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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부활절의 중요성

by 【고동엽】 2022. 8. 15.
 
부활 목차 돌아가기
 

막 16:1-8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 부활절이 없었다면 교회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 부활절은 교회에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공회 앞에서 한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수년 전에 드다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죽은 후에 좇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말과 갈릴리 유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도 일어나 백성을 많이 좇게 하다가 죽게 되니까 그 좇던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도들에게 대해서도 그렇기 때문에 상관하지 말라고, 그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또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그들이 아무리 무너뜨리려고 해도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독교는 무수한 핍박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왕성해졌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무너뜨리려 했던 이 세상 정권들이 무너졌고, 마침내는 로마제국까지도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게까지 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기독교가 그런 무수한 핍박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나아올 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는 이 부활에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붙잡혔을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드다의 추종자들처럼, 갈릴리 유다의 추종자들처럼 처음에는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마가복음에 보면, 어떤 제자는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다가 예수님이 체포되니까 그 베 홑이불을 버리고 누드로 스트리킹을 해서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되는 자리에도, 그를 장사하는 자리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아닌 엉뚱한 사람들이 장사지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도 드다나 갈릴리 유다나 다름없는 사람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도망치고 뿔뿔이 흩어졌던 비겁하고 약한 제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다 한결같이 목숨을 바쳐서 그 스승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는 그 후에 주님을 전하다가 요한만 빼놓고는 다 순교를 당합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그 외에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자기들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교회가 그 후에도 무수한 환난과 핍박을 받아왔지만 지금까지 존속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드다나 갈릴리의 유다와 예수님이 다른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이 이것입니다.
드다나 갈릴리 유다는 죽고 그것으로 끝났지만, 우리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힘은 부활을 믿는 신앙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특징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감사하는 날, 그 날이 바로 오늘 부활절입니다.
그러니 이 부활절이 얼마나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이 부활절이 얼마나 우리에게 귀한 절기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런 부활의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뜻깊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삶의 중요한 원리,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첫째로,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와 하나님은 하나라고 하셨고,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거기에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면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말씀이었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 말을 듣고는 그냥 흘려 버렸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말을 듣고도 설마 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라든지,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미래 예언에 대해서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저 한번 그렇게 말해 본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 머리로 이해되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냥 접어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면 달라질 것이고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도 처음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을 때에,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들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하면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다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가 꾸민 것이 아닌 사실적인 이야기인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다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나보다 못한 것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그것을 믿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쓸데없이 그것을 믿겠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고민했는데, 정말 부활하셨다면 그 부활하신 분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하다가 영으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가졌습니다.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손으로 만져 본 것도 아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내게 말씀해 주시고 내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도록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시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성경 말씀이 그냥 책의 기록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시는 영적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고 성경을 읽으면 모든 것이 다 풀립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고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성경의 모든 의심이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믿을 수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로 해서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진실한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서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런 모든 말씀이 진실하며 성취력이 있다는 것을 주님의 부활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도 모든 것을 실패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뜻이 다 실패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대신에 마귀는 승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마귀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나타났습니다.
창 3:15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그의 머리를 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함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생각할 때에 승리는 우리 것임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주님의 부활을 말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빌 4:13에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 롬 8:11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볼 때 그렇습니다.
또 엡 3:20에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부활을 볼 때 확실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가 믿는 어떤 것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 분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이 헛되지 않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용서 또한 어떻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가면서 누가 그 무덤에서 돌을 굴려 줄 것인가 하고 무덤문을 걱정합니다.
그런데 거기 가 보니까 이미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보니까 무덤은 비었고 흰 옷 입은 한 천사가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여인들이 심히 놀라고 있는데, 말하기를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하면서, "그가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합니다.

여기,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왜 하필이면 베드로의 이름을 들어 말씀하셨을까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에도 칼을 휘두르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막상 주님이 붙잡혀 가니까 도망쳤다가 멀찍이 주님의 뒤를 따라가기는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그였지만 주님은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부활의 사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렇게 마음이 넓으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에 아무리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는 삶을 살았을지라도 부활하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은 다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해 주시고 새 삶을 주십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 기억하시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랬을 때, 베드로는 비록 주님이 '아가파오' 하느냐는 말로 물으셨지만 그렇다고는 대답하지 못하고 '필레오' 합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귀한 주님의 양들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의 사도가 되어 그 후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양떼들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마지막에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고 부활의 주님의 뒤를 따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와서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면 변하여 새 사람 되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미국 보스톤 교외에 고든 코넬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나오기 전에 그곳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이 학교를 처음 시작했던 사람의 이름이 럿셀 코넬(Russell Conwell)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북군의 지휘관으로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후퇴를 하다가 그만 자신의 지휘도를 버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수치스러운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부하 중에 링이라는 소년이 적진 속에 들어가 그 칼을 찾아오다가 총에 맞았습니다.
칼을 가지고 천막에 들어와서 쓰러진 그 소년을 보고 코넬 대령은 말했습니다.
왜 그런 일을 했느냐? 네가 그렇게 하면 죽을 줄 알지 못했느냐?
그랬을 때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 말이 무신론자였고 회의론자였던 코넬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이 소년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더니 한 참 있다가 "주여, 이 소년이 찾은 하나님을 위해서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세운 것이 바로 코넬 신학교였는데 나중에 고든이라는 사람의 학교와 합치면서 고든 코넬(Gordon-Conwell)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뒤에 Temple 대학도 세워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했습니다.
링이 믿은 부활신앙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링과 같은 부활 신앙을 가지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또 코넬과 같이 불신자요 회의론자라고 해도, 주님의 부활을 믿기만 하면 변화할 수 있습니다. 변화해서 코넬과 같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다 링이라는 소년이 믿었던 부활의 주님을 함께 믿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코넬이 고백했던 부활의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여 가치있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설교/이 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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