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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한 초신자들의 질문들

by 【고동엽】 2022.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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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한 초신자들의 질문들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민족 종교가 아닌가요?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인 언어, 구체적인 역사, 구체적인 지리적 장소를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알려주시기 않으면 도무지 하나님을 알 재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구약시대에 알려지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민족 종교는 타 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데, 기독교는 처음부터 예수 안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남자와 여자가, 노예와 자유인이 모두 평등하다는 원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28). 그러므로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고 보편종교이며, 나아가 남녀평등, 노예해방의 종교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도 안 되는 천동설을 주장하지 않는가요?

갈릴레이 이야기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에 의해 과학자가 핍박을 당한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로마 카톨릭이나 개신교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 성경 자체는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천동설을 토대로 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구절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성경이 쓰여진 시기가 모든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고 사는 시기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세계관 속에 이해가 되는 용어로 계시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천동설을 주장한 것은 어리석은 인간들이었지 성경이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처녀가 애를 낳나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녀도 애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모세가 자신의 능력이 없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거부(?)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출4:11)

이 말씀을 조금 확장해 보면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합하여 져서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법칙을 만드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첫 사람 아담은 이런 수정이란 과정없이 직접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지구, 또한 지구가 있는 태양계 그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처녀의 자궁에 하나의 생명을 만드신다는 것은 아주 쉬운(?)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비과학적이라기보다 초과학적인 사실입니다. 즉 우리의 지적 능력이 모자라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적능력이 온전히 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2~13)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니 말이 됩니까?

성경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즉 믿음은 행함을 배제하는 배타적인 용어가 아니라 행함의 씨앗으로서 생명력이 있는 작은 겨자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믿음이라고 참 생명이 있는 씨앗과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평생 그 믿음이 성장하여 많은 의로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또한 이 믿음이란 언약과 관계된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의 조국을 떠나 평생 나그네와 객지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현존 질서의 울타리 밖으로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식은 언약과 믿음이라는 방식이며, 결코 이 전에 세상에서 얼마나 좋은 조건을 구비했는가가 아닙니다. 재물의 빈부, 지위의 고하, 학력의 차이과 이 언약과 믿음이라는 단순한 조건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언약"이라는 조건을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언약"(약속)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는 "믿음"을 완수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믿음이라는 조건이 너무 작은 것이라고 얕보는 분들은 공산치하나 이슬람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단지 "믿음"의 단계로 향하는 결단 때문에 고난을 당했고 당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한국이 얼마나 신앙의 자유 속에 있는지 모르고 계십니다. 더구나, 그 분들은 하나님께서 이 우리가 믿으면 구원을 받도록 하시려고,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셨는가를 잊고 계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왜 그리 배타적인가요?

기독교의 배타성은 기독교가 그만큼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그런 확신이 없다면 배타적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만 구원을 받고 선민이 되려고 한다면 그러한 배타성 없이 그저 다른 사람들은 멸망하도록 버려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낳은 배타성은 거룩한 배타성입니다. 이러한 배타성이 없는 종교가 오히려 사이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기독교의 배타성은 결코 다른 어떤 종교의 경우처럼 폭력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파키스탄 등지에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의해 화형에 처해지는 핍박을 당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위험한 배타성은 바로 이러한 폭력적 배타성입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홍수 전에 큰 배를 만들고 이 배에 따라고 외치는 노아의 배타성입니다.

왜 선악과를 만들어 죄를 짓게 했는가요?

선악과를 만드는 것까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지만, 죄를 지은 것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는 그 만큼의 자유에 해당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아담 간의 유일한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은 아브라함에게서는 "할례" 이스라엘에게는 "안식일" 이었듯이 아담에게는 "선악과"가 하나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담이 바른 관계에 있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따먹도록 직접 작용한 것은 악마였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 거역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시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는 바로 그러한 자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부정이 더 심한가요?

상대적으로 청렴해야 할 사람들이 죄악의 테두리에 드러나니까 실망감과 배신감 같은 것 때문에 부정이 심해보이는 것뿐이지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아주 청렴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성자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막 믿는 사람이 범죄하지 말라는 법도 없고 오래 믿은 사람이 실수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죄악의 본성은 무섭고도 끈질기니까요. 

출처 : 창골산 봉서방 

 


 

 

 

출처 : 브니엘
글쓴이 : noemisu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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