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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 합시다 (요일 5:2)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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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 합시다     (요일 5:2)

교육하고 선교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되 1월은 사랑으로 연합하는 달이며 2월은 계명대로 사랑하는 달이며 3월은 하나님을 사랑 하는 달입니다.

(요일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증거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말씀합니다.

중생한 자들에게 베푸는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 혹은 참된 복음적인 성격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줍니다.

사랑의 진실성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있습니다.

신앙 없이는 생활이 없는 것처럼 사랑 없이는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랑에서 나온 갈보리의 화해로 이루어져서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그를 위하는 우리의 사랑도 포함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우리의 사랑이야말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든 기초요 우리의 최고 영적 기쁨입니다.


신앙을 나타내는 말들보다 사랑을 나타내는 말들이 더 많은데 이 말들은 다 내부의 주관적인 의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령 서부 아프리카 사라하 사막의 변두리에 사는 하베 족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신다,'라고 한다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람의 마음속에 놓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이가 성령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계실 수 있다는 뜻이라 합니다. 영혼을 깨우쳐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게'하는 것은 사랑만이 하는 것입니다.

멕시코 오악사카 산중에 있는 싸포텍 인디언은 하베 족과 반대되는 말로사랑을 표현하였다합니다. 하나님을 사람의 마음속에 둔다고 말하는 대신에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나갔다.'라고 한다합니다.

하베 족과 싸포텍 족이 모두 옳다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사신다는 데도 뜻이 있고 `우리 마음이 우리 것이 아니다.'라는 데도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사랑의 대상은 땅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가난한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분반공부를 하고 있었다합니다. 선생님이 한참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잊어버리고 계신가봐요. 그러니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옷도 누더기를 입고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살게 되지요." 그 때 또 다른 아이가 일어섰습니다. 그도 역시 가난하여 헌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모두 기억하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좋은 부모님을 주시고 행복한 가정을 주신 것이 아니겠어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신다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사랑의 진실성은 경건한 복종에서 나타납니다.

  경건은 신앙의 뿌리와 같습니다.

뿌리는 관다발 식물의 기관 중의 하나입니다. 몰론 양치식물의 솔잎 란처럼 뿌리를 가질 수 없는 식물도 있습니다. 또 지상에 나와 있는 뿌리도 있습니다. 이것이 공기뿌리라고 하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뿌리는 땅 속에 있습니다. 비록 뿌리는 눈에 안보이고 밖으로 드러나 있지도 않지만, 사실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건강한 나무를 바란다면 뿌리를 건강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충실한 열매를 얻고 싶다면 먼저 뿌리가 충실해야 합니다. 큰 나무가 되기를 원한다면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출입해도 믿음이 자라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그 신앙의 뿌리가 부실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나무로 비유하면 그 뿌리는 경건입니다. 경건의 뿌리에서 종교의 줄기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가신 한 장로님은 사극을 굉장히 좋아해서 늘 토요일이면 사극 테이프를 몇 개씩 빌려다가 열심히 시청하셨답니다.어느 토요일 그 장로님은 밤늦게까지 사극을 시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주일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첫마디가 “황은이 망극하여이다”고 나와 모두가 웃었다고 합니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노라면 크리스천일지라도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풍조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처럼 크리스천들이 경건하게 살기 어려운 시대는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텔레비전과 라디오, 무분별한 영화와 언론매체들을 통해 세뇌당하고 영향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당부합니다.


  참된 경건은 기도 생활입니다. 기도란 영혼의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이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호흡이 없으면 질식하고 서서히 죽어가고, 심령이 황폐화되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의 선구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중국 땅을 밟아 평생 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일생을 선교사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죠?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지게 마련입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겐 미치지 못하리 이다 (시 32:6)

  참된 경건은 구제하는 생활입니다. 경건의 내적 표현이 기도라면 외적 표현은 바로 구제입니다. 참으로 경건한지 알고 싶다면 얼마나 구제하는 생활을 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약1:27)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 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경건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지만 자식이나 가족이라고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가정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2절)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진실되게 그리고 복음적인 입장에서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은 서로 같은 것입니다.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십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고아의 아버지인 조지 뮬러 목사님이 어느 날 어떤 청년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뮬러는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청년을 모르는데 나를 잘못 초청한 것이 아닙니까 ?"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시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23년 전 9살 때였습니다. 학교로 가는 길에 과일 가게에서 먹음직한 사과 하나를 훔쳤습니다. 그때 누군가 나의 따귀를 호되게 때렸습니다. 돌아보니 바로 뮬러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는 제 팔 계명도 모르느냐 ?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게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후부터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착하게 살아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잘못을 깨우쳐주시고 교육시켜 주신 것이 고마워서 오늘 이렇게 초대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예쁘고 착하다고 버려 두는 부모가 되지 말고 조지 뮬러처럼 채찍을 들어서라도 잘못을 깨우쳐주고 가르쳐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1924년 제8회 올림픽 때에, 파리에서 열렸는데, 그 때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올림픽 경기에 나가는 에릭 리들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는데, 이 사람은 100미터 선수입니다. 이 사람이 기록이 좋아서 틀림없이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유망주였는데, 하필이면 자기 경기가 그 배치된 것을 보니까 주일날입니다. 주일날 뛰게 되자 이 청년은 뛰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사람들이 그를 비난합니다. 이 사람은 조국을 배반한 자요, 위선자요, 옹졸한 신앙인이요, 비겁한 사람이라고 갖은 욕설을 했습니다. 국가를 대표해서 올림픽에 나간 사람이 주일날이라고 해서 안 뛰겠다는 그런 나쁜 놈이 있느냐고 갖은 욕설을 다합니다, 그러나 나는 주일을 범하면서까지 올림픽 선수 되고, 금메달 목에 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집어치우고 조용히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권유하기를, "자, 100미터는 놓쳤지만 400미터가 남아있는데, 혹시 뛸 수 있느냐?", "해보겠다."고 대답합니다. 100미터 선수가 400미터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출발에서부터 100미터 뛰는 솜씨로 총알같이 뛰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 200미터만 뛰고는 쓰러질 모양이다." 하고 걱정했는데, 400미터를 그대로 주파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100미터 선수인데, 어떻게 100미터 선수가 100미터 뛰는 솜씨로 400미터를 뛰었느냐고, 이런 기적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200미터까지는 내 힘으로 뛰고 나머지 200미터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내가 100미터를 거부했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이제 나머지를 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맡기고 뛰었는데, 이렇게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충성하라신 게명을 지켜야 합니다.

‘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고기가 헤엄칠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우리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말합니다. 아름답던 물고기가 혐오스러워지는 것은 그 물고기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 있기 때문입니다. 논밭에서는 꼭 필요한 흙이 방바닥에서는 닦아내야 할 더러운 것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임의대로 버리고 떠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나,직장에서나,가정에서나,교회에서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십시오. 그것은 견고함과 인내와 피나는 노력이 요구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은 제자리를 지키며 그 곳에서 충성스럽게 맡겨진 역할을 해낼 때입니다.


거룩하라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미국 롱아일랜드 북쪽 끝에서 몇 km 떨어진 황량한 섬이 있다합니다. 이 섬은 '플럼 섬 동물 질병센터'로서, 10년 전부터 구제역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곳이라 합니다. 이곳은 미국에서 유일한 구제역 연구소로서, 안전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인다합니다. 이 섬에서 바이러스 샘플 하나라도 유출되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섬에서 나온 하수나 쓰레기는 모두 열처리를 한다합니다. 연구소 밖으로 나가는 공기도 필터로 정화된다합니다. 실험실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연구소내의 기압을 낮추어 놓는다합니다. 이곳에 오는 외부인은 40년 동안 거의 없었으며, 출입하는 연구원도 안에서 입은 옷은 밖으로 가져갈 수 없으며, 연구실을 나갈 때마다 코를 풀고, 침을 뱉고, 샤워를 해야 한다합니다. 이곳의 안전 관리를 위해 들어가는 예산은 한 해 1천 1백만달러로 백신 개발 예산의 10배 정도라 합니다.

진정으로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력과 대가가 요구된다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거룩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타락해 갈수록 거룩을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연구비의 10배가 넘는 돈을 사용하면서 연구소를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기 위해서 그만큼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는 노력, 삶속에서 거룩한 모습을 나타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마크 트웨인이 경영하는 출판사가 파산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합니다. 그러나 그는 법률적으로는 엄청난 부채를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합니다. 하지만 그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그 문제를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지려 했다합니다. 그는 나이 60세에 관광안내원으로 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합니다. "나는 살아 있는 한 남은 부채를 4년 내에 갚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64세가 되어서는 새로운 기분으로 새 출발을 할겁니다." 그러고 그는 이 말을 덧붙였다 합니다. "명예는 법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명예를 지키고 있는가 살펴봅시다.


  이 계명들을  지키는 데서 영적 형제애가 나오게 됩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신비적인 영적 교제만이 아니고 사랑으로 계명들을 지키는 구체적 생활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세속적인 조건 즉 그들이 부하다든가 학식이 많고 우리에게 친절하며, 우리 교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동하는 은혜가 임하며 그의 형상과 모습이 그들에게 나타나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사랑을 받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 것임을 말해 줍니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와 주 예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할 때 우리 힘만으로는 감당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을 주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래 방탕과 술 취함으로 세월을 보내던 사람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후로는 훌륭한 성자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게 되었다합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간 후 처음에는 수도원 규칙과 덕성을 지키기가 어려워 믿음을 버리려고까지 생각했다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주님께서 그의 영안을 열어 늙은이, 어린이, 성인(聖人) 성녀(聖女) 모두가 기쁨으로 계명을 지키고 천국 길에 오르는 것을 보게 하셨다합니다. 그리고 "네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내 힘에 의지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다합니다. 그 후 그는 깊이 깨닫고 결심하여 열심히 규칙을 지키고 덕을 닦아 훌륭한 성인이 되었다합니다.


사랑으로 연합하며 계명대로 사랑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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