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행함의 은사 (5)
고전 12:9-11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듯대로 각 사람에게 나
누어 주시느니라.
신앙세계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신비함 속에 힘의 원천이 들어있습니다. 그 힘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입니다. 그 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로 주어집니다. 본문은 그 신비한 능력과 믿음의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은사들은 교회를 건실하게 받들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병 고침 은사
본문은 병을 고치는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9, 28). 이것을 신유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이 병 고침은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병이 고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신유의 은사는 육신과 정신의 질병을 치료해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사도바울도 선지자들도 많은 전도자들도 이 능력으로 육신의 병을 고쳤습니다.
질병을 고치는 단계가 몇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규칙적인 생활입니다. 발병도 알고 보면 규칙적인 생활이 없어서 발병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무질서와 무절제 그리고 폭식과 폭주 등은 모두 병을 유발하게 하는 원인들입니다. 무질서에서 유발된 질병은 대부분 질서를 찾으면 자연 치료가 가능합니다. 질서의 삶은 기초적인 치유의 삶을 이룹니다. 또 한 가지는 의학적인 치료입니다. 의학적으로 치료받는 것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방법이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간혹 신앙인들이 믿음으로 질병을 고친다고 해서 의학을 무시하고 믿음으로 고치려고 약도 치료도 거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믿음을 그렇게 자꾸 시험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의사를 통해서 질병을 치료하시고 고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질병이 신적인 권위로 치유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와 있는 신유의 능력입니다. 신유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경우는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신유로 고침 받은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유의 능력이 은사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신유의 능력이 주어지면 참 편리할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입원한 성도들을 위해서 병원에 갈 때마다 갈증을 느끼고 무력함을 느끼고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냥 돌아올 때 무능함을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병원에 가서 기도할 때 그때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병자가 고쳐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하는 목회자 자신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전도되어 좋고 환자도 좋고 모두 다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느 개척교회 목사가 40일간 금식하면서 병을 고치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목회자들이 마음으로는 간절하지만 그런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그 보다 먼저 나에게 사랑하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영웅심이 있어서 은사를 주셔도 대부분 영웅심을 위해서 사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사를 주시지도 않고 고침도 주시지 않습니다. 은사에는 이 신유의 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좋은 신유의 은혜는 발병했을 때 고침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건강한 삶을 유지하도록 건강의 은혜를 힘입는 것이 더 좋은 은혜입니다. 진정한 신유의 삶은 평소 건강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능력 행함
은사에는 능력 행함의 은사도(10) 있습니다. 이것을 기적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때로 인간의 상식을 넘는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영적 능력을 은사로 주시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물위로 걸으셨습니다. 무서운 파도를 향하여 호령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독사에 물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원주민은 바울을 신으로 섬기려 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선교사들이 때로 원주민 선교를 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원주민 추장 아들의 병을 기도하여 고쳤습니다. 그때 부족 전체가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선교초기에 그런 능력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능력 행함의 은사는 전도 초기에 많이 나타납니다. 아직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곳에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 이 같은 능력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기적의 모습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일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릅니다. 그런 능력이 나를 통해서 나타난다면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그래서 때로 믿음이라는 구실 하에 시험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동네에서 예수를 믿는 분에게 동네 사람들이 전도할 때마다 “뭔가를 자꾸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분이 “믿는 자에게는 독약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농약을 마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입니다. 농약을 마시면 죽습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때로 동네에서 사람들이 보여 달라 그러면 믿겠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사람들이 전도되어서 좋고 누구도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여 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농약을 마시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순진하게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그 말씀이 주는 메시지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니까 무모하게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시대에 그런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김익두는 시장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발견합니다. 그때 기도로 저를 고쳐볼까 생각하고 혹시 못 고치면 사람들이 비웃을까 생각되어 그를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안수했는데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음에 그것도 믿음이냐 하는 가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장날 보란 듯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뜨겁게 기도하여 그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김익두는 굉장치도 않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김익두의 인생은 요란했습니다. 그의 전반인생도 깡패로 요란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깡패도 그런 깡패가 없었습니다. 장날이면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반반한 여인들이 오면 끄댕이를 붙잡고 키스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김익두에게 끄댕이 안 잡힌 여인은 여자도 아니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변화를 받은 후의 인생도 요란했습니다. 성령이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였던지 그에게서 신유의 기적들이 일어났고 가는 곳 마다 전도의 폭발이 일어나는 요란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성령은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게 하기 위해서 때로 능력의 은사를 주십니다.
영 분별
본문에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영적인 부분 특히 예언이나 계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 영적인 문제로 인해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그래서 영을 분별하는 은사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 영 분별의 은사는 지금 주어진 영적인 역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에게서 나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게 하는 능력입니다. 때로 사탄의 영을 분간 못해서 유혹에 깊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몇 군데 있습니다. 역대하 18장을 보면 아합왕 시대에 우상 숭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합왕을 심판하기로 작정 하십니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때 아합왕은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에게 나가서 싸우랴 말랴 하고 묻습니다. 그때 시드기야는 “나가 싸우소서, 반드시 이기리라”고 계시하셨다고 말합니다. 아합왕은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미가야는 “이번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죽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두 선지자의 예언 중 누구의 예언을 믿어야 합니까. 계시는 이렇게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가야는 사탄의 영이 저 거짓 선지자의 입에 들어가 지금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리면서 “언제 하나님의 영이 너에게 말씀하시더냐”고 따졌습니다. 그때 미가야가 말하기를 “네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할 때 그 음성을 들으리라”고 대답합니다.
왕상 13장 나타난 사례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 유다의 한 젊은 선지자에게 “네가 가서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죄를 외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 단 그가 주는 물도 선물도 향응도 받지 말고 돌아오라, 만일 네가 먹고 마시면 죽을 줄 알라”고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 젊은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로 가서 여로보암 왕에게 주신 계시대로 준엄하게 죄와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이 저 놈 잡으라고 소리칠 때 그 손이 그만 굳어 버렸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잘못했으니 기도해서 회복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서 고쳐줍니다. 그때 여로보암이 이 젊은 선지자에게 선물을 주고 향응을 베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향응이나 선물이나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겠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하고 돌아옵니다. 아주 당당하고 자신 있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때 북 이스라엘의 한 늙은 선지자가 그 소식을 듣고 생각해 보니 참 창피했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하지 못하니까 남 유다 선지자가 이곳까지 와서 죽음을 무릅쓰고 우상숭배를 당당하게 지적하고 돌아갔다니 자기도 선지자인데 얼마나 창피한 노릇입니까. 이 늙은 선지자가 창피했으면 더 기도하고 그 시대를 향해서 준엄하게 책망하고 죄를 지적해야 하는데 그 젊은 선지자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재빨리 말을 타고 그 선지자가 돌아갔다는 길로 쫒아가서 그 선지자를 만나서 내 집으로 가자고 합니다. “내 집으로 가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 하자“. 그때 이 젊은 선지자가 “나는 북 이스라엘에서 향응은 물론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겠다, 하나님의 명령이다”하고 자신 있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 늙은 선지자가 말합니다. “나도 선지자요, 간밤에 나에게 당신을 접대하라 계시하셨소.” 이 말을 듣고 이 젊은 선지자는 아무 의심 없이 그 집으로 따라가서 먹고 마시고 향응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참 먹고 마실 때 이 늙은 선지자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소, 향응도 받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했는데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소.”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난 이 젊은 선지자는 짐을 챙겨 서둘러 돌아오다 산속에서 사자를 만나 찢겨져 죽습니다.
영 분별이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나도 선지자요” 이 말에 그만 의심 없이 무장을 해제하고 말았습니다. “간밤에 나에게 당신을 대접하라는 계시가 있었소” 이 말에 의심 없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니까 “며칠 몇 시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니까 모두 집 팔고 직장 그만두고 쫒아가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단은 성경에 대해서 더 잘 알고 더 열심입니다. 병을 좀 고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사탄도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 가서 많은 기적을 행할 때 애굽의 박사들도 그 기적들을 다 행했습니다. 문제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영 분별하는 은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은사
본문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믿음의 은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지극히 단순하고 얇고 가벼운 그런 믿음입니다. 믿음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별 자자란 일들에 일일이 반응하고 걱정하고 울고 웃는 그런 가벼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층 성숙한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의지적 신앙고백이 포함된 믿음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제자들도 다 도망간 그 때에도 이 여인들은 십자가까지 무덤까지 따라가고 부활의 아침 일찍 무덤까지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그 위험한 시국에 자신들의 신분을 노출하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인수해 무덤에 장사를 주도했습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별소리를 다 하다가도 위급한 상황이 되면 거의 다 회피합니다. 숨어 버립니다. 그런데 서슬이 퍼런 때 자칫 예수의 추종자로 몰리면 거세당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감수하고 자신을 보란 듯이 노출할 수 있는 그 용기, 이 용기가 믿음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그 외에 더 특별한 믿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 믿음에 의지적인 신앙고백이 내포된 그런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내게 주어진 직분만큼의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용기를, 행동을, 손해도 감수하는 길을 걸어가게 작용합니다.
오늘은 이 의지적 믿음이 너무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행동이 요구될 때 모두 낙오하고 후퇴하고 손해 안 보려고 수단을 쓰기도 합니다. 어떤 집사는 교회를 건축한다고 하니까 헌금할 것이 걱정되어 슬그머니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다른 교회에 가 보니까 그 교회도 일 년 후에 교회를 건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새로 지은 교회로 갔습니다. 그 교회는 교회를 짓느라고 빚진 것 갚기 위해 헌금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가족끼리 예배드린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믿음입니까. 믿음은 평상시에는 평안을 주셔서 감사하고 아픔이 주어졌을 때는 내게 아픔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임을 알고 지긋이 기도하며 내가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는 그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려운 것 이것저것 다 피하고 무슨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까. 그 믿음에 신앙고백이 들어있고 의지적 신앙요소가 들어있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고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갈 때 찬미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그 상황은 찬미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내일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참혹할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내일 져야할 십자가를 피해 달라고 피땀 흘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회피의 기도가 아니고 잘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죽는 시간을 자신이 스스로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제물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주어졌으면 소중히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몫이고 사명이고 할 일이고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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