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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알기 / 박영선 / 구원의 완성 제4강

by 【고동엽】 2021. 11. 30.

4강 하나님 알기

 

로마서 116절입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17)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난 시간에는 복음이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하는 말씀으로 우리가 구원에 관한 이해를 조금 성경적으로 넓혔습니다. 복음에는 또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 설명할 문제는 아닙니다만 믿음이란 문제는 굉장히 의미가 어렵습니다. 구원에서의 믿음은 은혜요, 율법이 아니요, 대가가 아닌. 원인 없이 결과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믿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우리가 구원을 얻은 이후에 신자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처음 구원을 얻을때의 믿음과 동일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었고, 그래서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됩니다. 여기 로마서 1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과가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알리셔서 생기는 결과로 이해를 합니다. 믿음을 처음 설명할 때 보통 이런식으로 설명하지요. 믿음은 전제되는 것이다. 생각해봐라. 여러분 이 건물 올라올 때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올라오고. 의자에 앉을 때 이 의자가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앉는다. 라는 식의 믿음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 있을 겁니다. 전철을 탈 때 이 전철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고 믿고 탄다. 믿음은 이렇게 전제되는 것이라, 이렇게 믿음을 억지로라도 설명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그것은 확률과 통계입니다.

 

지금 여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이 문제에서 말하자면 이 복음을 설명하는 겁니다. 믿음을 만들어내는, 항복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난다는 거죠. 앞에서 구원이라는 것이 거짓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랑이라는 디모데전서 표현 식으로 구원이 채워지고 나아가고 믿음의 완성이 이뤄지고. 라고 설명할 수 있는 완성의 가장 중요한 몫. 믿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위하여 성경은 복음에 이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죠. 로마서 3장에 가시면 여기에 정의되었던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일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321.

 

(로마서 321~26)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구원이라는 문제를 다룰 때 복음을 다룰 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 복음, 능력인 복음, 그의 의가 나타난 복음 속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만 이 복음을 만드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도 여기다가 담아놨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옳고 그른 것만 따지시는 분이 아니고. 그른 자를 옳게 만드는 것을 기뻐하는 자라. 하는 것이 복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이해를 위해서, 성경에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하시는가 하는 부분을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43절입니다.

 

(마태복음 543~48)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기독교의 특징을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기독교의 특징을 논할 때 제 1특징을 사랑으로 듭니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고 사랑이 본체인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 사랑이 어느 지경의 사랑이냐 할 때 원수를 사랑하라 그랬다고 저들도 알고 있는 그 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했을까요, 하는 것이죠. 너의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왜 이렇게 말씀하시느냐는 거죠. 가장 고급한 수준이니까.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도덕적 가치가 아니고 이 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느니.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닮으래는거죠. 모든 아버지의 소원 아닌가요? 아닐 수도 있겠네요. (웃음)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복이죠. 그냥 이 정도해도 좋다가 아니라 사람만 되라가 아니라 하나님 같으래는 겁니다.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만 영광의 정도가 그렇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 비추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리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아량과 관용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한국 사회 전체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경쟁적입니다. 우리 나라는 후진국이죠. 조금 경제적으로는 살만하게 됬습니다만 다른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후진국입니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온 것은 그동안 근대 사회에서 겪은 불행들 일제하에 식민지로 지낸 것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가진 아픔들,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배고픔들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약소국으로 강대국의 이해 관계의 피해를 보는데서도 벗어나기 위해 우린 힘을 다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뛰었습니다. 앞서가는 싸움을 했고 앞서가는 자가 승자고 훌륭한 자고 가치 있는 자고. 그렇지 못한 자는 쓸모 없는 자고. 밥도 먹어서는 안되는 자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들은 뒤로 쳐졌죠.

 

이것은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문화가 되었기 때문에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사는 이상 교회에 왔다 해서 예수를 믿는다 해서 하루아침에 싹 고쳐지지 않더라구요. 우린 신앙생활도 경쟁적이고 열심 있고 능력 있고가 우선합니다. 목사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능력 있는 말씀, 능력 있는 목회, 성공하고 유명한 교회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우리가 즐겨합니다. 사회 전체 분위기죠. 자기 몫을 하고 자기 분수를 지키고 충성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용어입니다. 충성. 성공이니 능력이니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쓰지 않는 표현인데. 우린 즐겨 쓰고 있습니다. 이런 열심들, 이런 승리,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에게 제일 없는 게 뭐냐면 관용과 아량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면 용서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만 용서하지, 용서하는 자세와 인격을 갖추는 싸움을 우리는 거의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자랄 때도 그랬습니다. 여러분 자녀에게나 이런 가르침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 컨닝하는데 혼자만 컨닝 안하는 것을 ??(11:09)했다. 바보 새끼야. 눈까리 두개씩이나 있는데 그거 하나 못 넘겨다봐. 우리가 자연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이기고 봐야 되는 것이죠. 너 잘했다. 정직했으니까 됐다. 그러나 열심히는 해야 된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잘 못 가르칩니다. 기도도, 믿지 않는 사람들 다 나빠하고 믿는 우리 애들만 붙게 해달라죠. 그건 여기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한다구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주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다 주십니다. 악당들에겐 비가 레이저 같이 떨어져서 뇌를 뚫고 나오게 그렇게 안 하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기꾼이나 비열한 사람들이 이익을 취하고 성공하고 멋있다는 사실입니다. 악당들이 멋있고 머리가 좋다는 건 우리로서는 사실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뜻밖에 목사들은 머리도 안 좋은 게 대부분이고, 지능을 얘기하는 겁니다. 빠진 걸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웃음) 이 아량과 관용의 하나님이라는 건 우리로서는 상당히 뜻밖에 낯섭니다. 성경은 이렇게 얘기하는데도 우리는 하나님은 한 손에 백합을, 한 손에 칼을 들고 계시는 분으로 생각했다구요. 순결을 요구하고, 순결치 않으면 죽음을 요구하는 심판의 하나님으로 생각했다구요. 시편 103편으로 가시면, 이 문제가 성경에서 얼마나 일찍부터 강조되어있는 문제인가 하는 증거가 나옵니다.

 

(시편 1031~8)

103:1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103:2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6 야훼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103:7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103:8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8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함이 풍성한 이 하나님은 시편 103편 다윗의 고백일뿐만 아니라, 그는 이 고백을 7절에서 보았듯이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신 그 하나님 은혜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함이 풍성한 하나님으로 당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찾아가 봅시다.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출애굽기 34. 시대적 배경을 잠시 설명하죠.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함을 받아 이제 애굽을 나와서 광야 길에 들어서서 신의 산에 도착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율법을 주시죠. 율법을 받아오는 40일 동안 산 밑에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이 지치고 의심이 생겨 범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내려보내어 저들을 꾸짖으시고 다시 모세를 불러 돌판을 다시 가져오게 하여 다시 써주시는 그 때입니다.

 

(출애굽기 341~6)

34:1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34:2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4: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34: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야훼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34:5 야훼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야훼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34:6 야훼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야훼라 야훼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라고 나타나시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요? 최악의 상황이요. 최악의 상황.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 할 말이 없는, 벌 받아 마땅하고 꾸중 들어 마땅한 그때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함이 풍성한 하나님으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이게 시편 103편입니다. 시편 103편을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만큼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냐. 하나님은 얼마만큼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함이 풍성하시느냐. 1절부터 제가 다시 봅니다.

 

(시편 1031~8)

 

이것만으로 이미 아멘이죠. 더 할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도 우리가 못 알아들으니까 계속 확인, 반복해나갑니다.

 

(시편 1036~7)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성립됐고 복을 받았는지 역사가 증언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아멘입니다. 계속입니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여러분 애들 꾸중해보셨죠. 때려도 보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 빨리 와서 밥 먹어. 안 먹어. 안 먹어 이 시끼야. 부모의 마음입니다. 죽으라고 패는 적은 없습니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아멘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는 그거, 하나님은 잊으셨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지하지 아니하시며. 아멘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밑줄 하나 그어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격이 다르십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이것이 아까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에 등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뭐라고 되어 있죠? 마태복음 5장으로 가보십시오.

 

(마태복음 546)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세리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의 이 당시 예수님 살아생전 로마의 식민지였고 세리들은 로마를 위하여 세금을 거둬가는 관리였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로마 직원으로 산 자들이 있어서 세리가 그토록 욕을 먹는 이유는 세금을 거둬가서가 아니라 남의 나라 것을 받아가는 걸 그토록 혹독하게 굴곤 해서 욕을 먹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나라도 팔아먹는 자라는 악명을 얻은 거죠. 그들도 어떻게 한다구요?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사랑한다구요. 우리보고는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구요. 이리 가는 싸움입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방인은 뭐에요. 하나님 없는 자. 하나님이 없다는 건 뭐죠? 본 받을 아버지가 없는 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구원은 뭐냐, 이 하나님을 알고 이 하나님을 믿는 싸움인데. 그걸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셨느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의를 나타내어, 하나님의 오롯이, 하나님의 오롯이는 지금 우리 시편 103편에서 보고 마태복음 5장에서 보고 있는 겁니다. 어떤 하나님.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자와 불의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누구와 달라야 돼요? 당연히 세리와 다르고 이방인과 달라야 합니다. 왜요? 우리는 인도하시고 복 주시고 찾아오시고 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가 되는 겁니다. 신앙은 이리 가는 싸움입니다. 예수를 믿었다. 나 구원 얻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아요. 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채우는 싸움이 계속 남아 있고 그것이 성화며 교회로움입니다. 이 문제는 지금 우리 로마서 1장에 등장했던 설명 때문에 시작되었죠. 로마서 1장에서 16.

 

(로마서 116)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이 일. 우리를 하나님을 믿게 하는 이 믿음을 주신 이. 하나님에 대한 항복으로만 시작이 되는데 그 하나님이 이 하나님,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개입하셔서 우리는 항복을 하게 되고 그 항복과 감격이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비로소 믿음이 생기죠. 그런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났다구요. 복음에 나타났다는 거죠. 로마서 3장을 읽었습니다. 로마서 3장에 등장하는 이 의는 24절부터.

 

(로마서 324~26)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 표현을 잘 보세요. 이 의롭다 함,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자에게 허락되는 구원. 칭의. 그 의롭다 함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허락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냈다 이겁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은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옳으심, 의를 우리 말로 표현하면 옳으심이라 그래요. 옳으심은 율법의 옳으심과 다르다는 게 시작이었잖아요. 21절에 있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이라는 의가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율법과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다우심, 입니다. 복음에는 율법. 맞다 틀리다의 기준을 훨씬 상회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이 드러난 의로움이 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해내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나타난 것이다. 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구원에는 뭐가 드장해요. 하나님이 누구시냐가 등장을 하죠. 그리고 이것이 우리 모든 믿음의 시작과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부터 믿음이 자라나게 되요. 우리 안에는 믿음이라는 것의 근거와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찾아오실 때요, 모든 구원 없는 자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능력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에 믿음을 비로소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목적하며 소원하게 됩니다. 로마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사실상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인격적 관계로써 우리에게 알리시고 찾아오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 구원이라 이런 얘기입니다. 아까 마태복음 5장에서 본 많은 얘기들의 끝, 즉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로 구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자꾸 어디로 가죠? 쓸모 있으려고 그럽니다. 쓸모 있으려고. 요한복음 17장에 가보십시오. 영생에 대한 성경의 정의를 보시죠.

 

(요한복음 173)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가장 깊은 관계를 말합니다. 부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말합니다. 지식과 정보를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런 신분과 그런 내용으로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과 성경이 설명하는 내용 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데부터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 것이냐를 우리가 정합니다. 주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목사 아들인데 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가야지. 대학도 못 들어가면, 하나님 영광에 방해가 된다 이거예요. 하나님은 그러시잖아요. 나는 괜찮다. (웃음) 너도 참아라. 그러시지 않던가요? 우리 애는 삼수해서 들어갔어요. 우리 집의 내력인데 저도 삼수했고 아들도 삼수했습니다. , 손해보지 않습니다. 인생의 쓴맛도 보고 더 많이 깊어지고 하나님의 편을 들면 잘못되는 일로도 복을 받고, 하나님 편을 안 들면 잘되는 일로도 벌을 받고. 그게 인생인 줄로 압니다.

 

이런 문제들을 우리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낳느냐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요 하나님을 알아가고 닮는 문제라는 것을 놓치면 쓸모 있음과 열심 있음이라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꾸 확인하려고 합니다. 쓸모 없거나 열심이 식으면 하나님도 자신을 외면하시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자꾸 갖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된 것이 구원이요, 그 관계는 하나님을 닮는 자리의 완성까지로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 라는 이해를 성경적으로 가져야 우리의 실패를 관계의 실패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의 내용을 채워가는 것으로 이해를 해서 실패마저도 다시 밑거름으로 삼고 도약대로 삼는 그런 극복이 가능한데. 쓸모있음과 열심으로 삼는 그런 열심이 식고. 쓸모가 없어졌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불안해하고.

 

그러면 구원 자체를 본인이 의심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로마서 8장에 가시면 이런 문제들을 성경은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12절부터 보시죠.

 

(로마서 812~17)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그의 자식이다 그거에요. 왜 자식이라는 말을 쓰느냐면 신분의 관계가 구원에서 제일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취소되지 않는다 그래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하필 양자라는 용어를 쓴 것은 당시 로마가 자기 자식은 버릴 수 있어도 양자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양자가 법적 권리가 더 강했습니다. 지금 미국도 그렇습니다. 양자로 입양하면 친자에게는 유산을 안 줘도 되지만 양자에게는 줘야 합니다. 법적 신분과 혜택을 강조하기 위하여 양자의 영을 받았다. 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신앙을 자랑이냐 감사냐라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 점검하는 기준을 삼아야 된다 그랬죠. 자랑하는 것은 자기 기준을 가지는 것이요,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만 기준을 두는 정상적인 신앙이라. 하는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 이 부분, 구원과 연관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확인하는 데 중요한 것은 무서움이 있느냐 없느냐는 겁니다. 15.

 

(로마서 815)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두려우냐 두렵지 않느냐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이 문제를 확인합시다. 요한14장을 봅시다.

 

(요한1418)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어떤 교회 목사님이셨는데 신앙 생활 잘하던 청년 여자가 유학을 가고 대학을 졸업하고 거기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신앙생활하던 교회 목사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만저만해서 여기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여 편지로 대신합니다. 목사님이 축하 편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예전 얘기입니다. 전화기도 별로 없던 시절이라 국제 전보를 쳤습니다. 글자당 얼마잖아요. 짧게. , , , ,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이겁니다. 이게 우체국에서 실수를 해가지고 일이 빠졌습니다. , , , . 결혼식을 마치고 축전이 와 있으니까 부부가 얼른 목사님 축전을 찾아봤습니다. 요한복음 418절을 찾았더니 여인아,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내 남편이 아니니라. 이게 나왔다 그럽니다. 누구에요? 이렇게 묻진 마시죠.

 

중요한 구절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 는 건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의 실력, 자격으로 확보하려고 그러지 마라.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무엇으로 확보하고 계시느냐면 사랑으로 확보하고 계시다 이겁니다. 뭘로 아느냐, 십자가를 봐라 이거죠. 로마서 58절의 증거가 뭐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게 왜 필요하죠?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라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때 구원의 필요성을 모를 때 우리에게 아무런 자격과 조건이 없을 때 하나님이 이 구원을 이미 예수안에서 이루셨으며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쓸모나 가치가 있느냐로는 관계를 확인하면 안 됩니다. 우리 신앙의 마땅한 도리로써 주께 얼마나 주의 요구하심과 구원의 목표에 순종하고 사느냐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인생을 헌신하는 차원에서 점검할 수는 있습니다만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로 관계를 확보하려고 그러시지는 말라 이거죠.

 

관계를 확인하는 데 공로를 동원하면 다시 자랑이 등장합니다. 쓸데없는 싸움으로 갑니다. 커나가지 못하죠. 우리 장차 더 확인해보겠습니다만 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이 구원의 완성들은 보면, 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되는 일들과 함께 내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닮으라 한 인격과 성품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어떤 권면을 하던, 우리 인생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봉사의 일로 부름을 받던 그 일들은 그 일 자체보다 일을 통하여 봉사를 하는 자나 봉사를 받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이 복된 구원이 진전되고 성취되고 확인되는 결과를 낳도록 의도되어있지 그것을 행하는 자나 받는 자가 자신을 자랑하는 쓸모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일들은 선교에는 의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한국 교회에 빨리 이해되어야, 일은 한국 교회가 많이 하는데 교회 안의 성도들끼리 신자된 인격적 고급한 관계가 허술한. 이 병을 치유할 것입니다.

 

뜻밖에 한국 교회는 모두가 사랑이 없다는 말을 하나 같이 합니다. 열광적이며 능력 있으며 자랑할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끼리 깊은 교제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위로를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이 갖는 구원이 목표하는 인간의 참된 모습으로의 이해, 그것을 기다려주고 스스로 고치고 용서하는 이 일들에 대하여 내적인 완성에 대하여 우리가 사실은 놓치고 있기 때문에 이 일들이 생기는 줄로 압니다.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회자들께서도 밖으로 확인받는 일하는 교회 이상으로 교인들이 서로 교제하는 속에서 만들어져나가는 신앙 인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 교회의 크기나 재정상의 크기와 상관 없이 목회의 재미를 목회하시는 당사자나 교인들이 함께 누리실 줄로 믿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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