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크도다 마15:21-28 (2013/6/2)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 경계선 밖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무더워지면서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좀 피곤합니다. 가끔은 일상을 떠나 잠시 침묵과 무위의 시간을 갖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마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겁니다. 예수님 역시 피정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당신의 온 몸으로 부둥켜안으며 사셨지만 주님 역시 해야 할 일과 사람들의 눈길로부터 벗어나 고독의 시간을 누리고 싶으셨을 겁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은 국경 너머의 도시인 두로와 시돈 지경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병행본문은 예수님께서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랐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막7:24). 고요한 곳에서 자신의 사역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예수님은 희망과 절망을 고루 맛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있었다는 측면에서는 희망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 깊은 절망감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무력으로라도 로마를 내쫓고 다윗의 왕권을 잇는 새로운 왕조를 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기대는 자칫하면 환멸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대고 있는 힘의 논리를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운명은 죽음 아니면 따돌림입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학정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했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에게도 깊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어쩌면 당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대중들의 몰이해야 그렇다 해도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당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라고 하는 장로들과의 갈등도 점점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잠시 물러나 그 모든 상황을 재점검하려 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고요함을 찾아 숨어든 그곳에서 예수는 한 여인의 방해를 받습니다. • 뜻밖의 방해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 앞에 나타납니다. 마가는 그 여인이 시로페니키아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마태는 여인의 출신을 특정하지 않고 다만 가나안 여인이라고만 말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22) 상황은 단순합니다. 한 여성이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고, 그 어머니는 딸 때문에 더 큰 괴로움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아마도 딸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별 무소용이었습니다. 재산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이웃과의 친교로부터도 멀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딸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어느 날 풍문으로 들려오는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한 사나이가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는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그 사람이 가까이에 왔습니다. 여인은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다윗의 왕권을 회복할 왕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민중들의 기대가 이 이방 여인에게까지 이미 전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말문이 막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예수의 그런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사정만 줄기차게 아룁니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23) 하고 부탁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의 큰 사역이 여인의 그런 사적인 일 때문에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큰 일’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대의에 헌신해야 할 예수가 불필요하게 여인과 연루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적당한 말로 위로해주고 돌려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부탁조차 거절합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24) 예수님도 마음의 여유가 없으셨던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은 평등공동체의 이상을 잃어버린 백성,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자기들의 소명을 잃어버린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 동포에게 참 생명의 길을 가르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셨습니다. 세상의 변혁은 먼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대학의 팔조목도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지치기도 했고,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좀 퉁명스럽습니다. 조금 당황스럽지요? 예수님은 언제나 친절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고, 헌신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원망사고願望思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치지도 않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합니다. • 낯선 예수 예수님은 지금 누구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막무가내입니다.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예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25)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주님’으로 바뀌었습니다. 훨씬 더 주관적인 호칭입니다. 그분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누가 뭐라 하든 멈칫거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수의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관계맺음에 대한 차가운 거절이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 뜻밖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놀랍니다. 이 말을 하신 분은 우리가 알던 그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셨던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예수님의 반응은 낯설 뿐만 아니라 불친절하고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게 옳으냐 죽도록 내버려두는 게 옳으냐고 따지며 사람들과 갈등도 마다하지 않던 분의 말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예기치 않은 반응을 두고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변호하기 위해 애씁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반응을 보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여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혼잣소리처럼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은 이미 여인의 믿음을 알아보셨지만, 여전히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런 반응을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역시 정말 그럴까 싶습니다. 여인은 모욕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개’라고 지칭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도 국수주의자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노골적이었습니다.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어떤 긴장감이 조성되었을 겁니다. 고통을 안고 찾아온 여인이 종교와 인종의 장벽에 막힌 것처럼 보입니다. • 고통이라는 보편 언어 그런데 그런 긴장된 대치를 깨뜨린 것은 여인이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7) 모욕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단절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절박함은 자존심을 훨씬 넘어섰던 것 같습니다. 여인은 그 모욕적인 말과 상황을 그냥 자기 품으로 부둥켜 안아버립니다. 그러자 갑자기 자유의 공간이 생겼습니다. 긴장이 해소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일부러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다고 합니다.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거절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사소한 거절에도 자기 존재 전체가 거부되기라도 한 것처럼 반응합니다. 이 여인이 거절에 노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고통으로 인해 겪어온 인고의 세월이 준 선물이었습니다. 여인의 말은 예수님께 깊은 인상을 남겼음이 틀림없습니다. 여인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문제에 몰두해 있던 예수님을 구체적인 한 존재, 곧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한 사람에게 주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고통은 인종, 피부색, 문화, 정치 체계, 종교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인류 공통의 경험입니다. 그렇기에 고통이야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의 끈입니다. 고통의 자리에 선 사람을 외면하는 순간 인류와의 연대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 교회에 와서 <새날을 여는 청소녀 쉼터> 사역을 소개한 김선옥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고통에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집 밖으로 내몰려 거리를 떠도는 청소녀들을 부모의 심정으로 품어 안고 있습니다. 때로는 거칠고, 막무가내이고, 통제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옳고 그름의 잣대만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의 눈에 그들은 문제아입니다. 하지만 사랑과 연민의 눈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이들에게 그들은 잠시 길을 잃은 사람일 뿐입니다. 김 목사는 아이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깃든 그늘과 상처와 눈물과 여림을 보았기에 능히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었습니다. 김 목사의 돌봄 안에서 아이들은 공부도 계속하고, 일도 배우면서 자기 속에 있는 보석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정신적인 문제로 인하여 고통받는 딸에게 기어코 정상적인 삶을 되돌려주고 싶은 여인의 마음이 예수님을 움직였습니다. 여인은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라 돌봄이 필요한 이웃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은 프로그램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개인을 소중히 여기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28) 불신앙의 무리들 가운데 살면서 예민해졌던 예수님의 마음은 이 여인의 존재를 통해 부드러워졌습니다. 어두웠던 마음에 빛이 유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인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고통의 자리로 예수를 초대했고, 예수님은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우리는 수 없이 많은 경계선을 쳐놓고 삽니다.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휴전선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기업과 노동자, 신자과 불신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내국인과 이주민, 노인과 젊은이…. 그러나 경계선의 한 쪽에 머무는 한 우리 삶은 편벽됨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경계선의 저편에도 삶이 있습니다. 경계선 저편의 사람들과 만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만나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서로를 가르고 있는 경계선이라는 게 얼마나 인위적인 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수많은 경계를 가로지른 삶이라 하겠습니다. 의인과 죄인,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거룩함과 속됨 사이를 넘나들며 그 둘을 소통시키시려고 애쓰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1:14-16) 고통 앞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은 무의미했습니다. 마침내 주님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했고, 바로 그 순간 여인의 딸은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익숙한 세계에만 머물지 말고 처음에는 불편하더라도 경계선 저편의 사람들에게 다가서보라는 주님의 초대 앞에 서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수많은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사람들을 소통시키고, 마침내는 그 경계선 자체를 없애야 합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삶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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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06월 02일 12시 02분 2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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