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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소망을 따라(빌립보서 1장 19절~26절)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특별한 생각 없이 곧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희망사항'이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이 말의 깊은 뜻을 생각해보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희망사항'이라는 말은 확실한 지식과 의지가 없는, 또한 실현가능성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하게 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소원, 현실성 없는 꿈을 희망사항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장차 무엇이 될 것이냐?"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내 소원은 이것입니다" "내 목적은 이것입니다" "10년이 걸리더라도 이것만은 꼭 이룰 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희망사항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이다지도 나약하고 초라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의 허상의 고백을 듣는 것 같습니다.
나약한 정신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확실한 희망과 이상이 없기 때문에 결단이나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이라는 말보다도 소망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소망은 바라는 바를 말합니다.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닌,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간절한 기대(企待)'입니다. 우리말로는 '간절한 기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마는, 헬라 원문에서는 '아포카라도키안'이라는 한 단어입니다. 먼 곳에 있는 것을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소가 담장 너머로 푸른 풀밭을 내다봅니다. 갈 수는 없습니다. 묶여 있을지언정 목을 길게 빼고 푸른 풀밭을 바라본다---간절한 기대입니다. 무슨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이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이 따라봐야 소용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학수고대(鶴首苦待)일 뿐이지요. 이에 반하여 '소망'이란 신학적으로 설명하여 신앙의 미래적 표현입니다. 구체적입니다.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입니다. '기대'는 인간의 마음이요 의지요 소원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적 응답입니다. '소원'은 미래를 투사한 인간의 의지요 '소망'은 미래로부터 출현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내가 수렴할 때,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소망이 됩니다. 그래서 소원이나 희망이라는 말보다 소망이라는 말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우리 교회를「소망교회」라고 이름지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소망을 아는가, 소망이 있는가, 소망을 믿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높은 미래적 의지, 하나님의 그 약속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확실하게 믿고 있는가---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희망사항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일입니다. 역사를 보면 일반적으로 전후(戰後)의 혼란기에는 초자연적인 이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사 하시는 것이라고, 믿음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역사 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마는 아무튼 환난과 핍박 가운데 이적이 많습니다. 전쟁 직후 프랑스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서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난치병이나 불치병을 고칩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데, 개중에는 병을 고치러 나온 사람도 있고 호기심으로 구경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비판하러 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왔다가는 깜짝 놀라 회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갖가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법석거립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부상으로 다리 하나를 잃어서 목발을 짚고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립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 다리 주시기를 바라나보다." "저 사람은 없는 다리를 얻으려고 나왔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좀 지나쳤네." 그러나 청년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능력을 행하는 분께 다가갑니다. 주의 종이 그를 보고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되기를 바랍니까? 내가 무엇을 기도해주기 바랍니까?" 청년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새 다리 주시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한 다리로 두 다리 못지 않게 굳게 서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바라서 나왔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자세가 아닙니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올시다.
여러분, 환경이 달라지기를 바라십니까? 천지개벽하여 내게 특별한 변화가 있기를 바라십니까? 이것을 소망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 안에서, 네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기대를 걸어야 합니다. 소망에 따르는 기대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소망과 기대는 현실을 초월합니다. 상황을 초월합니다. 나의 나약함도 완전히 극복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각자의 간절한 기대를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나는 이 소망과 기대에 합당한 자세를 갖추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소망과 기대에 따르는 바른 철학과 바른 지식, 그리고 이에 합당한 생활이 있는지, 그것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변수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확실한 소망과 기대는 있는데, 이에 합당한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그 소망과 기대는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용기와 진실한 행위가 따라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여기 한 학생이 있습니다. 소원도 있고 희망도 있고 소망도 있는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노력이 따르지 않는 기대는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전쟁은 걱정스러운데 대비를 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건강하기를 소원한다면 건강에 합당한 절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해야 건강하다---우리가 할만큼 충분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건강을 바라면서도 건강에 해로운 행동거지를 일삼습니다. 이러고도 건강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 바람은 허상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절제하십니까? 건강을 위하여 얼마만큼 절제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과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희망과 소망은 그 의미를 잃고 맙니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행위가 있었습니다. 피나는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소망과 기대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요, 처음부터 소망과 기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합니다.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고속도로에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습니다. 한번 길을 잘못 들어서면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하는 수없이 다음 번 출구까지 달려서 나가 돌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달리면 달릴수록 목적지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저도 운전을 한 지가 꽤 오래되었습니다마는 차안에 나침반을 가지고 다닙니다. 차를 바꾸면 나침반부터 가져다놓습니다. 사실 제가 방향을 잃어서 몇 번 고생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나침반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무릇 방향을 분명하게 하여야 합니다. 길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바른 길로 들어서지 않으면 어떠한 노력도 헛수고로 돌아갑니다. 차선을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는 줄을 잘 서서 막힘 없이 잘 빠지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고장난 차 뒤에 서서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엉뚱한 줄에 서놓으면 아무리 수고하고 땀흘려도 소득이 없습니다. 내가 줄을 잘 섰는가 잘못 섰는가---소망과 기대가 바로 되었는가를 재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소망과 기대와 내 노력이 일직선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성공이 있고 영광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대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를 바로 읽고 바로 이해해야 할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운행하시는지---정치․경제․문화․교육의 모든 면에서 생각해볼 것입니다.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깊게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확실히 이 세대는 급변(radical change)하고 있습니다.
혹자의 말대로 역사가 곤두박질하고 있습니다. 잠시 앞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 충격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깊은 맥락을 한번 짚어보시기 바랍니다.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역사의 방향이 어디로 나 있는가---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과 역사의 방향은 '민주화'에 있습니다. 이 세대는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화라고 하는 큰 과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화는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민주화가 무엇입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 민주화인 것입니다. 앞으로의 역사는 독재를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재를 제거하심입니다.
민주화는 귀족을 용납치 않습니다. 내가 왕년에 귀족이었다, 고관이었다-----다 소용없습니다. 특권층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지식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지식이란 일정 분야를 깊이 공부하여 그 분야에 봉사하자는 것이 근본 목적입니다. 그런데 공부해서 양반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귀족이 될 수 있다, 특권층이 되어 대우를 받을 것이다---봉건주의적인 사고의 잔재와 지난날의 역사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할 수록 무식해집니다. 전문가들이 연구한 것을 보면 국민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1, 2학년 때의 지능지수(IQ)가 가장 높다고 합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의 아이큐는 고작 90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누구나 훌륭해질 줄로 압니다. 박사다, 좋아라 하고 결혼했다가 무식한 사람하고 사느라고 고생하는 사람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박사라 하면 한 분야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 밖의 다른 것에는 무식합니다. 당연히 사는 것에 멍청할 수밖에요. 어쨌거나 전문화하고 기능화 하면서 사람들이 너나없이 무식해졌다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무슨 의학잡지에서 보니 요즘의 의사들은 한 가지 병에 대해서만 전문적으로 연구를 해놔서 자신이 연구한 병이 아닌 다른 병에 걸린 환자가 오면 진찰조차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감기 하나 못 고친다는 것입니다. 나는 외과의사다. 감기는 모른다---이러한 형편이니 일반의학도 좀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부 많이 한다고 유식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이나 하지 못한 사람이나 무식하기는 한가지입니다. 그러니 나는 공부를 못했으니 무식하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공부하지 못했다고 인간이 낮아진다고 착각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같이 무식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도 보면 입시 때문에 아주 시끄럽습디다. 합격하면 당장 귀족이나 된 양 으스대고, 떨어지면 망한 것처럼 축 처져 있습니다마는, 귀족은 무슨 귀족이며 망하기는 왜 망했습니까? 인간은 어디까지나 같은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높낮음이 없습니다. 공부하고 못하고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유식하고 무식하고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지식과 학교가 문제된 것입니까? 귀족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이 멍청한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정치적인 귀속도 있습니다. 높은 자리 하나 얻었다고 귀족인 양 행세하려듭니다. 장관은 한 달밖에 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장관님, 장관님"하고 굽실거려요. 장관은 무슨 장관입니까? 흔한 말로 '미스터 김'일 뿐입니다. 대통령도 그만두면 '미스터 김'이지 별수 있습니까? 그런데 왜 두고두고 '각하'인 것입니까? 국민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관직에서 물러나면 다시 완전한 시민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깨끗한 시민이 되지 못하면 이 세대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귀족이 따로 있지도 않고, 혹 있다고 해도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귀족이다, 귀족대접을 받아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이 세대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미쳐서 지레 죽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깨끗이 비웁시다. 귀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민주화입니다.
내 자식마저도 내 말을 듣지 않는 오늘입니다. 그럴진대 누가 내 말을 들어주겠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각기 인권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민주적으로 살아갑시다. 생각 자체를 민주적으로 바꾸지 못하면 더는 이 세대에 살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돈 있다고 귀족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 혼자 쓸 돈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돈으로 양반을 사는 일도 있었습니다마는, 이제는 아닙니다. 있거나 없거나 민주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대의 나아가는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귀족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인간 우상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이 세대는 '인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요즘 들어 '기업의 인간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기업도 인간화해야 성공한다는 것이지요. 월급 몇 푼 더 준다고 기업이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인간대접을 하느냐에 기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근대화의 도구가 되는 때는 지났습니다. 물건을 생산하는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월급에 얽매여 사는 부속품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마땅히 기업 성공의 비결도 얼마나 더불어 인간화하느냐에 있어야 합니다. 이 철학을 바로 터득하고 내 몸에 완전히 익히고 기업에 임할 때에 기업도 나도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의 성패는 월급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인 것입니다.
셋째는 복음화의 단계입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역경, 이 곤두박질하는 역사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었습니다. 사회주의가 무너졌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물론 여러분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공산주의의 기본 철학은 '물질 리얼리즘(materialism),' 유물주의, 유물사관입니다. 모든 것이 물질로 평가됩니다. 물질로 시작하여 물질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토록 물질을 우선 시 하던 그들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가장 가난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용어의 두 번째가 '과학적'이라는 말입니다. 종교와 도덕을 비과학적이라며 없애버리고 '과학적인' 것을 추구하더니 결과적으로는 가장 비과학적인 인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가보니 이제는 공립학교에서까지 성경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일부러 공립학교를 찾아갔었습니다. 가르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학교 교장선생님과 대화하면서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용하십니다. 이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게 하시다니요? 당신은 정말 위대하십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끊임없이 변함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선교의 역사는 중단이 없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환난과 역경과 재난이 따르더라도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끝이 올 것입니다. 선교 중심적이고 복음 중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관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의 방향을 앞에 보면서 과연 나는 이에 합당하게 사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점검해볼 것입니다. 쓸데없는 후회도 금물입니다. 귀족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특권의식을 버립시다.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마음은 오직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그 누구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씀하는바,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의 인간을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의로써 구할 것입니다. 그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에게 소망도 있고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하게 살았습니다. 부지런하게 살았고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봅시다. 이제 우리는 부자로 살기 틀렸습니다. 높은 존경을 받기도 틀렸습니다. 그런 것은 다 잊어버리십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담대하게 사는 것이요, 자랑스럽게 사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그 하나님의 역사의식에 동참하는 자로서의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소망과 기대,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과 담대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여 그 거룩한 역사가 우리 가운데에 이루어지는, 소망에 찬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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