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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1)(롬1:16~17)
이미 보신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써나감에 있어서 1장 1절로 15절까지에 그 서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서론 속에 도 바울의 복음적 정열이 마치 활화산 폭발하듯 분출되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불같은 정열을 걷잡을 수 없어서 문안을 하다말고 복음을 말씀하게 되고, 감사를 표하게 되고, 사랑을 이야기하게 되고, 특별히 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뜨겁게 설파하여 마지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론과 문안인사가 좀 길어졌습니다. 편지형식 상으로는 결국 균형이 상실된 셈입니다. 서론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16절에 이르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하고 본론에 접어듭니다. 16, 17의 두 절 속에 로마서 전체의 주제가 나타나 있다 하겠습니다. 본론 겸 주제입니다. 복음과 믿음--이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복음'에 대하여 공부하고 '복음에 대한 믿음'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공부하겠습니다. 우선 오늘의 이 본론은 마치 조용한 가운데로 강하게 울려 퍼지는 트럼펫소리와도 같이 귀청을 때립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실로 위풍당당한 선언입니다. 더없이 귀중한 복음적 선언입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복음적 간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앞의 2절에서 이미 "이 복음은"하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유앙겔리온(복음)'--이 말씀만 나왔다 하면 사도 바울은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편지 형식이고 뭐고 없이 "이 복음은"하고 지레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또다시 나옵니다. "이 복음은"--이렇게 말씀합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지금 '이 복음'에 대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는 곧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앙겔리온'의 원뜻은 '기쁜 소식'입니다. 이 단어에는 내력이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몇 년씩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전쟁에 이겼는지 졌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된 때도 아닌지라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전쟁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그 전쟁에 승리가 있으면 이제 승전의 소식을 가지고 전령이 오게 됩니다. 한시바삐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자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유래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령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높은 성문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사람들이 모입니다. 이 사람들을 보고 전령은 높은 데서 큰소리로 외칩니다. 전쟁에 이겼다고, 어디어디서 어떻게 어떻게 이겼다고, 어디어디를 쳐들어갔고 어디어디를 빼앗았고…이렇게 승전보를 전하게 됩니다. 이 승전보에 군중은 환성을 터뜨립니다. 함성을 지릅니다. 몇 시간이고 환희작약(歡喜雀躍)하면서 축제를 벌이게 됩니다. 단 한마디의 소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겼다'--이 한마디의 소식이 그같이 엄청난 감격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것이 많습니다마는, 개개인이 다 나름대로의 남다른 경험이 또한 있겠습니다마는, 우리 민족에게는 남달리 거족적으로 드라마틱하게 경험한 것이 8․15 광복입니다. 일본의 소위 천황이란 자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할 때, 잘 들리지 않는 라디오에 귀를 갖다대고 들은 그 한마디 소리에 온 나라 온 민족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목을 놓아 울고, 달포를 두고 일손을 놓을 만큼 기뻐했습니다. 교회의 종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거침없이 울려 퍼졌습니다. 총칼로 못 치게 하던 종, 열심히들 쳤습니다. 날마다 모여서 마음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보세요. '기쁜 소식'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승리의 소식--이게 복음입니다. 해방과 승리의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죄와 사망과 사단을 이기는, 율법과 진노를 이기는 승리의 소식이자 동시에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소식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생각해보세요. 기독교는 그래서 축제의 종교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벅찬 감격과 기쁨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자유한가--이것이 예수를 잘 믿느냐 못 믿느냐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의 소식을 받았으니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의 소식을 받고 징징 울고 다닌다면 말이 되겠어요?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징징 웁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총칭은 복음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은혜'입니다. 은혜는 곧 기쁨이니 복음, 은혜--이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이 소식은 곧 생명의 소식입니다. 능력의 소식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무엇인가--그 내용은 지난 시간에 공부했습니다마는 '이 복음'의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예수를 케뤼그마적이요 종말론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특별히 십자가에다 그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그 에게는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명의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예수 십자가 사건'입니다. 믿는 사람으로 볼 때에는 '예수의 생애'도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병고치고 말씀하시고 이적 행하신 것, 물론 다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 물론 중요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부활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다 종합해서 '예수복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이 점입니다. 예수 사건이라면 믿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하나뿐입니다. 십자가밖에 못 봅니다. 어떤 사람이 서른 세 살에 골고다 언덕에서 비참하게 죽었다--그것밖에 모릅니다. 로마의 정치가들이 볼 때에 그렇습니다. 안 믿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런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불 신앙의 사람에게는 그 하나밖에는 안보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역사적 사건이지요. 비참하게 죽었거든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모르겠는 것입니다. 고작해야 역사 위에 있었던 한 낱의 사건일 뿐이에요. 이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이해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같은 문제를 앞에 하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내가 믿는 복음은 생명이라고, 복음은 곧 구원이라고. 이렇게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에 돌아가서 깊이 생각해봅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왜요?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부끄러워할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 로마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복음이 부끄럽습니다. 왜요? 십자가는 저들에게 있어 부끄러운 것이거든요. 로마사람만 되어도 십자가를 지지 않아요. 유대사람이기 때문에 로마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거예요. 약소민족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거예요. 그리고 의고 불의고 가릴 것 없이 로마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저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그 한 사람 잘못 죽였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어요. 그 의를 잃은 재판, 그 빌라도 재판을 받으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요새같이 재판을 또 하고 다시 하고 한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잘잘못을 신중히 가리는, 그런 재판 과정이 아니었어요. 새벽에 재판해 가지고 9시에 못박아버렸어요. 이런 사건입니다.
이렇듯 부조리하고 모순된 재판과 처형으로 죽어간 한 사람의 모습--로마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아주 부끄러워요. 특별히 십자가에 죽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로마황제들 가운데에는 기록에 보면 적어도 식사할 때에는 절대로 십자가에 대해서 얘기하지 말라 한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은 '십자가'라는 소리만 들어도 그날은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끔찍하니까요. 실로 처참한 죽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더욱 이 말씀을 하게 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라"고. 또 하나, 로마사람의 철학으로 볼 때에도 복음이 부끄럽습니다. 일찍이 헬라철학이 로마의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지혜를 대표하는 헬라철학이 무릎을 꿇고, 로마의 힘이 이긴 것입니다. 이 힘이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같은 시간이에요. 모든 것이 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힘의 철학만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보고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시자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빌라도가 반문합니다. 묻는 것이 아니지요. 비웃는 거예요. 곧 십자가에 죽게 된 처지에 '진리'가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진리'하면 승리가 진리지, 패하고 무슨 진리냐, 이기고야 진리를 논하는 거지 죽어지는데 무슨 진리냐, 지금 네 처지에 진리 운운하게 됐느냐--그 얘기입니다. 무서운 조소입니다. 진리라 무엇이냐--이 같은 로마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니 예수의 십자가는 정말 부끄럽고 형편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생각합니다. '아니다! 나는 십자가 사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예수를 사랑한다. 이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이것이 바울의 진실한 간증입니다. 특별히 바울 자신에게서 그런 당당함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은 결코 복음 앞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름을 받은 이후로 진실하게 복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에베소서에서 그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면했는데 자신부터가 복음에 합당하도록 살았습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보면 그는 로마감옥에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기대와 소망을 따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코 부끄럽지 않다, 담대하다 함입니다. 떳떳하다 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대할 때에 나는 떳떳하다, 부끄럽지 않다, 이 거룩하고 놀라운 사랑 앞에 나는 부끄럽지 않다--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십자가, 그 앞에 부끄럽지 아니한 사람이 있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라." 바울은 지금 로마감옥에 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 디모데를 보고 부끄러워하지 말라 합니다. 지금 믿음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고, 믿음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은 편안하게 지냅니다. 생각해보면 부끄럽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고초를 겪고 있는데 아들인 저는 편안한 것이니 마음에 부담이 되었을 법해요. 그러나 바울은 말씀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꼭 감옥에 들어와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되는 것이지 부끄러워할 것 없다--이제 부끄러움이 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십자가 사건, 나를 위해 주님 죽으신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에 합당하게 살았고. 그리스도 앞에 충성되게, 진실하게 살았음을 말씀함입니다. 부끄러워 아니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자랑하고 있다는 뜻인 줄 압니다.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나는 이것을 특권으로 알고 있다, 영광으로 알고 있다' 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 이하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십자가 사건은)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는 (십자가 사건은) 미련한 것이로되"라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4절)"라고. 그는 유대사람의 욕구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면 다 채워지고, 헬라사람들의 지혜를 구하는 마음도 십자가만이 충분하게 채워줄 수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도 16절 끝에 가서 보면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사람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의 제 1이 십자가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지혜의 근본, 지혜의 진수, 그 핵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바울은 이만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헬라철학에도 능통하고, 히브리종교에 대해서도 능통합니다. 히브리 종교적으로 표적을 구하는 욕구도 십자가 안에서 다 채워지는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철학적 욕구도 십자가 속에서 만족하게 채워질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입니다. 복음만이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먹어야 합니다. 물이 없어서 바닷물을 먹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바닷물 아무리 먹어도 갈증에는 소용이 없어요. 꼭 물을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대전으로든 대구로든 좀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할 때면 꼭 보온병에다가 생수를 넣어가지고 다닙니다. 그 물을 틈틈이 마시면서 갑니다. 역시 물이 제일 좋아요. 커피다 콜라다 사이다다 하는 것들은 헛것이에요. 그런 것 가지고는 갈증이 없어지지 않아요. 갈증에는 꼭 물을 마셔야 돼요. 물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요. 바울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의 표적을 구하는 마음이나 율법적 욕구는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채워질 수가 없어요. 율법의 완성이 그리스도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End of the Law'입니다. 예수는 율법의 끝이라고 했어요.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유대사람으로 보아도 십자가만이 그 율법적 욕구를 다 채울 수 있으며, 헬라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그 많은 철학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말만 많고 머리만 복잡하다, 십자가 곧 복음이 그 같은 욕구도 만족하게 채워준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엄청나게 위대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을 자랑한다, 복음으로 만족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의 으뜸가는 영광이다, 특권이다--이렇게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그렇게 말씀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라고. 구원을 주신다고 했어요.
헬라철학은 추상적 진리로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구원을 설명하고 그렇게 구원을 전망합니다. 그러나 그 철학이 절대로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히브리사람들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것이 길이다, 저것이 길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도덕적 규범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렇게 하면 산다,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그러나 그 길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길로 갈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듯 보이나 없는 것이지요. 바울은 말씀합니다. '오직 복음만이 율법적인 문제도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런고로 복음은 능력이다. 철학이 아니요, 윤리가 아니요,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복음은 능력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뒤나미스'---능력, power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를 말씀함입니다. 구체적인 것입니다. 행동을 말씀함입니다. 생명력을 말씀함입니다. 복음은 능력이다-여러분, 복음을 구원의 능력으로 체험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내가 자유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렇게 속박되어 있던 자가 막 쇠사슬에서 풀린 듯이 풀리고, 안개가 걷히듯이 마음이 시원해지는 자유함, 구원.
영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고생고생 하다가 복음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 복음을 바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에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할 수 있고,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자유함, 그것은 복음이 주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두 가지 능력이 있다고들 합니다. 먼저 부정적으로는 죽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죽이고, 교만을 죽이고, 위선을 죽이고, 거짓을 죽이고, 세속적 욕망을 죽입니다. 그런 것이 다 사라져요. 복음 받아들이는 순간에 헛된 욕망 다 사라집니다. 욕심, 시기, 질투가 어느 결에 없어졌는지 나도 모르게 다 없어져요. 이게 바로 복음의 죽이는 능력입니다. 또 하나, 긍정적으로는 살리는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은혜 안에 내가 살아납니다. 존재의미가 살아납니다. 삶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가치관이 살아납니다. 하루하루의 생의 보람과 그 뜻이 살아납니다. 복음에 이렇듯 살리는 생명력이 있어요. 죽이는 능력, 살리는 능력이 동시에 역사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생애로 돌아가서 이것을 다시 이해해봅시다. 보면 분명히 복음으로 인하여 병이 낫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21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지는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녀를 보십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예수에 대한 복음을 믿고 따라와서 옷 끄트머리만 만져도 구원을 얻는다고 그녀는 믿었어요. 그리고 구원을 얻었어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병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8장 36절로 보면 거라사의 무서운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맑은 정신을 찾고,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복음의 빛이 나면서 어두운 권세가 다 물러가는 것을 볼 수 있음입니다.
또, 모든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로 보면 풍랑이 일어 배가 파손 당하게 됐을 때, 예수님의 명령, 말씀 한마디, 복음, 말씀의 능력으로 인하여 바다가 고요해지는 것을 봅니다. 또 마태복음 14장 30절로 보면 베드로가 물에 빠져들어 갈 때에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심으로 복음이, 말씀이 저를 위험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세 번째로 복음은 모든 세속과, 죄와 타락으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서 구원해주십니다.
네 번째로는 복음은 길 잃음으로부터, 버림받음으로부터 구원해주십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로 보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있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양,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마는 복임이 그를 건져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잃어버린 바 될 때에 주께서 나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하시면서 삭개오라는 버림받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완전히 소외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십니다. 이렇듯 복음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십니다. 삭개오 이 사람, 세관에 앉아 있지마는 마음으로는 늘 메시야의 나라를 사모하고 있었어요. 이 버림받은 사람을 붙들어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당신은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또한 죄와 율법을 이기게 하십니다.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복음의 능력이 내가 죄를 이기도록 해주십니다. 내 의지가 아닙니다. 복음이 내 도덕적 편견이나 율법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좀더 나아가 가장 귀한 것은 로마서 5장 9절에 있습니다마는,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 wrath of God,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벌벌 떱니다. 그런데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자유하게 하십니다.
또한 가장 결론적인 것은 로마서 13장 11절, 고린도전서 5장 5절에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 13:11)"--아주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 앞으로 갑니다. 바로 이 세상이 끝납니다. 주님 앞에 다 들리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구원--이것도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복음을 능력으로 체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오고, 내 가슴에 사무칠 때에 나도 모르게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게도 되고, 용서하게도 되고, 죄를 이기게도 되고, 사특함을 이기게도 되고, 세속적 욕망도 이기게 됩니까? 그리고 모든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깨끗이 사라지고 오직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옵니까? 이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추상적 진리가 아닙니다. 구체적 능력입니다. 복음은 생명력입니다.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그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곧 충성입니다. 진실입니다. 신앙입니다. 전적인 수락입니다. 전적인 의지입니다. 전적인 위탁입니다. 복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북한 말에 참 좋은 말 한마디가 있는데 어색해서 쓰기가 거북하지만 말을 해보자면 '전적으로 접수'해야 돼요. 주의 말씀에 전적으로, total acceptance, total commitment, 전적으로 위탁해버려요. 그리할 때에 복음 앞에 바르게, 전적으로 바르게 응답(right response)할 때에 비로소 복음은 나에게 와서 나를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역사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복음은 구원하시는 능력이라고. 20세기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복음은 물론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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