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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by 【고동엽】 2021. 10. 29.

 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우리들교회/김양재 목사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200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일년을 잘 지켜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들이 특권을 누리고 화평을 누리기 원하는데 마지막은 또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셨사오니 마지막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이 시간 찾아오셔서 말씀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주고 받으셨습니까.
연말연시에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또 우리들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지난 주 신문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보았습니다.
켄터키 넉스빌에 있는 미들브룩 연합감리교회 프랭크 포토 담임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50세 된 어느 성도가 재혼을 해서 아내와 신혼 여행을 떠났는데 한 곳의 백화점에서 아내가 진열대의 진주 목걸이를 보면서 ''너무 예뻐요. 값이 무척 비싸겠네요. 그래도 누가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진열했겠죠.''하고 감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혼 생활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고 6개월밖에 못 살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혼 10주년을 맞아서 주례 목사님을 초청해 예배를 드리는데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선물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선물은 10년 전에 아내가 갖고 싶어했던 진주 목걸이였습니다.

아내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비싼 것을 어떻게 샀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에게 이 선물을 하기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내가 좋아하던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목마를 때 마시는 콜라도 안 마시고 한 푼, 한 푼 저금을 했소.''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고 했을 때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그 아내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기쁨과 평안이라는 말이 저에게 들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고, 부부끼리도 서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인가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신다고 오늘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선물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선물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사단이 우리 자존감을 짓밟아서 자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 권사에게 주어지는 선물도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소유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꿔놓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가진 것은 쉽게 없어지지만 존재 자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부모된 모든 사람의 마음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합니다.
성탄에, 생일에 물건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선물을 줄 수만 있다면 생명이라도 버리겠습니다. 정말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바뀌는, 업그레이드되는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중고등부 열린 예배를 하는데 여러분이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까.
이 근처에 사는 분들에게 이런 선물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특권을 선물을 주고자 하실까요.

첫 번째,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선물입니다.

1절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만 얻지 못합니다.
먼저 화평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바른 진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건강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멋있는 사랑을 만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것은 죄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 죄에 대해서 지겹게 들었습니다. 인생은 100%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의롭다 할 인생이 없고... 그 예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었습니다. 허물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이제 그 선물을 주신 분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화평을 누리자"는 권고가 아니라 선포입니다. 원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특권을 왜 못 누리는가 말입니다. 못 누리고 있으니까 "누리자"고 선포를 했겠죠.

화평은 하나님과 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분쟁이 없는 어떤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선물을 아무리 주고받아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평은 권세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일대일의 관계에서 성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바른 지식을 알고 있다해도 알아듣지 못할 상대방에게 교훈을 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바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 절대 의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한 며느리 다말을 보고 시아버지인 유다가 "그는 나보다 옳도다"했습니다. 그것을 ''의-righteousness''로 표현했습니다.(창38장) 이것이 어떻게 도덕적인 개념이겠습니까.

히브리어로 ''샬롬''의 역어이고 헬라어로 ''에이레넨''이라고 하는 "화평"은
전쟁이 없는, 전쟁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보상과 회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빚진 상태를 청산하고 긴장 관계가 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믿으면서도 이런 화평이 없습니까. 긴장 관계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빚진 것부터 갚으십시오. 회복할 것 있으면 빨리 회복하시고, 보상할 것 있으면 빨리 보상하십시오.

우리들교회의 비전이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는 교회입니다.
누리는 것 중에 화평을 누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가장 먼저 빌어주신 말씀도 "평강이 있을지어다" 였습니다.
돈이 있고, 자식이 잘나고, 건강하고, 용모가 빼어나도 평강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성탄 예배 때 정몽준 캠프의 대변인이었던 김행씨 간증을 들려드렸습니다.
지난 대선 때 후보지지 철회 일로 세계 언론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신문기자에 대변인으로 그렇게 잘하는 글과 말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느끼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정몽준 후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너무 미워하다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25년이나 안 만나던 어머니를 찾아가서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평강을 누리려면 이렇게 빨리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강을 누리려면 관계에서 자기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일대일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아내 자리, 남편 자리, 자식 자리, 사장 자리, 사원자리.. 자기 자리를 알아야 어떻게 하면 평강이 이루어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상대방의 수준과 학력과 성격으로 낮아지면서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섬기는 것이 성실입니다. 화평의 근거입니다.

2절 말씀은 이것이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는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절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과거형입니다.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간 사람들은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즐거워한다"는 원래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자랑할 만큼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아내 자리, 남편 자리.... 각각 제 자리로 찾아가는 것, 이것이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나의 영광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역대 뉴욕시장 중에서 1934년부터 45년까지 재직하며 가장 훌륭한 시장이라는 평을 들었던 피에렐로 라가디아씨가 판사로 재직할 때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먹다 기소된 노인을 재판하는 자리였습니다. 라가디아는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벌금 10달러 형(刑)에 해당합니다. 그 10달러는 제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는데 나는 그 동안 그것도 모른 채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벌금으로 제가 10달러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중절모를 벗어 재판장 서기에게 주면서
''여기에 계신 여러분 중에서 나처럼 너무 잘 먹은 것에 대해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금 47달러를 손에 쥐고 기소되었던 법정을 눈물을 흘리며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공부도, 결혼도, 이제 목적이 달라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즐거워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균 수명이 이미 희수(喜壽-77세)를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20년이면 망구(望九-81세)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고령화되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치매인데 어느 신문에서 치매 안 걸리는 방법을 보도했습니다. 하루 2시간씩 책을 읽어라, 의도적으로 왼발과 왼손을 많이 사용해라, 웃어라 등등.. 여러 가르침이 있는데 가장 기억나는 것이 ''가능하면 자주 감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제임스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 보도에서는 감동하기 위해서 극장과 공연장을 자주 찾으라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감동하면 어디에 와야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목장 모임에서 누리는 감동을 어디에 비교하겠습니까.
우리는 축제로 교회에 오기 때문에 이미 즐거움과 감동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전공하고, 평생 피아노 치느라 애썼는데 연주회 가서 울어본 적이 없고, 미술 전람회에서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심방을 하면서 또 어찌나 웃는지 다들 코미디언이 따로 없습니다. 왜 웃는 지도 모르고 그냥 말 한 마디만 해도 웃습니다. 큐티를 하면서 우리끼리 통하는 ''방언''이 있고, 성경을 읊어대면서 딱 던지는 말들이 그렇게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줍니다.

참 평안은 의롭게 살기 위해 흘리는 눈물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 평안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자꾸 합리화시키며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룬 것으로 속입니다.

진리를 온 마음으로 생각하면 거기에 불안이 있습니다. 심각함이 있습니다.
복음이 바르게 전파돼서 100% 죄인임을 지적 받으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면 적용이 힘들고 고민스럽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거룩함은 힘들어합니다.
지옥 가는 건 싫어서 용서 구하는 일은 너무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열광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거룩을 이루어 가는 일에 소홀하기 때문에 참 화평을 못 누립니다.

우리 믿음의 수준이 말씀으로 올라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파산을 할 지경이고, 남편이 부정맥이고, 카드 빚을 지고.... 그런데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는가 할 수도 있습니다. 빚이 많은데 빚 안 갚고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게 옳으냐 그르냐.... 적용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만 부르면 평안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배는 열심이어도 그런 일에 적용을 못하면 평안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거룩을 열심히 이루어가기 때문에 화평이 아니고,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거룩을 이루어가면서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자마자, 또는 믿은 후로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3~4절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의 의롭다 함, 화평, 즐거움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체험인 신유, 환상, 방언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것만 대단하다고 합니다.
성경 지식,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주관적입니다. 내 체험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으로 하나님께서 양육시켜 가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환난이 올수록 내 믿음이 객관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이기적이거나, 이해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나를 양육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복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도 주시고, 환난도 주시고, 가난도 주시고, 박해도 주십니다.

육체와 물질과 정신의 고통은 모두 영적 시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환난은 누르다, 짜내다, 분쇄하다 그런 뜻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필수 코스입니다.
바울 사도가 275명과 함께 행선하다 유라굴로 광풍의 환난을 만났습니다. 배가 파손되고, 기구, 재물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 없이 로마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환난에는 인내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는 무엇 무엇 밑에서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밑에서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것은 시어머니 밑에서 극심한 시집살이를 하고 남편 밑에서 힘든 경험을 당해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성도를 섬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날마다 합니다.

온유와 화평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확고 부동함으로 끝까지 버티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연단은 그런 인내를 가지면 인정받는 품질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인정받은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인정받은 인격에 예수 안에서 항상 좋은 것만 바라고 기대하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5절 -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이 강해 보일 때도 있고, 약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했다, 미워했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환난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만취한 상태로 음주운전을 한 차에 치어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 자매의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그 자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미팅에서 만나야 될 의대생을 스물 세살 처녀가 발가벗고 병원에서 만나는 환난을 겪으면서 스무살의 나이를 없애버렸다고, 세살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올바른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선이의 어머니는 지선이가 아프고 고통 당할 때 부둥켜안고 울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엄마가 감정적이 되면 아이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수술에 들어가면서 지선이는 다른 아무 것도 안 보고 엄마 눈이 흔들리는가만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에 힘주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 안 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열 세 번 수술에 한 번도 울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힘이었고 계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울어야 할 때와 안 울어야 할 때를 이렇게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가해자가 떠오르지 않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상을 당해서 힘이든데 가해자를 떠올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내 힘으로 못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선이가 하루, 하루를 눈물로 시작하고 모든 거울을 다 치웠는데 숟가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살려놓았으면 대책이 있으실 것 아니냐''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화상을 알기나 하느냐고 따졌다는 겁니다.

제가 전에 조그만 화상을 입고 화상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사포(sand-paper)로 문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선이가 전신화상으로 55% 이상 피부가 죽었기 때문에, 온 몸을 날마다 소독하고 거즈를 붙이면서 당하는 고통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습니다. 염증이 나면 죽기 때문에 날마다 그렇게 해줘야 하는데 정말 예수님이 화상을 당해봤느냐는 말이 나올 것 같습니다.

스물 세살의 여대생 마음으로는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으면서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좀 성숙했을 때는 완벽주의가 생깁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한 것까지는 좋은데 화평이 깨질 정도로 예민하게 되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안 고쳐주신 질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질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안질인지, 간질인지 모르지만 안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히고, 간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설교하다가 갑자기 발작을 하면서 쓰러지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설교를 한다면 그 모습이 어땠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안 고쳐주셨습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편두통이 심해서 일주일에 두 세 번 편두통이 발작하면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졸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이고, 설교자인데 그 분이 화평을 누렸겠습니까. 그러니 날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언행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죄감과 완벽주의 때문에 예수 믿고 나서도, 의롭다 함을 얻고 나서도 화평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우리는 100% 죄인입니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과 100% 죄인인 인생이 만나는데 어떻게 날마다 공포와 두려움과 갈등이 없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보겠습니다.

6절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연약할 때", 8절 "죄인 되었을 때", 10절 "원수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나의 많은 정죄감과 나의 불완전한 모습,
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화평이 깨어집니다.

그 때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보라는 겁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화평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를 의롭다 칭해주신 근거도 예수님이고, 화평의 근거도 예수님입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갈 일이 쉬지 않고 엄습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어떻게 해야될까요.
오늘 바라봤으면 내일은 안 바라봐도 될까요.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쉬지 않고 드려져야 되고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봐야 합니다. 순간 순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나눔 예배, 수요 예배... 이 모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굉장히 시간을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한 주일 동안 나를 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얼마나 감정의 낭비가 줄어드는지 아십니까. 훨씬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줄여주시는 주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 순간 나를 보게 됩니다.
말 한 마디하고도 금새 나를 봅니다. 내가 말 실수를 했어, 쓸데없는 말을 했어, 말을 해야 될 때인데 못했어, 거긴 괜히 갔어.... 이러면서 나를 보기 때문에 이상한 데 가서는 교만하고 이상한 데 가서는 열등감이 듭니다. 나를 보기 때문에 교만과 열등감이 교대, 교대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화평이 깨집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자신도 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은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되었다 하는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처럼 그렇게 설교를 잘 해도 ''나''를 보는 겁니다. 다 똑같습니다. 금새 믿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나''를 보기 때문에 화평이 깨집니다. 나는 100%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7~8절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지선 자매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자기 고통을 천 번, 만 번이라도 대신해줄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동생을 구해준 오빠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금식해주는 교회 분의 사랑을 광야 같은 투병생활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픈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화상이 사랑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백 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내 삶이고 얼굴이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이만하면 꽤 귀엽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지선 자매의 화상 전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선이는 대학교 2학년 때의 그 아름다운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용모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체격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지선이는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오픈하고 나서 ''괜히 오픈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깁니다.

지선이는 서럽고 힘든 시절 다 지나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너의 찢김과 찔림과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알고 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아시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선이가 병들고 약한 자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안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를 보기 때문에 용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못 보던 거울도 이제 볼 수 있게 되고, 거울을 보면서 ''안녕 이지선!'' 하고 인사하면서 지나간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 7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7개월, 너무 아픈 동안에 자기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55%의 죽은 피부 대신에 나머지 피부를 가져다가 이식을 하고 붙이는데 스테플러로 찍는 것처럼 갖다 붙이니까 여기 저기 땡기고, 쭈글쭈글 해집니다.

화상을 당하고 초기에 수술을 하러 일본에 갔는데 병원에서 어떤 꼬마가 지선이를 보더니 ''엄마, 괴물이야, 괴물!''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는 걸 듣고 지선이는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놓으셨으면 사람답게 고쳐주세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 후 수술을 하고 교회에 가게 됐는데, 교회에 간 첫 주에 식당에서 어떤 아이가 지선이를 보더니 ''엄마, 저기 이상한 <사람>있어.'' 하더랍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된 것 때문에 너무 감사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지선 자매가 감사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그 즉시, 즉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선이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실 것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도 자기의 완벽주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기로 했더니 놀라운 평안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목사님도 해결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아주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껴안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3주 후에 편두통이 사라지고 그 이후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 아플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보다 수준이 훨씬 높아서 평생 안 고쳐주셨습니다.
고쳐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고쳐주지 않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셔야 합니다.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나를 보지 말고
"모든 죄를 사하셨으니"(골2:13)

순간 순간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의 피, 보혈의 공로만 의지한다면
9절에도 "구원을 얻을 것이고", 10절에도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미래형이지만 로마서 8장 24절에 가면 "구원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끊임없는 갈등 구조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화평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나의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가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지만 또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화평이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보혈을 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나를 쳐다 볼 때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기도 제목을 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됐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선물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올바른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고도 정죄감과 나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망할 때 나를 보지 말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이 보혈의 공로만 즉시 즉시 바라보게 해달라고
그래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우리가 화평을 누리자 했는데 왜 화평을 못 누리는가를 알았습니다. 주님,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바라볼 때가 많은 것을 고백합니다. 열등감과 교만이 날마다 오갑니다. 나는 되었는 줄 알고 거기에서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해서 절망했습니다.

주님, 참으로 화평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100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환난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올바른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서, 부끄럽게 되지 않는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지금 환난을 주셨사오니 누르고, 분쇄하고, 짜내는 고통을 통해서 저희들이 올바른 소망을 이루어가기 원합니다.

주님,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볼 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주님의 공로를 인하여,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을 오늘도 고백합니다.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쳐다보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나는 100% 죄인입니다. 즉시, 즉시 주님만 쳐다보게 도와주옵소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 예수님만 바라보게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렇게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찾아가 주옵소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화평을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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