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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본심 (마가복음 6:14-29)
저는 어려서 중학교에 다닐 때 부흥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고 ‘나는 꼭 주님을 위해서 죽는 순교자가 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뒤 저는 기도할 때마다 사도들처럼 순교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기도를 매일 하다가 어느 날 마귀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저의 형과 저, 그리고 동생, 이렇게 셋이 있었는데 마귀들이 창과 칼을 가지고 와서 먼저 제 형에게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하니까 형이 “아니다. 나는 죽어도 예수를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마귀들이 제 형을 한 쪽을 밀쳐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 아우에게도 예수를 믿지 말라고 위협을 했는데, 동생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믿겠다고.”고 했습니다. 역시 동생도 한쪽으로 밀쳐졌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저는 “나도 형과 동생처럼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이윽고 마귀가 저에게 다가오더니 “너도 예수를 믿을 테냐? 그러면 너도 저쪽으로 보내 모두 죽이겠다.”고 하면서 창으로 제 심장을 겨누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때 담대하게 “예수를 믿겠다.” … 고 했어야 했는데 그만 “예, 안 믿을께요.”라고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징그럽게 웃으면서 저에게 “참 잘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웃음은 저를 멸시하는 웃음이었습니다.
이건 제가 중학교 때 꾸었던 꿈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하나님께 그 꿈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어차피 꿈이었으면 그냥 끝까지 안믿겠다고 해서 잠에서 깨면 될 것을, 마귀의 위협이 두려워 예수님을 안 믿겠다고 대답한 것이 지금도 생각하면 죄송스럽고 한스러울 정도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내 신앙이 그 정도 밖에는 안되는 것 같아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지구상에 많은 사람들이 주를 위해 실제로 순교를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실제로 순교를 당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귀가 나타나 심장에 창을 겨누지 않는다하더라도 매일 매일 시험과 유혹 속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키지 않으면 금방 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다가 순교를 당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순교자적인 삶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순교는 최고의 신앙 표현입니다.
신구약 중간시대를 300년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활동이 중단된 채 죄악으로 점철된 시대였기에 ‘침묵의 시대’ 혹은 ‘암흑의 시대’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푸는 예언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이면서도 제사장직에는 관심이 없고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백성들은 애타게 기다리던 예언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구름떼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4-5)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단강에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고는 얼마있지 않아 헤롯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체포된 이유는 헤롯 안티파스 왕을 책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헤롯 안티파스 왕이 자기는 본처와 이혼을 하고, 자기의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뺏어 결혼한 일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레위기 18:16, 20, 21)을 어긴 것이라고 지탄하였습니다. 이 일로 세례 요한은 왕과 왕후의 원한을 사게 되어 체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세례 요한은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영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헤롯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헤롯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놓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헤롯의 생일 잔치 자리에서 세례 요한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헤롯의 새 부인인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여흥을 돋구기 위해 춤을 추고 나자 이를 즐거워하던 헤롯은 살로메에게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헤로디아가 사주하는 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순간 헤롯 안티파스 왕은 당황했으나 초대 손님들 앞에서 공언한 약속을 어길 수 없는 처지여서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사명을 완수한 세례 요한은 짧은 생을 마감하고 순교의 이슬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헤롯 부부처럼 천한 것들에게 어찌하여 의인인 세례 요한이 죽어야 하는지 정말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세례 요한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거룩한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신약시대의 순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실 때,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두 아들에 대해서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지라. 나의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33)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잔은 ‘순교의 잔’입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제자들 중 누구도 그 의미를 알지는 못했지만 결국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신 그 잔을 마시고, 순교의 길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교외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주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의 길바닥에서 끌려다니다가 죽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에서 올리브 나무에 매달려 죽었스비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져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는데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설교하다가 죽었습니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모두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네로 황제에 의해서 교수대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들은 왜 피할 수도 있었던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까?
신앙인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순교자의 길을 걷는 것은 애통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숭고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명을 다하고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길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평안한 죽음은 침대 위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살다가 주를 위해 죽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사도들이 ‘고통스러운’ 순교를 당했지만, 그것을 ‘비참한 죽음’이라 하지 않고, ‘고귀한 순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을 위한 고난은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이끌어 오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순교자들에게 하늘에서 가장 큰 상급이 주어진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나오는데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아더라”(계 4:4)고 했습니다. 이 ‘이십사 장로’들은 신구약 시대에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로써 이 세상에서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순교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큰 자는 총회장이나 교황이나 추기경이 아니라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고난과 순교를 당한 이 ‘이십사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천국에서 흰옷을 입고 승리와 영광의 금면류관을 쓰고 하나님 둘레에 앉게 될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강남교회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서 이십사 장로의 반열에 모두 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순교를 당한 다음에 예수의 이름이 유대인들 사이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을 죽이고 더 이상 자신을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헤롯 왕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헤롯 왕은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막 6:14) 라고 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왕은 의인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다가 많은 기적을 베푼다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분명히 다시 살아났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도 역시 의인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작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등장이 세례 요한의 부활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세례 요한의 순교를 통해 비로소 예수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평소에도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하면서 자신은 낮아지고 오직 주님만 높아지기를 소원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은 오직 예수만 위해서 살다가 간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과 교회보다는 내 가족, 내 사업, 내 성공, 내 출세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과 교회만 위해서 살다가 갈 수는 없을까요? 이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평생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아무런 고난도 당하지 않는 그런 삶은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인생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과 동행하며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 간 우리의 인생 뒤에 예수의 이름만 드러냐야 할 것입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1885년 4월 5일에 인천항으로 들어와 어두운 이 땅에 복음을 심어 이 나라가 광명의 세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안일을 구하지 않고 머나먼 이국에 복음의 씨앗을 심기 위해, 순교자적인 삶을 실천한 그들의 헌신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면 우리 뒤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3. 순교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습니다.
순교(殉敎), 사전적 의미로는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순교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르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33에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고생하고, 병들게 하고, 실패하게 하는 것이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위해 죽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는 게 너무 고생되니까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비참하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복음을 전하며 헤롯의 죄를 꾸짖다가 잔칫상에서 쟁판에 목이 드려진 것으로 그의 생명이 끝난다고 하면 요한의 죽음은 개죽음이 된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평양감옥에서 많은 고문을 당하다가 순교했는데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 죽음은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아벨이 참된 제사를 드린 것 때문에 형이 쳐 죽인 것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한 것이 그것으로 끝나버린다고 하면 그처럼 비참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었으나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과 교회를 위한 고난과 순교는 영광의 부활을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합니다. 그 모든 고난과 순교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곁 24장로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는 말씀은 고난과 순교의 잔을 마시는 이에게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예비되어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자 미국의 좋은 관리의 자리를 제공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사양하고 목사의 길을 택하여 갔습니다. 루이스 감독이 그에게 묻기를, “어떻게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는가?”고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있었을 때에 중국의 내륙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는 우상을 섬기는 절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적 떼 같은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절간으로 왔습니다. 위협하는 군인들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신앙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우상 앞을 지나갈 때에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끌려 온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절을 하기는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고 그 우상의 앞을 걸어 지나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군인의 앞에서 목이 땅에 떨어져 구르며 순교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절만 한번 하면 사는데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며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163명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어렸을 때였지만, 그 사건은 나의 일생을 새롭게 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똑바로 가르쳐준 것이었습니다.”
163명의 순교자들은 모두 장차 다가올 영광을 보았던 것이며, 이제 그 신앙을 한 청년이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귀한 신앙이 여러분과 자녀들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의 고난과 고통과 눈물과 한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중에 거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광은 ‘현재의 고난’ 없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부터 주를 위한 헌신에 참여하는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순교자들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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