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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편◑/예수 학자들

초대교회 변증가들

by 【고동엽】 2021. 11. 18.
초대교회 변증가들



1.1. 변증가들

“초대 교회에는 6인의 변증가들이 있었다.
저스틴 마터(d. 약 165)
이레니우스(약 130-200)
클레멘트(d. 약 217)
오리겐(약 182-251)

터툴리안(약 155-230)
키프리안(d. 258)

“이 6명의 사람들을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먼저 동방교회의 저스틴 마터와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그의 제자 오리겐,
그리고 카르타고의 터툴리안과 그의 제자 키프리안으로 짝을 이룬다.


그 외에도 변증가들로 활동한 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히폴리투스(Hippolytus, 236),
코넬리우스(Cornelius, 253),
노바티안(Novatian, 257),
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Great, c. 264),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68),
피르밀리안(Firmillian, 268),
그레고리 타우마투르구스(Gregory Thaumaturgus, 268),
아르켈라우스(Archelaus, 282) 등이다.

*저스틴 마터
“‘저스틴 마터’라는 이름은 ‘저스틴 순교자’라는 말이다. ‘마터’란 영어로 ‘martyr’, 즉 순교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다.. 저스틴은 철학자, 순교자, 그리고 기독교 변증가이다.



“철학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저스틴은 약 110년경에 태어나 165년경에 순교하신 인물이다.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주의에 심취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스틴이 가르친 당시의 에베소
“게다가 나이 많은 분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저스틴과 함께 철학적 주제들을 논의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를 보다 알기 위해 기독교인들의 삶에 관심을 보다 깊게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철학자의 옷을 입고 여전히 다녔다. 에베소에서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쳤고 후에 로마에서도 철학을 가르쳤다.”


*담대하게 죽음을 기도로 맞이하는 순교자들
“그런데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서고 두려워하지 않는 초월적인 용감함을 보고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개종한 저스틴은 복음전도자로서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철학임을 전했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알렸다. 여러 곳으로 여행을 하던 중 에베소에 거하기도 했고, 상당한 기간 동안 로마에 거주하기도 했다. 로마에 거하면서 아마도 기독교 교사직을 감당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저스틴은 순교로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했다. 165년 그는 참수형을 당해 순교를 하였다.”



*스토아 철학
“저스틴의 삶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그가 쓴 작품들이다. 언제 어디서 자신의 작품들을 썼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로마제국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기에 살면서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순교를 당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추종자였던 안티스테네스(약 445-365 B.C.)가 세운 학파가 견유학파이다. 견유학파는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덕스러운 삶이라고 보며 덕행을 행하게 되면 행복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기존의 가치관, 즉 부귀영화와 사회적 신분과 같은 가치관을 포기했다. 그런 가치관은 자연과 위배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견유학파는 철학 체제라기보다는 하나의 삶의 한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은 줄 모르겠다. 아무튼 그들의 많은 사상들은 스토아 철학(Stoicism), 즉 금욕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제노

“‘스토아 철학’이란 우주처럼 사람들의 정치적이고 개인적 삶을 질서 있기를 바라는 헬라 철학을 말한다. 모든 스토아 철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 명령이 자연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는 에베소의 헤라클리투스이다. 그는 스토아 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개인이 자연법이나 로고스에 복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을 사랑했던 견유학파들처럼 덕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300년B.C.경 제노라는 사람이 아테네에서 강의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헬라인들에게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를 규명했다. 그런 후 A.D. 1-2세기에 이르러 이미 보았던 세네카와 황제 아우렐리우스에 오면서 스토아 철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세네카(약 4년 B.C.-A.D. 65)는 황제 네로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들은 윤리를 나무의 열매처럼 표현했다. 삶은 우주의 은택과 질서를 따라야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삶의 결과는 영적 평안과 부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영혼의 행복은 신성을 닮아 가는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최종적 목적은 하나님처럼 자선적이고, 자발적이고, 그리고 한결같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되기 위해 언제든 덕행을 쌓아야한다고 했다. 최고의 덕행은 행위가 아니라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성이며,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함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어떻게 나눠줄 것을 아는 공의이며, 자제심이다.”




작품들
*저스틴의 전집안 표지
“저스틴의 작품들은 2세기에 쓰인 것으로 기독교인들을 위한 『변증서』로 유명하다. 현존하고 있다. 이 작품은 『변증서 1』과 『변증서 2』로 나눠진다.



『변증서 1』은 로마제국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에게, 그의 아들들 루키우스와 마르쿠스 아렐리우스, 그리고 로마 원로원들과 로마인들에게 보낸 작품이었다.


『변증서 2』는 로마 원로원들에게 보낸 작품이다. 결국 이 두 작품은 로마인들의 핍박에 대한 변증서란 말이다. 이 작품은 당시의 이교도들과 기독교인들 간에 있었던 관계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우리들에게 전해 준다.”


“그 외 그의 작품은 『트리포와의 대화』인데, 이 책에서 그는 유대인 트리포에게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아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그 외 저스틴의 작품들은 소실되었지만 ‘헬라인들에게 주는 글’ ‘헬라인들에게 주는 권면’ ‘하나님의 유일한 통치에 대해’ ‘디오그네투스 서신’ ‘부활에 관한 여러 말씀들’ ‘여러 파편들’ ‘참된 신앙 해설’ ‘정통을 위한 답변’ ‘이방인들에게 묻는 기독교 질문들’ ‘기독교인들에게 묻는 이방인들의 질문들’ ‘제나스와 세레누스 서신’ ‘아리스토텔레스 어떤 교리들에 대한 논박’ 등이다. “


http://www.iclnet.org/pub/resources/christian-history.html 에 들어가시면 저스틴의 작품들만 아니라 초대교회, 즉 모든 교부들의 작품들을 영어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저스틴의 작품들 중 『변증서 1』의 구성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이 불공정한 것임을 철학자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변증한 내용이다. 기독교인들은 참된 철학을 가진 자라고 했다. 1-12장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증거들을 제시한 후, 13장부터 긍정적인 증거들을 설명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즉 모든 만물의 창조자를 경배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올바른 도덕성을 가지도록 했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강조한다. 그리고 61-67장에서 기독교인들의 매일의 삶들을, 즉 세례, 성찬, 그리고 주일예배 등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변증서 2』는 부록으로서 핍박 아래 살았던 기독교인들의 삶을 강조하면서 인내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트리포와의 대화』는 서론에 이어 10-30장에서 기독교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법임을 설명한다.31-108장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에서 증명하고 있다. 결론적인 부분인 109-142장에서 기독교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 ― 성경중심. 사도적 계승
생애:
“이레니우스의 출생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이는 약 120년, 또는 130년이라고도 합니다만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자로서 소아시아에서 출생했음에는 틀림없다. 그의 부모님은 기독교인들로 그를 '위대한 교회 지도자'이며 속사도인 폴리캅, 즉 서머나 감독 폴리캅에게로 보내어 교육을 시켰다.



“폴리캅의 인도 속에 이레니우스는 훌륭한 성도, 학자, 지도자로 성장했다. 마치 폴리캅의 복사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레니우스는 이교 철학자들을 탐구했다. 그의 작품은 터툴리안을 비롯한 여러 변증가들에게 알려졌다.”


“철학의 오류들, 영지주의자들과의 전투들을 수년 간 경험한 이레니우스는 스승 폴리캅의 권면에 따라 고올 지방, 즉 지금의 프랑스로 임지를 옮겼다. 그 이유는 동방교회, 즉 소아시아의 이단자들이 서방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4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론 강을 건너 리용이라는 지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리용 감독 포티누스를 도왔다.


“177년 경, 즉 그러니까 로마제국 황제 아우렐리우스 시기에 포티누스의 사명을 받들어 이레니우스는 로마로 간 사이에 그 지역에 핍박이 있었고 감독 포티누스는 순교를 당했다. 되돌아온 이레니우스는 그를 이어 리용 감독이 되었다. 감독이 된 이레니우스는 리용을 기독교의 모범지역으로 인도해갔다. 그러다가 로마제국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10년째 치리하던 시기, 즉 202년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순교를 당했다.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집필하는 이레니우스
“그도 저스틴 마터처럼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5권으로 된 『소위 영지주의라 불리는 자들을 발견하고 이기기 위해』라는 책을 180-189년에 썼다.



이 책의 목적은 다양한 영지주의 단체들의 가르침을 논박하는 것이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1권은 다양한 영지주의 종파들의 오류들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특별히 발렌티니아니즘(Valentinianism)에 관한 것이다. 영지주의를 가장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바로 발레티니안이다.


그리고 2-5권은 영지주의자들의 오류들을 논박하는 내용이다. 특별히 2권에서 이레니우스는 철학적으로 접근해 가서 논박한 후, 3권에서 ‘전통’을 강조한다. ‘믿음의 규율’을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지.


그 전통을 통해 교회의 순결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가 된다고 한다.


4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는 구약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특별히 마르키온에 반대하여 신ㆍ구약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 5권에서 이레니우스는 종말에 관한 내용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두 번째 그의 책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논증한다』는 『이단들에 대하여』를 쓴 후에 쓰였다. 마르키안이라 불리는 친구에게 보낸 것. 이 작품에서 이레니우스는 먼저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고 선지자들로부터 이런 교리들을 찾아내었다고 강조하면서 교리의 진실성을 나타냈다. 어떻게 보면, 내용상 『이단들에 대하여』와 유사한 논지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의 1권 10장 1절.”
이제 우리는 지상 끝까지 어디든지 교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한 분이신 하나님, 성부, 전능자, 그리고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와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를 믿는 신앙을 사도와 그들의 제자들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신앙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섭리와 재림, 그리고 동정녀 탄생, 그분의 고통,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심, 성부의 영광을 받으시면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과 성령을 믿는 신앙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불가시적 성부에 따라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와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이는 무릎을 꿇을 것이고 모든 입들이 그분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배교자들이 되고 범죄한 사악한 자들과 천사들, 또 불법을 자행한 사람들 가운데 신성모독적인 행사를 범한 자들을 영원한 불 못으로 던질 것입니다. 하지만 의롭고 거룩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영광으로 가득 찬 복과 영생을 베풀 것입니다. 또 그분의 계명, 즉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며 회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베푸십니다.


“다음은 3권 3장 1절의 내용.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쉽게 얻게 되는 진리를 다른 분들 가운데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은행에 많은 돈을 가진 한 부유한 사람과 같습니다.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물을 그들로부터 길어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영생으로 향하는 문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도둑이며 강도들입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진리의 전통을 열심히 고수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합니다.






클레멘트


오늘은 북아프리카로 옮겨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두 분 클레멘트와 그의 제자 오리겐이다. ‘ 교회사 책들은 1세기의 교부인 클레멘트를 ‘로마의 클레멘트’라 부르고 2세기의 클레멘트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라 부릅니다.”

생애
“클레멘트를 생각하면, ‘윤리학’이다. 그분의 본명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이다. 2세기 중엽에, 즉 약 150년 경에 태어났고 211년과 216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분으로 태어난 곳은 북아프리카이기보다는 아마도 아테네라고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그의 탁월한 그리스어 실력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들과 시인들에 대한 수많은 인용들은 그가 그리스인임을 증명한다.”


*300B.C에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클레멘트는 그리스, 이태리,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로 여행하여 이곳에 정착했다고 본다. 그러면서 저스틴처럼 하나님에 대한 문제로 고민했으며 마침내 기독교인들의 교리와 숭고성, 도덕성을 통해 개종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기독교 교사들을 만나기를 원한 나머지 약 18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고 약 190년 경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교장 판타에누스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로가 되었다. 판타에누스의 이름의 뜻은 ‘시실리아의 벌’이라는 뜻이다. 클레멘트는 그를 이어 그 학교의 학교장이 되었다.”



저서
“그리스인, 철학자, 여행자라는 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클레멘트는 열린 마음과 귀족적 마음을 지닌 인물이었다. 박식한 그는 비범했으며 어느 누구도 그만큼 이교도 저자들과 기독교 저자들의 글을 인용한 사람이 당대에 없었다. 심지어 유명한 그의 제자 오리겐도 그에게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폭넓은 지식을 갖기 위해 많은 독서를 했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정통신앙과 조금 달랐다. 예를 들어보면, 그의 주요한 목적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짓는 것이고, 철학으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 계시를 과학적 신학으로 바꾸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는 정통에서 벗어난 갖가지 이론들을 지니게 되었다.”


“그가 쓴 작품들은 『권면』, 『교사』, 그리고 『잡록』 등이다.
『권면』은 이교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오류들을 저버리라는 권면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 후에 개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완전한 진리는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제안한다.”


“『교사』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기독교적 삶을 살도록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작품은 먼저 어리석은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인들이 완전에 이를 수 없다고 하며 보다 나은 지식, 즉 영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클레멘트는 세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영지는 단순히 신앙의 발전에 불과하다고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분에서 그는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인 다양한 삶의 현장들을 언급하면서 덕스러운 삶에 대한 지침을 준다.”
“ 『잡록』에서는 완전한 기독교인을 참된 영지주의자로 묘사하면서 다양한 기독교 교리들을 교육적으로 설명한다.


*데오도레스에게 보낸 클레멘트의 서신의 한 부분
“그 외 그가 쓴 작품으로는 『개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신ㆍ구약성경에서 발췌된 구절들을 주석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서신, 요한서신, 그리고 사도행전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의 주석적 방법은 주로 알레고리칼, 즉 풍유적이다. 그 외에도 『구원받는 부자는 누구인가?』는 마가복음 10:17-31에 대한 설교이다. 그리고 데오도레스에게 보낸 서신이 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삶이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학식이 높은 알렉산드리아인들을 전도하기 위한 마음의 소원에서 나온 것이다. “클레멘트가 가진 두드러진 결점들은 신약성경의 전 정경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기독교 신조의 초기 형태인 믿음의 도에도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비밀적 전통을 싫어했던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클레멘트는 비밀적 전통을 언급했으며 영지주의에 대한 그의 호감은 영지주의적 단어들을 빌려와 사용한다는 수준을 훨씬 넘는 것처럼 보인다. 주로 그는 윤리학 교사로 알려져 있다. 클레멘트 덕분에 기독교 교리신학은 홀로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고 잘 발전된 윤리학의 조직과 함께 동반자 관계에서 들어갔다. 클레멘트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도덕신학은 교리신학과 함께 나란히 왔으며, 실제로 기독교 신학이 꽃필 때마다 윤리학 뿐만 아니라 교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오리겐
생애
“초대교부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553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오리겐이다. 그에 대해서는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가 쓴 오리겐의 1백개의 서신을 소개하면 알 수 있다.


“오리겐의 본명은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igenes Adamantius)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경건한 기독교인 부모의 자녀로 약 185년 또는 186년경 태어났다. 그는 7 형제ㆍ자매들 중 맏이다. 부친 레오니다스로부터 처음에 학문과 지식을 배웠다. 그런데 부친 레오니다스는 202년경 로마제국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 핍박 시에 참수형을 당하면서 순교하였다.

*오리겐의 연구하는 모습
“그런 후 오리겐은 판타에누스와 클레멘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는 나이 17세에 문법 분야에 큰 두각을 나타내다가 18세에 이르러 클레멘트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금욕적 삶을 산 오리겐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학을 할 정도였다. 그래야만 여인들을 가르칠 때에 유혹을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오리겐은 마태복음 19:12를 문자적으로 채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고 제자들이 생겨났다. 212년 그는 제자들 중 헤라클라스를 택하여 교리학교의 초급반을 맡겼고 자신은 고급반을 맡았다. 그는 기독교 신앙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까지 가르쳤다. 오리겐은 204년부터 230년까지 가르친 후 23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리아에서 가르쳤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항상 학문을 배우는 학도의 자세를 잊지 않았다. 25세 나이에 그는 신플라톤주의 암모니우스 사카스 학교에 입학했다. 그 이유는 철학적 지식을 완벽하게 알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도 그는 성경 말씀을 늘 묵상했으며 히브리어를 배워 원어로 읽는데 노력했다. 또 유대인들과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자 했다. 그리하여 후에 『헥사플라』(히브리어와 5가지 그리스어를 함께 쓴 6가지 성경본문)를 썼다. 약 215년에 로마제국 황제 카라칼라의 핍박이 교회에 임하게 되자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카이사리아 감독 테오크티스투스를 만나 사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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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겐에 대한 평판을 들은 예루살렘 감독 알렉산더는 그로 하여금 두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도록 했다. 사실은 일반 신자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당시에 허용되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메트리우스는 218-219년에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오도록 하고 다시금 교리학교 직을 맡도록 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당시에 오리겐은 가장 인기 있는 교사였다.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온 오리겐은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이미 가르치고 있었기에 여유가 있어 집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약 230년 아카이아로 여행을 했는데 다시금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리아를 지나치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친구인 데오크티스투스와 알렉산더는 그를 다시금 붙잡고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메트리우스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오리겐을 사제로 임명하고 말았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오리겐을 자신들과 함께 일하도록 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것은 불법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데메트리우스는 불평하면서 오리겐을 231년경에 교리문답 학교장직에서 파직시켰고 사제직 역시 파직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데메트리우스는 서신들을 써서 여러 교회들에게 이 불법적 처사를 고발했다.”“오리겐은 이제 더 이상 이집트에 머물 수 없었다.

*고문당하는 오리겐
“아무튼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을 당하자 하는 수 없이 카이사리아로 가서 자신의 두 번째 경험을 그곳에서 갖게 된다. 목회를 할 뿐만 아니라 여러 문학 활동을 아울러 했다. 아마도 이곳의 경험으로 인해 거의 3백여 편의 설교를 썼다. 오리겐은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로마제국 황제 막시미누스(235-237)의 핍박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잠시 피했다. 240년에 다시금 그는 아테네로 여행했고, 244년 아라비아로 여행했고, 그 후 보스트라 감독 베릴루스를 방문했다. 그러다가 또 다시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250-251)의 핍박으로 인해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아 로마제국 황제 갈루스 시기, 즉 254년이나 255년에 69세의 나이로 뵈니키아의 두로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저서
정말 오리겐은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헌신된 금욕적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다작가였다. 기독교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먼저 그의 작품들 가운데 성경적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최고의 작품은 누가 뭐라 해도 『헥사플라』와 성경 주석류이다.”


*헥사플라'의 한 페이지
“교수님, 앞에서도 『헥사플라』는 “6개의 칼럼, 즉 세로 줄로 된 구약성경 대역서라고 하는 것이다. 첫줄에는 히브리어로 된 히브리어 본문, 다음은 그리스어로 된 히브리 본문, 세번째 줄은 아퀼라(Aquila)의 그리스어 역본, 네 번째 줄은 심마쿠스(Symmachus)의 그리스어 역, 다섯째 줄은 셉투아진트(70인역)의 그리스어 역, 그리고 여섯째 줄은 데오도티온(Thedotion)의 그리스어 역이다. 이 중에서 특별히 시편은 8개의 칼럼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두 역본을 더한 것. 이러한 역본을 쓴 오리겐의 목적은 성경 역본들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셉투아진트임을 밝히기 위함이고 히브리 본문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의식한 것. 이 작품은 약 24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쓰기 시작했다가 카이사리아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의 성경적 작품으로는 『주해』(Scholia), 『설교집』(Homilies), 그리고 『주석집』 등. 『주해』는 성경구절들 중 난해한 것들을 순수하게 문법적으로 성경을 주해한 . 주로 모세 5경과 이사야, 시편, 전도서, 마태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관한 것이다. 『설교집』은 성경에 관해 신실한 사람들과의 친밀한 대화를 엮은 것. 마치 교수와 학생과의 대화처럼 말입니다. 약 500여개의 설교를 담고 있다. 그 중 200여개는 라틴어로 현존하고 있다.


『주석집』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도록 성경구절들을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목적이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찾는데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의로 해석했다는 것”
“그러니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오리겐의 성경 해석방법이 알레고리칼, 즉 풍유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생각에 성경은 무오류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류인 것처럼 여겨지는 본문에 관해 이렇게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서늘한 날에 낙원에 거니셨다고 하실 때의 의미는 실제 사건이라기보다는 은유라고 여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별히 그의 『요한복음 주석』은 교사였던 그의 모습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 다음 그의 작품들은 변증적 작품으로 『셀수스에 반대하여』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작품으로는 『첫 번째 원리들』이 있다

▲오리겐 작품의 '로마서 주석'
“ 이 작품은 모두 8권으로 되어 있다. 또 셀수스라는 사람은 박식한 플라톤주의자다. 그는 ‘참된 강론’이라는 작품을 써서 기독교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약 177-178년경. 이 안에서 셀수스는 기독교란 당시의 이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성경을 언급하면서 사용했지만 극히 주관적으로 사용했다. 마치 볼테르와 같은 인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냉소주의자였다. 이 작품을 읽은 오리겐의 친구 암므로스는 오리겐에게 부탁하여 비판책을 써달라고 했다. 셀수스의 책의 모든 부분들을 조목조목 들이대면서 비판했다.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번째 그의 작품은 신학적 작품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그의 두 번째 조직신학 작품으로 『첫 번째 원리들』이다. 이 책은 클레멘트 작품과 유사한 것으로 기독교 신앙을 알렉산드리아 철학과 관련시키고 있다. 이 안에서 그는 한 분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지배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독생자이시고, 성령은 그 두 분들의 영광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들은 성부로부터 존재를, 성자로부터 이성을,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거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서 그는 두 가지 창조를 말한다.


첫 번째 창조는 몸 없는 영들의 창조. 영들은 자유의지를 가졌지만 타락하고 말았다. 두 번째 창조는 물질적 창조. 고통을 인간이 받는 이유는 우리의 죄의 선재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플라톤 철학적 관점이다. 또 이 책에서 그는 ‘보편 구제설’(universalism)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심지어 사탄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끝에 가서는 모두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금욕주의자였던 오리겐의 세 번째 작품은 『순교에 대한 권면』 그리고 『기도에 관하여』가 있다. 로마제국 황제 막시미누스 핍박시기에 검거되어 순교한 자들과 검거되어 있는 자들을 위해 235년에 쓰인 작품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대한 여러 편의 설교집이 있다. 그리고 『기도에 관하여』는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1~17장과 18~30장. 주님의 기도, 즉 주기도문 해설서라 할 수 있다. 231년 이후에 쓰인 책.”


오리겐의 탁월한 공헌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삼위일체 정통이라 부르는 것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불행하게도 이러한 대 알렉산드리안 [오리겐]을 추억할 때 그의 상상력이 너무나 풍부하고 그의 사색이 너무나 가공적이어서, 동방정교는 그를 성자나 교회의 교부로 보지 않고 단지 대 이단으로만 여길 뿐이다. 자신보다 앞선 터툴리안처럼 오리겐은 정통 교리의 발전에 헤아릴 수 없는 공헌을 했지만 너무나 많은 비정통 사상도 산출했기 때문에, 하르낙과 같은 대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환대하지만 정통 기독교인들은 그에 대해 수치감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를 받는 첫번째 이유는 그의 삼위일체론이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서로 ‘동일본질’(homoousios)을 말한 사람은 바로 오리겐이었다. 이 용어는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는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단어이다. 그렇지만 그 두 분의 관계를 ‘종속’의 관계임을 동시에 암시했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더욱이 성령을 단순히 사역이나 역할로 보았다.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다고 보지만 성령을 동일하다고 보지 않았다. 이것은 삼위일체에 큰 무리를 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의 선재설을 언급했다.


오리겐은 인간의 영의 선재설 (preexistence)을 가르쳤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독단성을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영들을 포함한 형체가 없는 수많은 영혼들을 창조하셨다. 태어나기 전에 그러한 영들은 자유의지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각 영들은 물질적 육체를 수여 받는다.31) 이런 설명은 마치 영지주의와 흡사하다. 선재한 영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선택에 따라 일시적인 정체를 부여받는다. 영의 선재설 개념은 16세기 이후 극적으로 말일예수그리스도교 (몰몬교)의 교리에서 다시 재발한다.


“그의 금욕적 삶과 교훈은 후에 수도사들이 그의 사상을 닮고 추구하곤 한다.
“ '호모오시오스'라는 용어는 '동일본질', 즉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철학적인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264-268년경에 개최된 안디옥 종교회의에서는 이 단어가 영지주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여 정죄했다. 그렇지만 325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는 ‘유사본질’(homoiousios [호모이오시오스])이라고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동일본질’이란 용어를 정통으로 인정했다. ‘유사본질’ ‘동일본질’ 과의 사이에는 단순히 ‘i’(이오타)의 차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다르다. ‘이오타’가 덧붙여지므로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을 닮았다고 표현된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신성이 무너지게 되는 셈이다. 또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 교사로만 인식하게 되고 모본자로만 인식하므로 인간종교로 기독교를 전락시키고 말 것이다.”




*터툴리안

“지금까지 변증가들 가운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교부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2인을 보도록 하겠다. 두 분은 스승과 후계자의 관계이기도 하며 북아프리카 출신이기도 하다.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다. 먼저 터툴리안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터툴리안이라고 하면, ‘삼위일체’(trinitas)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교부이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를 ‘한 본질과 세 위격들’이라고 설명하였다. 그 외에도 ‘신ㆍ구약’ 성경이라는 용어도 처음으로 그가 사용했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를, 즉 하나님에 관해 알려고 할 때에 반드시 터툴리안의 설명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터툴리안(약155–230)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이다. 당시 그의 부친은 로마 장교로서 카르타고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터툴리안은 덕스러운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터툴리안은 아마도 모든 일에 있어 부지런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학문성도 뛰어났다. 특별히 로마법에 관해 심오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직업상 법률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차분하고 냉정한 이성을 지닌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데 약 197~198년경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몬타니즘
“약 200년경 결혼한 그는 장로가 되었다. 당시는 로마제국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46-211)의 핍박이 있었던 때였다. 그리고 얼마 후 터툴리안은 교회를 떠났다. 그 이유는 몬타니즘(Montanism)을 로마교회가 정죄했기 때문다. 당시 몬타누스파는 재혼을 금했는데 로마감독의 권위를 가지고 재혼을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아마 217~222년 경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겸양에 관하여』를 쓴 후 역사의 기록에서 벗어났다. 터툴리안이 몬타니즘으로 개종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다.”


몬타니즘은 초대교회 때, 즉 2세기 중엽에 일어난 기독교의 한 종파였다. 창설한 자는 ‘몬타누스’였다. 어떻게 보면, 성령 운동을 강조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몬타누스는 두 여인, 즉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와 함께 동행했는데 그녀들은 성령의 인도를 직접적으로 받는다고 했다. 이것에 관해서는 『위대한 여인들의 발자취』라는 책의 3장 ‘프리스킬라: 이단자’를 보면, 몬타니즘에 관해 잘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는 동안 일부 개종자들이 이상한 교리들을 수용하고 채택했다. 예수님은 몇몇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와서 미혹시킬 것이라고 예언하신 적이 있다(마 13:20-22).

*몬타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그 결과 사도들은 성도들을 미혹시키기 시작하는 이단적 가르침들에 대해 교회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데 주력했다(행 20:29-30; 벧후 2:1-3). 하지만 이단 사설은 교회 전체에 퍼져 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하였다(요일 2:19). 2세기 말 소아시아 지방에 프리기안이라는 곳에 이단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성령께서 교회에 새로운 계시를 주시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두 명의 여인 프리스킬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는 그 계시를 받는 선지자들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받은 계시를 ‘새 예언’(New Prophecy)라고 불렀다. 새 예언은 박해와 금식에 저항하고, 재혼을 금하고, 죄를 미워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레니우스가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큰 공헌을 했던 것처럼 터툴리안도 역시 이단들에 반대하여 큰 공헌을 했다. 다음은 『변증학』의 21장 6절, 19장 3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두 분은 한 분이시다. 그분은 또 성령으로부터 나오시는 성령도 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에 수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분은 근원에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며 결코 분리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기독교 기강과 신앙에 대한 진리가 현존하는 곳에서,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성경의 설명도 발견할 수 있고 모든 기독교 전통 진리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기도에 관하여』의 6장 2절의 내용.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이며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떡이 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이 말씀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덧붙여 말하면, 그분의 몸은 떡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는 말씀을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말씀드리면, 일용할 양식을 간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기 위함을 기도하며 그분의 몸과 분리되지 않도록 간구해야만 한다.”


끝으로 『프락세아스에 반대하여』의 2장 1절.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처럼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십니다. 말씀이신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만들어졌고 그분이 없이는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이 성부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사람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분이 성경에 따라 고통을 당하셨고, 죽으셨고, 그리고 장사되셨음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분이 성부의 우편에 앉아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이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약속에 따라 성부께서 성령을 즉 모든 자들의 신앙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을 보내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터툴리안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정통으로 인정을 받는다. 오리겐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을 증오한 자였다. 영혼이 선재했다고 믿지 않았는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 개념은 후에 있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성부 고난설’에 반대했다. 그런데 그는 삼위일체 개념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경륜(economy), 위격, 그리고 본질’ 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믿음의 규율’을 언급했는데 이는 교회의 권위 있는 전통을 의미했다.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전통이 아니라 바로 ‘말씀’이라고 했다.”


*키프리안
키프리안(약 210-258)은 터툴리안처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출신으로 그리스어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한 교부다. 카르타고는 지도에서 보다시피 로마와 매우 근접해 있는 도시다.



키프리안은 카르타고 출신으로서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다.”
“키프리안은 약 210년에 카르타고에서 이교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카에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이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웅변가, 즉 수사학자로서 법률을 배웠다. 그 후 그는 카르타고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일락과 명예로 만족하지 못한 키프리안은 245년 카르타고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제인 카에실리아누스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개종한 그는 곧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사제로 수임을 받았다. 249년 초 그는 도나투스를 이어 카르타고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감독직을 9년 동안 유지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250년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의 핍박으로 인해 카르타고를 떠나 인근 지역에 피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는 교회의 감독들과 지도자들에게 명하여 황제에게 희생제를 드리라고 명을 내렸다. 충성을 맹세하라고 로마 군사들은 마을을 다니면서 황제령을 시행했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도주했다. 핍박의 시기 다음 해인 251년 봄, 카르타고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배교자들’(Lapsi, 랍시) 문제를 직면하게 됐다.”


배교자들의 문제에 있어 키프리안은 어려움을 직면했다. 왜냐하면 겁쟁이처럼 도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로마 감독에게 고발했다.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키프리안에게 글을 써서 그를 비난했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자신의 도주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신적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도덕성과 관련되어 일어났다기보다는 배교자들에 관련되어 일어난 것이다.”


이에 키프리안이 도주했던 시기 동안 장로 노바투스라는 사람이 임명한 펠리키시무스 집사는 키프리안의 제안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래서 키프리안은 그를 파직하고 출교를 명했다. 그러자 펠리키시무스는 노바투스의 지원을 받고 반대파들을 이끌면서 분파를 자행했다.


그러자 251년 키프리안은 『배교자들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고 카르타고에서 감독자들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거론했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펠리키시무스를 정죄하고 키프리안의 권면을 채택했다. 그러자 펠리키시무스를 따르는 자들은 키프리안을 반대하고 감독을 선출하여 분파를 또 이끌었다. 더욱이 로마 감독까지 선출해 점차 노바티안을 따르는 자들의 분파는 심각해져 갔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교인들의 도덕성에 관한 글들을 써서 권면하며 분파자들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했다.”


*16세기에 그려진 ‘역병’에 관한 그림
“252년과 254년 간 역병이 카르타고에 몰아쳤다. 이 역병은 전 로마제국을 15년 동안 휩쓸었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255년 다시금 키프리안은 이단자들이 주재한 세례가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른 것인지에 관한 문제로 인해 로마감독 스테판과 논쟁을 벌였다. 스테판은 이단자들의 세례도 타당하다고 했다. 그리스도 또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합법적으로 행했다면 그 세례가 정당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에 반해 키프리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회개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단자들의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논쟁이 한창일 때, 257년 8월 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안의 핍박으로 인해 논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스테판과 그의 후계자가 순교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핍박에서 키프리안은 담대하게 자신의 양떼들과 함께 맞섰다. 그러자 그는 쿠루비스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일 년 후 258년 그는 새로운 총독에 의해 검거되었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여 참수형을 당했다.”
“키프리안은 앞서 배웠던 터툴리안의 작품들을 탐독한 자였다. 그렇지만 터툴리안과는 다른 온건하고 친절한 성품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터툴리안이 열정적이었다면, 키프리안은 참을성 있고 균형 잡힌 인물이었다.”


“키프리안의 문학적 작품들은 자신의 온순한 성품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었다. 터툴리안보다는 라틴어 실력이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정확하고 실수가 없는 자였다. 자신의 서신들 외에도 13권의 권위 있는 작품들을 남겼다. 변증적인 작품들, 도덕적인 작품들, 그리고 교회적인 작품들 등이다.


“먼저 변증적 작품들은 보면, 『도나투스에게』는 자신이 개종한 후 쓴 작품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친구들에게 끼치는 도덕적 영향과 신적 은혜로 말미암는 자기 굴복에 관해 설명한다. 『데메트리우스에게』는 위험한 이교도 데메트리우스에게 보내는 글로 기독교 변증서라 할 수 있다. 『우상들은 신들이 아니다』는 터툴리안의 『변증학』과 유사한 작품으로 약 250년에 쓴 작품이다. 3권으로 구성된 『퀴리눔에게 보내는 증거들』은 신ㆍ구약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면서 1권에서 유대 율법의 성격을 설명하고, 2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성으로 드러난 예언들의 성취를 설명하고, 그리고 3권에서 신앙과 기독교인들의 임무와 덕행을 설명하고 있다. 『행복에 관하여』는 257년에 쓴 것으로 핍박 가운데 기독교인의 임무와 연관된 성경 본문을 소개하고 있다.”

“두 번째 그의 작품은 도덕적다. 『배교자들에 관하여』와 『보편교회의 단일성에 관하여』에서 기독교의 도덕과 기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251년 종교회의에서 읽힌 글이다. 『배교자들에 관하여』를 쓴 목적은 데시우스의 핍박 시기에 있었던 배교자들이 교회에 화해되기 전에 중요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보편교회의 단일성에 관하여』는 오직 참된 하나의 교회가 이 세상에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교회의 단일성은 신실한 자들의 공동체로서 감독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분파는 심각한 범죄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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