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 (고전15:16-19 )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가 자랑하는 최대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너무 존귀하기 때문에 가짜 부활도 생겨났습니다. 이 땅위의 진품은 언제나 가짜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이단들이 가짜 부활론을 주장하면서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존 스미스 라는 사람은 미국에서 악명 높은 사기꾼이고 건달입니다. 한번은 보스톤에서 워싱톤디시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무임승차를 했습니다. 그러나 검표원에게 발각이 됐습니다. 그 때 스미스는 "나는 뉴욕타임즈의 기자요" 하고 거짓으로 자기 신분을 둘러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열차에는 뉴욕타임즈의 편집국장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검표원이 "아, 그래요. 그러면 이리 와 보시오" 하고 그 사람을 편집국장께 데려갔습니다. 가니까 그 사람이 "어, 자네가 웬일인가? 출장가는 길인가?" 하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검표원이 할 말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검표원이 가고 난 다음 스미스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저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푸십니까?" 그 때 그 사람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도 가짜요. 가짜끼리는 다 진품이 아니요?" 라고 했답니다.
가짜 부활론
세상에는 가짜가 많지만 기독교의 부활도 가짜를 만들어 사람을 미혹하는 세상입니다. 세일교회 교주 이뢰자는 죽어도 살아난다고 유언을 하고 죽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교인들이 부활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패가 갈렸습니다. 살아나지 않으니까 장례를 치르자, 아니다 기어코 살아날 것이다 라는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분쟁하다 결국은 세일교가 깨어졌습니다. 아직도 그루터기는 있지만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뢰자의 부활론은 아주 유명한 이단교파의 부활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에도 김일성의 부활사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히 인민들의 마음속에 부활하여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체사상은 기독교의 부활론과 영생론을 그대로 도입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김일성 어버이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가짜 부활론이 이 땅위에는 사상적으로, 이념적으로, 교리적으로 많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으며 아무도 모조품으로 만들 수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가치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부활절이라고 할 때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말고 핵심적인 주제 하나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완성이다
부활이 의미하는 진리의 최고 가치는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며 진리의 완성이요 승리의 완성입니다. 모든 것의 완성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진리 안에서 진리의 온전성을 주장하고 믿습니다. 믿음은 99점 짜리가 없습니다. 기도도 99점 짜리가 없습니다. 전도도 99점 짜리가 없습니다. 60점 이상은 합격이고 60점 이하는 불합격이라는 이런 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섬김이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완전해야 바쳐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완전은 하나님 앞에서 바쳐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성으로 나아가는 이 원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증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불완전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은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불완전이 메워져서 하나님 앞에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도 불완전한 예배입니다. 예배 드리는 회중 가운데는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분석해보면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는 온전해야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예배가 됩니다. 그 불완전함을 누가 메워 주십니까?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메워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함께 함으로써 우리의 부족한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로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그 진리를 선포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5:16) 예수를 믿고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신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5:17) 우리의 믿음도 헛되며 사죄도 무효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15:19)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고 고난받으며 수고하는 우리의 믿음의 삶 자체가 다 헛된 것이라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부활은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하고 부활의 주께 경배하는 이것으로 그치는 부활이 되면 안됩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부활의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각 속에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에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 부활의 주님이 오셔서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시인 황금찬 씨는 '부활의 노래' 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습니다. 한 대목만 소개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있지 않고 / 하늘에 계시며 / 다시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 믿음 안에 계시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에도 계시고 믿음 안에도 계시는데 부활의 주님을 믿는 그 성도의 믿음 안에 계신다고 노래를 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 믿음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모조품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메시야만이 진 십자가이며 메시야만이 부활하신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진리는 우리에게 중대한 교리이며 진리로 다가옵니다. 부활하신 날 아침에 무덤에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중요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 중요한 메시지를 이 시간도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들은 메시지는 세 마디입니다.
세 마디 말씀
첫번째는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걱정과 근심과 염려의 도전을 받는 우리들에게, 불완전한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질고와 가난과 굶주림과 죽음의 고통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를 만나러 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무서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진실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무서워 말라,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살아 나셨다고 주의 사자가 일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무덤이 없는 종교입니다. 그가 살아나셨습니다. 무덤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살아 나셔서 하늘에 계시고 만 왕의 왕으로 우리의 경배를 받고 계십니다. 그리고 땅 위에 믿는 자 안의 믿음 속에 함께 역사하고 계십니다. 살아나신 주님이십니다. 그 살아 계시는 주님을 믿는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 음성은 "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부활절 아침에 들었던 주님의 메시지는 우리가 부활절마다 살아가면서 늘 새기고 들어야 되는 주님의 음성인줄 믿습니다.
안식 없는 안식일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부활하시기까지는 삼일간입니다. 시간으로는 금요일 오후 세 시에서 일요일 새벽까지로 보아서 대략 35시간 내외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고요히 무덤에 계신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매우 분주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그 날의 안식일보다 긴장이 감돌던 안식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무리들은 과연 예수가 살아날 것인가? 또 살아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보낸 안식일입니다. 마리아와 여인들, 제자들도 주님이 평소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도 초조와 긴장 속에 보낸 안식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안식일이 아니라 초조와 긴장, 불안 등으로 지샌 안식 없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종지부 찍고 새로운 주의 날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먼저 활동한 사람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부활의 아침입니다. 그런데 그 아침 그 무덤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기한 돌을 보십시오.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돌은 무덤에 출입하는데 절대 방해물입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옮겨져 있습니다. 천사가 그 돌을 굴려 내었다고 했습니다.
신기한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시체가 없습니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기독교의 최대 신비입니다. 중국 창평향에는 공자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 살수서안에는 석가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아라비아 메카에는 마호멧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이 없습니다.
신기한 대화가 있습니다. 굴려진 돌 위에 천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천사가 없으면 큰 오해가 일어날 염려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만 보면 말이 와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천사의 메시지는 놀랍습니다. "놀라지 말라, 무서워 말라"(5) "그가 살아나셨느니라(6)"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눅24:6) "빨리 가서 고하라"(7-8)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만나리라"(막16:7)고 전했습니다.
신기한 반응을 보십시오(막16:8). 못 믿는 마리아와 여인들입니다(눅24:11). 듣고도 못 믿고 있습니다(막16:10). 너무나 놀라워서 감히 말을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렸습니다.
부활을 반대하는 이설들
부활의 아침부터 오늘날까지 예수의 부활을 불신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같은 무리들입니다. 돈을 받고 부인해주는 군병들도 있습니다. 빈 무덤에 대하여 기절설이니 도적설이니 타묘설을 주장합니다. 주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환상설이니 착각설이니 강령설을 주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사기설이니 신화설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열 한번이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십 여일 간 자신의 부활을 확증시켜 주신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반대하면 할수록 더욱 명확한 사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활의 의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죽음을 승리하신 증거입니다. 그는 왕이 되셨고 주가 되셨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 모든 권세 위에 군림합니다. 권세, 명예, 지식, 아름다움 그 모든 것도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새 생명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입니다. 사망은 죽고 영생이 문을 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생명은 우주적이지만 개인적인 생명입니다. 또한 종말론적이지만 현실적인 생명입니다. 또한 부활은 신자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믿는 자는 그 다음 열매로서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으로 죽으나 의인으로 삽니다. 추하게 죽으나 영화롭게 삽니다. 미움으로 죽으나 사랑으로 삽니다. 썩어지는 죽음이나 영구한 기업으로 삽니다.
맺는 말
부활은 묵은 생명의 회복이 아니고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또 죽음에 대한 자유의 축제라는 말로 표현한 사람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자유의 삶을 누리고 새로운 창조의 사역을 누려야 합니다. 부활은 완전한 죽음에서 새 생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시들어진 것이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기절한 상태에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죽음에서 새롭게 지어진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늘 함께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의 은혜를 수선의 개념으로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먼지가 묻은 운동화를 툭툭 털어서 새 운동화로 만드는 이것이 기독교의 은혜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이전 것을 수리해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고 바로 오늘의 은혜를 하늘에서 바로 내려주시는 새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전과 연관시켜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고 오늘 내가 주님 앞에 새로 지어진 존재처럼 새 힘을 받아 새 은혜를 받아 새롭게 살아가는 부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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