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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사도신경.주기도.십계명

사도신경 심층강좌 5강

by 【고동엽】 2021. 11. 27.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사도신경 고백 중 가장 약한 부분은 성령에 대한 고백이다. 로흐만이 지적한대로 서방교회의 역사는 성령 망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성령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고 형식적이었다. 성령의 인격성, 성령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성령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성령과 교회(신자), 성령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등 모든 면에서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은 한층 더 심화된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성령은 성자의 요청에 의거하여 성부 아버지로부터 출원하신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해설하며 심화된 이해를 가져다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효과(죄사함 갱신)를 개별 신자들에게 적용시킨다. 성령에 대한 지식은 삼위일체장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4-16장, 누가복음 1-4장(누가복음은 성령의 복음이라고 할만큼 성령주도적인 기술이 현저), 사도행전 전체(특히 2:31-36), 에베소서 전체(특히 1장, 3-4장, 5-6장), 로마서 8장(롬 7:6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 고린도전서 2-3장, 12-14장, 갈라디아서 5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전체(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사자를 보내는 성령: 1:7 성령의 감동; 2:7, 11, 17, 29; 3:6, 13 등 ) 등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구약성경 중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말하는 구절들로는 에스겔 36:35-26, 예레미야 31:31-34, 요엘 2:28-32, 시편 51, 104편 등이 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영 관련 성경구절들을 갖고도 구약성경의 성령론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사도신경에서 성령론은 성자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고백과 교회론에 대한 고백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성령론은 성자론과 교회론의 산파역할을 하는 신앙고백적 교리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인수인계(요한복음 16:1-11)

요한복음 14-16장은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을 담고 있다. 이 세 장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중에 동방교회의 전통으로 불리게 되는 요한복음의 삼위일체론적 전통은 성령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사도 요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으로 이어지는 요한복음 중심의 기독교는 4세기의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닛싸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 바실)의 삼위일체론으로 이어진다. 1948년 이후 에딘버러 에큐메니칼 회의 동서양 교회가 화해하고 서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동방교회의 성령론이 몰트만 등에 의하여 서방교회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몰트만의 경륜적 삼위일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문체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일단 요한복음과 에베소서 등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론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을 천착해야 한다.

 

1. 성부 하나님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이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하여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을 파송하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시대에 예언자를 파송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때에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파송하셨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본질은 자기연소, 자기비움, 자기희생적 사랑이다(요일 4:8; 요 3:16, 5:18).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희생을 통하여 새로워지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신적 권능과 권위를 연소시키고 소모시킴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랑하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끊임없이 당신을 주신다. 빛나는 태양이 하루 종일 스스로를 태우며 온 땅에 빛과 열(에너지)을 창조하듯이 하나님께서도 홀로 스스로를 태우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연소시킨 후에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시 19:1-4). 이 세계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창조열정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창조하신 후 이 세계를 유지하시기 위하여 말씀으로 붙들고 계신다(히 1:1-4). 창조질서가 무질서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계를 붙들고 계신다.

 

전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마치 물 분자 구성에 비유할 수도 있다. 물은 H20로 구성되어 있다. 산소 원자 하나에 수소 원자 둘이 합하여 물이 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명령하시고 아들 하나님은 이 명령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그 명령을 집행하신다. 아들 하나님은 또한 기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움직이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명령을 통하여 일하시고 아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을 북돋우시고 아들이 이루신 명령의 결과를 인간에게 적용시킨다. 아버지의 명령을 아들이 이해하도록 돕는 하나님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명의로 활동하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그 부활을 가지고 일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과 수직적 위계질서의 위에 계신 분이라면 또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파송하신다는 점에서 성령 하나님도 성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나님이다. 이에 비하여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항렬이 비슷해 보인다. 마치 형제간처럼 여겨진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에 싸여 있다. 신학적 설명 시도 자체가 무모할 정도로 신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밝히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비밀에 대해서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열어주시는 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존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서론 부분 “계시”의존적 하나님 인식). 어떤 교부들(터툴리안, 오거스틴

)의 설명도, 어떤 위대한 신학자들의 설명도(몰트만, 칼 바르트, 갑바도기아의 세 동방 교부들) 비의하고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을, 성령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고전 2장).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사정을 통달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있다.

 

2. 성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표현하실 때 대리자를 통하여 표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 존엄한 위엄을 표현하는 대리자들은 천지만물, 천사들, 이스라엘 백성들, 왕과 제사장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집행하고 실행하는 대리자들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하나님의 대리자들의 완성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의 화신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군가의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펼치고 당신의 나라를 확장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상쇄시키는 위대한 순종과 신앙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분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과 거의 같은 말은 태초에 한 위대한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이 있었다는 말이다.

 

3. 성령 하나님: 성령님은 예수님의 일을 이 땅에서 계승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시고 격려하시는 원(元) 보혜사(믿음의 격려자와 고취자)라면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을 때 이 세상에 오시도록 약속된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신자 안에서, 교회 안에서 계승하신다. 성령님의 가장 핵심사역은 예수님을 둘러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가르치는 일이다.

죄란 무엇인가, 의(義)란 무엇이며, 그리고 무엇이 심판당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시는 진리의 영이다(요 16:8-11). 유대인들에 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 죽임을 당했다고 믿어졌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당하게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이 모든 유대인들의 억지주장과 거짓된 확신을 완전히 뒤엎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증거하다가, 즉 의를 행하다가 자초한 사랑의 고난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예수님이 심판을 당한 것임을 알려주기보다는 하나님께 되돌아가기 위한 것, 하나님께 드려온 자신의 복종을 완성시키기 위한 자발적인 죽음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성령님의 깨우침을 받고 납득된 사람은 이미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요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다.

 

보혜사 성령 안에서 누리는 절대 평안(요한복음 14:25-31)

나사렛 예수의 일생의 특징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무한 복종이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의 죄인들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배반과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세상의 잃은 자들을 사랑하던 예수님은 유대 종교당국자들에게 깊은 반발과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들이 뒤집어 씌운 죄를 묵묵히 지고 어린 양처럼 온순하게 붙잡혀 죽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절대복종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한편 죽기까지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상실이요 절망이었다. 제자들은 깊은 불안과 심리적 동요를 겪으며 해체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죽음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며 자신의 죽음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영속화하며, 세계적으로 확산시켜가며, 시간을 넘어 계승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는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요한복음 14장 전체는 예수님의 죽음과 제자들과의 이별이 가져올 유익과 구원을 설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근심과 불안은 너무 깊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 자신들의 인생의 전부였던 사랑하는 스승, 주와 왕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오는 상실감, 그리고 기대와 희망이 깨어지는 고통이 제자들의 마음을 깊은 불안과 근심으로 몰아갔다. 그들은 평안을 잃고 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다.

요한복음 14:25-31은 제자들의 근심과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는 결정적인 위로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육신을 입은 예수님, 창에 찔리면 그대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예수님을 잃으면 보혜사 성령을 받는다.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의 자아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분이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고 삶의 구체적 상황에 적용시켜 주는 진리의 영이다. 한 때는 육체로 계시다가 죽음의 지배를 받았던 예수님이 이제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죽음을 무기력하게 만드신다.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다. 보혜사 성령은 죽음의 공포, 상실과 실패, 좌절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깊은 불안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하신다. 잠간의 상실은 영생을 얻기 위한 예비절차에 불과하며 잠간의 이별은 영원한 연합을 위한 중간단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하고 서로 안에 거하게 하는 진리의 영, 위로의 영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가? 죽음의 공포, 재산 상실, 생명 상실, 건강 상실, 모든 좋은 것들의 상실과 모든 좋은 분들과 좋은 것들과의 강요된 이별을 감당하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 십자가에 달리려 체포당하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 웃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종 된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주가 되었다고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 또 다른 한편 보혜사 성령님을 받은 사람만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을 수 있다. 둘 다 진실이다.

결국 보혜사 성령은 세상의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을 친히 겪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을 주신다(천로역정, 미우라 아야꼬, 우찌무라 간조). 예수님을 따르다가 세상의 위로와 평안을 다 잃어버린 사람에게 보혜사 성령이 주시는 절대평안이 찾아온다.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주는 평안은 죽음의 공격에도 파괴되지 않는 절대적인 보금자리에 들어와 있는 영혼의 평안이다. 보혜사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피조물들도 빼앗거나 무너뜨리지 못하는 절대 평강이다. 평강은 샬롬이다. 성령의 열매가 희락과 평강이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다. 어떤 원자 폭탄도 파괴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방호벽, 상황초월적인 평강과 희락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어떤 세상 임금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 평안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에 잠긴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떠나 십자가의 수치와 굴욕을 감수하는 예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폭풍이라면 그 폭풍 안에서도 절대평강을 주시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믿어야 한다. 이 보혜사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 임금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다니엘이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기도한 것처럼(단 6:10) 어떤 환난에도 동요되지 않고 자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기도에 몰입하는 교우들은 절대적인 평안을 누릴 수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임금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위한 임무교대를 하시는 통과의례인 것이다. 요한복음 14-16장이 성령을 파송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성자의 하나님 우편보좌 복귀--->성령 오심), 성령과 성자의 순차적 임무교대와 유사한 측면을 강조한다면, 사도행전 2장은 성자의 주도적인 성령 파송행위를 부각시킨다.

 

 

승천하셔서 성령을 파송하신 예수님(행 2:33, 34-36)-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의 승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

사도행전 2:33-36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 승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힌다(34-35절). 33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파송을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파악한다. 33절의 상반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령 파송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행하신 첫 사역인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요청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파송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 3위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 1054년 동서방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필리오케(and from the Son) 논쟁을 자세히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양측의 논쟁은 언어적 자구의 뉘앙스를 사이에 둔 논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로마교회로 대표되는 서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from the Father and the Son) 출원하신다”고 주장하였고 콘스탄티노플로 대표되는 동방교회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 성령이 출원하신다”고 주장했다. 요한복음 14-16장과 사도행전 2장을 종합해 보면, 아들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께서 성령을 파송하신다는 주장이 참된 진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합의와 연합으로 성령을 파송하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은 일차적으로는 아들 하나님을 증거하고 아들 하나님의 사역을 바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 보혜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토대로, 그의 이름으로 오셔서 그를 증거하실 성령은 둘째 보혜사인 것이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강조되듯이 성령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가지고 당신 자신을 증거하실 “또 다른 보혜사”인 것이다.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고 보좌 우편으로 되돌아가 주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착수하셔야만 제자들에게 오시도록 예정된 또 다른 보혜사였다. 따라서 성령이 강림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리우셨음을 의미한다. 성령 강림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의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에게 심어준 가장 강력하고 즉각적인 확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다(마 28:18-20; 행 7:55; 빌 2:10-11).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주(主)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깨달았는가? 아니면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는가?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요한복음 14:26, 15:26, 16:7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의 논리적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시면 아버지께 요청하여 제자들을 위하여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았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서 처음으로 착수했던 최초의 통치행위는 무엇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主)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착수한 통치행위는 성령을 파송하신 사건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심을 증거하는 영(靈)이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게 된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 주권(主權)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확신하려면 성령 충만에 이르러야 한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는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한 감정이 단지 감미롭게 순화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意志)와 책임감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심을 믿을 만큼 성령충만한 신앙고백을 드리지 못하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성령의 단기적 과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보혜사 역할이었다. 예수님은 성령의 감동과 감화 속에서 감미로운 순종 모드(mode)로 전환된 제자들을 자유자재로 다스리신다. 성령으로 달구어지고 감동된 제자들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하시고 아주 사이가 나쁜 인간 관계에 머물던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같은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고립된 개인들이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루되, 성령의 능력에 무장해제된 개인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신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33절에 의하면 그들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과 공동체에게 일어난 사태의 외양과 현상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위대한 공생애를 실선적(實線的)인 사건으로 목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보거나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과 주장만 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의 신앙(信仰) 여부(與否)에 상관없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취상태를 경악과 당혹, 의심과 경이 속에서 쳐다보고 있다. 새 술에 취한 듯 세계 만방의 지방 언어로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하는 이 사건의 일차적 목격자요 관찰자로 서 있다. 성령강림의 결과 나타난 사건은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만민(萬民)이 경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선 사건이다.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은 실선 사건(實線 事件), 부활과 승천은 점선 사건(點線 事件), 오순절 성령강림의 결과 나타난 방언 현상은 다시 실선 사건(實線 事件)인 것이다. 국외자들이 볼 때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아직도 미궁(迷宮)에 쌓여있다(다빈치 코드의 대담한 주장을 보라). 예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진리다. 존 스토트가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제시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간접적인 증거, 방증은 그 자체로는 무기력하다. 빈 무덤설, 시체도난설, 기절설(氣絶設), 환생설(還生設) 등을 반박한다고 예수 부활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빈 무덤설, 시체 도난설, 기절설, 환생설 등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데는 물론 반증하는 데도 무기력하고 불충분할 뿐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들에게 과학적으로 설복시킬 만큼 공개적인 증거가 약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방식으로 증거해야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데는 증명 방법이 중요한데 그것은 증인의 역량에 있다. 증인의 삶과 사역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기대되는 삶과 사역이어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갈릴레오나 케플러식으로 증명(證明)하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게 할 수는 있다. 부활의 증인은 법정(法廷) 진술(陳述)처럼 증거 능력을 가져야하고 신빙성있는 진술과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이 표방하는 가치를 내면화(內面化)하고 육화(肉化)시켜서, 죽음의 권세를 압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는 것은 믿지 못할망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신의 부활도 믿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주장이 개연성(蓋然性)이 있다고 인정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부활 사실을 증거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한 여러 방식의 신(神) 존재 증명(證明)(우주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은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았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

34절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리우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선포한다. 주(主)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약간 다른 말이다. 당시에 주(主, kyrios)라는 말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신적 대권을 가진 왕을 의미하였다. 고대 로마 제국 안에서는 제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이사)에게만 사용된 호칭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종교의 창시자에게도 주(主)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황제의 주권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로마 총독 관저(官邸)가 소재하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다(마 16:15).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主) 고백을 요청하실 때는, 우리가 우리에게 절하라고 하는 거짓 주들을 거절하고 배격하는 담력을 발동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부왕(副王)을 일컫는다(Second King). 헬라어 그리스도(christus)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마시아흐’(massiaḥ)를 번역한 단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신정통치의 인간 지도자를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 신학적인 의미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代理) 왕(王)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부왕(Second King)을 뜻한다. 부왕은 항상 아버지 왕의 오른편에 앉아 아버지 왕과 함께 공동통치를 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왕(副王)을 뜻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런 의미의 부왕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것이다.

35-36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원수(怨讐)를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다. 원수를 발등상 삼는다는 것은 원수를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고전 15:20-2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서 주와 그리스도 역할을 하신다는 말이다. 원수를 발등상 삼는다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고대 앗수르의 왕국 조각물이나 문헌(文獻)을 참조하면 된다. 고대 앗수르의 신상(神像)들이나 왕의 원정 전쟁을 기록한 부조물들 중에는 원수의 목을 밟고 있는 앗수르 대왕(大王)을 묘사한 부조(浮彫)가 많이 발견된다. 예수님은 원수인 사망을 완전히 정복하여 무력화시킬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고, 때가 오면 왕권(王權)과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가 불가불 왕노릇 하는 시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이 정적(靜寂)인 느낌이 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이 보좌에 앉아있다”는 말은 아주 역동적인 통치행위를 묘사하는 말이다. 히브리서 1:1-2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붙드는 일을 하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다. 누가복음 24:47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일이다. 죄를 정결케 하는 예수님의 과업은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저항하는 진지와 요새가 되어버린 개인의 자아와 집단 이념과 기득권을 거룩하게 분쇄하는 일이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 전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확장시키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동일한 사역이다. 결국 누가복음 24:47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되돌아오는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세계를 통치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교회가 사람들의 죄와 반역, 불순종과 불신앙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진실은 의심되고 타기(唾棄)되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인들 자신조차도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임을 믿으면 믿는 우리가 그의 다스림에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영향을 받게 되어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主)를 지금 이 시간 믿지 못하면, 다른 주(主) 앞에 절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절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거짓 주들에게 절하지 않아도 되는 용기와 담력을 얻지 않았는가?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절하고 나면, 우리에게 절하라고 요구하고, 윽박지르고 회유하며, 공갈치는 거짓 주(主)들을 단칼에 칠 수 있는 담대함과 자유가 생긴다. 예수님께 제대로 절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경배해 보라. 엄청난 자유와 용기가 생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거짓 주(主)들이 우리의 양심을 세차게 정련(精鍊)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순교를 의미한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면 부동산 투기 못한다. 이런 때 일수록 우리의 예수 주(主) 고백은 위력을 발휘한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일은 우리의 정신적 담력을 단련(鍛鍊)시켜 주고, 엄청난 자유를 확보해 준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들은 스승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으나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에 의하여 완전히 부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위로 지상의 인간 권력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결론: 성령을 믿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성령을 망각했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이신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십자가와 부활)을 실재화하신다. 개별화시킨다. 현재화시킨다. 성령은 개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드라마에 참여케 하는 영적 권능을 선사하신다.

성령은 신자의 현재적 삶 속에 현재하는 그리스도시다. 영은 예수의 사신(使信)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공생애적 삶 속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누가복음은 성령복음서). “주는 영이시다”라는 선언은 기구화되고 권력기관화된 교회 공동체와 이 세상 질서의 한 부속품으로서 살아가는 개별신자들에게 부단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나님 나라)하도록 격려하고 압박하는 변혁적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마치 엘리야가 남긴 겉옷을 들고 엘리사가 요단강을 파하여 마른 땅을 만들어 걷듯이,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가 남긴 겉옷과 같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움직여진 사랑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넘어서 성령의 최종적인, 표준적인 은사와 성령 자신의 현재적 사역범위를 결정한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의 부재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채 남겨진 공허에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고독으로 방치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변증법적으로 연합하는 시간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고별 시간은 체념의 시간이 아니라 세계 속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시간이다. 성령의 도래와 더불어 제자들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육박하고 당국자들과 권력자들의 홈그라운드로 전진한다. 압도적인 성령의 현재는 신약성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주님의 현재(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로서 파악된다. 성령 충만한 경험 속에서(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소유되는 경험)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하나님으로 겹쳐 경험된다. 이러한 성자와 성령의 내적 관련성에서 “주님은 성령이시다”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이면서도 성령을 통해 신자들과 교회 공동체 속에 현존하시고, 교회와 신자들을 통해 이 세계 안에 현존하신다. 교회가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현존하심을 고백하지 못하면 온 세상은 무신론의 지배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자유한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을 촉진하는 성령 하나님-거룩하고 공변된 교회 공동체

그리스도 영(성령)의 현존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내재적인 세계에서 일어난다. 성령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유케 된 신자들(자녀들)을 창조한다(롬 8:15-17). 개별적 욕망, 계급적 계층적 이데올로기적 굴레, 즉 모든 비진리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성령은 하나님께 소속시키는 영이시다. 성령의 분명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얻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만일 구원받았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자신(인종, 계급, 계층 등)속에서만 맴돌고, 초월과의 다리 -이웃과 하나님과의 다리 -를 파괴한다면 그러한 행동은 구원의 상실을 초래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성령은 교회공동체의 영이시다. 개인을 구원하시자마자 공동체에 접목시키신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자마자 이 세계 생존공동체의 핵심문제에 시선을 맞추게 되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해답이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성령의 운동은 개별신자에게 죄사함과 중생을 창조해주시면 또한 개인밖의 외부, 사회구조의 갱신을 목표한다. 성령의 운동은 인간 밖으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고 이것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성령론은 교회론과 종말론을 지나 더 나간다. 성령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로서 먼저 교회의 영이다. 성령의 몸은 교회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상하는 것은 신약 성서적인 교회론의 명쾌한, 가장 생산적인 주제에 속한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에 거한다는 성령의 장소규정은 구체적인 신앙의 공동체를 단순하게 받아들이거나 교회를 인간적인 현상에다 그대로 내맡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현존하시지만 교회의 직제나 기구에 속박되는 그런 영이 아니시다. 교회의 밖을 향한 선교의 첫 발걸음은 외부사회를 갱신하려는 성령의 원래적인 사명과 잇닿아 있고 교회는 이제 세상을 향한 성령의 변혁적인 공격의 전위부대가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교회와 함께 교회를 넘어선다. 이런 성령의 거룩한 추동력에 의해 실행되는 교회 밖을 향한 교회와 성령의 증거는 교회사와 교리사의 넓은 흐름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마치 성령은 교회 안에서만 활동하기로 작정하신 종파적인 인간 정신의 대표자인 것으로 오해받았다. 원래의 광활하고 변혁적인 성서적 성령론의 열려진 전망은 기구화되고 권력기관화된 교회에 의하여 자주 가려졌고 좁혀졌다. 이 점은 성령의 교리화, 개인화, 제도화를 초래하였으나 이것은 마땅히저지되어야 한다(몬타누스 운동에 대한 초대교회의 억압).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이상에서 고백된 성령의 포괄적이고 광활한 역동성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거룩한 공회와 거룩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이 성령에 관해서 말한 다음 곧 같은 조항에서 교회에 관해 말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가장 진실된 표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와 복종이다. 거룩성, 보편성, 사도적 계승, 단일성이 교회의 표지다. 교회의 세 가지 기능은 말씀 선포, 성례전 집행, 그리고 치리다. 교회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예배 동안에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리로 올려진 모든 인간적인 권력들과 업적들과 성취물들을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놓을 수 있다.

교회의 본질에 상응하는 최대의 봉사는 생동하는 예배를 위한 노력이다. 교회는 전체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거룩한 목적을 위한 분리된 성도들의 공동체다. 이 거룩한 공동체는 전체로부터, 그러나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분리된 공동체다. 이 거룩한 공동체는 모든 세대들을 통하여 배출된 성도들의 교제가 가능함을 믿는다. 인종, 세대, 계급, 피부색의 차이를 초월하는 성도들의 공변되고 거룩한 교제를 믿는다. 전체로서의 세상으로부터 “에클레시아”(교회)는 부름받은 자들(the called)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전체로부터 분리되었으나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분리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거룩한 교회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교회다. “거룩” “보편성”이란 개념들은 분리되었으되 세계 안에서 그리고 세계를 위하여 봉사하라는 부름을 듣고 전 세계와 연대하라는 부름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한계(닫힌 경건과 거룩)를 넘어서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공동체다.

이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교회의 열려있는 관계의 지평을 가장 잘 표현한 신학적인 개념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회의 독점물이 아니고 전 인류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교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이자 세계의 미래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교회의 현재를 폐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상대화하고 종말로부터 역진해 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출발하게 하며 맞이하게 한다. 교회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당파와 영속적으로 제휴하지 못한 채 역사의 오메가 포인트를 향하여 달려간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인 당파를 신앙의 고백에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자본주의나 공산당이나 어떤 인간적인 이념도 종말의 질서를 구현하기 위하여 자기 시대보다 몇 발짝씩 앞서 달려가려고 하는 교회의 전진을 가로막을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과 동시에 지역과 시간을 초월한 성도들간의 역동적 사귐이다. 이 사귐은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사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까지 나누는 총체적인 사귐이다.

성도들의 사귐이 교회에서 엷어지고 사라진다면 교회의 이해는 천박해지고 교회의 삶은 빈곤해진다. 성도의 사귐은 성도끼리의 사귐 이상을 의미한다. 한 시대의 주변화된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를 이루는 사귐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사귐이다.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면은 동시대인들과의 친교에서 드러난다. 초대 신약성서 교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형제자매적 운명공동체적인 공동체 정신과 실천이었다. 초대교회의 운동은 분명히 형제적인 공동체의 사귐운동이었다(행 2:42). 성도들의 사귐의 사회적, 경제적인 차원에서까지 이뤄졌다. 성도들의 사귐은 사회 윤리적인 정치적인 현실성을 수반하는 임무를 갖는다. 성도들의 사귐의 약속이 가장 강력하게 실현되는 장이 성례전이다.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총체적인 사귐에 들어갈 용기를 고백하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사도신경 고백에서 앞으로 더 깊이 다뤄어야 할 부분:

1. 왜 서구 교회는 성령 망각의 시대를 살아왔나? 후스토 곤잘레스의 기독교사상사 I에 의하면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일어난 몬타누스의 성령 운동이 제도권 교회에 의하여 축출되는 과정에 대한 비상한 주목이 있다. 성령운동은 제도권 종교권력의 기구화된 성례집행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2. 20세기초 미국에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에 대한 개혁교회의 입장은 어떠해야 하는가?(차영배, 김명룡, 프레드릭 브룬너의 성령신학)

 

3. “성령을 받으라”는 복음서의 표현, 사도들의 안수기도로 임하는 성령 등에 대한 묘사가 성령의 인격성을 훼손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4.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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