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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어버이 주일설교

예수님처럼 효도하라 (요 19:25-27)

by 【고동엽】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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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처럼 효도하라  (요 19:25-27)

기독교는 부모도 모르고 조상도 모르는 종교라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독교는 부모도 모르고 조상도 모르는 그런 종교일까요? 물론 성경을 읽다보면 의미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삶이 효도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여지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유월절 절기 행사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보니까 아들 예수가 없는 겁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니 아들 예수가 성전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흘만에 아들을 다시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눅2:49절을 보면 아들 예수가 자신을 찾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또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어느 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진정한 의미를 알면 다 이해가 되고 오해가 풀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정말 부모도 모르고 조상도 모르는 불효막심한 종교일까요? 예수님은 부모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자신만을 위해 인생을 살았던 불효자였을까요? 아닙니다. 기독교만큼 부모 공경에 강조하고 가르치는 종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십계명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제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제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관한 계명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인륜의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부모공경입니다. 그리고 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에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출21:15절에 보면 부모를 업신 여기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12살 어린 시절에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눅2:51절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도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마지막 그 죽음의 현장에서도 어머니를 기억하시며 마지막 효도를 다 하셨습니다.
□ 예수님이 처한 상황
먼저 예수님이 처하여 있는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가운데 계십니다.
18절을 보면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못박힘을 당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예수님의 손과 발은 십자가에 못박혀 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머리와 두 손과 발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체중을 이기지 못하여 손과 발은 찢어지고 있으며 피를 너무나 많이 흘렸기에 목마름은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8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의사인 리이터 박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찔린 곳에는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고 몸은 심한 긴장으로 인하여 혈액순환에 장애를 일으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피는 머리로 솟구쳐 극심한 두통을 일으켰을 것이고 폐에 있는 혈액은 누적되어 가슴을 압박하여 형언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피가 응고되어 멈추기 시작하면서 근육, 혈관, 신경들이 점점 굳어져 움츠러 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처절한 상황과 타는 듯한 목마름의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어서 한번 내려와 봐라”는 비웃음과 조롱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26절)

그리고 자기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습니다. 26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26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여기에 사용된 “여자여 보소서”라는 말은 무례한 호칭이 아닙니다. 여자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귀나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어떤 여인을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고대 문서를 보면 왕후에게 사용했던 존칭어가 바로 이 '귀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유명한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저 유명한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첫마디가 "귀나이" 여인이시여!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할 때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곁에 서 있던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는 지금 죽지만 이제부터는 바로 요한이 나를 대신하여 아들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말입니다.

□ 왜 예수님은 여자여 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을까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머니!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시고 여자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메테르’ ‘어머니라’는 표현 대신 ‘귀나이’ ‘여자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그것은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시는 어머니의 아픔을 반감시켜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 줌으로 어머니의 생각을 변화시켜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고자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자여!라고 부른 그 호칭이 바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성경에 “여자여”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이고 두 번째로는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마칠 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그때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마치는 운명 직전에 또 다시 어머니를 여자여!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공생애의 시작과 마지막에 이렇게 예수님을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여!(물론 최고의 존칭어이지만) 라고 부르신 것은 자신이 바로 육신의 아들이지만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마치고 계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창3: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처럼 남자 없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용된 여자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70인 역에서 ‘귀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라 부른 것은 당신 자신이 바로 창3: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야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요셉과 정혼하고 아직 동침하지 않았을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러므로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나신 이 아기가 자신의 혈통을 통한 아기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품 안에서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손에서 걸음마를 배우며 어머니의 무릎에서 글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아무리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래도 나은 정이 있고 기른 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 십자가에 못이 박힌채로 피흘 흘리며 죽어갑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자신이 손수 만들어 입혔던 그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지며 희희낙락 거립니다. 지나가는 자들도 고개를 흔들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시므온이 예언한 것처럼 마리마의 심정은 칼이 자신을 찌르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 효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메테르’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귀나이’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어머니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하여 어머니의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반감시켜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어머니 지금 나는 육신의 아들로서 이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너무 슬퍼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죽음 가운데서도 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계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효도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 효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에게 잘 해 드려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그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자녀는 내 부모가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의 방법으로 열심히 효도를 하려고 합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부모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부모님이 무엇으로 인하여 주름살이 깊어지고 밤잠을 설치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무엇을 인하여 마음이 울적해 계시는지 아십니까?
부모는 자식이 마음을 몰라 줄 때 마음이 아픕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려고 구테타를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나중에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그 압살롬이 전쟁터에서 죽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삼하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 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도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아들이지만 그 아들 때문에 많은 세월 도망을 다니고 쫒겨 다녔지만 그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소리내어 울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마음이 우리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109편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나를 도리어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자식이 못쓸 병에 걸렸을 때에 자식을 대신하여 죽을 수만 있으면 죽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의 그같은 마음을 몰라 줄 때에는 참으로 죽고 싶도록 외롭고 슬픈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귀찮으니까 집에 오지 말라고 말 해 놓고도 안 보면 보고 싶고, 전화를 열 번, 스무번 받아도 또 기다려 지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이드신 어머님이 맨날 주변 사람들로부터 식사 대접만 받다보니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자신이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돈을 달라고 하니까 “안 사람한테 애기해 보세요. 아마 줄 겁니다” 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할 수 없이 자존심을 버리고 며느리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4만원을 주더랍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돈을 가지고는 대접이 불가능할 것 같아 다음날 3만원을 더 받았습니다. 그런데 7만원을 가지고는 여러 사람들을 대접할 수 없을 것 같아 이틀 후에 용돈을 더 달라하여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실의 탁자에 놓여 있는 가계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웬수 9월 14일 4만원. 웬수9월 15일 3만원. 웬수 9월 17일 4만원. 그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고 합니다. 효도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해라는 시가 있어 소개합니다.

《 오 해 》 - 배경음악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 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빨리 불러 와 좋은 음식 앞에서 먼저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 주머니에는 늘 돈이 얼마쯤은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오해를 오랫동안 해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이제야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보라 네 어머니라

27절을 보면 드디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27절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 그 제자는 바로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인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면서 어머니를 친 어머니처럼 모실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때부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처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를 다른 제자들이나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요한에게 부탁하셨을까요?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제자들은 일찍 순교를 당할 것이고 요한만이 가장 오래 살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참된 신앙을 가진 자 만이 참 효도를 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때가지만 해도 산 믿음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진정한 참된 효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신자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효를 한다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면서 “보라 네 여자이니라” 아니라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나이가 아닌 메테르, “여자여”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은 요한아! 비록 내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네 곁에 서 있는 우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느냐? 지금 네 곁에 계신 어머니 마리아는, 아니 네가 장차 돌 보아 주어야 할 어머니 마리아는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릎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나를 잉태하셨고 그 해산의 수고를 통해 나를 낳아 주신 분이시다. 그리고 나를 키워 주신 분이시다. 만일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희생과 수고가 없었다면 어찌 내가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제자 요한아! 나로 인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던 분이시고 나를 위하여 많은 눈물을 흘리신 나의 어머니시이다. 그러므로 나의 육신의 어머니를 잘 모셔다오. 이 땅에서의 어머니의 인생의 여정을 네가 책임져 다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부모가 배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훌륭한 가문을 남겨주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가난하여 많은 유산을 남겨주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아니 인생에 오점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나를 낳아 주신 것만으로도 나의 어머니라, 아빠라 부르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긍지가 되듯이, 나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나의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보십시오, 저의 어머니이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보십시오 저는 부모님의 자식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 슈퍼볼 MVP를 수상한 하인스 워드 선수를 보십시오. 그는 수퍼보울에서 최우수선수(MVP)에 등극했을 때도 모든 공로를 어머니에게 돌리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지난 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정말 강한 분이십니다. 어머니는 제게 큰 영감을 주시고 항상 이끌어 주셨습니다. 어머님이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의 자랑입니다” 라며 어머니를 인정하고 어머니를 자랑했습니다. 한국 방문 내내 기자회견을 하든지 어디를 방문하든지 항상 “어머니, ...우리 어머니”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감동이 되었으면 노대통령까지 효자상을 주고 싶다고 했겠습니까?
효도는 부모님을 인정해 드리고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 사역과 사명 때문에 부모 공경의 도리를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는 그 순간에도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홀로되신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사역과 사명 때문에 부모 공경의 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예수님은 어떤분이십니까?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요1:1)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1:29,36) 이 세상의 참 빛이신 분이셨습니다.(1:9)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셨습니다.(14:6) 그래서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그동안 여러 가지 기적과 표적을 통하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되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요2장)
거의 죽게 된 왕의 신하를 살려 주셨습니다.(요4장)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요6:4-13)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시기도 하셨습니다(요6:16-21)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요9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요11장)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인간의 아들로서의 본문을 망각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아들로서의 도리도 잘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구세주로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시면서도 한 어머니의 아들로서 어머니를 책임지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사역과 사명 때문에 부모공경의 도리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부모공경의 도리를 다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 십자가의 효도를 하라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어머니를 기억하시고 그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심으로 육신의 아들로서의 효도를 다하셨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효도를 십자가의 효도라 부르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효도는 고통 속에서 하는 효도를 말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자신의 한 몸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 속에서 하는 효도가 바로 십자가의 효도입니다. 예수님은 그 타는 목마름의 고통 속에서도 효도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돌보지 못하고 효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몸이 약하고 ...물론 몸이 아프면 내 손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이 듭니다. 힘들 땐 누가 옆에서 말 거는 것도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처절한 아픔과 상황 속에서도 부모님을 잊지 않으셨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자녀들 뒷바라지 하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을 생각하며 십자가의 효도를 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효는 유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효자집안에 반드시 효자가 나고 불효자 집 안에 반드시 불효자가 나옵니다. 자녀들로부터 효도받고 싶으면 지금 부모님을 잘 섬기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효도는 살아계실 때 하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작년 4월 24일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사실은 90회 생신 기념으로 온 가족이 함께 중국 여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중국여행을 앞두고 운동화도 준비해 놓으시고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여행 일주일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셨고 그만 하나님의 나라로 가셨습니다. 항상 건강하실 것 같지만 좀도 오래사실 것 같지만 앗차 하는 순간에 부모공경의 계명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계명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지금 하는 것입니다.
효도는 철학이 아닙니다. 사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땅위에 주신 첫 번째 명령입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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