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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에 인생을 걸라! (사도행전 20장 13~24절)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장 13~24절 말씀
오늘 본문 앞부분에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이동 경로가 상세하게 나와 있고, 뒷부분에는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한 고별 설교의 일부분이 나와 있다. 드로아를 출발한 바울이 앗소를 지나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경유하여 밀레도에 이르렀다. 바울의 경유지가 이렇게 상세하게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바울이 상당히 바쁘게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갈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도 느긋하게 머물 수가 없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기간이 무려 삼 년이나 될 만큼 에베소는 바울이 특별히 애착을 갖고 있는 곳이다. 그런 에베소였지만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가려면 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던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오자 그들에게 이야기 하는 내용이 17절 이하다. 그 내용은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여러분이 다 압니다. 저는 겸손과 눈물로 지냈고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한 모든 시험을 참으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또 신앙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 갑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어떤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에는 개의하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세상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이들은 그냥 세상에 왔으니까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관심이 없다. 정처없는 구름나그네 처럼 아무 생각없이 되는 대로 산다.
둘째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철저하게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자기 이익에 있다.
셋째는 사명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사명에 두고 사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가 바로 이런 사명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사명은 곧 우리가 이 땅에 온 목적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이름 그대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사명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
첫째, 복음 전하는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회개하라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다. 예수님은 이 사명에 맞춰서 모든 계획을 세우셨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셨다. 그래서 어디를 가시든지 가시는 목적이 전도였다. 그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을 모아놓고 명령하셨다.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을 확신하시기를 축원한다.
여러분에게 가족을 주신 것은 그들을 예수 생명에 참여시키라고 주셨다. 이웃을 주신 것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직장을 주신 것도 단지 먹고 살게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서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다. 그러므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증인: 마르투스 -순교자, 어려움과 희생 따름 - 그러나 상급과 누릴 영광은 크다.
둘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섬기는 일을 하셨다.
막 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구원과 섬김을 위해서다. 그래서 병든 자도 고쳐 주셨고, 귀신들린 자도 낫게 해 주셨고, 소외 되고 약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더 나아가 주님의 섬김은 목숨까지 바치는 섬김이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의 삶은 섬기는 삶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이 그와 같이 섬기는 삶을 살라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섬김을 여러분의 일과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섬김 받으려고 하기보다 섬기려고 해야 한다. 섬김는 자가 아름답다. 섬기는 자가 행복하다. 섬김은 우리의 사명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본은 섬기는 삶이다. 그러므로 내 눈에 부족한 부분이 보이고, 불만스런 부분이 보이면 그것이 바로 내가 섬겨야 할 영역임을 아시고 적극적으로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다같이 "섬김은 내 몫이다." "섬김은 내 사명이다."
셋째, 십자가를 통한 생명구원의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결국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십자가를 향해 가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종종 예루살렘에 올라가 잡혀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때 제자들이 많이 말렸다. 특히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런 일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렸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고 하시면서 아주 강하게 책망 하셨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사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자란 뜻이다. 사명을 잃은 자가 곧 넘어진 자다. 그리고는 결국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의 사명을 완수하신 것이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의 생활속에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다.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져야될 섬김의 십자가가 있다.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료들을 섬겨야할 십자가가 있다. 교회 일에도 나의 희생을 요구하는 십자가가 있다. 내가 살아가는 지역사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섬김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각 분야에서 기꺼이 십자가를 질 때 거기서 생명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 내가 십자가를 질 때 거기서 능력이 나타난다. 십자가가 사명임을 알고 기꺼이 지시기를 축원한다.
오늘 본문의 말을 한 바울도 예수님처럼 사명의 사람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생명구원에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것을 위해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거침없이 올라간다. 사명에 사로잡힌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명에 목숨을 걸었다. 그는 사명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그런 그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성도여러분! 세상에서 생명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그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명이었다. 사명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았으니까. 그야말로 바울은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그 사명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강하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사명도 아니고, 그 어떤 사람이 부여한 사명도 아니다.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이었기에 그는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거기에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바울은 결국 사명에 매인 자로서 복음위해 살다가 순교를 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참 가치를 발견하고, 사명을 깨달으면 거기에 목숨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한번 왔다가 한번은 간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한 평생이다. 사도 바울은 한 평생을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다. 가치 있는 인생은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인생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매인 인생, 사명에 인생을 거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한다.
출처/김종민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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