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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실제(갈라디아서 2장 17절~21절)

by 【고동엽】 2023.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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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실제(갈라디아서 2장 17절~2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흔히 '개혁'이라는 단어에 관심의 촛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개혁적 신앙이라고 하면 흔히 사회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경제개혁이니 교육개혁이니 할 때의 '개혁,' 다시 말하면 외적 환경의 개혁에 관심을 가지기 쉽습니다. 세상을 개혁하는 사람,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 이렇게 생각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깊이 연구해보면 정작 그 주역인 마르틴 루터는 사회개혁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나 자신의 개혁'이었습니다.


나의 생명, 나의 영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실존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 문제가 바로 해결될 때에 라야 교회가, 사회가, 세상이 개혁되는 역사가 파급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는 오로지 나의 죄, 나의 영혼, 나의 생명에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개혁자의 관심이요, 나아가 종교개혁의 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영생은 더욱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마는, 이 생명의 문제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마는, 생명의 문제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 나의 영혼에 관한 문제야말로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입니다.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가장 현실적이요, 가장 우주적이면서도 바로 내 앞에 당면한 문제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생명'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육체적 생명이 있습니다. 이른바 생리학적 생명(biological life)입니다. 이 생명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숨을 쉬고 먹고, 자고,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생리학적 생명을 가졌기에 교회에도 나올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생명입니다.
둘째로, 철학적 생명이 있습니다. 의식적 생명입니다. 제가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73년도에 자동차 사고를 당한 목사님인데 지금까지 식물인간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내도 자녀도 누구인지 모릅니다. 떠 넣어주는 음식은 삼킵니다. 그렇게 20여 년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사모님을 만났는데,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난처합니다. 제 딴에는 아픈 마음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저 안녕하시냐고 평범하게 인사를 드리고 말았습니다마는, 사모님은 제게 느닷없이 한마디합니다. "아직도 안 죽었어요." 얼마나 지겨웠으면 그랬겠습니까? 육체는 분명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된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것입니까, 살아 있는 것입니까? 정신적인 생명이 없습니다. 철학적, 이념적 생명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먹고 입고 자는 것 말고는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이고자 하는 생각을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숨은 붙어 있지만 죽은 사람입니다.


셋째로, 도덕적 생명이 있습니다. 윤리적 생명이라고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파손된 양심의 소유자가 많습니다. 사람에게 양심은 배에 나침반이요 키와도 같습니다. 키 없는 배, 나침반 없는 항해를 상상해보십시오.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양심을 포기한지 오래되었습니다. 난파된 배와도 같이 파손된 양심의 소유자가 많습니다. 혼자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아이들이 놀고 있는 광장으로 차를 모는 인간을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도덕성이란 마치 정조와 같아서 한번 깨어지고 나면 원래대로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자포자기합니다. 알콜중독자니 마약중독자니 도박꾼이니 폭력주의자니 하는 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속합니다. 이것이 우리 세대의 부조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파렴치한한테 "너는 양심도 없느냐?"라고 물었더니 그 파렴치한,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을 뭣하러 가지고 다녀?"라고 대꾸하더랍니다. 양심을 떠난 사람은 생명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도덕성을 잃고 사는 자는 산 생명이 아니라 죽은 생명입니다.


넷째로, 사회학적 생명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바 명예니 체면이니 인기니 하는 것들입니다. 요즘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체면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제 실속만 차리느라고 명예도 버립니다.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문제입니다. 특별히 젊은이들, 명예를 소중히 여길 줄 모릅니다. 명예는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할 때, 남학생만 있었지 여학생이 없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여자대학에서 여학생들을 데려옵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잔뜩 데려다가 신나게 파티를 즐기고 밤 11시가 되면 어김없이 돌려보냅니다. 간혹 여학생들이 마음에 드는 남학생을 붙들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사정을 해도 절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파티는 끝났으니 안녕히 돌아가십시오"입니다. 박절하게 거절합니다. 제가 궁금해서 한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프린스턴인의 명예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한 여자로 인하여 허우적거리다가 공부에 소홀해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아주 대단한 자존심입니다. 명예가 소중한 줄 모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명예, 체면, 인기---중요한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 율법적 생명이 있습니다. 'legalistic life'입니다. 의가 무너지면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의와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데에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죄를 짓고 수배를 받아 쫓겨다니던 사람도 10년이 지나면 법적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른바 법적 시효가 끝나 처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달을 남겨놓고 자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피해 다니는 생활을 더는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의를 잃고 사는 것은 숨을 쉬어도 죽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 생명입니다. 'spiritual life,'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끗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대홍수 전의 타락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3절)"---하나님의 형상은 다 죽어 없어지고 고깃덩이 곧 육체적 욕망만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에 다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대홍수를 내어 쓸어버리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지저분한 쓰레기를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영적 생명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동물적 생명만을 놓고는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도덕도 진리도 없고, 명예도 의도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가장 근본적이요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성경은 거듭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말씀에서 죽는다는 말을 두 번, 산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죽고 사는 생명 문제를 실제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묘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죽음에는 피동적인 죽음이 있고,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다가 하는 수없이 죽어지는 죽음과 나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죽음이 있습니다.


왜 스스로 생명을 버립니까? 더 귀한 생명을 위하여 덜 중요한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정치적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도덕적 생명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적 생명 하나 살려보겠다고 도덕적 생명을 버리고 양심을 팔았습니다마는, 그러고 나니 어떻게 됩디까? 인격이 파탄맞고 말았습니다. 도덕적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얻으려 했던 정치적 생명마저 끝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생명을 찾기 위하여 덜 중요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사회적 체면을 살리자고 진리를 버립니다. 육체적인 생명을 위하여 신앙을 버립니다. 영적 생명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증거 해주시는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해보십시다. 영적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육체를 버렸습니다. 거룩한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세속적인 것들을 버렸습니다. 신령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속된 것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삶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 상태는 어떠합니까?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고 죽은 것은 무엇입니까? 혹 죽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명에 대한 올바른 진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섯 가지의 새 생명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율법을 향하여 죽은 바 새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19절)"---그러므로 나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0절에서도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율법 앞에 죽습니다. 율법의 무서운 심판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 앞에서 죽임을 당하면 심판이요, 스스로 자기를 죽이고 버리면 회개입니다. 쉬운 예로, 어떤 사람과 시비가 벌어졌다고 생각해봅시다.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해가면서 끝도 없는 시비를 계속 해댈 것입니까?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한마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이 한마디로 모든 시비가 끝납니다. 그 따갑고 날카로운 심판의 화살도 그 순간에 멈춥니다.


율법은 산 자를 공격하지 죽은 자 앞에서는 자비롭습니다. 죽은 자는 풀어놓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씀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신비로운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새 생명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19절)."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목적의 새로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목적으로 살아가는 새 생명입니다. 목적이 새로울 때에 그 사람은 새사람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새 생명을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20절)"---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과 6장 14절, 로마서 6장 8절, 골로새서 2장 20절에서도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거기에 나도 함께 죽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로마서 6장 4절이나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는 함께 장사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함께 죽을 뿐만 아니라 장사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매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새 생명을 체험하지 못했습니까? 완전한 죽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바로 죽이지 못할 때, 하나님은 내가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넷째, 그리스도가 사는 새 생명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0절)." 생명의 새로운 능력을 말씀함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용기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용기, 그의 사랑, 그의 능력, 그의 생명력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새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내가 수용하면서 얻어지는 진정한 믿음의 생활을 말합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새 생명을 말씀합니다. 율법적 관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난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으로 삽니다. 율법의 질서가 아니라 은혜의 질서 안에서 삽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할 것 없이 두 질서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 볼 수 있고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비판적으로 볼 수 있고 은혜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보나 세상을 보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은혜의 질서 안에서, 은혜의 시각 안에서, 은혜의 철학 안에서 살아갑니다.
바울 사도는 17절에서 '우리'라고 한 지칭을 18절부터는 '나'라고 바꾸어 말씀합니다. 생명은 언제나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나'라는 단어가 자그마치 열 한 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에 큰 사건이 있습니다. 먼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또한 나는 내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내가 아니다, 법적으로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더는 옛날의 내가 아니다---철저하게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아니요, 미래의 나도 내 이상대로의 내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은혜 안의 나입니다. 현재도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실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자세입니다. 나는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나는 철저하게 내가 아닙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나 아닌 나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나 아닌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보다도 방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하루는 우연히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함께 놀던 아가씨들이 따라나오며 반색을 합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 동안 왜 안보였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가며 중얼거리더랍니다. "너희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 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옛날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다." 이렇듯 철저하게 나 아닌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가 동기요, 그가 목적입니다. 그가 생명의 힘이요, 그가 가치의 기준입니다. 그가 기쁨이요, 그가 은혜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것을 신비롭게 표현합니다. "To live is Christ."---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영혼은 육체의 생명입니다.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한 믿음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영혼은 죽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만 생명이 있습니다. 믿음은 영혼의 생명이요, 그리스도는 믿음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이 땅에 오셨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가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정리해보면 법조항이 무려 613조항이나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다윗은 시편 15편에서 11개의 조문으로 압축했습니다. 이사야 33장 15절에서는 6개의 조문으로, 마가 6장 8절에서는 3개의 조문으로, 다시 이사야 56장 1절에서는 2개의 조문으로 분명하게 요약합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는 단 한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이것저것 복잡하게 다 알 필요 없습니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긍휼----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이요 생명규범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전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두고 '엔 크리스토'----'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신비로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이 그의 서신 전체를 통하여 164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구원 사건의 직설법이요, 그리스도 실존의 객관적 기초입니다. 구체적인 실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신비로운 말씀인 동시에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오직 그의 의로, 그의 은혜로만 살아갑니다.
종교개혁은 사람의 의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만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이것이 생명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이것이 나의 실존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십니다---이것이 나의 능력이요 지혜요 윤리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 은혜 안에 사는 의인---죄인인 동시에 의인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제가 아는 어느 여집사님은 교회의 피아니스트인데, 외모도 빼어나고 재주도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는 원만한 가정인데, 그실 집안에서는 문제가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가 둘이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늘상 티격태격 입니다. 몇 달 함께 사는가 싶으면 또 별거를 합니다. 이같은 일이 반복되니 교인도 많지 않은 교회에서 오죽이나 말이 무성했겠습니까? "또 헤어졌다고 하던데?" "이번엔 아주 이혼할 거래." "다시 합쳤대." 도대체가 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여집사님을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왜 그리 시끄럽소? 행복하게 살기에도 짧은 세상인데 복잡하게 살려 하지 말고 원만하게 살아보십시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요." 그 여집사님, 대답인즉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방법은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고민이 있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할 것도 없고 분할 것도 없습니다. 아직 육체가 살아서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별것도 아닌 인간이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죽어보세요. 환한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고맙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절대로 어두울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내가 아직 덜 죽었기에 이 모양인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버려 완전히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살리실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적인 인간이 아니라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 생은 실제요 현실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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