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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헛되고 헛된 세상입니다! (전 1:1-18)

by 【고동엽】 2022. 2. 11.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된 세상입니다! (전 1:1-18)

 

이 세상엔 오직 소유에 목적을 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유를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이 오직 하나의 목적입니다. '돈이면 다다.' '돈이면 다다.' '돈이면 다다.' 그 소리를 빨리 하다 보니 '돈다'가 되었습니다. 돈에 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산신령이 나무꾼에게 나타나서 물었습니다. '소원 한가지를 들어 줄 터이니 말해보아라' 나무꾼은 선뜻 말했습니다. '돈과 여자를 주옵소서. 결혼도 못 하고 가난합니다.' 산신령이 말했습니다. '한 가지를 준다고 했는데 두 가지를 말하는 구나. 그래 그 선물 두 가지를 한꺼번에 준다. 돈 여자를 주마' 그래서 그 나무꾼은 '돈 여자'를 받았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기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로 연관됩니다. 이 기간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려는 신앙적 결단은 매우 귀한 일이며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교만을 꺾고 겸손한 믿음을 가짐으로 고난을 통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과 생명(부활)입니다. 먼저, 사순절은 내가 죽는 절기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그 죽음은 실상 나의 죽음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내가 달려야 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는 순간 우리도 죽은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욕심도 없습니다. 자기주장도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죽은 자임을 믿습니까? 사순절은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깨닫는 기간입니다. 내 안에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사단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순절이 되어야 합니다.
사순절의 다른 의미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사순절이 끝나면 부활절이 있습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사순절의 경건 훈련은 신앙의 봄을 피웁니다. 죽은 것 같은 땅에서 새싹이 나오듯이 사순절은 우리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이 기간 동안 힘써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또 이 기간 동안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할/ ◀제목 소개!▶

 

솔로몬은 세 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입니다. 이 세 권 가운데 아가서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그 다음에 잠언이 기록되었고, 전도서는 제일 나중에 기록되었다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서의 내용을 보면 젊음의 열정이 묻어 나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젊었을 때 술람미라는 여자와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편 잠언은 솔로몬이 나이 지긋한 중년이 되었을 때 그의 원숙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어떻습니까? 솔로몬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자기가 걸어온 인생 길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들을 뉘우치는 심정으로 기록한 것이 전도서입니다. /할/ 그러니까 아가서는 솔로몬이 젊었을 때, 잠언은 그의 나이가 중년이었을 때, 그리고 전도서는 그가 노년이 되었을 때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솔로몬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전도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를 전하는 자,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쓴 잠1:1절을 보면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자기의 이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1:1절에 '솔로몬의 아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전도서만큼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기 이름을 나타내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그 만큼 그가 인생을 깊이 돌아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크게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큰 지혜를 받았습니다. 권력도 받았습니다. 남보다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너무 편해지니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육신의 쾌락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들 가운데는 이방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의 꾐에 빠져서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이방의 헛된 우상을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을 징계하셨습니다. 솔로몬의 노년에 사방에서 솔로몬을 대적하는 무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나라에 환난이 생겼습니다. 평화가 깨져 버렸습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참회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살롬'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즉 '평화'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범죄하고 자기가 타락해서 자신의 잘못으로 나라에 환난이 생기고 평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전도서에서는 평화라는 뜻을 가진 '솔로몬'이라는 자기 이름을 떳떳하게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를 낮추고 뉘우치는 심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혀 기록하지 않고 전도서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전도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할/
전도서는 솔로몬의 모든 실수와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는 인생 교과서요, 인생체험서입니다. /믿/

 

①'해 아래 있는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된 세상'임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2-3).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기서 헛되다는 '손으로 잡을 수 없고,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한 가닥 연기와 같은 한차례 부는 바람이나 가느다란 숨과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삶이든지, 주택이든지, 부모나 남편, 자녀등 식구들이든지, 하늘과 땅, 바람과 물, 사람들이 좋다는 모든 것, 그리고 슬퍼하는 모든 것,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또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헛되다'라는 것입니다.
'헛되다'라는 뜻은 '대수롭지 않다, 스쳐지나 간다, 부질없는 것이다. 완전한 공허와 허무를 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헛된 것인지는 3절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절에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다', 5절에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절은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절에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솔로몬이 자기의 인생을 다 살고 난 뒤에 그가 내린 결론을 모든 것이 다 헛되더라는 것입니다. 남다르게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내 인생은 정말 멋있었도다. 아름다웠도다. 신 났었도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졌으면, 이 짧은 구절 속에서 '헛되다'는 말을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똑같은 내용을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여기 '해 아래서'는 이 땅,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해 아래서, 이 땅에서 많은 수고를 했지만 결국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노인과 바다'라는 영화를 아시죠? 어떤 노인이 돛단배를 타고 홀로 먼바다로 나가서 낚시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매일 허탕만 쳤습니다. 84일 동안이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85일 째 되던 날 노인은 큰 고기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돛새치라는 엄청나게 큰 고기입니다.
너무 커서 고기가 낚시에 잘 딸려 오지 않습니다. 노인은 며칠 동안 그 고기와 씨름을 했습니다. 줄을 풀었다가 당겼다가 하면서 필사의 싸움을 했습니다. 드디어 사흘 째 되던 날 고기가 바다에 떠올랐습니다. 노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작살로 고기의 옆구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축 쳐진 고기를 배 옆에 끼고 노인은 육지로 돌아옵니다. 노인은 모처럼 오랜만에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노인은 또 상어와 필사의 싸움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육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고기의 살점은 다 떨어져 나가고 앙상하게 뼈만 남았습니다.
노인은 허탈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해 아래서의 수고는 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남는 것이 없으니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미국의 억만장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죽을 때 마지막으로 'Nothing, Nothing, Nothing'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부를 가지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날 때는 결국 '아무 것도 없다'란 비통한 고백만 남기고 떠났답니다. 우리 한국의 그 유명한 이병철, 정주영 재벌들도 갈 때는 다 빈손 들고 갔습니다. /할/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박해를 피해서, 참 자유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청교도들은 북미 대륙으로 건너갑니다. 가면서 그들은 한 가지 꿈을 갖게 됩니다. 가서 검소하게 살고, 말씀대로 살고, 마음껏 신앙생활하며 그곳에 낙원을 이루어 보자는 꿈입니다.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갑니다. 가서 그들은 그때부터 엄격한 청빈 생활을 해 나갑니다.
여기서 나온 정신이 바로 청지기 정신, 집사 정신입니다. '내 재산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관리자일 뿐이다. 나는 하나님의 재산을 지키는 집사이기 때문에 나는 내 재산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만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집사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바로 오늘날의 미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 보면 교회들이 많은데 그 교회들 중 대다수는 개인 이름을 붙여서 지은 기념 예배당들입니다. 돈을 벌어서 사용하다가 죽을 때는 재산을 모두 정리해서 교회에 헌납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교회가 기념관을 지어 놓은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재산을 자선 단체에 헌납해서 미국에는 자선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도움을 준 선명회니 홀트니 하는 단체들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미국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하버드 대학은 존 하버드가 설립했다고 하는데, 정작 설립자 자손은 지금 그 대학에 한 사람도 개입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또 카네기 공대는 앤드류 카네기가 설립을 했는데 그는 돈만 냈지 일체 학교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공대는 누가 설립자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또 시카고 대학은 존 록펠러가 설립했는데 돈을 낼 때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학교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다 똑같은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모두 집사 정신에서 나온 물질 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세계를 제패하였던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입니다. 지혜로운 신하에게 대왕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는가?' 그 신하는 죽은 해골을 가지고 와서 말을 합니다. '이 해골을 책상 위에 놓고 정치를 하십시오'
그 후 알렉산더는 해골을 책상 위에 놓고 정치를 했습니다. 그는 그 해골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나도 이렇게 될 것이니 다 버리고 오직 정치만 잘 하자'고 다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골이 될 몸이니 전리품은 하나도 갖지 말고 다 싸운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깨끗한 정치를 했습니다. 모두를 버리고 오직 한 가지에만 전념했습니다.
그 알렉산더 대왕이 20세에 왕위에 올라 페르시아, 이집트, 이란을 정복한 뒤 인도를 정복하려 했으나 열병과 장마로 인해 바벨론으로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4세에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지나간 죽음의 길을 앞두고 허무함을 절감하며 '내가 죽거든 내 손을 빈손으로 관 밖에 내어놓아 성을 돌면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고 외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라면서 관에서 양손을 내놓게 했다고 합니다. 위인다운 삶의 철학입니다. /할/
여러분, 그렇습니다. 위대한 사람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후세에 기억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죽은 당사자에게 무슨 유익이 되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죽고 난 다음에 그 모든 것은 죽은 사람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묘지 앞에 아무리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고 찬양하고 칭찬하며 박수를 친다한들 죽은 사람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바람과 같을 뿐입니다. /할/
사40:6-8절에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 이외에 인생은 모두가 풀과 같은 일장춘몽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 가운데 '노생지몽'(老生之夢)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당나라에 노생이라는 젊은이가 한단이라는 곳으로 가던 중 잠시 주막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마침 같은 방에 묵게 된 한 노인과 술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노인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입신출세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리고는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그는 주막을 나와 어느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부자인 최씨의 딸과 결혼하고 날로 부유해져 3년 후에는 수도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 이를 격파하여 공을 세웠고 드디어 재상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역적으로 몰려 귀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귀향지의 조그마한 오두막에서 '내가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있었으면 평안히 살 수 있었을 텐데 무엇이 부족하여 벼슬을 하려고 하였던가?' 한탄하며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흔들었습니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 머물렀던 주막집이었고 옆에는 노인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노생은 깜짝 놀라 '아니 이게 꿈이었던가'하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노인은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걸세'라며 껄껄 웃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노생지몽'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인생이란 꿈과 같이 덧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하룻밤 꿈에 일생을 다 경험했습니다. 결국 우리도 일생을 지나 돌이켜 보면 일장춘몽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에는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비극입니다. /할/

 

②해 아래서의 수고는 왜 무익한가?
솔로몬은 좀더 구체적으로 4절 이하에서 해 아래서의 수고가 왜 유익하지 못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과학적인 시각으로 본 이유'입니다(4-7).
해 아래 이 세상 만물이 돌아가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세상 만물이 부산하게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똑같은 일을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 아래서 그 수고가 아무리 크다 한들 무슨 의미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두 번째 이유는 역사적인 접근입니다(8-11).
인간의 역사라는 것도 반복될 뿐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새 것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주님만이 새 것을 만드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테두리 속에서 맴돌 뿐입니다. 해 아래서는 새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해 아래서 인간이 땀흘리면서 아무리 수고해봤자 새 것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접근하여 본 것입니다(12-18).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깊은 사색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지혜를 다 짜내도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해 아래서의 수고가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할/

 

③솔로몬이 밝힌 세 가지의 접근법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⑴과학적으로 본 이유입니다(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까? 야단법석을 떨면서 수고하고,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한 세대가 와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다 끝내고 나면 그 세대는 갑니다. 또 그 다음 세대가 와서 그 일을 이어갑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어질 뿐입니다.
연극을 보면 무대 위에 배우가 나와서 자기의 배역을 하고 나면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또 다른 배우가 와서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합니다. 말하자면 땅이라고 하는 지상 무대는 그대로 있고, 한 세대가 와서 살다가 사라지고, 또 그 다음 세대가 오고, 그 세대가 사라지면 그 다음 세대가 또 옵니다. 이것이 되풀이될 뿐입니다. 인간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그 예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해와 바람과 강물입니다.
5절에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아침이 되면 동쪽 하늘에 해가 떠오릅니다. 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서쪽을 향해서 달리고 또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서쪽으로 해가 집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해는 밤새도록 떴던 곳 동쪽을 향해서 또 계속해서 달립니다. 해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또다시 동쪽으로 움직이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니 그 수고가 뭐 그리 대단히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6절에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해를 말할 때는 동쪽과 서쪽을 말했습니다. 이번에 바람을 말할 때는 나머지 두 방향, 곧 남쪽과 북쪽을 대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바람이 남쪽으로 불기도 하고 북쪽으로 불기도 합니다. 이리 돌고 저리 돌지만 따지고 보면 그 바람이 그 바람입니다. 결국은 왔다갔다하는 일만 반복합니다. 똑같은 일만 지겹도록 반복할 뿐입니다.
7절에 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강물이 쉼 없이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그러나 강물은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합니다.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서 위로 올라가 구름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가 되어 땅에 떨어져 강물이 됩니다. 이것이 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계속해서 그 일만 반복할 뿐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자연의 이치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만물은 결국 다 원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해는 떴다가 지는데 결국은 그 떴던 곳으로, 원점으로 되돌아갑니다. 바람이 이리 돌고, 저리 돌지만 결국은 원점, 그 불던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강물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지만 결국은 그 원점인 강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해 아래서 이모저모로 고생하고 수고하지만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 원점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결국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인생인데 해 아래서 헛되고 헛됫 일에 목숨을 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라는 교훈입니다. /할/

 

⑵역사적으로 본 이유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결국은 되풀이될 뿐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새 것도 만들지 못하는데 해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의미가 그리 있겠습니까?
8절에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은 앞에서 솔로몬이 언급했던 세대, 해, 바람, 강물 등을 말합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끊임없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해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물의 피곤함은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여기 '만물의 피곤함'이라는 말은 '모든 일이 반복될 뿐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눈이 아무리 보아도 족함이 없습니다. 새 것이 있어야 족함이 있지요. 우리 귀도 아무리 들어도 차지 않습니다. 늘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말에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 아래 것 때문에 목숨 걸 일은 말아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는 해 위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할/ 영원한 세계,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볼 때, 우리 인간은 참된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인간의 말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우리 영혼에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과 만족이 임할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9절에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인간의 역사는 돌고, 돌고 되풀이될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이미 우리 선조 들이 다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우리 후손들이 또 다 행할 것입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절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새 것이 있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0절에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이것은 새 것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사실은 어떻습니까? 10절 마지막 부분에 보니까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발명한 것은 단지 자연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들추어내서 그것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적용했을 뿐이다'
자기가 발명한 것 중에 새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자연 속에 있는 원리, 비밀을 드러내서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새 것이 있는 것처럼 자꾸 착각을 합니까? 그 이유가 11절에 나옵니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쉽게 잊어버립니다. 예컨대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까지는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위의 증조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은 쉽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과거의 일을 곧 망각해버립니다.
지금 솔로몬이 역사의 이치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역사에도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되풀이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범위 안에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해 아래서 수고한다 해도 새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무슨 대단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새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고후5:17절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23:1절에서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멘!/
부족함이 없는,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삶은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 내 모든 삶을 다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참된 만족이 옵니다. /아멘!/
여러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⑶철학적으로 본 이유가 있습니다(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솔로몬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임을 이미 1절에서 밝혔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앞으로 자기가 하는 말에 더욱 권위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동사무소 직원이 하는 것과 동장이 하는 것은 다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대통령이 말하면 더욱 권위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하는 말에 권위를 주기 위해서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혔습니다.
지금 솔로몬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세요! '마음을 다하며' 진지한 태도로 말했습니다. 대충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써서' 솔로몬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문자 그대로 '최고의 지혜자'이었습니다. 그 지혜자가 지혜를 써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를 깊이 있게 공부를 했습니다. 폭넓게 다각적으로 다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보려고 연구해 보고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론은 무엇입니까?
'이는 괴로운 것이니' 인간의 지혜를 아무리 다 짜내어도 그것 가지고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솔로몬만 그렇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역사상 많은 철학자들이 다 똑같은 질문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왜 사는가? 그러나 아무도 속시원한 해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똑같은 내용을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생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해 아래서의 모든 수고를 다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손으로 바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손으로 한번 움켜쥐어 보세요. 손에 남는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한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기 위해서 15절에서 하나의 속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이지러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이지러진 달 조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까? 꽉 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보름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꽉 차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셀 수도 없습니다. 아울러 이 세상에 구부러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렇게 많은 구부러진 것들을 어떻게 펼 수 있겠습니까? 이지러진 것을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오늘날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그렇다고 세상의 구부러진 것이 다 펴졌습니까? 오히려 범죄가 얼마나 더 많아졌습니까? 더 살기 어렵고 더 구부러진 세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모르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부족한 것이 더 많이 느껴집니다. 옛날에 다 없이 살았을 때는 오히려 마음은 편했습니다. 요즘에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상대적인 빈곤감 때문에, 이것저것을 아니까 자살하는 사람이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써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솔로몬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솔로몬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6절에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평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꿈 가운데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무엇을 줄꼬' 그때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간구대로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상4:32절에 보면 솔로몬이 잠언을 3,000개를 말했고, 노래를 1,005개나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 지혜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천부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17절을 보세요.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솔로몬은 지혜에 대해서 깊이 연구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지혜의 반대가 되는 미친 것, 미련한 것,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습니다. 인생의 밝은 면, 어두운 면,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을 두루두루 깊이 조사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지혜로 풀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그러면서 솔로몬이 마지막 18절에서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인간의 지혜가 많다고 해서, 지식이 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번뇌가 많아지고, 근심이 더해집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해졌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과 멀어지고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발달했습니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했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금도 수없이 하늘에 떠다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달나라에 가서 달 표면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한 지혜와 지식은 무서운 원자폭탄을 만들었습니다. 수소폭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에 떨면서, 더 큰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할/

 

④여기서 솔로몬이 '헛됨'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저자의 의중을 바로 알고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 솔로몬이 헛된 것을 강조한 목적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추구해봤자 그게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
▶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봅시다. 전12:13-14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즉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긴 해보나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이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까지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날이 올 것이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며 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할/
우리가 육신의 즐거움과 욕심을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은 실망과 절망으로 헛되이 끝나고 말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해 주셨습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아멘!/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⑴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가 됩시다! 인간의 생각과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벧전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세상의 모든 사상이나 문학이나 철학이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씨앗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는 씨앗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영원히 남는 삶입니다.
성경은 우리 삶 속에 필요한 지혜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사는 법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말씀 따라 사는 성도가 최고의 행복자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⑵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성도 됩시다! 내 뜻이나 내 생각이나 내 야망을 따라 사는 것은 다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을 따라 사는 삶은 영원과 연결된 삶이요, 영원한 차원에서 사는 삶입니다.
롬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할/
요일2: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리고 17절에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내 뜻대로 사는 것은 쭉정이의 삶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영원히 남는 삶입니다. /할/
⑶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로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단12:2-3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할/
여기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전도자의 상급입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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