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율법과 복음이해
유정우 평택대학교
I. 서 론
율법과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성을 가진 문제이다. 율법은 칭의의 동기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규범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칼빈이 “율법의 제 삼 용법”을 강조하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졌기 때문에 율법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써 성화와 관계되는 칼빈의 율법이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의 동기와 함께 율법의 고소하는 기능을 등한히 하였는가? 이 점에서 칼빈은 오해를 받기도 한다. 율법과 복음의 주제에서 칼빈과 바울은 반대되는가?
이를테면, 칼빈은 “교리에 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율법의 권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영원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포함하는 하나님의 의가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은 끊임없고 일치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다시 예레미야 31:31-34절에서 “새 언약”을 주석하면서, “새롭게 된 것은 틀림없이 형식을 언급하는 것이고,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본질에 의하여 나는 그 교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에서 율법이 포함한 것 외에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칼빈에 의하면 율법은 성경의 핵심이다. 그는 제사장들, 예언자들, 그리고 시편기자들 뿐만 아니라, 사도들 또한 율법의 해석자 또는 해설자로 이해한다.칼빈은 그리스도의 역할까지도 단순히 율법의 “충실한 해석자”로 이해한다.
그런가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일어난 큰 변화를 기린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왔도다.”(고후 5:17) 다시,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우리가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했기 때문이다.”(롬 8:2)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롬 6:14)이라고 선포한다.
칼빈은 율법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주로 율법의 제 3 용법(중생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규범)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에게 그것은 “중요한 용법”이다. 율법의 제 1 용법 그리고 제 2 용법에 대하여 칼빈은 루터와 완전히 일치하여도, 루터란 학자들은 칼빈이 율법의 고소하는 용법(칼빈에게 제 2 용법은 루터에게 제1 용법)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칼빈은 정말 율법의 고소하는 기능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가?
II. 칼빈의 “율법”과 “복음”이란 말의 이해.
칼빈은 넓은 개념으로 “율법”이란 말을 사용한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 “이 율법에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
칼빈에게 “율법”이란 말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 말의 여러 가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나는 ‘율법’이란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법칙인 십계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전하여 준 종교의 형식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에게 “율법”이란 말은 1)모세의 전체 종교형식2)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계시된 도덕법(주로 십계명) 및 예수께서요약하신 것3) 여러 가지 민법과 재판법과 의식법이다.이 가운데 “도덕법”은 “의의 진정하고 영원한 원칙”이며, 가장 중요하다. 도덕법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3가지 용법으로 설명된다. 칼빈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율법의 제 3 용법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러나 루터는 율법의 정죄하는 용법을 가장 주요시한다.(루터의 갈 3:19절 주석 참고)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정죄 기능을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대하여 “부수적 (附髓的)”인 것으로 이해한다.율법은 그리스도와 관련될 때에 한해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지론이다.
분명히 “도덕법”인 십계명과 여러 가지 의식의 법들과 재판법의 구별은 칼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왜냐하면 후자의 법의 목적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을 준수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도덕법에는 “하나님이 간결하지만 포괄적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의 법칙을 요약하였다.”이 구별은 어떻게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는가를 이해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에 의하여 이스라엘에게 준 종교의 형식”인 율법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2권 9장-11장에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를 근본적으로 옛 언약, 새 언약으로 언급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 2권 9장 제목 “그리스도는 율법아래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졌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에서, 우리는 옛 언약(구약)을 율법으로 새 언약(신약)을 복음으로 대체시킬 수 있다. 칼빈에게 넓은 의미에서 “복음”이란 말은 “하나님이 구약의 족장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자비나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에 대한 증거를 포함”한다. 그러나 더 기술적인 개념에서 “복음”이란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은혜의 선포를 언급한다.”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포괄적 용어이고, 옛 언약의 전체 시대 또는 경륜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율법”이란 말은 주로 십계명이나 법전을 주로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광범위한 개념의 율법과 복음은 그 둘의 본질이 동일하다. 다만 율법과 복음은 다루는 형식만 다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본질과 실체에서 너무나 같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 둘은 하나이다. 그 둘은 처리하는 형식에서 다르다.”근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은혜의 언약이다. 옛, 새 언약의 차이는 이 하나의 언약이 처리되는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강요에서 이 주제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친숙하다. 인정되지 않는 것(특히 칼빈의 율법과 복음의 이해을 비판하는 자들에 의해서)이 율법과 복음(두 언약)의 형식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좁은 의미의 율법으로서만 율법과 복음에 반대되는 반대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경우는 갈라디아서 3장 19절이다. 거기서 바울은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반대로 위치시킨다. 그러한 경우에 칼빈은 율법의 고소하고 죽이는 기능, 율법의 저주하고, 위협하는 기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좁은 의미의 율법의 이러한 측면은 강요 2권 7장에서 취급되고, 바울 서신과 관계된 본문의 주석에서 칼빈은 충분하게 토론한다. 이 점에서 강조와 구별을 제외하고 칼빈은 루터와 다르지 않다. 이를 테면 칼빈은 자주 지적하기를, 바울과 다른 성경기자들이 좁은 의미에서 율법을 복음에 반대되는 것으로 언급할 경우, 율법은 은혜의 약속으로부터 분리되고, “독특한 직무, 힘, 목적”의 관점에서만 고려된다.
복음에 반대 명제인 율법은 전체 율법( tota lex)이 아니고, 단순한 율법 (the bare law; nuda lex)이다. 그러한 율법은 살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단순한 문자이다. 그 율법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위치하게 하는 무서운 요구일 뿐이다.이러한 율법은 다만 복음의 반대 명제로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믿음의 의에 대칭적으로 반대되는 의의 형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3:21-31절과 갈라디아서 3:10절에서, “바르게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반대로 위치시킨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3개의 주서(朱書)아래 이해되어야 한다. 즉 1. 본질에서 일치. 2. 형식에서 차이. 3. 의문(儀文)으로써 율법과 영(靈)으로써 복음의 반대 명제이다.
III.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과 복음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토의하는 데 있어서, 그에 의해 주어진 율법에 대한 이중적 정의를 유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시간에 구약 -신약 또는 옛 언약- 새 언약은 칼빈에게 있어 율법-복음에 상응한다. 이 포괄적 의미에서 율법은 대체로 옛 언약에 일치한다. 이 경우에 언약들(율법과 복음)의 본질은 동일하다. 처리하는 형식만 다르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반 명제에 대하여 말할 때, 이렇게 율법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때에 그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좁은” 의미에서 율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세의 독특한 직분 또는 사역을 의미하는데, 곧 그 때의 율법은 교훈들(precepts)과 보상들을 가진 “단순한 율법”이다. 또는 칼빈으로부터 다른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그것이 복음에 반대되는 율법이다.이 구별을 마음에 유념하면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의 3가지 주요한 주장을 주목한다.
1. 본질에서 일치
본질의 일치와 형식의 차이를 차례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칼빈은 거의 언제나 이 둘을 함께 토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형식의 차이를 논의하지 않고, 본질의 일치를 논의할 수 없다. 칼빈이 같은 구절의 상황에서 그 차이를 항상 구별하기 때문이다. “모든 족장들과 맺은 언약은 그 실질과 실상이 매우 같기 때문에, 실지는 이 둘이 하나이다. 다만 처리방법이 다르다.”모든 족장들에게 한 언약은 그 둘이 실제로 하나이고 동일한 본질과 실체에서 너무나 많이 우리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의 양식에서 다르다. 그러나 순서적인 설명 때문에 우리는 먼저 본질 또는 실체의 일치를 생각할 것이다.
(1) 교리의 일치
본질의 일치는 율법과 복음사이에 교리의 일치가 있음을 의미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본질은 동일하다. 본질로 나는 그 교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포함하는 것 외에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내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리의 본질에 관하여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교리의 일치는 “하나님이 그 자신에 결코 한결같지 않을 수 없고, 또 그가 그 자신과 같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그 뿌리를 갖고 있다.”칼빈에게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성서가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하여 말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구약과 신약 모두에 같은 오직 하나의 은혜의 언약이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비추어서 보면 “하나님이 앞서 아브라함에게 하고, 드디어 모세의 손에 의하여 확인한 언약 외에 다른 언약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은 칼빈에게 분명하다.사실 새 언약의 새로움은 형식에만 관계된다. 또는 칼빈이 “교훈의 외적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에만 관계된다.새 언약이 옛 언약과 반대되므로 “새 언약”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관성을 가지는 분이고 결코 자신의 성품에 어긋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의 교리가 ‘시온에서 나올 것’(사 2:3)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 최근의 혁신이 아니고, 그것이 나타나기 전에 모든 시대에 주어진 증거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라는 것을 이것으로 알게 된다. 교리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하여도, 고대 모든 의식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하고, 교훈의 새로운 형식이 소개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율법이 이전에 시내산에서(출19:1)나오기 때문이고, 그러나 이제 율법이 ‘시온에서’(사 2:3)나오기 때문에 그 율법은 새로운 형식을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동일하고 언제나 그 자체에 일치한다. 마치 누가 하나님이 불일치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비난할 수 없다. 주의 율법이 언제나 동일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옷으로 시온에서 나왔다. 둘째로, 의식과 그림자가 폐지될 때, 그리스도가 계시되었고, 그 계시 안에서 의식과 그림자의 실체가 보인다.
(2) 신앙의 일치
율법 아래 산 자들에게 교리의 본질이 구체적으로 의미한 것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무슨 의미로 구약의 조상들이 그리스도를 소유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신약 신자들이 본질에 관한 한 신앙의 일치에서 구약의 유대인과 연합되었다면, 이 일치는 거기에 있는가? “족장들은 우리와 같은 중보자의 은총에 의해서 같은 기업에 참여하며 같은 구원을 바라보았다. 이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율법서와 예언서에 증언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경외와 경건에 관해서 어떤 다른 원칙이 있은 일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본질의 일치는 구약과 신약 신자들 사이의 신앙의 일치이다. 옛 언약 아래 조상들은 - 비록 부분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만 주어지는 같은 구원, 불멸의 소망으로 동일한 양자가 되는 것, 그리고 하나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동일한 은혜에 우리와 함께 참여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우리의 상태와 이스라엘의 상태가 다르단 말인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는데, 우리와 일반으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어찌하여 우리와 더불어 똑같은 자유에 참여하지 못한단 말인가? 저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오늘날 면제된 멍에를 어째서 저들이 메지 않으면 안되도록 강조되어야 하는가? 옛 언약 아래 있던 조상들도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속의 희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저들도 동일한 양자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영적인 복이 우리에게와 마찬가지로 저들에게도 속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저들은 우리와 동일한 교훈을 받았으며, 저들은 우리와 더불어 믿음으로 진정한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저들은 우리와 함께 유일한 중보자를 신뢰하고 있으며,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와 조상들 사이의 차이는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연성에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 모든 언약의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와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인정되는 의식이나 관리는 부속물과 같다. 더욱이 그 당시는 교회의 유아기이며,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래 교회는 성년에 이르도록 성장했다는 사실이다.”옛 언약과 새 언약의 신앙 사이에 일치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지적은 칼빈의 저작 어디서나 언급된다.
(3) 그리스도에서 일치
본질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로써 중심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하나의 교리”와 “같은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 자신뿐이다.더 특별하게,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약속들로 옷 입고 있다.”모형들(types)이 비록 육으로 그가 나타나는 것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르키지만, 칼빈은 그리스도가 복음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써, 그는 구약에서 활동하였고,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마신 “샘”이었다.
따라서 칼빈은 로마서 못지 않게 야고보서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그리고 신약에 못지 않게 구약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못지 않게,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그리스도는 성서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에 대해서 말하는 분이다. 사도들과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까지 율법의 “유일한 해석자들”이라는 것을 그가 말할 때, 그는 신약이 구약의 유일한 해석이며 적용이라는 주장에 접근한다.
그러나 그 둘의 일치는 신학적 문제로써 그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주목한대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치와 변할 수 없음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2. 처리하는 형식 또는 양식의 차이
율법과 복음 사이의 형식의 차이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칼빈은 기본적으로 율법에 대한 더 넓은 개념을 마음에 두고 있다. 즉, “단순한 율법”으로부터 구별되는 “전체 율법”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그 차이는 “형식”에 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의 경륜의 양식” 또는 “교훈의 방식”에 있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특별히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다섯 가지 차이를 열거한다. (1) 구약에서 영적 축복은 지상의 축복의 상징아래 표현되었다. 이에 반하여 신약에서 이 열등한 계시의 양식은 폐지된다. (2) 옛 언약에서, 진리는 모형들, 상징들, 그리고 의식들로 표현된다. 이에 반하여 새 언약에서 진리의 바로 그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3) 옛 언약은 “문자”로써 “글자”로서 설명될 수 있고 설명된다. 즉 그것은 돌 판에 새겨졌고 저주와 죽음을 가져 왔다. 새 언약은 “영”으로서 설명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기록되었고 의와 생명을 가져다 준다. (4) 세 번째 차이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네 번째이다. 옛 언약은 “속박”을 가져다 주는데, 공포의 속박이다. 새 언약은 “자유”, 신뢰와 확신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 (5) 옛 언약은 한민족, 이스라엘에게 국한된다. 새 언약은 이방인을 부르신 것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을 언급한다.
실재로 세 번째 네 번째 차이는 다른 셋과는 약간 다른 본성의 차이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석에서 칼빈의 설명에 비추어 보아, 그들은 율법과 복음 사이의 반대 명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의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반대 명제가 절대적이지 않더라도, 이 두 명제에 대한 율법과 복음 사이의 분리(break)는 다른 세 가지에 비하여 훨씬 더 날카롭다.
다른 “차이들”은 정도의 차이, 모형과 영적 실체, 그림자와 본체, 다른 은유들과 비유들, 그리고 근본적 차이인 “유보된 은혜”, 약속의 성취의 문제이다.
첫째 정도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부성적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하는 점에서 그 둘 (율법과 복음)은 다 같다. 그 둘이 모두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 우리의 것은 더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준다.”칼빈은 두 언약이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은 같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율법의 “덜”과 복음의 “더”를 설명하는데 “모세는 복음이 아직 완전히 명료하게 계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을 휘장 아래 가려 두어 실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모세는 예표와 그림자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그 당시의 백성에게 맞는 초보적 형식으로 다루는 모세의 직분은 제사장 직분이 폐지될 때 모세의 임무도 동시에 끝났다. 그는 복음에서 밝히 드러난 진리가 “가려진” 율법을 말하고 있다.그는 “예표들”과 “상징들” “표징들”아래 복음을 감춘 율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특별히 히브리어의 용어사용에 따라, 그는 “그림자”가 되는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본체와 대조가 된다.
다른 상징적인 것이 또한 나타난다. 율법은 화가의 “첫 스케취”같다. - 거칠고, 어둡고, 윤이 나지 않은 것으로 스케취이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을 나타내는 색깔”로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나타낸다.옛 언약 아래 조상들은 우리가 완전하게 즐기는 은혜를 “약간의 맛”만 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아래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부족하게 맛보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몸으로 나타났을 때 그 축복은 쏟아 부어졌는데, 마치 만족한데도 불구하고 손에 가득히 쏟아 부어졌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것”과 “먹는 것”의 은유에 더하여, 칼빈은 “유치함”과 “성숙”이라는 유비를 사용한다. 즉 “이 어린이 같은 미숙함이 이 세상 초보적인 것으로 그리고 작은 외적 실행으로 훈련되어, 마치 어린이의 교훈을 위한 규칙들로써 그리스도가 와서 그를 통하여 신자들의 지식이 성숙해질 때까지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
다시, 그는 복음의 대낮에 대하여 새벽으로써 율법 아래 있는 상황을 비교하면서 “빛”의 개념을 사용한다. 또는 “그의 완전한 생명의 밝음이 우리에게 오늘 비추이는 그 생명의 작은 섬광과 같은 것”으로서 빛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 연결에서, Hesselink는 자주 간과된 칼빈 사상의 측면에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즉, “유보된 (suspended)”은혜 또는 “유보된” 믿음의 개념이다. 이것은 근본적 차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영원한 아들로써 그리스도의 은혜가 구약 제의(祭儀)아래 조상들에게 주어졌다고 해도, 아직 이 은혜 또는 믿음은 몸을 입고 온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임시적(contingent)이다. 옛 언약은 “그림자 가운데 그리고 효과 없는 의식의 준수에 싸여 있으며, 유대인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그것이 확고하고 본질적인 확인에 의존할 수 있을 때까지 마치 유보로(in suspense) 남아 있기 때문에 일시적이다. 그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성별되고 확립 된 후에야 만 새롭게 되었고 영원해졌다.”의 유보(suspension)는 구약 성도들이 그림자 같은 의식들에 참여하는 것일지라도, 은혜의 언약에 유효하게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그 의식들이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의식들을 그림자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말하자면, 그 의식들의 실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으로 비로소 유보로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드시 효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의미의 양식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나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육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모든 표징들은 결석한 것처럼 그를 미리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그의 능력을 나타내게 하였을 것이고, 신자들 가운데 그 자신을 내적으로 더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유보”의 개념은 여기서 “마치 결석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위하여 해석된다. 이 개념은 칼빈이 구약의 성도들이 “숨겨진 것 또는 마치 결석한 것 같은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소유했다고 말할 때 더욱 더 묘사한 개념이다. 나는 은혜의 언약의 능력에서 결석한 것이 아니고 그가 아직 몸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그러한 의미에서 율법아래 진정한 축복들은 몸으로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나타날 때까지 임시적이다. “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비로소 말하자면”유보된 상태에서, 율법 아래 신자들의 믿음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관계된 계시까지도 유보되었다. 즉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때에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종들이 예언하기를 원했던 것에 관한 이런 것들에 대한 계시를 유보해 두었기 때문이다.”사실 칼빈은 은혜가 유보되었다고 말할 정도까지 나아간다. “은혜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유보된 방식으로 있었다. 조상들이 은혜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의식들 가운데서 은혜의 현존하는 나타남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이렇게 “유보된” 은혜에 대하여 말하므로, 칼빈은 율법과 복음 안에 은혜의 근본적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새 언약의 “새로움”이 그 것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둘 사이의 극단적인 차이를 강조하려고 한다.
형식의 차이 또는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진정한 바울의 개념을 반영하는가? 옛 그리고 새 언약 사이의 이와 같은 정도의 차이 또는 다소에 대한 개념은 바울의 선포의 부분과 일치하는가? 진정한 바울의 개념을 설명하는 본질의 일치 안에 있는 형식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는가?
분명히, 사람들은 바울의 선포(kerygma)에서 이와 같은 어떤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3:7-11에서 더 위대한 것에 대한 덜 위대한 것으로부터 논쟁이 있다. 정죄와 죽음의 사역이라고 하더라도 모세의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과 비교한다면 그 영광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새 언약의 영광의 지나치게 대단함은 옛 언약의 영광을 무색하게 한다. 이 비교에 대하여 4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모세를 다루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치는 바울에게서 나타난다. 둘째로, 새 언약의 “영광”은 너무나 급진적으로 새롭고 너무나 지나치게 위대하기 때문에 그 둘은 좀처럼 비교될 수 없다. 셋째로, 그 둘 사이에 위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중심적인 일치에 적극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고후 3:14, 16) 넷째로, 이 일치에서 이와 같은 큰 다양성 배후에 계시와 구속의 역사의 주님으로써 하나님이 서 계신다.
또한 교훈적인 것은 골로새 2장 17절에서 이루어진 비교이다. 음식과 마시는 것에 속하는 율법들, 축제, 새 월삭, 그리고 율법에 의하여 정해진 안식일에 대하여 말하면서, 바울은 말하기를, “이들은 장차 올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그림자”와 “본체”(또는“실체” 또는 “몸”)의 상징적인 것은 율법과 그리스도 사이의 적극적인 상관 관계를 나타낸다. 그림자들은 “장차 올 것들”을 비추어주는 것들이었다. - 구약의 유리한 점으로부터 미래로써 생각되어지는 - 그것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이다. 그리스도가 옛 언약 아래서 나타난 참된 양식과 음료인 것처럼 (고전 10:3, 4; 고전 11:23이하) 그리고 유월절의 본질인 것처럼 (고전 5:7) 그리스도는 마찬가지로 율법의 의식적(儀式的)이고 제의적(祭儀的)인 규정들에서 그림자 같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본질이다.
물론, 골로새 2:16절과 17절에서 주된 강조는 그리스도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러한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평가하는 것으로 더 이상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자리에 적극적 상관 관계를 놓는 것은 정말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이다. 사실, 옛 언약의 종교적인 제도들에 대하여 바울이 쓴 것에서 많은 암시가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새 언약의 실체들과 어떤 종류의 대조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새 언약에서 일어났던 것 또는 일어날 것에 대한 적극적인 유비를 형성한다.
새 언약의 더 영광스럽고 더 위대한 본체와 함께, 형식에서 차이의 이러한 강조는 바울에게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강조가 바울의 기록에서 보다 히브리서에 더 한결같이 반영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언약”과 “옛”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상은 “옛 언약”의 개념에 재한 된다. 그런가하면 “율법”은 주로 제의적이며 의식적인 규정을 지배하는 율법이다. 결과적으로, 그 대조가 새 언약의 커다란 우월성의 관점에서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히브리서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더욱 더 적극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기록에서 그의 종말론의 특징적인 측면은 두 시대의 측면이다. 그 측면은 우주적 틀을 가지고 있고, 그 틀 안에 두 시대가 반 명제적 방식으로 관계되고 있다.옛 시대는 죄, 죽음, 육에 의하여 “이 세상 신”으로써 그러한 세력들로 지배된다. 율법이 옛 시대의 이러한 세력들과 연결되는 한에 있어서, 율법은 죽음을 가져오는 죄의 “세력” 또는 “지배”에 기여한다.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복음에 더 부정적으로 또는 반대 명제적으로 관계되었다. 다음절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울의 사상의 이러한 측면에 대한 것이다.
3. “의문”으로써 율법과 “영”으로써 복음의 반대 명제
우리는 이제 모든 개신교가 인정하는 율법의 측면을 생각하게 되었다. 즉 복음에 모순 또는 반대로 율법, 성령과 그리스도와 분리된 율법이다. 이것은 칼빈이 단순한 법(nuda lex) 즉 양심을 고발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율법이다 그 자체로는 이 율법은 언약과 약속에서 분리된 율법이다. 완전을 요구하는 이 율법은 결핍이 있는 경우 그 율법은 저주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율법이다.이 율법은 좁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율법이해이다.
칼빈은 정말로 이러한 율법을 인정하는가? 이것은 칼빈의 신학에서 중요하지 않은 동기인가? 복음이 칼빈보다 루터에게서 더 분명한가? 이것은 확실한가? 이 질문은 논의되어 온 문제이다.
우리는 칼빈의 주석을 살펴보자. 첫째로 요한복음 1: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느니라.” 칼빈은 “모세의 기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비교하면 정말로 부족하다는 것”을 주목한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다소의 정도의 문제이지만, 칼빈은 은혜와 진리가 율법에 대조되는 반대 명제임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두 가지 곧 은혜와 진리가 부족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은 그리스도와 별개의 율법 자체의 율법의 효력을 다루고 있다.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율법에서 본체를 발견하는 것을 부인한다. 진리는 율법이 줄 수 없는 은혜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반대 명제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율법(또는 모세)이 복음 (또는 그리스도)에 반대되는 것으로 말해지는 한에 있어서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둘째로, 칼빈이 이런 식으로 그 둘을 대조할 때에 그는 율법의 재한 된 의미 또는 좁은 의미로 율법을 언급하고 있다. 즉, 교훈들(precepts)과 보상들을 가진 단순한 율법이다. 셋째로, 이 “반대 명제” 또는 “반대”는 “문자”로써 율법과 “영”으로써 복음 사이의 그리고 율법의 “굴레”와 복음의 “자유”사이의 구별에 관하여 칼빈이 언급하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 구별들이 기독교 강요에서 설명된다고 해도, 그들은 고린도후서 3:6절과 계속되는 로마서 8:15절에 대한 주석에서 반대 명제로써 더 분명히 발전된다.
고린도후서 3:6절에서 “그 하나님은 우리가 새 언약의 일군이 되도록 자격을 주는 분인데, 기록된 율법(문자)에서 아니고 영에서이다. 왜냐하면 율법(문자)은 죽이지만 영은 살린다” 7절에서, 바울은 이 율법 또는 문자는 “돌에 글자로 새겨진” 그리고 일시적이고, 모세의 영광의 “시드는”영광 같은 것으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죽음의 하나님의 경륜”으로써 7절에서 율법에 대한 설명을 고려할 때, 율법과 복음 사이의 이 반 명제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비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측면들을 분석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포함된 전체 교리나, 또는 구약 아래에서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가 독특하게 모세의 사역에 속한 것만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율법과 복음의 속성들을 지금 간단히 조사해야만 한다. 율법은 돌에 새겨졌으며 따라서 율법은 문자적 교훈이었다. 이 부족함은 복음에 의하여 바르게 고쳐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율법이 오직 돌 판에 맡겨져 있는 한 무상한 것(transitory; fragilis)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복음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보장 아래 반포되었기 때문에 거룩하고 어길 수 없는 언약이다. 이것으로부터 율법은 정죄와 죽음의 사역이었다는 것이 결과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들의 의무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죽음과 죄책을 발견하고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율법으로부터 그들은 하나님이 거기에서 자신에게 마땅한 것을 요구하고 그러나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 정죄 밖에 받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에 의해서 인간은 그들의 죄를 거져 용서받으므로 하나님에게 화해하고 중생하게 된다. 그래서 복음은 의의 사역이며 마찬가지로 생명의 사역이다.
율법과 같이 복음마져도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향기” (고후 2:16)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 칼빈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의 기능은 율법에 어떤 부족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에 생겨나는 율법에 대한 단지 “우연적 (accidental)”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아닌 율법을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으로 부른다. 이 사실에 대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많은 사람에게 죽음의 경우가 된다고 해도, 복음은 여전히 그 복음이 값없이 하나님과 화해를 제공하고 중생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생명의 교리라고 옳게 불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위반자를 영원한 죽음으로 위협하고 의에 대하여 순종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고치지 못하고 다만 선한 삶을 위한 법칙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율법은 다만 정죄밖에 할 수 없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치료의 어떤 희망도 제공하지 않고 병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그리고 실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 복음의 기능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포기하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을 불가피한 죽음에 맡기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복음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 결과 생명의 문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죽이는 것은 율법의 영구적이며 불가피한 우연 (accidens)이다. 왜냐하면 사도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아래 있는 자들은 그 저주 아래 있다.”(갈 3:10) 그러나 복음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17)이며 복음은 반드시 죽이지 않는다.
더욱이, 칼빈은 율법의 일시적 성격에 대하여 말하는데, 바울이 단순히 의식적 율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관찰한다. “내 입장에서”하고 칼빈은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율법의 폐지를, 율법과 선지자들은 요한의 때까지라[마 11:13]는 말에 일치하는 것처럼, 그것이 복음에 반대되는 한에 있어서 구약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칼빈은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문맥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후 3:6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광범위하게 그리고 계속하여 이 중요한 절의 맛에 대한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인용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에 대한 대단히 통찰력 있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주석들로부터 다른 많은 구절이 또한 인용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19절에서, 바울은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하여 율법에 대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여기서 또한 그리스도와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를 이해하고 있다.
율법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율법을 버리고 그것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율법 안에 어떠한 신뢰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 율법은 노예의 멍에 아래 우리를 붙잡아 두고 있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는 율법이 우리 모두를 멸망에 맡기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 안에서 어떠한 생명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후자의 견해는 더 훌륭하게 맞는다. 왜냐하면 율법이 유익하기 보다 더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악을 만든 자가 된다는 것을 그가 부인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 자체 안에 우리를 죽이는 저주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생겨난다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이다. 그 율법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생명을 주는 교제 안에서, 또 하나의 다른 종류의 죽음이 대조된다. 그는 그가 살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말한다.
“문자”로써 율법과 “영”으로써 복음 사이의 반 명제로부터 생기는 것은 율법의 “굴레”와 복음의 “자유”에 관계된 반 명제이다. 이 구별은 로마서 8장 15절에 칼빈의 말에서 정교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두려움으로 다시 돌아가는 노예의 영을 받지 않았고, 너희는 아들 됨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여기서 분명히 율법과 복음 사이의 비교를 분명히 이해한다.
이 두 굴레의 영과 양자의 영은 두려움과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졌다.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은, 우리가 본대로, 그러한 반대가 되는 것으로부터 더욱 더 명료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히브리서 12:18절 이하에서 반대 명제를 이해한다. 그는 양자의 영이 옛 언약에 없었는지 이 본문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목한다. 그는 이것을 부인한다. 그는 율법에 대한 거짓 사도 때문에 이 같은 사려 깊은 대조를 바울이 한 사실로부터 그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바울이 그와 같이 날카로운 대조를 했는지 설명한다.
은혜의 언약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바울은 율법에서 언약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에 반대하여 율법 자체에 독특한 것만 중시하기 때문이다. 즉, 죽음의 위협으로 범법자를 명령하고, 금지하고, 구속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는 율법에 율법 자체의 성질을 돌린다. 이때, 율법은 복음과 다르다. 마지막으로, 그 자체로 고려되는 율법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그 율법의 비참한 굴레에 복종하는 자를 다만 구속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조건을 이행하는 것 외에 다른 복을 약속하지 않고, 모든 범법자들에게 죽음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 무서움으로 양심을 억누르는 굴레의 영이 있는 것처럼, 복음 아래서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하고 우리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양자의 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좁은 의미의 율법과 복음의 중대한 구별이 있음에 대한 문제를 여전히 제기해야 한다. 어떻게 율법이 사람들을 공포의 굴레로 가져가고, 정죄하고, 죽이는 문자가 되는가를 설명하는 반대 명제의 초점은 무엇인가?
칼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율법과 믿음의 모순은 칭의의 동기 때문이다. 인간이 믿음으로 그리고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두 가지 설명을 조화시키기 보다 불과 물을 더 쉽게 하나로 만들 것이다. 율법은 믿음에 속하지 않는다. 즉, 율법은 믿음과는 완전히 낮선 인간을 의롭게 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율법의 “의롭게 하는 방법”에 대한 언급은 “법적 약속들”과 “복음적 약속들” 사이의 칼빈의 구별을 상기시킨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기 때문에 율법의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그 개념의 차이는 더 이상 부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이 의를 성취하는 두 모순되는 방법은 율법과 복음의 반대 명제의 중심의 초점이다. 하나는 행위에 의한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에 의한 방법이다. 이것은 두 종류의 약속들, 곧 하나는 법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적이라고 하는 약속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점에서 그 반대 명제는 불과 물이 반대가 되는 것처럼 가장 날카롭다.
물론 의를 성취하는 이와 같은 방법이 모세의 “전체 율법” 또는 “보편적 직분”에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보편적 직분에서, 모세는 또한 복음 선포자였다. “모세가 가졌던 보편적 직분은 경건함에 대한 진정한 법칙으로 사람들을 교훈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회개와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의 값없는 약속들인 약속들을 내 놓지 않고는 가르쳐지 못한다.”
회개와 믿음 두 가지 모두를 전한 선포자로써 모세는 그의 보편적 직분에 의하여 복음 선포자였다. 그러나 모세는 그에게 맡겨진 “독특한 직분”을 또한 가지고 있었다. 즉 “그러므로, 행위들에 대한 참된 의의 성격을 가르치는 기능은 칭의와 함께, 옳게 그리고 독특하게 모세에게 돌려 졌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기대되는 보상과 그것을 어기는 자들에게 기대되는 형벌이 어떤 것인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기능 또한 모세에게 돌려졌다. 율법이란 말이 이와 같이 재한 된 의미에서 사용될 때마다 언제나, 모세는 암시적으로 그리스도와 대조시키고 있다.”참된 의를 가르치는 이 독특한 사역이 “옳게” 그리고 “칭의와 함께” 바울에 의하여 모세에게 돌려 졌다고 칼빈이 주장하는 것을 잘 주목하라. 거짓 사도들의 교훈들이 바울에게는 율법과 복음을 너무나 날카롭게 대조시키는 경우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대를 칭의에 주었다.
한편으로 모세의 보편적 직분과 전체 율법, 다른 한편 좁은 의미의 또는 단순한 율법과 모세의 독특한 직분의 이 구별은 모세의 사역 내부에 날카로운 긴장을 만들어 내고, 차례로 율법과 복음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이 긴장은 두 언약의 본질의 일치와 형식의 차이와 함께, 두 언약들의 일치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IV. 결론
율법과 복음 이해는 죄인의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므로 그 말의 재한과 그 말이 포함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개신교 신자로써 너무나 우리의 생각에 칭의의 동기와 함께 기억되는 율법과 복음의 반대 명제만 기억하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인 율법이해를 오해할 수 있다.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가 물과 불을 결합하려고 하는 것같이 정 반대임을 우리는 안다. 이 대립되는 율법의 좁은 의미에서 율법이해와 함께 율법과 복음이 본질에서 일치하고 형식에서만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반대 명제인 좁은 의미의 율법이해를 누구보다 잘한 자이다. 우리는 복음에 반대인 율법이해와 함께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규범인 도덕법이 영원한 하나님의 뜻임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유정우 평택대학교
I. 서 론
율법과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성을 가진 문제이다. 율법은 칭의의 동기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규범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칼빈이 “율법의 제 삼 용법”을 강조하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졌기 때문에 율법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써 성화와 관계되는 칼빈의 율법이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의 동기와 함께 율법의 고소하는 기능을 등한히 하였는가? 이 점에서 칼빈은 오해를 받기도 한다. 율법과 복음의 주제에서 칼빈과 바울은 반대되는가?
이를테면, 칼빈은 “교리에 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율법의 권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영원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포함하는 하나님의 의가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은 끊임없고 일치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다시 예레미야 31:31-34절에서 “새 언약”을 주석하면서, “새롭게 된 것은 틀림없이 형식을 언급하는 것이고,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본질에 의하여 나는 그 교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에서 율법이 포함한 것 외에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칼빈에 의하면 율법은 성경의 핵심이다. 그는 제사장들, 예언자들, 그리고 시편기자들 뿐만 아니라, 사도들 또한 율법의 해석자 또는 해설자로 이해한다.칼빈은 그리스도의 역할까지도 단순히 율법의 “충실한 해석자”로 이해한다.
그런가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일어난 큰 변화를 기린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왔도다.”(고후 5:17) 다시,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우리가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했기 때문이다.”(롬 8:2)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롬 6:14)이라고 선포한다.
칼빈은 율법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주로 율법의 제 3 용법(중생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규범)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에게 그것은 “중요한 용법”이다. 율법의 제 1 용법 그리고 제 2 용법에 대하여 칼빈은 루터와 완전히 일치하여도, 루터란 학자들은 칼빈이 율법의 고소하는 용법(칼빈에게 제 2 용법은 루터에게 제1 용법)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칼빈은 정말 율법의 고소하는 기능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가?
II. 칼빈의 “율법”과 “복음”이란 말의 이해.
칼빈은 넓은 개념으로 “율법”이란 말을 사용한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 “이 율법에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
칼빈에게 “율법”이란 말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 말의 여러 가지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나는 ‘율법’이란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법칙인 십계명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전하여 준 종교의 형식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에게 “율법”이란 말은 1)모세의 전체 종교형식2)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계시된 도덕법(주로 십계명) 및 예수께서요약하신 것3) 여러 가지 민법과 재판법과 의식법이다.이 가운데 “도덕법”은 “의의 진정하고 영원한 원칙”이며, 가장 중요하다. 도덕법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3가지 용법으로 설명된다. 칼빈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율법의 제 3 용법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러나 루터는 율법의 정죄하는 용법을 가장 주요시한다.(루터의 갈 3:19절 주석 참고)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정죄 기능을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대하여 “부수적 (附髓的)”인 것으로 이해한다.율법은 그리스도와 관련될 때에 한해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지론이다.
분명히 “도덕법”인 십계명과 여러 가지 의식의 법들과 재판법의 구별은 칼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왜냐하면 후자의 법의 목적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을 준수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도덕법에는 “하나님이 간결하지만 포괄적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의 법칙을 요약하였다.”이 구별은 어떻게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는가를 이해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모세에 의하여 이스라엘에게 준 종교의 형식”인 율법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2권 9장-11장에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를 근본적으로 옛 언약, 새 언약으로 언급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 2권 9장 제목 “그리스도는 율법아래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졌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에서, 우리는 옛 언약(구약)을 율법으로 새 언약(신약)을 복음으로 대체시킬 수 있다. 칼빈에게 넓은 의미에서 “복음”이란 말은 “하나님이 구약의 족장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자비나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에 대한 증거를 포함”한다. 그러나 더 기술적인 개념에서 “복음”이란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은혜의 선포를 언급한다.”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포괄적 용어이고, 옛 언약의 전체 시대 또는 경륜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율법”이란 말은 주로 십계명이나 법전을 주로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광범위한 개념의 율법과 복음은 그 둘의 본질이 동일하다. 다만 율법과 복음은 다루는 형식만 다를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본질과 실체에서 너무나 같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 둘은 하나이다. 그 둘은 처리하는 형식에서 다르다.”근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은혜의 언약이다. 옛, 새 언약의 차이는 이 하나의 언약이 처리되는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강요에서 이 주제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친숙하다. 인정되지 않는 것(특히 칼빈의 율법과 복음의 이해을 비판하는 자들에 의해서)이 율법과 복음(두 언약)의 형식의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좁은 의미의 율법으로서만 율법과 복음에 반대되는 반대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경우는 갈라디아서 3장 19절이다. 거기서 바울은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반대로 위치시킨다. 그러한 경우에 칼빈은 율법의 고소하고 죽이는 기능, 율법의 저주하고, 위협하는 기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좁은 의미의 율법의 이러한 측면은 강요 2권 7장에서 취급되고, 바울 서신과 관계된 본문의 주석에서 칼빈은 충분하게 토론한다. 이 점에서 강조와 구별을 제외하고 칼빈은 루터와 다르지 않다. 이를 테면 칼빈은 자주 지적하기를, 바울과 다른 성경기자들이 좁은 의미에서 율법을 복음에 반대되는 것으로 언급할 경우, 율법은 은혜의 약속으로부터 분리되고, “독특한 직무, 힘, 목적”의 관점에서만 고려된다.
복음에 반대 명제인 율법은 전체 율법( tota lex)이 아니고, 단순한 율법 (the bare law; nuda lex)이다. 그러한 율법은 살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단순한 문자이다. 그 율법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위치하게 하는 무서운 요구일 뿐이다.이러한 율법은 다만 복음의 반대 명제로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믿음의 의에 대칭적으로 반대되는 의의 형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3:21-31절과 갈라디아서 3:10절에서, “바르게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반대로 위치시킨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3개의 주서(朱書)아래 이해되어야 한다. 즉 1. 본질에서 일치. 2. 형식에서 차이. 3. 의문(儀文)으로써 율법과 영(靈)으로써 복음의 반대 명제이다.
III.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과 복음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토의하는 데 있어서, 그에 의해 주어진 율법에 대한 이중적 정의를 유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시간에 구약 -신약 또는 옛 언약- 새 언약은 칼빈에게 있어 율법-복음에 상응한다. 이 포괄적 의미에서 율법은 대체로 옛 언약에 일치한다. 이 경우에 언약들(율법과 복음)의 본질은 동일하다. 처리하는 형식만 다르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반 명제에 대하여 말할 때, 이렇게 율법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때에 그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좁은” 의미에서 율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세의 독특한 직분 또는 사역을 의미하는데, 곧 그 때의 율법은 교훈들(precepts)과 보상들을 가진 “단순한 율법”이다. 또는 칼빈으로부터 다른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그것이 복음에 반대되는 율법이다.이 구별을 마음에 유념하면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의 3가지 주요한 주장을 주목한다.
1. 본질에서 일치
본질의 일치와 형식의 차이를 차례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칼빈은 거의 언제나 이 둘을 함께 토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형식의 차이를 논의하지 않고, 본질의 일치를 논의할 수 없다. 칼빈이 같은 구절의 상황에서 그 차이를 항상 구별하기 때문이다. “모든 족장들과 맺은 언약은 그 실질과 실상이 매우 같기 때문에, 실지는 이 둘이 하나이다. 다만 처리방법이 다르다.”모든 족장들에게 한 언약은 그 둘이 실제로 하나이고 동일한 본질과 실체에서 너무나 많이 우리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의 양식에서 다르다. 그러나 순서적인 설명 때문에 우리는 먼저 본질 또는 실체의 일치를 생각할 것이다.
(1) 교리의 일치
본질의 일치는 율법과 복음사이에 교리의 일치가 있음을 의미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본질은 동일하다. 본질로 나는 그 교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포함하는 것 외에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내 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리의 본질에 관하여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교리의 일치는 “하나님이 그 자신에 결코 한결같지 않을 수 없고, 또 그가 그 자신과 같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그 뿌리를 갖고 있다.”칼빈에게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성서가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하여 말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구약과 신약 모두에 같은 오직 하나의 은혜의 언약이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비추어서 보면 “하나님이 앞서 아브라함에게 하고, 드디어 모세의 손에 의하여 확인한 언약 외에 다른 언약을 결코 하지 않았다”는 것은 칼빈에게 분명하다.사실 새 언약의 새로움은 형식에만 관계된다. 또는 칼빈이 “교훈의 외적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에만 관계된다.새 언약이 옛 언약과 반대되므로 “새 언약”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관성을 가지는 분이고 결코 자신의 성품에 어긋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의 교리가 ‘시온에서 나올 것’(사 2:3)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 최근의 혁신이 아니고, 그것이 나타나기 전에 모든 시대에 주어진 증거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라는 것을 이것으로 알게 된다. 교리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하여도, 고대 모든 의식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하고, 교훈의 새로운 형식이 소개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율법이 이전에 시내산에서(출19:1)나오기 때문이고, 그러나 이제 율법이 ‘시온에서’(사 2:3)나오기 때문에 그 율법은 새로운 형식을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동일하고 언제나 그 자체에 일치한다. 마치 누가 하나님이 불일치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비난할 수 없다. 주의 율법이 언제나 동일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옷으로 시온에서 나왔다. 둘째로, 의식과 그림자가 폐지될 때, 그리스도가 계시되었고, 그 계시 안에서 의식과 그림자의 실체가 보인다.
(2) 신앙의 일치
율법 아래 산 자들에게 교리의 본질이 구체적으로 의미한 것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무슨 의미로 구약의 조상들이 그리스도를 소유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신약 신자들이 본질에 관한 한 신앙의 일치에서 구약의 유대인과 연합되었다면, 이 일치는 거기에 있는가? “족장들은 우리와 같은 중보자의 은총에 의해서 같은 기업에 참여하며 같은 구원을 바라보았다. 이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율법서와 예언서에 증언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경외와 경건에 관해서 어떤 다른 원칙이 있은 일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본질의 일치는 구약과 신약 신자들 사이의 신앙의 일치이다. 옛 언약 아래 조상들은 - 비록 부분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만 주어지는 같은 구원, 불멸의 소망으로 동일한 양자가 되는 것, 그리고 하나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동일한 은혜에 우리와 함께 참여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우리의 상태와 이스라엘의 상태가 다르단 말인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는데, 우리와 일반으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어찌하여 우리와 더불어 똑같은 자유에 참여하지 못한단 말인가? 저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오늘날 면제된 멍에를 어째서 저들이 메지 않으면 안되도록 강조되어야 하는가? 옛 언약 아래 있던 조상들도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속의 희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저들도 동일한 양자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영적인 복이 우리에게와 마찬가지로 저들에게도 속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저들은 우리와 동일한 교훈을 받았으며, 저들은 우리와 더불어 믿음으로 진정한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저들은 우리와 함께 유일한 중보자를 신뢰하고 있으며, 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와 조상들 사이의 차이는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연성에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 모든 언약의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와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인정되는 의식이나 관리는 부속물과 같다. 더욱이 그 당시는 교회의 유아기이며,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래 교회는 성년에 이르도록 성장했다는 사실이다.”옛 언약과 새 언약의 신앙 사이에 일치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지적은 칼빈의 저작 어디서나 언급된다.
(3) 그리스도에서 일치
본질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로써 중심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하나의 교리”와 “같은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 자신 자신뿐이다.더 특별하게,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약속들로 옷 입고 있다.”모형들(types)이 비록 육으로 그가 나타나는 것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르키지만, 칼빈은 그리스도가 복음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써, 그는 구약에서 활동하였고,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마신 “샘”이었다.
따라서 칼빈은 로마서 못지 않게 야고보서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그리고 신약에 못지 않게 구약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못지 않게,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그리스도는 성서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에 대해서 말하는 분이다. 사도들과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까지 율법의 “유일한 해석자들”이라는 것을 그가 말할 때, 그는 신약이 구약의 유일한 해석이며 적용이라는 주장에 접근한다.
그러나 그 둘의 일치는 신학적 문제로써 그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주목한대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치와 변할 수 없음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2. 처리하는 형식 또는 양식의 차이
율법과 복음 사이의 형식의 차이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칼빈은 기본적으로 율법에 대한 더 넓은 개념을 마음에 두고 있다. 즉, “단순한 율법”으로부터 구별되는 “전체 율법”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그 차이는 “형식”에 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의 경륜의 양식” 또는 “교훈의 방식”에 있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특별히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다섯 가지 차이를 열거한다. (1) 구약에서 영적 축복은 지상의 축복의 상징아래 표현되었다. 이에 반하여 신약에서 이 열등한 계시의 양식은 폐지된다. (2) 옛 언약에서, 진리는 모형들, 상징들, 그리고 의식들로 표현된다. 이에 반하여 새 언약에서 진리의 바로 그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3) 옛 언약은 “문자”로써 “글자”로서 설명될 수 있고 설명된다. 즉 그것은 돌 판에 새겨졌고 저주와 죽음을 가져 왔다. 새 언약은 “영”으로서 설명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기록되었고 의와 생명을 가져다 준다. (4) 세 번째 차이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네 번째이다. 옛 언약은 “속박”을 가져다 주는데, 공포의 속박이다. 새 언약은 “자유”, 신뢰와 확신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 (5) 옛 언약은 한민족, 이스라엘에게 국한된다. 새 언약은 이방인을 부르신 것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을 언급한다.
실재로 세 번째 네 번째 차이는 다른 셋과는 약간 다른 본성의 차이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석에서 칼빈의 설명에 비추어 보아, 그들은 율법과 복음 사이의 반대 명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의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반대 명제가 절대적이지 않더라도, 이 두 명제에 대한 율법과 복음 사이의 분리(break)는 다른 세 가지에 비하여 훨씬 더 날카롭다.
다른 “차이들”은 정도의 차이, 모형과 영적 실체, 그림자와 본체, 다른 은유들과 비유들, 그리고 근본적 차이인 “유보된 은혜”, 약속의 성취의 문제이다.
첫째 정도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부성적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하는 점에서 그 둘 (율법과 복음)은 다 같다. 그 둘이 모두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 우리의 것은 더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준다.”칼빈은 두 언약이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은 같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율법의 “덜”과 복음의 “더”를 설명하는데 “모세는 복음이 아직 완전히 명료하게 계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을 휘장 아래 가려 두어 실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모세는 예표와 그림자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그 당시의 백성에게 맞는 초보적 형식으로 다루는 모세의 직분은 제사장 직분이 폐지될 때 모세의 임무도 동시에 끝났다. 그는 복음에서 밝히 드러난 진리가 “가려진” 율법을 말하고 있다.그는 “예표들”과 “상징들” “표징들”아래 복음을 감춘 율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특별히 히브리어의 용어사용에 따라, 그는 “그림자”가 되는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본체와 대조가 된다.
다른 상징적인 것이 또한 나타난다. 율법은 화가의 “첫 스케취”같다. - 거칠고, 어둡고, 윤이 나지 않은 것으로 스케취이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을 나타내는 색깔”로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나타낸다.옛 언약 아래 조상들은 우리가 완전하게 즐기는 은혜를 “약간의 맛”만 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아래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부족하게 맛보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몸으로 나타났을 때 그 축복은 쏟아 부어졌는데, 마치 만족한데도 불구하고 손에 가득히 쏟아 부어졌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것”과 “먹는 것”의 은유에 더하여, 칼빈은 “유치함”과 “성숙”이라는 유비를 사용한다. 즉 “이 어린이 같은 미숙함이 이 세상 초보적인 것으로 그리고 작은 외적 실행으로 훈련되어, 마치 어린이의 교훈을 위한 규칙들로써 그리스도가 와서 그를 통하여 신자들의 지식이 성숙해질 때까지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
다시, 그는 복음의 대낮에 대하여 새벽으로써 율법 아래 있는 상황을 비교하면서 “빛”의 개념을 사용한다. 또는 “그의 완전한 생명의 밝음이 우리에게 오늘 비추이는 그 생명의 작은 섬광과 같은 것”으로서 빛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 연결에서, Hesselink는 자주 간과된 칼빈 사상의 측면에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즉, “유보된 (suspended)”은혜 또는 “유보된” 믿음의 개념이다. 이것은 근본적 차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영원한 아들로써 그리스도의 은혜가 구약 제의(祭儀)아래 조상들에게 주어졌다고 해도, 아직 이 은혜 또는 믿음은 몸을 입고 온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임시적(contingent)이다. 옛 언약은 “그림자 가운데 그리고 효과 없는 의식의 준수에 싸여 있으며, 유대인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그것이 확고하고 본질적인 확인에 의존할 수 있을 때까지 마치 유보로(in suspense) 남아 있기 때문에 일시적이다. 그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성별되고 확립 된 후에야 만 새롭게 되었고 영원해졌다.”의 유보(suspension)는 구약 성도들이 그림자 같은 의식들에 참여하는 것일지라도, 은혜의 언약에 유효하게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그 의식들이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의식들을 그림자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말하자면, 그 의식들의 실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으로 비로소 유보로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드시 효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의미의 양식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나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육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모든 표징들은 결석한 것처럼 그를 미리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그의 능력을 나타내게 하였을 것이고, 신자들 가운데 그 자신을 내적으로 더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유보”의 개념은 여기서 “마치 결석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위하여 해석된다. 이 개념은 칼빈이 구약의 성도들이 “숨겨진 것 또는 마치 결석한 것 같은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소유했다고 말할 때 더욱 더 묘사한 개념이다. 나는 은혜의 언약의 능력에서 결석한 것이 아니고 그가 아직 몸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그러한 의미에서 율법아래 진정한 축복들은 몸으로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나타날 때까지 임시적이다. “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비로소 말하자면”유보된 상태에서, 율법 아래 신자들의 믿음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관계된 계시까지도 유보되었다. 즉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때에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종들이 예언하기를 원했던 것에 관한 이런 것들에 대한 계시를 유보해 두었기 때문이다.”사실 칼빈은 은혜가 유보되었다고 말할 정도까지 나아간다. “은혜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유보된 방식으로 있었다. 조상들이 은혜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의식들 가운데서 은혜의 현존하는 나타남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이렇게 “유보된” 은혜에 대하여 말하므로, 칼빈은 율법과 복음 안에 은혜의 근본적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새 언약의 “새로움”이 그 것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둘 사이의 극단적인 차이를 강조하려고 한다.
형식의 차이 또는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진정한 바울의 개념을 반영하는가? 옛 그리고 새 언약 사이의 이와 같은 정도의 차이 또는 다소에 대한 개념은 바울의 선포의 부분과 일치하는가? 진정한 바울의 개념을 설명하는 본질의 일치 안에 있는 형식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는가?
분명히, 사람들은 바울의 선포(kerygma)에서 이와 같은 어떤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3:7-11에서 더 위대한 것에 대한 덜 위대한 것으로부터 논쟁이 있다. 정죄와 죽음의 사역이라고 하더라도 모세의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광과 비교한다면 그 영광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새 언약의 영광의 지나치게 대단함은 옛 언약의 영광을 무색하게 한다. 이 비교에 대하여 4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모세를 다루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치는 바울에게서 나타난다. 둘째로, 새 언약의 “영광”은 너무나 급진적으로 새롭고 너무나 지나치게 위대하기 때문에 그 둘은 좀처럼 비교될 수 없다. 셋째로, 그 둘 사이에 위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중심적인 일치에 적극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고후 3:14, 16) 넷째로, 이 일치에서 이와 같은 큰 다양성 배후에 계시와 구속의 역사의 주님으로써 하나님이 서 계신다.
또한 교훈적인 것은 골로새 2장 17절에서 이루어진 비교이다. 음식과 마시는 것에 속하는 율법들, 축제, 새 월삭, 그리고 율법에 의하여 정해진 안식일에 대하여 말하면서, 바울은 말하기를, “이들은 장차 올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그림자”와 “본체”(또는“실체” 또는 “몸”)의 상징적인 것은 율법과 그리스도 사이의 적극적인 상관 관계를 나타낸다. 그림자들은 “장차 올 것들”을 비추어주는 것들이었다. - 구약의 유리한 점으로부터 미래로써 생각되어지는 - 그것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이다. 그리스도가 옛 언약 아래서 나타난 참된 양식과 음료인 것처럼 (고전 10:3, 4; 고전 11:23이하) 그리고 유월절의 본질인 것처럼 (고전 5:7) 그리스도는 마찬가지로 율법의 의식적(儀式的)이고 제의적(祭儀的)인 규정들에서 그림자 같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본질이다.
물론, 골로새 2:16절과 17절에서 주된 강조는 그리스도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러한 실천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평가하는 것으로 더 이상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자리에 적극적 상관 관계를 놓는 것은 정말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이다. 사실, 옛 언약의 종교적인 제도들에 대하여 바울이 쓴 것에서 많은 암시가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새 언약의 실체들과 어떤 종류의 대조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새 언약에서 일어났던 것 또는 일어날 것에 대한 적극적인 유비를 형성한다.
새 언약의 더 영광스럽고 더 위대한 본체와 함께, 형식에서 차이의 이러한 강조는 바울에게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강조가 바울의 기록에서 보다 히브리서에 더 한결같이 반영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언약”과 “옛”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상은 “옛 언약”의 개념에 재한 된다. 그런가하면 “율법”은 주로 제의적이며 의식적인 규정을 지배하는 율법이다. 결과적으로, 그 대조가 새 언약의 커다란 우월성의 관점에서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히브리서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더욱 더 적극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나 바울의 기록에서 그의 종말론의 특징적인 측면은 두 시대의 측면이다. 그 측면은 우주적 틀을 가지고 있고, 그 틀 안에 두 시대가 반 명제적 방식으로 관계되고 있다.옛 시대는 죄, 죽음, 육에 의하여 “이 세상 신”으로써 그러한 세력들로 지배된다. 율법이 옛 시대의 이러한 세력들과 연결되는 한에 있어서, 율법은 죽음을 가져오는 죄의 “세력” 또는 “지배”에 기여한다.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복음에 더 부정적으로 또는 반대 명제적으로 관계되었다. 다음절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울의 사상의 이러한 측면에 대한 것이다.
3. “의문”으로써 율법과 “영”으로써 복음의 반대 명제
우리는 이제 모든 개신교가 인정하는 율법의 측면을 생각하게 되었다. 즉 복음에 모순 또는 반대로 율법, 성령과 그리스도와 분리된 율법이다. 이것은 칼빈이 단순한 법(nuda lex) 즉 양심을 고발하고 괴롭히는 것으로 율법이다 그 자체로는 이 율법은 언약과 약속에서 분리된 율법이다. 완전을 요구하는 이 율법은 결핍이 있는 경우 그 율법은 저주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율법이다.이 율법은 좁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율법이해이다.
칼빈은 정말로 이러한 율법을 인정하는가? 이것은 칼빈의 신학에서 중요하지 않은 동기인가? 복음이 칼빈보다 루터에게서 더 분명한가? 이것은 확실한가? 이 질문은 논의되어 온 문제이다.
우리는 칼빈의 주석을 살펴보자. 첫째로 요한복음 1: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느니라.” 칼빈은 “모세의 기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비교하면 정말로 부족하다는 것”을 주목한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다소의 정도의 문제이지만, 칼빈은 은혜와 진리가 율법에 대조되는 반대 명제임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두 가지 곧 은혜와 진리가 부족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은 그리스도와 별개의 율법 자체의 율법의 효력을 다루고 있다. 요한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율법에서 본체를 발견하는 것을 부인한다. 진리는 율법이 줄 수 없는 은혜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반대 명제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율법(또는 모세)이 복음 (또는 그리스도)에 반대되는 것으로 말해지는 한에 있어서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둘째로, 칼빈이 이런 식으로 그 둘을 대조할 때에 그는 율법의 재한 된 의미 또는 좁은 의미로 율법을 언급하고 있다. 즉, 교훈들(precepts)과 보상들을 가진 단순한 율법이다. 셋째로, 이 “반대 명제” 또는 “반대”는 “문자”로써 율법과 “영”으로써 복음 사이의 그리고 율법의 “굴레”와 복음의 “자유”사이의 구별에 관하여 칼빈이 언급하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 구별들이 기독교 강요에서 설명된다고 해도, 그들은 고린도후서 3:6절과 계속되는 로마서 8:15절에 대한 주석에서 반대 명제로써 더 분명히 발전된다.
고린도후서 3:6절에서 “그 하나님은 우리가 새 언약의 일군이 되도록 자격을 주는 분인데, 기록된 율법(문자)에서 아니고 영에서이다. 왜냐하면 율법(문자)은 죽이지만 영은 살린다” 7절에서, 바울은 이 율법 또는 문자는 “돌에 글자로 새겨진” 그리고 일시적이고, 모세의 영광의 “시드는”영광 같은 것으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었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죽음의 하나님의 경륜”으로써 7절에서 율법에 대한 설명을 고려할 때, 율법과 복음 사이의 이 반 명제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비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측면들을 분석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포함된 전체 교리나, 또는 구약 아래에서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가 독특하게 모세의 사역에 속한 것만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율법과 복음의 속성들을 지금 간단히 조사해야만 한다. 율법은 돌에 새겨졌으며 따라서 율법은 문자적 교훈이었다. 이 부족함은 복음에 의하여 바르게 고쳐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율법이 오직 돌 판에 맡겨져 있는 한 무상한 것(transitory; fragilis)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복음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보장 아래 반포되었기 때문에 거룩하고 어길 수 없는 언약이다. 이것으로부터 율법은 정죄와 죽음의 사역이었다는 것이 결과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들의 의무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은 죽음과 죄책을 발견하고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율법으로부터 그들은 하나님이 거기에서 자신에게 마땅한 것을 요구하고 그러나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 정죄 밖에 받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에 의해서 인간은 그들의 죄를 거져 용서받으므로 하나님에게 화해하고 중생하게 된다. 그래서 복음은 의의 사역이며 마찬가지로 생명의 사역이다.
율법과 같이 복음마져도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향기” (고후 2:16)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 칼빈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의 기능은 율법에 어떤 부족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에 생겨나는 율법에 대한 단지 “우연적 (accidental)”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아닌 율법을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으로 부른다. 이 사실에 대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많은 사람에게 죽음의 경우가 된다고 해도, 복음은 여전히 그 복음이 값없이 하나님과 화해를 제공하고 중생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생명의 교리라고 옳게 불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위반자를 영원한 죽음으로 위협하고 의에 대하여 순종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고치지 못하고 다만 선한 삶을 위한 법칙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율법은 다만 정죄밖에 할 수 없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치료의 어떤 희망도 제공하지 않고 병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그리고 실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 복음의 기능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을 인간 자신에게 포기하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을 불가피한 죽음에 맡기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복음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 결과 생명의 문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죽이는 것은 율법의 영구적이며 불가피한 우연 (accidens)이다. 왜냐하면 사도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아래 있는 자들은 그 저주 아래 있다.”(갈 3:10) 그러나 복음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17)이며 복음은 반드시 죽이지 않는다.
더욱이, 칼빈은 율법의 일시적 성격에 대하여 말하는데, 바울이 단순히 의식적 율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관찰한다. “내 입장에서”하고 칼빈은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율법의 폐지를, 율법과 선지자들은 요한의 때까지라[마 11:13]는 말에 일치하는 것처럼, 그것이 복음에 반대되는 한에 있어서 구약 전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칼빈은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문맥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후 3:6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광범위하게 그리고 계속하여 이 중요한 절의 맛에 대한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인용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에 대한 대단히 통찰력 있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주석들로부터 다른 많은 구절이 또한 인용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19절에서, 바울은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하여 율법에 대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여기서 또한 그리스도와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 사이의 날카로운 대조를 이해하고 있다.
율법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율법을 버리고 그것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율법 안에 어떠한 신뢰도 갖고 있지 않으며 또 율법은 노예의 멍에 아래 우리를 붙잡아 두고 있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는 율법이 우리 모두를 멸망에 맡기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 안에서 어떠한 생명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 후자의 견해는 더 훌륭하게 맞는다. 왜냐하면 율법이 유익하기 보다 더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악을 만든 자가 된다는 것을 그가 부인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 자체 안에 우리를 죽이는 저주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생겨난다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이다. 그 율법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생명을 주는 교제 안에서, 또 하나의 다른 종류의 죽음이 대조된다. 그는 그가 살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말한다.
“문자”로써 율법과 “영”으로써 복음 사이의 반 명제로부터 생기는 것은 율법의 “굴레”와 복음의 “자유”에 관계된 반 명제이다. 이 구별은 로마서 8장 15절에 칼빈의 말에서 정교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두려움으로 다시 돌아가는 노예의 영을 받지 않았고, 너희는 아들 됨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여기서 분명히 율법과 복음 사이의 비교를 분명히 이해한다.
이 두 굴레의 영과 양자의 영은 두려움과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졌다.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은, 우리가 본대로, 그러한 반대가 되는 것으로부터 더욱 더 명료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히브리서 12:18절 이하에서 반대 명제를 이해한다. 그는 양자의 영이 옛 언약에 없었는지 이 본문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목한다. 그는 이것을 부인한다. 그는 율법에 대한 거짓 사도 때문에 이 같은 사려 깊은 대조를 바울이 한 사실로부터 그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바울이 그와 같이 날카로운 대조를 했는지 설명한다.
은혜의 언약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바울은 율법에서 언약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에 반대하여 율법 자체에 독특한 것만 중시하기 때문이다. 즉, 죽음의 위협으로 범법자를 명령하고, 금지하고, 구속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는 율법에 율법 자체의 성질을 돌린다. 이때, 율법은 복음과 다르다. 마지막으로, 그 자체로 고려되는 율법은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그 율법의 비참한 굴레에 복종하는 자를 다만 구속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조건을 이행하는 것 외에 다른 복을 약속하지 않고, 모든 범법자들에게 죽음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 무서움으로 양심을 억누르는 굴레의 영이 있는 것처럼, 복음 아래서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하고 우리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양자의 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좁은 의미의 율법과 복음의 중대한 구별이 있음에 대한 문제를 여전히 제기해야 한다. 어떻게 율법이 사람들을 공포의 굴레로 가져가고, 정죄하고, 죽이는 문자가 되는가를 설명하는 반대 명제의 초점은 무엇인가?
칼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율법과 믿음의 모순은 칭의의 동기 때문이다. 인간이 믿음으로 그리고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두 가지 설명을 조화시키기 보다 불과 물을 더 쉽게 하나로 만들 것이다. 율법은 믿음에 속하지 않는다. 즉, 율법은 믿음과는 완전히 낮선 인간을 의롭게 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율법의 “의롭게 하는 방법”에 대한 언급은 “법적 약속들”과 “복음적 약속들” 사이의 칼빈의 구별을 상기시킨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기 때문에 율법의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그 개념의 차이는 더 이상 부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이 의를 성취하는 두 모순되는 방법은 율법과 복음의 반대 명제의 중심의 초점이다. 하나는 행위에 의한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에 의한 방법이다. 이것은 두 종류의 약속들, 곧 하나는 법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적이라고 하는 약속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점에서 그 반대 명제는 불과 물이 반대가 되는 것처럼 가장 날카롭다.
물론 의를 성취하는 이와 같은 방법이 모세의 “전체 율법” 또는 “보편적 직분”에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보편적 직분에서, 모세는 또한 복음 선포자였다. “모세가 가졌던 보편적 직분은 경건함에 대한 진정한 법칙으로 사람들을 교훈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회개와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의 값없는 약속들인 약속들을 내 놓지 않고는 가르쳐지 못한다.”
회개와 믿음 두 가지 모두를 전한 선포자로써 모세는 그의 보편적 직분에 의하여 복음 선포자였다. 그러나 모세는 그에게 맡겨진 “독특한 직분”을 또한 가지고 있었다. 즉 “그러므로, 행위들에 대한 참된 의의 성격을 가르치는 기능은 칭의와 함께, 옳게 그리고 독특하게 모세에게 돌려 졌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기대되는 보상과 그것을 어기는 자들에게 기대되는 형벌이 어떤 것인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기능 또한 모세에게 돌려졌다. 율법이란 말이 이와 같이 재한 된 의미에서 사용될 때마다 언제나, 모세는 암시적으로 그리스도와 대조시키고 있다.”참된 의를 가르치는 이 독특한 사역이 “옳게” 그리고 “칭의와 함께” 바울에 의하여 모세에게 돌려 졌다고 칼빈이 주장하는 것을 잘 주목하라. 거짓 사도들의 교훈들이 바울에게는 율법과 복음을 너무나 날카롭게 대조시키는 경우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 반대를 칭의에 주었다.
한편으로 모세의 보편적 직분과 전체 율법, 다른 한편 좁은 의미의 또는 단순한 율법과 모세의 독특한 직분의 이 구별은 모세의 사역 내부에 날카로운 긴장을 만들어 내고, 차례로 율법과 복음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이 긴장은 두 언약의 본질의 일치와 형식의 차이와 함께, 두 언약들의 일치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IV. 결론
율법과 복음 이해는 죄인의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므로 그 말의 재한과 그 말이 포함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개신교 신자로써 너무나 우리의 생각에 칭의의 동기와 함께 기억되는 율법과 복음의 반대 명제만 기억하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인 율법이해를 오해할 수 있다.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가 물과 불을 결합하려고 하는 것같이 정 반대임을 우리는 안다. 이 대립되는 율법의 좁은 의미에서 율법이해와 함께 율법과 복음이 본질에서 일치하고 형식에서만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의 반대 명제인 좁은 의미의 율법이해를 누구보다 잘한 자이다. 우리는 복음에 반대인 율법이해와 함께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규범인 도덕법이 영원한 하나님의 뜻임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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