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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설교 :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자 (롬 8:18-25)

by 【고동엽】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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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영광을 비교하자  (롬 8:18-25)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면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물론 물질도 드립니다. 온 정성을 기울여야 그런대로 좇아가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이 하도 바쁘고, 오라는 데도 많고, 갈 곳도 많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회사에서는 기독교인들을 배려하지 않고 주일에 행사를 강행합니다.  회사나 사회 단체에서 왜 그렇게도 주일에 가지는 행사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을 보니 부조나 축하금을 내는데 그것도 여간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식당 봉사하는 당번은 왜 그렇게도 빨리 돌아오는지, 교회 올 때마다 주방에서 사시는 것 같습니다.  시간내야지요, 헌금하고 찬조해야지요, 봉사해야 하지요, 성경공부에 나와야 하지요, 예수 믿는 것 참으로 바쁘고 부담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부담되고 무거운 신앙생활인데 귀찮은 것이 아니라, 자원하고, 기다려지고, 또 감당하고 싶고, 열심을 다하여 앞장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말씀드리면 정말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아무런 부담도 안되고, 그저 쉽기만 하다면 누구나 다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찾아 읽어 보아도 예수 믿으면 무조건 잘되고 만사형통하고, 넘치는 복을 받는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에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참으로 많은데, 사실 몰라서 그렇지요, 전제조건이 있는데,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축복장이라는 신28:1 이하의 말씀에는 가슴이 설레일만큼 엄청난 복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설레게 되고 나도 그런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그 명령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순종할 때 그런 복된 삶은 살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 연단,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죽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가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주안에서 의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말씀으로 쳐서 그 앞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두가지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시작과 끝입니다.  한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영광이 없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영광만 기대하고 있습니다.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이나 지신 것이고 목사들이지는 것이요,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8:16-17에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윤리만 남게 됩니다.  그러한 윤리 도덕 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보면 어떤 약은 사람은 고난은 피하고 영광만 받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다보니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럭저럭 신앙생활하는 분들도 있어 보입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해야 합니다.  미지근하지 말라 그러셨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 그에게 유리한 것은 받아들이고, 부담이 되고, 힘들고 어려운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씀이야 그 시대의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오늘의 상황에는 맞지않는 말씀이라고 거부합니다.  

이왕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면 바르게 믿고, 열심히 믿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8-19의 말씀에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서라는 자리에 서고, 앉으라는 자리에 앉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 서고 싶다"고 하실 것입니다.  "내 맘에 맞지 않는 않은 말씀이어서 좀 보류하고 있다"고 하실 것입니까?  언제까지요?
개혁교회를 이룩하신 요한 칼빈 선생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 중 18절의 말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이 말씀을 암송하시는 중에 임종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을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자"고 정하였습니다.

사람이 비교하면서 살면 때로는 위축이 되고, 실망하고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저보다 목회를 잘하는 분들도 있고, 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런 관점이 아닐 것입니다.  동창회에 나가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다 동역자들입니다.  배울 것만 배우면 됩니다.  사람은 비교할 때 가장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 미련한 녀석아, 동생 좀 보라, 저 앞집 아이좀 보라, 서울대학만 잘 들어갔다더라, 삼수하고 모자라서 사수하려고 해" 이러지 마세요, 하나님은 다른 재능을 주셨습니다.  유심히 보십시오.

하나님도 비교당하시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 외에는" 이 말씀은 오직 나만 섬기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내 앞에"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 외에는" 이 말씀은 " 내 앞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난하의 주를 달고 있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놓고 비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46:5에서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작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현재의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비교해보라고 하십니다.  구역에서는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비교의 상대가 되어야 비교하는 것이지 이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대학생과 어린 유치원생을 비교할 것입니까?  비교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비교이지만, 그래도 신앙에 도움이 되니 비교하라고 하셨습니다.  

비교하는 것은 두 가지를 같이 놓고 품질을 따져보고, 자질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가격을 비교해봅니다.  무게를 달아봅니다.  사용하여 봅니다.  엣날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질구레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큰 것 값진 것 하나만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값이 싸다고 하면 비싼 것보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싼 것이 비지떡"이라고 했습니다.  값싸고 물건도 좋고, 유용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영적인 일에 비교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일에는 값이 싸다는 것은 그만큼 허술한 것이요, 문제가 있습니다.  천국은 눈물 없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사람이 빼앗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거져 받고, 값없이 받았지만, 그 이후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주님이 작은 계시록이 마태복음24장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고후4:16-18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받는 환난이란 경하다 즉 가볍다는 말이요, 우리가 누릴 영원한 영광은 지극히 크고 중하다, 즉 무겁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받는 환난이란 잠시 잠깐이지만, 우리가 누릴 영광은 영원하다고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 도처에 우리 주님이 받으시는 환난과 고난을 말씀하시면서 그러한 고난에 동참하고 자기 몸에 짊어지고 나가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영광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4:14)  
사도 베드로는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국회 위증 사건으로 기소된 여성들이 정죄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다시 뒤집어질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으로 거짓말하거나 위증하여 창피를 당하고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받는 고난이라 하면 그건 부끄러운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리라는 각오로 받는 고난이라고 하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정말 비교해보아야 합니다.


1.  고난과 영광을 비교하려면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18절 말씀에 "생각하건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세계관 그의 인생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교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놓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비교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값진 것을 값진 것으로 알지 아니합니다.  값진 물건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그런 소중한 물건은 놓고 보는 것으로 더 가치 있는 것인데 굴리고 흔들면서 놀고 있으니 깨뜨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얼른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이지만, 더 크고 총천연색의 다른 물건을 주면 값진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직 물건의 가치를 잘 몰라서 비교 능력이 떨어집니다.  
기성세대라고 하는데, 그 말은 책임적인 존재라는 말도 됩니다.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이 비교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값진 것을 값진 것으로 보지 않고 무가치한 일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벌어놓은 돈이니까 돈은 써야 하지요.  돈 쓰는 재미로 살려면 그만 두세요.  돈을 쓰고 재미를 느끼려고 하고, 돈을 써서 여가를 보내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현재 내가 받는 고난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질 장래의 영광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런 영적인 일을 정리하고 나의 신앙으로 삼기 위하여 깊은 묵상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루에는 수십만 가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이런 것들이 시시하게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아주 특별한 아이디어로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점수를 메겨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나는 우리 교회에서 몇 등쯤 할 것인가?  450명 교인을 쭉 한 줄로 세우고 등수를 메겨서 등수대로 서라고 하면 가관일 것입니다. 성목사가 한 400등 쯤에 서 있다고 해보세요,  한심한 노릇입니다.  교회에서 내노라 하시며 앞장서던 아무개는 449번째로 서 있다고 하면 기막힌 노릇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늘나라에 가면 다 일등으로 보아주실 것입니다.  모두 다 은혜로 구원받았지, 행위나 공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행이지, 하늘나라에서 일등석 이등석 가리면 얼굴 뜨뜻해서 못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면까지 다 고려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다 구원받았지만 머리 면류관을 쓰신 분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순교자는 다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면류관을 썼어도 교만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은혜요 감격입니다.  어떤 차별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2.  여러분이 받는 현재의 고난이 있습니까?

현재라는 시간은 잠시 잠깐 후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현재 일어난 일도 잠시 후면 과거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다시 현재의 하는 일에 어떤 감동을 주기도 하고,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현재의 시간이란 아무리 붙잡으려고 해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교인은 나는 "고난"이란 말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그만이지 무슨 고난이 따르느냐? 누가 박해하느냐, 예배당 정문에서 누가 가로 막느냐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교회 나오고, 시간 없으면 말고,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이란 말조차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고, 만들어내고, 하나님 앞에 해결해야 하는 것 다음으로 미루지 않습니다.  내게 비록 손해가 와도 우선 갚고 해결하려는 각오가 없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고난이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이의 신앙은 악세사리와 같습니다.  멋으로 믿어두는 사람에게는 평생 고난이 따르지 않습니다.  스펄죤 목사님이 하신 유명한 말씀 "내가 참석하지 않은 집회에 성령이 임하시면 나만 손해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고난을 받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강단에 꽃꽂이 하시는 분들, 후암초등학교 정문과 후문에 가서 노방전도하려는 선생님들, 교회의 주보는 제대로 나왔는가, 교역자들은 다 건강하게 일하고 계신가, 이래 저래 관심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 몇 시간 보내시고 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에서 일하고 토요일 오후에 교회에 와서 시간을 보내실 것입니까?  목욕탕에 가서 자고 오던지, 볼링장이나 야구장에 가서 소리라도 지르다가 오던지 하시지요, 겨우 교회에 와서 황금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까?  저는 감히 말합니다.  그런 분들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책임을 맡는다는 것, 얼마나 귀한 사명인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책임을 맡으면 명예스럽습니까?  무슨 명예가 있습니까?  주일학교 한 부서의 부장이 되었다고 해보세요.  지도하시는 전도사님을 도와드려야지요.  교사들을 다독거려야 하지요, 부서가 침체되지 않도록 활력을 불어놓어야 합니다.  매사에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오늘에 있어 기독교 교육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런 부장의 일을 하나님이 주신 일자리로 알고 열심을 다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왕년에 다 했습니다."라고 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불평하지 말고, 이제는 다른 차원의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목사님을 돕는 것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제발 사람의 일로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시면 여러분이 복을 받고 여러분 자신은 복의 통로가 되시고, 가정에 은총을 주십니다. 특별히 자녀에게 복을 주십니다.  사람이 잘됩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나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의 학교는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마지막에는 나에게 유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데이비드 프라이어]라는 분의 간증이 있습니다.  "병들었을 때에는 내가 병들지 않았다면 못했을 기도가 있습니다.  병들었을 때에 은혜되는 나름의 찬송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들리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가까이 하는 않는 성경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우러러보지 못할 영안이 있었습니다"고 했습니다. 프라이어라는 분은 질병을 통하여 참으로 위대한 신앙으로 들어갔습니다.  건강할 때에도 기도를 드리지만, 병들었을 때에 드리는 기도는 달랐습니다.  어느 때에도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지만, 병들고 보니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병들지 않고는 부르지 못할 찬송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기적이 믿어지지 않았는데 병들고 보니 기적이 믿어졌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듣지 못할 말씀이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고 가까이할 수 없었던 성경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프라이어]는 "오 하나님, 그런고로 나는 병들지 않고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을 배우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멍에를 지고 배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도 없고, 배울 수가 없습니다.  멍에를 지고 십자가를 지시고 주님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3.  장차 나타날 영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우리의 신령한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불못에서 고생하다가 위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상에서 떨어지던 부스러기나 얻어먹고 살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 곧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늦게 바라본 때문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하늘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재물만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1만불 소득이라도 만족이 없고, 앞으로 2만불 소득이 우리 시대에 열린다고 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1천불 소득일 때도 집안 식들과 고구마 구어먹고, 쌀과자 튀겨 먹으면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굶어죽으신 분이 그렇게 없습니다.  우리는 돈이나 명예만 바라보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1천불 소득일 때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가정은 더욱 행복하였습니다. 1만불 시대에 오니 부부간에 딴 호주머니를 차기 시작하고 남편을 알기를 우습게 여기고, 아내를 무식한 여자, 대화도 안되는 사람을 몰아붙이고 성격이 맞지 않는다나, 생활 양식이 다르다나 그래서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모두다 재물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입니다.  내가 돈 벌었는데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하세요.  그런 소리 하다가 이혼당합니다.  그래 당신이 벌었으니 잘 쓰고 다니시오. 나하고 산 동안 모은 것은 절반은 내 것이오. 내놓고 나가라고 할 것입니다.  돈 몇푼 때문에 싸우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8에서 간증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혀가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아러다가 죽는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무슨 고난입니까?

히11:33-38에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무서운 박해를 견디면서 그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구차히 주님을 배신하고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조롱을 받고, 채찍질당하고 결박받고, 옥에 갇히고 돌에 얻어맞고,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고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40절 말씀에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에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위를 바라보세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현재에 고난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현재의 고난과 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하신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 보자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 안에서 현재의 고난은 다 녹아내리고 흡수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이겨나가고 아예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위를 바라보고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카타콤이라는 지하동굴을 갑니다.  석회암 지대를 파서 만든 인공적인 무덤이요, 지하 대피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 들어가면 아직도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비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있고, 몇 층으로 되어 있고, 갈래길이 많고 수십리 길이어서 숨기가 좋았습니다. 이곳은  로마인들의 공동묘지입니다.  아무리 박해하여도 로마인들은 조상의 무덤에 칼을 들고 들어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의 박해 당시에 교인들은 지하 무덤에 들어가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햇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낮에 돌아다니다가 잡히면 죽어야 했습니다.  저들 성도들은 지하 수십 미터에서 깊은 어두움을 뚫고 찬란한 아침을 바라보았습니다.  

김옥릴 이화여대 총장님이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가기 전에 유언하였습니다.  "나는 이 시간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분의 감사는 두 가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 하나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천국을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잘믿는 것이 여러분의 지상과제입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받으실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시면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성홍모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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