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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사도행전 1:6-11)/곽선희

by 【고동엽】 2023.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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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사도행전 1:6-11)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적으로 큰 수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은 견디다못해 북간도를 비롯한 온 세계로 정처없이 망명의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일제에 언어도 빼앗기고 민족성마저 말살될 지경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의 마을마다 그들의 신사를 지음으로 종교성까지 침해하려들었습니다. 이렇듯 정치, 문화, 종교 할것없이 모든 것을 빼앗긴 우리 민족은 말할 수 없는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해방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독립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독립의 그날을 기다리며 지은, 해방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당시 심정을 담은, 애국시인 심훈 선생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주기라도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우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고난 속에서도 잃지 않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소망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토록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겪은 지난날의 고난을 너무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전혀 모르는 것처럼, 어느새 이렇듯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유독히 구약성경을 좋아합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면 곳곳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수난사를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숱하게 수난을 겪었습니다. 바벨론 포수생활을 겪었는가 하면 앗시리아, 이집트, 헬라의 지배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점령하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저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없고,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약탈당하고 짓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들은 언젠가는 나라가 회복되리라는 희망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유독 구약성경을 좋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유대사람을 빼놓고 구약성경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한국교인들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일본의 억압에 눌려 있을 때에 우리 민족은 구약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의 설교문들을 연구해보면 태반이 설교의 성경본문을 구약성경인 선지서(先知書)에서 취하고 있습니다. 예언서(豫言書)에서 취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사를 보면서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 민족을 향한 말씀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같은 억압과 설움 속에서도 '나라의 회복'이라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회복이란 곧 자유와 번영과 영광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회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와 해방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적 종말론적 세계적인 변화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세속적인 나라를 생각하기도 하고, 신령한 나라, 종말론적인 나라의 회복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구별되어 있지 않은, 연계된 상태에서 저들은 나라의 회복을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메시야의 세대와 메시야의 관계는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오늘날까지도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세대를 위하여 메시야가 있는 것이냐, 메시야가 있어서 메시야의 세대가 오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메시야를 a Christ, the Christ로 구분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a Christ는 평화와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는 메시야의 세대, 보다 잘사는 세대, 보다 안정된 세대, 모두 평화롭게 사는 세대를 이루기 위하여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자는 전부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도 메시야가 될 수 있고, 예술가도 메시야가 될 수 있고, 농부도 메시야가 될 수 있고, 정치가도 메시야가 될 수 있어요. 이렇듯 인간적인 메시야 세대관에 집착하는 나머지, 메시야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데에 공헌하는 자는 모두가 하나의 작은 메시야다, 라고 하는 범 메시야적인 사상이 예나 오늘이나 우리에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성경은 the Christ----그 메시야, 오직 한 분인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로 오시는 종말론적인 그 메시야만이 메시야요, 그 메시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세대는 오는 것이라고 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메시야가 먼저요 그 다음이 메시야의 세대다---이것이 성서적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이 메시야의 세대와 메시야에 대한 확실한 해석은 내리지도 않은 채 메시야를 학수고대 했습니다. 메시야만 오면 만사 오케이, 잘살게 되고 원수는 다 물러가고 평화가 오고 자유가 오고 번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젊은 사람들의 표현대로 단번에 화끈하게 오고, 영원히 거하는 메시야의 나라를 기대한 것입니다. 흥망성쇠라는 역사의 굴레 속에, 그 전철을 따라 다시 망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요, 다시 타락하는 나라가 아니요, 다시 점령되는 나라가 아닌, 완전히 회복된 나라, 영원한 나라를 기다린 것입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시절만큼 나라의 영광과 영화를 누려본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다윗의 나라, 솔로몬의 왕국과 같은 시절이, 그런 나라가 다시 임했으면, 종말론적인 영원한 메시야의 나라가 왔으면 하고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성경말씀을 믿고 성경역사를 외면서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메시야를 낳겠다고 베들레헴에 가서 노처녀로 죽은 여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저들은 성경을 믿었으며, 메시야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만 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 메시야 대망(待望)이 그들의 사상이요, 그들의 철학이요, 그들의 정치요, 그들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오셔서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권능을 행사하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고, 권세 있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메시야의 모습은 저들을 놀라게 했으며 만족케 했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권능을 지닌 그 메시야가 언젠가는 정말 큰 역사를, 메시야의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우주적인 큰 역사를 이루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기적의 메시야를, 능력의 메시야를 바라보면서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그 메시야가 십자기에 달려 죽고 만 것입니다. 저들의 실망은 대단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과 동행하게 된 사람이 예수님인 줄도 모르고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분으로 믿었는데 죽었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로마 군인에 의해서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분이 부활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어쨌든 저희는 실망했노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 26절)." 왜 고난의 메시야를 모르느냐, 고난의 메시야를 통하여 영광의 메시야가 있는 줄을 왜 모르느냐고 성경에 기록된 바 당신에 관한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주십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나라를 회복해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리라 기대했고, 왔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사실, 그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로마의 엄청난 권력 앞에서 중동지구의 조그마한 나라 유대로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꼼짝못하고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왔으니 저분이 이루실 것이다---모든 것을 그 메시야 한 분에게만 기대했습니다.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는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심으로 인기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온 백성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백성들의 그러한 기대를 등에 업고 '예수님은 그대로 계십시오. 그냥 능력만 행사하십시오. 이 인기를 몰이서 우리가 정치혁명을 하겠습니다'하고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려고 했던, 소위 정치적 혁명을 꾀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대표자로 우리는 가룟 유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분을 모시고 혁명을 일으키자, 이 나라를 회복하자 하고 팔을 걷어붙이는 적극적이고 극단적인 무리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 암시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편에서는 그냥 막연하게 나라가 회복되고, 세속적인 욕망이 성취되고, 정치적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라고 기다리는 군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에서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저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이제야말로, 바로 지금이야말로 저분이 메시야의 나라를 이루실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그 앞에서 이주 조심스럽게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이 얼마나 절실하고 간6절한 질문입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후에는 고통이 없는, 주님께는 능력이 있으므로 이후에는 가난이 없는, 주님께는 사망을 이기는 권세가 있으므로 이후에는 전쟁이 없는, 이후에는 아무 고통도 없는, 이러한 메시야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었기에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물음은 어쩌면 당연한 물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마치 동문서답 같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절)" 하고 여쭙는데, 예수님께서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8절)"고 대답하십니다. 앞뒤가 좀 안맞는, 피상적으로 보면 분명히 동문서답입니다. 그러나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면 이것이야말로 저들의 물음에 대한 해결입니다. 구체적인 방도를 가르쳐주심이요, 저들의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주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야흐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바로 지금 그들이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까지 일러주시는 중요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해답이요 가장 현실적인 해답이요 종말론적인 해답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해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의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 바 아니요(7절)"---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그 시기와 때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망할 때에 이유 있고, 흥할 때에 이유 있습니다. 나라가 회복되는 데에 이유 있고, 나라가 소멸하는 데에 이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역사는 운행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복도 은혜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 민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나, 이 민족이 나라를 회복하여 영광을 누리는 것이나, 오늘의 번영과 안정을 누리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 역시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로 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전파에 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선교가 해결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사람 한사람 예수믿게 되는 것이 바로 해결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우러러보는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가운데 '내가 원하는 나라'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하게 할만하고, 우리의 무력(武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하면 족합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입니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라가 번영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거든 먼저 의롭게 살기를 바라십시오. 잘살기를 바라지 말고 진리대로 살기를 바라십시오. 이 나라가 온 세계를 지배하기 바라지 마십시오.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증인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십시오. 온 국민이 겸손하고, 온 국민이 검소하고, 온 국민이 부지런하고, 온 국민이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시다.
구조문제, 제도문제 모두 정치적으로 변혁을 이루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만방에 전해져 땅끝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여기에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온 세계가 가난한데 우리나라만 잘살겠다면 됩니까? 온 세계가 흔들리는데 우리나라만 평안하겠다면 됩니까?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일 없이는 이 나라의 안정도 없습니다. 이 나라의 자유도, 평화도 보장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은 말씀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그 해결은 말씀에 있고 성령에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能)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神)으로 되느니라"하는 스가랴 4장 6절의 말씀과도 같이,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은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문제요, 그 중심이 문제입니다. 밝은 판단이 있어야 하고, 자기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어찌 보면 더딘 것 같습니다마는, 이것은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로만 가능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경륜 앞에서 진실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역할 때에 비로소 나라의 회복은 가능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너희가 권능을 받음으로 가능하다고 대답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이것이 나라 회복의, 해결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나라의 회복은 더 넓고 깊은, 우주적인 하나님나라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회복, 새 나라의 건설이라는 것은 복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큰 기적을 바라지는 마세요. 한 심령 한 심령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데서부터 시작입니다. 사람을 바꾸었다고, 제도를 바꾸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문제요 말씀의 문제요 성령의 문제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 중생하고 증인이 될 때에 비로소 이 나라의 회복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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