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 교회의 본 (행13:1-3)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초대교회 중에서 안디옥 교회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습니다.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짧은 역사에 초대형 교회로 부흥하였습니다. 무려 남자만 3천명이상 모이는 정도로 부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숫적으로 부흥하는 과정에 구제의 문제로 교회가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안수집사를 세워서 교회가 아주 든든하게 세워져가면서 더욱 부흥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흥의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에 심한 핍박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교회의 7명의 안수집사였던 스데반이 집사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 이후 예루살렘교회의 안수집사들은 흩어지게 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웁게도 이런 핍박과 피난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본문의 안디옥 교회는 바로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흩어져 안디옥에 가서 개척을 한 교회입니다.예루살렘교회와 비교할 때 안디옥 교회는 역사도 짧고 교인수도 작습니다. 그런데 비록 규모는 예루살렘교회보다 작지만 아주 우리에게 본이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강동교회는 강릉지역에 있는 지역교회입니다. 지역교회로서 우리 교회가 본을 삼고 닮아가야 할 좋은 모델이 되는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입니다.
1.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일꾼을 세우는 본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1절에 안디옥교회의 다양한 일꾼들을 소개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기에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신분과 민족과 계급을 초월하여 다양한 일꾼을 세운 것을 봅니다.이것은 이미 주안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다양한 평신도 일꾼들이 세워졌습니다.
먼저 인종의 다양성입니다. 본문에 보면 지도자 중 흑인이 있었습니다.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이 소개됩니다. 니게르는 니그로와 같은 말 흑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소개됩니다. 구레네 지역은 북아프리카 지역임으로 이 사람도 흑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안디옥교회는 이미 흑인을 수용하는 열린 교회였습니다.
다음 안디옥교회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여기 보면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소개됩니다. 헤롯은 주전4년전부터 주후 39년까지 갈리리 베뢰아지역을 통치한 헤롯안디바스였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젖을 먹고 자란 왕실의 쥐족도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왕실의 귀족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평범한 서민지도자와 함께 공존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좋은 일꾼들을 잘 선임하는 교회였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바나바와 사울입니다. 특히 바나바는 행11:24“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하였습니다.그리고 바나바는 큰 부자였습니다. 사울과 더불어 안디옥교회에서 중추적인 일꾼으로 활동하였습니다.또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서 바울로 개명을 합니다. 그는 바로 안디옥 교회의 좋은 일꾼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안디옥 교회 일꾼들을 보면 나이가 많은 바나바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이가 작은 사울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넘어서서 다양한 일꾼들이 모여 있습니다.또 백인도 있었고 흑인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안디옥 교회는 평신도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안디옥 교회가 5명의 좋은 일꾼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꾼을 키운 것입니다. 행11:26에 보면 안디옥 교회는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얻게 되었더라고 합니다. 먼저 교회는 지속적인 양육과 훈련을 통해서 일꾼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꾼들이 유명한 교회로 세워가야 합니다.
보통 교회를 소개할 때 우리는 담임목사를 떠오르게 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를 말을 하면 우리는 보통 담임목사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누가 그 교회를 목회하는 감독인지 그런 부분에 관심이 없습니다 . 그 교회에 어떤 일꾼들이 있는지 다양한 일꾼들을 소개합니다.
다양한 일꾼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양육과 훈련으로 세워질때에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도전이 있습니다.우선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사람을 수용하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피부가 다른 흑인들도 수용했습니다. 또 헤롯가의 높은 신분과 지식을 갖은 사람들도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수용성이 결국 주님 나라를 위란 선교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받게 됩니다. 보통 지역교회가 세워져갈 때 가장 문제가 무엇입니까? 너무 끼리 끼리 모이는 게토화되어지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의 일꾼을 세울때에도 다양한 직업 다양한 학력 다양한 성격의 분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더욱 다양한 사역들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안디옥 교회가 수용한 사람 중에는 너무나도 좋은 그러나 숨은 일꾼들을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어쩌면 안디옥 교회도 사울의 과거를 너무나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앞장서서 반대하고 심지어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기까지 했던 사람이고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울입니다.
사울이 변화받았고 그래서 교회에 들어오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사울의 변화를 의심하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안디옥교회가 그 사울을 받아주었습니다. 만약에 안디옥교회가 사울의 과거에 주목했다면 그를 일꾼으로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변화된 사울 그리고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에 사용되어질 바울을 바라보면서 그를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너무 내 주관성에 근거하고 감정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는데 제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강동교회가 다양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과거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도 주님의 일꾼으로 세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좀 성격이 모가 나더라도 주님의 일꾼으로 세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좀 지식이 짧은 사람도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기준으로 사람들을 제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평신도 일꾼들이 세워져서 사역을 동역해야 합니다.좋은 여자 일꾼들도 세워져야 합니다. 좋은 남자 일꾼들도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그리스도의 귀한 일꾼으로서 사역 감당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귀한 일꾼으로서 사역 감당해야 합니다. 더 멀리는 세계에 나가서 복음의 귀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안디옥교회처럼 다양한 평신도 일꾼을 훈련하고 세우는 교회로 다함께 세워져가기를 바랍니다.
2. 안디옥 교회는 예배의 본이 있었습니다.
2절 주를 섬겨 금식할때에
여기 “주를 섬긴다”는 말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새번역 성경에서는 “주를 예배하며 금식하고 잇을때에”라고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금식”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금식의 효과가 무엇입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금식을 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가 금식하면서 집중하여 예배드릴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합니다.즉 하나님의 꿈 선교를 위하여 일군들을 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마다 복음에 목숨을 걸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게 됩니다.예배가 죽을 때 믿음이 죽습니다. 예배가 죽을 때 교회가 죽고 선교도 죽습니다. 예배가 죽으면 교회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예배가 있고,예배에 감격있는 교회,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는 복음에 대한 열망이 살아나고 기도의 불이 타오르고 선교를 위하는 열망이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왜 안디옥교회가 이렇게 금식하면서 예배에 집중하였을까요? 어디에서 이런 도전과 본을 배웠을까요? 안디옥교회를 개척한 사람들은 바로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예배를 감격스럽게 잘 드리고 예배에 성공한 교회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초대예루살렘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예배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최선을 다했습니다.성전에서 보여 예배드렸습니다.가정에서 모여 예배드렸습니다. 행2장46절-47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라고 합니다. 어쩌면 안디옥교회 개척성도들 중에는 이때의 그 예배의 감격 그 기쁨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핍박으로 모든 성도들이 서로 흩어지게 되면서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안디옥교회를 개척하였을때에 어쩌면 이들은 가장 찾고 회복하기를 원하고 싶은 것이 감동의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무엇보다도 관심을 갖고 함께 노력해야 할 부분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 교회의 영성,비젼은 예배드리는 모습 속에서 드러납니다.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 예배 시간에는 우리의 마음,믿음의 모습이 모두 드러나는 것입니다.그래서 어떤 이는 “예배는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요4:23“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먼저 내가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회 속에서 직분자들은 예배에 대한 거룩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목사로 장로님으로 안수집사님으로 권사님으로 부름을 받은 직분자들은 먼저 온전한 예배에 대한 결단을 드려야 합니다.
구약사무엘서에 보면 사무엘과 엘리제사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가문이었던 엘리가정이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맙니다. 두아들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고 아버지 엘리도 결국은 그 소식을 듣고 죽고 맙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무엘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복된 삶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엘리가문이 망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고 합니다. 엘리 가문이 실패한 것이 바로 예배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면서 두려움이 없었고 반복적인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무엘은 믿음으로 여호와를 섬기면서 영광을 돌렸습니다. 엘리가정이 점점 지는해가 되었다면 사무엘은 점점 뜨는 해가 되어 복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현대판 엘리가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그 엘리의 자녀들이 제사를 드리는데 실패햇을까요? 저는 그 아비의 책임도 크다라고 봅니다. 반복적이 형식적인 제사의 집례와 예배를 바르게 감독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봅니다. 많은 경우에 얼마나 우리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준비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선 마음의 간절함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더럽고 추하고 죄된 마음으로는 나아올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철저하게 십자가에 의지하여 회개하면서 가장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 때를 따라 나아오시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배에 집중하십시오. 죽은 예배가 아닌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지금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배를 위해서 정성을 투자하십시오.한번의 예배를 드리더라도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집중하여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드리다가 결단하며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3. 안디옥 교회는 선교의 본을 보였습니다.
3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주를 예배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따로 두 사람들을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일할만한 일꾼들을 선교사로 내어보내는 일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도 안디옥교회는 2명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여기 이방인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교회가 금식하고 기도하고 난 뒤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순종하였습니다. 어쩌면 안디옥교회 입장에서는 이 두 사람이 교회에 남아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더 드릴 수 있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개교회의 성장과 개교회의 욕심을 갖고 있는 안목과 신앙이었다면 이들은 이 두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안디옥교회처럼 이렇게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할수 있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안목이 우리 교회 안만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는 좋은 평신도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교의 꿈을 자꾸 꾸어야 합니다. 자꾸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 각국에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동남아 국가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 부름을 우리가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교하자고 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 선교를 해서우리 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다는 말입니까? 또 나자신에게는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익이나 축복을 위해서 선교하는 것은 아닙니다.선교 그 자체는 희생입니다. 물질도 시간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희생하고 교회가 희생하여서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면 우리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그런데 가장 크게 감수해야할 희생이 무엇입니까? 선교를 위해서 좋은 일꾼들을 파송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언젠가 기독교 잡지에 실린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목사다운 목사가 없다 누구의 책임인가 교인의 책임이다”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한국교회 성도들이 자기 자녀들중에서 아주 공부도 잘하고 믿음이 좋은 자녀들이 어느날 신학교가서 목사되고 선교사가 되겟다고 하면 기를 쓰고 말린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공부시켜났더니 겨우 전도사요,겨우 선교사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잘하는 좋은 아들은 선교사나 목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별수없이 대학에 떨어진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들을 위해서 자신의 훌륭한 자식들은 내어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제물을 바칠 때 어떤 제물을 바쳤습니까?
흠과 티가 없는 첫 번째것을 바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물을 바치는 정신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선교사역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드리는 이 희생과 열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게서는 선교사역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희생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땅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선교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교회,선교를 위해서 투자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디옥에서 파송받은 이 두 사람의 선교사로 인해서 신약 성경에 소개되는 에베소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교회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등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복음이 흥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아프리카선교사의 삶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부부 선교사의 그 희생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무지하고 가난한 아프리카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같은 복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버려진 땅들이 선교사들의 손을 거치면서 옥토가 되고 버려진 건물들이 학교가 되고 희망이 없이 죽어가는 마을에 기쁨으로 찬양하는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이 지나가는 자리 선교가 일어나는 곳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곳에는 지금도 기적과 능력의 역사들이 일어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협력선교를 하고 있습니다.사실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그분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으로 협력을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 교회도 자체적으로 선교사까지 보낼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힘과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지금 제가 기도하는 것은 올해 안에 뉴욕 안에 선교센터를 세우는 것입니다.
센터를 중심으로 예배와 제자훈련 공동체훈연 언어훈련들을 통해 민족을 넘어서 세계에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귀한 일꾼들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 2세대들 청년들을 위해 우리가 선교의 비젼을 갖고 그들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세워지는 우리의 청년들 그리고 선교를 할 수 있는 언어의 훈련들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귀하게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세계를 향해서 선교하는 일꾼들을 보내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 수님 여기 있습니다. ‘라고 드릴 수있는 순종의 결단의 삶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이제 오늘 우리가 교회 일꾼을 세움으로 인해서 이런 안디옥교회의 본이 우리의 교회도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다양한 일꾼들이 풍성하게 세워지는 교회 살아있는 감동의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 훈련된 평신도 선교사를 보내어 복음을 수출하는 교회로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춘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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