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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순종 (롬6:16-19)
한권의 책을 통해 어떤 목사님의 후배 여학생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여학생은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멋부리는데에만 마음을 쏟았다 합니다. 얼마나 게으른지 일어나는 시간도 10시가 넘는 일은 부지기수이고 자취하는 아파트에서 밥을 하기가 싫어 친구집에서 가서 밥을 얻어먹거나 사먹는 것으로 늘 끼니를 해결했다 합니다. 그런 여학생에게 남자친구가 생겼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남자친구가 심한 감기에 걸려 학교에 오지도 못했고 몸살로 고생하고 있을 때 그 여학생이 새벽에 일어나 밥과 국을 지어 친구에게 먹였고 방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그 공부안하던 친구가 남자친구 강의까지 빽빽히 노트에 정리하여 남자친구를 위해 마음을 쏟는 것을 보았답니다. 결코 그 여학생은 더 이상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만 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남친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쏟으면서 행복해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있어지는 변화의 특징입니다. 17,18절을 읽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합니다.
변화는 현상을 넘어 본질적이어야 합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이처럼 희는 태어날 때에 죄의 종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사망의 울타리 안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본성적으로 죄의 노예요 죄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시편기자는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다 합니다. 사람도 죄 가운데 나고 불의 가운데 조성된 삶을 삽니다. 사람도 죄를 선택해서 죄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입니다. 모든 인류는 본질상 그런 존재입니다. 만약 사람이 그대로 있으면 그대로 죽으면 영원한 어두움, 지옥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언제인가 안산시 의원을 지내고 있던 장로님이 전화로 자신이 친구 중에 한명이 고대병원에 중한 병으로 누워있는데 목사님이 전도해주셔야 되겠다 해서 갔습니다. 예상했던대로 환자분은 저를 보지도 않고 누워있었습니다. 그런 저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보니 곧 죽을 것 같습니다. 했더니 버럭 화를 내며 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런 그분에게 저는 선생님뿐만 아니라 저도 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에게 천국의 길을 알려드리려 이렇게 찾아 뵌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변회를 가져옵니다. 복음을 영접하여 이제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죄의 종이었는데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있어지는 가장 큰 특징은 변화입니다. 먼저는 본질적 변화이니 죄의 종이었는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뜨거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삶 속에서 변화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것들을 논리적으로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겪는 사람입니다. 법동에서 은혜동으로 이사한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변화의 은혜를 입은 당사자는 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에 속헤 있으면서 누군가 주인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나도 전에는 그랬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전에는 죄의 노예였으나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노예요 의와 거룩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전에의 나와 이제의 나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를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시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전에 하던 주초잡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등이 그리스도인의 지표가 아닙니다. 이런 변화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전의 나 이제의 나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되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본질적인 면에서 변화되는 삶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입니다. 무엇으로입니까 무엇을 통해 이런 변화가 있어지는 것입니까? 17절은 이렇게 답합니다. 너희에게 전하여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들려온 진리 들려온 말씀앞에 순종이 있어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복음은 진리를 지적으로만 인정하는 것에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구원은 전 인격적입니다. 지정의입니다. 만일 들려온 진리앞에 입으로는 믿어지지만 의지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참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사죄만 믿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용서를 믿는다 하면서도 계속해서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적으로 정리된 생각만 갖고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의지가 필요합니다. 빞2:12절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권면합니다. 구원을 구원으로 거룩을 거룩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10:10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를 의지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받곤 합니다. 지금 죄의 노예로 유린당하면서도 생각속에 믿음이 있으니 입술로만 그리스로 부인하지 않으니 된 것 아니가 착각합니다. 여기 시인하여는 [호몰로게이타이]라 하며 지적인 확신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시인하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볍지 않습니다. 마10:32절은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절은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나를 부인하리라 합니다. 여기서 시인 부인은 삶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게으른 여학생이 남친을 만나면서 있어지는 변화의 차원도 아닙니다. 먼저는 본질적 변화입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도 흉내낼 수 없는 변화입니다. 사람이 가난하다가 부자가 되는 것은 본질적 변화는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에게만 있어지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본질적 변화에 이어 삶에 변화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마땅한 것입니다. 1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입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원래 본질적 내 모습니다.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입니다. 들려진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들려 온 말씀들을 마음에서 삶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니 너희에게 전하여 분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했는데 원래는 마음으로 믿어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믿어를 마음으로 순종하여합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과 순종을 동의어로 본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는 것이빈다. 모리아산에서 하나님의 요구앞에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을 봅니다. 아브라함아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구나 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삭이 더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요구앞에 모리아산으로 3일길을 가고 또 산위에 오르고 하나님께 자신이 드려질 번제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삭은 어떻게든 자신의 의사와 의견을 피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무력으로라든 힘으로라든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저항없이 순종합니다. 아버지에게 순종해버리는 것입니다.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끔을 믿음이 끌고 순종이 따르고 믿음이 묶고 순종이 묶이고 믿음이 찌르고 순종이 찌름을 당하고 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타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은 성품이 아닙니다. 온순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믿음이요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순종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배우는 것입니다. 히5: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합니다. 순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혀 배워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죄의 종인데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 구원의 옷을 입었어도 언제 옛날 기질이 뛰어 나올지 모릅니다. 순종을 통해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입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들음은 귀로 듣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주실 때 미리 조건을 붙이거나 알려주고 기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우르를 떠나 모르고 가는 것처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가나혼인집에 기적을 보더라도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보더라도 순종을 먼저요구하고 그 다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의 기적을 맛볼 수 없습니다. 택시운전을 하는 집사님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부산으로 가는 손님을 태우게 되었습니다. 기사들에게 있어 장거리 손님을 만나기는 힘들었고 한번 만나는 것은 대단한 수입원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에 가는 도중에 집사님은 많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예전부터 집사님이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기때문입니다. 다름아닌 하루의 첫손님의 요금은 무조건 선교헌금으로 드리기로 작정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처럼만에 부산장거리 손님을 태웠으나 그 많은 요금을 송두리채 선교헌금으로 드려야 한다는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가뜩이나 딸의 학원비도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 말입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내내 얼굴이 굳어있었고 손님은 나름대로 깊은 갈등이 기사의 얼굴에 수시로 바뀌니 내려가는 시간내내 편하지 않는 시간이었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집사님이 잠시 휴게실에 내려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다짐했답니다. 그래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지켜야지 하고 결단을 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그 편한 얼굴이 웃는 얼굴로 변화되어 손님을 대하니 부산에 가는 동안 즐거웠답니다. 부산역 근처에서 손님을 내리고 다시 올라올려고 유턴하는데 한 손님이 손짖을 하더랍니다. 그 손님앞에 차를 세우고 손님 이차는 서울차입니다 하고 가려던 찰나에 그 손님이 서울에 급한 볼일이 있어 세운 것이니 서울갑시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더 큰 하나님을 말할 수 없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더 큰 하나님을 더 큰 예수를 알아가야 합니다. 배워서가 아닙니다. 순종하여입니다. 몸으로 그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을 느끼는 예배가 되게 하나님을 느끼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을 보면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순종하다보면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순종은 행함이기에 꼭 본질적 개념에 묶어주면 안됩니다.
순종은 곧 행함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의지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지정의가 포함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면서 여전히 죄에게 유린당하고 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다윗처럼 순간 그럴 수 있지만 일어서야 합니다. 나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라 사람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19절 말씀이 여기에 결론을 맺어줍니다. 19절을 보니 너희 육신이 연약함으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율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합니다. 전에는 입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우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으니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입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몸이라 하지 않고 지체라 한 것입니다. 지체는 우리가 가진 다양한 기능과 활동력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이것이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체는 지금 어디에 길들여져 있습니까? 영적으로 입니까? 세상적으로입니까?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이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의 마음이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그리스도예수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최고의 목표는 단순히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지적인 승인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나누어진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전과 이후가 달라야 합니다. 지적인 요구를 넘어 삶의 요구에 반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2:10절을 통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예수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는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선한 일을 위하여입니다. 이것은 바로 삶의 요구입니다. 나도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의 요구입니다. 거룩의 중요한 개념은 구별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죄로만 끝날 수 없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살전4:3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고의 관심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12: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합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내게 있는 옛 본성들과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을 욕심내야 합니다. 신앙인의 처절한 욕심은 거룩입니다. 요삼1:3절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리로다 요한사도는 진리안에서 행하는 가이오를 기뻐한 것입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요삼2절에 사랑하는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합니다. 진리안에서 행하는 가이오를 축복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나무만 보면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열리는 열매를 보면 아 저 나무가 사과나무였구나 배나무였구나 하고 압니다. 우리 주님은 미리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심겨진 그리스도의 나무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거룩함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믿음은 순종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삶은 어떠하십니까
출처/유재명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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