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로마서 주석(1549)에 나타난 성경해석방법
1539년에 출간 한 칼빈의 로마서 주석은 기독교강요의 제2판의 전체 구조와 내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이었다. 기독교강요의 2판의 체제가 이후의 여러 번의 수정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된 것은 로마서 주석이 칼빈의 조직신학적 체계를 지속적으로 규정한 중요한 저작임을 말해 준다. 이 글은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 나타난 성경해석학의 몇가지 측면들을 관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전체 요지는 칼빈이 전통, 당시대의 교회의 상황과 반응하면서 성경 본문의 원래의 의미를 파악한 후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종합적 신학을 성경강해-주석을 통해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I. 해석학적 전통
칼빈의 성경해석을 규정하는 주요한 축은 해석학적 전통, 자기의 시대의 교회상황, 그리고 성경 텍스트 등 세가지라 할 수 있겠다. 우선 해석학적 전통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를 살펴보자. 그는 기독교회, 특히 교부들의 성경해석 뿐 아니라 서양 고대 고전의 학자들의 저작들을 수용 혹은 비판하였다.
일반 고전 (헬라어 혹은 라틴어 저작자)은 주로 성경 헬라어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암모니우스(Ammonius 1:30, p. 81), "Lain Authors (1:32; 82), Ovid (23, p. 106), Cicero (2:8, p. 92) 등을 인용하였다. 칼빈은 단순히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 인간관에 대한 고전 철학자들의 견해도 놀랍게도 수용한다. 예를 들어 이방인들의 양심이 그들에게는 율법과 같은 기능을 한다는 2:14을 해석하며, 그 실례로서 그리이스 사상가들은 "인간의 마음에 자연적으로 심겨진 전제 (preconceptions, prolhyeis )"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거론하였다. (2:14 p. 97)
물론 그는 일반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성경의 가르침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철학자들이 인간본성에 관해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깊게" 인간본성에 대해 철학적 사색을 한다 (philosophizes)" 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7:15, p. 263). 성경의 깊은 통찰력을 경험한 칼빈은 "기독교철학의 기본공리"는 "인간에게부터 혹은 인간 안에는 어떤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고 천명하며 기독교철학이라는 용어까지 쓴다 (3:4, p. 116).
그러나 칼빈에게서 가장 중요한 해석의 전통은 교회의 교부들이었다. Ambrose (p. 47), 크리스토솜, 어거스틴은 세속적 학문전통에 대한 칼빈의 비판을 돕는 역할도 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자비에 대한 개념을 해석할 때, 어거스틴이 스토아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자비는 기독교적 덕목이라 주장한 것에서 도움을 받았다 (1:32; p. 82).
그러나 칼빈은 전통을 그때로 맹종하는 대신, 성경의 본문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따라 전통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교정하였다. 이삭을 임신할 때, 사라만 불임이었고 아브라함은 생식능력이 있었다고 어거스틴의 건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칼빈은 과감히 말했다 (4:19, p. 178). 특히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따르기 보다는 영해 (알레고리한 해석)을 많이 했던 오리겐은 자주 비판을 받는다 (5:15, p. 205) "율법이 신령하다"는 구절을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Scripture is not to be understood literally)" 라고 해석한 오리겐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 성경 자체의 문법적, 문자적 의미를 먼저 찾으려고 노력한 종교개혁가들의 성경해석의 원리를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7:14, 260)
II. 자기 시대의 상황
칼빈이 전통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다양한 성경해석과 교회의 위기 및 필요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한 칼빈의 과제였음은 물론이다. 우선 그 당시에 중세의 전통에 서 있는 스콜라 신학, 특히 파리의 대학에서 가르쳐지는 그런 스콜라철학 (이것을 그는 소르본느의 철학이라고 말한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단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잘못되었다는 정치적 판단에 좌우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해석의 구체적 잘못을 겨냥한 것이었다. 때문에 스콜라 신학자들의 옳은 부분은 공정하게 평가해 주었다.
3:20에 나오는 "율법을 지킴"을 의식법의 준수에 국한되는 것으로 해석한 Chrysostom, Origen, 그리고 Jerome을 비판하면서 칼빈은 오히려 "행위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의해 공로가 생겨난다는 일반원칙 (the common maxim, that works have no intrinsic worthiness, but beome meritorious by covenant" 을 견지한 스콜라 신학자들과 생각을 같이 했다. 물론 칼빈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행위는 사악함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보지 못한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3:20, P. 131).
칼빈에게 가장 많은 대화의 상대가 된 것은 먼저 로마서 주석을 발행한 에라스무스였고, 특히역시 그보다 먼저 로마서 주석을 간행한 부서 (Bucer) 와 동지적으로 견해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칼빈에게 가장 중요한 성경해석의 현실적 맥락은 말할 나위없이 로마교회였다. 칭의와 믿음이 그리스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의 중개도 있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 젊은 개혁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3:21, p. 136). 한편으로는 구원받은 후 기독교인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완전주의자 (Purist Catharorum) 어거스틴의 피반을 받은 - 의 견해를 부활하려는 당대의 "소요세력 (turbulent spirits)" 의 잘못을 지적하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악과 지속적으로 싸워야 함을 로마서가 가르친다고 주장하였다. (7:25, pp. 274-5). 아울러 칼빈은 한편으로는 로마교회의 율법주의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이 필요없다고 주장한 방종주의자들도 비판하였다.
이처럼 칼빈이 과거의 성경해석의 전통과 자기 시대의 교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를 한 것이 그의 성경해석의 객관성을 흐트렸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저의 생각에는 과거와 현재의 공동체와의 대화는 성경의 원래의 의미를 탐사해 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쓰여진 목적은 과거의 문서로서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오늘날의 문제에 요구에 대해서 생생하게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읽히기 위한 것이다. 해석자의 독창적 해석능력과 과거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성경이 쓰여지기 까지의 과정에만 편집증에 빠진 환자처럼 매어달리는 현대의 해석학보다 칼빈의 해석학이 훨씬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III. Text
1. 성경 사본
이미 칼빈의 오리겐 비판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칼빈은 성경의 텍스트로부터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발견하고 텍스트에서 교훈을 끌어내는 일에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16세기의 인문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 도움을 받기도 하였겠지만, 칼빈은 성경사본 중 더 믿을 수 있는 사본을 따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사본이 다른 해석에 반대되고, 또 이 사본의 의미가 부적적한 것이 아니므로 나는 기존의 본문이해를 따른다 (but as the greater part of the manuscripts is opposed to it, and the sense is not unsuitable, I retain the old reading)" (2:17, p. 101) 는 표현은 그의 사본이해의 신중성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약성경에 인용된 구절이 구약성경의 어느 부분인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판단을 제시하였다. (2:21, p. 105; 2:24, p. 107). 칼빈은 히브리 구약성경과 헬라어 구약성경 (LXX)를 동시에 참고하며 3:4는 Ps 116:1의 헬라어 판을 인용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사도바울이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기 보다는 그 뜻을 전달하며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는 관찰을 제시하였다 (3:4, p. 117).
2. 문법적 수사적 관심
다양한 사본을 살핀 칼빈은 로라서 헬라어 성경의 문법적 뜻과 수사학을 관찰함으로써 분본의 의미를 찾으려 하였다. 그는 원문의 문법을 관찰하며 본문을 해석하였을 뿐 아니라(3:4, p. 117) 헬라어 단어에 상응하는 히브리 단어의 뜻을 찾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2:12, p. 85). 또한 성경의 뜻을 해석하는데 최고의 권위는 성경 그 자체라는 생각으로 다른 성경구절을 빈번히 참조하였다 (예를 들어 3:10, p. 125).
우리는 칼빈이 본문의 뜻에 대한 영적 상징적 해석보다는 가급적 자구적 의미를 선호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1, p. 84) 그러나 자구적 의미를 선호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징을 그 상징이 담고 있는 원래적 의미를 찾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는 은유법은 은유법으로(smilitude 6:5, p. 223), 제유법은 제유법으로 (Synecdoche, 4:9, p. 163), 환치법은 환치법으로 (hypallage, 2:27, p. 111) 바로 읽었다.
로마서의 레토릭과 관련하여 우리는 로마서의 문맥과 수사법에 대한 칼빈의 예리한 시각을 관찰할 수 있다. 칼빈은 바울이 온건한 표현에서 강력한 표현으로 옮겨가는 부분 (1:12, p. 57), 증거를 제시한 후에 강하게 비반하는 일반적인 웅변의 기법과는 달리 로마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의존하여 먼저 강한 도전을 제기하는 점 (2:3, p. 86)을 지적하였다. 그는 "from the less to the greater" 라는 수사학 기법을 언급하기도 한다. (2:24, p. 107).
그러나 바울의 수사학에 대한 관심은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는 보조적인 정도의 관심이었지 성경의 수사학을 본격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아니었다. 칼빈은 2:6-10의 흐름이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을 포착하고, "우리는 다른 글들에서 달변을 배워야 하며 여기서는 평이한 스타일이 담고 있는 영적인 지혜를 찾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2:6-11, p. 91). 칼빈이 수사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서의 문맥의 흐름을 통해 본문의 진의를 찾으려는 진지함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칼빈은 성경 본문의 한 의미를 파악함에서는 한 부분이 아니라 보다 큰 구절의 맥락을 관찰해야 한다는 부서의 관점을 동의하며 인용하기도 한다 (4:4, p. 158). 문맥에 대한 관심 때문에 칼빈은 율법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표현이 실은 바울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논쟁적 맥락에서 반대자의 잘못된 견해를 인용한 것이라는 지적을 할 수 있었다 (7:13, p. 258). 또한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맥락에 따라 4개의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7:22, p. 269).
3. 신학적 메시지
본분의 문법적, 수사적 관찰을 한 후 도달하는 칼빈의 최정적 관심은 신학적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칼빈은 신학적 메시지에 대한 관심 때문에 2장의 해석에서는 본문에서 "위선"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본문의 중요한 주제가 유대인의 위선에 관한 것임을 지적할 수 있었다 (2:1; 83). 신학적 메시지를 찾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성경의 여러 부분 특히 상충되어 보이는 다른 본문과 대조하는 것이었다. 믿음과 행위의 관련에 대해,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조화롭게 연결시키는 칼빈의 해석은 흥미롭다. 칼빈은 야고보서의 주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의롭게 된 것을 사람들 앞에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관한 것이기에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상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3:28, p. 149. 한편, 6:4, p. 221-2도 은혜를 통한 구원과 인간의 거룩한 삶의 책임을 다루고 있다.). 또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로마서는 육의 죽음과 성령의 지배를 말하지만, 고후 4장은 십자가를 짐과 이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에 연결됨을 밝힌다. (고후 4장)
신학적 큰 관심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칼빈의 장점은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발전하였음을 설명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4:11, p. 166). 그래서 자신의 주석을 쓰면서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기독교강요를 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3:28, p. 149). 주석에 기초하여 조직신학적 가르침을 구성하고, 또 조직신학적 큰 맥락에서 성경을 주석하는 칼빈의 신학방법은 신학이 작은 전문분야로 파편화되어가는 현대의 신학경향을 교정하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으로 생각된다.
4. 겸손한 자세
칼빈의 성경해석에서 아주 인상적인 것은 그의 인격적 겸손이다. 아주 종종 그는 해석 한 본문에 대한 두 가지 이상의 해석이 가능함을 제시하면서 자신은 어떤 견해를 더 지지하는 지를 언급한다: 평화 (1:7, p. 51), 위로 (1:12, p. 58), 의 (1:17, pp. 64-5), 하나님의 의 (3:21, pp. 134-5), 유대인이라는 용어의 기원 (2:17 p. 102-3).
칼빈의 겸손함은 정직함과 관련있지 않나 생각된다. 한 구절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고 두 개 이상의 해석이 타당성이 있을 때, 자신이 판단하기에 더 설득력있는 해석을 제시하는 것은 지적 정직함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의 성경해석들과 주석, 현대학자들과의 칼빈의 가장 큰 차이는 겸손과 정직함에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현대의 많은 성경신학은 기존 견해와 다른 자신의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고, 가능한 확실히 주장하는 것을 학문의 성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성경 자체의 명료함에 그토록 확신을 가졌던 칼빈이지만 그는 성경이 가진 객관적 명료함과 자신의 해석이 가질 수 있는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의 지적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다양한 견해들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진 칼빈의 자세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 같다.
실은 성경해석을 교회의 해석사적 전통과 일반 서양 고전의 전통, 그리고 자신의 시대의 교회의 상황과 연결시키는 통전적 자세도 역사의 한 지점을 이어가는 성도로서의 겸허함을 가능케 하였던 듯 하다. 과거의 성도들의 해석사적 전통에 귀기울임은 시대를 뛰어넘는 성도의 교통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현실의 교회적 상황에 대한 관심은 교회의 영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섬김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전통에서 별 관심없고 현실의 교회의 아픔에도 관심없고, 성경 자체의 의미에도 적은 관심을 두는 현대의 성경신학은 깊이 반성하며, 400여년 전의 칼빈을 선생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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