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가 축복(祝福)의 통로입니다! (시 50:14-15, 22-23)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추수 감사절의 절기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감사절의 기원은 미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후 첫 수확을 하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린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청교도들과 이미 형식과 의식에 젖은 영국의 성공회(잉글랜드교회)간에는 많은 신앙의 갈등이 있었는데 영국의 국왕은 영국의 성공회이외는 다른 신앙 견해를 가진 청교도들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신앙적 자유를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네덜란드로 건너가 11년 간 고생하다가 거기서도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기가 힘이 들자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 7년 동안 힘들여 일해서 번 돈으로 배를 샀는데 그 배가 바로 그 유명한 '메이 플라워'호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물과 양식이 부족한 가운데 행해진 65일간의 항해가 험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꿈에 부풀게 했던 신대륙에서의 생활도 생각처럼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심한 식량난과 추위, 기후 차와 영양 실조들의 원인으로 인해 첫 겨울에 102명 가운데 44명이나 죽고, 그 나머지도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 속에 있던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마음씨 좋은 인디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가져다 주었고, 농사짓는 방법도 가르쳐 주어 그들의 도움으로 다음해인 1621년 청교도들은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친절한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칠면조 고기 등을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기쁜 첫 추수 감사절을 가졌습니다.
그 후 1789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이 추수감사절을 전국적으로 지킬 것을 선포하였으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 추수 감사절이 왕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중단시켰습니다. 그 뒤로 추수 감사절은 일부 주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지켜지게 되었고, 그 기념일도 주마다 달랐습니다.
이렇게 폐지되었던 추수 감사절이 다시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 감사절을 미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추수 감사절 하루 동안은 전쟁이 중지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가 추수 감사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게 된 것은 1904년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장로교 단독으로 11월 10일을 추수 감사절로 기념하던 것이 1914년 각 교단 선교부의 회의 결과에 따라 미국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변경되어 지켜지다가 그 후에 추수 감사절은 수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어 11월 셋째주 일요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계에서는 추수 감사절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추석(중추절)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일부 교파에서는 이미 이를 시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①추수 감사절의 근본 목적은 무엇인가?
한해동안 보살펴 주시고 축복해 주셔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물을 드리는데 있습니다. 1621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신대륙에서의 첫 수확을 거두게 된 그들은 추수할 수 있게 도와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실질적으로 신대륙 생활에 도움을 준 이웃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추수 감사절과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풍습으로 칠면조 고기를 먹는 것이 있습니다. 칠면조 고기를 먹는 풍습은 첫 추수 감사절 때 새 사냥을 갔던 사람이 칠면조를 잡아와 먹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일부 지방에서는 이날 식탁에 5개의 옥수수를 올려 놓는데, 이는 청교도들이 식량난으로 고생할 때 한 사람의 하루 식량으로 배당되었던 옥수수 5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각 가정의 부모는 첫 추수 감사절이 지켜지기까지 고생했던 그들 선조들의 수고를 설명해 주며 자녀들과 함께 그 옥수수를 먹는다고 합니다.
②추수감사 주일은 우리의 감사지수를 확인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며 사는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를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할/
오늘 본문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할/
바울은 엡5:20-21절에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보면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 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았습니다. /믿/ 오늘도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납니다. 히13: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은혜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의 이름의 은혜를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은혜를 알아야 감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나의 생명의 구세주입니다. 그 예수 안에 회복이 있고, 변화가 있습니다.
가끔 보면 은혜를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병에서 낫고, 문제가 풀리고, 원하던 것을 얻는 것만 은혜인 줄 압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멘!/
어떤 아내가 남편을 은혜 받게 하기 위해 교회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남편은 졸기만 합니다. 너무 속이 상해서 항상 하던 대로 남편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좋은 말씀에 은혜도 못 받아요?' 그러자 남편이 '은혜 받으면 어떻게 되는데. 당신처럼 되는 것이 은혜 받은 거야! 그러면 나는 그런 은혜 안 받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말씀을 들은 것을 은혜로 생각하지만 진짜 은혜는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자신의 생각이 변화되고, 자신의 말이 변화되고, 자신의 얼굴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 말씀을 들을 때 귀가 즐겁고, 강단이 즐거운 만담으로 가득 차고, 걸쭉한 사투리와 농담으로 재미있게 하는 것을 은혜로 오해한다면 하나님의 진짜 은혜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 학에서는 사투리를 쓰는 것도 주의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언어도 치우치지 말아야 하고, 표준어를 써야 하는 공적인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걸쭉한 사투리를 쓰면 재미있어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욕처럼 들리는 말까지 쓰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재미있게 된 것을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대 사회는 쾌락과 재미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방송국은 작품성보다 시청률을 중시합니다. 아무리 아카데미 작품상을 탔어도 재미없으면 환영받지 못합니다. 교회도 그런 영향이 있지만 교회는 그런 재미로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유머 적인 말과 행동으로 웃기는 것을 은혜로 알아서는 곤란합니다. 참 성도는 재미와 쾌락을 따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헌신할까?'에 관심을 가지야 합니다. /아멘!/
③감사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감사는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을 행복과 기쁨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인생에 바퀴와 같습니다. 감사는 인생에 날개와 같습니다. 감사는 조건과 환경을 초월합니다. 감사는 기쁨을 몰고 오는 축복의 바람과 같습니다. 감사는 인생의 환난과 시련의 폭풍의 진로를 바꾸는 힘과 능력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감사는 행복의 어머니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어떠냐?'의 문제가 아니라 '감사가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길이 막힐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의 축복도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요6장에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 벳세다 산 위로 가시자 수많은 군중이 따랐습니다. 말씀을 오래 하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허기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제자 중에 빌립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라'고 하십니다. 빌립은 머리 회전이 잘 돌아갑니다. 빨리 계산하고 나서 말했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 때 제자 중에 안드레가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서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님은 그 것을 받아 드셨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을 50명씩 무리를 지어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남자만 5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여자까지 합하면 기만 명쯤 될 것입니다. 그때 그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요6: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여기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병이어를 들고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어도, 주어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5천명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습니다. 열 두 광주리였습니다. /할/
오병이어의 기적의 비결은 오직 감사 한 가지였습니다. 감사만 하셨는데도 축복이 따라 왔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능력입니다.
⑴감사만 했는데도 '원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할/ 감사하면 오늘도 '원대로'의 축복이 임합니다. /믿/
⑵감사만 했는데도 '먹고 남는 풍요'가 있었습니다. 감사의 전의 분위기와 감사후의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가난의 언어가 부요의 언어로 바뀌어졌습니다.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는 말이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로 바뀌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가진 오병이어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는 빈곤의 언어가 '저희가 배부른 후에'라는 풍요로 바뀌었습니다. 모자랄 것 같다는 말이 '남았나이다'라는 즐거운 비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축사입니다. 감사만 해도 풍요가 있습니다. /아멘!/
1620년 12월 26일 청교도 102 명이 미 대륙 플리머스 해변에 상륙하고 그들이 엎드려 이런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여러 가지로 감사 드립니다. 첫째로 180 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지만 시속 2마일로 117일간 무사히 항해하였음을 감사 드립니다. 둘째로 항해 중 두 명이 죽었지만 한 생명이 배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 드립니다. 셋째로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져 못 쓰게 되었지만 배가 파선하지 않은 것을 감사 드립니다.
넷째로 큰 파도로 여자들이 바다에 빠진 적이 두 번 있었지만 모두 무사하게 구출된 것을 감사 드립니다. 다섯째로 신대륙에 도착한 후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을 못 하다가 한 달만에 플리머스에 안착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니다. 여섯째로 3개월 동안 항해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음을 감사 드립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첫 감사기도였습니다.
⑶감사만 했는데도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벳세다 빈들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느라고 배고픔을 잊으시고, 사람들은 듣느라고 배고픔을 잊었습니다. 말씀하기를 마치고 듣는 것을 그치고 나니 배가 고팠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또 장소 적으로는 들판이었습니다. 시내라면 주문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밤이었습니다. 낮이라면 서둘러 조를 짜서 밥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나니 모든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감사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할/
▶덴마크 '안데르센'이 '썩은 사과'라는 동화를 썼습니다. 어느 시골에 노인 농부 내외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집의 재산이라고는 말 한 필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말을 다른 더 좋은 말로 바꾸어 오던가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오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말을 끌고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말을 끌고 나가서 썩은 사과하나를 달랑 들고 집에 들어갑니다. 그 모습을 옆집 부자가 보고 틀림없이 부부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노인에게 말하기를 '당신 부인에게 호되게 야단 맞고 부부싸움이 대판 벌어지겠군요!' 그러자 노인이 말합니다. '내 아내는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만 찾는답니다.' 노인은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말 한 마리가 썩은 사과 한 개로 바뀌었는데도 불평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고요?' '예. 정 궁금하시면 따라와 보십시오' 노인은 집에 들어가자 아내와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처음에는 말과 암소를 바꾸었지요!' '우유를 먹게 되었으니 감사하군요!' '그런데 다시 암소와 양을 바꾸었지요!' '더 잘 되었군요. 우리 집 앞에는 풀이 많지요. 그리고 양젖도 먹고, 양털 옷까지 입을 수 있게 되었군요. 감사해요' '그런데 암탉과 바꾸었지' '잘 하셨어요. 암탉이 알을 낳으면 알도 먹고, 병아리도 까면 우리는 양계장 주인이 되는군요' '그런데 암탉을 썩은 사과와 바꾸었어요!' '그러면 더 감사하여야 갰네요. 옆집에 파 한 개를 꾸러 갔더니 썩은 사과 한 개도 없데요. 이제 옆집에 썩은 사과 한 개를 꾸어 줄 수 있게 되었네요'
안데르센은 항상 감사하는 여자 이야기를 이렇게 담았습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여유가 있고 다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문제 해결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딤전4:4절에서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⑷감사만 했는데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장정만 오천명이 다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감사만 해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시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할/
④우리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⑴실망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어떤 분은 너무 실망을 잘합니다. 실패하면 금방 실망합니다. 그러나 실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실패를 잘 극복하면 우리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실패 때문에 우리가 겸손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실망하지 말고, 그 실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⑵불평보다는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불평은 어떤 환경도 지옥을 만듭니다. 반대로 감사는 어떤 환경도 천국을 만듭니다. 불평하는 말은 듣는 사람의 기쁨을 빼앗고, 그 영혼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 한 마디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영혼을 생동감 있게 만듭니다.
⑶달라는 기도보다 감사를 기도합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의 기도를 보면 감사보다는 간구가 많습니다. 항상 '하나님, 주세요'라고만 합니다. 초신 자 때에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잘 주십니다. 그러나 신앙 년조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간구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감사할 줄은 모르고 그저 떼만 쓰면서 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부모는 그것을 받아줍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감사하다는 말은 없고 항상 달라고 졸라댄다면 주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야단을 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항상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간구만 하는 성도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더'(more)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돈'(more money), '더 좋은 집'(more house) '더 좋은 차'(more car), '더 큰 행복'(more happy)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더, 더 달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⑤우리는 예수님의 감사기도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 중 대부분은 기도생활입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서 가장 성숙한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감사는 가장 성숙된 정신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말에도, 마음에도, 생각에도, 도무지 감사의 정신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고 기도에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전체에 응답해 달라는 애원만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심지어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⑴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11:38절을 보면 예수님이 초상집에 가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초상집은 나사로의 집입니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3남매가 조용하게 살았습니다. 아주 다복하게 생활하는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가며 자주 그 집에 들러 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3남매들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비통해 했습니다. 이미 무덤에 뭍인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뒤늦게 소식들 듣고 찾아오신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힌 무덤으로 가십니다. 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아버지여 내 말을 들어주심을 감사하나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기도입니다. 그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돌을 옮겨놓으면서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하고 말합니다. 그 말은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돌을 굴려 보았자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감사의 기도부터 하십니다. '내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 앞에서 그들 가족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죽음의 현장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응답되어 죽은 나사로가 살아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
⑵마지막 만찬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막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만찬에서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 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 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시며 나누어주십니다.
이 감사의 기도는 죽음 직전 전날 밤에 하신 감사의 기도입니다. 내일이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하시던 중 '이 떡을 받아 먹으라, 이 떡은 나의 살이니라, 또 이 포도주를 마시라, 이 포도주는 나의 피니라'하고 나누어주십니다.
얼마나 비장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기도의 묘미입니다. /할/ 신앙생활의 깊음은 감사의 삶에 있습니다. 감사도 그냥 일상적인 감사가 아니고 정말 극한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감사의 기도입니다.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놓고 감사하는 기도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다가 며칠만에 음식을 먹을 때의 감사의 차원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극한 상황에서 연출되는 것입니다.
▶어느 불구자가 팔다리를 모두 잃었습니다. 몸통만 남았습니다. 이 불구자가 붓글씨를 쓰는데 입으로 붓을 물고 글씨를 썼습니다. 한참 글씨를 쓰다가 벅차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입을 남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묘미입니다. 여기에 그 신앙의 깊이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이 어쩌고 하면서 못살겠다고 자살하고 그르지만 그런 불구의 몸을 가지고 살면서도 누구도 할 수 없는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만들어내는 기적입니다. /할/
예수님은 지금 상황이 전혀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이 만찬을 마치고 곧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가서 밤새워 철야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새벽이면 체포됩니다. 그리고 아침 9시면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순서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룟 유다가 와 있습니다. 천연스럽게 와서 주는 대로 받아먹습니다. 발을 씻겨주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내 발도 씻겨 달라고 발을 내 맡깁니다.
그러니 그 모습을 보는 예수님의 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은 떡을 들고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며 '먹고 마시라 이것은 나의 살이고 피라'고 하시며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이 어려움 중에서 드릴 수 있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아멘!/
⑶운명하시면서도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19:30절을 보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다 가고 십자가에서 6시간동안 신음하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십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죽을 때 모습이 가지각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기는 말 한마디도 가지각색입니다. 호스피스에 종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지막 죽어갈 때 어떤 사람은 '내가 왜 죽어, 다 두고 갈 수 없어' 그러면서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많은 돈을 두고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대로 죽으면 안 돼 더 살아야 돼'하고 중얼거리다 죽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죽을 준비가 안된 사람입니다. 죽으면 심판을 받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준비도 없이 살다 갑자기 죽게 되니까 그렇게 부르짖다가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죽음을 준비하고 산다는 것이 축복이고 감사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 받으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복음서마다 예수께서 마지막 운명하시는 모습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마태, 마가복음은 마지막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더라'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시며 운명했습니다. 그런데 요19:30절에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을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주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께서 잘 감당하고 마치도록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들의 기도내용과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늘 나 자신을 위한 기도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도 내내 나를 강조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축복하시고, 나를 알아주시고, 나를 평안하게 해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고 성공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때로 원망의 기도도 합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 시험은 자기가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힘이 없고 응답이 없고 기도하면서도 내 자신이 감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기도는 능력이 따르고 응답이 따르고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믿/
⑥오늘 시50편은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는 '감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이 선언은 당신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곤혹스런 하나님의 자기 설명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았는가? 바로 '제사', 곧 저들이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저들의 제사는 외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왔고 또 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드리는 번제와 희생제가 항상 제단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인하여는 책망할 것이 없으나 다른 면에서는 책망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감사의 상실'입니다. 그들이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서원을 잊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문제였습니다.
이 시50편의 키워드는 '참 예배'입니다. '무엇이 참된 예배인가?'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희생제를 드렸습니다. 그 제물에 대해서는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서원 했던 지난날의 애틋한 신앙이 점점 형식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제사, 중심이 쏠려있지 않은 예배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시는 겁니다.
우리가 때로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 이런 경험들을 할 것입니다. 받아서 기분 좋은 선물이 있고, 받아서 기분 나쁜 선물이 있습니다. 순수한 선물 속에는 감사가 깃들어 있지만 순수하지 못한 선물 독 뇌물 속에는 뭔가 계산된 의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반대급부가 들어있습니다.
주고받음에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의 크기나 액수가 아니라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담긴 것이면 얼마 안 나가는 물건에도 기분이 좋아지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은 것이면 비싼 것이라 해도 기분이 별로 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향해 그런 마음을 느끼는 겁니다. 점점 저들의 예배와 섬김이 형식화되고 건성화 되어가고 있음을 아신 겁니다. 그래서 저들을 향해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고 간절함으로 드렸던 네 서원을 갚으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14-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할/
▶22절 감사를 잃어버린 자의 저주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절 감사하는 자의 축복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할/
⑦감사가 축복의 통로입니다.
⑴감사는 '축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시100;4절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요10;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할/
⑵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싹틉니까? 원망과 불평,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⑶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는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지그 지글러' 박사는 '나는 감사할 줄 모르면서 행복한 사람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⑷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스펄전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의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⑸감사의 조건은 '찾아 만드는 사람의 것'입니다. 감사는 감사할 조건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뜻도 그런 것입니다.
⑹감사는 또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는 감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엔 약속이 있고, 감사는 또 감사를 낳습니다. 갈6: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감사를 심는 자는 분명히 감사를 거두게 하십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영적인 법칙입니다.
⑺감사는 천국은행에 투자한 것이고, 우리의 창고를 채우는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각각 자기 소유의 창고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광이란 창고가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이 광에 곡식으로 꽉 채웠습니다. 부자 집에는 큰 창고가 있었습니다. 몇 만석씩 농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창고에 가득히 채워 놓고 만족해하였습니다.
잠3: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창고는 비어 있으면 안 됩니다. 만약에 우리의 창고를 비어 있다면 그 집은 망한 집입니다. 우리 믿음의 수확을 천국 창고에 채우는 감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⑻감사는 성령 충만한 자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겔37장에 네 종류의 바다가 나옵니다. 첫째는 발목에까지 차는 바다요 둘째는 무릎까지 차는 바다요 셋째는 허리까지 차는 바다입니다. 넷째는 너무나 깊어서 헤엄쳐야만 건널 수 있는 바다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가는 성도는 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깊은 은혜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마음의 바다가 깊어지고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할/
⑼감사는 주님과 동행하는 비결입니다. 그 분과 동행하면 만사는 형통입니다.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피아니스트가 독주회를 준비하고 지방신문에 광고를 냈는데,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인 '리스트'의 제자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리스트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 리스트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거짓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일생은 끝장나고 맙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제 별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빕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부족한 피아니스트인 주제에 감히 당신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리스트가 조용히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요.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 연주를 시킵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중간중간 멈추게 하고 고쳐줍니다.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가 그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당신 연주가 끝나면 제가 한 곡 연주를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십시오' 그 연주회는 엄청난 기쁨과 영광의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시골 피아니스트는 리스트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도움을 힘입어 꽤 괜찮은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만 하면 서투른 인생의 연주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힘입고 도움을 받으면 멋진 연주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감사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⑴말로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⑵몸으로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나의 손과 발과 입과 눈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⑶물질로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보물 있는 곳에 마음 있으므로 물질로 주님을 섬깁니다. ⑷마음으로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야 몸도 물질도 관심도 가게 됩니다. 이런 감사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끝으로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 심장병동에 지은이의 이름도 없는 무명의 시(詩)가 걸려 있습니다.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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