하는 것도 괴로움이지만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것은 더 큰 괴로움입니다. 깨끗이 잊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과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나 자신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망각은 수동적이거나 피동적인 의미에서의 망각이 아닙니다. 능동적인 망각입니다. 스스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 쓸데없는 옛날을 기억하면서 교만해지는 사람을 봅니다. 글쎄, 국민학교 다닐 때 우등생한 그것을 오늘에 와서 어쩌란 말입니까? 과거의 어떤 것 때문에 가슴이 부풀어서는 교만해 하는데 모두가 다 소용없는 일이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난 날에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깨끗이 잊어버리십시오. 과거를 생각하면서, 과거가 나를 지배하는 그런 처지에 산다면 그것은 과거에 사는 사람이지 오늘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미래에 사는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 과거 지향적인 생에서 떠나 출애굽하여 미래 지향적인 생을 사는 것이 새로워지는 비결입니다.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가만히 보면 공부할 때는 노는 것 생각하느라 제대로 공부가 안 되고, 또 놀 때는 숙제 안한 것이 생각나서 놀지를 못합니다. 이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에는 노는 것 다 잊어버리고 공부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놀 때에는 공부 생각은 싹 잊어버리고 노는 것만 열심히 놀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저쪽 생각하고, 저쪽에서는 이쪽 생각을 하니 이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남들이 나를 평가해 주는 칭찬이나 비판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냉철하게 생각을 해보면 남이 나를 평가해 주고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어제의 일이요 과거에 속한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나에 대한 평가는 내일 그리고 앞으로 받게 될 것이지 지금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듣는 소문은 1년전, 10년전 이야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나에게 대한 소문과 평판에 신경을 쓰고 사는 사람은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오늘에 대한 평가는 내일에 받아야 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평판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늘이요, 나의 나 됨은 오늘에 있는 것이지 지나간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 22절에 보면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범죄한 과거에서 떠나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지난 날의 죄가 기억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억치 않으시는 과거를 내가 왜 기억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용서하신 나를 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저는 탕자의 비유를 대할 때마다 깊이 생각해 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가 소를 잡아라, 새 옷을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하면서 영접할 때에 이 아들이 얼마나 거북스러웠겠습니까? 사실이 탕자요,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내다 버린 몹쓸 자식이었기에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게 거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시기에 내가 나를 책망할 수가 없는 것이더란 말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시기에 내가 나를 용서해야 했고, 아버지가 내 과거를 기억치 아니하시기에 나도 내 과거를 기억치 아니 하여야 했습니다. 더러는 이런 사람을 보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 속에 진정한 신앙이 있습니다.

과거에야 어찌 되었든 오늘 새로워지고, 새로워진 나를, 새로워진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남을 용서할 때에도 깨끗이 용서하고 깨끗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용서란 물질적 거래가 아닌 용서 자체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지난 일을 기억치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깨끗이 잊어버려야지 그 사람 만날 때마다 옛날 일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그 때문에 어거스틴(Augustine)은 음행한 아내의 행위까지도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과거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용서하고, 잊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대할 수 있을 때에야 만이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깨끗하게 잊어버릴 때에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허물을 기억치 않는 망각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속한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좇아가노라! 여기에서 좇아간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는 '디오코' 라고 하는데 이는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운동 선수가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의 생각도, 마음도, 그 모든 힘을 함께 모아 앞으로 기울이며, 그리로 달려가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목표가 내게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마십시다. 내가 목표를 향해서 가야 합니다. 그 누군가가 나에게 찾아와 화해해 주기를 기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찾아가고, 내가 화해를 청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희생이 되어 주고 그리고 새로운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는 아니 됩니다. 내가 찾아가 희생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하고야 새로운 세계가 오고,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일단 목표를 정했으면 온 힘, 온 정열을 다해서 그리로 향해 뛰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라톤 선수가 뛰는 것을 보면서 무조건 열심히 오래 뛸 수 있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라톤이야말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때때로 세계적인 코치를 초빙하여 훈련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기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자기가 가진 힘이 얼마라는 것을 측정하여 이것을 뛰어야 하는 거리와 필요한 시간에 안배하여 다 소모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너무 열심히 뛰어 힘을 많이 써버림으로 맨 앞서 뛰다가도 절반쯤에 가서 쓰러지고 만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고울인한 다음에도 힘이 남아서는 씩씩거리며 아직도 뛰고 다닌다면 그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좀더 미리 힘을 내어 뛰었더라면 좋은 기록을 남겼을 터인데 왜 힘을 남겼느냐는 것이지요. 그것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고울인 할 때에 푹 쓰러져야 한답니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를! 지난날에 무엇이고 해보지도 않고 된다, 안된다 한 것이 아닙니까? 언제 제대로 결심이나 해 보았더냔 말입니다. 단순한 기분으로 그저 새롭게 한번 해볼까 하다가 말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러고 있으니 밤낮 악순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것이 아닙니다. 목표를 한번 정했으면 그것을 향해 앞으로만 기울이고 뛰는 것입니다.

임마누렝 칸트(Immanuel Kant)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너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네가 반드시 그것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 간혹 어떤 이들은 운전하는 일에 대해서도 "난 운전 못하겠어요"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아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니까 못하는 것이지 안 하면 죽는다고 생각하면 못할 일이 어디 있느냐"고 대답을 합니다. 해야 될 일이라면 죽느냐? 사느냐에 걸어 보세요. 못할 일이 어디에 잇습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들 별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은 반드시 하여야 한다. 그리고 내 운명을 거는 목표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믿고 그리로 내어 뛰는 것입니다. 이제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하고야 새로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보고, 새로운 세계에서 듣고, 그리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직 목표만 보고, 총력을 다하여 뛰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새로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새해가 새 해되게 하고 싶습니까? 적어도 금년만은 좀 달리 살아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뜻을 새롭게 하십시오. 과거를 잊으십시오.

아흔 아홉 번을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성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그 하나를 향해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뛰세요. 총력을 기울이세요. 그렇게 할 때에 새로운 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새로워질 때에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양심이 나를 칭찬할 때가 올 것입니다. 내가 나를 성원하는 명랑한 새해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새해를 새해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계속 새롭게 되기를 기대하고 기다리시며 오늘도 새해를 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이 되지는 못하였기에 아무 의미도 없는 새해를 맞게 됨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원하옵고 기도하오니 금년은 분명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께만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향하여 전심전력으로 달려가게 하여 주옵소서. 과거는 십자가에 묻어 버리고 앞만 보고 달리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금년은 정녕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게 하시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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